![]() 카키색은 암울한 느낌이지만 그 톤에 따라서 다르다. 문양이 검정색에다 촛불을 연상시키는 느낌도 그렇고 왼편에 나뭇가지도 앙상하면서 밤의 유혹이나 괴기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전체적인 문양을 보면 침대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표지가 주는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내용이다. <이책은> 리뷰어클럽 당첨 도서다. <저자는>
굳이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긴건 "'침대'만큼 좋은 소재가 또 있을까?" 라고 말한 저 대목을 인용하고 싶어서다. 수없이 많은 일화들이...행복에 겨운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다 가 고스란히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라는 침대가 독자들에게 깊고 평안한 잠과 아름답고 경이로운 꿈을 선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는 너무나 꿈에 부푸신 기대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서 이런 소망을 갖기를 바란다는건 무척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침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개가 비슷할 것이다. 단순히 잠을 자는 장소이자 도구라는 생각만 한다면 그건 좀 고상한 척 하는게 아닐까. 침대에선 많은 일들이 이루어진다. 그건 잠자러 누워서 잠들기까지의 사색의 공간이기도 하고 명상의 시간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다. 집밖에서의 열린공간으로는 병원의 침대가 있겠고 호텔이나 모텔 등 숙박업소와 유흥업소의 침대가 있겠다. 잠들어서 꿈을 꾸는 장소이자 공간도 침대다. 살아서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다가 죽는 곳도 침대다. 우리의 인생에서 침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 그 침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애초 나(침대)는 시베리아의 자작나무로 칼리우와 미누, 우그리아, 세 영혼을 품은 관이 되었다. 그 후 벌목꾼의 눈에 띄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리에파야 항구에 도착한다. 즉, 시베리아-리에파야 항구-발틱-희망봉-싱가포르-대한해협에 이르는 백여 년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침대의 탄생부터 시작된 첫장은 매우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시베리아의 자작나무라. 얼마나 멋지고 우아한 느낌이 들던지. 그렇게 시작된 침대의 결코 원하지 않았던 여행은 시작되는데...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침대에 관한 어릴적부터의 트라우마가 소개되고, 끝내 더욱 발전하여 늘 기괴하거나 침대를 두려워하는 경지가 되기도 하고...그러다 그 침대는 또 다른곳으로 이동하게 되고...별의별 사람과 만나게 되고 별의별 사건과 별의별 상황을 다 겪는다. 나는 관에서 병원선의 침대로 변모하여 전쟁의 참상을 환자들을 통해 알게 되고, 그 병원선이 일본에 나포되어 일본 게이샤의 눈길에 사로잡힌다. 한낱 풍류객인 조선 남자 장선우와의 사이에 내 위에서 핏덩이(아들)를 분만하고는 안아보지도 못한채 죽게 되지만 그 침대는 게이샤의 죽기전 미리 작성된 유언장에 의해 조선으로 보내진다. 멀어진 장선우와의 사랑을 그렇게라도 이루고펐던 게이샤의 눈물겨움이자 장선우에 대한 증표다. 조선에서의 물욕에 어둔 송병수, 유적, 송선이와의 인연을 만들지만 역시 또 떠돌게 된다. 서커스단에 등장한 침대는 사람들에게 잠시지만 기쁨과 희망을 주지만 역시 또 운명은 어쩌지 못한다. 침대 자신이 떠나길 바라는게 아닌 온갖 욕망들이 빚어낸 사건들로 늘 침대는 희생냥이 되기도, 버려지기도, 누군가의 시선을 받고는 또 사용되기에 이른다. 침대를 숭배하는 남자, 침대를 역겨워하지만 물리치지 못하는 남자, 침대를 연인처럼 사랑하는 남자 등등 인간 세상 온갖 곳을 전전하면서 가장 누추한 곳에서부터 가장 기이한 곳, 가장 무료한 곳에서부터 가장 변태적인 곳까지 거쳐가면서 진기한 경험을 두루두루 한다. 도박사의 침대였다가외과 의사의 수술 침대가 되고, 최면술사의 침대도 되고, 무협 영화에 출연도 하고, 포르노 영화 촬영도 하며, 사기꾼의 침대가 되기도 한다. 식물인간의 침대이기도 했으며 스트립 댄서의 침대였고, 유곽과 여관에도 있었다. 그렇게 거치는 동안 나는 지쳤으며 영혼은 황폐화되었고 물론 때론 나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과의 교감도 있었다. 상대의 심정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해하여 위안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끝까지 물욕이나 욕망의 덫에서 자유롭지를 못하다. 한 소설가가 늘 뒤숭숭한 꿈으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데 전광석화처럼 떠오른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다. 그러곤 모처럼 단잠에 빠졌다 깨보니 수십 개의 댓글에 어리둥절한다. 댓글들은 자신만 그런줄 알았는데 그 글에 매우 공감했다며 오히려 고마움을 표하는거다. 기대하며 올린 글이 아니고 그저 꿈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글이므로 놀라운 반향앞에서 소설가는 힘을 얻는다. 그가 내보내는 글들은 독특한 한 편의 글이고 한 개의 침대였던 것임을 알고 소설가는 더욱 박차를 가하고 정진한다. 침대에 관한 일화를 모으다보니 무궁무진한 자료가 되고...그가 만들어낸 침대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백 년을 산 침대, 침대를 도둑질하는 남자, 도가니 침대, 홍수에 떠내려가는 침대, 과묵한 침대, 침 흘리는 침대, 로데오 침대, 평생 침대 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침대들의 공동묘지, 침대들의 반란, 등등 별의별 제목으로 침대가 만들어져 사람들속으로 들어갔다. 결국은 소설가의 침대가 만들어낸 글들임이 뒷부분에 나올때 조금은 허탈하다. 수많은 글들이 수많은 침대를 탄생시킨것인데 그 침대를 둘러싼 인물들이 나오고 그 인물들과 얽힌 관계와 여전히 진행중인 트라우마가 나오는 전개 방식이 앞에서부터 자리한다. 그 인물들이 계속 이어지는 관계다. 게이샤의 핏덩이 아들이 자라서 나오고 ...그러자니 나(침대)는 생명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되다가 침대일뿐이지 싶다가, 침대가 '나'가 되어 계속 말을 듣다보면 또다시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나중에 작가가 만들어낸 시나리오임이 밝혀졌을때 얼마나 김빠졌던지...약간은 그와 유사한 경험이다. 그럼에도 몰입을 하지 않으면 침대 얘기인지 다른 인물들 얘기인지도 헷갈리고 내용이 가볍지 않아 심기언짢음도 상당부분 자리한다. 천상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몇몇 작가들을 떠올린다. 비교적 유치하다해도 밝고 유쾌하게 피력하는 스타일도 있고, 바보스럽고 능청맞게 글을 이어가 박장대소를 이끄는 이도 있다. 최수철 작가는 처음 만남인데 참으로 능숙능란하다고 해야나, 유들유들하다고 할까. 오래전 마광수 교수의 칼럼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나 풍기는 뉘앙스가 참으로 심기불편했다는 것. 인신모독할 마음은 아니나 생김새도 독특하셔서 그런 글을 쓰실까 싶었다. 이 침대를 읽으며 그러한 느낌이 상당부분 일치했다는...오히려 점잖아뵈는 저 모습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잘도 끌어냈구나 싶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침대를 둘러싼 다정다감하고 밝고 즐거운 추억이나 일화도 많을진대 이 곳에선 참으로 해괴하고 기이하고 입에 올리기도 뭣한 일색이다. 하물며 일개 사물인 침대에게 생명과 감정을 부여해 침대가 오로지 기술하는 이야기니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고...왜그리 침대에서의 어둔 부분이 부각되는지...침대에서의 음험함이나 역겨움들이 많이 자리하다보니 소름이 끼치고 구토가 치밀어 오름도 많았다. 침대를 둘러싸고 생길 수 있는 가지가지 일화는 다 나온다. 총집결한 일화들은 음성적이고 위험하고 도를 빗나간 것 투성이다. 어릴적 트라우마들이 더 나쁜 일상으로 나쁘게 도출됨이 가히 염려스럽다. 어찌그리 풍부한 상상력은 도를 넘는지...모방범죄 야기를 하지 않을까 염려되는 마음도 있었다. 나(침대)는 청산유수로 잘도 지껄여댄다. 어쩜 그리도 구구절절 사연도 많고 부적격자인 인간들과도 그리 꼬이는지. 가지가지 사연들은 보도듣도 못한 해괴망측한 사건들을 야기시키고, 잠못들어하는 인간들 내면은 대개가 욕망으로 가득하여 꿈속의 악마라 불리는 몽마들에게 시달림을 당하고...욕망이 빚어내는 산물은 대개가 역겨움이다. 인간쓰레기다. 인간의 내면에 잔혹성이나 악마의 본성이 있다지만 대개는 감추거나 누르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이 책에선 마치 참지 말라 말하는 듯도 하다. 온갖 성기는 다 등장하며 그 성기들이 침대에서...다 알고 있다는 식의 나(침대)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쾌하지 않다. 하나같이 제대로 된 인간들이 등장하지 않다 보니 그 말로들도 다 나쁘다. 다만 한 커플의 해피엔딩이라서 그나마 참 다행이었다. 결격사유 많은 인간들이다 보니 제대로 된 잠을 잘 자지 못한다. 그게 어릴적부터의 대개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의 시작임을 보면 유년시절의 풍요로운 정서가 얼마나 큰 비중인지...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유년시절의 정서의 습관화 내지는 무의식의 각인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좋은 심성을 타고 나기도 하지만 환경의 지배를 받는 인간인지라 살아가는동안 두고두고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든 습관이라면 개선의 여지가 있어야는데, 그 습관대로 진로도 발전하다보니 더욱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간들로 채워진건 아닌지, 갖가지 침대의 사연을 들으며 거기에 연관된 인간들의 사연을 읽으며 많이도 머물러졌다. 잠자리를 위한 편리한 도구이자 장소인 침대. 그 침대가 모든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머물게 된다면 얼마나 숨이 막힐까. 소름끼친다. 그건 자신의 손때가 묻은 정겨운 살림중 비중이 큰 물건일 뿐이다. |
|
큰 아이, 작은 아이 모두 침대에서만 생활해선지 바닥에서 자면 온몸이 아프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침대는 아이들의 할머니께서 특별히 신경 써주신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 좋은 것인데 가끔 아이들 침대에 누워보면 느낌이 살짝 다르다. 단단하면서 고정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이들 침대가 좋아서 우리 부부가 사용하는 침대를 바꿔볼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집이 오래되고, 층고가 낮고, 문이 좁아 새 침대로 바꿀 경우 이사하는 것처럼 가구의 대 이동이 필요함을 안 순간 포기하고 말았다. 나중에 우리 집 전면 대공사가 시작된다면 그때 좋은 걸로 바꾸는 걸로. ^^ 예전엔 몰랐다. 침대가 가진 단단하고 안락한 느낌을. 나는 예민하고 날카로워서 유독 잠자리를 밝히는 편이다. 쉬 잠들지 못하고, 잠들고 나서도 옆에서 부스럭거리면 잘 깨는 편이다. 결혼 전에는 바닥에 요를 깔고 잤기에 침대의 중요성을 몰랐다. 그걸 알았다면 다른 건 몰라도 침대만큼은 좋은 걸로 구입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침대회사에서 이런 광고를 만든 모양이다. ‘침대는 과학이라고.’
누군가에게는 하루 8 시간도 눕지 않는 곳이지만 누군가는 생활이 될 수 있는 것. 바로 침대. 이 침대가 무슨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의아했었는데... 침대라는 소재 하나로 5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음에 감탄하게 된다. 한 그루의 자작나무가 침대로 탄생한다. 침대는 시베리아, 라에파야, 발틱, 희망봉, 싱가포르, 대한해협을 거쳐 한국에 오게 된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이후 독재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침대가 겪기엔 너무나 파란 만장한 이야기를 담았다.
침대로 태어나 5년 이상을 살기도(?) 버거울 텐데 어떻게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침대 위에서 사람들은 베개머리 송사를 하고,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에 배신을 당하고 정치적 혹은 사회적으로 버림받거나, 사회의 기득권자가 된다. 교묘한 처세술로 일제 강점기를 거쳐 60년대 이 사회의 중요 인물이 되기도 한다. 내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기에 조금은 난해한 부분도 많지만 책을 읽으며 우리네 삶을 생각하게 된다. 같은 침대를 쓴다는 건 누구보다 가깝다는 것이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같은 침대를 쓰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꿈을 꾼다. 어쩌면 다른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축복은 아닐까? 만약 같은 꿈을 꾼다면... 서로를 오해할 수도 있을 테니까. ‘어쩌면 같은 침대 위에서 다른 꿈을 꿀 때 비로소 공존하고 화합할 수 있는 게 인간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270) 침대라는 공간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그나마 다행인 인생은 아닐까? 침대에 눕지만 눕는 것도 쉬는 것도 편안하지 못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눈을 감지만 잠을 이룰 수 없고, 잠을 잤지만 잠을 잔 것 같지 않은 불안함. 잠자리가 뒤숭숭하다는 것. 그건 심리적인 것인지 아님 예지 인지..
이 책의 인물들을 보면 군부 시절의 그 사람과 머리카락이 없는 전직 대통령을 연상하게 한다. 침대는 단지 잠을 자는 곳인지, 우리 삶의 또 다른 이름인지.. 생각하게 된다. 꽤 두꺼운 책이고 어렵고 난해한 책이란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도 이걸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했다. 그럼에도 읽고 나니 뿌듯하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뿌리는 어디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
|
최수철교수님의 장편소설 <침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침대다. 아니, 나는 침대가 아니다. 내가 처음부터 인간들을 위한 침대였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그루 나무였다. 하얀 나무줄기와 곧은 자태로, 숲의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작나무였다.(9쪽)” 침대를 잠자리로 삼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생활을 떠돌던 1년간 그리고 미국에서 연수를 하던 2년여가 전부였기 때문에 침대가 주는 깊은 맛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만, 침대를 둘러싸고 다양한 군상들이 벌이는 삶을 침대가 화자가 되어 독자들에게 전하는 소설은 참으로 독특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가 “처음 침대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을 정한 후로, 내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일화들이 쉬지 않고 만들어졌다. 게다가 그 일화들이 서로 엮이면서 어찌나 다양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오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한자리에 쓸어 담아야 할지 몰라 행복에 겨운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58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에는 신화로부터 설화, 고대역사로부터 근현대역사는 물론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서 이야기 거리를 끌어다 상황을 엮어내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언젠가 읽거나 보았다는 기시감이 드는 것은 상황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거리를 짧게 요약하여 버무려내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이야기의 진행을 잠시 떠나 유영하던 정신은 곧바로 이야기의 흐름에 복귀하게 됩니다. 가끔은 침대를 쟁취하기 위하여 신이 인간들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장면처럼 오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침대를 사이에 둔 남녀들의 삼각관계는 영화 <은행나무침대>를 연상케 합니다만, 스토리의 앞과 뒤에서 잠깐 언급되는 정도이기 때문에 잠깐 스쳐지나가는 느낌일 따름입니다.
작가는 “사람이 침대 위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기도 하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는 까닭은, 침대라는 것이 애초에 천사와 악마, 구름과 진흙의 성질이 합쳐진 때문이며, 인간이 침대에서 태어나고 침대 위에서 죽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보면 침대란 인간에게 인큐베이터인 동시에 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38쪽)”고 정의하고 있는 것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스토리를 무리없이 진행하려는 장치라 싶습니다. 워낙이 방대한 분량을 담은 소설로서 화자인 침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세세한 부분보다는 화자인 침대 혹은 침대와 함께하는 등장인물의 심리상태의 흐름을 면밀하게 따라가는 점도 관심을 둘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
|
이 책 참 재밌다. 지인들에게 추천해 주고픈 책이다. |
|
"죽음은 삶을 위한 침대이고, 삶은 죽음을 위한 침대이다. 천하만물, 우주만상은 각기 서로에게 침대다. 만인은 각자 서로에게 침대다."
|
|
침대는 우리 인간들이 잠을 잘 때 애용하는 도구입니다. |
|
침대 (최수철, 문학과지성사, 2011) 1. 침대의 역사 한국인 40세의 여성과 36세의 치과의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결혼하게 된다. 여성은 몇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최근 의료봉사를 온 남성과 사귀게 되고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다. 남자는 국내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도피한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김치찌개로 아침 식사를 한다. 며칠 전 꾼 꿈이다. 전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꿈에 등장했다. 나의 염원이라거나 도피의사와 전혀 관계없다. 내가 최근에 본 기사나 드라마와도 관계없다. 나의 억압적 요소와 도 무관하다. 잠재의식 속에서 무슨 연동작용이 일어났던 것인가. 꿈은 이렇게 무의미한 구석이 있다. 꿈과 현실을 연관시킬 필요도 없는데 우리는 꿈을 현실의 연장선상에 놓고 해석하거나 읽어내려고 한다. 어리석은 일이다. 작가가 말했듯이 인간의 보편적 꿈은 “자연스레 잠자는 법과 꿈꾸는 법을 배워” 사는 것이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기본에 충실한 것이 인간의 꿈이다. 얼마나 쉽고, 또 얼마나 어려운가. 잠자리에 들자마자 잠이 들고 잠을 깨지 않고 잘 자고 상쾌하게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매일매일의 인생살이처럼 뒤죽박죽이다. 잠을 청하는 것에서부터 잠을 깨는 일까지 고통의 연속이다. 그 사이에 끼어드는 꿈은 또 어떤가. 최수철의 <침대>는 바로 우리들의 잠과 꿈에 대한 보고서다. 태고 적부터 인간이 살던 궤적을 그려내고 있지만 중심은 근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현실과 꿈이다. 현실이 꿈에서 연유하고 하루의 일과가 잠에서 연유한다고 여기며 ‘잠과 꿈’에 대한 해부를 했는데, 분석적이거나 몽상적이지 않게 ‘침대’를 매개로 설정했다. 시베리아 샤먼의 침대에 깃든 신화적인 시간은 중세 왕정의 시간을 건너뛰고 근대 제국주의 각축의 시간과 연결된다. 그리고 러일전쟁과 일제 침탈, 그리고 한국전쟁과 근대화 과정이 세밀하게 펼쳐진다. 그러니 침대가 지내온 긴 시간의 중간부분은 에피소드와 삽화로 녹여 인간의 보편적 삶을 보충하는 서술태도를 취하고 있다. 태고 적 신비감은 근현대를 이어오면서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침대에 깃든 죽은 자의 원혼이 또 다른 죽음을 부르면서 침대의 마력이 작동한다. 침대는 죽음의 장소다. 침대에서 태어나 침대에서 죽는 인생의 전반이 죽음으로 강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바탕이 깔려 있던가. 특히 근현대 우리 인생이 겪은 참담함을 이 침대를 통해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베리아 샤먼 미누에서부터 그의 영혼이 깃들어 있던 나무를 베어 침대를 만든 목수, 러시아 지휘관과 군의관, 일본의 후쿠스케와 조선의 유적, 외국병사와 3공화국 주역에 이르는 끝없는 죽음이 저주처럼 한 침대에서 연속된다. 괴기스럽다. 그러나 그런 죽음은 바로 우리 역사의 단면인 셈이다. 침대는 “악마성의 근원이자 모든 희망과 가능성이 공존하는 신비한 장소”(11쪽)라고 한 것을 보면 침대를 ‘역사’ 그 자체로 환원시키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에게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 그리고 욕구의 표현’이라 규정한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작가는 포스트모던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있는데 시간적 단절을 극복하는 진지성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근현대의 일제침탈기와 민족 분단, 그리고 근대화 독재시기에 인간이 지닌 보편적 꿈과 시대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작가의 전작들과 다른 면모가 드러나고 있으니, 인간존재의 현실적 모순이라는 모더니즘적 특성을 구체적 역사성에 대입하여 리얼리즘적 반전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일제침탈과 해방, 전쟁과 독재는 역사의 구체성이지만, 한편 인간의 존재의식을 다른 각도에서 상처내고 억압한 보편적 비극이기도 하다. 다음은 그 구체적 역사에 녹아 있는 인간의 군상이다. 2. 전쟁과 독재 민족 분단과 민족 전쟁의 참혹함을 매우 다른 각도에서 포착하고 있다. 역시 침대를 매개로 하기 때문이지만 침대의 외연과 상징을 한껏 확대하여 인간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간파하되 그것을 아귀들의 각축이라고 하면서, 입은 작지만 거대한 위장을 가져 아무리 먹어도(죽이고 파괴하여도)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가진 아귀를 등장시켜 삽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근대 민족주의국가 시대는 아귀의 식욕만큼의 대량학살이 자행되는데도 자각증세가 전혀 없다. 전쟁은 전쟁을 낳고 있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깔아뭉개고, 인간이 동물만도 못하다는 경멸을 퍼부으면서 작가는 전쟁을 부정한다. 동물은 먹을 것을 위해 다투지만 동족을 일시에 대량으로 죽게 하지는 않는다. 인간만이 전쟁을 일으켜 동족을 죽음에 빠트린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상황을 요나의 침대라고 하고, 고래뱃속에 비유한다. 작가의 젊은 시절, 그를 위대한 작가로 알린 ‘고래뱃속’이란 소설에서도 우리 현실의 참담함을 고래뱃속에 비유한 바 있는데, 그곳은 “지옥·죽음보다도 더 나쁜 곳”(88쪽)이다. 전쟁, 군함 발진, 전투를 앞둔 인간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 ‘전쟁에 대한 환멸’을 일으키는 등장인물을 통해 작가도 전율하고 있다. 요나는 하느님의 계시를 무시하고 도망치다가 고래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듯이, 현대 인간들에게도 하늘이 없다. 하늘이 심판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전혀 없다. 작가는 작금의 전쟁을 두고 곧 하늘의 징벌이 가까웠음을 예언하고 있다. 오래 전에 인간의 오만함을 하늘이 징벌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멸종시키려 했다는 신화가 있는데, 그것이 인류 멸종의 첫 번째 위기였다면 작금의 전쟁은 인류 멸종의 두 번째 위기일 것이라고 작가는 경고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신들은 인간들이 시끄러워 못살겠다고 하면서 엔릴로 하여금 인간을 멸종시키기로 결의하였는데 엔키가 이 비밀을 지우쑤드라(우드나피시팀)에게 알리고 배를 만들어 온갖 생명의 씨앗과 동물을 싣도록 하여 인류가 위기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작가는 위의 오천 년 전 사건과 달리 이번에는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비관론을 펼친다. 인간의 전쟁이 너무 잔인해졌고 대량학살을 태연히 저지르고도 죄의식이 없는 점, 그리고 다른 나라의 영토를 빼앗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각 개인의 ‘잠자리의 안위’나 가장 기본적인 자유와 행복을 위협하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 이 침대 빼앗기 게임도 인류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미칠 수” 있다고 공언한다. 침대 빼앗기는 ‘침대 파괴’로 이어지고 그것은 인간의 삶과 꿈을 송두리째 파괴하여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박탈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전쟁으로 아직 종말을 맞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지도 모른다는 여운은 이 소설 속에 내장되어 있다. 인간이 피맛을 알고, 종족간의 대결이 계속되고, 대학살을 저지르고, 그것이 문명간의 충돌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핵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그 파멸을 가져오는 셈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북한과 전쟁놀이를 벌이면서 그것이 확대될 위험이나 핵전쟁의 위협을 모른다는 점이 더 큰 두려움이다. 전쟁의 위협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작가는 잠 대신 춤을 제안한다. “꿈은 침대가 낳는 알과도 같은 것인데, 침대가 포탄 소리에 놀라 불임과 불모의 상태로 떨어져 알을 낳지 못하니, 꿈 대신 춤을 추어야지요. 춤으로 꿈을 대신하다 보면 침대도 살아나겠지요. 그럼 우리는 전쟁을 멈출 수 있겠지요” 포로수용소에서 남북이 갈려 서로를 불신하고 죽이게 되자 극도의 불안한 상황에서 장강이 꺼낸 말이다. “잠 대신 춤을” 제안했지만 결국 수용소 내의 음모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장강이 말한 춤은 ‘해원(解寃)의 춤’이 될 수 있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작가는 몇 년 전 <페스트>라는 소설 속에서도 춤을 꺼낸 바 있다. 작품의 무대는 죽음의 병 페스트가 휩쓸고 지나간 직후다. 라인강과 모젤강 연안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한 ‘광란의 춤’은 쾰른에서 프랑스로 이어졌다. 몇몇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고, 춤을 추다 지친 사람들은 탈진해 쓰러졌고 이렇게 모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광란의 춤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춤추는 행렬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전염되었는데, 페스트 후 종말을 예감한 자들의 몸부림이라 해석된다. 이는 당시 <죽음의 춤>이라는 연극으로도 상연되었다고 한다. 해골이 다양한 신분의 사람을 하나씩 불러내어 춤을 추고 무덤으로 끌고 가고, 지옥에서 솟아나는 화염 속에서 광란의 춤을 추다가, 등불을 든 순례자들에 의해 잠시 광란이 멈추는 극이었다고 한다. 물론 대마왕은 잠시 퇴진하지만 빛은 지속되지 않고 빛과 어둠의 끊임없는 투쟁이 계속되는 상황이다. 페스트에 의한 죽음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상황에서 추던 ‘광란의 춤’이 민족 전쟁 속에서도 재연되었다고 보았다. 수용소의 음모세력에 의해 어둠이 승리하고, 해원의 춤이 광란의 춤으로 바뀌어 엄청난 살육이 이어진다. 그래도 작가는 장강이 제안한 ‘해원의 춤’이 휴전선에서 다시 번질 것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알을 잉태하지 못하는 침대가 춤을 통해 서서히 치유되고 꿈을 꿀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과 반목과 의심과 분노 등 악덕이 깃든 나쁜 침대가 전쟁을 잉태하게 되는데, 인간은 “의심과 분노로도 생명의 에너지를 얻게”(74쪽) 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수용소 침대, 야전침대로 쓰이던 것이 민족중흥의 사명에 투철했던 한 독재자를 만나면서 푸른 침대로 자리 잡는다. 푸른 기와의 청와대와 묘한 대응을 이룬다. 그곳의 독재자는 세상의 모든 침대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에 불타고, “이 세상 모든 침대들이 새로운 위기”(399쪽)에 빠진다. 침대는 상상력이 발휘되는 공간이고 그래서 ‘사고와 결의의 탄생 공간’인데, 독재자는 침대를 관리함으로써 사고를 구속하기 시작한다. “침대 위에 누워 나누는 말속에 자신을 음해하려는 음모가 들어 있다고 의심”(406쪽)하면서 베갯머리 송사도 관리한다. 지독한 전제국가의 상황을 적절하게 은유하는 흥미진진한 부분인데, 실제로 중국은 최근 민족분규가 일어나는 신강 위그르 지역에서 전화를 감청하고 인공위성으로 사람들의 대화를 도청하여, 말속에 의심스러운 단어가 잡히면 바로 공안들이 출동하여 인신구속을 한다는 소문이 만연하였다. 이제는 첨단기술로 가능해진 구속력을 인위적인 힘으로 실현시키려 했으니 얼마나 혹독한 ‘사상의 자유’ 구속이 이루어졌는지 가늠케 한다. 권력자의 침대는 청와대를 빠져나와 고문 침대로 전락한다. 사고를 의심하던 단계에서 사상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단계로 상황이 악화되었음을 상징한다. 침대는 사상을 감시하는 밀실에서 이제 “잠을 재우는 것이 아니라 잠을 빼앗기 위한 물건”(417쪽)으로 전락한다. 침대의 타락은 역사의 타락이고 민중의 고난이 극에 달했음을 의미한다. 독재시절에 있었던 등화관제 훈련도 “잠자리의 관리”이고 이는 “내면까지 장악”(424쪽)하려는 음모라고 표현한 점이 70년대 시대상활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밀실의 침대가 등장하는데 그곳은 “처음에는 기억하게, 나중에는 잊게” 만드는 공간이라고 서술되고 있다. 처음에는 사상범을 고문하면서 관련자를 실토하도록 고문하고, 나중에는 밀실의 고문과 악행을 잊도록 조치하는 지독한 상황을 묘사한 바 있다. 70년대에 이어 80년대 밀실과 고문과 사상 검열과 감시로 점철되는 이 구속 공간을 작가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로 단정한다. 침대 위에 눕혀 놓고 그 한정된 길이에서 긴 놈은 자르고 짧은 놈은 늘리는, 그야말로 민중을 엿가락 주무르듯 하던 시절을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비유하면서 ‘검열·교정의 시대’라 명명하였다. 그런 시대는 끝났는가.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는 아직도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침대는 희망과 가능성의 배태되는 곳이지만, 악마성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말을 상기하자. 고문은 침대 위에서 잠이 드는 것이라고 했다. 한 수도승은 고문을 받으며 고통 속에서 궁극의 침대를 꿈꾼다. 그것이 수도승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고 도달할 목표다. “이 세상에는 모두가 평안히 잠들지 못하는 한, 결코 잠들 수 없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422쪽)을 상기시킨다. 유마거사의 재림이고, 작가가 발견한 가능성의 세상이고, 작가가 감당하려는 세상의 표현이다. 유마거사의 깨달음, 거기에 잠과 꿈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3, 꿈꾸기와 꿈 깨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잠자리’가 단순한 장소가 아니며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단순한 시간이 아님을 느꼈다. 여직껏 잠을 잘 자는 편이었는데 이 소설을 읽은 후는 잠을 설치는 시간이 많아졌다. 침대는 아주 복잡한 것이고, 잠자리는 무수한 시간과 공간이 얽혀 상호작용을 하는 곳으로 새삼 인식되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절감”(539쪽)하였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며, 설사 잠을 자더라도 꿈을 꾸지 않으며, 꿈을 꾸더라도 악몽을 꾼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잠을 잘 자고, 꿈꿀 시간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했다. 그래서 “꿈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479쪽)이라고 했다. 작가가 바라보는 뭇 중생의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는 꿈을 깨야 하는데, 사람들은 꿈을 꾸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꿈’은 희망 혹은 미래에 대한 낙관 정도로 해석된다. 그래서 늘 “꿈을 가져라”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길은 꿈을 깨는 데 있다. 샤먼 미누의 현신인 최불은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길 바라면서 다음의 말을 던진다. “깬 상태로 악몽을 꾸면서 그것을 넘어설 용기를 가지는 게 중요한 거야”(550쪽) 바로 고통을 감내하는 수도승의 독백과도 유사하다. 고통 속에서 그 고(苦)와 대면하고 그것을 넘어설 끈질긴 생명력을 바라는 마음이다. 깨어 있으면서 고를 넘어설 용기는 인생을 낙관만 하는 자에게는 불가능하다. 침대에서 꿈을 꾸면서 망각을 통한 즉각적인 갱신능력을 소유한 자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망각과 갱신의 장소’는 다름 아닌 우리의 교회와 사찰이 아니던가. 일주일의 잘못과 죄를 사하여 달라고 빌고 헌금을 하고 돌아와 홀가분한 마음으로 또 죄를 짓고 악을 증식하는 인간들에게 교회와 절은 고통을 환락으로 바꾸는 공간인 셈이다. 현대문명은 대부분 고통을 쾌락으로 환원시키는 작동능력을 최선으로 삼는데, 교회와 사찰은 그 중심에 있다. 무통문명을 이끄는 정신세계의 주모자다. 진통제과 마약도 바로 종교가 관장하고 있다. 고통스럽지 않으려고 고통을 회피하는 공간이 바로 종교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원래 종교의 본래면목은 그렇지 않았으리라. 자아를 찾고 정신세계의 깨달음에 도달하거나 구원을 얻는 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침대에 달렸다는 사실(577쪽)을 말하면서 “잠을 자면서 신비를 경험하는 동안 진정한 자아를 회복한다. 사랑도 그 신비 중의 하나다”라고 했다. 잠을 자면 바로 구원되는 게 아니다. 잠을 자면서 ‘사랑 혹은 평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자아를 찾고 구원에 이른다고 했다. 작가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덕목으로 ‘사랑’을 던져 놓고 있다. 사랑 이외에 말하지 않은 신비는 무엇인가. 비워 두는 것이다. 비워 두기 때문에 평화가 찾아온다. 작가는 그래서 수많은 침대를 나열하고 궁극에 빈 침대를 제공하는 게 아닌가. 현대문명의 들끓는 욕망이 잠재워진 침대. 혼미한 욕망으로부터 깨어 있는 침대. 모든 욕망이 비워진 결핍의 침대. 사랑은 결핍에서 가능하다. 이 소설이 잠을 깨우는 것이 되었고, 꿈을 꾸는 것보다 꿈을 깨는 것, 꿈에서 깨어나 자아를 깨닫는 것을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내가 혼미한 잠 속에서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더구나 작가와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는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
|
이 책은 침대의 이야기다. |
|
"나는 침대다. 당신은 나의 침대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을 위한 침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