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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번에 읽은 『프랑스식 전쟁술』은 솔직히 내 능력 밖의 책이다. 나의 짧은 문학적 소양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놓지 않고 읽었던 건 이 책의 배경에 나온 현대 프랑스의 전쟁사에 대한 이해가 그나마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정말 온 힘을 다해서 독일과 전쟁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힘만으로는 독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기술의 발달이 전술의 발달을 뛰어넘으면 발생한 괴리는 전선에서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전사자를 양성했지만 전쟁의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해 독일 스스로 무너지면 결국 전쟁의 승리자는 프랑스와 영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21년 뒤 리턴매치가 벌어졌다. 당시 세계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육군을 보유했던 프랑스는 독일군에 단 6주 만에 패한다. 그렇게 시작한 점령지가 된 프랑스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생기고 처음 겪는 시련이 된다. 바로 이 시점이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빅토리앵 살라뇽의 이야기 시작점이다. 이 책은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잉여 인간인 나와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3번의 전쟁에 참여했던 빅토리앵 살라뇽이다. 무기력하고 권태스러운 삶을 살던 나는 결국 권태스러움 벗어나고자 모든 걸 버리고 고향 리옹으로 온다. 그는 최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광고 전단지를 돌리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 삶을 살던 그가 평소 관심 있던 그림이란 매개를 통해 늙은 화가 살라뇽을 만난다. 수묵화를 그리는 살라뇽과 스승과 제자가 관계가 된 나는 살라뇽의 전쟁 이야기를 정리한다. 그러면서 지금 프랑스의 폭압적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폭력으로 점철된 프랑스를 이해해 간다. 이 책은 살라뇽의 부분을 소설로 나의 부분의 주석으로 나눠서 현대와 과거를 오간다. 그나마 소설 부분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쓰고 있어 이해하기 쉬웠지만 주석 부분은 시간의 흐름보다는 관념의 흐름에 따라 쓰다 보니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전체적 내용은 프랑스가 그동안 수행했던 전쟁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쓰고 있다.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의 프랑스는 그들이 그렇게 증오했던 독일군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독일군에게의 저항을 가르치던 그의 삼촌은 똑같은 이유로 프랑스에 저항하던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의 사람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압을 한다. 그리고 그걸 당연스러워 한다. 그런 삼촌은 나중에 알제리에서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처형당한다. 살라뇽은 이런 프랑스의 범죄에 가장 선두에 섰던 공수부대 지휘관이 되어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이런 장면을 현장에서 본다. 그와 같이 전쟁터에 나갔던 마리아니는 이런 폭력에 물들게 되어 전쟁 후에도 그는 폭력적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가프라는 조직을 만들어 프랑스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에 의한 통치를 부활시킨다. 그럼 살라뇽을 그런 폭력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던 것 무엇일까? 그건 그림이었다. 난 여기서 왜 살라뇽이 그림을 통해서 그것도 다양한 색이 사용되는 서양화가 아니라 오직 먹 만을 사용한 수묵담채화를 그렸는지가 생각해 봤다. 살라뇽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란 상황이 그에게 물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단색으로만 그림을 그랬을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만 결코 화려한 색이 없는 단조로운 흑과 백의 그림만을 그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 선혈이 낭자하고 어둠이 가득한 상황을 색을 사용해 그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고어물에 해당하는 작품들만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흑백이라는 단조로움이 오히려 이런 부분을 감추기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선혈이 낭자한 장면보다는 그는 전쟁 밖에 아름다움과 사람다움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이 부분에서는 난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가 나오는 장면이다. 그는 전쟁 속에서도 아름다운 장면을 어떻게 보려고 했고 그래서 그는 전쟁에 물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적인 이해는 있었지만 이 작품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폭력적인 프랑스의 현대 전쟁사를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을 이해해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반성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지금도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무슬림들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이 정당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한다는 것인지도 애매하다. 비판적인 부분이 있으니 반대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그 부분을 놓쳤을 수도 있다. 밀떡 입장에서 이 책의 번역은 솔직히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지금은 대명사처럼 굳어버린 독일의 티거 전차를 호랑이 전차라고 굳이 번역한 부분, 무전기임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라디오라고 번역을 하지 않은 부분은 잊을 수 없다. 이 밖에도 읽는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이 있어 자세히 보면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의 직역해 놓았다는 느낌이 있는 부분도 있었다. 물론 나의 소양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이 해낸 일 중 가장 비인간적인 일이다. 효율적으로 상대를 학살하기 위한 전쟁을 수행한다. 이런 행동은 전후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그 폭력성을 이어간다. 이는 지금 우리나라도 겪고 있는 일이다.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와 그 직후 세대가 가진 좌파 혐오는 폭력을 동반한 채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태극기 집회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런 극단적 사상을 가지지 않은 합리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좌파 학살은 당연하다. 지금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며, 그때 그 일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때 좌파를 척결하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했겠느냐며 말이다. 그런데 그 당시 학살당한 좌파는 누가 선별하였는가? 소위 우파라는 사람들이 선별했다. 그들은 사람을 죽여놓고 ‘이 사람은 빨갱이 있소’ 하면 끝났다. ‘에이 아닌데’라고 이야기하면 그도 빨갱이 동조자라고 죽였다. 이런 공포 속에서 과연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을까? 우리도 이 책의 프랑스처럼 아직도 전쟁 폭력의 영향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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