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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피하기 위한 모든 행동을 일컫는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게으름은 때로 삶의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 오기도 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물음들에 대답하지 않았을 때, 그것을 피하기 위해 다만 눈 앞의 순간만에 충실했을 때, 그 순간들의 누적이 나의 삶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낙타>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한 아버지의 여행기이다. 그러나 그 여행은 아들의 영혼과 함께 고비사막을 건너는, 환상 속의 여행이자 이별 여행이다. 생의 가장 아픈 상처에 대해, 이 소설은 절실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든 생의 결말을 먼저 맞이하고 싶어했는지, 나는 그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규를 꼭 끌어안았다. 육체의 실감이 생생했다. 녀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나의 때의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등록금을 못 내 학교에서 쫓겨나올 때, 운동장에 쏟아지던 하얀 햇살이 너무 눈부셔 차마 가로지르지 못하고 그늘에 숨어 교문을 나와야 했다. 울었던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가도 그 순간이 지나면 또 살아지는 것이 아니던가. -61p
두 녀석은 밤을 꼬박 지새운 모양이었다. 밝아오는 새벽을 보며 서로를 들여다봤겠지. 그래도 부족했을 터였다. 삶에 충족감을 느끼는 순간, 인간은 나태해지기 마련이었다. 부족한 것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바쁘게 사는 것에 생의 동력이 담겨 있었다. -118p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타인 혹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상처를 준 것은 언제나 '나'였다. 내가 준 상처 때문에 나는 언제나 아팠다. -49p
느린 낙타를 타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둘만의 여행을 한다. 꿈 같은 시간 동안 나는 앞으로의 긴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서는 여행이다.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나는 필사적으로 묻고, 절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이 또 다음 고비를 맞는 우리들의 자세가 될 테니까.
삶의 고비와 마주선, 또는 앞으로 마주설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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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사막에 비유한다. 어딘가에 반드시 숨겨져 있을 오아시스를 찾아 떠나는 여정.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모래 바닥 속에서도 오아시스를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반복적인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 것. 한 차례 지나간 바람이 만들어 놓은 모래 언덕일 지라도 한 고비 두 고비 넘어가야 하는 것.
머릿 속이든 마음 속이든,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품고 나아가는 사막 위의 인간들은 '신기루'를 경험한다고 한다. 심신이 지쳐갈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열망은 극에 달할 테고, 그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들은 진짜 오아시스의 모습을 한 신기루를 만나게 된다. 비록 곧 사라질 기쁨과 행복이라 해도, 신기루를 오아시스라 굳게 믿었던 그 순간 동안은 온몸을 강타하는 짜릿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신기루는 말 그대로 신기루일 뿐. 오아시스는 아닌 것이다. 그것이 잠시 날 홀렸던 신기루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순간, 사막과 그 사막 위의 인간들은 다시금 고독해진다. '그럴리가 없는데, 정말 오아시스의 모습이었는데. 두 눈으로 똑똑히 봤었는데.'라고 지나가버린 신기루를 하염없이 곱씹으며 힘겨운 한 걸음 두 걸음을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삼천 년 전 어느 날, 테비시라 불리는 돌산에 암각화를 그리던 화가가 있었다. 마지막 한 점을 찍으려던 찰나, 그 화가의 아들은 독사에 물려 죽었다. 태양이 중천에 뜨기 전에 이동해야 했던 부족들은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급하게 화가의 아들을 무덤에 묻고, 어미 낙타가 보는 앞에서 새끼 낙타의 목을 베어 그 무덤을 낙타의 피로 붉게 물들이고는 떠나갔다. 아들은 잃은 화가의 아내는 울음소리를 안으로 삼켰고, 어미 낙타의 긴 눈썹에는 눈물이 매달렸다.
그리고 지금 여기, 지하철에 몸을 던져 생을 끝내 버린 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있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의 옆구리에 절벽 하나를 만들었다. 어떻게든 그 절벽을 넘어보려고 애쓰던 아버지는 삼천 년 전 그 낙타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테비시를 향해 사막으로 떠난다. 사막에서 아버지는 아들 '규'를 만난다. 규와 함께 사막을 헤치고 나아가 태양사슴이 그려져 있는 테비시에 도달한다.
1. 신기루는 거기에 있었고 다만 닿을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손을 내밀어 잡으려던 모든 것이 신기루였을까. 그토록 간절하게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 없었던 신기루들. 잠시 내 곁에 머물던 오아시스 같은 행복들, 혹은 내가 머물렀던 행복을 생각하니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사라진 신기루 앞에서 나아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었다. 살아가면서 또 얼마나 많은 신기루를 만날 것인가. 신기루를 만날 때마다 나는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또 걸어갈 터였다. 그런 사람이 나였다. --- p.27
2. 말은 사막에서 결코 빨리 달리지 못해. 쟤들은 성질이 급해. 빨리 달리려고 하지만 사막이 허락하지 않아. 반면에 낙타는 말처럼 빠르진 않아. 아주 느긋하지. 대신 낙타는 물이 없어도 한달을 버틸 수 있고, 먹지 않고도 위에 저장해둔 비상식량으로 굶주림을 견뎌. 발바닥이 접시처럼 넓고 발굽이 두 개라 사막을 건널 때 모래에 푹푹 빠지질 않고. 모래바람이 불면 콧구멍을 닫고, 모래먼지가 자욱해도 속눈썹으로 막아내지. 언청이처럼 갈라진 윗입술은 가시가 있는 선인장도 먹어치울 정도로 두툼하고 딱딱해. 겨울에는 영하 40도를 견디고 여름에는 영상 40도를 이겨내는 놈들이야. --- p.44
3. 인간은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할 줄을 몰라 끝내 좌절을 경험한다. 그 경험이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되어 있어도 막상 눈앞에 닥치면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으려 하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체험할 뿐이다. --- pp.50~51
4. 행복이란 꿈의 성취에 있지 않다. 꿈을 이루고도 불행해진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지. 지금 당장 몰려오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이렇게 서로 몸을 끌어안고 있는 것, 모닥불에 말똥을 더 얹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는 것, 마음을 다해 서로 이야기 하는 것에 행복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절망보다 더 나쁜 것은 터무니없는 희망이다. 나는 희망이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많이 보았다. --- p.61
5. 걸음마다 잠시 내 곁에 머물던 이름들이 호명되었다. 추억된 이름들이 떠오르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추억을 지우기 위해 빠르게 걸었다. 추억이란 과거의 어느 순간을 왜곡하고 미화하여 편집된, 새로운 기억이었다. 나는 자주 추억에 속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나는 언어의 바깥, 마음의 바깥에서 오로지 몸을 움직여 황무지를 건널 수 있기를 소망했다. --- p.66
6. 눈으로 보는 것, 슬픔이나 사랑이나 죽음 따위를 관념으로 상상하는 것은 결국 허상이었다. 그것은 결코 면도칼로 살을 베어내는 듯한 상처를 남기지 못했다. 오직 몸으로 겪은 것들만 실상인 것을. 육체가 겪어낸 순간들만 기억이 되었고, 상처로 남았다. 이 고비를 넘으면 바람에 날려가는 모래먼지처럼 내 생의 모든 기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규와 함께 했던 날들의 소소했던 추억까지도 고비의 모래 속에 묻혀 다시는 기억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나는 네발짐승처럼 기었다. --- pp.175~176
7. 그냥 죽 가시우. 그곳을 못 찾더라도 너무 실망하진 말고. 가끔 성자들이나 현자들이라는 족속들이 삶이 헛되다는 말을 하는데, 그거 믿지 말고. 헛되든 헛되지 않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소.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것을. 삶이 사막이고 폐허라는 것, 그건 고독한 위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불과하다네. 그것에 속지 마시게나. 자네 얼굴에 그늘이 너무 짙어서 하는 말이니 오해하지 말고. 가면서 그냥 잊어버리시게나. --- p.200
8. 나는 내가 슬펐다. 슬픔에는 윤리도 논리도 들어 있지 않았다. 상처는 상투성에서 비롯되었다. 생활과 작품과 상상력의 상투성에 사로잡혀 옆구리의 절벽만 자꾸 높였다. 차라리 절벽 끝에서 아득한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던져야만 했었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절벽을 긁으며 다시 올라와야만 하는 것이었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엇이 두려워 머뭇거렸던 것일까. 게다가 엄살은 또 얼마나 심했던가. 나는 내가 불편했다. --- p.218
아버지와 규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규는 유목민 여자아이 체첵과 살랑거리는 로맨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규는 바람과, 나무와, 양과, 낙타와 이야기를 나눈다. 사막을 건너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삶의 면면들, 그 동안 아들 규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들, 규에게 해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말들이 펼쳐진다. 책의 거의 모든 곳에 밑줄을 치고 싶을 만큼 작가의 문장은 '진짜 생'에서, '진짜 경험'에서, '진짜 상처'에서 만들어졌음을 느꼈다.
"초원과 사막에 서면, 문명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길의 뼈가 보입니다. 그 뼈 위에서 나는 떠도는 집을 꿈꾸었습니다. 일체의 시멘트벽과 장식이 없고, 오로지 뼈로만 이루어진 집을 꿈꾸게 된 것은 아들을 잃고 난 이후였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작은 깨달음을 맞바꾼 셈이지요. 그러나 많이 아팠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구체적인 고통과 상처를 끌어안고 나는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내게 있어 길이란 바로 소설쓰기이며, 떠도는 집이란 소설입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작가에게는 대체 어떤 깊은 상처가 있길래 이런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낙타와 함께 한 그의 기나긴 사막 여행이 실은 옆구리의 절벽을 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픔과 그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떠도는 집이라해도 이 소설에 잠시나마 머물 수 있어 행복했길, 그리고 이를 통해 절벽을 넘을 수 있는 튼튼한 몸을 얻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사막 같은 우리 인생에 사실 오아시스라는 건 없을 지도 모른다. 테비시로 향하던 주인공이 만난 한 노인의 말처럼, 삶이 헛되든 헛되지 않든, 오아시스가 있든 없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살아 있으니까, 사실 오아시스의 유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평생 곁에 있을 것만 같다가도 어느 한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들의 연속. 사막의 모래처럼 까끌거리는 우리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건 사실 그 신기루들의 기억이 아닐까? 없어지고 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없어지고 나서도 두고두고 곱씹는 기억들. 잠시나마 내 곁에 머물렀던 신기루를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으며 또다른 신기루를 기다리는 것. 그러면서 나아가는 것, 그게 인생이 아닐까?
그것이 잡을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 다른 신기루를 만날 수 있다면야 난 기꺼이 두 발을 힘차게 내딛겠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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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영혼의 속도로 걷는 동물이란다... 그래선지 낙타의 눈속엔 깊이를 알 수 없을 고독과 영겁의 세월과 존재에 대한 신들의 전언이 담겨 있는듯 하다.
낙타...라는 제목의 소설...
정도상...이라는 조금은 낯선 작가...
소설 낙타...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녹아든 한편의 지독한 슬픔과 뼈져린 아픔의 되새김질이다.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가 안고 있는 고통과 회한의 기억으로부터 한발짝 물러서게 되고 먼저 간 아들에 대한 집착을 거둘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아비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린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사람이다. 아들은 무슨 연유에선지 지하철에 몸을 던져 스스로의 청춘을 마감한다. 그리고 아비는 가슴에 묻은 아들의 기억을 고통스럽게 안고 몽골 고비사막으로 향한다.
생의 고비를 넘기 위해 고비 사막을 택한 아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행의 길을 선택했듯 아비는 고통의 본질과 마주하기 위해 스스로를 황량하기 그지없는 그곳으로 던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들의 영혼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그 여행은 아들에 대한 사랑과 아들에 대한 아비로서의 회한을 통렬하게 아프게 되짚어가는 고행이다. 여행을 통해 아비는 아들에게 못다한 사랑을, 삶에 대한 깨달음을 가르쳐주고자한다. 그런 가르침을 통해 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기를, 그래서 아비 옆에 굳건히 서서 함께 생의 길을 가기를 바랬으리라. 그러나......이미 아들은 영혼이 된 상태...
그들의 여행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참으로 슬프고도 아름답게 빛이 난다. 읽는 내내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 그 필연적인 인연에 대해, 부모의 자식을 향한 무한한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먼저 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슬픔이 내게도 전해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행의 막바지....... 아비는 아들을 놓아줄 때가 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들의 영혼에 자유를 주는 것임과 동시에 아비 스스로 채운 족쇄를 풀고 마음 속 고통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어느덧 아비의 마음속에 아들은 춤추는 별이 되어 박혔다.
시종일관 잔잔하지만 그래서 더욱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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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부분에 나오는 낙타의 예화가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한 동간 내버린다. 독사에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자식의 묘를 표식하기 위해 아기 낙타의 목을 베어서 묻어두는 그 유목민들의 방식이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낙타의 GPS를 통해 거대한 초원의 자리를 기억해야 하는 유목민들의 삶도 무시할 수 없다.
소설은 어느날 갑자기 지하철에 몸을 던진 아이의 영혼과 몽골 초원을 여행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프게도 소설가의 진짜 생도 그랬다니 너무 슬픈 일이다. 실제로 인터뷰에서 본 그의 사진도 한끝이 달아난 것 같은 슬픈 모습이 남아있다.
그가 찾아가는 곳은 테비시다. 테비시는 몽골 초원의 돌산에 태양 등의 그림을 그려둔 것이다. 아들 규를 잃는 나는 형섭과 함께 몽골을 향하고, 길에서 형섭이나 트럭과도 헤어진다. 그때 아들 규가 내 옆에 나타나서 길을 간다. 그리고 둘은 대화를 한다.
“유목의 전제조건은 되도록 적게 소유하는 거야. 많이 가지면 떠나기가 어렵거든. 사랑도 마찬가지야. 누구나 한번쯤은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지. 청춘의 날들을 보내면서 사랑에 목숨을 걸어보지 못하는 것도 불행한 일이야”(55P)
“나는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생의 고비를 힘겹게 건너고 있었지만, 숙자는 생의 고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자처럼 강한 의지로 가족을 지켜내고 있었다”(132P)
책에서는 조금 설익은 아포리즘이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쯤은 무시하기로 했다. 어떻든 이전에 나는 정도상의 소설을 몇 번 들지도 못했지만 하나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꼼꼼히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나 역시 그와 같이 슬픈 인연이 있어서 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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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가슴에 오래 지워지지 않을 사막을 만나게 되었다. [어린왕자]를 읽었던 10대 시절, 어린 왕자가 쓰러지던 사막의 풍경이 아주 오래 마음에 남았다. 20대에 읽은 르클레지오의 [사막]은 라라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며, 신선하고 성스러운 땅이었고 라라가 살고 있는 도시가 차라리 삭막한 사막이었다. 이제 이 나이에 또 하나의 사막을 만나고, 암각화가 새겨진 사막의 돌산들이 가슴에 먹먹하게 오래 남아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이 사막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영역이 사막이 될 수도 있음을, 그런 사막을 모래바람을 견디며 건너야하는‘낙타’가 바로 우리 모두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아들과 함께한 여행은 아들을 온전히 보내기 위한 노력이며 작가가 살고 있는 자신의 사막 안으로 씩씩하게 돌아오기 위한 충전의 기간이다. 아주 조용한 사막 속에서 도시인이 흉내 낼 수 없는 유목민의 삶의 속도와 깊이로 자신의 삶 전체를 되새김질한다. :
이제 나는 주인공이 다시 소심낙타를 타고 자신의 사막을 걷고 있으리라 믿는다. 모래 바람이 심한 날은 콧구멍을 막으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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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라는 동물.... 태풍이 불어와도 꼼짝없이 느릿느릿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만 같은 오묘한 동물. 예전까지는 한 번도 낙타라는 동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와 함께 여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강인함으로 똘똘 뭉쳐진 영물이 아닌가 싶다. 그 거친 모래 사막 위에서 바로 지워질망정 또각 또각 자신의 발자욱을 남기고 앞으로 걸어가는 낙타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진중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단테의 신곡을 따라 여행하고 싶다, 생을 리셋하련다라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15년 6개월의 어린 삶을 스스로 마감한 아들은 작가에게 끊임없이 삶의 이유를 묻는 듯하다. 그 대답을 찾기 위한 듯 시작된 몽골 고비사막으로의 여정 속에서 저자는 수많은 나와 너를 마주대하고 마침내 저 밑바닥에 홀로 웅크리고 있던 순수한 영혼을 꺼내 올리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동안의 모든 삶의 여정이 켜켜히 쌓아 올려졌을 그 영혼의 목소리를 이제야 들을 수 있었고 그리고 그 여정이 끝날 즈음에야 마침내 아들 ‘규’를 떠나 보낼 수 있었음이다. 여행이 즐거웠다며 작별을 고하는 그 장면에서 나는 드디어 그가 자신을 용서하고 미처 손 써볼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난 아들도 용서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살아가는 진짜 여정의 길 위에서 이제 조금은 편안하고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 것은 아닐는지. 고비 사막에서 그가 만났던 많은 유목민들. 그들이 전해준 소박하지만 인간적인 우정들이 인생의 단비처럼 느껴져 실제로 한 번쯤 그들과 조우했으면 하는 바램마저 들게 했다. 그 순수한 삶 속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멋지게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자니 오늘 하루도 허덕거리며 살아간 내 삶이 너무도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 다정한 눈길,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숨결, 갓난아이의 보채는 소리, 양떼의 바스락거림, 말똥이 일으키는 불꽃, 낙타 새깨의 젖 빠는 소리, 이처럼 사소한 것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을 만들어 내는 부부 앞에서 내가 한없이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곳에서 나는 배터리가 떨어진 MP3나 신호를 받지 못하는 손전화 같은 존재였다.” - P. 122 중 목적 아닌 목적을 위해 쉼없이 달려온 내 삶이 이렇게나 부질없어 보인적이 없었다. 나를 희생하고 때로는 타인의 희생까지도 강요하면서 내가 획득해 온 것들이 지금 내 옆에서 나를 비웃는 듯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또 다시 저질러야 하는 예견되지 않은 악행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눈을 감아 버렸다. 등골의 서늘함을 강하게 느끼면서. 나에게도 저자와 같은 사막여행이 필요했었던 건 아니냐고 슬그머니 묻고 싶어졌다. 언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너란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느냐고, 살아오면서 내 가슴에 날카롭게 그어졌을 상처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치유해 준 적은 있느냐고 말이다. 그저 고통스러움도 묵묵히 견뎌야 하는 게 인생이려니 싶었다. 남들 다 그렇게 산다는 거 나도 알고 그들도 알고 생이 다 하는 날 까지 비루하게 이어지는 삶의 부록같은 것일 뿐이라고 애써 위로하면서 참으로 잘 견뎌왔다. 그렇지만 순간순간 놓아버리고 싶었던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때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마음을 추스렸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 허해지고 삶의 목적은 불분명해졌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제 나도 여행을 시작하고 싶어졌다. 새로운 기대와 흥분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일상적인 여행이 아닌 내가 이미 걸었던 길을 다시 거꾸로 돌아가는 그런 여행 말이다. 그리고 천천히 묻기 시작할 것이다. ‘ 넌 누구니? '라고. 이 물음에 스스럼없이 대답할 수 있는 날 나는 이 삶을 계속할 이유와 용기를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래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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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슴속에 사막이 있다. 한때는 커다란 산이었을지도 모를 모래가루가 쌓여 다시 산이되는 그런 사막!
세상 어떤 문명의 이기로도 손쉽게 건널수 없는 그곳에는 오로지 낙타만이 어떻게 사막을 건너야 하는지 알고있다. 사나운 바람으로 길이 묻혀도 그네들은 바람의 냄새만으로 혹은 태고적 기억으로 용케 내가 건너야 할 그고비를 묵묵히 건너게 해주는 안내자이다. 자신의 몸과 혼을 나누어 태어난 아들에게 몽고의 사막땅을 건너 흉노가 그렸다는 암각화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한 아버지가 열여섯해를 살다 하늘도 떠나버린 아들과 함께 떠난 기행문이다. 아니 치유되지 못한 아픔을 이기고 보내지 못한 아들을 떠나보내는 진혼굿이고 씻김굿이다.
다른 아버지보다 달랐던게 있었다면 밥이 안되는 글을 쓰고 상금 5천원을 걸고 어린 아들과 국토대장정을 감행했던 무모하고 용감했다는것 밖에...그의 아내의 말처럼 철이 덜난 남자였을 뿐이다. 오히려 다른 어떤 아버지들보다 아들과 소통한다고 믿었고 그녀석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끔찍하게 지하철에 몸을 던진 아들의 소행은 그의 옆구리에 높은 절벽을 만들었다. 때로는 유체이탈을 하듯 공중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들이 생겼고 끊임없이 그 절벽에서 몸을 던지는 상상에 빠졌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서라도 절벽을 긁으며 다시 올라오기위해 테비시로 향한다. 미술을 하고자 했던 아들녀석과 꼭 함께 가겠다고...녀석이 죽기 열흘전 약속했던 그곳으로 말이다. 어린왕자는 사막이 아름답다고 했지. 우물이 숨어 있어서...하지만 몸밖의 사막이든 몸안의 사막이든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노을지는 어느 한때 별이 쏟아질것 같은 깜깜한 밤에 잠깐 아름답다고도 생각했지만 뜨거운 한낮의 태양앞에서는 낙타보다도 못한 인간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가혹한 땅이었다. 가지 않으면 도저히 평생 아이를 놓아주지 못할것 같아서 아비는 죽은 아들녀석을 불러내어 같이 사막을 건넜다. 분명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그아이는 여전히 아비를 시시하게 여기고 MP3에 몸을 흔들거리는 보통의 아이이건만 제나이에 비해 허영이 너무 컸어. 윤활유같은 허영정도였다면 지금쯤 너는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뺑뺑이를 도는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아비의 곁에 있었을 것을...아비역시 목숨걸고 건넜던 그 황량한 사막땅을 뒤로하고 결국 너를 만났잖니...너도 언젠가 너를 닮은 아들녀석을 가질 수도 있었을텐데.. 너무 무심했을까. 꼭 그길이어야만 했을까. 아비는 듣고 싶었다. 왜그랬냐고. 후회스럽지 않았냐고. 너를 사랑했던 가족들과 헤어져 그곳에 가니 더 행복하냐고...하지만 아비는 많이 묻지 못했고 아이는 적은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이 고비를 넘으면 바람에 날려가는 모래먼지처럼 내 생의 모든 기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175p
나역시 시간이 모든 기억들을 지우고 아비와 아이의 소망처럼 생을 리셋하고 싶다. 아비가 살았던 역사의 소용돌이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너무 깊었다. 허무하게 보내버린 사람들에 대한 기억도 버려졌던 어린시절의 슬픈 기억도 낙타를 불러 하늘도 떠난 아이와 함께 그렇게 사라졌으면 좋겠다. 입속에서 서걱거리는 모래를 내 뱉으며 이제는 단단한 땅위에 서서 이렇게 외쳐주었으면 좋겠다.
'초원에선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어. 그저 현재를 열심히 사는거지. 우리는 언제나 불안한 시간 속에서 살지. 죽음은 삶처럼 흔하니까. 그게 자연이고.'-38p
죽음처럼 깊었던 어제로는 떠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아비가 정신을 차려 이렇게 큰소리로 외쳐 주었으면 좋겠다.
'개찬타 개찬타 개찬타..' 그의 황량한 영혼을 치유해주는 주문을 외우면서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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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 년 동안 나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허파에 시퍼렇게 피멍이 들도록 속울음을 참으며 겨우 살았다.(23)
사랑하는 아들이 짧은 유서만을 남긴채 훌쩍 떠나버린 후, 아버지는 삼 년 동안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거다. 얼마나 속울음을 울면 '허파에 시퍼렇게 피멍이' 든다는 표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아마, 허파뿐 아니라 아버지의 속은 온통 시커멓게 타버렸을 거다. 그리고 삼 년의 세월을 견뎌낸 후, 아버지는 옆구리에 생긴 절벽을 넘기로 한다. 마음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몸으로만 넘을 수 있는 절벽이었다. 아버지는 고비 사막에서 생의 고비를 넘고자 했고, 소설로 그 모든 걸 녹여내었다. 이는 소설 속 이야기이기도 하고, 정도상 작가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기루는 거기에 있었고 다만 닿을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손을 내밀어 잡으려던 모든 것이 신기루였을까. 그토록 간절하게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 없었던 신기루들. 잠시 내 곁에 머물던 오아시스 같은 행복들, 혹은 내가 머물렀던 행복을 생각하니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27)
인터넷에 연재할 때도 챙겨보았던 소설이었다. 소설이 연재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작가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소설이 소설로만 보일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은 가끔은 독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약이 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후자였다. '약'이 되었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이후 소설 속 아버지의 마음이 무척이나 사실적이고 더욱더 애절하게 다가와 소설의 한 문장도 허투로 보아넘겨지지 않고 소설 속의 어느 한 감정도 공허하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온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재글을 만나던 어느 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 속에 아주 커다란, 하지만 야트막한 봉분을 가진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무덤은 온통 까만천으로 뒤덮여 있었고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무덤 위에 있었다. 여자는 터지는 울음을 참지도 못한 채 작은 소반에 차려진 밥을 힘겹게 꾸역꾸역 입에 넣고 있었고, 남자는 그 옆에 서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이제는 보내줘야해"라고 말을 했다. 남자는, 그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정도상 작가의 얼굴이었다. 내가 작가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작가의 글을 읽어본 적도 없는데 감히 주제넘게 이런 꿈이라니, 싶은 마음에 어이 없기도 했지만, 꿈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연재글을 읽던 당시에도, 이렇게 책으로 다시 읽게 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생의 한 고비를 간신히 넘으면 또 만나게 되는 고비, 어쩌면 나는 그 고비를 건너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고비의 한복판에서 나는 물었다.(49)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아들을 잃은 슬픔이 아니라, 아기 낙타의 탄생, 유목민 아기의 탄생, 춤추는 별의 탄생이라는 세 번의 탄생을 통해 '온갖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독자는 소설속의 '온갖 상처'만을 너무 들여다 보려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위의 꿈을 꾸고, 아직까지 떠올리고 있는 것도 그 흔적이 아닐까). 너무 깊은 아픔에 빠져들어버렸다. 그래도 지속되는 삶이라는 게 있다는 걸 잊고 말이다. 이제야 드는 생각은, 이 책은 작가 마음속의 슬픔을 만천하게 알리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읽는 이에게 어떤 동정이나 슬픔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쓴 글도 아니다. 삶이란 고비를 넘는 것과 같다는 것, 고비를 넘고 또 고비를 하나 넘고 또 다른 고비를 하나 넘으며 그렇게 끝도 없는 고비를 넘으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말해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항상 '고비의 한복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말마따나 '숨이 막혀 곧 죽을 것 같다가도 그 순간이 지나면 또 살아지는 것이 아니던가', 삶이라는 건.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혼돈이 별로 탄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65)
작가는 그 안의 많은 상처와 고통의 시간으로 단련한 혼돈을 『낙타』라는 별로, 춤추는 별 하나로 탄생시켰다. 그 혼돈이 얼마나 깊고 어두웠을지 짐작이 가기에, 아니 감히 짐작도 할 수 없기에 이 춤추는 별의 탄생 앞에 더욱더 경건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읽고 쉽게 느끼고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때론 울음을 삼키느라 힘겹기도 했지만, 먼 옛날 흉노족의 화가가 한 점 한 점 정성스레 쪼아 그린 암각화처럼 작가가 한 자 한 자 그의 내공을 다해 그려낸 문장들 앞에 때론 숨이 막히고 때론 감동하고 때론 삶을 배웠다. 수많은 문장들에 밑줄을 긋느라 자주 손을 멈추었다.
세상의 모든 양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 초원을 밟지 못하나니. 어제의 말에서 내려 두 발로 오늘의 대지를 밟아라!(156)
죽어버린 아들을 사막 모래속에 묻고도 어미는 역시 새끼를 잃은 낙타의 등에 올라타 떠나야만 하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어제의 말에서 내려 두 발로 오늘을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 삶이다. 내 삶의 고비를 낙타의 걸음으로 넘는 방법을 조금쯤은 배운 것 같다. 더 이상 혼돈에만 머무르지 않고 춤추는 별을 탄생시킬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다. 규와 아버지의 여행을 투명 낙타처럼 따라 걸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규의 인사처럼, 저도 여행 즐거웠습니다.
_ 마음으로 절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절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몸이었다.(14)
_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타인 혹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상처를 준 것은 언제나 '나'였다. 내가 준 상처 때문에 나는 언제나 아팠다.(49)
_ 추억이란 과거의 어느 순간을 왜곡하고 미화하여 편집된, 새로운 기억이었다. 나는 자주 추억에 속았다.(66)
_ 언어가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득한 순간들이 많았다.(92)
_ "나는 그냥이라는 말이 참 좋더라. 특별한 이유는 아니면서 그것만큼 확실한 이유도 세상에 없는 거 같아."(164)
_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해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쓸쓸해지기도 하는 존재였다.(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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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는 것, 슬픔이나 사랑이나 죽음 따위를 관념으로 상상하는 것은 결국 허상이었다. 그것은 결코 면도칼로 살을 베어 내는 듯한 상처를 남기지 못했다. 오직 몸으로 겪은 것들만 실상인 것을, 육체가 겪어낸 순간들만 기억이 되었고, 상처로 남았다. 이 고비를 넘으면 바람에 날려가는 모래먼지처럼 내 생의 모든 기억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175쪽에서
"영혼이 게으른 것을 상투성이라고 해. 대충대충 일을 하고, 적당히 흉내만 내고, 금방 싫증내며 귀찮아하고, 진부하게 상상하고, 자신의 처지에 안주하는 것 말이야." ...............................237쪽에서
제목이 '낙타'인 이유는 짐승 중 낙타만이 유일하게 영혼의 속도로 걷는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흠....정말 마음 한켠을 너무 아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작가 본인이 실제로 아이를 잃고 그 아이를 위한 진혼곡을 울리는 심정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너무 처절하다. 자살이라는 것은 정말 사람들을 옥죄인다. 얼마전...나도 그런 마음의 흔들림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나만 떠나가버리면 나는 더 이상 고통스롭지 않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누구나 자살이라는 것을 한번쯤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어린시절에는 잘난 형제들을 보고 나를 비교하면서 고통 속에서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들은 내가 없어져서 나에게 잘못한 것을 후회하겠지..라는 생각을 한 기억도 난다.
자살이란 것은 어떤 마음이 그렇게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일까? 작가는 아이를 잃었다고 한다. 자살로....그 아이가 중2였다고 한다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 그렇게 잘 자라던 아이...아빠와 허물없이 이야기도 많이 하던 아이...그렇지만 작가 스스로가 아이와의 단절가운데서 자살은 자라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별은 정말 예기치 않은 고통을 수반한다. 지금 우리 딸아이가 중2다.
이 책을 손에 쥐면서부터 그리고 읽고 난 지금도 아이에게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잘 자라는 듯 하다가 어느날 떠나버릴지도 모르니 잘해주어야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쉽게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어쩌면...아들아이에게 못다한 이야기를 하려다보니...아이가 대화를 하지 않고 대화를 단절해버리고 가 버린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으로 작가는 그렇게 쉽게 쉽게 글이 읽히도록 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어려워서 이별을 하려는 마음을 붙잡지 못할까봐 말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얼마나 참혹했을지...작가의 심경이 느릿느릿한 영혼을 지닌 낙타와의 동행과 함께 담겨 있다. 책을 읽는 내내. ...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도대체 그 아이는 왜 그렇게 가야만 했을까? 작가 자신도 묻고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가야만 했니.......다른 독자들은 글을 읽으면서 왜인지 알아냈을까?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던 기억이 난다고 짧은 순간 고백을 한다. 아주 짧은 순간...그 말을 했던가? 싶을 정도의 찰나에 말이다.
몇일전 아들(작은 아이)과의 마찰이 있었다. 아이와 나는 다른 곳에 존재했던듯한...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다. 그래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아이를 나만 바라보도록 억지로 고개를 돌려놓았다. 고개는 돌려놓았는데...이제는 어떻게 해야하나? 아이를 둘 키우다 보니..참...한 아이가 조용하면 또 한아이가 소리를 내고....그 소리를 진정시켜주다 보면 또 다른 아이가 소리를 낸다. 언제 그런 소리가 날지는 짐작할수 없다.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끔은 두려움으로 고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사랑으로 다가오기도하고 말이다. 작가의 마음이 위로가 되었기를...이책을 통해서....규도 좋은 길로 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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