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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곱게 친 채에 걸러서 만든 부드러운 떡처럼, 그렇게 쉽고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우리가 크리스마스로 지내는 12월 25일 이란 날짜가 실제 탄생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 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저자가 주는 '의심'에 대해 쉽게 수긍이 갔기 때문이다.
동정녀를 통한 탄생에 대해서 의심을 해 보았었나!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보아도 예수께서 0물 위를 걷는 기적은 의심을 해 봤어도 동정녀탄생은 의심해 본 기억이 없다.
신자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비판적 사고가 결여되어 그런지 믿어졌고 지금도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정자와 난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수정이 되는 것은 생물학적인 일인데 여기에 '초월'이 결합되면 결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이론이다. 또한 위대한 영웅의 탄생도 아닌, 십자가의 형틀에서 고통스럽고 잔인한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한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 굳이 탄생신화를 만들어 낼 필요성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후대에 와서 추종자들의 하수적인 습성으로 신격화시키고 과장하고 왜곡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기본적인 틀을 새로 짜거나 창작하거나 했을 것이란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서 동정녀탄생에 대해서 믿어진다.
하지만 예수의 어린시절을 저자와 함께 살펴보니 내가 너무 쉽게 성경에 쓰인대로 사고하고 단순히 따라가고 있었다는 것은 뼈아프게 느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든, 사생아이든 예수는 인류의 보편적 관습인 결혼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늘 열외의 생명으로 취급된 것 같았다. 조롱과 곁눈질꺼리의 생명으로, 가난하고 무식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났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내일, 서울시장이 시민들에게 무상급식 찬반투표를 하러 나오란다. 결코 경제불황에 이런 편가르기식 싸움을 붙이는 부족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지는 않아도 시민들을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것이라며 자신의 아래로 보는 그 교만함과 무지함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지난 주, 광복절날 영등포역에 볼 일이 있어 갔는데 뜻밖에도 길을 잘못 들어 으슥하고 한적한 공터에 들어가게 되었다. 젊은 남자, 나이 든 남자, 그 곳에선 모두들 맨 땅에 누워서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깨어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절망에 절은, 희망이라곤 없는 눈빛으로 낯선 우리 가족이 무척이나 불청객인 듯 싶은 얼굴들만이 보였다. 가까스로 길을 찾아 나오니 '요셉의원' 앞이었다. 아! 여기가 바로 뉴스에서 보았던 그 곳이었다니...
배고픔의 문제, 결코 투표로 결정지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보았다. 죽어가는 사람들, 한 낮에 희망도 삶에 대한 의지도 없이 길 곳곳에 아무렇게나 죽은 듯 잠에 빠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어야 인간이다.
마침 공휴일이라서 광야교회의 무상급식소도 철문이 닫힌 상태였다. 실망이 밀려왔다. 공휴일엔 밥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나... 종교단체의 구제가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배고픔의 문제를 개인이나 종교단체에게만 맡겨 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어렵고 가난하며 천대를 받으며 자라온 예수의 성장과정이 더욱 더 내게는 단순히 극복해야만 할 콤플렉스가 아니라 대다수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양질의 환경 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집착하는 예수의 편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있고 유연한 해석을 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난한 자들에게까지도 배신을 당한 결론만을 가지고서 너무 쉽게 예수의 속뜻을 단정지어 버린 것이 내게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니까 당연히 이렇게 했지 라고 사고하지 않고 지나친 부분들에 대해 촘촘하게 대하는 자세가 생긴 것 같다. 분명, 이 책은 대단한 필력을 갖춘 작가가 쓴 것이라서 어렵지 않게 술술 읽을 수 있고 근거자료에 대해서도 신뢰가 갈 정도로 많은 이론과 문헌을 섭렵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방향성에 대해서만큼은 각도가 다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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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콤플렉스… 세계 4대 성인 중 한명이고,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신으로 추앙을 받는 예수가 콤플렉스가 있다. 하.. 참 도발적인 제목을 선보인다. 도대체 뭐하자는 애기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가 되면 사찰에 들어가 찬송가를 부르는 개신교의 사람들과 한판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참모습을 보겠다는 것인지, 것도 아니면 혼자 글을 쓰며, 만족하겠다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제목이 매우 자극적이고, 그 자극 만큼 책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저자를 보니 저자는 개신교의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헐, 그럼 좀더 종교적인 애기를 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저자를 소개하는 글은 그 또한 그닥 평탄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도대체 이책의 실체가 무엇일지 궁금증은 계속해서 자극을 한다. 예수의 콤플렉스의 시작은 내재과거아에서 시작했다고 저자는 주장을 한다. 내재과거아는 휴 미실다인의 말한 것으로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형성된 심리적 콤플렉스 이다. 어린 시절 겪은 경험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파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것은 우리 심리와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은 부모의 영향으로 받아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 이 내재과거아가 부모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을 결코 없앨 수 없고 인정하고 억제하거나 조절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환경(결혼, 양육)과 비슷할 때 잘 나타난다. 심하면 병적인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 고 한다. 예수의 이런 콤플렉스는 그의 태생에 기원을 하는 것이며, 그 탄생에서부터 아이에게 가히 충격적인 문제를 남겨주었던 것이라는 주장을 저자는 하고 있다. 이 태어나면서부터 사생아 설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고, 어쩌면 아버지인 목수 요셉에게 아들로 인정을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저자는 예수가 평생을 이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과 그 위에 더해지는 각종 열등감들이 함께하며 예수를 성인으로 만들었다는 묘한 주장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대목은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직감을 했다는 것이다. 유대교의 전통에 정면으로 배치를 하는 삶을 행보를 보였던 예수는 그가 언제쯤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 아닌 말 그대로 아 이대로라면 내가 죽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 것이라 그는 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유대교의 전통에 정면으로 배치하는 삶을 산 사람으로서, 이렇게 하면 그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죽음으로 그는 부활의 예수라는 승화의 타이틀 마저 쥐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활용하여 성인의 자리에 오르고 전세계에서 가장 추앙을 받는 사람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의 삶의 행적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있지만, 그 또한 전부가 진실이라고 말하기는 어패가 있을 것이다. 여튼 종교에 관련한 책 읽기는 배경 지식의 문제로 그닥 편안한 시간은 아니겠지만, 비오는 주말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것 같다.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까지 읽는 내내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다. 종교적인 배경 지식이 많지 않았고, 또한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나와는 안 맞는 부분도 있었기에, 그런 경우를 보겠지만, 여튼 읽는 내내 불편했다. 그리고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대부분이어서 공감이 되지 않는 독서를 해본 것이 가히 얼마만의 이야기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 낸 것도 어쩌면 공감이 가는 한 줄을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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