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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
굳게 닫혀 있는 한 여인의 마음이 보인다. 그 누구에게도 쉬이 허락되지 않을 굳게 닫힌 문...... 그녀의 말없이 깊은 눈빛이, 그 속에 내재된 슬픔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순간... 내 속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가슴께부터 목구멍까지 무언가로 꽉 막힌듯한 갑갑함이 느껴진다.
나는 누경이 아니다... 나는 그녀처럼 어릴적에 불운으로, 실수로 몸과 마음에 충격을 받은 일도 없다. 나는 그녀처럼 (‘행복한결말’이라는 뻔한 로맨틱 코메디의 그것과는 0.1%의 공통점도 없는) 처절하게 철저히 아프기만 한 사랑을 해본 적도 없다. 나와 누경의 공통점은... 삼십대 싱글이라는 인류통계학적 사실 그 하나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야기가 한자 한자 심장 어디쯤에 박혀온다.
사랑...... 시공조차 초월할 수 있고, 그 영원불멸함이 신성시되기까지 하는 그 한 단어... 그 위대하고 그 대단한 사랑이란 놈이 대체 왜 누군가의 삶을 이토록 눈물겹게 힘겹게 만드는걸까? 그 좋은 것이 누군가에겐 왜 그다지도 어렵고 복잡하기만 할까?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을 놓지 못하는가...... 왜...왜...왜...
누경과 서강주... 그들의 순탄치않은 사랑 이야기에 마음이 아프다. 누경의 기다림과 지쳐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물론 누경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할거면서 누경을 그리워하고 보고싶어하고 놓아주지 못하는 서강주도 마음이 아프다.
갖고 싶고 행복하고 싶고 그 모든게 ‘내’가 중심인거고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이기적인 것이겠지만 이기적이기에 그로 인한 상처는 2배, 3배 증폭되어 온전히 아프게 돌아온다.
그 아픔속에 갇혀 있던 누경이... 스스로 만든 족쇄로 마음의 문을 채워버린 누경이... 유리 속에 자신을 가둬버렸던 누경이... 밀로의 비너스처럼 파도에 휩쓸리기만 하던 누경이... 서강주와의 하루하루를 기록한 일기를 따라가며 조금씩 조금씩 ‘나’의 흐릿한 실루엣을 점점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여자, 마리안느는 그 일기를 통과해가며 실존하는, 생생하게 오늘을 보내는 ‘나’가 되어간다. 그와의 사랑은 곱씹을수록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이겨낸 끝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음을 어렴풋이 깨닳아가는 과정이, 이 후 단호하게 스스로를 마주하는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아마도 그때쯤 누경은 자신의 마음속 어느 깊은 숲 가운데 숨겨져있던 풀밭을 발견하고 따사로운 봄볕을 몸에 받으며 살포시 낮잠을 즐기다 일어나 달콤한 브런치를 즐기지 않을까...
전경린 작가님의 [풀밭위의 식사]는 빛나는 연애소설이다. 그러나 그 빛은 진부하지않고 거북하지않고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하다.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또한 너무나 정갈하고 수수하다. 감정의 표현 또한 유려하고 풍부하지만 절대 흘러넘치지는 않는다.
당신이 아직 확신없는 사랑에 대해 머뭇거리기만 하는 30대 여성이라면 당신이 아직 지난 사랑의 상처에 마음 한 구석을 저당잡혀 있는 30대 여성이라면 이 소설을 통해 당신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당신만의 풀밭을 찾아 쏟아지는 봄볕 아래 자유로운 당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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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이 좋았다던 안애금 씨. 전경린이란 이름은 그녀가 써내려갈 소설의 운명을 점지한 걸 아니었을까? 거슬러 올라가면 또 군대 이야기가 등장한다. 군대 도서관병으로 근무할 당시, 90년대 후반 한국 문단의 전면에 등장한 여류 작가들의 작품들을 게걸스럽게 읽었었다. 신경숙, 공지영, 은희경, 하성란, 김인숙, 배수아, 고은주 등 저마다 개성 넘치는 문체가 내 무의미한 일상을 위로해줬었다. 그중에서도 전경린은 매우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가였다.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그 무시무시한 귀기란. 딱 고양이가 빙의된 자의식 강한 여성의 움직임처럼 느껴졌었다.
미흔과 규의 지독한 사랑을 그린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은 후에 변영주 감독의 '밀애'로 분하기도 했다. 아마도 전경린을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 평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나또한 이때부터 전경린 작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자의식 강한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녀의 분투가 퇴색됐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후 '엄마의 집'에 이르러 완전히 외면하고 말았다. 내가 좋아했던 전경린은 사라지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화해하는 여성의 일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치 공식처럼 상처받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고,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다 적당히 피흘리며 다시 일상으로 귀환하는 그 얼개가 지겨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경린의 '풀밭 위의 식사'를 손에 든 건, 순전히 책 뒷표지에 실린 한 문구였다. '더 많이,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 그랬다. 전경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은 지독하게 사랑했고, 아파했고, 버림받았다. 그럼에도 결국 그것들을 이겨내고 차분하게 일상으로 복귀한다. 마치 불륜남을 친정집에 데려가던 날을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이라 기억하듯 말이다. 이 지점에서 권지예 작가와 궤를 달리하는 그녀를 마주한다. 권지예가 창조하는 여성은 철저히 여성성을 유린당하고, 결국 세상 앞에 이혼, 자살 등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점철된다.
조바심이 났다. 기현이란 남자가 등장한다. 적어도 규와 미흔처럼 지독한 사랑은 아니겠지. 표지가 말해주지 않는가. 풀밭 위 평화로운 풍경 속에 부려진 식사의 의미. 같이 먹는다는 행위는 곧 화해와 소통을 의미하는거니까. 책장을 넘기며 기현은 페이드 아웃된다. 온전히 누경이란 인물을 떠올리는 두레박 같은 존재로 기능하며...
누경의 상처는 어디에서 기인한걸까? 단순히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먼 친척뻘 아저씨에 대한 연정을 품으며, 살았던 그녀가 철저히 내면으로 침잠하며, 생을 소비한다. 극렬한 남성 혐오 혹은 회피주의자인 줄 알았으나, 그녀에게 남자는 무위였다. 열 다섯 나이에 한 남자를 보내고, 한 남자에 의해 유린당했던 당시. 그 상처가 지금의 누경을 만들었다. 그 상처로 도망치기 위해, 숨기 위해 그녀는 늘 고통의 사막을 헤맸고,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남자와의 데이트에서 남자를 잊은 채 그림에 빠져든 것이 씁쓸하기도 편안하기도 했다. 그런 지점 어디쯤에 누경의 진실이 있는 것 같았다. -P42
30대 상처를 안은 여성과 50대 엄격한 합리주의자 교수의 사랑 이야기라 말한다면 언어도단일까? 제각기 다른 빛깔의 사랑이 존재할테지만, 국경과 나이를 초월하는, 심지어 동성과 근친까지 초월할 수 있는 게 사랑이라지만, 그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사랑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던 서강주를 향한 누경의 사랑은 아버지의 현현, 혹은 아버지 지우기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세상을 알아갔던 그녀가, 단 한순간의 상처(성폭행)에 의해, 그 상처에 대한 아버지의 덧댄 상처에 의해 아픔의 극단을 달린 건 아닐까. 악몽처럼 매일 꿈에 나타나 급기야 딸에게 청혼하는 아버지란. 그리고 그 청혼을 받아들이는 누경이란. 어떤 의미일까?
햇빛이 닿으면 이내 녹아 사라질 눈꽃이라니. 이 세상에는 왜 이런 환(幻)이 있는 것일까. 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내일이 있고, 왜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무 것도 이룰 것 없이 자리를 적시며 사라져갈 이런 사랑이 있는 것일까. -P146
그럼에도 사랑이라 믿고 싶었다. 고통이 머물러 있는 곳이 곧 작가의 글쓰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라 했다. 고통스러운 사랑, 사랑 같지 않은 사랑이라 에둘러 말하기 곤란한 사랑. 그 치열한 분투의 지점에서 누경은 서경주를 넘어선다. 소설 첫머리에 등장한, 그닥 감정이 생기지 않는 기현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을 동경하고 인정한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순진한 기현과 그 사랑을 절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누경의 만남. 어느날 문득 제주도 여행을 제안하며, 함께 떠날 동료들과 여행 전 함께 한 술자리에서 누경은 기현의 선배인 인서와 대면한다. 깊게 빠져든다. 친구인 상미에게조차 고백하진 않았지만, 서강주를 일상으로 받아들인 그녀에게 새로운 파문이 인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사랑은 변하는 것이고, 지속된다는 것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푸른 유리병은 지속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깨어지지 않는 게 사랑이야. 어떤 균열이든 두 팔로 끌어안고 지속하는 그것이, 사랑의 일이야." -P227
상처를 대면하고, 맞서 싸우는 누경의 핍진한 일상은 유리로 점철된다. 열을 가해 어떤 모양이든 창조할 수 있지만, 쉽게 깨져버리는 것. 날카롭게 몸과 마음을 후벼 파는 것. 사랑은 유리같은 것이란 시시한 유행가 가사가 융숭하게 되살아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한 상처와 아픔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난 전경린의 글쓰기가 좋다. 조각난 유리들을 온몸으로 보듬어 푸른 유리병으로 환기시키는 것. 풀밭 위의 식사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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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남녀간(반드시 남녀간이라고만 할 수도 없지만..)의 만남과 그 만남의 지속 속에서 자연스레 생기는 생리학적 현상이라고 할 진댄, 그것을 사회가 스스로를 건전하게 유지시켜야 한다는 강한 강박으로, 보편이라는 선을 긋고, 아름답고 주변인의 축하를 받을 만한 사랑과, 익명성을 갖는 다수의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을 몹쓸 불륜으로 선명하게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가벼운 의문이 일게 한 책.
물론 그러한 의문의 발원이 사랑에는 책임이 반드시 따른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다. 다만 책을 읽는 동안,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다소 혼동하기 쉬운 두가지 다른 의미로 분리되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철저히 감정적이고 생리적 반응일 뿐인 사랑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가정을 만들며 아이를 낳고 기르며 두 사람만의 배타적 울타리를 만들어간다는 의미로..
이를테면 '열정'과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화를 내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통제가 매우 어려운 감정이 '사랑'이라 하면, 그러한 감정상태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생각이다. 그건 당사자로서는 불가항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사랑을 '선택'했을 때,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전에 없는 새로운 관계들이 파생되었다면, 그 선택은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짐(?: 서강주式 표현)'이 맞는다. 그런 미묘한 차이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듯한 느낌이다.
「사랑에 관한 한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에 엄청난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거 같아」
이 말이 내재한 의미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색함과 수줍음이 흔히 서로 오해되어지는 것 만큼이나, 우리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진 그 중의성 때문에 많은 착각과 오해를 하고 사는 건 아닌지.. 흔히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면 '모호함(또는 애매함)'이라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동반되기 마련이겠지만, 이 소설에선 사랑의 모호함이 '선택의 경계' 문제에 맞추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나온 화제의 신간이기도 하고, 여러 리뷰의 호평에 끌리기도 했지만, 이전 작품 들에서 느껴진 작가에 대한 호감이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접하게 만든 보다 큰 이유였다. 그런 개인적 처지에서 보면 이 소설을 읽으며 전경린이라는 작가에 대한 호감도가 그다지 증가하지 못했다는게 다소 안타까운 점.
그리고 약간의 용기를 보태 조금 더 솔직해보면, 기현이라는 주인공 남자가 가진 순수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누경이 서강주나 인서 등으로 대표되는-보통의 남자라면 싫어라 할만한-대부분 초면에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만한, 묘한 매력을 지닌 남자들에게 끝내 끌려가고 있다는게 왠지 싫었다. 그건 아마 '나는 결코 그런 남자가 아니고, 앞으로도 될 수 없어..'라는 체념에 근거한 질투심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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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의 어록 중에 진정한 사랑에 관한 글이 떠오른다.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 가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로, 사랑은 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그 장점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단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단점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과도 사랑이라는 연이 닿아 백년해로를 함께하자고 약속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의 사랑은 위 말 중 후자였던 것 같다. 나 아니면 이 남자 노총각 신세 면치 못할 것 같다는 지고지순한 여인의 생각... 신혼의 단꿈을 벗어난지 오래 이젠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살아지는 덧없는 사랑이랄까. 차분히 밟아간 결혼이라서 좀 더 애틋하고 열정적인 과거로 기억되지는 않지만, 한번쯤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온통 내 영혼이 흔들리는 격렬함을 가져봤으면 하는 미련을 가져 본다. 여기 사랑의 감정에 대해, 사랑하는 이들의 현재와 과거에 대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더 아름답고도 정확하게 그리고 있는 사랑이 있다. 그것도 매혹적인 문장과 치명적인 독성으로 독자들을 홀릭하게 만드는 전경린 그녀가 말이다. “더 많이,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 누경과 기현의 관계에서 보면 이 말은 둘 다 해당이 된다. 강주를 더 사랑한 누경과 이룰 수 없는 사랑 누경을 또한 더 사랑한 기현. 시작부터 이미 깨어질 것을 예고하는 이 이야기는 위험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누경은 그 사랑을 지속하고 싶어한다. 사랑에 관한 한,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에 엄청난 권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곤 한다. ‘내 사랑’만큼은, 언제나, 어떤 이유에서건 가장 순결하고 고귀하다고 말이다. 내 사랑에 대한 권한이 있는 만큼 욕심을 부리지만, 때문에 또한 두렵기도 하다. 더 많이, 더 깊이 사랑을 하다 혹시 상처입지 않을까 라고...... 불륜이라는 소재를 담고는 있으나 강주와 누경의 사랑은 불륜의 냄새가 나지 않는 듯하다. 십수년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순수했던 감정들이 성인이 되어서 돌출되버린 둘의 사랑. 결론을 끌어내자면 이 소설은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온전히 끌어안는다. 세 노르말 c’est normal,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안고 일상적 상황으로 돌아가도록 말이다. 연애 소설을 접해 보았지만, 이렇게 차분한 멜로디로 찾아온 소설은 없었던 듯하다. 조용히 이 책을 접으면서 가슴 한켠이 아릿해 오기까지 하니 전경린 그녀는 연애소설의 대가가 맞는다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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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은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랄수록 인생이 다복해진다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면서도 아버지 환영 속에 매몰되어 어떤 실체와의 사랑을 꿈꾸며 지내 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물질적인 궁핍으로 힘들었을 때 빨리 어른이 되어 결핍 상황을 채워 균형 잡힌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었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른다. 감성의 문보다는 마음에 빗장을 지르고 살던 그 시절 자신에 대한 연민이 더할수록 아버지의 든든한 사랑을 더없이 갈망해 왔는지도 모른다. 외출할 때면 늘 아버지 손을 잡고 나섰던 누경이 부러운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그녀 아버지의 완고함을 대면했을 때는 그 존재가 더 큰 상처를 딸에게 안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 입은 딸의 마음을 포용하지 못하는 큰 벽으로 작용했던 아버지는 사후(死後)에도 누경의 마음을 옥죄어 힘들게 해왔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어떤 원칙과 규범대로 질서 있게 움직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돌연한 일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고를 넘나들게 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그리하여 규범적 관습을 어기고 욕망에 탐닉하며 환희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미완의 사랑으로 귀결될 것은 불을 보듯이 확연하다. 스무 살이나 벌어지는 나이차, 아내가 있는 친척 오빠와의 사랑은 누경과 강주가 쉽게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상황이 아니었다. 누경의 구두 굽이 부러졌을 때 그녀를 부축해 준 일을 기점으로 강주와 그녀는 또 다른 관계 속에 놓이게 되었다. 서로를 향한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할수록 누경이 감내하기 힘든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생활로 점철되었다. 생존하기 위해 그녀는 일기장에 그와의 만남을 그리워하고 기대하며 고스란히 담아냈다. 누군가가 볼까 두려워하면서도 그 마음을 토로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기에 그녀는 강주를 향한 마음을 전했다.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지 못해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그 마음을 일기장에 담아 감정을 다스려 본 사람은 누경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의 의무를 다하려는 현실적인 남자 강주와, 숨겨진 그녀의 일기장 속 그는 동일한 인물이지만 강주가 따르며 사는 질서는 보편적인 섭리 중 하나였다. 30대 처녀와 친척 오빠인 50대 유부남과의 사랑은 둘 사이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별의 고통도 배가(倍加)될 것임을 알면서도 쉽사리 사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한 개인이 손쉽게 사회적 통념을 깨부술 수 없다는 것을 누경은 잘 알기에 그와의 사랑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결별을 선언했는지도 모른다. 성립될 수 없는 미완의 사랑은 강한 여운으로 남아 치유하기 힘든 실연의 아픔을 더해 서로를 힘들게 할 때가 많다. 본질적인 도덕심을 잊고 사랑을 나눈 강주와 누경은 서로의 공통점을 들어 그 상황을 합리화할 때도 있었지만 부도덕함을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서로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미약한데도 누경에게 깊이 들어와 자리한 강주는 그 어떤 남자의 사랑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에게 중독된 누경은 자신을 삶의 주인공으로 삼기보다는 강주를 인생의 주인으로 삼아 그와의 만남 속에 기쁨을 찾아가는 양상을 띠어 안타까움이 더했다.
또 다른 욕망을 품고 이탈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외부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현실적 관습과 섭리 속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하나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네 일상이다. 개인의 내부의지가 강하게 솟구쳐 오를 때마다 그 감정을 적절히 제어하며 자신을 가두는 일은 자기기만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조차 품어서는 안 될 일들이 많이 있기에 번민하며 괴로움의 정점에서 허우적거리며 지내게 될 때가 있다. 그의 목소리를 산소처럼 받아들이고 가슴 속에는 늘 강주를 품고 살아가는 누경에게 그는 열여섯에 경험한 폭행 사건의 피해의식을 달래주는 창구였던 셈이다. 아버지의 현실적 부재는 꿈속에 나타나 누경을 괴롭혔지만 인상착의가 닮았던 강주와 소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더더욱 갈망하는 상대로 존재하였는지도 모른다.
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랜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무책임하게 가정을 버리고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파기하였다. 하지만 강주는 자신의 의지와 생각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따르며 아내를 짐으로 여기면서도 그 짐을 끝까지 부리지 않으려는 책임 속에 가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하여 그는 공명(共鳴)할 수 없는 삶을 감내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성이 바로 기존의 사회적 통념 속에 내재한 명예로운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깨진 유리조각이 고열에 녹아 새로운 형체로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누경은 유리 공방에서 사랑의 본질에 근접하여, “깨어지지 않는 게 사랑이야. 어떤 균열이든 두 팔로 끌어안고 지속하는 그것이, 사랑의 일이야.” 귀결 짓고는 통한의 눈물을 쏟아내며 현재적 삶을 조금씩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비춰져 처연함이 더했다. 누경은 지금껏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여 온전한 삶을 살아내지 못했다는 자기모멸과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지 못해 시린 그리움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 혼재해 왔다. 이제는 한 걸음 비껴나 자신의 일상을 들여다 보고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현재적 삶을 관조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안고 일상적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자기 주문과 함께 누경은 현실로 돌아가려 했다. 사랑하며 살기를 바랐으나 사랑이 어긋나는 것을 받아들이며,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담담하게..... “세 노르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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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같은 겉잡기 힘든 열정의 시기가 지나고, 그 과잉의 감정이 스러지고 나면 “들에 핀 꽃나무가 누구를 향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밝히며 활짝 피어나듯” 그런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소설 속‘누경’의 “한 때의 공유와 공속, 공감, 공모, 개념으로 재단되지 않는 그 어떤 영역...”이라는 사랑, 강주의‘뜨거운 초연함’과 담백한 세속적 사랑을 낯 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금지된 사랑, 아내가 있는 50대의 교수와 30대 처녀와의 사랑이야기. 1970년대를 장식했던 연애스토리인‘별들의 고향’,‘겨울여자’류의 통속적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통속성이 유해하다, 무해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사람들이 그리는 사랑이란 세속성을 이탈하지 못한다는 것일 게다. 작품 속에서도 누경과 강주가 주고받는 대화에는 서로 속물 같아서 웃는 장면들과, 바로 그 속물성에‘따뜻한 사랑’의 감정이 내재하고 있다는 자기위안을 담고 있다. “자꾸만 생각이 나, 네 속에 내가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온통 네 속에서 살고 있어.” 라든가, “포옹이 풀렸을 때. 우리의 두 눈은 꽃처럼 많은 겹으로 피어 있었다.”와 같이 많은 문장에서 낯 붉어지는 갈망과 미화된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그 만큼 사랑의 순간은 수식과 과장, 과잉의 포장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시쳇말로 이들의 사랑은‘불륜’임에도 이를 도덕적 일탈로만 볼 수 없게 하는, “우리는 둘 다 매정하다. 우리는 둘 다 겁이 많다. 우리는 둘 다 내면이 강하다. 우리는 둘 다 이기적이다. 우리는 둘 다 순수하다. ~ 우리는 둘 다 부도덕하다...” 라는 객관적 상황인식의 나열이 등장하는데 짐짓 숭고함으로 위장하는 자기 정당화의 일면일 것이다. 한편, 고독한 천성과 사람을 최소한만 만나면서 영위하는 삶을 최선의 삶이라 생각하는 누경의 성격이나, 간결함과 앞뒤로 토막 쳐 함축된 지나치게 밀도와 강도가 높은 말을 뱉어내는 강주에게서 억제된 삶, 억눌린 감정의 참기 힘든 인내에서 풀려난 욕망을 다시 거둬들일 것이라는 또 다른 세속성을 목격하게 된다. 특히, ‘검은 콩과 매실’로 상징되는 견고하고 안정된 일상에 대한 희구가 두 사람의 짧은 여행이 지니는 의미와 대비되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또한 강주 부부의 안정된 삶과 명예를 지켜 주리라는 자기암시도 궁극의 위안이 되지 못하는 것은 어쩜 미완성의 귀결이 주는 아름다움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미진한 채 남겨둔 채로, 잠간의 남은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이별의 걸음을 내딛는 누경을 이해케 된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속물 같아도 괜찮아, 그래도 섬에 가자.”하던 강주의 말이 그리움이 되어 인후를 아프게 하였으리라. 그리고 깨진 유리병을 녹여 다시금 완성한 녹색화병, 어둠속에서 건져 올린 고통의 앙금까지도 차라리 맑고 투명 했으리 만큼 봉합된 유리병이 전하는 사랑의 의미는 그대로 사랑의 진리가 되어 날아든다. “깨어지지 않는 것이 사랑이야” 그래 “어제의 무게를 내려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추락한다.” 사랑은 지속되는 것이지. 지금 나 역시 새로운 사랑을 꿈꾸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내안에 또 다른 나, 진정한 나, 나의 내부를 응시하는 시선, 적요(寂寥)와 우수, 그리곤 사랑의 아름다운 매혹을 말하는 작가의 진솔한 내면이 다시금 깨어난 작품이란 느낌이다. 선명한 욕구, 일탈과 격렬한 사랑, 그러나 “현재야말로 매순간 얼마나 눈부신 기회인지...”를 말하는 그녀의 전언은 그대로 진정한 삶을 포착한다. 이제 사랑이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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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과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정 조건만 갖추어주면 어떤 망각된 기억이라도 얼마든지 되살아난다. 그렇기 때문에 치매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특히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과거에 얽매여 비정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심한 충격을 경험한 이들은 계속 그렇게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들도 얼마든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이 겪은 일이 아무리 부끄럽고 창피하더라도 정신과 상담을 받을 용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신경정신과 의사의 처방 중에 글쓰기를 통한 치유라는 것이 있다. 이는 그 어떤 처방보다도 효과가 있어 자가 치료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고 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상담 받는 것을 꺼리거나 망설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과거를 껴안고도 얼마든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책은 영혼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글쓰기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누경이란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누경이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충격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는지를 아주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다소 무거운 소재를 사용했는데도 전혀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누경의 심정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누경의 속마음이 담긴 일기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 관찰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누경의 심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한편 저자는 누경과 서강주와의 사랑을 너무나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어 근친과 불륜이란 소재를 가지고도 이렇게 예쁜 사랑이야기를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만약 보통 사람들이 이런 사랑을 했다면 결코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념상 둘 중 하나만 저질러도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의 사랑은 너무나 조심스럽고 순수해 과연 이들의 사랑 나눔을 지탄하고 욕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둘의 사랑이 마치 상처 입은 영혼들이 서로를 보듬어주는 것 같아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애틋한 마음이 들게 한다. 마음의 상처로 인해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바이다. 인상적인 글귀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인생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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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그러나 일반화될 수 있는 생각을 담아내고 있다. 마음은 늘 가까이 있으나 표정과 행동이 그렇게 나타나지 못하는 모습이라든지, 가까이 다가가고 싶으나 거리감을 느끼는 마음 등 미묘하게 흐르는 감정의 편린들이 글 속에 펼쳐진다.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 준다. 우리가 찾을 것을 구하도록 만드는 가운데, 잘 찾아가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언어가 그 길이 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왜 이리 불확실할까 하는 생각을 늘 지녔다. 마음을 내어 놓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하는 야릇한 인물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누경은 30대 중반으로 나온다. 남자를 만나나 깊이 있게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빠져들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 기현을 배려 반, 우연 반으로 만나게 되어 관계가 이어진다.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게 되고, 둘이 섬으로 놀러 가기도 한다. 그러나 같이 가지만 서로 남남처럼 떨어져 움직이게 되고, 마음은 더욱 거리가 멀다. 함께하나 함께하지 않음의 모습이다. 어색한 그러나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함 속에 둘만의 섬 나들이, 그런 가운데 외형적인 거리는 조금 가까워진다. 그 뒤 기현은 보호 본능을 느낄 정도로 누경에게 집착하게 되고, 누경에게 수시로 다가간다. 그것이 누경의 입장에서는 편안하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사랑이란 느낌이 더 중요한데 말이다. 그러면서도 외형적으론 둘이 자꾸 엮여지는 관계가 되니까 누경이 그 분위기를 못 견디게 되고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한다.
그런 가운데 누경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결벽성을 지니는 이유가 담긴 이야기가 액자로 전개된다. 액자는 16세에서 30대 초반까지의 누경의 이야기를 일기로 기록한다. 그 이야기에는 새로운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은 누경의 6촌 친척 서강주다. 누경이 어릴 적 서강주는 누경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 그는 누경에게 첫사랑의 느낌으로 강하게 마음속에 자리 잡는 존재다.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이 어린 소녀의 가슴에 자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 서강주가 그녀가 16세 때 결혼을 하게 되고 그의 결혼식 날 누경은 온 세상을 상실한 느낌을 갖게 되면서 들판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악을 느끼면서, 강주 아닌 다른 남자에 대한 모든 마음을 지우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 후, 누경은 성장을 하게 되고 강주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다. 강주에게는 누경이 어린 동생의 개념으로 존재하여 있고, 누경에게는 강주가 마음의 연인으로 남은 상황에서 그들은 같은 공간 속에 머물게 된다. 한 번 누경이 강주와 같이 길을 걷게 되었을 때, 신발의 굽이 불어지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선을 넘는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사랑이 강주에게는 책임감 비슷하게, 누경에게는 열병처럼 이루어진다. 둘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게 되는 동반 여행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심리적인 거리감을 가지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서로에게 괴리감과 애틋함을 동시에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금기의 상황이 전혀 불결하게 느껴져 오지 않고 오히려 싱그러움으로 다가든다. 그것은 작가의 따뜻한 손질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지닌 한 여인의 마음속에 세상에 대한 거부감이 일고, 그것이 새로운 만남에 대한 힘겨움으로 다가들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아름다운 문체에 애틋한 호흡으로, 밝은 이미지로 채색되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어둡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불륜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것은 여인의 섬세한 마음이 좇는 사랑의 크기 때문이리라.
언어가 참 힘이 있다. 그리고 감각들이 쟁쟁하게 다가든다. 그런 이미지들이 전편을 압도해 나가면서 이야기들을 이끌어가지 않나 생각된다. 이야기 자체는 무거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언어에 있는 듯하다. <5월의 바다는 임신한 생명체같이 싱그러웠다. 배는 시시각각 부풀어 오르는 파란 바다 위를 넘실넘실 흘러갔다. 등장인물도 대사도 없고 장면전환도 없이 화면 가득 끝없이 바다만 펼쳐지는 영화관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작가의 언어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부분이리라. 어두울 수 있는 분위기를 이런 언어들이 메워 나가면서 이야기 가득히 그리움을 심는다. 이 부분은 주인공이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한 장면 속이다.
다음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주고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주인공이 생각을 하는 장면이다.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대목에서 서강주와 같이 있는 누경의 마음속이다.
검은콩과 매실......그처럼 아름답고 탐나는 언어를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나는 입안에 웅얼거렸다. 그가 다시 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음성이 다시 가벼워졌다. 나는 섬 이름을 아득히 흘려들으며 다른 생각에 젖어 들었다. 이 남자는 나와 헤어지면 백화점에 들러 검은콩과 매실을 사서 집으로 가는 것이다. 어쩌면 아내에게 지도를 받으며 매실을 씻어 설탕에 재고 검은콩은 식초에 담글지도 모른다. 얼마나 단단하고 아름다운 일상인가.
그렇게 그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그녀는 실천을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다짐한다. 가족으로서 보는 일 외에는 그를 다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서 그녀의 일기는 끝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 기현을 만난다. 기현은 더욱 애착을 가지고 그를 쫓게 되고, 결별 선언은 무색케 된다. 그 후 그들의 관계는 씨앗이 들어 있지 않는 껍질처럼 만남이 지속된다. 아마 그녀가 어디로 갈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언어가 매끄럽다. 이야기 솜씨가 남다르다. 책을 잡고서 많이 빠져들게 만든다. 일기라는 것이 쉽게 읽히기가 힘이 드는데, 이야기를 담았기에 잘 읽힌다. 그리고 그 일기를 통해서 과거의 일들을 자세하게 알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고 있는 특별한 구성을 하고 있다. 작가의 호흡이 아름답게 열려 있는 글이다. 그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밝게 채색되어 나타날 것 같다. 한 폭의 은은한 동양화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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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 문학동네 ,2010) 사랑 , 그 끝나지 않을 이야기 세상에 태어나 정해진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죽음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정해진 것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몇 몇의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으면서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풀밭 위의 식사』를 읽으면서 더욱더 명징해졌다. 노래방을 가본 사람은 안다. ‘ㅅ’ 중에 가장 많은 노래 제목이 ‘사랑’이고 다른 노래 내용도 다 사랑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 어쩌겠는가 이 많은 사랑들을 전경린은 『풀밭 위의 식사』에서 사랑의 한 편린에 대한 이야기를 자아냈다. 기현 , 서강주 ,하이힐, 치마 누경 , 사랑은 유리 같은 것 『풀밭 위의 식사』는 기현과 누경의 사랑 이야기면서 강주와 누경의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누경과 인서의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것은 거대한 자루 같아서 그 자루 안에는 많고 많은 자잘한 사랑들이 모여 있다. 자고로 지탄을 받을만한 사랑이 더 애틋하던가? 세상의 잣대라는 것은 참 우습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잣대도 들이대지 못한다. 강주와 누경의 사랑이 그러하다. 절절한 사랑이라고 말하면 조금 질펀해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마른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은 하이힐 , 그날의 하이힐 한 쪽이 부러지면서 시작되었다. 시작되어서는 안되는 그런 사랑 따위는 상관없는 일이다. 강주와 누경의 사랑의 정점에서 베를린으로 떠나는 강주에게 치마 선물을 해달라고 한다. 중년의 남자가 치마를 산다는 것은 참 그렇다. 부인에게가 아니면 그다지 선물할 곳도 마땅하지 않다. 강주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부인이 아니라 누경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누경이 아니었을까? 균열된 사랑의 끝은 어쩌면 자명한 것일지도 몰랐다. 누경의 일방적인 통보 ‘앞으로는 사적으로 만나지 않겠다’는 말로 관계는 끝이다. 기현과 누경은 섬으로 여행을 가고 위에서 누경의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누경에게서 밀려난다. 이 도한 사적으로는 만나지 않겠다는 완고한 문자 메시지 한 통으로 끝나는 사랑이다. 하지만 기현은 포기하지 않고 누경의 곁을 지키기로 한다. 안 될 사랑 외사랑이다. 누경의 사랑은 인서에게로 향한다. 불꽃이 튀기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것이 사랑이지 않던가? 기현은 인서와 누경을 담담히 지켜본다. 지켜보는 사랑은 매우 힘들지만 견딘다. “깨어지지 않는 게 사랑이야 어떤 균열이든 두 팔로 끌어안고 지속하는 그것이 , 사랑의 일이야”라고 푸른 병이 사랑에 대해서 말했다. 사랑은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어떤 것이어야 했다. 누경은 깨어진 유리병을 다시 만든다. 이후의 누경의 사랑이 어디로 향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글을 맛있게 읽은 사람은 그 방향을 알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게 되는데 그것은 읽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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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도,삶도,우리 마음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심연의 외줄 위에서 안간힘을 다해 현재를 제어하려는 아둔하고 흐릿하고 가냘픈 의식의 줄타기 뿐이야.그 가난 속에서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p2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