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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심층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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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종교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좋은 일을 하는 종교인들도 보지만 언론이나 주변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쁜 면을 부각시켜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인 종교관이 결코 좋게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종교의 긍정적인 면이나 위대한 부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협한 종교인들의 말과 행동은 나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보고 생각하고 느끼게 만든다. 결코 그것이 종교의 모든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던 중 이 책 저자에 대한 글을 읽고 목차를 보면서 나 자신의 종교관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능력부족으로 제목처럼 심층을 보지는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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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비교종교학자인 저자가 모든 종교와 철학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면서, 각 종교에 담긴 공통적이면서 중요한 유산들을 짚어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스, 로마의 주요 철학자들부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불교 등의 중요한 사상가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의 사상가들의 삶과 가르침을 되돌아본다.
2. 감상평 。。。。。。。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라는 프레임으로 종교를 분석하고, 그래서 자신의 범신론적 기준에 맞지 않으면 죄다 ‘미성숙한 표층종교’로 분류해버리는 저자의 방식은 대단히 독단적이고 전제적이다. 수천 년을 이어온 각각의 종교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작은 것’이나 ‘비본질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바람직한 종교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만 따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마치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며 발해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분명한 개별적 특징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사실상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바람직한 종교’란 범신론과 뉴에이지적 명상법의 뒤섞임인 듯한데, 여기에 신비주의적 전통까지 가미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들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여기는 이 범신론은, 겉으로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종교와 사상의 평화를 이루려는 대단히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적 관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각 종교들로부터 특정한(혹은 특정하게 보이는) 교리들만을 취사선택해 만든, 어찌 보면 대단히 획일적이고 무색무취의 종교,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거대한 군중들을 위한 종교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믿어오던 범신론은 이렇게 현대의 자유주의신학의 바람을 타고 다시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상 일신론이 극단적인 분열이나 적대감을 초래해왔다고 주장하는 듯하지만,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인들의 절반 이상이 이미 마음속으로는 기독교로 위장된 이 ‘내재적 범신론’을 따르고 있다는 연구도 나와 있는 걸 보면, 문제는 일신론이냐 범신론이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대와 문화,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종교를 현대의 관점에 놓고 같은 선상에서 보고 있는 비역사적 연구방식은 딱히 학문적인 것 같지도 않고, 인류 역사상 유구히 주장되어 온 범신론적 종교에서 딱히 새로운 매력을 느끼지도 못하겠다. 물론 현대의 종교인들에게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문제가 범신론이나 유물론과 같은 다른 사상과 철학을 선택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기대다.
동서양의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한 권의 책에 모아두었다는 게 이 책의 유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 너무 단편적으로 실려 있고 거의 대부분 주관적인 변형을 가하고 있기에 딱히 잘 된 요약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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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종교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을 의지하며 내세의 지복을 바란다는 측면에서 신의 존재 여부는 모든 종교에서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다. 중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를 넘어오며 우린 신이 중심이 되던 세계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이 중심이 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와 환경재앙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공포와 불안이 확산되는 현재, 종교에 대한 의미와 해석이 다양한 각도에서 재조명 되고 있다.
경제적 인간으로 급속한 발전을 거듭한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경제적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엇이며, 그 이익이 투자되는 돈과 시간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상당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을 설득해 신을 믿게 하려고 시도하면서 그가 제시한 논리는 그 이전까지 신앙에 대해 주장되어 왔던 내용을 뛰어넘어 매우 흥미롭고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그는 심지어 신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기 불가능할 때조차 그것을 믿는 것이 현명하다고 제안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앙은 그저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혜택을 제공할 것이다. 그이 주장에 따면, 설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신을 믿어서 잃을 것은 작거나 아예 없다. 하지만 신이 존재할 경우 신앙은 영원한 행복을 제공하는 반면,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 지옥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내기를 했을 때 우리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비교해보자.” 파스칼은 그렇게 제안했다. “만약 우리가 이긴다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진다고 해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신에게 돈을 걸어라.” -본문 273쪽.『모든 것의 가격』/ 에두아르도 포터
하지만 문제는 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고 해서 종교가 지닌 심층적인 의미를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을 통해 남과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종교의 진리인지, 혹은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독실한 종교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신의 섭리라면 그것이 설령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행위라도 따라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종교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래서 종교에 관한 질문과 대답은 언제나 복잡하다.
오강남 선생님의 책『종교, 심층을 보다』는 과연 종교가 무엇인지, 종교인의 자세는 어떠해야하는지, 인간의 삶과 종교가 어떻게 심층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다. 종교가 이미 자본에 종속되어 버렸다는 비관론에 대한 대안으로 삼을 좋은 책이다. 종교는 단순한 종교적 교리에 대한 믿음과 복종, 신에 대한 영원한 의지가 아닌 인간의 깨달음에 그 본질이 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게 된 건 무엇보다 값진 일이다.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경지가 있다. 그 경지는 종교의 특수성을 관통하는 영적 자유로,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 실존의 궁극 의미를 표현한 다른 표현들 속에 나타난 영적 현존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한다. -본문 256쪽.
폴 틸리히가 강조한 종교를 초월한 영적 현존이 바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닐까? 책엔 수많은 종교 지도자와 수도자 그리고 성인들이 등장한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유교를 망라한 거의 대부분의 중심 종교계의 내노라 할 인물들이 말이다. 물론 지식의 깊은 얕은 나에게 생소한 이름들도 많았지만. 그들이 이야기 하는 종교는 구원과 내세의 행복을 떠나, 이익과 경제적 논리를 벗어난 심층 종교의 본질이었다. 믿음이 아닌 깨달음 그것이 바로 종교의 핵심이라는 것. 그 핵심을 책은 앞서 살아간 종교계 스승들을 통해 이야기 하고 있다.
종교에 관련된 책이라 딱딱하고 재미없을 것이란 편견은 버리는 것이 좋다. 이 책은 상당히 재밌다. 그리고 종교가 있든 없든 인간의 영혼과 삶에서 깨달음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준다. 개인적으로 류영모 선생님의 삶과 종교관 그리고 철학이 가장 인상 깊었다. 예수나 석가가 우리와 다르지 않고 유교와 불교 예수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선생님의 가르침.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오늘의 영원함을 감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가르침. 사는 것은 놀이와 다르지 않다는 종교적 깨달음. 꽤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과거는 과정하지 말라. 지나간 일은 허물이다. 나도 조상보다 낫다 순舜은 누구요 나는 누구냐?(…) 죽은 이들은 가만 묻어두어라. 족보를 들추고 과거를 들추는 것은 무력한 증거다”라고 했다. ‘과’過라는 글자가 ‘과거’라는 뜻과 ‘허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그에게는 ‘오늘’만 있을 뿐인데, ‘오늘’은 ‘오+늘’, ‘오~영원!’이다. -본문 48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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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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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남겼던 얘기 중에 " 예수는 문제가 없으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 라는 논조의 얘기 가 있습니다. 종교가 통치의 논리, 침략의 논리, 지배의 논리로 악용되는 사례가 많고, 인류 역사상 종교의 가르침이 호도되고 지배층의 통치수단으로 이용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테러, 기독교를 이용한 전쟁명분쌓기, 힌두교의 계급 세습 수단 , 불교의 정복전쟁 등... 종교가 인류에 끼친 영향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각 종교 및 사상별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종교 자체의 선악과 옳고 그 름을 논하기보다는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더 많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저자는 종교 ,사상에서 전하려는 공통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각 종교 경전 및 말씀 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해석에 따라서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논지는 분명히 맞는 부분이 있고, 각 종교의 근본적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비판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보다는 개방적인 태도로 한 번 접근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분야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다 보니 내용이 조금 미흡한 부분은 있는듯 합니다. (성경도 2,000페이지, 불경은 원시경전만 몇가지만 골라도 4,000~5,000페이지, 사서삼경도 2,000페이지. 서양철학자들과 다양한 분야의 종교적 경전과 주석서 등을 합하면 500페이지 짜리 책으로 최소 100권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네요. 워낙 다양한 사상가들의 사상과 진리의 핵심을 축약해서 전하려다 보니 내용을 과다하게 생략한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진리의 메시지를 간결하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책으로는 '도덕경' , '바가바드 기타' 두 가지로 봅니다. (책의 분량도 많지 않고, 핵심적이고 명쾌한 메시지를 가장 간단하게 전달하고 있다 봅니다.) 동저자인 오강남님의 '도덕경'과 정창영 님의 '바가바드 기타'를 진리의 메시지를 찾는 분들에게는 꼭 추 천 드리고 싶고 단일 종교의 논리에 집착하기보다는 각 종교의 경전과 서양,동양 철학자들의 저서를 접 해 보시는 것도 '진리' , '근원'에 다가가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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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제에 갑자기 관심이 많아졌다.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할 이 고민의 해답이 종교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 노력의 하나로 이 책이 선택되었다.
그리스, 로마철학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불가와 유가, 노장사상과 도가, 묵가까지 아우르는 종교의 심층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른바 '범재신론'이다. 나는 '범신론'과 '범재신론'의 차이를 모른다, 다만 책에서 읽은 바를 표현하자면 인간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나 단절로서 찾지 못하니 어떤 특수한 인식변화를 거쳐 내 안의 빛 말하자면 신성을 찾으면 궁극실재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 방법으로 지금까지의 현실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깨달음이 말한 어떤 특수한 인식변화라는 뜻이다. 그 깨달음은 일반 인식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저자가 사용한 용어의 '궁극실재'는 결국 범아일여, 신인합일, 인내천으로 귀결된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 궁극실재를 진리를 관장하는 '신'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세상은 왜 부조리한가,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가? 나를 괴롭히는 원인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때문에 힘들어하는가?
앞에서 밝혔다시피 삶의 목적과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삶의 목적과 방향이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하여 종교를 선택했고 그 종교의 문제를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책이 선택되었다.
범재신론이 답인가, 하는 부분에 대하여서는 아직도 스스로 많은 고민이 있어야하겠지만 한가지 깨닫게 된 사실은 내가 왜 고통스러워하고 고민하는 지 그 원인이 무엇에 있는지 알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 원인을 다르게 생각하는데 고민 해결의 실마리가 있었다. 원인 자체가 소멸될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할 고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기록을 덧붙인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개신교도로서 그 교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조금의 의심이라도 할라지면 믿음이 부족한 자에 대한 스스로의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가 겪은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가 그랬다, 절대적이었다, 믿음은, 조금의 의심도 필요없었다. 그러다 생각이 송두리째 뒤바뀌게 된 계기의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까지와의 종교적 신념을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자세히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때까지 삶을 간신히 버티게 해주었던 그 종교적 믿음은 그 엄청난 사건 앞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음을 말해 둘 뿐이다. 그 때 나를 지탱시켜 준 건 소설 '오두막'과 '도마복음', '예수의 기도' 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통절히 깨달았다, 문제는 바로 지금 내 마음과 내 생각의 태도라는 사실을.
절대적 믿음 앞에 귀의하면 편하다. 개신교는 그 절대적 믿음 앞에 배타성을 앞세웠다, 그러다 차츰 만일 어떤 '궁극실재'가 있고 그 궁극실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향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고 많은 종교는 모두 그 방법을 말하는 여러가지의 통로이며 내가 믿어왔던 종교 또한 그 여러가지 통로 중 한가지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생각했다, 이제껏 가져왔던 생각을 버리고 다 내어 맡기면 정말로 편안해질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아직도 고통스러운걸까 하는 생각.
그리고 나서 한 번도 가지지 않았던 그저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되어졌던 진리를 향하는 방법이 나와는 잘 안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겠다, 혼란이 가중되었기도 하고...고통의 원인에 대한 실마리는 찾았으나 종교의 다양한 통로 가운데 과연 어떤 통로를 선택하여 해답을 얻을 것인가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비슷하다 하겠으나 어떠한 통로를 선택하여 어떠한 경로로 그 방법을 이루어 가는가 하는 문제는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다만, 이 책에서는 종교의 심층을 위에서 밝힌 '범재신론'에 촛점을 맞추어 설명했기 때문에 소개한 종교의 교리 및 사상의 전부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말하자면 결론에 맞춰 취사선택했다는 생각이 많이 일었다. 이 책은 또 책에서 소개한 종교를 더 심층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이끄는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개된 많은 저작 중 읽고싶은 마음이 든 경우도 많았고, 교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더 알아보고 싶은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그 종교들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경우로라야 이 책에서 소개한 종교의 심층에 공감한 부분도 많았고 새로운 분야로의 흥미를 유도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미 예정된 결론을 위하여 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 각 종교 등에 대한 다른 부분에서의 소개가 조금 부족한 점 등은 약간 아쉬웠다.
일생에 한 순간, 깨닫는 날이 왔었대면 아마 나는 그렇게 허무하고 안타깝게 그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찾았던 신은 날 깨우치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미몽 속을 헤매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흘려버리고 말았다.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기에, 지금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는 와중에 오강남 교수의 책들을 만났다,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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