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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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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베드로 한중, 향년 사십칠 세' 마지막 12자를 읽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글의 처음부터 시작된 외줄타기식의 불안함이 중간으로 가면서부터는 불안하기가 그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얼마나 더 그의 비참한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하며 가슴 조렸던 그의 행보가 끝이 났기 때문에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어이없는 것인가? 마흔 일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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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베드로 한중, 향년 사십칠 세' 마지막 12자를 읽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글의 처음부터 시작된 외줄타기식의 불안함이 중간으로 가면서부터는 불안하기가 그지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얼마나 더 그의 비참한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하며 가슴 조렸던 그의 행보가 끝이 났기 때문에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어이없는 것인가? 마흔 일곱해를 사는 동안 사랑하는 여인과의 삶이 질곡으로 이어지는 한 남자의 삶. 처음에 그가 사리댁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하는 장면에서 나는 혀를 차야 했다. '다 늙은 남자가, 손자까지 본 남자가, 아내가 병들어 있는 남자가, 이런 남자가 임자있는 남의 여자를 꼬셔서 도망을 치다니' 한 마디로 법리나 체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그의 행각이 화가 나서, 작가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아는 한 작가는 젊은 시절에도 사랑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이념'이라고 짧게 표현하기 쉬울 정도로 작가의 글은 아픈 역사속에서 헤엄쳤는데, 이제 와서 야반도주하는 다 늙은 남자의 사랑이야기라니. 그러나 화전촌에서의 짧은 행복이 끝이 나고 유랑자처럼 떠도는 그와 사리댁을 보니 연민이 생겨났다. 때로는 타인에 의해 헤어지기도 하면서 성모를 버렸다는 죄책감을 마음속에 늘 가지고 살아야 하는 고통. 그러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끝까지 성모를 거부하는 이들의 사랑과 삶. 그랬기에 이들에게 행복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리댁의 서글픈 형상을 보노라면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버렸는데 좀 행복했으면'하는 기원을 하기도 했다. 결국 사리댁은 탄광촌의 주막 부엌에서 일하는 신세까지 되고, 원두막이 거처가 되는 극한 상황까지 가는 두 남녀의 행로는 비참하기 그지없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리댁은 자신의 임신이, 천주님께 저지른 업보에서 풀려나게 하는 것이라며 위안을 삼아 종교를 등진 이의 갈등을 엿보게 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자식을 낳고 천주님을 모시며 잘 사는 것으로 끝이 날 줄 믿었지만, 그런 그들에게 고생끝의 낙은 없었다. 만삭의 아내는 실명을 하고, 그는 잠시나마 배척당했던 친구의 집에서 마지막을 맞게 되는 것이다. '見危授命과 私通이 어찌 같겠느냐'는 질타섞은 친구의 말에 '끝까지 한 여자를 목숨을 다해 사랑했노라'는 그의 말은 그래서 더 서글펐다. 그는 결국 떠난다. 자신이 사랑을 떳떳하게 자식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했지만, 거부당하면서도 그는 편안하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죽은 자는 연민이다. 그래서 그 또한 내게는 연민이다. 그토록 바다 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여인을 옆에 두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노라'며 죽어야 했던 사람, 서 베드로. 개화기의 어수선한 사회속에서 불혹을 훌쩍 넘긴 한 남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이며, 사랑은 또 무엇인지?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이것에 대한 인간의 갈등을 보여준 셈이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이 가졌던 종교와,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 그 둘을 적절히 조화시키지 못한 탓에 그들의 삶이 죽음과 실명으로 끝이 났지만, 그들은 잠시나마 행복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해 주는 밥을 먹고, 사랑하는 남정네의 노래 가락을 들으면서. 그래서 나는 깨닫는다. 나쁘다고, 세상의 법리를 어겼다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입장을 들여다 볼 줄 아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비록 그들의 삶은 객관적인 잣대에서는 불행했지만, 그들에게는 행복이었다고. 오늘 밤, 내 삶을 돌아보며 말한다. 우리는 모두 얼마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
k***7 2001.12.2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철부지 어른들의 잘못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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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읽고 이 작품이 내게 아니 독자들에게 주려고 했던 메세지는 무엇일까? 또 왜 이런 작품에 이런 제목붙였는가, 또 주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했었다. 이런 복합적인 관점에서 내 나름대로의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보면, 이 작품은 종교적인 측면과 함께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글의 주제를 동시에 가감하여 이해치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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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읽고 이 작품이 내게 아니 독자들에게 주려고 했던 메세지는 무엇일까? 또 왜 이런 작품에 이런 제목붙였는가, 또 주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민했었다. 이런 복합적인 관점에서 내 나름대로의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보면, 이 작품은 종교적인 측면과 함께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글의 주제를 동시에 가감하여 이해치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힘든 작품이라 여겼으며 특히 종교를 떼어놓고 해석을 하면 3류 소설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은 그런 작품이라 판단하였다. 얼핏 읽어보면 1800년대 후반 신사조가 이 땅에 들어오며 발생한 통속 연애 소설같이 느껴질지 모르나, 성경의 주요대목을 밑바탕에 깔고 이야기는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 문물과 신흥종교가 들어오면서 계급과 문화, 사회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갔다. 이와중에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정신적 혼란기가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소설이 주는 종교적 교훈과는 달리 소설 그자체가 갖는 의미성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작가와 작품이 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자. 역시 책의 제목과 같이 남녀간의 신분과 사회관념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아닌가 여겨진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히트를쳐 영화화 되고 있는 일본 소설인‘실락원’이라든가 중년 미국인들의 가슴을 적셨다는 소설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류와 같은 주제로 이 줄거리를 엮어갔다면 정말로 가슴아픈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통속적인 사랑보다는 은은과 다소곳 함이 우리민족의 기본정서임을 감안해볼 때 이 작품을 위에서 언급한 외국의 두가지 소설 전개방식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갔다면 파격 그자체가 될 뻔하였으나 이 작품이 주는 이미지나 맛은‘실락원’과‘매디슨카운티의 다리’와는 다른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나는 솔직히 이 작품의 작가가 너무 마음에 안든다. 무엇 보다‘김원일’씨의 문체에 힘이 없고, 장단 완급이 없어서 이다.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러하다. 평범한 냇물처럼 흐르기만 할 뿐 시냇물 처럼 졸졸 거림도, 큰 강물처럼 고요함도 없는 그저 평범히 마냥 의미없는 나열식으로 흐르는 그런 내용으로만 일관 되고 있어 너무 갑갑할 뿐이다. 차라리 내용상 서 한중(베드로)를 할빈당과 함께 산중에 남겨놓고 부하들을 시켜 사리댁을 찾아오게 한 후 산중에서 같이 살면 - 어차피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타 곳은 참봉이 풀어놓은 사람들로 득실 거릴 바에는 - 거기서 참봉이 풀어놓은 사냥꾼들에게 쫏기며 옹졸이지 않고 살수 있으며 또한 사리댁이 병으로 죽으며 남겨 놓을 자식을 바라보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도망가고 산속에 숨어있다 잡으러와 도망가고 또 어쩌구 저쩌구 참으로 답답한 주인공의 행동이라 여겨진다. 좀 더 활기찬 내용과 박력있는 사건의 전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또 주인공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진지한 대화없이 가끔씩 주인공(서 한중)이 사랑에 대해 독백처럼 자조거리는 내용은 정말로 힘빠지는 대목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과 맞지 않는 내용이라 여겨지는 대목은 사리댁이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에 주인공이 취하는 태도이다. 이 건 완전히 상식이하의 행동이라 여겨진다. 여인을 꼬셔서 야반도주해 그 사랑의 결과로 아이를 가졌음에도 반겨하는 기색은 커녕 부담으로 여기는 행동은 이 책의 제목이나 주제와 동 떨어진 느낌을 주고 있다 하겠다. 사리댁도 그렇다. 남자가 자신이 아이 가졌음을 알려었도 기뻐하지 않는 기색을 보이면 관계를 재정립한다든가 아니면 다그쳐서라도 관계를 재정리 했어야 하는데, 그냥 맹하니 남자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대목이라 여겨진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의 씨를 잉태했음에도 기뻐하지 않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으며, 고개마루에서 할빈당에게 잡혀갈 때도 - 처음에는 사리댁이 잡혀가나 나중에 자기가 끌려간다 - 적극적으로 사리댁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은 서 한중이라는 인간의 저의를 의심케하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모든 정황을 놓고 볼 때 이 작품은 종교적인 측면으로 이해치 않고 단순한 통속 연애소설로 이해를 하다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작품이라 말하고 싶고, 야반도주나 사회 통념상 용인되지 않는 사랑을 하려면 짧게 그리고 확끈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륜을 조장하려는 것은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 작품 전체를 놓고 볼 때 빼어난 수작은 아니라 여기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줄거리의 흐름을 통해 알 수 는 있겠으나 그리 강렬하지도 그리 아름답지도 또한 그리 애석하지도 또한 그리 애절하지도 않은 철부지 어른들의 사랑놀음을 그린 통속적인 소설도 - 진짜 통속소설이라면 좀 더 확끈한 문체나 묘사등이 있어야 하지만 - 못되는 평범작이었다.
n****e 1999.10.0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