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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문학을 표방하지 않아도 페미니즘이 짙게 배어 있는 문학 작품이 더러 있다. 이를테면 <빨간 머리 앤>이 그렇다. 고아인 앤 셜리는 마릴린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놀랍게도 둘은 부부가 아니라 남매 다. 어릴 때는 왜 이들이 '당연히' 부부인 줄 알았을까!)에게 입양되어 대학 교육을 받고 어엿한 직업도 가진다. 사소해 보이지만 작품이 발표된 해가 1908년임을 감안하면 앤은 상당히 진보적인 여성 캐릭터이다. <빨간 머리 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와 마찬가지로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대표작 <눈먼 암살자>는, 페미니즘 문학이라기보다 역사 문학에 가깝지만 페미니즘이 작품 전체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삼중 액자 구조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팔십 대의 노파 아이리스가 죽음을 앞두고 회고록을 작성하는 부분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스물다섯에 사망한 아이리스의 여동생 로라의 이름으로 출간된 작중 소설 <눈먼 암살자>이고, 세 번째 이야기는 <눈먼 암살자> 속 남자가 여자에게 들려주는 공상 과학 소설이다. 아이리스는 20세기 초 캐나다의 명망 있는 가문에서 두 자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두 딸에게 무관심하고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유모 리니가 두 자매를 거의 다 키우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산 위기에 처한 아버지가 아이리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했고, 로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스는 가족들을 위해 결혼하는 길을 택했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한 몸처럼 지냈던 자매는 떨어지게 되고, 결국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주요 등장인물 몇 명의 죽음이 신문 기사의 형태로 암시된다. 그 상태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아이리스와 로라 자매가 명망 있는 가문의 여식으로 자라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아이리스와 로라는 같은 부모에게 태어나 같은 집에서 자라고 같은 교육을 받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어느 순간부터 양극단으로 치닫는다. 아이리스가 보수적이고 순종적인 선택을 한다면, 로라는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을 한다. 그로 인해 아이리스는 부잣집 마나님으로서 편안하게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공허한 반면, 로라는 정신병원에 감금될 만큼 문제아 취급을 받을지언정 짧은 생을 자유롭게 살다 간다. 그렇다고 아이리스가 로라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아이리스도 로라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아버지가 짝지어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그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로라처럼 살 용기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건 아이리스의 탓이 아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말했다. 아이리스가 아들이었다면 회사를 경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사업을 물려주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아이리스는 -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 아들로 태어날지 딸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었다'. 반면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선택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아이리스를 자신의 후계자로서 교육할 수 있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아이리스에게 사업을 물려줄 수 있었다. 아이리스의 아버지는 아이리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모든 비극은 '선택할 수 없었던' 아이리스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었던' 아이리스의 아버지의 탓이다. 아니면 애초에 아이리스를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나게 한 신의 탓이든지. 이론상으로는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나는 중심가, 번화한 곳만을 고수했다. 그런 한정된 곳 내에서도 구속력이 느껴지지 않는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을. 그들은 결혼을 했는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직업은 있는가?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그들의 신발 가격 외에는 별다른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2권 75쪽) '선택할 수 없었던' 아이리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무능과 용기 없음을 평생 탓했다. 아이리스는 자기 자신을 '거대한 사기의 희생자, 그와 동시에 그 하수인'이라고 여겼다. 아이리스는 여자도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여자도 가고 싶은 곳에는 마음껏 갈 수 있다고 말하는 동생을 부러워했고 질투했고 시기했다. 자매의 유대감은 그렇게 와해되었고, 언니와 동생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강력한 가부장제 속에서 자란 자매가 각자 다른 선택을 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겹쳐 보인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맨)부커상 수상작이다(<눈먼 암살자>는 2000년, <채식주의자>는 2016년 수상). |
| 세 번째 시도 끝에 1권 완독. 액자식 구성으로 아이리스의 현재와 과거, 로라의 소설까지 시점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처음에는 다소 산만한 느낌이었으나 읽다 보니 적응이 됐다. 전체적인 스토리도 어둡고 화자인 아이리스의 기본적인 감정 상태도 자기 비하와 우울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읽는 독자도 축축 처지고 힘들게 만든다. 스토리 자체는 분명 흥미로운데 읽는 동안 느껴지는 우울감 때문에 너무 괴롭다. 2권을 또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힌다... |
| 액자식 구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느낌으로 시작.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다가, 주인공의 동생 소설까지 나오고, 중간중간에 신문 기사까지 나오는... 처음에는 산만해서 읽기 어려웠으나, 읽다 보니 적응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밝은 부분보다는 우중충한 느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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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애트우드를 내가 처음 접한 것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레이스(Alias Grace)때문이었다. 1900년대 초반 살인죄를 범한 하녀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마가렛 애트우드의 소설이 원작이다. 나는 그 드라마에 빠져들었고, 원작자가 캐나다의 여성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나라로 치면 박경리 작가님에 버금가는 국민 작가로, 여성의 시선과 서사에 천착해온 작가다.
그녀의 소설이 또 드라마화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시녀 이야기(Handmaids tail)이다. 시녀 이야기는 sf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환경오염과 방사능 유출로 출산율이 급격하게 떨어진 미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미국을 점령한다. 그들은 가임기의 여자들을 납치한다. 그리고 쿠데타의 주역들인 사령관의 집에 들어가게 하여, 그들의 아이를 임신하게 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씨받이라고나 할까. 잡혀온 여자들은 동성애자이거나, 바람을 피우는 등 기독교에서 금지하는 짓을 저지른 여자들이다. 그들은 사령관의 부인이 입회한 방에서 합법적인(?) 강간을 당한다. 그리고 아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는 빼앗긴다. 주인공은 오브 프레드.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가 잡혀와 아이를 낳는 시녀가 되어버리는 여자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모스. 이 드라마는 2017년 에미상에서 웬만한 상들은 거의 휩쓸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애트우드는 2019년 증언들이라는 시녀 이야기의 시퀄 격인 소설을 출간하여 맨 부커 상을 받았다.
위의 소설과 드라마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그녀의 다른 소설들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눈먼 암살자다.
눈먼 암살자는 1930년대 후반 한 여자가 차를 몰고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신문 기사로 시작한다. 이 소설의 화자인 아이리스의 동생인 로라다. 로라가 죽을 당시 젊었던 아이리스는 이제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되어 그 시절을 회고하는 회고록을 쓴다. 그리고 로라가 죽기 전에 남긴 소설 눈먼 암살자. 아이리스의 회고록과 소설 속의 소설 눈먼 암살자, 그리고 아이리스와 로라의 삶을 건조한 필체로 작성한 신문 기사가 교차되면서 로라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소설은 천천히 파헤쳐나간다.
로라는 왜 차를 몰고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을까? 소설 눈먼 암살자는 그녀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리고 왜 늙은 아이리스는 그들의 부모, 그리고 로라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다지도 집요하게 묘사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역 신문에 난 기사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가문이 몰락하면서 지역의 신흥 부호인 리처드에게 아이리스가 18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급 발전하게 된다. 리처드는 아이리스의 아버지를 속여 사업을 되살려 준다는 핑계로 아이리스와 결혼하고, 아이리스 집안의 대저택까지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졸지에 고아가 된 두 소녀는 마흔에 가까운 남자와 한 집에 살게 된다. 그의 누이 위니 프리드와 함께.
처음에 읽을 때는 이 것들은 모두 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소설 눈먼 암살자 속의 남녀는 허름한 호텔방에서 눈먼 암살자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어느 먼 행성의 나라. 아이들을 눈을 멀게 하여 암살자로 키우는 문화가 있는 나라. 그곳은 또한 소녀를 신전의 공물로 바치는 곳이다. 반항하지 못하게 혀를 자른 소녀가 죽음을 기다리는 신전. 그것에 눈먼 소년이 침입하여 그녀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소년은 소녀를 죽이지 않고 성 밖으로 도망을 친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남자. 그리고 그것을 들으며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여자. 여자는 그들이 도망을 쳐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 불과한 것일까? 여자는 항상 시간에 쫓기고, 남자는 돈이 없다.
이 눈먼 암살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소설 속 남자와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아이리스는 왜,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회고록을 쓰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까지 다 읽게 되면 작가가 짜 놓은 시간과 공간의 그물에 제대로 걸려들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1930년대 캐나다. 스페인 내전과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물들은 무엇을 잃게 되고 무엇을 얻었는가. 전쟁이 남긴 상흔을 한 인간의 삶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추적하여 우리에게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전쟁에서 몇 백만이 죽었는지를 알게 되어도 우리는 그것을 실감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인간이 전쟁과 탐욕을 통해서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공감할 수 있다. 마가렛 애트우드는 이 소설로 1985년 맨 부커 상을 받았다. 맨 부커상은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받게 되어 한동안 떠들썩했던 유서 깊은 문학상이다.
눈먼 암살자 사키 얼- 논의 몰락
그녀는 밤중에 갑자기 잠에서 깬다. 심장이 마구 뛰고 있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창가로 가서 창틀을 높이 올리고 몸을 굽혀 밖을 내다본다. 오래된 상처 때문에 거미줄 같은 흔적이 있는, 보름달에 가깝게 차오르는 달이 떠 있고, 그 아래로는 가로등이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발하는 약한 주황색 불빛이 보인다. 그 밑에는 그림자로 얼룩이 지고 가지들은 단단하고 두꺼운 그물처럼 펼쳐져 있고, 하얀 나방 같은 꽃들이 희미하게 깜박인다.
한 남자가 올려다보고 있다. 짙은 눈썹, 움푹 팬 눈두덩이, 검고 갸름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하얀 사선 같은 미소가 보인다. 세모꼴로 파인 목선 아래는 창백하게 보인다. 셔츠다. 그는 손을 올려 손짓을 한다. 그녀가 자신과 합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창문 밖으로 나와 나무를 타고 내려오기를. 그렇지만 그녀는 두렵다. 추락할까 봐 두렵다.
이제 그는 창턱 바깥쪽에 있다. 이제 그는 방안에 있다. 밤나무 꽃이 너울거리며 타오른다. 그 하얀빛으로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회색 띤 얼굴, 엷은 색조, 사진처럼 이차원적인 모습. 그러나 얼룩이 져 있다. 타는 베이컨 냄새가 난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해 그녀를 보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치 그녀는 그녀 자신의 그림자고, 그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그림자가 볼 수 있다면 그녀의 눈이 있을 바로 그곳을 그는 응시하고 있다. 그녀는 그를 만지고 싶지만 주저한다. 그녀가 그를 감싸 안는다면 분명 그는 희미해져 버릴 것이다. 이내 헝겊 조각으로, 연기로, 분자로, 원자로 분해되어 버릴 것이다. 그녀의 손은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버릴 것이다.
돌아오겠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뭐가 잘못된 거죠? 모르고 있어?
눈먼 암살자 속 한 단락이다. 내가 좋아하는 단락.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슬픈 대목이었다.
이 소설은 처음에 읽을 때는 작가가 짜 놓은 직물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꼭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다. 그녀는 현실과 환상, 그리고 왜곡되고 지워진 진실과 거짓. 우리가 눈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생의 편린들에 대해서 아름다운 언어로 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어투로 말한다.
그녀와 동시대를 살고 있어 다행이다. 그녀가 아직 살아계셔서 다행이다. 오래오래 사셔서 또 다른 책들을 출간하시길 바란다. 그전에 이미 그녀가 쓴 수많은 저작들을 읽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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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만 읽고 일단 적어본다. 만약 내가 살만큼 산 나이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지나간 긴 시간들을 돌이켜 본다는 건 어떤 의미가 될까. 즐거웠고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그 당시의 행복감에 밥도 잘 먹게되고 잠도 잘 자게될 그런 느낌들일 것이다. 그러나 즐거웠던 일이 하나도 없는 상태의 인생을 살고서, 현재는 나락으로 떨어질 데로 떨어지고 남은 것 하나 없이 홀로 노구의 몸만 남은채로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린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일 것이다. 주인공은 바로 그런 후자의 사람이다. 힘겹게 힘겹게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을 느끼고 다 놓아버릴 만도 하지만 여전히 지나간 세월에 자신의 후회를 버무려서 그 과거를 글로 남기고 있다. 그리고 자살한 동생이 남긴 소설 - 물론 주인공이 읽는 것은 아니고 액자식으로 들어와 있다 - 이 뜻했던 것이 주인공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서서히 보여지고 있는 순간이다. 아직 1권만 읽은 상태이지만, 후회로 가득한 지난날이 시간과 버무려져서 구멍으로 흘러가 버린 후 그걸 느끼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지를 치밀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인 것 같다. 캐나다의 근대사와도 같이 버무려졌고. 좋은 작품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