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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와 제목에서부터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들어 강렬하게 나를 끌어당겼던 책이다. 손이 말굽으로 변한다니..대체 어떤 이야기일런지 궁금증이 치밀어 꽤 두꺼운 책인데도 이틀만에 다 읽어 버렸다. 식용 개를 키워 특수부대 병사와 장교들에게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주인공, 그는 자기 집 밑에 자리한 은행나무 집에 사는 여린이라는 소녀와 어릴때부터 친하게 지낸다. 그러나 맹인인 여린의 아버지는 개백정의 자식인 그를 싫어하고 무허가 건물인 그의 집을 철거하라며 구청과 높은 분들을 찾아 다니면서 매일같이 민원을 넣는다. 어느 날 소녀의 집에서 불이 나고 소녀를 구출하다 그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 설상가상 소녀의 집에 불을 지른 혐의로 감옥에서 형까지 살고 나온다. 자살한 아버지를 끝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그는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며 거렁뱅이 생활을 하다 어느 날, 자신의 손에 말굽이 생겨난 것을 느끼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신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와 그녀의 집이 있었던 곳엔 5층짜리 원룸텔이 들어서 있었고 얼떨결에 그 집의 주인인 이사장과 맞부닥친 그는 건물의 관리인으로 눌러 살게 된다. 건물 주인인 이사장은 근처의 종교단체인 명안진교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를 잘 본 탓인지 건물의 관리인뿐만 아니라 명안진교의 경비 일까지 맡기게 된다. 이사장 곁에 머물면서 그는 맹인이 된 여린과 다시 마주치게 되고 이사장 근처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세계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을 쓰며 수십명의 사람을 죽인(물론 작품에서..) 작가는 어느 날 자신의 손에서 딱딱하게 굳은 살을 발견했다 한다. 주인공에게 말굽이 생겼듯이 자신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처음 조그맣게 생겨난 말굽이 점점 커지고 팔의 대부분을 잠식하게 되면서 말굽이 가지는 폭력성을 주인공도 그대로 가지게 된다. 말굽이 곧 그이고 그가 말굽인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잔인한 장면도 많이 나오고 말굽이 자라나는 과정이 끔찍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불우하게 태어나 얼굴에 화상을 입고 손에는 말굽이 자라나는 주인공도 그렇고, 맹인이 된 여린, 아기 보살, 이사장과 그들의 수하인 백주사, 김실장, 노과장, 미소보살, 아기 보살의 아버지 등등.. 박범신님의 전작인 <은교>와는 배경도 등장하는 인물들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읽으면서 자꾸 <은교>가 생각났다. 같은 작가가 써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동경하는 대상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애타는 심정을 묘사해서 그런 것인가. 읽고 난 후 머리가 멍하면서도 여운이 짙게 남는다. 주인과 분리되어 땅속에 묻힌 말굽의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리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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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목만 보고서는 손이 말굽으로 변한다니 이게 무슨 희한한 상황의 이야기인가 무슨 판타지 소설이라도 되나 하고 생각했었다. 이 책의 장르는 뭐라 딱 꼬집어 말할수 없다.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잡는 추리소설의 분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스릴러 소설이라 명명하기에도 또는 판타지라 이름붙이기도 어렵다. 사람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심리소설이라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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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초, 첫 시작을 [살인자의 편지]로 시작했다. 살인이 추억의 대상이 되거나 고백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그런 제목들이 붙여진 까닭은 아마 아이러니를 부각시켜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역시 그랬다. 손이 말굽으로 변하는 장애극복 소설이 아니라 한 인간의 폭력성을 비유적으로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장치로 손바닥을 뚫고 나오는 말굽이 사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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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국내에서 '폭력미학'하면 떠올려지는 예술가들은 김기덕이나 박찬욱과 같은 영화감독들의 이름들이었다. 소설가들의 경우는 폭력보다는 남녀간의 사랑이나 가족애의 테마가 주류를 이루었고 설령 사이코패스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미학'이라는 꼬리표를 갖다붙이기에는 그 수준이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이제 박범신의 이름을 폭력미학의 작가 명단에 올려야 할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폭력은 인간문명의 이중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예민한 키워드다." 이 책《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문예중앙, 2011)는 '말굽'으로 상징화되는 인간의 야수성에 대한 고발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한 병폐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문명비판적인 틀에서 본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가 본질적으로 약육강식의 폭력사회임을 고발한다.
솔직해지자. 우리들 모두 살인자의 후손들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절멸시켰듯이 우리의 유전자에는 살인과 전쟁 그리고 물리적 폭력의 본성이 깃들어 있다. 그런 폭력적 본성이 소설에서는 선명한 인격성을 부여받은 '말굽'으로 상징화된다. 말굽의 전기생체인 이사장과 현기생체인 주인공 모두 폭력의 화신들로 살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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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했던 내 손에 이상한 말굽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면? 그리고 그 말굽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끈불끈거리며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이 된다면? 그 말굽이 이제는 나와 한몸이라며..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면?
이름도 없고, 주민등록도 없는 나는 정처없이 노숙인 생활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얼굴에 입은 화상으로 인하여 나는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를 견뎌내며 또한 매질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살던 집터를 방문하니 그곳에는 5층의 멋진 집 "샹그리라엔"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60대, 하지만 몸은 30대인 이사장을 만나게 되고, 샹그리라엔 관리자가 되어 노숙인의 생활을 접게 된다.
샹그리라엔에는 이사장과 그의 심복인 김실장과 백주사,, 그리고 눈먼 안마사 여린. 그리고 일반 입주민들이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이사장은 명인진사라는 절을 운영하면서 자신이 교주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명인진사라는 곳에서 이사장은 절대적인 위치를 가진 계시자이고, 그 안에는 자신들의 재산을 다 바치고 삶을 마무리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밤마다 샹그리라엔 뒷산에 올라 망원경으로 입주민들의 삶을 엿보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이 곳에서 식용 개를 키우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근처 특수부대의 장교들이 자주 와서 개를 잡아 먹었고, 나는 사람들에게 개백정 새끼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사람처럼 대우해줬던 여린.. 여린이네 집에 불이 나서 여린을 구하고, 여린의 아버지를 구하던 중 떨어지는 나무기둥을 맞아 나는 쓰러지게 되었다. 가까스로 소방관으로 인하여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나.. 나는 방화범으로 몰려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고.. 그러는 가운데 아버지는 자살을 하고, 여린의 소식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샹그리라엔에서 여린을 만나게 되고, 나는 내 손에 살고 있는 말굽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내 안에 숨겨진 폭력의 본성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폭력의 성향은 말굽으로 인하여 구체화 되면서 나는 무자비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김실장의 파트너, 노차장, 제석궁에 있던 많은 병자들.. 살인을 하면 할수록, 더욱 커져가는 말굽., 그 말굽은 결국 내 손바닥에서 벗어나 팔까지 그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간다. 나중에는 혐오했던 말굽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내가 말굽인지,.. 말굽이 나인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어린 시절.. 개를 먹기 보다는 개를 죽이는 과정에서의 폭력의 맛에 빠져있던 많은 장교들.. 살아 있던 개 목에 밧줄을 걸어 매달고, 개가 죽기까지 끊임없이 매질을 하는 그 과정.. 그 과정에서 장교들은 숨겨진 폭력의 맛을 느끼게 되고, 또한 그 폭력에 길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자주 개를 먹으러 우리집에 왔던 것이다.
폭력.. 폭력이라는 것 역시 중독성이 있고.. 또한 그 맛에 길들여지게 되면 폭력의 지배를 받게 된다. 반대로 맞는 것 역시 중독성이 있고, 그 맛에 길들여지게 되는 법이다. 맞는 남편이나 부인이 왜 자꾸 맞고만 있는가? 반대로 때리는 남편이나 부인은 왜 자꾸 때리기만 할까?
나 역시도 말굽을 만나기 전에는 맞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맞는 폭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면.. 말굽을 만난 이후에는 내 안에 숨겨진 폭력의 본성을 알게 되고, 때리는 폭력의 지배를 받게 된 셈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 속에 폭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잠재된 폭력의 결과물인 말굽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 내 손에도 숨겨진 말굽이 있지 않을까? |
![]() 오늘 만나게된 작품은 인터넷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2010년 11월 1일부터 2011년 4월 22일까지 여섯 달 동안 중앙일보 인터넷 홈페이지(joongang.co.kr)에 총 120회 연재한 후, 6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기이한 살인에 관한 긴 보고서가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들이대어 묻고 싶었다. 당신의 가슴속에 진짜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당신은 진짜 인간이냐고.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문구가 띠지에 적혀있던 이 소설은.. 작가 박범신이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을 본격적으로 차용한 첫 번째 소설라고 한다. 주인공 '나'는 4년간 수감되어 있던 교도소에서 출옥한 뒤 노숙자로 십여 년을 떠돌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다. 그곳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묻고 떠난 뒤,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수천 번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강력한 힘에 이끌리듯 돌아온 것이다. '개백정'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무허가 판잣집이 사라진 자리에는 음산하고 위압적인 5층짜리 원룸빌딩 '샹그리라'가 들어서 있다. 나는 그 앞에서 우연히 만난 기괴한 외모(젊고 건장한 사내의 몸에 노인의 얼굴을 가진)의 집주인 이사장에게 빌딩 관리인으로 고용되고, 어둡고 축축한 욕망의 배설관 같은 그곳에 숨겨진 비밀들에 한 발짝씩 다가가게 된다. 샹그리라엔 메마른, 불모의 인간들이 살고 있다. 샹그리라에 사는 인물들과 그들이 벌이는 천태만상은 자본주의 문명의 남성적 야수성과 잔혹성의 표본이다. 샹그리라의 주인이자 그 도시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배하고 있는 군주인 이사장은 폭력과 악의 화신 같은 존재다. 그의 비정한 행각을 목도하고 잔인성을 깨달아가는 동안 나에게는 믿기지 않는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나의 손바닥에 숨어 있던 말굽이 모습을 드러내고, 위기감과 분노에 빠지는 순간들마다 걷잡을 수 없이 자라서 나는 그 말굽으로 희대의 연쇄살인에 버금가는 살인들을 저지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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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연재되는 동안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절대 완결되지 않은 작품을 찾아보지는 않는다"는 주의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경우엔 나름대로 한주를 기다리는 맛이 쏠쏠한데 소설이나 영화의 경우엔 기다리는게 너무 힘들다는걸 꽤나 오래전에 깨달았다. 강원도에 처박혀 있을때 강풀 작가의 만화를 기다리다가 속터져 죽을뻔했다ㅡㅡ 그 이후로는 절대 완결되지 않은 작품은 시작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완결될때까지 궁금증을 가지고 기다리는게 속편하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악', 혹은 '(감정에의) 무지'를 '말굽'이라는 소재로 형상화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어있는 소재가 아닌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행동하는 하나의 생물로서 작품의 살인을 지배한다. '탄생 이전으로부터 온 슬픔'을 제외하고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주인공 '나'에게 들러붙은 이 생물은 자신의 의지를 거리낌없이 펼쳐나간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탄생된 스스로를 그 목적에 따라 움직이게 만든다.
작가는 문예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이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로, 번지르르한 자본주의 문명 뒤에 은밀히 장전돼 있는 폭력성의 비정한 탄환을 가차 없이 발사했다고 느낀다. 내가 쓴 것 같지 않다. 오늘의 이 문명이 나를 앞세워 썼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여기 차용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은 우회로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향해 직진보행하기 위한 첩경을 선택한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즘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분위기를 약간 느꼈을 뿐,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나마 작품의 맨 마지막 부분에 담긴 양윤이 문학평론가이 해설에서 쉽게 집작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읽은 폭력과 죽음은 희생자들을 다 집어삼키고 나서도 다시 소생할 날을 기다린다. 죽음은 끝내 자신의 논리를 관철할 것이다. 이것이 자본의 논리와 상동관계임은.. 이라고 담아둔 부분을 읽고서야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의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내가 읽어내기엔 어려운 작품인 것 같다. 그래서 난 이렇게 받아들였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내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게되는.. 탄생 이전으로부터 온 그 슬픔이라는 감정이 말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 주는 것은 아닐까.. 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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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빠른 책은 늘 궁금하다. 어떤 내용들이 어떻게 연결되어질지....... 이런 류의 책들 흔하지 않다. 그렇지만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프랑스 작가 기욤뮈소와 우리의 박범신 작가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난다. 종이책으로 읽어도, 전자책으로 읽어도 별 무리없이 흥미롭게 읽혀진다. 아마 그들의 문체에 어느정도 익숙해져서 그런가보다.
추석연휴라 책 읽을 틈이 나지 않을 듯..... 그렇지만 늘 습관에 이끌려 책 한권을 가방에 챙겨넣었다. 이동중에도 가벼이 읽을 수 있는 소설책이 좋을 듯 싶어 읽지 않은 책들 중에 시선이 딱 멈춘 책. 바로 많이 좋아하는 박범신님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 나온 책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신간은 잘 사지 않는 편인데, 인팍 동생에게 귀한 선물로 받았다. 몇달전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박범신님 신작으로 나온 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흥미롭게 봐왔던 책이었는데, 선물로 받고 읽게 되어 너무 기뻤다.
박범신님의 책, <은교 http://blog.chosun.com/jyh1014/5216490>와 <비즈니스 http://blog.chosun.com/jyh1014/5244361>를 전자책으로 모두 읽었다. 종이책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책 두께가 만만치않다. 500여 페이지. 얼마나 효진아빠에게 면박을 당햇는지.... 책 때문에 가방이 무겁다나 어쨌다나....... 그럼에도 별 부담없이 읽은것은 역시나 이야기의 빠른 전개(호흡)와 특유의 문체가 낯설지 않아서였다. 박범신 작가님이 다루는 주제 면에서 날카로운 면이 있음을 알기에..... 우리 사회의 모순점이나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거나 자연과 환경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사람 사이 소통을 다루는 면에서 그 섬세함과 세밀함이 빛을 발하는 듯 하다. 감히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생각들이 글 속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듯 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의 글들을 통해 더 열광하며 대리만족을 느끼지않나 싶다. 이런 면에서 이번 책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더 파격적이면서 대담한 느낌 받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폭력'에 대한 잔혹성과 인간의 탐욕에 대한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 듯 하다.
우리사회 최하층민들을 바라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로 간접적이면서 노출되지 않는 은연중의 폭력이며, 그들을 향해 직접적인 무차별적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의 의식 이면에 잠재하고 있는 비윤리성은 또다른 폭력을 낳게 되는 원인제공처이며, 그들에게 당하는 아무 힘도 능력도 빽도 없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사회와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표출되어 또다른 형태의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우리 사회 가지지 못한 자와 가진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힘센 자와 약한 자........ 이분법으로 양분된 사회속에서 늘 그늘이 쳐진 소외된 그들. 그들이 원한 것은 부와 재물과 능력이 아니었다. 바로 층 구별이 되지 않는 평범함이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보아주는 그 넉넉함. 그냥 '받아들여 주는 것' 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발단과 결말은 참 마음 아팠다.
최하층민 백정의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준 소녀를 향한 그리움과 애정은 연민으로 발전하고 결국 이생에서 함께 하지 못하는 슬픔 때문에 소녀가 희생양이 되었다. '폭력은 또다른 폭력을 낳는다' 어릴적부터 어느 누구에게나 마구 몰이식 폭력을 당하고 이젠 그 폭력에 익숙해버렸고, 자신이 또다른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희생에게서 무감각해진 상태. 이런 단면들도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연된 문제의 한 바탕일 것이다. 어떤 순간에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음에도 그 경계가 무너진 상태가 적나라하게 펼쳐져있다.
20여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이한 살인'과 관련된 '말굽'의 항변. 이 '말굽'은 사람의 생각과 영혼을 갉아먹는 '폭력'의 정당방위에 이르게하는 무서운 도구였다. 바로 폭력의 무차별함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게하지 못하는 우리 자아였다. 자본주의의 비정함과 그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타인을 잊어버리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우리를 향한 또다른 가면을 쓴 자화상이 아닐까싶다.
기이한 책, 독특한 책을 만났다. 섬뜩하리마치 예리하면서도 내용이 있는 책. 이야기와 함께 그려진 그림은 더욱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처럼 강렬하다. 잿빛톤의 그림과 여백....... '폭력의 잔혹성' 이란 주제에 고스란히 근접하게됨을 은연중 알게된다. 아하~~ 바로 박범신님만이 풀어낼 수 있는 책이었음을 또 느끼게된다. 살인과 폭력.... 너무 사실적이라서 놀랬다. 그리고, 여인의 등장은 늘 이야기 발단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여인은 늘 태고적 주인공들의 추억이며, 가슴앓이였다.
정말 인간이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거부한 인간들, 자아와 타협하는 인간들, 자아와 고뇌하는 인간들..... 숱한 인간들의 모습들이 한 사람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진다. 자아에게서조차 인정받지 못함은 더욱 쉽게 폭력의 노예로 충분히 전락되어질 수 있음을 보았다.
'말굽'으로 덧씌워진 기이한 살인에 대한 긴 보고서. '사이코패스'란 단어가 생각이 난다. 멀쩡한 사람도 어느 누군가들로 인해 소외됨으로 충분히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고, 도덕적 불감증이 아닌 집단적인 소통의 부재가 충분히 말굽으로 장착된 폭력자로 만들 수 있음도 알았다.
그렇다. 늘 문제는 '소통의 부재'였다. 박범신님의 책은 다소 무거운 주제지만 그 속에서 언제나 어느때든지 소통할 수 있는 귀와 눈,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를 우회적으로 역설하는 듯 하다. 이것이 바로 작가적 역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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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청년작가.... 무궁무진한 글감이 마르지 않는 처녀지의 우물, 그는 전방위적으로 아랫도리가 날랜 청년처럼 전후좌우를 거침없이 붓질을 한다. 멀고도 먼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삼은 '촐라체'에서, 늙은 시인과 어린 소녀의 거세된 사랑 이야기 '은교'까지. 그리고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처참한 말로를 다룬 '비지니스'. 짧은 주기 동안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범위를 넘나들며 엉청난 글의 성찬을 이뤘다. 이번에는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인간과 말의 공존. 손과 말굽의 공존. 말굽은 땅을 딛기 위한 뜀박질용이 아니라 살인을 위한 도구이다. 너무나 단단하고 묵직한 헤머같은 것. '나'라는 주인공은 남해안 어느 촌락의 개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무수한 폭력의 양분을 먹고 자란다. 폭력에 익숙한 개 백정의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특수부대원들의 광기어린 폭력성을 보고 자란 그는 사회적 편견이라는 집단적인 폭력 앞에서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다. 이미 화마에 얽힌 얼굴은 더 이상 인간의 얼굴이 아니다. 남해 해안선을 따라 노숙과 방랑의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샹그리라. 이상의 세계. 티벳 어딘가에 있는 영혼의 세계. 그러나 불탄 집터 위에 세운 건물은 더 이상 샹그리라가 아닌 수라의 세계이다. 사아비 종교 집단의 교주인 이사장. 사실 교묘히 폭력성을 은폐한 다른 방식의 정신적 폭력자이다. 그리고 그의 수구들. 사회의 언저리로 밀려난 불쌍한 부초들을 현혹하여 가진 재산을 빼앗고 정신을 갈취하는 나쁜 무리들. 그들은 과거 그와 아버지를 괴롭혔던 특수부대원 출신자들이며 지역 사회의 유력인사로 행세하며 폭력의 합법성을 키운다. 말굽을 가진 그는 오래 전 보랏빛 점을 가진 소녀를 기억하고 여린이라는 이름으로 성정한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그의 구원체이다. 보랏빛은 항상 신묘하다. 눈을 잃은 그녀도 신묘하다. 사이비 집단에서 관음보살로 칭하고, 몸으로 보시한다. 박범신의 그녀들은 항상 투명한 피부와 실핏줄이 파랗게 도드라져 나오는 연약한 피부를 가졌고, 팔과 다리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이다. 박범신의 공통점이다. 은교가 그러하다. 말굽을 가진 그는 관음봉 암벽에서 그녀를 관음하고 썅그리라에서 기숙하는 모든 인간들의 행위를 관음한다.
그 언젠가 박범신은 자신의 작품은 경험의 부분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갖가지 등산용어는 그의 히말라야를 등락했던 체험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초의 산악소설이라 말하는 촐라체에도 등장한다. 관음봉의 관음의 통해 샹그리라의 이사장과 그의 수하들의 더러운 행각들이 드러난다. 어린 소녀의 젖비린내를 맡고 보랏빛 점을 가진 여린이를 거칠게 탐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달콤한 혓바닥 밑에 가려진 덩쿨장미의 가시를 드러내고,,우매한 대중을 설파하는 사기행각들. 이 모든 것에 주인공의 폭력성은 말굽이 육체를 갉아 먹으며 소뿔처럼 자라나듯 무럭무럭 자라 끝내 도살의 잔치를 벌린다.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살인욕구는 이미 도덕적으로 죄악을 따질 수 없고, 과거로부터 입은 카르마는 더 이상 억제할 수 없다. 한명 한명씩 제거해 나가고 결국 단 하나 사랑했던 여자마저 죽인 일은 죽음으로써 과거의 순결을 지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고통에서 잔명하고 있는 단신원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말굽으로 난타하여 죽이는 행위는 이유없은 살륙이라기 보다 폭력이 폭력을 낳은 악순환의 고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결국 이사장과 그 수족들과 함께 매몰돼 버리는 주인공의 말로는 잔혹한 살인영웅의 모습이기도하다. 언제나 그러하듯 박범신의 소설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양파 껍질 벗기듯 잘 갈무리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추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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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하드코어적인 작품이다. 김기덕 감독 영화를 보는 듯한 날것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의 극한을 보여주는 어두운 실체는 눈을 뜨고 제대로 바라보지 못 할 정도로 잔혹하다. 등단 후 39년, 39번째 작품인 박범신 작가의 신작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작가에게는 여러모로 의미있는 작품이다. 그가 25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 오롯하게 소설가로의 활동만을 하는 첫 발걸음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박범신 작가의 작품 중 <촐라체>를 시작으로 <은교><비지니스>를 차례로 읽음으로서 인간의 잠재되어 있는 폭력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처한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짙은 칼날을 내세운다. 책을 펼치면 끝이 날 때까지 접을 수 없는 흡입력과 어디선가 있을 것만 같은 주인공들의 세계는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그동안 읽었던 세 작품을 연상시킨다. 인간으로서 보여지는 선함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폭력의 길이 주인공을 필두로 나뉘어 진다. 아니, 필두로 나뉘어 지기 보다는 그를 둘러싼 환경이 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주 옛날에 보랏빛 점은 가진 소녀 이외는. 늦은 밤 심층 프로인 '이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 것처럼 선의로 보여지는 것들이 사실 어두운 실체의 폭력으로 둘러 쌓이는 모습을 보니 절로 토기가 올라왔다.
박범신 작가의 작품은 늘, 인간의 극한을 보여준다. 체력의 한계, 심적인 한계, 폭력의 한계 등 인간이 보여주는 한계들로 하여금 욕망을 실현시키고, 만족이라는 것이 없는 욕망의 늪에 빠진 어리석인 인간들. 한치앞도 볼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세상을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나락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양의 탈을 쓴 악마 같다. 피를 먹고 사는 흡협귀처럼 폭력을 자행해 먹고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폭력성을 보여줌으로서 마치 피카소의 작품처럼 '괴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상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악마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소설에 나오는 곳곳의 이미지는 그 실체를 더 부곽시켜 놓았다. 상상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산물이라 그들이 행하는 '믿음'과 '치유'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들을 믿고 따르는 인간들의 어리석음 또한 조롱에 가깝다. 비정상적인 삶에서 오롯하게 소녀를 마음에 품었던 한 남자와 소년을 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는 폭력을 벗어가는 갈망이었으리라.
500페이지 정도 되는 도톰한 분량은 손에 잡히는 질감만큼이나 휘몰아치는 흡입력으로 또 한번 그들의 세계에 흠뻑 빠졌다. <은교>를 한 달만에 쓰고, 여섯달만에 이 작품을 쓴 박범신 작가의 왕성한 집필능력 만큼이나 또한번 그의 세계에 잔혹함을 느끼게 한 작품이었다. 인간의 잔혹함. 인간의 욕망의 끝은 어디까지 일까. 언젠가 먼 바다의 수평선을 보며 바다의 끝은 어디까지 일까 라는 궁금증이 일었는데 박범신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인간'의 그림자의 깊이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작품. <은교> 이상으로 좋았던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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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39년 39권째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책이 나오면서 박범신 작가를 소개하는 매스컴에서 자주 인용하는 문구다. 등단한 지 삼십구 년이나 됐구나...!! 등단해서 작가로 살아온 세월도 세월이지만, 삼십아홉 권의 책을 써 오기까지의 작가의 글에 대한 고민과 한결같은 집념을 느낄 수있어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내가 어릴 적은, 책을 사서 보는 사람보다 빌려 보는 사람이 많았고 빌려 보는 것보다 읽지 않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 많은 시절이었지만.. 고만고만한 책 꽂이에 꽂힌 (교과서를 제외한) 책 중 가장 흔하게 볼 수있었던 작가의 책이 박범신이었고, 최인호였고, 황석영이었다.(우연하게도 최근에 연륜이 깊은 세 작가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작품을 내게 되어 비교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어쨌기나 박범신은 우리에게 오래된 작가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달려온 작가였고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으로 깊은 연륜에 비해 어린(?) 독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작가이기도 하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존재의 근원과 맞닿아 있는 폭력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 손에서 말굽이 돋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차용해 자본주의 문명 뒤에 은밀히 장전되어 있는 폭력성의 바정한 탄환을 가차 업쇼이 발사했다고 했다. 한대에 천만 원인가를 내고 부하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구방망이로 사람을 때렸다는 어느 재벌 2세의 실화를 모티브로 삼아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침대 밑에 얼마나 위험한 것들을 깔고 누워 있는가를 얘기하고 싶었다고!!
우연히 손 바닥에서 말 발굽이 돋아나는 주인공. 단순한 주먹다짐의 물리적인 폭력과 자본주의라는 형태안에서 행해질 수있는 수많은 형태의 폭력이 서로 맞닿아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그 폭력이 우리앞에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폭력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 해야하나를 생각케 해 주었다. 소설내용의 배경이 된 샹그릴라와 명안진사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 폭력을 실현(?)해 보이는 안방이었고, 개백정의 아들로 자라나서 손바닥에서 자라기 시작하는 말발굽을 가진 나는 폭력을 폭력으로 맞설때 최고의 희열을 느끼고 (양심과는 상관없이) 존재의 가치를 증명받는 현대인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폭력이라는 질척한 뿌리에서 성장해 군림하는 자의 그늘에서 기생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보여 줌으로 나는 아니라고 비켜서 구경꾼으로 끝나는 게 아닌 나는 어떤식의 폭력에 가담되어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손 바닥에 말 발굽은 없을 지언정...)나만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건 아닌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폭력에 휘둘리면서도 자각조차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문득, 섬뜩해지기 조차 한다.
39년의 필력에 빛나는 만큼 책 내용은 스릴과 서스펜스의 경계에서 애틋함과 연정의 러브 라인까지 넘나들며 독자를 긴장시키고 다음 내용을 기대하게 하는 노련함이 돋보인다. 어떻게 하면 읽히는 책이되는가를 잘 알고 있고 어느곳에서 긴장감을 줘야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이건데 잘 읽어내고 있니?하는 독자가 밑줄 긋게 하는 문장도 빼 놓지 않았다. 자칫 지루할 수있는 이념을 피력하다가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면도 적재적소에 배치해 휘리릭 책장을 넘겨 띄엄띄엄 읽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잘 배치했었다. 떨어지는 답 없이 결론을 열어 놓은 채 마무리짓는 프로다운 마지막도 좋았고!
다만, " 이것은, 아마도 기인한 살이에 관한 긴보서가 될 것이다." 라는 빨간 글씨의 책 띠지에 적힌 문구는 독자를 충분히 현혹시킬만 하되 책의 전반을 아우르기에는 목표물을 명중시키기엔 일 크리크 쯤 벗어난 문구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책 내용은 끊임없이 쌍방간에 살인이 자행되고 있긴 하지만, 그 살인이 말해주고 싶은 것은, 폭력이 얼마나 디테일하게 우리삶에 관여하고 있고 폭력의 반증으로 쓰일 수 있는가에 촛점을 맞췄을 뿐이지 살인자체를 이슈화 하려는 건 아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출판편집자의 독자로 하여 책을 들고 펴보게 만들려는 마케팅적 표현이었다면 완전 성공!이었다고 살짝 말해주고 싶다.^^ 또 한 번의 다만은...(죄송 ㅠㅠ 늘 안티적 글을 적고야 마는 내 못된 독서 습관을 용서하시길...) 수많은 문제를 풀어와 이런 문제엔 이런 공식, 저런 문제는 저런 공식..막힘없이 풀어내는 학원 수학 선생님의 노련미처럼 매끄럽고 막힘없는 글이었지만 뭔가 공식에 딱 맞아 떨어진다는 정형화된 느낌, 서툴게 삐죽 튀어 나와 가능성을 열기보다는 틀 안에서 잘 만들어 자물쇠까지 완벽하게 채웠구나..싶은 작가의 (범접하기 어려운) 아성을 느꼈다. 이런 노련한 매끄러움과 자기만의 아성을 만들기위해 죽기살기로 글을 쓰는 작가가 대부분이라면 다시 죄송하다고 조아릴 수 밖에!
내 몸 어딘가에 조금씩 자라고 있는.. 어쩌면 벌써 드러나 나도 모르게 남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지 모를 폭력의 근원적 모습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책의 내용과 상응하는 일러스트도 무척 인상적이어서 시선이 오래 갔다. 오욕칠정을 완전히, 티끌 하나 없이 거세한(p.465) 말굽이 필요로하는 '탄생 이전의 슬픔'까지 버린 주인이 나타나지 않기를, 우리중 아무도 그 말굽의 주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윤리성이 최후로 들어가 누울, 어둡고 깊고 행기로운 아기집 마음(P.23)부터 점검해야 할 일이나 어리석은 나는 혹 물리적인 징조가 나타나 있을새라 몸의 이곳저곳만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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