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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이니 인문학의 부흥이니 최근 인문서적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종종 눈에 띈다. 나는 인문서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인문서적을 읽는 분들을 존경할 뿐이다. 베스트 셀러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인문서적들 조차 읽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하지만 요즈음 인문서적을 읽는다. 베스트셀러가 아닌 그냥 서점 한귀퉁이를 차지 하고 있는 이름 없는 인문서적을 선호한다. 그리고 어렵게 쓰여진 책은 사절이다. 복잡한 마르크시즘이나 푸코, 들뢰즈,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인문학자들의 서적은 저~얼대 읽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은 제목부터 반가운 불온한 인문학은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아 선택하게 되었는데 평범하지만 평범함을 고수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 다 베스트셀러를 읽을때 책더미에서 버려진 책을 읽는 불온한 나, 같았다. 하지만 이 <불온한 인문학>역시 좀 어렵다. 왜 인문학자들은 이토록 어렵고 복잡한 것일까? 난 복잡하고 어려운 책은 질색데...ㅠ.ㅠ 하지만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어려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이 책은 불온한 인문학을 외치는 수유너머 + 의 연구원 여섯명이 공동 집필하였다.인문학의 역사를 보면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인문학의 분야로는 인간의 역사, 고전, 언어, 법, 문학, 철학, 종교, 예술 등이 있다. 그야말로 방대한 분야이다. 이런 인문학이 2006년까지는 침체기를 걷다가 최근에 와서 부활한 것으로 보는 것은 많은 언론매체에서 CEO들이 인문서적을 강연하고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재벌남 김주원이 인문서적을 읽는 모습으로 증명이라도 하듯이 지금은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의 강좌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그럼 희망을 말하는 인문학과 불온한 인문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문학- 장치는 기존의 사유 규칙, 지적 작업을 규제하는 질서에 순응하는 주체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장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배적인 가치 질서에 순응할 뿐인 장치로서 안온한 인문학을 가져온 현재의 인문학 즉 장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 공부가 평온하고 안온한 삶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삶을 뒤흔드는 위험한 행위이자 사유의 활동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문학-장치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는 앎과 대결하는 지적 투쟁, 그러한 앎이 주조되는 암묵적 전제와 규칙들을 와해시키는 사유의 폭력이 불온한 인문학이다.
수유너머+를 이런 불온한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 대중속으로 스며들기를 원하고 있다. 행동하는 철학을 위해 그들이 내건 이 불온한 인문학은 21세기의 인문학은 '인간'을 해체하는 앎의 실천이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인문학의 고유한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 그 물음이 인간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문에 부치는 질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는 장애인,재소자, 탈성매매 여성, 오국인 노동자, 노숙인 , 철거민등 사회의 소외계층에 있는 인간의 처지에 직면하게 될때 "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근대적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그런 의문이 제기되는 소외된 계층의 현장에서 소외계층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인문학이 오늘날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침체기를 거쳐서 인문학의 부활이라고 명명되어지는 지금의 시기에서 나아가 불온한 인문학을 외쳐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쉽게 말하면 소외계층을 만들어낸 사회 자체를 일깨워야 하는, 즉 자신을 구속하는 시대와 대결하는 그 '불온함' 속에서 그저 안온함만을 추구한 인문학이기 보다 안온함의 껍질을 깨고 비로소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는 < 불온한 인문학>을 외쳐야 할 시기인 것이다. 남이 다 예라고 할 때 아니오를 외치는 이 불온한 인문학이 너무도 반가운 사람이다.인간의 본질을 연구하는 이 인문학자들이 외치는 불온한 인문학에 대한 시도가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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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은 여섯명의 저자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어떠한 방법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제시한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인문학적 사유에 저자의 견해를 더해 가볍게 쓴 칼럼 혹은 에세이의 느낌을 준다. 몇 편의 글은 푸코나 들뢰즈를 비롯한 고전어 더해 다양한 인문 서적을 조금씩 참고해 저자의 견해를 개진한 반면, 몇 편의 글은 현 상황에 대한 저자의 견해 그 자체를 인문학적 [필체]로 적어내었다. 그런만큼 전반적으로 책 자체는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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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까지만 하더라도 인문학의 위기라며 교수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하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최근 인문학은 언제 그런 일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대기업 CEO에서부터 재소자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인문학은 직업, 연령대, 성별, 상황 등을 감안하여 고전 강의에서부터 영화, 음악, 미술, 문학 등과 융합을 하며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가 인문서로서는 드물게 스테디셀러에 오르면서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해석하는 일이 벌어졌다. 도서관, 문화센터, 기업, 정부기관 등이 주관하는 각종 문화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문학 강의, 심지어 TV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인문학 책을 뒤적이며 자신과 처지가 다른 여자 주인공을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도 모르게 어느새 인문학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는 어느 정도 인문학이 ‘대중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책은 그와 같은 인문학의 인기는 우리가 겉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반박하며, 현재 우리 사회에 널리 번지고 있는 인문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 제목이나 표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상당히 도발적이다. 내용자체도 마찬가지다. 책은 총6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먼저 현재 우리 시대에 인문학은 자본과 국가,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인문학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5개 장에 걸쳐서 인간을 인한 인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유의 불온성, 사상의 전복성, 비판의 급진성을 담은 불온한 인문학이 되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지은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글이 균질적이지 못하고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하다.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거칠게 다가오는 글이다. 흑백 논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양극단을 치닫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주장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거나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다만 현재의 인문학을 싸잡아서 국가와 자본, 그리고 권력에 굴복하는 인문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맹목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지은이들의 주장을 좀 더 비약해보자면 지금 대중들은 무지몽매하다는 것으로 들린다. 이는 다분히 7, 80년대의 사고가 아닌가 한다.지금의 대중은 예전의 교육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각성되어 있다. 인문학이라고 하지만 모든 학문은 인간의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는 것들이다.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영역을 제외하고 인문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 달라질 수는 없다. 다만 그 사실에 대해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예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달려있다. 지은이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대중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현재를 유지하려고 하는 삶에서 인문학도 그와 같은 삶을 유지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다만 그 설득력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사람을 움직이는 글이 필요하다. 이 책에 쓰인 글들은 너무 전투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 현재는 20세기와는 다르다. 인문학을 소비하는 대중들의 학력 수준이라든지 생활 수준이 달라졌다. 달라진 만큼 인문학을 소비하는 모습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기존의 인문학에 대항하며 설득력을 담을 수 있는 인문학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주제에 힘을 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 점에서 기성 인문학에 대항하는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인문학의 호황기(?)라고 생각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인문학에 일침을 가하는 글들은 상당히 공감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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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조금 속았다는 생각이 든 건 이 책이 앞으로 출간한 불온한 인문학 시리즈의 예고쯤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주로 오늘의 인문학 열풍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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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꽤 오랫동안 생각한 것을 누군가에게 말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이 똑바로 전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말하는 순간에도 생각한 것과 다른 취지의 말이 나오기도 하고 상대방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해오는 경우도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내가 말한 것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받아들여서 오히려 이상한 논리가 되버리는 경우이다. 반대로 그냥 단순한 이 경우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라고 말했는데 너무 넓은 범위가 적용되어서 이건 아니고 저건 아니고 하면서 꼬투리가 잡혀버리는 경우는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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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제목과 파격적인 표지를 보고 연상한 것은 '과격함'이었다. 학문 분과 중에서도 얌전한 축에 속하는 인문학이 왜 스스로를 불온하다고 칭하며, 과격한 소통을 시도하게 되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학자들이 과격분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인문학이란 단어를 만나기 어렵지 않아졌다. 인문관련 교양강좌도 늘어났고, 출간되는 인문 관련 서적도 늘어났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인문학'이라는 단어만 붙어 있을뿐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언제부터 인문학이 돈을 벌어오는 학문이 되었단 말인가? 더 많이 판매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교양으로써의 인문학은 인문학인가, 자기개발인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의 연구원 여섯 명은 인문학이 범람하는 이런 세태에,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을 논한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전체적으로 쉽게 논하고 있음에도 몇몇 글에선 논문을 읽는 것같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사회의 주류와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반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닐까? 파격의 껍질을 쓰고 대중에게 불온한 인문학을 논하는 글이 선동이 아닌 학구적인 논문으로 읽힌다는 것이 아쉬웠다.
전체적으로 봤을때 책의 절반은 솔직함을 담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학술적인 부분을 담고 있었다. 아예 대중적이지도, 아예 학구적일지도 않은 이 책이야말로 연구자들의 고뇌를 담고 있는 글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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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은 수유너머 연구원들의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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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인문학 vs 불온한 인문학 인문학 붐의 이면과 인문학적 사유가 나아갈 길
한쪽에서는 인문학이 위기에 빠졌다는 말을 반복하며 앤드게임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쪽에서는 ‘인문학 붐’을 말한다. 이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도대체 인문학은 위기인가 붐인가? 아니면 여전히 예전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인문학에 무관심할 뿐인가? 그간 다양한 행보를 보여준 ‘수유+너머’에서 활동하는 저자들이 쓴 <불온한 인문학>은 이러한 물음에 ‘인문학 위기’에 무게를 두고 응답하는 책이다.
인문학은 왜 위기에 빠진 것일까? 사실 존망을 논하기에는 최근 몇 년 동안 인문학이 수면 위로 올라와버렸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는 고리타분한 ‘꼰대 이미지’를 벗기고 ‘창의성’, ‘독창성’, ‘상상력’이라는 휘황찬란한 어휘들로 진공포장 된 상품으로서 가판대에 올라와 있는 인문학이다. ‘인문학 붐’에서의 ‘인문학’이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유행하는 상품으로서의 인문학이다. 우리는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기 이전이 이 인문학 상품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럭저럭 잘 팔린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소비자는 누구일까? 아니 그들은 예전에는 거들떠도 안 보던 인문학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우선 그들은 인문학은 수단적으로 활용하는데 익숙하다. 예컨대 ‘OO을 위한 인문학'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ml:namespace prefix = o />
실용학문이라고? 인문학이 무엇에 실용적이란 말인가? ‘성공’? 여기서의 ‘성공’이란 무엇이며, 뒤처짐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짐작은 가지만 모른 체 하고 싶다. 이제 일부의 인문학은 ‘성공을 위한 인문학’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른 말로 ‘CEO인문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에 덧붙여 ‘창의 경영’의 수단으로 칭송된다. 이상, 가판대 위의 인문학을 판매하기 위한 광고 멘트의 전형이다.
그러나 가짜 약을 팔기 위한 상술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다. 시장 논리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전문가인 기업들은 실제로 인문학의 효능을 열렬히 믿는 것 같이 보인다. 롯데쇼핑의 경우 사장뿐 아니라 임직원이 ‘서울대 인문학 최고위 과정(AFP)’을 의무적으로 수강하며 포스코의 경우 600명에 이르는 팀장 이상급 직원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인문학 강좌를 받는다고 한다.
그 효과가 입증 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실용학문, 인문학은 ‘이윤 창출을 위해’, ‘기업의 성장’을 위해, 나아가 더 나은 ‘국가’를 위한다는 등 다양한 이름으로 계획적으로 정당하게 소비된다. 인문학에 대한 규정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들의 인문학이 ‘경제적 생산성’을 향상 시킬 수 있을 지는 확실히 미심쩍다.(나만 그런가!)
아무튼 책에 소개된 모CEO는 그들이 생각하는 인문학의 효과에 대해 일러주는데 그에 따르면 “인문학의 효용을 ‘외국 바이어들 앞에서 노래 한 곡 불러주는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P7)
물론 시장의 부름에 답한(할 수 밖에 없는) 인문학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구석에 마련된 양로원에서 인문학을 지키고 있던 일부 학자들이 ‘꽁돈’을 만져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머지 학자들은 그들의 시장친화적 면모를 몰아세우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인문학’의 어제는 이 자본중심적 사회에서 분명 시련이었다. 아웃소싱의 전면화와 소위 ‘돈 되는’ 학문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인문학자들은 결코 존경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한가한 지적 ‘엘리트’의 요소가 부각되며 쾌락의 평등주의를 갈망하는 대중에게 재수 없다는 소리나 듣고 있었다. 분명 대중은 언제라도 인문학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인문학 자체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인문학이 뭔데?’ ㅡ 이는 인문 정신을 고수하는 지식인의 권위의 추락, 상징 자본의 소실로 이어졌다. 물론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무기로 대학이라는 사회적 보호막에 거주하였지만 그곳이 바로 그들의 양로원이자 묘지였다.
이러한 만성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고맙게도’ 이윤 창출의 분야를 확대하는데 힘쓰는 시장의 기본 전략에 따라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부름에 응답한 인문학자들은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롱런’ 하려면 대중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인문학의 소생술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누적된 깊이와 이에 따른 문턱은 감추고 피상적이고 화려한 심연의 이미지만이 남은 것들이 대중들에게 ‘진짜 인문학’으로 제공돼버렸다. 결국 그들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떠먹는 ‘이유식 인문학’ 출시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에서의 이 상품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저자 중 한 명에 따르면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한적한 테라스에서 은은한 향의 드립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여유. 나는 이것이 오늘날 인문학의 이미지”라고 한다. 싸구려 제품보다는 고품격을 지향하는 듯하다. 이들이 단지 시장에만 친화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위험인물’들의 정신 상태를 교화 시키는 역할까지 자임한다. 즉 국가의 편에서 ‘대중 훈육의 역할’까지 영업을 확장하는 것이다.(가장 최근에는 서울시가 서울역 주변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채움 인문학 강좌'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모든 인문학자가 시장과 국가의 부름에 철저히 순응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동향에 따라 그들이 머물 수 있는 ‘바깥’은 협소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앞서 기술한 이미지의 시장 친화적 인문학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중의 ‘반지성주의’와 전문가의 ‘훈련된 무능(베블런)’ 적절히 배합된 결과만 남기는 시장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인문학은 시장의 부름을 받게 되면 피상적이게 되는 것일까?
동시대는 속도가 곧 이윤인 시대다. 최고의 경제적 엘리트는 기술 문명의 힘으로 빛의 속도로 지구를 장악한다. 그들과 문화적으로 많이 다르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시간의 절약은 곧 이윤을 위한 약속이다. 이는 곧 니체의 말처럼 ‘되새김질’을 동반하는 사유와 통찰의 인문학적 과정은 시대의 흐름과 대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태생적으로 나무늘보인 인문학의 시장 적응에는 유행의 속도에 응할 수 있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바쁘게 사는 현대인’에게 어필하기 위해 인문학자들은 과거 자기 선배들의 방법론을 검출하고 도식화 하여 수학 공식과 같이 제공하는 전략을 택하게 된다. 대중은 이를 한층 더 쉽게 흡수하지만 이는 곧 개념의 물화를 동반한다. 이택광 식으로 말하자면 ‘울퉁불퉁한 사유’는 사라지고 ‘매끄러움’만 남게 되는 것이다.
최신의 인문학자는 과거의 유산을 으물으물 씹어서 수용자들이 최대한 넘기기 쉽게 전달하지 않으면 ‘삼키기 어려우면 아예 안 먹는 대중들’의 거부에 직면하게 된다. 장사가 안 되는 것이다. 심지어 대중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대중 曰 : “너는 권위적인 엘리트다. 민주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시대에 뒤처진 자식, 날 계몽하려 들지 마라.”
사유는 사람들이 필수 교육 과정에서 배운 것처럼 암기로 대체되어야 한다. ‘자, 탈주는 무엇 무엇이며, 노마드는 무엇 무엇이며, 차연은 무엇 무엇이며, 시뮬라크르는 무엇 무엇입니다. 참 쉽죠~?’ 이때 암기왕 오타쿠 하나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제히 ‘고놈 참 철학 잘하네’라고 탄성을 지른다.
또한 입문자들은 짧은 배움의 기간으로 인해 시야가 좁아 ‘고전 패티쉬’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결코 입문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학문계에는 서양 학문을 절대적인 지평으로 삼고 규범적으로 수용하며 사상경찰을 자임하던 전력을 지닌 학자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테리 이글턴 말대로 “아비가 틀렸다면, 그 누구도 옳을 수 없다.”
저자 중 한 명인 이진경은 이렇게 예언한다.
하여튼 우리의 인문학 판매 실태를 보자면 철학은 통조림화(니체, 들뢰즈, 아리스토텔레스 테이크아웃 해가세요! 맛조은 네그리! 누구의 말대로 푸코라는 기호는 루이비통과 대등하다.)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반응하여 보급의 이점이 있는 통로가 구축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현실의 난해함을 텍스트에 간직하고 지목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반대로 흐르는 것이다.
결국 연역이 남용되어 사유는 반쪽이 된다. 이러한 반쪽짜리 사유가 현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은커녕 ‘맹목적인 관점’이라는 역효과가 안 나면 다행이다. ‘이론은 좁게 본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 아도르노가 분명히 화낼 일이다. 우리에게 언제나 부족했던 것일지 모르나, 지금 여기에서 이론화의 계기를 찾는 사유의 공간은 엔트로피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 파멸의 과정을 누구를 잘못했다고만 타박하는 일은 무익하다. 도통 파악하기 힘든 현실 속에서 적어도 그들은 공범이거나 모두가 무죄일 가능성이 높다. 반-이유식 인문학 철학자 강신주는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라”고 부르짖었지만, 그러한 사유의 가치는 하락하였다. 남들이 안 알아주는 ‘사유 따위’ 보다는 어려운 책을 요약만 보고 읽은 척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다. 강신주가 요구한 ‘힘든 일’은 상호경쟁적인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항목의 계속적인 증가로 인해 ‘도태의 불안감’으로 시작조차 하기 힘들다.(혹은 엘리트의 전유물로 남는다)
이렇게 빠르게 회전하는 궤도에서 사유하는 주체가 설 곳은 없는가? ‘인문학 붐’은 새로운 출발점이니까 이렇게 문제가 있어도 좀 봐줘야 하는 것일까? 이 가치 혼란의 시기에서 우리는 다시 이러한 질문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 정신이란 무얼까? ‘이유식 인문학’이라는 말을 처음 꺼낸 <사유의 악보>의 저자 최정우는 인문학이란 ‘질문의 방식에 대한 고민’ 이라 말한다. 또한 <불온한 인문학>의 많은 저자들은 인문학이란 ‘비판 정신’이라고 입을 모은다. 즉 ‘기존 사회질서와 가치체계에 대한 비판이 인문학의 본질’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 붐과 함께 인문학 위기설이 뒤따르는 이유는 비판과 좋은 질문의 사라짐 때문이다.
현실은 그들의 증언대로 (판매되는 무상 제공되든) “인문학이란 건전한 시민 육성의 교육적 프로젝트에 더 가까워 보인다.” 현재의 인문학은 비판이라는 독소 조항을 제거하고는 그 껍데기만 남겼다. 비판은 없거나 치명적이지 않아야 한다. 건전한 시민 육성에 사용되는 인문학이란 잠재적인 불평분자들을 무한 관용의 정신으로 이끌어 주는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응력 또한 길러주어야 한다. 이는 곧, ‘사회는 문제없으니 낙제점 맞은 너희는 적응력을 길러야 한다. 마음가짐에 달렸다!’라는 식의 책임 회피 전략이다. 매일 같이 등떠밀리는 사람들에 폼 잡으며 1000원 짜리 장미 한 송이 건네는 격이다. 그러나 박남희의 지적처럼, “앞으로의 인문학은 노숙자를 일깨우는 인문학이 아니라, 노숙자를 만들어내는 사회 자체를 일깨우는 인문학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앞으로의 인문학’이 <불온한 인문학>의 저자들이 바라는 인문학의 모습이다. 불온한 인문학 사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작성한 텍스트는 <불온한 인문학> 이전에도 있었다. 그 예로 박가분의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이택광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사이에서 <불온한 인문학>의 특이점은 저자들이 오랫동안 수유+너머에서 경험하면서 느낀 시행착오와 성과에 대한 솔직한 평, 이를 기반으로 한 사유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은 이렇게 단호히 선언한다.‘위안, 구원 따위는 주지 않을 것이다’(P8) 또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종이며, 어디선가 항상-이미 시작된 낯선 출발점을 가리키는 지표”라 말한다. 이로써 붐을 조성한 인문학의 이미지와는 확실한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이들이 인문학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의고주의자들은 더더욱 아니다. 이들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 따르면 “인문학의 본래 과업은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원이었다. 예컨대, ‘정신문화’를 창달한다는 미명 하에 인문학이 주로 복무했던 분야는 국가적, 사회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변호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실토와 함께 그들은 새로운 인문학을 구성해야 하는 위치를 단번에 점한다. 탈주를 위한 스타트라인에 서있는 것이다. 이들의 다양한 활동을 기억하고 있는 바, 그들의 행보가 상당히 기대가 된다.
다만 이 책에는 화려한 개념어들(들뢰즈, 랑시에르, 네그리, 푸코 등에서 연유한)이 남용되는데 인문학 상품들 하고는 다른 방향에서 물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여러 사이트에서 서평을 살펴보니 많은 독자들도 이미 이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내용이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그것과 같은 취급을 당할지 모르는 위태로움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재수 없음’으로의 회귀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유란 그것에 시간 투자를 많이 한 노력형 학자 혹은 특출난 천재의 영역, 즉 ‘나와는 유리된 영역’으로 비추어 지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개념의 문턱은 높으며 문턱을 넘을 시도를 하는 사람조차도 극소수다. 그래서 불통이 만연하다. 이는 곧 질문과 비판을 통한 개입과 자극의 부재로, 즉 불임의 사유로 이어진다. 교육과 앎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는 심지어 무관심을 넘어 열성적으로 지식인을 혐오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는 모습을 보자면 무언가 방법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붐의 이면에는 확실히 인문학의 시련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좌절의 장소가 아닌 새로운 전략을 짜야할 지점임은 자명하다. 나는 그들이 먼저 수행해야 할 일은 사유를 위한 조건, 즉 문턱을 낮추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이진경은 이것이 정치라고 하였다) 예술가 존 케이지처럼 ‘탈숙련성’, ‘악보성’ 등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보호막을 걷어내는 것이기에 돈은 안 되겠지만 민주주의의 가치에 부합한다는 이점이 있으며 ‘불필요한 건수’를 줄일 수도 있다. 우리사회에서의 새로운 사유의 흐름은 분명 이러한 문턱을 낮추는 시도에서 비롯될 것이다.
물론 대중영합적인 시도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기표가 수용자들에게서 작동할 수 있게끔 전달하여 극단적인 순응주의자조차도 자극할 수 있는 비판과 질문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다. 비판인지도 질문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게 만드는 높은 문턱 뒤에는 ‘찻잔 속의 태풍’이라는 은유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ㅡ 그러나 정치판마냥 밀실 패거리주의로 보이는 것을 어찌하랴? 이때 인문학은 오타쿠의 폐쇄적인 지적 유희를 위한 전유물로 강등되며 유산 관리자들은 책임 방기라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또한 인문학적 사유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까지 드러내게 된다.
인문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시 지금 이곳에서 인문학적 접근과 이론화의 계기를 발견해야만 한다. 매일 같이 동시다발적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적 사유의 결핍은 너무도 치명적이며 이것이 사람들이 인문학을 포기하자고 쉽게 얘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기존의 인문학자들은 양로원에서 뛰쳐나와 불확실성이 만연된 사회 현실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인문학적 사유를 조장하여야 한다. 이러한 시도가 누적될 때 우리는 불현 듯 독소가 말끔히 제거된 이유식 인문학과는 다른, 사유의 정치성을 회복한 인문학의 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위 과정은 당신들의 ‘생명 연장의 꿈’에 부합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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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은 불편하다. 현실에 날세우고 싸움을 거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인문학과 싸운단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인문학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동안 어쩌면 내가 본 ‘인문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럴 듯하게 포장된 소비를 위한 인문학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의 모든 것을 엎어놓고 기본부터 ‘사유’하는 것은 잔잔한 강의 바닥부터 뒤엎어버리는 혼란을 안겨준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내부에서 불편함이 소용돌이쳤다.
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反 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83p)
불온한 인문학이란 지금까지 인문학에서 부여되었던 동일성의 서사, 그 통념의 임무를 거부하고 내던질 때 시작된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신랄하게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것, 휴머니즘을 떠벌리며 자행한 학살의 현장을 상기시키거나 삶의 주체로 우뚝 서서 만족해하는 자신에게 꼭두각시 인형이 비친 거울을 보여주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의 배면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한 번도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통념적인 삶의 관성에 낯설고 불쾌한 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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