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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미래 /저자 변현단/출판 들녘/발매 2011.06.28.
모종을 하는 이유는 '수확량을 늘리기 위한 욕심' 때문이다. 토종이 수확량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생육기간 내내 먹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훨씬 더 많다. 한 번에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을 따름이다. 자급하는 생활에서는 토종만큼 좋은 게 없다.
P169~172 농사는 자연이고 자유다. 생태의 기본이 자유 아닌가? 자유를 찾는 사람이라면 생태농을 시작하자. 유기적 순환 구조로 무장한 사유 체계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라. 하루에도 몇 명씩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자살하고, 돈 때문에 자살하고, 명예 때문에 죽는 것은 알고 보면 모두 소유욕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인간들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유기적 순환 체계에 익숙해지면 삶의 방식과 사고가 달라진다. 행복에 정답이 없다는 것, 길이 하나밖에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자기를 바라보고, 내 안에 숨겨진 이면들을 잘 읽어낼 필요가 있다. 농사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수양에 도움이 된다. 식물을 보면서, 자연을 바라보면서 무경운 직파 재배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자연의 흐름과 일치하고 수양을 가능하게 하는 농사를 지으려면 첫째, 농가의 가난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계 사용으로 오는 이익과 편리함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최소한 도구만 사용하면 농사가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둘째, 안일함을 버리고 약간의 게으름을 부려야 한다. 급한 마음에 하루가 길세라 땅을 뒤집고 파는 거승ㄴ 옳지 않다. 농부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셋째, 당장의 이익을 버려라.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비료를 남용하고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황금알을 더 꺼내기 위해 마법의 닭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귀농인들은 대부분 집부터 짓는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집은 시간을 두고 자신이 필요한 때 짓는 게 옳다. 농가 주택은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고 난 뒤, 집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없다. 귀농하자마자 집부터 짓는 사람은 대개 욕심 때문에 움직인다. 집은 자신의 옷처럼 편안하게 몸에 잘 맞아야 한다. 사람을 초대하거나 잔치를 벌이려고 짓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생각 없이 집부터 크게 지은 사람들은 자중에 보면 꼭 후회한다. 치우고 관리하느라 귀농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린다. 집이 생활의 전부가 되면 귀농한 보람이 없다.
문만 열면 자연인데 굳이 넓은 거실을 만들어 놓고 앉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시골집을 구하라. 그리고 용도에 맞게, 취향에 어울리게 요모조모 뜯어고치면서 살아라. 노인들이 헌집을 어떻게 고치면서 살아가는지를 잘 보아라. 시골 살이의 참맛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텃밭도 그냥 텃밭이 아니다. 그 안에 정원의 개념도 들어가 있다. 고추 옆에는 파가 있고, 그 옆에는 샐비어 꽃이 있다. 작물만 심는 게 아니라 꽃도 같이 심는다. 부추 하나에서도 꽃도 보고 부추도 먹는다. 조그만 텃밭에 좋아하는 꽃과 먹을거리가 가득한 것이다.
어르신들의 삶에서는 버리는 게 없다. 깻잎이 노랗게 되면 소금물에 담가 장아찌를 해 먹고, 방에서 지네가 나오면 잡아서 말려두었다가 약으로 쓴다. 창고 안에 깻대를 가지런히 놓았다가 나중에 태워서 재를 이용한다. 살균할 때도 쓰고, 비료로도 쓰고, 비누 대용으로도 사용한다. 예전엔 놋그릇을 닦을 때 짚에 재를 묻혀 썼다. 싹싹 문지르면 반짝반짝 윤이 났다.
P186~187 산업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소비한다. 생산과 소비가 한 몸인 사회다. 그래야만 생활이 가능하다. 손수 만드는 것은 차지하고,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조차 직접 사서 쓰지 못한다. 반드시 시장이라는 중간 단계를 거쳐야만 사용할 수 있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시장에서 생활필수품을 구매한다. 노동력을 팔아서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소비한다. 결국 소비하기 위해 노동을 파는 셈이다.
돈은 생명 유지를 위한 기본 수단이다. 하지만 자신이 먹고 입고 사용하는 것들 모두를 자연에서 얻었던 농경 사회의 모습을 상상하면 꼭 그렇지만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농경 사회에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이용해 무엇이든 자급했다. 잉여물이 생기면 꼭 필요한 것과 바꾸기 위해 상인에게 팔았다. 시골장터를 떠올리면 된다. 시장은 잉여물을 다른 자재로 바꾸기 위한 곳이다. 자급이 기본이었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일이 없었다. 과소비도 일어나지 않았다. 쓰레기까지 알뜰하게 재사용했다. 최소한의 소비, 검소한 생활,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순환이 기본인 생활이었다.
P209~210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연에 종속돼라. 자연의 힘을 빌려 최소한의 욕심만 만족시키면서 살아라. 인위적인 거, 파괴적인 것, 단절적인 것에 의존하지 말고, 자연적인 것, 생산적인 것, 영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라. 자연과 하나가 될 때 인간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고, 집을 짓고, 정신과 육체를 재생산하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하라. 이 체제로부터 해방된 생활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다. 자연의 생산이 목적이 아닌 나의 삶을 위해서.
《소박한 미래(변현단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하면서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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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미래》에서 발췌하고 필사한 내용입니다.
현대 생활의 근간은 석유 에너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약회사에서 만드는 약도 그렇다. 아스피린은 버드나무 껍질에 있는 살리실산을 추출하여 만들었지만 지금은 화학 분해를 통해 석유에서 추출된 것으로 만든다. 전자 의료기구, 인공 심장 등 생명에 연결된 많은 것들이 값싼 석유 추출물로 이루어져 있다.
석유 집중화는 농업에도 해당된다. 현대 농업은 석유로 만든 비닐을 애용한다. 비닐하우스에서 계절 없이 채소를 재배하고, 제초를 하지 않으려고 밭에 비닐을 깐다. 석유로 움직이는 트랙터로 밭을 갈아 화학비료를 넣고, 농약을 뿌려 벌레를 몰살한 뒤 수확 기계를 이용해서 쌀을 거둬들인다. 농업 과정 자체가 모두 석유로 움직이는 셈이다. 아무리 유기농업을 한다고 외쳐도 석유가 농업에 투입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산업 기반은 대부분 석유 자원으로 이루어졌다. 만일 심각한 유가 변동이 일어나거나 피크오일이 닥친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1979년 미국에서는 '4~5개월 동안 석유가 부족하게 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총을 쏘고 폭력을 행사했다. 우유가 없으면 물을 먹으면 되지만 석유에는 대체품이 없다. 우리는 이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석유는 인류에게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준 거의 신적인 존재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 연료는 인류에게는 선물과 같았다. 지금은 석유가 없는 생활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산업 문명 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 빈곤에 시달렸다. 국가별 불평등은 물론 내부의 불평등 구조도 심화되었다. 18세기 초 독일 쾰른의 인구 5만 가운데 2만 명은 거지였다. 1815년까디만 해도 스웨덴 인구의 절반이 땅 없는 노동자나 거지였다.
석유 시대 100년 동안 인간은 땅 속 깊은 곳을 파서 먹고 살았다.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고, 지금도 그 전쟁은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생활양식은 변하지 않는다. 1859년 이래 석유 산업을 지배하던 미국은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크게 휘청거린다. 미국의 석유 보유량은 겨우 3% 정도이지만, 소비량은 전체 생산량의 25%에 달한다. 석유에 중독된 미국의 생활 방식은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반전 운동가조차 쉽사리 자기들의 생활 방식을 바꾸지 못 한다.
전통 농업은 내가 먹을 거, 가족이 자급하는 데 의미를 둔 농업이었다. 사회·역사적 배경에서 보면 전통 농법이 그리 거창한 이념이 나리다. 자신이 먹을 것, 안전한 먹을거리를 추구하는 소농이 바로 전통 농업이다. 내가 먹을 것이니 다양하게 짓고, 땅이 작으니 집약적으로 농사짓고, 자연히 섞어짓기와 돌려짓기를 한다. 무투입인가, 투입인가의 문제는 당연한 순환 논리로 생각했다.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사람과 가축의 오물, 자연의 부산물 등을 모두 땅으로 돌렸다. 그뿐인가? 자연 부산물로 집도 지었다. 볏짚을 사용한 초가집, 흙을 사용한 토담집, 돌을 재료로 쓴 돌집 등이다. 또 닥나무 껍질로는 종이를 만들고, 삼이나 목화를 재배해 의복을 지어 입었다. 식의주를 모두 농사의 생산물과 자연의 부산물로 해결한 것이다.
지금 같으면 내다버릴 쓰레기도 거의 다 활용했다. 조껍데기술, 수수로 만든 고량주, 피로 담근 술, 콩 깍지로 담근 간장 등이다. 잡초도 상에 올랐고 약재로도 사용했다. 아이들도 자연의 부산물을 가지고 놀았다.돌로 망치기와 공기를 했고, 나무를 깎아 새총도 만들었다. 이처럼 진정한 전통 농법은 생활의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어 쓰고 자연으로 돌리는 농업이라 할 수 있다.
할머니들이 하던 방식을 떠올려 보라. 이른 새벽 4시부터 일어나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지 않았던가? 인위적인 행동이므로 노동이 투여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머릿속에서 사육과 재배라는 개념을 없앤다면 최소의 노동만을 가지고 일하고 먹고 살 수 있다. 이게 농사다.
농사는 자연이고 자유다. 생태의 기본이 자유 아닌가? 자유를 찾는 사람이라면 생태농을 시작하라. 유기적 순환 구조로 무장한 사유 체계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라. 하루에도 몇 명씩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자살하고, 돈 때문에 자살하고, 명예 때문에 죽는 것은 알고 보면 모두 소유욕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인간들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유기적 순환 체계에 익숙해지면 삶의 방식과 사고가 달라지낟. 행복에 정답이 없다는 것, 길이 하나밖에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자기를 바라보고, 내 안에 숨겨진 이면들을 잘 읽어낼 필요가 있다. 농사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수양에 도움이 된다. 식물을 보면서,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지만 농사를 지을 때 화학비료를 쓰거나 농약 사용을 먼저 배운다면 절대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의 흐름과 일치하고 수양을 가능하게 하는 농사를 지으려면 첫째, 농가의 가난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계 사용으로 오는 이익과 편리함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최소한 도구만 사용하면 농사가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둘째, 안일함을 버리고 약간의 게으름을 부려야 한다. 급한 마음에 하루가 길세라 땅을 뒤집고 파는 것은 옳지 않다. 농부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셋째, 당장의 이익을 버려라. 눈앞의 이익에 사료잡혀 비료를 남용하고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황금알을 더 꺼내기 위해 마법의 닭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도시 사람들이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해 평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귀농인들도 대부분 집부터 짓는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집은 시간을 두고 자신이 필요한 때 짓는 게 옳다. 아무리 미리 계획을 세운다 해도 시골에서 살 때와 도시는 전혀 다르다.
귀농하자마자 집부터 짓는 사람은 대개 욕심 때문에 움직인다. 집은 자신의 옷처럼 편안하고 몸에 잘 맞아야 한다. 사람을 초대하거나 잔치를 벌이려고 짓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생각없이 집부터 크게 지은 사람들은 나중에 꼭 후회한다. 치우고 관리하느라 귀농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린다. 집이 생활의 전부가 되면 귀농한 보람이 없다. 시골에서는 실내를 크게 만들 이유가 없다. 마당에 우물이나 수도가 있다면 투명한 아크릴로 사각 창고를 만들어 씌우면 그만이다. 그러면 미가 오나 눈이 와도 씻고 빨래하는 데 지장이 없다. 방한이 안된다 싶으면 처마 밑에 비닐을 치거나 아크릴로 둘러라. 문만 열면 자연인데 굳이 넓은 거실을 만들어놓고 앉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시골집을 구하라. 그리고 용도에 맞게, 취향에 어울리게, 요모조모 뜯어 고치면서 살아라. 노인들이 헌집을 어떻게 고치면서 살아가는지를 잘 보아라. 시골 살이의 참맛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어르신들의 삶에서는 버리는 게 없다. 깻잎이 노랗게 되면 소금물에 담가 장아찌를 해 먹고, 방에서 지네가 나오면 잡아서 말려두었다가 약으로 쓴다. 창고 안에 깻대를 가지런히 놓았다가 나중에 태워서 재를 이용한다. 살균할 때도 쓰고, 비료로도 쓰고, 비누 대용으로도 사용한다. 예전엔 놋그릇을 닦을 때 짚에 재를 묻혀 썼다. 싹싹 문지르면 반짝반짝 윤이 났다.
텃밭도 그냥 텃밭이 아니다. 그 안에 정원의 개념도 들어가 있다. 고추 옆에는 파가 있고, 그 옆에는 샐비어 꽃이 있다. 작물만 심는 게 아니라 꽃도 같이 심는다. 부추 하나에서도 꽃도 보고 부추도 먹는다. 조그만 텃밭에 좋아하는 꽃과 먹을거리가 가득한 것이다.
선조들은 작은 것 하나도 지나치지 않았다. 퇴비더미에도 파와 상추를 심었고, 짜투리 땅에 찬거리를 심고 꽃을 심었다.
요즘도 시골에 가면 담 아래 짜투리 땅이나 시멘트가 깔린 동네 길에서 알뜰한 농사의 현장을 볼 수 있다. 이른바 할머니들의 도시농업이다. 그뿐인가? 비료 부대나 함지박에 고추도 심는다. 무엇 하나 버리지 않는 것, 농사와 시골 살림의 지혜는 이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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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67 아름다운 앞날을 바라려면 ― 소박한 미래 변현단 글 들녘 펴냄, 2011.6.28. 아름다운 앞날을 바라려면 스스로 아름답게 새 하루를 맞이해야 합니다. 날마다 아침에 새롭게 꿈을 짓고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아름다움은 어느 날 짠 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스스로 날마다 차근차근 일구고 가꾸어 누리는 삶입니다. 쳇바퀴를 돌면서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가둔 쳇바퀴를 벗은 뒤, 스스로 새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되풀이하는 똑같은 일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는 이야기가 되도록 스스로 바꾸어야 합니다. 말로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스스로 바꾸면 스스로 즐겁거든요. 스스로 안 바꾸기에 스스로 안 즐겁습니다. 스스로 하면 되는 일이기에 남이 돕지 못하고, 스스로 하면 되는 일인 만큼 스스로 하는 동안 내 이웃과 동무도 즐겁게 배웁니다. .. 아파트에 늘어선 음식 쓰레기통을 열어 보라. 도저히 사료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뿐이다. 화학 세제로 설거지를 하고 난 뒤 걸러지는 음식물 쓰레기여서 그 안에는 화학 물질이 분해되지 않은 채 잔존한다 … ‘국민의 건강’은 언제나 핑계였을 뿐이다. 건강 구호가 2010년에는 ‘국민 건강을 위해 쌀 소비를 권장한다’로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문제는 ‘건강’이 아니라 소비 진작이었다. 정부 주도로 행해지는 일련의 식문화 정책 배후에는 반드시 기업의 이익이 도사리고 있다 .. (16, 20쪽) 그런데, 무엇을 바꿀까요. 어떤 삶이 아름다울까요. 무엇을 어떻게 바꿀까요. 참답게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학교나 사회에서 아름다움을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일이 있을까요. 교과서나 방송에서 아름다움을 알려주거나 이야기하는 때가 있을까요. 대통령이 아름다움을 말한 적이 있을까요. 동사무소나 면사무소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살기에 누구나 아름다운 삶이 되지는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자가용을 씽씽 몰거나 농약을 펑펑 쓴다면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사니까 모두 안 아름다운 삶이 되지는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더라도 마당이나 텃밭을 일굴 수 있다면, 마을을 돌보고 이웃과 어깨동무할 수 있다면, 두레와 품앗이를 도시에서도 넉넉히 누린다면, 누구라도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갑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시골에서는 두레와 품앗이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마늘밭에서 일을 돕는 이웃은 있으나, 다들 기계를 써서 논일과 밭일을 하니, 차츰차츰 두레도 품앗이도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 농부들의 판매권을 박탈하고 종자부터 생산 전 과정을 간섭함으로써 농부를 기업의 하청 노동자로 만들거나 대기업의 공장식 농사를 담당하는 농업노동자로 만드는 것이다 … 가공 식품을 먹지 않으면 곡물가 급등에 대한 우려를 떨쳐도 된다. 사실 한국식 밥상에는 가공 식품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산업화와 기업화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다. 그리고 내 손으로 식의주를 해결하는 생활 구조로 돌아가야 한다 … 어쩌면 우리는 고기를 권하면서 폭력을 조장하는, 저급한 육류 문화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26, 47, 56, 86∼87쪽) 우리 사회는 어디에서나 겨루라고 내몹니다. 서로 겨루어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도록 내몹니다. 서로 돕는 길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성적 숫자에 따라 등수와 등급을 매기는 학교입니다. 함께 나누며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는 학교가 아니라, 더 이름난 대학교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아이들을 가르는 학교입니다. 도시에서는 ㅅㄱㅇ이라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 이름을 걸개천에 큼지막하게 써서 내겁니다. 시골에서는 아무 대학교라도 들어가면 아이들 이름을 걸개천에 큼지막하게 써서 내겁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학교란 자취를 감춥니다. 스스로 삶을 가꾸는 길을 보여주려는 학교란 태어나지 못합니다. 오직 도시로 가서 오직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고는 오직 돈만 벌라는 학교교육입니다. 변현단 님이 쓴 《소박한 미래》(들녘,2011)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변현단 님은 ‘시골살이 생각’을 책 하나로 풀어냅니다. 인문도 철학도 교육도 사상도,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책 하나로 보여줍니다. 도시에서 떠드는 인문이나 철학이 아닌, 강단이나 제도권에서 외치는 교육이나 사상이 아닌, 몸소 흙을 만지고 풀과 나무와 이웃으로 지내는 삶에서 ‘생각’을 끄집어 내어 나누려 합니다. 참말 그렇지요. 모든 생각은 흙에서 태어납니다. 모든 슬기는 풀과 나무에서 태어납니다. 모든 사랑은 숲에서 태어납니다. 흙과 풀과 나무와 숲이 아니라면, 생각과 슬기와 사랑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흙과 풀과 나무와 숲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요. 바로 우리 마음에서 태어납니다. ..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바빠 죽겠다’를 입에 달고 산다. 시간이 부족하다면서 다른 데서 시간을 아낀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모두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시간이나 먹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들이다 … 전통 농법이 그리 거창한 이념이 아니다. 자신이 먹을 것, 안전한 먹을거리를 추구하는 소농이 바로 전통 농업이다. 내가 먹을 것이니 다양하게 짓고, 땅이 작으니 집약적으로 농사짓고, 자연히 섞어짓기와 돌려짓기를 한다 .. (78, 145쪽) 스스로 아름다우면서 따사로운 마음으로 오순도순 지내는 마을이 아름다운 숲입니다. 툭탁툭탁 치고받으면서 이웃조차 없이 밟고 올라서기만 하는 도시에 널따란 공원을 큰돈 들여 지은들 아름다운 빛이 흐르지 못합니다. 그래도, 도시 한복판에 숲이 있다면, 돈으로 만든 억지스러운 숲이라도 있다면, 이 숲에 깃들어 마음을 쉬고 몸을 달랠 테지요. 한국 사회를 살펴봅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인천이든 대전이든 광주이든 울산이든 어디메이든, 도시 한복판에 숲이 있나요? 도시 한복판에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없는 숲이 있나요? 도시 한복판에 오직 두 다리나 자전거로 오갈 수만 있는 숲이 있나요? 맨발로 흙과 풀을 밟으면서 맨손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나무가 자라는 숲이 있나요? 아파트 꽃밭에도 나무는 있지만, 농약을 엄청나게 뿌립니다. 아파트 꽃밭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살구알이나 감알이나 능금알이 맺는다면, 이 열매를 옷자락에 슥슥 문지른 뒤 곧장 입으로 베어서 먹어도 될까요? 도시마다 많은 커다란 가게에 그득그득 쌓인 열매나 푸성귀는 얼마나 정갈하거나 믿음직하거나 먹을 만할까요? 왜 우리는 아름답고 깨끗한 밥을 안 먹는 삶을 그대로 이을까요? 왜 우리는 안 아름답고 안 깨끗한 밥을 먹는 데에 그토록 많은 돈과 품과 겨를을 들일까요? .. 도시 문명으로 인한 기후 온난화로 삶이 피폐해졌는데도 그것을 도시화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 한다. 오히려 자신의 터전에 들어와 교육을 빌미로 전통과 자연을 잠식하는 도시민들을 동경한다. 그들은 도시에서 사는 것을 ‘가난의 극복’이자 ‘자신들의 목표’로 설정하게끔 교육받는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 화살을 돌리려면 먼저 자신의 임금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소비를 포기하고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 도시의 권력자가 된 일부 계층은 도시에서 살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멀리 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와 정치를 조작하기 시작한다 .. (165, 195, 198쪽) 변현단 님은 《소박한 미래》라는 책에서 ‘수수한 삶’이 가장 아름다운 우리 앞날이 될 수 있다고 밝힙니다. 다만, 《소박한 미래》라는 책에 쓰인 말이 쉽지는 않습니다. 변현단 님은 흙을 만지면서 살지만, 이 책에 쓰인 말은 ‘흙내음이 나는 말’은 아닙니다. 도시에서 학문을 하거나 책을 내거나 강의를 하는 지식인들과 똑같은 말입니다. 흙을 말하는 책이지만 흙내음이 나지는 않습니다. 풀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소박한 미래》라는 책에서 흐르는 글은 ‘풀내음이 나는 글’은 아닙니다. 인문 지식과 철학 지식으로 가득한 글입니다. 이 책에 깃든 이야기는 알차지만, 정작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습니다. 먼 옛날부터 시골에서 살며 ‘글을 모르던 사람’이 쓰던 말하고는 많이 동떨어졌어요. 글을 몰랐다 하더라도 삶으로 삶을 알고 삶으로 삶을 사랑하던 시골사람들 넋과 숨결까지는 건드리지는 못합니다. 다국적기업과 유전자조작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잘 밝히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여느 수수한 시골 할매와 할배가 알아듣도록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도시에 있는 ‘지식 있는 사람’이 읽고 알아들을 만하게 글을 씁니다. 아무래도, 도시에 있는 이웃들이 무엇인가 깨달아 도시살이를 바꿀 수 있기를 바라는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도시에 있는 이웃들이 이제 도시를 떠나거나 버릴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려는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여름에는 여름내음을 풀 한 포기에서 느끼고, 가을에는 가을내음을 나무 한 그루에서 느끼며, 겨울에는 겨울내음을 햇살 한 조각에서 느끼는 이웃이 차츰 늘어나기를 빕니다. 온누리 모든 사람들이 봄에는 봄내음을 꽃 한 송이에서 느낄 수 있기를 빕니다. 4347.8.2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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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회로의 전환은 과거 농경사회를 재현하는 게 아니다. 농사회가 가진 자연관과 사유방식, 생활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다.
자급자족 사회를 위한 이야기다. 뒤표지에 나온거처럼 과거 농경사회로 돌아가자는 내용은 아니다.
지난 몇년동안 일어난 자연재해, 구제역, 조류독감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에너지고갈, 식량위기 등을 고려하여 농사회가 가진 자연관, 생활자세, 사유방식 등으로 돌아가자는 내용이다.
보다 많은 육고기, 질 좋은 식품을 개발, 사육하기 위해서 기업형 농축업을 지향해왔다. 태어나서 고기로 팔려가기까지 몇년동안 한 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가축들은 살아가게 된다. 채 몇미터 움직이도 못하고 먹고 자면서 지낸다. 또한 제때 치우지 못한 분뇨 등은 환경을 오염시켜 가축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오염시킨다. 운동도 못하고 더러운 환경에서 공장에서 찍어온 사료들을 먹으면서 면역력이 낮아진 가축들은 병들게 되는 일이 잦아진다.
이 밖에도 석유와 관련되어 에너지 고갈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석유는 피크오일을 지나 점점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대체에너지는 아직 석유를 대체하기가 어렵다. 식량 역시 위기에 빠진다. 우리가 육식을 먹기 위해서 사육에 들어가는 식량은 육식을 먹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사육에 소모한다.
지금의 생활방식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위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만 남게 된다.
이를 대비하여 자연을 벗삼아서 자연에 속해서 살아가는 소박한 미래를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는 거 같다. 물론 아직은 꿈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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