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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지 않았어도 첫 문장이 유명해서 아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소설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이제 잘 모르겠다. 삶의 부조리란 인간 개인의 욕구와 사회의 현실에서 오는것이며 이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기본조건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작품내에 많은 상징적 장치가 있고, 불합리한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인 내용들이 깔려있다. 책이 어렵고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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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에는 이방인이 없는 줄 알고 있다가 우연히 찾게 된 제목 '이인'. 처음에는 뭐하러 이름을 바꿨을까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나니 이방인보다 이인이라는 제목이 더 잘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이인'이었고, 그런 다름으로 인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한 채 죽음을 선고받는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그의 행동과 생각은 마치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생각이 들만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인간이었고, 그가 사람을 죽인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사람을 죽였다는 이유보다도 '이인'이라는 이유로 처벌받는 듯한 느낌이다. 짧은 소설속에서 주는 울림은 강렬했고, 이 사회속 공동체 조직의 곳곳에 존재할 이인들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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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남들이 기피하는 건달과도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는 사람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뫼르소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도 마음에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별 것 아니다. 하지만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인간과는 도저히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은 건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원래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거나 떨어져 지낸 기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모자 간의 정이 희석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원래 죽음을 쿨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여도 이상할 게 없다. 바람 때문일 수도 있고 비 때문일 수도 있다. 요컨대 언제 어떤 이유로 그가 나를 향해 총알을 발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도대체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법정에서 그를 변호한 마리나 기타 지인들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낄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인간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지만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를 죽이는 인간은 거의 매일 같이 뉴스나 신문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꽤 중요한 일이었을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태양 때문에 죽였다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다. 가급적이면 마주칠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뫼르소와 다르게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한다. 내가 아무리 싫어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도 그들은 거기 있다. 그들이 말하는 살인의 이유가 태양과 별반 차이가 없는 거라면 사실상 그들을 뫼르소라고 불러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뫼르소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뫼르소는 거기 있다.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나와 같은 도시에서 산다. 어쩌면 한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 지시대명사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몇 안 되는 수업시간의 기억인데 이것과 저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설명이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기에 있고 내가 아는 것이다. 저것은 여기에 없지만 나와 네가 둘 다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너와 네가 둘 다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어로 번역하면 The Thing이 되는데 이 말은 동시에 ‘괴물’로 번역되기도 한다고. 그때까지 내가 알던 괴물은 특촬물에 나오는 괴수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반인반수들이었다. 그것들은 주인공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주인공에 의해 죽거나 추방당함으로써 이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 주인공을 구체적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만약 그 수업시간에 들었던 ‘괴물’과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괴물’이 같은 존재라면, 내가 봤던 특촬물이나 판타지 소설은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그것’들이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없애면서 성장하고 세상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간다는 이야기의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도시를 부수는 괴수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내가 사는 동네에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 산다면 불안해서 어떻게 돌아다니겠는가. 그런 사람 때문에 바깥에 돌아다니지 못하고 집 안에만 있어야 한다면 사실상 그는 도시를 부수는 괴수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소설 속에서 검사가 어떻게든 뫼르소를 사형에 처하려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그가 뫼르소의 유죄를 주장할 때 그 근거를 살인에 두지 않고 어머니의 장례에서 보인 무성의한 태도에 두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직후 해수욕을 하고 여자친구와 자고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게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살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검사는 집요할 정도로 그 점을 파고들고 재판장도 그 점을 유심히 관찰한다. 마치 이 살인 사건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바로 거기 있는 것처럼. 살인을 저질렀으니 그냥 사형에 처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뫼르소가 서 있는 법정은 함무라비 시대의 법정이 아니다. 20세기 프랑스의 법정인 것이다. 여기서는 행위만큼이나 동기가 중요하다. 왜 죽였는지를 알아야만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릴 수가 있다. 그런데 뫼르소는 여기서 “태양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법원의 방청객들은 웃는다. 심지어 변호사까지도 어깨를 들썩거린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웃음은 즐거워서 웃는 것이라기보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너무 진지하지 않게 받아들이기 위해 웃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인간을 진지하게 상대하게 되면 이쪽에서도 뭔가가 이상해져버린다. 거기에는 상식이라든가 현실감각 같은 게 들어갈 여지가 없다. 말 그대로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방청객과는 다르게 검사는 그냥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다. 형을 구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납득할 만한 사유를 뫼르소로부터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사가 만들어낸 논리는 이런 것이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무성의했고 장례를 치른 후에도 해수욕장에 가고 여자와 뒹굴고 코미디 영화를 보며 킬킬거리는,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는 자다. 그리고 그런 자라면 설령 자기와 직접 관계가 없는 치정 사건이라고 해도 거기에 끼어들어 계획적으로 상대를 살해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이런 논리를 통해서 검사가 시도하는 것은 뫼르소를 괴물에서 나쁜 인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인간은 괴물이지만 육친에 대한 정도 없고 불량배와 어울려다니며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은 흔한 범죄자에 속한다. 엄마의 죽음과 살인 사건은 표면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지만 이 백스토리를 들음으로써 사람들은 그를 납득가능한 종류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 없이는 배심원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당연하게도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배심원들이 곧이곧대로 들을 리가 없다. 보통은 뭔가 말할 수 없는 게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적이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사정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여지라는 것을 만듦으로써 단번에 모든 것을 끝장낼 수 업게 브레이크를 건다. 누구라도, 뭔가 찜찜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죽이기로 결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요컨대 검사가 하는 작업은 배심원들의 마음에 채워진 브레이크를 풀고 사형이라는 도로로 그들이 슬슬 굴러가게끔 하는 일이다.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같은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사건의 전모를 모두 밝혀냈을 때 항상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바로 범인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범죄동기를 고백하는 장면이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였는지를 모두 밝혀도 이 ‘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에피소드는 끝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 사람이 절대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죽일 리 없다는 전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다, 라는 게 만화 속 등장인물들은 물론 만화를 보는 독자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이것은 꼭 인간이 반드시 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만은 아니다. 사실 꼭 누군가를 살해하지 않더라도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죽음은 도처에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추락하거나 산에서 미끄러지거나 바다에서 문득 쥐가 났다거나 하는 이유로 죽는 경우는 다반사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의지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는 데는 반드시 의지라는 게 필요하다. 의지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라는 뼈아픈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계발에 대한 열풍은 뜨거웠다.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는 빠지지 않고 자기계발서가 들어갔다. 유튜브에도 누군가의 명언이나 따끔한 일침을 모아놓은 동영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태어난대로 사는 삶, 운동하지 않는 육체, 시간을 계획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다. 계획은 어떤 면에서는 상상에 가깝다.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일로만 계획표를 작성할 때 거기에 있는 것은 지금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달라진 추상적인 자신의 모습이다. 그 각각의 계획이 얼마나 나에게 유효한 것인지 서로 유기적으로 연동되어 있는지 그걸 수행할 컨디션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등은 거기에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단순한 상상의 방이다.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면 성공한다, 이 말은 우리에게 복잡함을 제거한다.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얘기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생을 운동과 공부라는 두 종류의 카테고리 속으로 제한해버리는 것에 가깝다. 거기에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가지 종류의 곤혹과 우연,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빠져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뫼르소와 같은 괴물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런 것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없고 현실에는 뭐만 클리어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그런 관문이나 시험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요컨대 혼돈은 언제나 혼돈인 상태로만 세계와 자기 자신에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을 뫼르소는 보여주고 있다. 사실 괴물이라는 것부터가 그런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우리가 이해하는 자신에 ‘바깥’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검사의 분노에 찬 고발이나 교회신부의 눈물은 바로 그러한 바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최대한 밀폐하기 위한 안간힘에 가깝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뫼르소는 거기에 있고 우리와 세계에는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 없는 바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법률로 강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인간처럼 그저 거기에 새빨갛게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새빨간 것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방인』은 말하자면 그 목소리의 기록이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별로 듣고 싶지 않다. 우리는 나쁜 놈의 목소리는 듣고 싶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그것은 얼마간 안정되고 또 적당히 흔들리고 있는 서핑 보드 위에서 느닷없이 닥쳐온 해일을 볼 때의 심정과 비슷하다. 뫼르소의 목소리, 그 새빨간 것의 목소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심연을 깨우고 우리는 그 심연이 날뛰고 잠잠해지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무력함을 새삼 실감한다. 그리고 새로운 풍경이 열린다. 그 무력해진 자기 자신의 눈에는 모든 게 계획대로 되어 있고 모든 것의 인과관계가 뚜렷하다고 말하는 세상이란 어쩐지 이상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가지런할 리가 없다고. 그렇게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명확하게 존재하는 바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기에 있는 게 전부, 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할머니의 옷을 뒤집어쓴 늑대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어쩐지 속고 있는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럴 때 세상은 아무리 빈틈이 없어보여도, 완벽하게 정리된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그 빈틈없음이, 완벽한 정리가 실은 부조리하다는 걸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이방인』은 일종의 고발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이 고발이 우리를 단지 무력하게만 하거나 혹은 섬뜩하게만 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나와있는 것이 괴물과 괴물을 둘러싼 인간들의 대결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뫼르소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죽음에 임박해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을 터였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엄마에 대해 눈물을 흘릴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뫼르소가 이렇게 말하게 된 이유는 “이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안으로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뫼르소를 보고 거기서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만 뫼르소는 정작 자연으로부터 평화를 느낀다. 만약 뫼르소가 괴물이라면, 세계의 바깥이자 우리 안의 심연이라면 그 심연에도 ‘평화’라는 게 존재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것은 뫼르소가 말한 것처럼 “증오의 함성”으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가령 태양 때문)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적대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는 세계의 개연성과 무관하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하면 증오의 함성으로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얼핏 보기에 도저히 구원의 실마리라고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무언가에서도 구원은 존재한다는 말도 된다. 우리가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 되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이 살인자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 자신을 이해해주는 나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아마 그러한 점이 이 책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뫼르소와 같은 사람과는 별로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에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가급적이면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세상에는 균형이라는 게 필요하고, 설령 내 안에 통제 불가능한 심연이라는 게 확실히 입을 벌리고 있다고 해도 현실에는 내가 통제해야만 하는 구체적인 일들도 있기 때문이다. 알아서 해주겠지, 라는 심정으로 심연에 기대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게 정말 존재한다면 그 통제가 불가능한 심연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이편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순간에도, 세상의 무관심에도, 증오의 함성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 게 정말로 있다면 나도 꽤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25년 7월 5일부터 2025년 7월 7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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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읽어도 난해하다. 한 십년전쯤 읽고 다시 읽어보았는데 우선은 이방인이라는 제목보다 이인이라는 제목이 낯설고 생소했다. 첫 문장이 강렬한 소설이 몇몇 있는데, 안나카레니나와 함께 이 소설도 첫 문장이 유명하다. 엄마가 죽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 조차도 객관적 사실일 뿐인 것처럼 말한다. 문장과 호흡이 매우 짧은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1인칭 시점으로 쓰여있음에도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흘러가고. 그리고 우연치 않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재판과정에서 살인사건 자체나 살인동기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뫼르소가 했던 행동들이 살인사건을 저지를 만한 성격이나 배경을 갖추었다는 근거를 들어 재판이 진행된다는 것이 참 황당하기도 하고 지금의 세태같기도 하고. 이 주인공이 본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이나, 장례식장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이 이 사람이 살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와는 별개의 문제임에도 그것이 마치 살인할 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왜 다들 그렇게 사건을 바라보는 것일까. 어쩌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때 그 사건 하나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근거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지금도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두번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닌 것 같다. 교훈따위는 차치하고, 고전은 그런 매력이 있어서 구입해 두고 몇번씩 읽을 수 있는 가치가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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