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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언어의 풍경 - 곽경효,『달의 정원』
곽경효의 『달의 정원』(시학, 2011)은 소통을 꿈꾸는 존재의 언어들로 물들어 있다. 소통을 꿈꾼다는 것은, 돌려 말하면 지금 이곳에서 타자와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상처’라는 시어가 오롯하게 부각되는 여러 시편들, 이를테면 「거울을 보다가」, 「벼랑에 서다」, 「소통」, 「바람의 언덕」 등에 드러나듯, 소통은 이 세상에서 상처 입은 존재의 아픔을 치유하는 시적 계기로써 작동한다. 소통의 이면에는 상처 입은 주체의 아픔이 존재하고, 상처의 이면에는 소통하고 싶어하는 주체의 열망이 존재한다. 소통과 상처에 새겨진 이러한 역설을 시인은 “절망 위에 피어나는 참혹한 사랑”(「벼랑에 서다」)으로 표현한다. 「벼랑에 서다」라는 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참혹한 사랑의 시학은 ‘벼랑 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소통을 향한 존재(시인)의 의지를 그만큼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허공에 몸을 던졌다 목소리를 버리고 시간을 버리고 노래는 이미 이 세상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 「벼랑에 서다」 1연 벼랑에서 허공으로 몸을 던진 사람들을 ‘참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상인들의 시선이다. 그들에게 그것이 참혹하게 보이는 이유는, 일상인들은 결코 죽음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벼랑에서 몸을 던진 사람들의 사건에 시인의 시선이 개입하는 순간, 시는 일상의 차원에서는 배제될 수밖에 없는 죽음의 영역을 시의 세계로 불러들이게 된다. 허공에서 몸을 던진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사는 것’이다. 죽음을 산다는, 이 역설적 상황을 시인은 “목소리를 버리고 시간을 버리”는 상황으로 묘사한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무언가(여기서는 물론 목숨이다)를 버려야만 “노래는 이미 이 세상 누구의 것도 아”닌 세상이 도래한다. 이 세상 누구의 것도 아닌 노래는 익명적인 노래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벼랑에서 뛰어내린 존재라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개별적인 존재의 느낌을 표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자기(자아)를 버림으로써 새로운 자기(자아)를 얻는 역설의 풍경은 시인이 이야기하는 참혹한 사랑의 풍경에 그대로 드리워져 있다고 하겠다.
“참혹한 사랑”은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어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문제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시(인)의식이 벼랑에 몸을 내던지는 상징적 죽음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점에 있다. 상징적 죽음은 죽음을 ‘사유하는’ 자아마저도 가차 없이 끊어내는 정신적 고통을 수반한다. 벼랑 위에서 한 발자국을 떼는 것만으로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뒤섞이는 한없이 두려운 상황이 벌어진다. 이러한 상황을 스스로 감내해야만 죽음을 넘어서는 어떤 세계(선禪의 세계는 아마도 이런 세계이리라)를 시의 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다. 관념과 현실 사이, 혹은 이상과 실재 사이에 드리워진 고통의 심연을 시화하고 있는 곽경효의 시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죽음의 역학과 무관할 수 없다고 하겠다. 한때는 꽃잎 지는 소리에 잠을 설치고 구름을 따라 멀리까지 떠돈 적도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막다른 골목길 끝에서 입속에 날아든 모래를 씹으며 깨달았다 슬픔이 얼마나 고요한 것인지 살아있음이 얼마나 선명한 멍 자국인지 - 「벼랑에 서다」 2연 꽃잎이 지는 소리에 잠을 설치고, 구름을 따라 멀리까지 떠도는 일은 이상을 갈망하는 보헤미안적 존재라면 누구나 (생각/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일을 아무나 할 수 없는 ‘개별적인’ 일로 만들어 내는 데 있다. 집을 떠난 존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상처는 “슬픔”이라는 시어로 이어지고, 그것은 “선명한 멍 자국”이라는 이미지로 다시 이어져 지금 이곳의 시적 주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환기한다. 사람들이 몸을 던진 벼랑에서 돌아와 “선명한 멍 자국”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의 슬픔을 느끼는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벼랑 끝에 서서 / 다시 소통을 꿈꾼다”고 시인은 이 시의 4연에서 말하고 있다. ‘다시’라는 반복어에 새겨진 시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집으로 돌아온 존재는 계속해서 “참혹한 사랑”을 꿈꾸고 있다. 상징적 죽음의 과정을 이행하지 못한, 다시 말해 자기(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존재의 비극이 참혹한 사랑의 밑바탕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집-벼랑-집으로 이어지는 순환 고리가 결국은 참혹한 사랑의 시학을 낳는 해석학적 순환의 고리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꿈꾸는 참혹한 사랑은 따라서 “차마 함부로 기댈 수 없는 / 이 아찔한 난간”(「난간에 기대어」)이란 시어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시적 주체를 끊임없는 불안(두려움) 상태에 빠뜨리는 실존적 원인으로 나타난다. “한 장의 깃발로 힘차게 펄럭이고 싶은” “혁명의 꿈”(같은 시)을 그는 갈망하지만, 아찔한 난간(벼랑) 아래로 뛰어내리는 상징적 죽음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만큼, 그것은 목숨을 건 도약을 시적 주체에게 요구한다. 목숨을 걸어야 혁명의 꿈을 이룰 수 있고, 목숨을 걸어야 벼랑(난간) 위에서 주저 없이 뛰어내리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다. 존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이 모험(꿈)의 여정 속에서 시인이 찾은 것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길이다.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물들어 있는 이 길은 바깥에서 입은 상처(흉터)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일로 펼쳐진다. 몸에 새겨진 무늬를 가만히 만져 보네 아픔이 눈물처럼 온몸에 번져 가네 흉터는 내부로 들어가는 길 내가 가진 여러 개의 마음들이 자꾸만 그 길로 걸어가네 때로는 절망이 위로가 되기도 하네 환하게 꽃이 피기도 하지 저 깊은 그늘 속에 잠시 쉬었다 가네 지금은 다만 꽃이 진 자리만 얼룩으로 남아 지독한 내 사랑이 눈물겹다 말하네 오래된 상처가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네 긴 시간이 지나간 네, 발자국 - 「화석」 전문 위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오래된 상처가 /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네”라는 시구라고 할 수 있다.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존재는 물론 벼랑에서 돌아와 회한에 빠진 시적 주체이다. 회한에 빠진 주체는 과거(기억)의 흔적이 새겨진 흉터를 ‘들여다보며’ “지독한 내 사랑”을 눈물겹게 고백한다. 요컨대 내면의 흉터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지독한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지독한 사랑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적 주체의 시선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몸에 새겨진 무늬(흉터/상처)를 따라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은, 달리 말하면 몸에 새겨진 아픈 기억에 내몰려 시적 주체 스스로 바깥과 단절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긴 시간이 흐르면 상처는 아물겠지만, 그 흉터가 빚어낸 내면의 기억(아픔)은 여전히 얼룩처럼 남아 있다. ‘화석’이라는 제목처럼 얼룩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내면의 흔적, 곧 이미지이다. 바깥과 단절된 채, 그러면서도 바깥의 얼룩인 흉터를 들여다보며 시인(시적 주체)은 자기(자아)의 아픔을 스스로 위무해야 하는 시적 순환구조에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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