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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오페라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바로 <돈 카를로>다. 이 오페라의 인물들에게는 처연하다는 표현조차 사치이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황궁을 무대로 황제 가족과 고위 귀족이 등장하지만, 이곳에는 인간미나 감정이 자리할 곳은 없다. 설사 감정이 있다 해도,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런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 주변 환경의 차가운 응대뿐이다. 처절하고 음울한 인간 드라마가 연이어 펼쳐지는 이 오페라에, "살아있는 모든 인간이 짊어지는 끝없는 고통"이라는 이 dvd의 수식어는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약혼자와 약혼녀가 있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둘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정략 때문에 약혼녀는 약혼자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었다. 서로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아버지가 아들의 약혼녀를 빼앗은 격이 된 이 상황에서, 서로를 사랑하기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처절한 선율을 빚어낸다. 필리포는 대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이고, 돈 카를로는 그런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며, 엘리자베타는 황후이지만 그들은 행복이라는 감정을 조금도 맛보지 못한다. 그들의 명예와 지위는 공허한 것조차 아니라,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여기에 황후를 경외하면서도 질투하는 에볼리 공녀와 돈 카를로 왕자의 충직한 신하이자 믿음직스러운 친구인 포사 후작 로드리고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사건과 갈등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이 세계에 인간미와 활기를 불어넣어 주지는 못한다. 서로 얽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불행과 처절함의 쇠사슬에서, 또다른 불행한 인간군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 공연의 무대는 석조 영묘이다. 원래는 황궁의 내실, 정원, 성당 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지만 이 공연에서는 모든 일이 납골당에서 벌어진다. 삭막하고 휑뎅그렁한 납골당은 등장인물들의 막막하고 처절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황궁이 아무리 화려한들, <돈 카를로>의 등장인물들에게는 묘석만이 있는 납골당과 다를 바가 없었으리라. 오직 무덤 속에서만 평안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엘리자베타 황후의 처절한 아리아는, 이 오페라 등장인물 모두에게 들어맞는다. 이 오페라를 볼 때마다, 오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로드리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로드리고는 이 오페라에서 죽은 유일한 등장인물이지만, 오페라 등장 장면 중에서 죽을 때 가장 행복했을 것이다. 주군이자 친우인 돈 카를로를 구하고 대신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하다는, 로드리고의 마지막 아리아 가사처럼 말이다.
<돈 카를로>는 대작이다. 장대한 작품이 흔히 그렇듯이, 아쉬움 없는 공연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여섯 명의 주역 성악가가 뛰어난 기량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하며, 진중한 음악은 흐름을 잘못 잡았다가는 자칫 둔중하고 무거워지기 십상이고, 황실을 무대로 하는 오페라인 만큼 의상과 무대의 완성도도 중요하다. 이 <돈 카를로> dvd 공연은 이 조건들을 두루 만족시키고 있는, 드문 공연이다. 이 <돈 카를로> dvd 공연을 보다 보면, 몸짓 하나 노랫가락 하나에 살아있다는 것에 고통스러워하는 등장인물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오는 것만 같다. 비극에서 오는 감동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공연도 훌륭하지만, dvd 자체의 완성도도 흠잡을 곳 없다. 공연 영상을 재생하면 오역 없고 누락 없고 읽기도 쉬운 충실한 한글 자막이 우리를 반겨 준다. 또한 의상 디자인 스케치, 무대 뒷이야기 등 다채로운 부가영상이 가득한데, 하나같이 흥미로운데다가 부가영상에도 빠짐없이 한글 자막이 달려 있다. 박종호의 유럽 오페라 하우스 명연 시리즈의 장점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dvd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