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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난향이 물씬 풍기는 책
『추사진묵 (2005)』, 『추사정혼 (2008)』의 저자인 젊은 미술사학도이자 미술비평가인 이용수(38)의 새로운 저서 『인정향투 (에세이, 2011)』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구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논문집이라는 소리에 예술과 미슬분야를 좋아할 뿐 깊은 전문지식이 없는 제가 읽기에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을 하였는데 웬걸 이러한 생각은 기우였습니다.
책을 잡자마자 술술 읽히는 것이 맟 에세이류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또한 이번 저서에서도 저자 이용수의 정밀하고 세세한 연구 그리고 해박한 그의 전문성을 흠뻑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차세대 세계미술사계를 선도할 재목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책을 읽는내내 느낄 수 있었어요. 참 정말 대단하다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조상님들의 예술세계와 그 깊은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인정향투'책을 다른 독자분들께 권하는 이유입니다. 이책과 위 말씀드린 이용수의 다른 책들도 함께 읽어보시면 더욱 좋으실 것 같습니다.
서원아회첩 중 '옥동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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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옥동척강 (1739), 지본수묵, 개인소장
옥동척강 그림에 나타난 7인의 모습을 근거로 현재까지 서원아회 모임이 7인의 모임이라 알려져 왔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었음을 최초로 밝혔어요. 수십년 동안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알고 있었다니 부끄러워 지네요. 왜 지금까지 아무도 이러한 점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었는지... 참.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休官以來, 病懶相成, 未窺家後小圓者, 久矣,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 以謀小會, 歸鹿趙台, 聞風而至。(휴관이래 병과 게으름이 상성하여 집 뒤 소원(서원소정)을 들여다 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는데,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 작은 모임(소회)을 도모했는데, 귀록 조대감이 소식을 듣고 이르렀다) 먼저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의 해석이 중요하다. 이 부분의 해석을 위와 같이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로 ‘조군수趙君受’를 인명으로 해석함이 가장 타당하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지금까지 이 아회의 참가인원은 겸재가 아회의 정경을 담은 다섯 폭 중 한 폭인 ‘옥동척강玉洞陟崗’ (도 4)에서 표현된 바와 같이 7인 (이중희李仲熙 (이춘제李春躋), 조치회趙稚晦 (조현명趙顯命), 송원직宋元直 (송익보宋翼輔), 서국보徐國寶 (서종벽徐宗璧), 심시서沈時瑞 (심성진沈星鎭), 정선鄭敾, 이병연李秉淵)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 경우 위 아회기의 내용과 상충된다. 위 해제를 다시 살펴보면, 서원주인 이춘제 (이중희), 조현명 (조치회), 송익보 (송원직), 서종벽 (서국보), 심성진 (심시서), 조군수 (?), 그리고 아회(기)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아회의 정경을 화폭에 담은 겸재 정선과 시를 지어 남긴 사천 이병연 8인人이 되어야 위 기록과 일치한다. 이 경우 그림을 그린 겸재 정선이 화폭에서 빠졌음을 생각할 수 있으나 단언하기 어렵다.(중략)“ (책정보 교보문고, 알라딘)
또 이춘제 대감이 직접지은 서원아회기를 살펴보면 아회으 모습이 눈에 확연히 그려집니다. 대강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휴관이래 병과 게으름이 상성하여 집 뒤 소원(서원소정)을 들여다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는데,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 작은 모임(소회)을 도모했는데, 귀록 조대감이 소식을 듣고 이르렀다. 그때 소나기가 내려 물이 넘쳐흘러, 개인 후에 올라 서원(소정)에 임하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좆으며 또 연몌連袂하며 시선을 나와 옥류천석에서 배회하는데 귀록이 홀연히 지팡이를 날리며 짚신을 신고 비탈을 타며 산마루를 오른다. 걸음이 빠른 것이 소장小壯에 덜하지 않아 제공이 뒤따라 오르는데 땀이 나고 숨차지 않음이 없었는데 잠깐 사이에 산등성이를 넘고 골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청)풍계의 (원)심암과 (태)고정이 홀연 눈 아래 있다. 이것은 당초 시경에 이르기를 "마침내 절험을 넘었으니 이것은 일찍이 뜻한 바가 아니다."라 한 것과 같다. 마침내(급기) 숲을 뚫고 내려가 시내에 임하여 앉으니 곧 한 줄기 걸린 폭포가 바위 사이로 졸졸 흐른다. 갓끈을 빨고 갓을 씻고 답답한 가슴을 내어 씻어 땀나고 숨찬 것을 다 털어내고 나서 모두 이르기를, "풍원(조현명)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렇게 힘쓸 수 있었겠는가? 오늘 계곡놀이는 실로 평생 으뜸일 것이다."라 하였다.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고,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니 그대로 시화첩 (서원아회첩)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기이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를 돌아보건대, 어려서부터 '시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이 들어서는 또 눈이 높고 손이 낮은 증세(병)가 있어 무릇 시를 짓는데 마음을 두지 않아 친구와 만나고 헤어질 때 시를 주고받는 일에 일절 길을 연 적이 없다. 그런고로 문득 이것으로써 사양하였더니 귀록이 또 '시령'을 어긴 것을 책망한다. 부득이 파계하여 책망을 막기는 하나 참으로 이는 '육담(육두문자)시'라 할 수 있을 뿐이다. 기미(1739)년 여름 서원주인”
어때요, 아회의 정경이 그려지죠? 다음에 이어지는 시가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의 정취를 한 층 돋구어주네요.
"소원의 가회 (기쁘고 즐거운 모임) 우연히 이루어지니 지팡이 들고 짚신 신고 비 걷힌 저녁 산을 소요하네. 선객 (신선)이 번거로움 사양하니 마음 이미 고요하고 구름 산 승경 찾으니 다리 가볍네. 멀리 올라 오늘 저녁 피곤하다 말하지 말게 자랑하며 와서 논 것 (유람한 것) 이 생애 제일 (으뜸). 파함에 임해 정녕 지체하며 뒷기약 두니 장군의 풍치와 사천 노장의 맑은 뜻일세." 한양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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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한양전경(1940~1941), 견본담채, 개인소장
저는 이 그림이 정말 멋지게 보이네요. 와, 저런 곳에서 서울을 직접 바라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이 그림을 보니 정선이 왜 화성으로 불리는지 십분 이해를 하게 되었어요.
'인정향투'책의 '서원아회첩의 재구성' 논문을 읽으면 정말 조선시대 문인들의 풍류와 멋을 한껏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거라 확신합니다. 이런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등산과 탁족을 하고 정자에 앉아 시를 짓는 가회(아름다운 모임), 이런 모임 여러분들도 가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두번째와 세번째 논문인 '퇴우이선생진적첩의 제고찰'과 '소심란 연구의 제문제'는 책정보에 있는 설명으로 마무리 할께요.
퇴우이선생진적첩의 제고찰 “또 하나의 잡음은 사실 일고一考의 가치조차 없는 광견폐狂犬吠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한 인사가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내內의 겸재의 4폭 진경산수 기록화를 임본위작이라 주장했다 한다.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 살펴보니 주장의 근거나 논거를 찾아볼 수 없고 참 허접하기 이를 데 없다. 먼저 이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이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떠한 가전내력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임본위작이라 했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 첩의 꾸며진 상태로 보아 원본그림들을 이 첩에서 떼어내고 임본위작 그림들로 바꾸어 첩 안에 집어넣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진적첩은 본 논고의 앞부분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의 구성편에서 밝혔듯 아무런 수리나 변형된 흔적이 없는 원본 본연의 상태를 간직하고 있다.”(본문내용 중) 현대와 같이 물질적인 가치와 이로움의 중요함이 점점 더 강조되어 가고 있는 현 시점에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내內 퇴계의 친필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 서序> 중 부분의 가르침에 심금의 떨림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중략) 옛날 성인의 가르침에 예禮․ 악樂․ 시詩․ 서書가 모두 있다. 그런데 정자程子와 주자는 이를 칭송하고 기술함에 있어 마침내 논어論語를 가장 학문에 절실한 것으로 삼았으니 그 뜻은 역시 이 때문이었다. 아! 논어 한가지의 한 책으로도 도道에 들어갈 수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여기에 있어 학설을 외우고 (입으로만) 떠들기에 힘쓸 뿐 도道(를)구하기에 마음을 쓰지 않으니 이것은 이익의 꾀임에 빠진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에는 논어의 뜻은 있지만 꾀임에 빠지는 해독은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느끼고 흥기되게 하여, 참으로 알고 실천하도록 하는 데는 이 글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중략)” (이황,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 서序> 중) 인정향투난-소심란 연구의 제문제 “세간에 ‘부작난不作蘭’ 혹은 ‘불이선란不二禪蘭’이라 불리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명칭이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소심란素心蘭’이라 불리어져야 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추사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추사의 고제인 우선 이상적이 그의 문집 <은송당집恩誦堂集>에 이러한 시구를 남긴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知己平生存手墨 素心蘭又歲寒松 “평생 나를 알아주신 수묵이 있으니 ‘소심란’과 ‘세한송’이라.” (오세창 편저,<국역 근역서화징 하>, 시공사, 1999, p. 869; pp. 885-886; 이 <국역 근역서화징>의 해석이 잘못되었다. 이 부분을 “...그 본디 마음은 난초요 또 세한송이다”로 풀이했으나, 이 부분을 “평생 나를 알아주신 수묵이 있으니 ‘소심란’과 ‘세한송’이다”라 풀이해야 마땅하다) 추사께서 돌아가시자 이상적이 눈물을 흘리며 지은 시로 진실된 사제간의 관계를 보여주어 현대에 시사하는 바도 크다 할 수 있다. 또 ‘소심란’의 의미를 알아보면 ‘빈마음의 난, 무념 난’ 등으로 그 풀이가 가능한바,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의 본성이 드러났네’라는 화재와도 부합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吳小山見而豪奪 可笑’라는 문구의 해석도 ‘오소산이 보고 좋아하며 빼앗으려하니 가히 우습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난초를 소산 오규일이 빼앗아갔다는 일화도 잘 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不可有二. 仙客老人’이라 제하신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달준에게 작품해 주었는데 이로써 달준이라는 인물을 다른 뚜렷한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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