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과 혀 , 권정현 , 다산북스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제 7회 혼불문학상 [칼과혀] 권정현 , 《본문발췌》
“욕망해라. 저 재료와 네가 쥔 칼에 자부심을 가져라.”
아버지는 내 눈을 쪼던 닭의 숨통을 내게 넘겼다.
“너의 손놀림이 네 혀와 네 가족을 기쁘게 할 거야. 어서, 부릅뜬 놈의 눈을 찔러버려. 목을 따버려! 그리고 푹 익혀 고기를 뜯으며 맛을 느껴라! 너를 해치려던 맛이다. 너는 그걸 알아야 해. 식당의 개고기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법은 아니지. 단골 미식가일수록 인간을 물어뜯었던 개의 고기를 최상품으로 여긴다. 어쩌면 너는 오늘 비로소 재료가 너의 혀에게 안기는 기쁨에 감사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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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마에 놓인 송이의 눈동자를 살핀다.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식물이건 해산물이건 모든 재료에는 눈이 있다. 아버지는 재료의 눈을 제압하는 것이 요리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재료에 맛과 향취를 입히기 위해서는 재료를 완전히 굴복시켜야 한다고. 재료가 칼 아래 저를 온전히 내어놓을 때 불과 기름, 온갖 양념과 그것에 더해지는 요리사의 손길을 받아들여 또 다른 생명으로 건너가는 거라고, 그렇다! 음식이란 하나의 재료가 다른 재료들과 더해져 빚어낸 하나의 궁극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요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죽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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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가 되자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어.
아래층에서 기르는 누런 개 한 마리가 미친 듯이 짖어대. 평소에는 잘 짖지 않아 바보 개라 불리는 잡종 만주 갠데. 베베는 우려낸 차를 반 이상 남긴 채 죽은 듯 누워 있었고 나는 겹겹이 몰려드는 어둠 속으로 숨기듯 내 몸을 밀어넣었어. 난 만주의 누런 모래만큼이나 깊은 어둠이 좋아. 저녁 9시가 가까워지면 대부분의 집들이 문 앞의 조등을 치워버리고 어둠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어둠에도 결이 있고 냄새가 있어. 청진의 어둠과 만주의 어둠이 다르지 않아서 몇 집 건너 하나씩 걸린 시계들이 댕그렁거릴 때마다 팽팽히 줄 하나를 펼쳤다가 당겼다가, 이윽고 자정이 넘어서면 세상은 제풀에 지쳐 깊은 나락 속으로 떨어져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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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습니다. 이제 가도 좋습니다.”
제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춘 첸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도마를 들어올려 어깨에 얹고는 구부정히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중이야. 묶여 있던 어둠의 한 귀가 풀어지고 그 속에서 낯선 사내들이 튀어나왔다가 다시 그 부푼 침묵 속으로 죄 기어들어갔지. 불이 꺼지며 막이 내려가는 경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불을 켜라.”
어둠 속에서 베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참이라도 드시게요?”
나는 질문이 엉뚱하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어.
“불을 켜라…….”
어둠 속에서 그녀가 재차 중얼거렸어.
나는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등잔을 꺼내 심지에 불을 붙였어. 불이 붙자 거무튀튀한 방구석 어둠이 일렁이며 여러 개의 풍경으로 겹쳤다가 번지길 반복해.
“찾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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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의 눈을 속이되 치명적이며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는 독, 운이 따라준다면 음식을 먹은 모든 장교와 하사관들을 한칼에 쓰러뜨릴 수 있게 되겠지. 나는 첸의 도마가 첸의 계획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확신했어. 음식은 정직하지 않지만 독은 정직하니까. 그게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하는 내 오빠보다 나은 방법이란 걸, 나는 왜 지금껏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외투를 걸치고 급히 고무신을 찾아 신었어.
통금이 되기 전에 남호(南湖)에 닿아야 했거든. 남호는 시장 건너편에서 좌회전을 한 뒤, 사령부가 있는 서쪽과 반대로 30분쯤 더 가야 하는 거리야. 달이 뜨지 않았다는 건 아주 좋은 징조야. 돌아오는 길 헌병들의 눈길 걱정을 덜게 되었으니. 숨이 격렬하게 밤공기와 겨루는 사이 남호공원 서쪽 입구에 닿았어. 출입문 근처의 흰 백양목 아래, 거북 형상의 장식물 밑에 쪽지를 감춘 뒤 다시 뛰기 시작해. 첸이 주고 간 종이를 오빠가 최대한 빨리 봐주기를 갈망하면서. 발길을 돌려 돌아오는 길에야 비로소 독을 전해줄 방법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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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에 흰 꽃이라니, 대단하다!”
나는 혼잣말로 감탄사를 뱉는다.
차나무는 가지마다 다섯 장의 꽃잎을 밀어올린다. 겨울 이미지랑 가장 잘 어울리는 꽃, 꽃과 열매가 마주보고 있어 실화상봉수로 불리는 유일무이한 식물, 금년에 핀 꽃과 작년에 맺은 열매가 한 나무에서 만나는 기이한 인연의 꽃나무다. 나의 외할머니는 쓰고 달고 시고 짜고 떫은 다섯 가지 인생의 맛이 차에 담겨 있다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도, 외할머니도 저 소담스러운 차꽃을 유난히 아꼈다. 상기 저 여인이 두 손에 받들고 선 차꽃은 그러므로 내 기억 속 과거의 여인과 현재 사이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이 순간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부처를 앞에 두고 느끼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의 공허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 시게오가 나를 생각의 나락에서 끌어올린다.
“한 치의 오차도 없군!”
만다라 밑에 앉은 나는 매번 그랬듯 안도한다.
반가사유상은 오늘도 고개를 숙인 채 홀로 궁극 속에 앉아 미소만 짓고 있다. 누군가 부처를 옮겼다면, 혹은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면 측면의 저 미소를 완벽히 재현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 부처는 어찌하여 이토록 어슷한 각도에서만 웃는 걸까. 왜 법당의 중들조차 모르는 그 사실을 내게 깨닫도록 한 걸까. 저 부처를, 도무지 깨어날 생각이 없는 저 부처의 눈을 뜨게 하고 싶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내 기억 속 한 여인의 고운 얼굴을 완전하고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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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언제 죽음을 생각할까.
지금까지 나는 내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밀어냈거든.
아홉 살 때 쑥을 캐러 나갔다가 살모사 머리를 밟아 독이 온몸에 퍼졌을 때도 나는 죽음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 홍구에서 열린 경축행사* 당일 폭탄을 두 개나 몸에 숨기고 기차역으로 나갔던 오빠가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치고 돌아온 것만큼이나 죽음은 예외적인 일이야. 제 스스로 숨통을 끊을 줄 아는, 숙영이처럼 세상을 비웃고 떠날 줄 아는 일부 모진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
나라는 몸은 무엇이며 나라고 믿는 이 생각은 무엇이며 내가 겪었다고 믿는 과거는 무엇이며 나는 어느 인과를 통해 낯선 신경 한 귀퉁이에 버려져 있는 걸까. 내 오빠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걸까. 차나무에 앉아 아침 이슬을 매달고 지리하게 먹이를 기다리는 염낭거미의 반에 반만큼이나 삶은 의미가 있을까? 온종일 먹이를 기다리는 시간만큼이나 우리의 삶은 간절할까. 오빠처럼 거창한 명분은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어. 거창한 명분을 가진 자들일수록 모양과 크기에 집착하는 법이잖아. 종종 삶의 가장 진실한 알갱이를 잃어버리기도 해.
숙영이는 철도에 몸을 던졌어. ‘던졌다’는 표현이 적당한 건지는 모르겠어. 기관사에 따르면 숙영인 조용히 선로 속으로 걸어서 들어갔으니까. 몽유병에 걸린 사람 같았다지. 숙영인 꿈에 취해 있었어. 현란한 말솜씨를 지닌 내 오빠라는 꿈. 혀 속에 자신을 감춘 오빠를 통해 숙영인 오빠와 같은 꿈을 꾸었어. 꿈은 곧 실현될 것처럼 보였어. 세상은 부조리했고 오빠가 읽어주던 몇 권의 책들은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빛을 뿜어냈으니. 일본어로 쓰인 『독일 이데올로기』 『권력에의 의지』 같은 책들을 오빠는 밤마다 몰래 한글로 번역했어. 사이사이, 『파리의 우울』이나 『디바가시옹』 같은 어려운 내용의 서양 시집들을 읽어주곤 했는데 숙영이는 오빠의 입을 떠난 그 우울한 언어들을 빼곡히 노트에 옮겨 적었어. 그게 내 친구 숙영이가 오빠를 통해 바라본 조선 밖 세상의 모습이야.
“앨버트로스라는 새가 있어. 바다를 건너다보면 뱃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날개 길이가 어른 키의 두 배쯤 되는 아주 큰 새지. 뱃사람들은 종종 장난삼아 거대한 앨버트로스를 붙잡곤 했대. 갑판에 부려진 이 새는 긴 날개를 노처럼 질질 끌면서 가련한 몸짓으로 뱃사람들을 쳐다보곤 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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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백양목 줄기 뒤에 몸을 숨긴 채 고양이처럼 주변을 살피고 있어. 오빠의 마른 몸뚱어리와 달빛을 받은 흰 백양목 줄기가 슬프도록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달빛조차 차갑게 식은 겨울밤 뜨겁게 부푼 제 성기를 꺼내어 내 쪽으로 흔들던 오빠, 부엌에서 목욕하는 나를 몰래 훔쳐보던 오빠를 목격했을 때의 당혹감, 그런 종류의 슬픔이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걸 오빠는 알까. 허리에 권총을 숨기고 혁명을 이야기한다 해도 나는 오빠를, 아니 사내들을 믿지 않아. 열여섯 제 동생의 몸을 훔쳐보는 사내와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내의 심장이 같을 순 없으니까. 그 사내가 제 심장을 터뜨려 피를 뜨겁게 흘리기 전까지는 .
“그래, 여자들이 무슨 죄가 있겠니…….”
오빠는 등을 보이고 돌아서서 조심스럽게 궐련을 꺼냈어.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남쪽의 식당에서 3년을 체류했다는 내 말을 오빠가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고 보지는 않아. 남쪽이 품고 있는 의미를 똑똑한 공산주의자가 모를 리 없잖아? 그게 자기 때문이란 걸 문득문득 자학하고 있겠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더 큰 욕망 속에 제 잘못을 가두고 자기합리화를 하겠지. 볼셰비키 때도 5·4 운동 때도 항상 저들의 구호는 똑같았어. 오직 대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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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풀에서 채취한 독초야. 너도 알지? 아버지가 얘기한 적이 있어.”
아버지는 그걸 그냥 독풀이라고 불렀어. 독풀을 가공하면 냄새와 색이 없는 독초액이 돼. 삿갓풀의 뿌리를 삶아 물이 진득하게 끓으면 불을 줄이고 그대로 하루 정도 놓아두어서 만들지. 그다음 흙이나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맨 윗부분의 달인 물만을 떠서 사용해. 민간에선 주로 쥐나 꿩을 잡을 때 사용했는데 꿩이 좋아하는 콩이나 쥐가 좋아하는 곡물을 삿갓풀 달인 물에 넣어 독을 묻혔어.
“이걸 몸에 숨기고 있다가 비상시에 입에 물어라. 가급적 가장 지위가 높은 자에게 접근해. 넌 예쁘니까 누구든 탐낼 거야. 사내란 그런 존재들이지. 제대로 하나 걸리거든 씻을 시간을 달라고 한 뒤 이걸 입에 물어라. 그리고 입을 맞추는 척하면서 너의 침을 놈의 목구멍 속으로 흘려넣어. 독이 든 침을. 약효가 즉시 나타나진 않으니까 잘만 하면 의심을 사지 않을 수도 있어. 운이 좋다면 복상사나, 과로사로 처리되겠지. 열 번쯤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첸이야.”
“누가 모르니? 말하자면 이중의 장치를 하자는 거다. 첸이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너는 단지 기회만 엿보면 돼. 놈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
“첸의 독은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나는 하나야.”
“확실하게 한 놈이라도 부수어버려.”
“내가 죽을 수도 있어.”
“삼키지 말고 뱉어.”
오빠는 어느 틈엔가 냉철한 투사가 돼 있어.
“봉투는 두 개야. 큰 것은 첸을 주고 작은 것은 네가 가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령부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 경계가 느슨해지는 반진제 기간이 좋을 거야. 어서, 노린내 나는 중국 놈의 품을 벗어나 사령부로 들어가.”
“첸은 살아 올 수 있을까?”
오빠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리란 것을. 그게 오빠고 그게 나니까. 결국 그렇게 돼버린 거야. 오빠가 내 몸을 훔쳐본 그날 이후 나는 여전히 오빠의 시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 물풀에 발이 묶인 소금쟁이 한 마리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 자그마한 연못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혼자 걱정하면서.
“만주, 만주로 가겠다고요?”
이시하라를 처단한 첸이 만주행을 언급했을 때 나는 당황해하며 재차 물었어. 자그마치 3년이라는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오빠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나봐.
남쪽의 신발 공장에 가서 몇 년만 일을 하면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뻔한 거짓말을 물론 믿었던 것은 아니야. 그 순간, 나는 아주 복잡한 감정이었던 것 같아. 청진을 떠나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는 기쁨과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열아홉의 풋내기 오빠라는 사실 사이에서. 그때만 해도 오빠와 나의 시간은 오빠가 나를 훔쳐보던 열여섯의 시간 속에 멈춰 있었으니까. 그래서 강제로 납치가 되었을 때, 막연하게나마 그 상황을 희망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 몸속의 또 다른 나는 늘 오빠가 없는 곳으로 멀리 달아나고 싶어 했으니까.
만주에 온 뒤에도 나는 몸을 움츠렸어. 이곳 어딘가에 오빠라는 사람이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은 두려움과 안도가 묘하게 교차하는 감정으로 매번 나를 갈등하게 했어. 그날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말라깽이 오빠가 있는 힘을 다해 돌진하는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오빠를 잊고 살아갈 계획이었지. 어디서 무얼 하든 오빠는 오빠의 방식으로,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남은 삶을 살아내면 되었으니까. 그것이 대의를 위한 활동이든, 자신을 구해준 요리사를 위해 밀가루 반죽을 하고 닭뼈를 솥에 넣어 고아내는 평범한 일상이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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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부러진 중국인이 혼자 애처롭게 울부짖고 있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지. 그게 또 다른 내 오빠의 모습이었어. 내가 알지 못했던 오빠의 모습, 오빠가 추구하던 대의의 진짜 모습,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전에 불속으로 뛰어들던 오빠의 그 모습이 내 마음을 다시금 오빠에게 향하게 했다면 변명이 될까. 증오와 연민 사이에서 오빠는 그렇게 3년의 세월을 건너뛰며 내게 다가왔어 .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에 잠시 흠칫하고 물러나. 음부 속에 제 몸을 모두 태워버리고도 남을 분량의 맹독을 숨기고 있는 저 여자의 표정은 너무 평온해서 이질적이야. 평온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내들이 배 위로 올라와 허리띠를 풀었다 조일 때에도 내 표정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어.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오빠가 어느 모퉁이에서 쥐처럼 몸을 숨긴 채 내 모습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르거든. 나는 보여주어야 해. 착검한 일병들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나를, 굳센 조선의 여인을. 저들도 내 몸 위에 올라와 제 성기를 흔들어대던 그 무수한 병사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거지.
옷매무시를 바로잡은 뒤 정문의 일병들을 향해 걸어가. 정문을 지키는 일병은 모두 두 명이야. 두 명 모두 누런 군복에 갇혀 피곤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어. 정문 안쪽 초소에서 사관으로 보이는 나이 든 사내 하나가 병사들에게 손짓을 하는 게 보여. 아마도 나를 제지하라는 뜻이겠지. 얼마 전 술에 취한 만주인 하나가 병을 들고 정문으로 돌진하다 대검에 찔려 중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어. 사내는 파괴분자가 아니었지만 파괴 혐의가 씌워졌고. 화염병을 들고 사령부를 공격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사내가 들고 있던 것은 아쉽게도 술병이었어.
“정지하라! 무슨 일인가?”
키가 큰 병사가 눈을 매섭게 뜨며 물어와.
“면회를 왔습니다. 남편이 이곳에서 일을 해요.”
나는 침착하게 대답해.
“면회라니? 사전에 그런 연락을 받은 일 없다.”
“중국인이고 첸입니다. 식당에서 일을 한다고 들었어요.”
병사들이 비웃는 눈빛을 주고받았어.
“몇 살이냐?”
나는 더듬더듬 부정확한 일본어로 대답해.
“남편 나이는 서른다섯입니다.”
“너, 너한테 묻잖아?”
병사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어.
“스물…… 셋.”
“신분증 줘봐.”
병사는 신분증을 받아들고 위병소 건물 안으로 사라졌어. 그사이, 나는 건물 구조를 눈에 담아나갔어.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위압감을 주는 콘크리트 건물이야. 저 안 어딘가에서 첸이 도마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상상돼. 독이 없다면 첸의 요리는 무용지물이 되겠지. 단지 맛있는 음식 따위로는 단 한 명의 장교도 쓰러뜨리지 못해. 저들은 첸이 목숨을 걸고 내놓을 요리에 대가를 치러야 해. 그것이 첸의 생각일 테지. 아니 오빠 같은, 영웅심으로 똘똘 뭉친 사내들의 생각일 거야.
잠시 후 사내가 종이를 들고 다시 나타났어.
“누굴 만나고 싶다고? 여기 적어봐.”
나는 병사가 시키는 대로 첸의 인적사항을 적었어.
“기다려봐.”
사내가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가 나왔어.
“식당에 전달해놓았다. 연락이 갈 때까지 기다려.”
병사는 안 된다는 말을 어렵게 설명했어.
“그런데 남편이 이곳에 갇혀 있기라도 한 거냐?”
돌아서려는데 병사가 다리에 시선을 박으며 물었어.
“식당에서 일을 하는데 통 집엘 오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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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황제는 허울뿐인 황제의 역할과 제 민족의 정체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황제의 진짜 적은 누구일까. 누가 이 땅을 위협하는가? 응기 선생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가난한 민족을 짓밟은 타락한 자본주의자들이야말로 전 인민의 적이라고. 나는 역겨운 제국주의자들과 타락한 자본주의자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릴 것이다. 내 손에 쥔 잘 벼린 칼들과 나의 도마가 그렇게 할 것이다.
오토조 사령관이 반진제를 허락한 것은 의외의 일이다. 총동원 시기에 이런 행사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텐데. 만에 하나 사고라도 터지면 전적으로 그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지난봄 석전제(釋奠祭)* 기간에도 행사장에서 연설을 하던 국무대신 하나가 총격을 받아 죽는 일이 있었다. 만주국에선 공자의 제사 이외에 관우의 제사를 비정기적으로 거행하기도 한다. 행사 때마다 어김없이 애국심을 부추기는 강연회가 열리고, 국민들을 선동하는 연극이나 쇼가 무대에 올려진다.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 일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인심 쓰듯 나눠주는 것도 이 기간이다. 만국을 향한 일본의 간섭에 대한 거부감을 해소시키면서 국가의 구심점을 만들려는 계산된 전략이었다.
아침 일찍 거길 갔다온 군조 조장에 따르면 좁아터진 궁성 안마당과 궁성 밖 임시 천막에 각지에서 초청된 노인 수백여 명이 빼곡히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외빈과 지방에서 올라온 촌의 대표들, 일본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무부의 문무백관, 관동군 주요 지휘관과 경찰청, 법무부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는 축하 연회가 이틀간 계획돼 있었다. 말이 오족 연합이지 이번 행사의 주인인 만주족은 철저히 소외된 것 같았다. 모든 행사가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고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청나라 번성기에는 말타기와 활쏘기, 씨름 등 각종 민속 행사가 펼쳐졌다고 하나 금일의 반진제에 그런 행사가 계획되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행사는 사령관의 의중대로 각국 사절과 내지 장교들을 유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에 보지 못했던 온갖 요리들만이 며칠 전부터 준비되어 식탁으로 날라질 순간만 기다렸다. 주요리는 포탸오창이다.
사병들 식당과 달리 장교식당엔 에도시대의 무인들을 형상화한 그림도 몇 점 걸려 있고 앞쪽에는 공연을 위한 작은 무대도 마련돼 있으며 분라쿠(文樂) 인형 같은 것들이 장식품으로 놓여 있기도 하다. 일본 장교들은 떠들썩하니 음식을 먹는 편이 아니어서 식사 시간이 빠르고 특유의 침묵이 고이기 일쑤인 공간이다. 서열에 따라 앉는 자리도 다 달라서 이제 막 별 하나에 줄무늬 네 개를 획득한 소좌 따위는 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봐야 한다 . 자리는 반쯤 찼고 장교들의 눈이 이따금 내 행동을 좇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귀빈석 근처에 수레를 멈추고 사병들이 배열해놓은 식기류와 수저, 젓가락들을 꼼꼼히 살핀다. 모든 게 만족스럽다. 준비는 완벽하다. 황금색 보자기를 펼쳐놓은 저 식탁 위에서 일단의 영관급 장교들이 뇨타이모리*를 즐기다가 본국의 경고를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현 오토조 사령관 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임자들 가운데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얘기를 들려주던 요시이는 자신도 전임자로부터 들은 것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자신은 구역질이 나서 그런 음식 따위는 먹지 않겠다고 했던가. 조장의 말이 더 걸작이었다. 정신 차려, 요시이. 온종일 화덕이나 관리하는 너 따위에게 여자의 알몸을 감상하며 스시를 먹는 순간 따윈 결코 주어지지 않아.
(* 女體盛り, 여성의 알몸 위에 생선회나 초밥 등을 올려놓고 먹는 일.)
아직 고급 장교들이 착석 전이어서 식거나 퍼지는 음식이 아닌, 살구씨나 호두, 말린 감 같은 딱딱한 견과류 위주로 식탁을 차린다. 포탸오창은 그럭저럭 청조식으로 구색을 갖췄다. 일본인 상회에서 상어 지느러미를 얼마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장교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견과류를 먹고 차를 마시며 위를 자극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 각종 겅탕(羹?, 중국 수프의 일종)이 대령되고, 접시가 하나씩 비워지면 볶은 은행을 비롯하여 말린 여지, 연꽃 씨앗 따위가 식탁에 오르게 된다. 안주로 먹을 가벼운 요리들과 더불어 소홍주, 화조 등의 술을 들이도록 돼 있다. 공연이 펼쳐지는 가운데 거나하게 취한 수뇌부 장교들은 마침내 주요리인 포탸오창을 받게 될 것이다. 그곳에 내 비장의 무기가 숨어 있다. 의자는 모두 스물네 개. 만석이 된다면 오늘 스물네 개의 기름기 가득한 위장이 제거된다.
“뭐 도와줄 일은 없나?”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긴장이 더욱 팽팽해진다.
“네, 다 좋습니다.”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뒤를 돌아본다. 시게오다. 그는 자신도 빠질 수 없다는 듯 운명의 시간에 동참한다. 사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재료를 다듬는 틈틈이 갈등했다. 멍청한 염소 한 마리를 죽여 새로운 호랑이를 불러들인다면? 나는 가상의 동료들과 토론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래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멍청하든 똑똑하든 기회가 왔을 때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여야 한다. 적은 죽여도 그만큼 나타나게 돼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적들은 중요한 진리를 얻게 될 것이다. 점령지의 백성들을 진심으로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 그 두려움이 언젠가는 그들을 파멸의 시간 속으로 몰아넣으리란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도!
“다음 요리는 뭐지?”
“다음이라뇨, 아직 시작도 안 했는뎁쇼.”
시게오가 제 머리를 바보처럼 툭 친다.
“아, 내 정신 좀 봐. 암튼 중국요리는 복잡하다니까.”
“중국이 아니라 만주족 요립니다.”
“만주족이면 어떻고 조선족이면 어떠냐. 결국은 열등한 민족의 열등한 요리일 뿐. 기름에 볶고 지지고 튀기는 것이 요리의 전부인 줄 아는 자들. 고기 본래의 맛을 모두 잃고 진한 양념 속에 고기를 묶어두려고만 하지. 그게 중국요리다. 천하의 맹호 요리라도 너희 기름통에 빠지고 나면 그냥 고기 요리일 뿐이야.”
“세상 요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내 고향 북해의 요리는 너희 요리들처럼 복잡하지 않고 담백하다. 요리 문화만큼은 너희에게 뒤지지만 맛은 훨씬 간결하다.”
시게오의 반격은 예상 못 한 것이다. 아무리 입맛이 바뀌어도 제 고향 요리를 잊어버리는 사내들은 없다는 이족 속담 그대로다. 이족 요리를 할 때마다 아버지가 들려주던 잔소리였다. 이 녀석은 겉으로 중국요리를 흠모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왔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제 고향 북해요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녀석이 마음에 든다. 점령지의 백성들을 얕잡아보는 특유의 태도는 다른 제국군인들과 비슷하지만 순수한 면이 남아 있다. 시게오, 부탁한다. 부디 먹다 남은 음식이라도 상 위에 올랐던 음식엔 절대로 입을 대지 마라. 네가 피를 토하고 죽는다면 나는 오늘 식탁 위에서 펼쳐진 이 승리를 진정 축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마른 철쭉이 줄지어 심긴 마당을 내려다보며 잠시 호흡을 고른다. 길순은 실패했다. 아니, 그녀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설령 독을 구했다고 해도 내게 전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테지. 불쌍한 여자다. 내 계획이 성공하는 순간 침상의 노모와 길순은 죽게 될 테니.
거리는 축제 기간임에도 한산하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때문이겠지.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올 줄 알았다면 편지에 독 따위를 구해달라고 쓰지 않았을 텐데. 나의 실수를 인정한다. 길순에게 독을 요구할 게 아니라 멀리 도망가도록 했어야 한다. 이름 모를 검은 새 몇 마리가 사령부 남쪽 모서릴 끼고 날아간다. 검은 날개가 마치 죽음의 사신 같다. 날씨가 오늘처럼 맑았던 적은 흔치 않다. 맑은 날 죽을 수 있다는 게 그마나 복된 일이니 저 햇볕에 위안을 삼자.
“독을 숨겨라!”
광둥식 복어 요리를 가르쳐주던 날 아버지가 말했다. 독은 제거하는 게 아니라 숨기는 거라고. 당시만 해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먹는 자들을 위험에 빠뜨린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독을 숨길 것을 명령했다. 독을 전부 제거하면 복어의 고유한 맛 또한 사라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약간의 독을 남기되 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혀뿐 아니라 소화기관까지 완벽하게 속여야 한다. 그 방법이 무엇이지? 바로 중화(中和)다.
복과 가장 잘 어울리는 약재가 노근(蘆根)이다. 노근은 갈대의 뿌리로 차고 달달하여 폐를 식히고 위를 돕는다. 진흙에 뿌리박은 특유의 생명력이 독을 중화시키며 복 특유의 맛도 잡아둔다. 독을 잃은 복어 요리는 진정한 복어가 아니지. 중화를 통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물질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라고. 아버지 말대로 어차피 모든 요리에는 단맛이 빠질 수 없다. 설탕을 애써 쓰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다.
“독을 숨기려다가 단맛을 강요하게 되면요?”
어린 내가 그렇게 물었던가. 아버지는 말했다.
“좋은 질문이다. 넌 확실히 요리사의 운명을 타고났어. 나처럼 도마 하나를 챙겨 태어나진 못했지만 넌 늘 내게서, 아니 나의 요리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 그 점이 오히려 나를 자극해. 도망치려 하면서도 넌 요리 따위를 하찮게 보고 있어. 심지어는 내가 이룬 경력까지도 우습게 보고 있지. 언젠가 나를 넘어설 거야. 사내란 그래야 해. 최고로 맛있는 요리를 해내는 사람이 진짜 요리사는 아니지. 요리로 세상에 당당히 자신의 존재를 세우는 요리사야말로 최고라 할 수 있어.”
하여튼 말 하나는 그럴듯하게 하는 광둥 요리사였다.
독을 숨겨라! 나는 아버지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
독을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ㅡ
그렇다! 나는 부요리인 피 속에 독을 숨겼다.
피 요리를 담당한 사람은 호 아줌마다. 원래는 내가 그것을 맡기로 돼 있었는데, 나는 두 번이나 피를 묵으로 굳히는 데 실패했다. 호 아줌마는 그 일을 단숨에 해치웠다. 간수의 양과 숙성 시간의 차이였다. 쉐창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간장이나 소금에 찍어 먹거나 전골 속에 넣어 끓여 먹는 방식이 그것이다. 어떤 상태로 먹든 독을 섭취한다는 측면에서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호 아줌마가 요리를 하기 전 사슴 피 속에 다량의 독을 섞었다. 아직 누구도 선뜻 그 역겨운 음식을 맛본 자는 없다. 뜨겁게 끓는 사슴 피 속에서 유도화의 독은 어떻게 제 고유의 성질을 보존하는 것일까?
과연 그럴까? 이 또한 진실은 아닐 것이다. 내 한목숨을 살리고자 죄 없는 타인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을까? 더구나 귀머거리 호 아줌마와 나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지 않은가. 사실 나는 서너 병의 소홍주 속에 독을 감추었다. 사내들이란 음식은 먹지 않아도 술을 참아내지는 못하는 족속이니까. 맛을 가진 사물은 냄새를 풍긴다. 오로지 하나, 독이 예외다. 그것은 냄새를 숨김으로써 사물의 생명을 파괴할 수 있다. 나는 조금 더 확실하게 그것을 숨길 필요가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기세등등하던 관동군이 소비에트 동지들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을 보라. 만주라는 괴뢰 국가도, 중국도, 조선도 언젠가는 사라져갈 것이다. 아우성치던 사람들의 한숨과 발짝 소리들, 그 모든 게 역사에 한 줄 기록만 남긴 채, 혹은 기록조차 없이 사라져갈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내가 옳다고 믿는 하나의 굳건한 신념이 그것이다. 최선을 다한 요리사를 배반하지 않는 한 접시의 요리를 위해 나는 오늘도 웍에 기름을 두르고 재료를 손질한다. 한입의 요리가 혀에 전해주는 진솔한 맛, 그 진실함을 위해 나는 계속해서 도마를 지배할 것이다.
운명의 시간이 왔다 .
유도화에서 추출한 독은 청산가리의 수십 배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색무취하여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 방제용으로 쓰이는 유도화 가루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봄이 되면 잦은 봄바람에 고개를 숙일지언정, 유도화는 뿌리로 한 나라를 무너뜨릴 힘을 지녔다. 길순이 예정대로 독을 구해왔다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그 가련한 여자의 발짝 소리가, 뒤꿈치를 든 채 2층을 오가는 가엾은 뒷모습이 복도 끝에 어른거린다. 날개를 펴지 못한 나비처럼,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창문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펼치지 못한 흰 날개가 눈부시다.
ㅡ
내가 들어서자 수레의 음식을 바라보는, 기대에 찬 제복들의 눈빛이 읽힌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구나. 다리의 힘이 풀려서 나는 가까스로 몸을 지탱한다. 나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나의 내면을 빛나게 해준 나의 도마가 나 대신 더욱 빛나길 바란다.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도마였으니까. 삶 아니면 죽음, 인생은 그 어떤 요리보다 담백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수레를 밀며 나아간다.
빛들이 나의 걸작을 비춘다.
ㅡ
나는 야마다 오토조다. 정식 직함은 관동군 사령관.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아니, 꿈을 꾸는 건지 아닌지 헷갈린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다. 마차, 그것은 바퀴가 아홉 개나 달린 마차다. 관사 문밖에 마차가 서 있다. 마부석에 한 사내가 앉아 나를 기다린다. 서양식 맥고모자 같은 것을 깊이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다. 광대들이 쓰는 모자 같기도 하다. 마차는 검은색으로 장식돼 있다. 두 마리의 말이 직감으로 어렴풋이 느껴지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마부석 뒤로는 검은 천막이 쳐 있고 천막엔 창이 뚫려 있다.
그런데 하필 바퀴가 아홉 개라니? 나는 아홉(きゅう, 큐)이라는 숫자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대개의 일본인들처럼 그것이 고생(くろう, 쿠로)이나 똥(くそ, 쿠소) 같은, 부정적인 단어를 연상시켜서 그런 게 아니다. 어릴 때 목격한 아홉 마리 구렁이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한 해 전 일이다. 그해 신식 화장실을 파느라 인부들을 집안에 불러들인 적이 있다. 작업 도중 인부들이 구렁이 굴을 건드렸는지 아홉 마리나 되는 구렁이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구렁이들은 그 징글맞은 몸통을 꿈틀거리며 마당을 기어 다녔다. 햇볕아래 기어 다니는 검고 긴 그것들을 본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인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구렁이를 삽날로 잘라 죽였는데, 저녁에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며 인부들을 욕했다. 구렁이는 집안을 지키는 조상신인데 함부로 죽여 화를 불러들였다는 얘기였다.
평소 뱀이라면 극도의 살의를 표하곤 하던 아버지가 집안의 구렁이에게 유독 다른 잣대를 들이댄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몇 개월 뒤 어머니가 난산으로 죽은 건 이 구렁이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구렁이들은 그날 죽은 게 아니었다. 인부의 삽날에 검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그것들은 집안을 떠나지 않고 내 꿈속으로 건너와 나를 괴롭혔다. 침대를 따라 기어오르기도 하고 천장 들보를 타고 경쟁하듯 내려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콧속으로 기어들어와 뇌를 갉아먹었다. 이후 숫자 아홉은 내 인생을 따라다니며 불길한 징조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9번지에 자리한 식당엔 절대로 가지 않는다. 9가 들어간 사단으로의 배속은 무조건 피했고 심지어 집무실에 걸린 시계에서조차 9를 제거했을 정도다.
괘종시계가 아홉 번 고막을 울린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다. 나는 어느새 마차에 올라 있다. 사내가 채찍으로 말의 볼기를 후려친다. 말은 강을 건너고 흙집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끝없이 달린다. 혹여 이 길이 저승으로 가는 방향인가? 영원처럼 느껴졌으나 잠깐 동안의 시간이다. 마차가 멈춘 곳은 호숫가로 짐작되는 어느 기슭이다. 달이 떠 있다. 달빛이 수면을 비추자 물에 잠긴 건물 기둥들이 출렁이는 물결에 휩쓸려 나온다. 서른여섯 흰 석조 계단, 달빛이 물결 속으로 파고 들어가 용궁 속에 들어앉는다. 거무튀튀한 대웅전 누루가 보인다. 나는 비로소 알 것 같다.
“여긴 극락사로 가는 길이 분명하다. 무엇이 이곳으로 나를 이끌었을까? 어쩌면 나의 관념인지도 모르지. 내가 아홉 마리 구렁이와 마차를 만들어, 스스로 그 위에 올랐던 건 아닐까. 물속의 저 세상은 어쩌면 실재하는 풍경이 아닐지도 몰라.”
나는 기도인지 중얼거림인지 모를 자기공명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딛는다. 조선인 석공이 제 손목과 바꾸었다는 이 계단은 확실히 기이한 데가 있다. 중력을 무시하고 사람을 느슨하게 잡아 내리는 힘이 느껴진다. 조약돌이 물속으로 가라앉듯 나는 비틀거린다. 여러 번 이곳에 왔지만 계단은 처음이다. 주차장으로 곧장 오는 게 편하기도 했지만 석공의 잘린 손목 따위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누가 내게 이런 풍경들을 강요하는가? 물속의 저 부처일까? 아니면 나 자신인가. 미륵불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물속에 웅크리고 앉아 피비린내 풍기는 세상을 외면하는 저 부처가, 오늘은 작정하고 내게 할 말이라도 있다는 건가.
발이 극락사 마당에 닿는다. 모란 향내를 맡으며 대웅전 창살문을 열고 들어간다. 천장의 만다라 그림 아래 머리를 들이자 불안하던 마음이 안정된다. 참았던 숨을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미륵의 집요한 시선이 내 눈동자로 파고든다. 미륵의 눈은 명상 속에 감겨 있지만 나는 그렇게 느낀다. 처음 이곳에 와 미륵을 접견한 이후 나는 줄곧 누군가 미륵을 반출하지 않을까 마음을 졸여왔다. 주지를 구워삶아 미륵을 감시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도시엔 미륵의 진가를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온전히 내가 그 가치를 독점해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보물을 독점한다는 고통 속에서 나는 자주 외로움을 느꼈다.
보탁에 앉아 생각에 잠긴 미륵불은 전형적인 조선의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경성에 가면 이와 비슷한 금동미륵상이 한 점 더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에도 백제, 혹은 신라의 장인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미륵반가사유상이 교토 고류사에 모셔져 있기도 하다. 청년장교 시절 우연히 고류사에 들렀다가 그 부처를 알현한 적이 있다. 조선의 반가사유상이 청동인 것에 비하여 고류사의 미륵불은 목조로 제작되었다. 반면 만주의 불상은 석조불이다. 조선에서 제작된 불상이 후대에 만주로 옮겨져온 것인지, 아니면 여진족들에 의해 약탈된 것인지, 석조불이 하필 이곳에 놓여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세 나라의 불상이 각기 다른 재질로, 그러나 하나의 통일된 형식으로 제작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부처 홀로 물속에 앉아 진정한 대동아공영을 이룬 셈인가?
미륵은 세상의 모든 미가 압착된 모습으로 움직임 없이 앉아 있다. 무무명 속에 홀로 고착된 눈동자는 세상의 근심을 초월해 있다. 가장 깊은 구렁이에 떨어져 돈오(頓悟)를 초월해버린 우라본(盂蘭盆, 영혼)의 모습이다.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알아버린 산 자의 표정이기도 하다. 유황이 끓고 뱀들이 우글거리는 화탕지옥 한가운데에서도 흔들림 없이 부처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평생 찾아 헤매던 최고의 요리를 맛본 미식가처럼 창백한 고요가 서려 있다. 고통 속에서도 침묵할 줄 아는 얼굴, 고통을 즐길 줄 아는 고통의 얼굴, 저 부처의 복장 속엔 아직 꺼내놓지 않은 말들이 가득 숨겨져 있겠구나. 저 부처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만하다.
“완벽하다. 완벽해.”
그렇다. 나는 침묵 속에서 부처를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절제하지 못하고 매번 값싼 형용사를 법당에 꺼내놓았다. 공짜 음식 몇 점에 값싼 혀를 동원하여 미사여구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엉터리 미식가들처럼, 나의 입은 절제된 침묵 앞에서 번번이 패배한다. 나는 혀를 감췄어야 한다. 나의 입술은 내 눈에 담긴 물상의 신비를 이겨내고 감각을 감추었어야 한다. 나는 복장 속에 숨겨진 말들을 상상하지 말았어야 한다. 나의 목구멍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싸구려 말들을 욱여넣었어야 한다. 나의 후각은 천 년 이상의 세월을 건너온 석불의 냄새를 외면했어야 한다. 아니, 나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한다.
“어린 모리를 품어주던 그녀의 향기야.”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후각에 집중한다. 순간 불상의 입꼬리가 일그러진다. 죽어가는 새의 날갯짓처럼 눈꺼풀이 푸르르 떨리더니 검은 동공 속으로 유리처럼 깊은 절망이 눈을 뜬다. 나는 기대한다. 긴 침묵 속에서 세상을 굽어보려는가. 마침내 떨쳐 일어난 부처는 얼마나 광휘로울 것인가. 그 미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장 완벽한 궁극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 나는 부처가 줄곧 눈을 뜨길 고대해왔다. 그가 약속한 미래의 구원 같은 것은 관심 밖이었다. 나는 다만 보고 싶었을 뿐이다. 더는 고뇌하지 않는 얼굴을, 잠에서 깬 신이 아닌 인간의 얼굴을, 돌 속에 갇혀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기억 속 한 여인의 얼굴을.
돌의 파편들이 법당 바닥으로 떨어진다. 돌의 파편들이 법당 바닥으로 떨어진다. 돌이 부스러진 자리마다 한 여인의 섬세한 얼굴이 조금씩 또렷해진다. 예감이 맞았구나. 부처가 돌가루 속에 고운 여인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구나. 그러나 여인은 아름답지 않다. 그녀의 입술은 기괴하게 일그러졌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른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법당 안을 음산하게 만든다. 저 여인은 누군가. 여전히 낯이 익다. 코끝으로 스미는 차꽃 향기의 낯섦과 익숙함. 내가 잃어버린 단 하나의 얼굴, 평생을 기억 속에서 그리워하던 얼굴이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절망한다. 기괴하다. 울고 있다. 귀기 흐르는 물상이여, 다시 돌 속으로 숨어다오. 세속의 여인이 아니라 침묵하는 부처를 느끼고 싶다. 자리를 차고 일어난다.
“어머니, 어머니!”
일곱 살의 내가 급히 신발에 발을 꿰고 법당을 나선다. 사천왕이 금방이라도 내 목덜미를 낚아챌 것 같은 공포 속에서, 나는 넘어지고 엎어지며 법당 마당을 벗어난다. 산문을 타고 넘어온 한 줄기 소나기가 채찍처럼 어깨를 후려친다. 번개가 번쩍인다. 나는 몇 걸음 못 가서 잡초 무성한 도랑 근처에 주저앉는다. 음산한 먹구름이 법당 지붕에 틀어앉아 비웃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아홉 마리 구렁이다. 지붕 기와를 뚫고 들어간 구렁이들이 부처의 머리통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귀를 틀어막은 채 벌벌 떨며 달리기 시작한다.
“모리, 이곳으로 어서!”
법당 뒤켠 공양간이다. 목덜미가 흰 한 여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나를 부르고 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과 팔을 감싼 알룩달룩한 기모노 자락이 낯익다.
“어머니!”
나는 여인의 품에 안긴 채 울음을 터뜨린다.
부엌문을 걸어 잠근 여인이 머리를 조용조용히 쓰다듬는다.
“괜찮아. 여기라면 괜찮아. 그러니 어서 울음을 그치거라!”
여인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 입안으로 집어넣는다. 꿈에도 그리던 분고규의 달콤한 육즙이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꼭꼭 씹어 먹는다.
“사령관님, 좀 정신이 드십니까?”
입을 우물거리는데 눈앞으로 시게오의 잔영이 비친다.
“여기가 어디지?”
방금 전까지 나를 어르던 여인의 체취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극락사 부엌이었지? 그녀는 왜 하필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을까?
“관내 병원입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소량의 독을 섭취하셨습니다.”
“독이라고? 누가 독을 탔지?”
정신이 조금씩 돌아온다. 소홍주를 다섯 잔까지 마신 게 기억난다. 늦게 나타나 연거푸 술을 털어 넘기던 도시오 중장이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던가.
“억, 술맛이 이상해. 모두 멈추시오.”
먹은 것을 게우고 온 그가 일행들을 급하게 제지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동료 장군들은 오히려 도시오를 비웃으며 자기 앞의 잔을 비워냈다. 분위기가 그랬다. 사령부 한복판에서 누가 감히 음식에 독 따위를 섞었겠는가. 평소의 두려움이 가져온 감정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위장을 부여잡고 도시오가 쓰러진 뒤에도 전날 먹은 술 때문이라고 그를 비난했었지. 기억은 거기까지다.
“첸입니다. 아침에 헌병대에서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시게오의 목소리는 들뜨지 않고 건조하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녀석은 유도화의 독을 썼다고 주장하는데 독을 찾아내진 못했습니다.”
“스스로 주장을 한다? 근데 왜 아무도 안 죽었지?”
“포탸오창과 어울린 여러 음식들이 해독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멍청한 놈, 제 요리를 제 손으로 더럽히다니.”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놈을 용서할 순 없다.
“어떻게 할까요?”
“내가 직접 놈을 취조하겠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감히 나를 희롱해? 놈의 가족들을 잡아들이고, 식당의 조리병들과 외부 인력들까지 전부 수사하라고 전해라. 주방의 중국인들도 모두 잡아들여라!”
시게오가 부동자세를 취하고 밖으로 나간다.
잠에서 깼지만 어느 곳이 꿈속인지 아직 모르겠다 .
ㅡ
놈은 아직 제 노모의 죽음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차,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놈이 퉁퉁 부은 입술을 달싹거린다. 영웅이 되고 싶은 건가. 나라가 어수선할수록 그런 자들이 거리를 휘젓기 마련이다. 그들은 주장한다.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고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자! 그렇게 권력을 잡은 뒤 똑같이 백성들을 탄압한다. 저 미개한 자들은 그런 단순한 논리를 모르고 있다. 진짜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부처가 되는 게 낫겠지. 한자리에 앉아 몇 천 년 세월을 견뎌온 미륵처럼, 바뀌지 않고 영원할 수 있다면 이 땅에 슬픔 따위도 없을 것이다. 제 독으로 제 부모의 생목숨을 빼앗는 멍청이들도 생겨나지 않겠지.
“누굴 위해 너를 죽여야 하지?”
번역을 해도 좋다는 의미로 시게오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통을 끝내고 싶습니다.”
“너를 위해 죽여달란 소리구나.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을 용기도 없는 놈. 네 목숨을 편안히 앗아가 먼 훗날 우리가 물러가기라도 할라치면 이 땅에 너의 동상이 세워지고 너의 뼈다귀가 대접받는 꼴을 내가 보란 말이냐?”
“죄의 대가를 치르고 싶습니다.”
“무슨 죄?”
“상 위의 음식을 더럽힌 죄.”
그래? 녀석의 대답이 내 흥미를 끈다. 아직 살려둘 가치가 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충분히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나는 위엄을 보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자정이 되면 놈의 혀를 잘라라. 자르되 정확히 3분의 2 토막을 남겨라. 말을 빼앗되 전부를 빼앗진 마라. 너의 장애가 너의 요리를 돋보이게 할 것이다.”
광둥인의 표정이 지옥의 아귀처럼 복잡하게 뒤틀린다. 생과 사 사이에 낀 안도와 절망이 녀석을 간신히 버티게 하고 있다. 제 노모의 죽음을 알게 되면 녀석은 스스로 내동댕이쳐지겠지. 그러곤 복수하듯 솥에 기름을 두르고 요리에 매달릴 것이다. 복수를 위해. 애써 독을 쓰지 않아도 되는,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맛, 그것이 녀석의 복수가 되어야 한다. 내가 녀석의 요리에 취하여 접시 아래 무릎을 꿇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혀를 전부 빼앗지 않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완전히 맛보지 않아도 맛을 가늠할 수 있는 능력, 녀석의 혀는 새롭게 진화할 것이다. 맹인이 점자로 보이지 않는 공간을 가늠하듯, 나는 너의 혀가 그래 주길 바란다.
“혀를 자른 뒤 놈을 어찌할까요?”
대좌의 목에 땀이 번들거린다.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딱딱하게 굳어 있다. 고문을 충분히 가한 뒤 녀석을 사법기관에 넘겨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전시인 지금, 광둥인에게 그따위 온정을 베풀 이유가 없다. 녀석은 현장에서 잡힌 현행범이다. 정보가 샜다면 기자들이 몰려올지 모른다. 본토에 소문이 나면 더 골치가 아파지겠지. 만주인들은 동요할 것이다. 비밀은 밀봉될 때 그 가치를 지닌다. 도시오 중장은 다만 음식을 잘못 먹어 배탈이 났을 뿐이다. 내 의중을 대좌와 시게오가 넉넉히 이해했기를 바란다. 그들은 너무 제국의 관습에만 길들여져 있다.
“녀석의 발목에 튼튼한 쇠줄을 묶어 장교식당 주방에 묶어둬라. 어떠한 경우에도 쇠사슬을 풀어주지 말되 화덕 하나를 온전히 녀석에게 주어야 한다. 녀석이 원하는 재료가 있다면 남호의 밑바닥까지 뒤져서 가져다줘.”
번역이 귀에 닿을 때마다 녀석의 표정이 떨떨해진다.
“하루 두 번, 식당에서 요리하고 남은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단, 두 손을 사용하지 않고 개처럼 먹어야 한다.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하루에 한 가지, 매일 다른 요리를 해서 바쳐야 한다. 하루 두 끼의 잔반은 책임이 완수될 때 주어진다. 잘 들어라. 이곳엔 지금 너의 노모와 아내가 붙잡혀 와 있다. 네 요리가 성의 없거나 맛이 없으면 언제든 그들을 죽일 것이다. 네 요리가 어차피 죽을 자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지. 매번 화덕 앞에서 너는 목숨을 걸어야 해. 알겠어?”
시게오가 난감해하며 끼어든다.
“사령관님. 이자는 독을 써서 사령관님을 암살하려던 잡니다. 그런 자에게 어찌 다시 화덕을 맡기려 하십니까?”
“바로 그 점이다. 시게오!”
시게오가 딱딱하게 굳는다.
“나는 저자의 요리를 매일 기꺼이 먹어줄 것이다. 어떤 자식도 제 부모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네?”
“어때 시게오? 목숨을 건 저자의 요리가 궁금하지 않나?”
시게오는 부동자세만 취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ㅡ
먼 곳에서 우우, 짐승들 우는 소리가 들려.
잠드는 걸 잊어버린 짐승들 울음소리가…… 왜 짐승들은 새카만 어둠 속에서만 존재를 알릴까. 키가 작은 벚나무 몇 그루와 소나무로 그럭저럭 조경을 한 관사 주변에는 밤마다 쥐와 족제비들이 돌아다니고 이름 모를 새들이 나뭇가지에 숨어 혀로 발음할 수 없는 소리들을 내는데, 아무도 그 소리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혹시 배가 고파서 저러는 게 아닐까. 짝을 잃은 것은 아닌가. 누가 저들의 보금자리를 해코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미세한 소리에도 뒤척이며 걱정을 하곤 해.
나는 또다시 짐승의 방에 감금되었어.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사내의 집이야. 관성자나 팔리보 네거리 어디쯤에서 그를 보았던 것 같아. 어쩌면 요리점이 몰려 있는 골목이었는지도 몰라. 스쳐가는 마차 바퀴에 내 옷이 걸려 진흙을 묻힌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축제 기간에 옆에 서서 같이 인형극을 보았을 수도 있어. 낯설지가 않아. 바지 지퍼를 내리고 내 야윈 허벅지를 향해 스러지던 그 많은 제국군인의 그림자인지도 모르겠어. 그들은 각기 다른 얼굴, 다른 콧수염, 다른 몸 냄새를 갖고 있지만 언제나 같은 얼굴이었어. 저녁마다 찾아오는 그 사내는 수많은 그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고 언젠가 스친 적이 있는 단 한 명의 그일 수도 있어.
한 달 하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것 같아. 헌병들이 닥쳤을 때 나는 베베와 식사 중이었어. 그들이 오기 전 베베는 집안에 있던 가장 좋은 재료들을 전부 꺼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어. 마치 다시는 음식을 먹을 일이 없는 사람처럼 최후의 만찬을 마음껏 즐겼지. 아껴두었던 말린 호박과 땅에 묻어둔 연근, 말린 조기 한 토막, 뽀얀 쌀밥이 전날 저녁과 아침 식탁에 올라왔어. 흰 쌀밥을 배가 부르도록 먹은 것 같아. 전시라 그동안 식량을 아껴왔는데 베베는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 같았어. 다락에 모셔두었던 찻잎도 꺼내 넉넉히 차를 우렸어. 그녀는 멀리 길을 떠나려는 사람 같았고 늙은이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어.
헌병들이 오전 11시에 이리 떼처럼 몰려왔거든.
“독을 찾아라!”
놈들이 집안 곳곳을 뒤지며 독을 찾았어.
아마도 단서를 찾아내어 나와 베베를 함께 엮으려는 것이었겠지. 독 같은 게 나올 리 없잖아?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행동은 첸이 마침내 목표에 도달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어. 첸은 정말로 성공했을까? 내 오빠가 듣는다면 매우 기뻐할 소식이겠지만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 집안을 뒤지던 사병들 누구도 슬픈 얼굴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따분하고 권태로워 보였어. 명령이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할 것 같은, 그런 피곤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거든. 마루 밑 빈틈까지 샅샅이 뒤진 뒤 그들은 베베와 나의 몸을 묶고 차에 태웠어.
베베와 격리된 채 나는 한 달 가까이 고문을 받았어. 사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정확한 건 아니야. 뱀이 나올 것처럼 차가운 지하감옥은 밤과 낮, 시간의 흐름을 일절 가늠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 전등 아래 드러난 사내들의 피곤한 얼굴과 긴장한 근육, 그들의 손에 들린 각종 고문 도구와 거친 욕설이 이명처럼 종일 귓가를 떠나지 않는 곳이었지. 그들은 내게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알아내려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어. 다만 기계처럼 명령을 내리고 나는 따를 뿐이었어. 나 역시 규칙에 적응하는 기계가 되어야 했고.
뱀이 나올 것처럼 차가운 지하감옥은 밤과 낮, 시간의 흐름을 일절 가늠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 전등 아래 드러난 사내들의 피곤한 얼굴과 긴장한 근육, 그들의 손에 들린 각종 고문 도구와 거친 욕설이 이명처럼 종일 귓가를 떠나지 않는 곳이었지. 그들은 내게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알아내려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어. 다만 기계처럼 명령을 내리고 나는 따를 뿐이었어. 나 역시 규칙에 적응하는 기계가 되어야 했고.
나는 그들의 지시에 따라 기거나 돌아눕거나 앉거나 반쯤 앉거나 입을 벌리거나 손발을 올리거나 내렸어. 때론 줄에 묶여 거꾸로 매달리기도 했어. 내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그들은 친절하게도 내 몸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었어. 끔찍한 고통이 따를 때도 있었고, 침이 흘러내릴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도 있었으며,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한 모금의 물에 집착하던 순간도 있었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꾹꾹 목구멍으로 넘기며, 목이 쉬어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가면서, 그 차갑고 외로운 어둠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눈물을 감추는 일이야.
“너는 불순분자의 동거녀다.”
그들은 같은 얘기를 끝도 없이 반복했던 것 같아.
“남편의 동료들이 어디에 쥐새끼처럼 웅크렸는지 말만 해주면 풀어주겠다. 약한 몸으로 고문을 견디는 건 무리일 테니, 어서 말을 해.”
그들은 또 말했어.
“어쨌든 그냥 죽이긴 아까운 얼굴이야. 대장님도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전에도 종종 반반한 계집들은 살려서 올려 보내곤 했잖아.”
그들은 내가 자기들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줄 알았나봐.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직사각형 상자에 담기거나, 거꾸로 매달려 버티거나, 무릎에 무거운 쇠가 올려진 채 다리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견뎌내면서도 남쪽에서의 수치스러운 경험을 끝까지 숨긴 건 첸의 과거가 드러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어. 애국심 때문에 그랬던 것도 결코 아니야. 내가 그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내게 가해지는 고통이 달라지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들도 나도 모두 지리멸렬한 시간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시간은 최후까지 버티는 자들의 손을 들어주잖아.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질문을 던지곤 해. 타인에게 기억되는 내 얼굴은 모두 몇 개일까? 그들에게 비친 내 얼굴은 어떤 것일까. 희로애락이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내 표정 말이야. 어떤 일에 대하여 달관하거나 체념한 사람들은 다른 일에 집착하게 되잖아. 늘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게 일이었던 베베의 표정이나, 내 몸에 집착하는 사내의 표정이나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언제나 한 가지 표정만 고수하는 극락사의 죽은 부처처럼, 군복 입은 사내들이란 한 가지 표정 이외엔 다른 표정을 잊은 사람들 같았지. 그런 그가 오늘은 말을 하려나봐.
“누가 아름다운 여인을 이리 훼손했더냐.”
사내의 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며 상처를 하나하나 어루만지기 시작했어. 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몸을 만지듯 섬세한 손길, 채찍에 맞아 터지고 찢어진 흉터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는 장인이 옹기를 만들듯이 내 몸을 빚어 올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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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대를 이끌던 이시하라의 고향도 구마모토였지. 결국 벗어난다고 발버둥을 쳐도 인간의 운명은 늘 같은 궤도 안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인력거꾼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이 사내가 내 몸에 손을 대던 날 나는 알아버렸어. 저항 같은 건 무의미했지.
“장교식당 주방에 문어죽 하나만큼은 기막히게 끓이는 요리사가 하나 있지. 네가 그자의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된 건 행운이다.”
사내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죽 그릇을 잡아당겼어. 그러곤 수저를 들어 내 입에 죽을 떠 넣어주기 시작해. 그릇 속에는 인간의 상처를 푹 고아낸 듯한 쌀죽이 들어 있어. 밥알 사이로 드문드문 붉은빛이 도는 문어 조각들과 부추로 보이는 야채, 당근 조각 등이 뒤섞여 있었어. 물과 재료들이 적당히 혼합된 가운데 그릇 중앙에 살짝 뿌려놓은 김 가루까지, 시각적으로는 완벽한 문어죽이었어.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면서 시장기를 재촉하기 시작해. 난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받아들였어.
혀에 와 닿는 첫맛은 약간 썼어. 하지만 곧이어 입안에서 씹히는 문어 맛은 정말 대단했어. 아삭함과 쫄깃함, 그리고 입안으로 넘어간 뒤에 목구멍에 남아 있는 마치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침묵, 지금 이 순간 어떤 것이 이 죽의 맛을 대신할 수 있을까? 변명 같지만 저 사내에게 약간이라도 연민이 생긴다면 순전히 문어죽 때문일 거야. 먹으면서 나는, 아니 내 창자는 계속 생각해. 두 개의 표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내들처럼 포악함과 다정함을 동시에 지닌,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어죽은 바로 그런 맛이라고. 부드러움과 딱딱함, 고소함과 죽 특유의 밥 냄새, 약한 것과 강한 것의 조화, 여인의 품에 안긴 거친 사내들처럼 풀이 죽은 살기와 고요를 동시에 지닌.
“어떤 맛이지?”
나는 대답 없이 빤히 사내를 쳐다보았어.
“맛을 평가해봐. 짧을수록 좋다.”
진심을 들키지 않되 기쁨을 줄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또 먹고 싶어요…….”
“그건 장담할 수 없군. 그자는 요리에 책임을 질 줄 몰라.”
마지막 남은 밥알까지 그릇을 닥닥 긁어 내 입에 넣어주었어. 물병을 가져와 컵에 따라주고 심지어는 손수건으로 내 입술을 닦아주기까지 해.
그릇이 깨끗이 비워지자 사내가 내게 명령해.
“가까이 와. 끝까지 핥아먹는 게 죽을 먹는 예도야.”
나는 사내의 의도를 알아챘어. 잠깐 망설이는 동안, 어디선가 오빠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어. 무얼 머뭇거리지! 나는 무릎으로 기는 시늉을 하며 사내의 허리띠를 풀고 성기를 꺼내 입안 가득 삼켰어. 사내의 손길이 내 상처를 어루만졌던 기억을 더듬으며, 방금 전 고소했던 죽 맛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어. 죽을 먹을 때의 달콤한 표정과 죽을 먹기 직전의 그 고통스러운 얼굴 가운데서 나는 어떤 것도 택하지 못했던 것 같아. 사내가 사정하려고 거칠게 몸을 움직일 때에야 비로소 나는 오래 감추어두었던 하나의 표정을 끌어올렸을 뿐이야.
잔뜩 찌푸린,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되는 본능의 얼굴을.
“방금 그 표정이라면 너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군. 꾸미지 않은, 네 마음이 울퉁불퉁 새겨진 진짜 얼굴, 내가 네게서 원하는 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사내는 염불을 외는 중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어.
“조선 여자라고 했던가? 뜨거운 혀를 가진 여자일수록 사내의 사랑을 더 받는 법이다. 언젠가 이곳을 나가게 되거든 너는 필시 그 혀를 감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 혀가 너를 죽이고 또한 너를 살리게 될 것이다…….”
저 입을 틀어막고 싶다 . 벌어진 아가리 속으로 내가 가진 이빨들을 모두 박아넣을 수 있다면, 그 이빨들은 눈에 보이지가 않아서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의 질투와 인내, 악몽 속에서 내뱉었던 짧은 울음, 시멘트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천장을 올려다볼 때의 텅 빈 고통, 겨울밤 냄새나는 변소에 앉아 울던 기억, 가죽 채찍에 벌어진 상처, 그 상처를 맛있게 핥아대던 이미 죽어버린 사내들의 기이하게 웃는 얼굴, 그 모든 장면이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그렇게 세운 날로 제 몸의 세포들을 죄 벌리고 들어앉아 기억의 외부를 향해 밀어올리는 그 눈부신 날카로움들, 그 강하게 단련된 상처와 그 상처가 만들어낸 이빨들이 저 사내의 목덜미에 가닿을 수 있다면, 결코 쓰러지지 않는 강인한 척추 하나를 허공에 세워놓고 상대의 목덜미로 내 몸을 부수어 죽어갈 수 있다면.
“너의 혀를 느껴봐, 뇌가 아니라 스스로 혀가 되어 다가오는 감각을 느껴봐. 혀는 신이 만든 모든 기관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 또한 아름답다. 너는 그 이유를 아니?”
사내는 규칙적인 움직임 속으로 찾아드는 중이야.
“스스로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야.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피다. 혀가 붉은 건 세포 속에 피를 한가득 머금고 있기 때문이야. 맛을 갈구하는 것은 혀가 아닌 피다. 인간들이 끝없이 입속으로 음식을 집어넣는 이유를 이제 알겠니? 전부 다 먹어버리겠어. 너의 머릿결, 너의 웃음, 너의 슬픔까지. 죽어가면서도 나를 비웃을 너를, 너의 눈동자, 너의 입꼬리, 너의 혀와 그 속에 웅크린 뜨거운 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나의 것으로 만들겠어. 그래서 너의 영혼까지도 굴복시키겠어.”
사내는 지금 내 옆에 잠들어 있고 나는 사내를 분석하지 않을 생각이야. 관사에서 잡일을 하는 일본인 여자가 마른기침을 하며 복도를 오가는 기척이 느껴져. 그리고 나를 쏘아보는 눈빛 하나…… 나는 저 복도 마루 밑에 오빠라는 이름의 또 다른 사내가 망령이 되어 웅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사내는 문이 열리거나 바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연의 소리를 가장하여 내게 속삭이곤 해. 다시없는 좋은 기회야. 어서 놈을 죽여. 총집에서 권총을 빼낸 뒤 방아쇠를 당겨. 반드시 놈의 심장을 조준해.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조선의 계집들은 늘 강인하게 버텨왔으니까. 기차로 뛰어드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눈을 똑바로 뜨고 실체를 봐. 놈을 죽여. 총 같은 건 결코 쏘아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지만 오빠는 인상을 쓰며 욕을 해댈 뿐이야.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숨을 골랐어. 이 속에 피를 내뿜는 붉은 심장이 있어 더운밥을 먹고 사랑을 속삭이고 사람에게 총을 겨눌까? 나는 그 모든 의혹들을 연민해보는 중이야. 사내의 거친 숨소리 속에서 나는 그가 지나쳐온 산맥을 발견하려고 애쓰고 있어. 그가 대륙의 진흙탕 위에 남겨놓았을 오래된 발자국을 상상해. 이 소년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제 어미의 젖을 파고들던 유년의 기억이 남아 있을까. 어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제 어미가 떠 넣어주는 음식을 볼을 우물거리며 씹었을까. 마당에 앉아 머리를 빗던 날, 그날의 찰랑한 햇살을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잊어버린 그런 과거를 갖고 있을까.
사내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잠꼬대를 해.
“카아상, 카아상…….”
나는 그의 어머니는 아니지만 이불을 끌어당겨 사내의 몸을 덮어주었어. 사내를 쏠 기회는 오늘이 아니어도 찾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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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사슬에 묶인 나를 안타깝게 생각한 요시이는 조장이 보지 않을 때면 몰래 음식을 챙겨 입에 넣어주거나 말을 건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나는 그가 내게 보여주는 우정이 순수하다고 믿는다. 국적과 언어, 외모만 다를 뿐 이 주방에서 내가 그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란 걸 상기시키는 유일한 존재다.
그는 내가 사슬에 묶여 바닥에 처박힌 날 은밀히 속삭였다.
“멍청아, 독을 타려거든 나랑 상의를 했어야지. 독이라면 우리 나가노(長野) 사람들만큼 해박한 천재들이 없거든. 넌 잘 모르겠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에 백성들을 유난히 괴롭히던 성주의 둘째아들 사나다 노부시게를 은밀하게 죽여 관짝에 눕게 만든 것도 바로 성주의 부엌에서 일하던 조상들이 은밀히 쓴 독이었어. 알겠어, 응?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함께 손발을 맞춰보자구. 그전까지 끽소리 말고 순한 똥개 노릇을 계속해야 해. 절대로 짖거나 주인을 물지 말라고.”
(* 일본의 전국시대 말기.)
요시이 말대로 지난 몇 달간 나는 한 마리 개가 되었다. 개를 개답게 만드는 건 단단한 이빨과 후각이다. 이빨은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최초의 방어 수단이다. 나는 아홉 살 무렵, 이웃집 개에 물려 죽은 청년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3년밖에 안 된 보통 크기의 잡종 암캐였다. 이웃집 청년은 잠시 장난기가 발동했을 뿐이다. 임신한 잡종 암캐가 밥을 먹고 있을 때 청년은 밥그릇을 치웠다가 다시 돌려주는 장난을 반복했다. 그 찰나의 어느 순간, 개가 이빨을 청년의 귀 밑에 박아넣었다. 청년의 비명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 나왔지만 개는 이빨을 빼지 않았다. 청년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히자 보다 못한 어른들이 몽둥이로 개를 내리쳤다. 개 역시 눈을 까뒤집으며 죽어갔지만 끝내 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개가 허공을 보고 짖을 때 노인네들은 귀신을 보고 짖는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개가 허공에 떠다니는 냄새를 맡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죽은 자의 냄새일 수도 있고 사물의 단순한 냄새일 수도 있다. 냄새가 흩어지지 않고 떠다닌다는 건 그만큼 그 맛들이 단단한 힘으로 뭉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잃어버린 미각의 일부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 코에 의존한다. 내 후각은 감지할 수 없는 미각을 보충하기 위해 매일 세포를 늘려간다. 이제는 냄새만으로 단맛과 신맛, 짠맛, 매운맛 모두를 구분할 수 있다. 손이 재료를 다듬고 요리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은 나의 코다. 코와 혀는 상호작용하며 주인의 명령을 수행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요리가 나의 새로운 이빨이다. 그것은 날카롭고 무디다. 나는 인정받아야 한다. 나는 사랑하는 도마 앞에 엎드려 나의 요리를 상상한다. 발목에 쇠사슬이 감겨 있지만 두 손과 혀, 후각과 시각은 자유롭다. 다섯 발짝 정도 떨어진 곳의 시게오는 본국에서 보내온 기타자와 라쿠텐*의 시사만화집을 읽고 있다. 책장을 넘기며 이따금 낄낄거릴 뿐 시게오는 발이 묶인 나를 더 이상 감시하지 않는다. 다음번엔 썩어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지만 맛은 죽여주는 취두부를 안주로 내놓아야겠다. 사령관의 미각이 부디 나의 후각에 농락당하지 않기를.
“전쟁, 전쟁이 끝나면 무얼, 무엇을?……”
말을 할 때마다 쇠구슬이 내려와 목구멍을 막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낀다. 짧은 삽으로 우물을 파듯, 나는 막히는 발음을 답답하게 이어나간다.
“끝이라고? 첸, 전쟁은 끝나지 않아. 내가 살아 있는 한 전쟁 같은 건 절대로 끝나지 않아.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어. 나는 전쟁이 끝나든 끝나지 않든 기타자와의 만화를 읽고 너를 감시하고 사령관님의 명령을 수행할 거야.”
녀석은 염세주의자의 말투를 흉내내고 있다.
“명, 명령을 수행한다고?”
나는 쌀쌀맞게 비웃어준다. 그런가, 시게오? 나 역시 내 도마가 있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요리들이 한가득 피워 올리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싶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울림을. 화덕 위에서 하나의 요리가 익어갈 때 엄청나게 많은 요리의 입자들이 식당을 메웠다가 천천히 창문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그 냄새 맡는 것을 좋아한다. 내 요리의 입자들이 바람에 섞이지 않고 영원히 허공에 떠다니는 걸 상상한다. 요리는 소화되고 사라지지만 냄새는 영원할 거다. 나의 보잘것없는 싸움이, 이 주방 안에서 계속되었음을 누군가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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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는 동안 숨이 막힌다. 도대체 인간들은 왜 전쟁 따위에 미쳐 있는가. 내가 국민학교에 가서 처음 배운 것도 전쟁의 역사였다. 섬나라인 일본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내분이 잦았다. 태고부터 수백 개의 나라가 저마다 깃발을 휘날리며 야만인처럼 이웃한 마을들을 습격했다. 그런 혼란을 처음으로 통일한 것이 5세기 야마토 정권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통일은 무의미했다. 사내들은 또다시 쪼개기와 합치기를 반복하며 피를 흘려왔을 뿐이다. 그런 전쟁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유물로 남아 영웅을 만들고,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오래지 않아 만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처음 군에 입대했을 때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가졌던 건 제복이 주는 위엄이었다. 그것이 말단 이등병의 것이든 별이 세 개나 달린 대장의 것이든 제복은 힘을 지니고 있다. 나는 모자와 군화, 견장이 주는 그 특별함을 사랑했다. 그것은 해당 조직이 갖고 있는 특유의 문화와는 별개의, 유일하게 정붙일 수 있는 아름다운 격식미였다. 젊은 날 기병장교를 선택한 것도 말에 올라 제복을 입고 도로를 행진하는 기마병들의 위용에 반했기 때문이다. 딱딱함 일색인 계급 문화 속에서 각각의 제복이 주는 다양성과 통일미는 딱딱함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피가 난무하는 전장의 한 귀퉁이에도 꽃이 피듯이, 나는 그 딱딱함과 통일미 속에서 홀로 고독해왔다.
아버지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열정을 외부를 통해 획득하길 꿈꿨고 나는 조용히 달궈진 내부 속에서 사내들의 세계를 엿보길 즐겼다. 아버지는 사무라이의 후손임을 늘 자랑스러워해왔다. 세이난 전쟁 때 할아버지는 반란군 편에 서서 싸웠다가 총을 다섯 방이나 맞고 죽었다. 아버지가 뱀의 대가리를 응징해가며 구마모토성을 뛰어오르는 것도 그런 자긍심의 반영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내들이 전쟁의 마지막에 목도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죽음뿐이다. 제복을 훌륭하게 갖춰 입고 어깨에 각종 견장을 단 서른아홉 명의 저 사내들에게 곧 닥치게 될 어떤 운명처럼 말이다.
죽음은 한 조직의 지휘자라고 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 나는 그런 수사들에 대하여 지금껏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오지 않았다. 나는 불사신처럼 죽지 않을 테니까.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두려움도 떠난다.
적들은 한 달, 어쩌면 보름 안에 전 전선에서 불을 뿜을 것이다. 전쟁은 파괴인 동시에 또한 아름다움이다. 수고로움 속에 한 끼의 식탁이 차려지고 누군가는 허기 속에서 허겁지겁 배를 채우듯 전쟁도 그것이 흘려놓은 온갖 냄새들을 스스로 거두어갈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의 만찬을 피하지 않고 즐길 준비가 돼 있다.
바로 만주라는 붉은 땅 위에서 .
조선 여자가 몸을 웅크린 채 배시시 나를 쳐다본다. 저 간단한 유혹의 동작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 가녀린 손이 내 목숨을 겨냥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가 전쟁에 대하여 함부로 이야기하는가. 어쩌면 저 여자가 품은 저 습관화된 얼굴이 전쟁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전방 시찰을 갔다가 총검에 찔려 내장을 쏟고 죽은 병사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탱크에 깔려 압착된 병사의 얼굴을 본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본 건 전쟁의 참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광기였다. 전쟁과는 무관해 보이는 저 얼굴, 저 얼굴 속에서 나는 진짜 죽음을 본다. 공포를 느낀다. 여자의 얼굴은 진짜다. 공포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테니.
“너의 천한 아름다움은 이제 어떻게 될까?"
나는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턱 밑 둔덕을 두어 차례 문질러주자 그녀의 입에서 아, 하는 작은 신음이 새나온다. 저 신음은 길들여진 것일까. 아니면 곧 멸하게 될 제국에 던지는 비웃음인가. 질투가 난다. 처음부터 내가 소유할 수 없었다는 아쉬움, 마음에 드는 여자의 배 위에 엎어질 때마다 사내들은 늘 그래왔다. 천박한 여자의 배 위에 누워 있다는 괴로움, 결코 내 어머니를 발견할 수 없다는 고통, 그리하여 여자를 제멋대로 주무르고 하대하고 마침내는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녀들을 버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내들은 영원히 무엇도 가질 수 없다.
“잠이 쏟아져요.”
여자가 조선말로 내뱉는다. 말의 의미를 묻기도 전에 여자가 팔을 벌려 나를 따듯하게 안아준다. 이 순간, 나는 그녀가 나를 가련해하고 있음을 안다. 남자를 안는 순간 여자들은 어머니가 되어 매 순간 우리를 끌어안는지도 모른다. 총을 꺼내 쏘고 싶다. 저 교만한 얼굴을 부수고 싶다. 수천 번도 더 병사를 받아낸 천박한 몸뚱이가 감히 내 어머니를 대신하려 하다니. 내 어머니, 나를 위해 수탉의 눈을 뽑아버렸던 그 어머니의 강인함을. 이 여자를 똑같이 내면에 품을 수는 없다. 내게 웃음이 아니라 총을 겨눠야 한다. 그때 나는 조금이나마 너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곶감을 말리던 어머니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수탉이 내게 달려왔다. 다행히 부리가 비껴가 눈 밑 살점이 조금 떨어지는 데 그쳤지만 피가 철철 흘러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차분하게 상처를 지혈하고 실을 가져와 꿰맨 어머니는 감을 말리던 그 차분한 일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걸음걸이로 수탉을 향해 다가갔다. 다음 순간, 그녀는 닭의 모가지를 고운 손으로 꽉 잡고 차례로 두 눈알을 후벼 팠다. 기억 속 어머니는 그처럼 독함과 여림을 모두 지닌 여자였다. 그건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었다.
“아름답다!”
닭의 눈알이 뽑히던 순간 나는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당에 우뚝 선 어머니는 닭이 의미 없이 날개를 퍼덕이며 마당으로 기울어가는 풍경 속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었다. 닭이 부리로 땅을 파헤치며 비명을 질러댈 때에도 어머니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가마솥에 물을 붓고 장작에 불을 붙였다. 수증기가 뜨겁게 뚜껑을 밀어내자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는 닭을 집어넣었다가 꺼내 털을 모두 뽑아냈다. 수돗가에 앉아 닭의 내장을 죄다 긁어낸 뒤 몸통에 찹쌀을 채우고 백숙을 끓여 내 목구멍으로 국물을 흘려 넣어주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 모든 동작들은, 화단의 맨드라미 꽃밭을 가꿀 때처럼 적요로웠다.
내 눈을 탐했던 적(敵)을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혀에 와 닿는 맛으로 경험했던 그날, 나는 커서 결코 군인 따위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적을 죽이다가 끝내는 자신마저 그 죽음 속으로 밀어넣어야 하는 미련함, 대상에 대한 자유로운 품평을 강제당한 채 통일된 동작으로 뜨겁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획일화된 세계에 대하여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날 내 혀에 와 닿던 백숙의 맛은, 간장의 달착지근함이 더해진 그 연한 고기의 맛은, 적을 향한 그 어떤 사나운 증오심조차 그 연한 속살 속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외피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과는 상관없는 가장 순수하고 정제된 하나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자애로움으로 가득했던 내 어머니의 외피 속에 숨겨진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던 그날의 의식처럼.
전구 불빛 아래 여자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극락사의 부처가 겹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종일토록 생각에 잠긴 얼굴, 매번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눈을 거의 감은 채 무상 속에 잠겨 있는 얼굴, 나를 바라보되 외면하는 얼굴, 겨우 측면으로만 내어주는 미소. 나는 눈을 번쩍 떠 부처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부드러운 손길로 다가와 나를 무릎에 눕히고 노래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전쟁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그렇게 한 여인이 잠들어 있다. 나는 그 여인의 진짜 얼굴이 보고 싶다. 한 사람을 사랑할 때, 한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부를 때, 심장이 함께 움직여 만들어내는 그 낯빛을 보고 싶다.
ㅡ
여자는 대꾸하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이 여자는 조금도 저 중국인 사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사랑하는 여자다. 악마가 끼어든다. 여자를 시험하고 싶다. 놈을 발가벗겨 여자 앞에 세울 수 있다면, 요리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인간이 짓는 가장 진실한 표정을 보고 싶다. 살기 위해 내면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불의 앞에서 원초적으로 분노하는 심장 자체를. 살기 위해 구차하게 요리 따위를 해 바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얼굴을 가질 수가 있다면, 천 년 이상 견뎌온 극락사 반가사유상과 비로소 나는 화해할 것이다. 화해한다는 것은 유일하다고 믿는 그 얼굴로부터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해본 적이 있나?”
여자의 눈두덩 속눈썹들이 일제히 곤두선다.
“그래본 적은 없지만 그런 감정은 알고 있어요.”
“아니, 넌 모르고 있다! 단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너는 모르고 있어. 원한다면 나는 그런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 질투하는 얼굴, 체념한 얼굴, 분노하는 얼굴, 달관한 척하는 얼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얼굴을 모두 갖춘 유일무이한…….”
여자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린다.
“보고 싶지 않아요…….”
“너는 두려워하고 있구나. 말해라. 무엇을 보았느냐. 무엇이 너를 두렵게 하지? 나에겐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다. 어떤 군대도 우릴 함부로 넘볼 수 없다.”
나는 방금 뱉어낸 말들을 후회한다. 되돌릴 수 없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두려움을 들키고 말았구나. 영리한 여자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나를 조소하고 있겠지. 상대를 조소하는 자들의 얼굴에서 아름다움 따위는 읽어낼 수 없다. 비로소 조선 처녀의 얼굴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구나. 너는 곧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될 것이다. 네 두려움의 실체를.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마주보았을 때 너의 두려움이 너를 파멸시킬 것이다. 영원히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은 그렇게 사라져야 한다. 나는 여자의 잠든 얼굴을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아침엔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흰 쌀죽을 청해야겠다.
ㅡ
“혀가 잘린 요리사 하나를 알고 있다.”
시게오가 남의 얘기를 하듯 입을 열고 내 눈치를 살폈어. 나는 그가 어떤 말을 꺼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어. 그는 갑자기 소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숨기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고 난 뒤 얼굴을 붉히는 사춘기 소년.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해.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아야 하나, 혹시나 그 비밀이 자신에게 해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까 고민 중인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나를 마음껏 비웃어주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그 사내는 거의 매일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한 가지 요리를 만들어 올리지. 세상에서 가장 정성스럽게, 가장 맛있게, 자신의 존재를 요리하고 있어.”
“여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사내가 차갑고 냉정한 음성으로 대답해.
“아니, 모르지. 그녀는 몰라. 사랑 같은 건 그녀에게 불필요한 게 돼버렸으니까. 세상에는 별별 일들이 다 있잖아. 그 일도 그 별별 일 가운데 하나일 뿐이야. 어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닌가? 적을 앞에 두고 음식에 집착하는 사내와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요리를 해 올리는 남자,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
“그 남자는 여인을 사랑하지 않아요. 자신의 요리만을 사랑하죠.”
“자신의 요리를 사랑한다고?”
새들이 우르르 날아올라 남호 상공에서 원을 그리기 시작했어. 어쩌면 저 새들은 학의 무리가 맞는지도 몰라. 저렇게 아름답고 흰 빛을 띤 새는 학 이외에는 본 적이 없거든. 흰 빛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수백 개의 날개들이 힘차게 날아오르는 장면을 생각해봐. 날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일 거야. 저 새들은 어디든 날아갈 수 있겠지. 저 새들은 단순히 새가 아니라 이 세상을 이루는 뭔가 특별한 다른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인간들은 저 황홀한 군무를 은폐물 삼아서, 저마다 복잡한 어떤 것들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써보는 거지. 인생의 내밀한 진실 같은 것들. 그렇게 믿어왔으나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린 것들에 대하여.
“요리사는 어쩌다가 혀의 일부를 잃게 되었나요?”
“제 보잘것없는 솜씨를 목숨과 맞바꾸려 한 대가지.”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어.
인력거는 한 시간 뒤 극락사 주차장에 닿았어. 그 얘기 이후 시게오의 입은 굳게 닫혀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아. 그는 나를 동정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제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려준 걸까? 내가 이곳에서 탈출해버린다면 그에게 책임이 돌아가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야. 나는 기회를 노려야 해. 일본이 망하고 곧 양놈들의 세상이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숨 쉬고 있는 이유를 증명해야 해. 세상의 소문과 무관하게, 내가 앉은 자리에서 내 방식으로 말이야. 오빠의 그림자가 두려워서 그러는 건 아니야. 오빠와는 무관하게, 내 손으로 나는 사내들의 세계를 부수고 싶어.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시게오가 극락사 부엌을 힐끗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어. 스님들이 저녁을 짓는지 공양간 쪽에서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어. 아마도 스님들이 즐겨 먹는 공심채(空心菜)를 기름에 볶는 거겠지. 부엌에 서서 가족들이 먹다 남긴 밥과 반찬을 냄비에 넣어 다시 끓이던 내 어머니처럼, 늙은 보살 하나가 숯불에 눈을 찡그려가며 웍에 기름을 두르고 있으려나. 가끔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문 하나가 저 부엌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어느 부엌이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주린 배를 채울 무언가가 숨어 있게 마련이지. 죽이고 죽는 전쟁쯤은 잠시 잊어도 좋은 그곳.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시사만화집에서 본 건데 거위는 매우 불행한 사랑을 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부부관계가 돈독한 짐승이 바로 거위라고 해. 거위는 일단 서로 사랑하게 되면 어떤 멋있는 상대가 나타나도 바람을 안 피우는 것으로 유명해. 한쪽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목숨처럼 사랑을 지키는 거야. 어느 한쪽이 사람에게 잡아먹혀버리거나 병을 얻어 죽게 되면 남은 거위는 거의 미쳐버려서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몇 달을 헤맨다고 해. 그러다가 무리로부터도 미움을 받게 되고 혼자 외톨이가 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거야. 확실히 인간들보단 나아.”
나는 이 사내가 모성결핍이 아닌가 의심해.
“당신은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버려진 적이 있나요?”
시게오가 씩 웃었어.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남자든 여자든.”
“그럼 무얼 사랑하나요?”
“난 그런 것에 대해 특별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난 그저 이 비루한 전쟁이 속히 끝나기를 바랄 뿐이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나의 목표야.”
그는 마치 나는 평화를 사랑해, 하고 말하는 것 같아. 실은 그도 전쟁 따위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겠지.
동자승 하나가 계단을 내려와 주지가 찾고 있다고 전해주었어. 계단으로 올라가니 주지가 사령관 오토조와 이야기를 나누며 마당을 나서는 게 보여. 시게오와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쫓아가. 그들이 향하는 곳은 대웅전이야.
“시게오는 남고 너는 올라와.”
오토조 사령관이 신발을 탁탁 털어 바로 놓으며 내게 손짓을 해. 기시감이 들었어. 어쩌면 몇 달 전 대웅전에서 만났던 사내가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게 부처의 얼굴이라면 나는 이야기를 들을 용의가 있어. 지옥 속에 들어앉아 있는 저 부처를 사내가 무엇이라 말해줄지, 부처의 얼굴과 사내의 얼굴 사이에 놓인 틈에 대하여, 흩어지지 않는 시간에 대하여, 전쟁을 모르지만 전쟁을 안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수많은 불행한 사내들에 대하여 나는 듣고 싶었어.
“보대로 올라가 앉아.”
주지가 명령하듯 뱉었어.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얼른 알아듣지 못했어. 보대란 미륵이 앉아 있는 자리야. 내가 올라설 곳이 못 되는. 오토조가 거들어.
“괜찮으니 올라가.”
나는 불전함을 밟고 엉거주춤 대웅전 보대로 올라갔어. 사내들은 늘 여자들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온갖 요구를 들어줘왔지만 이런 일은 당최 의미를 가늠하기가 힘들어. 더구나 주지까지 가담한 터여서. 내가 보대에 앉자마자 오토조는 대웅전 천장 밑 중앙으로 가서 방석 하나를 펼치고 가만히 앉는 거야. 그는 수백 년을 견뎌온 수도승 같은 얼굴을 하고서 조용히 나와 부처를 번갈아 응시하고 있어.
“어떻습니까?”
5분쯤 지나 주지가 눈치를 보며 물었어.
“글쎄, 모르겠군요. 모르겠어.”
도대체 이자들이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전쟁이 사내들을 죄다 미치게 만든 걸까.
꿈꾸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처음 이곳에 와 미륵과 마주했을 때 부처의 저 오묘함에 단박에 압도당했다. 수많은 표정을 하고 있지만 아무런 표정도 하고 있지 않은 얼굴, 고독하지만 평화로운 얼굴, 두려움 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그것을 벗어난 얼굴, 무표정으로 일관하지만 측은함을 품은 얼굴, 아이 같은 얼굴, 소녀 같은 얼굴, 아내 같은 얼굴, 어머니 같은 얼굴, 울고 있지만 웃는 얼굴, 눈을 뜬 듯 감은 듯, 생각에 잠긴 듯 잠을 자는 듯, 말을 하는 듯 침묵하는 듯, 인간의 얼굴이되 신의 얼굴인 저 물상을.
“관세음보살.”
주지가 습관적으로 추임새를 넣었어.
그리하여 나는 생각했다. 저 표정은 어떤 인간의 찰나에서 따왔을까. 그 모델은 석공의 어머니일까? 아니면 애인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정을 나눈 뒤의 표정이 아닐까. 아니, 배설의 기쁨이 아닐까. 공양 후의 포만감을 표현한 게 아닐까. 도대체 저것을 대체할 얼굴이 있을까. 온갖 상상 속에서 나는 부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부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꿈을 꾸었다. 내가 상에 집착하는 사이 부처는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려주었던 거지. 저 얼굴은 세상의 어느 얼굴도 아니지만 또한 세상의 어느 얼굴이다. 한 여인의 고운 얼굴일 수도 있고 고통에 찬 얼굴일 수도 있다. 내 얼굴일 수도 있고 네 얼굴일 수도 있다.
오토조가 손짓으로 그만 내려오라고 신호를 보내.
“너는 그걸 알아야 한다. 난 이 각도에서 부처를 쳐다보길 즐겼다. 누군가 부처를 교체하거나 옮겨놓았다면 금방 알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나만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한 여인의 얼굴을 지키려고 조바심을 냈지.”
ㅡ
“집중, 집중! 너희들이 무슨 생각으로 요리 병과로 지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요리사는 요리사이기 이전에 가장 현란한 마술사가 되어야 해. 알겠어? 마술사와 요리사 모두 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 다만 마술사는 상대의 눈을 속이지만 요리사는 상대의 혀를 속여야 해. 맛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모든 사물은 그대로 있을 뿐이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 게 맛이야. 의미란 공통의 관습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고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의미를 부여받기도 하는 거고. 유능한 요리사는 그런 개인의 습성, 집단의 습성을 빠르게 간파하여 그들의 혀를 속일 수 있어야 해. 마술사들이 젊은 연인들을 앉혀놓고 모자 속에서 빨간 장미를 뽑아내듯이, 필요할 때 필요한 맛을 대령하는 거지. 곧 죽어갈 머저리들에게. 응, 알겠나?”
ㅡ
적들이 내게 화덕을 내어준 건 치명적인 실수다. 마지막 날, 나는 이 식당을 온전히 태울 것이다. 나의 화덕과 나의 도마와 함께, 이 식당은 병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다시는 제 어머니의 요리 솜씨를 탓하며 전장으로 나온 병사가 생기지 않도록, 제가 모시는 지휘관을 위하여 밤잠을 설치며 죽을 가져다 바치는 부관이 나오지 않도록, 이 잘못된 성의 주방은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 주방이 활활 타오르고 성이 무너지는 상상을 해본다. 맛은 그 무엇도 지배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뿐이다. 내면의 두려움을 잊을 순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인생의 큰 흐름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먹고 즐기는 일에 만족했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요리 따위는 신경 쓰지 말았어야 한다. 그들의 혀는 철저히 파괴될 것이다. 그날이 가깝다.
ㅡ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줘. 하지만 아직 놈의 임무가 끝난 건 아니야. 적들이 사령부를 겹겹이 둘러싸는 한이 있어도 놈이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야 한다. 그게 녀석의 운명이다. 인정받기 위해 도마질을 멈추지 않는 것, 요리를 해 올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규칙적인 복종 속에 개성을 잃어가는 것. 녀석은 자신이 진실로 패배해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 보잘것없는 목숨 하나 보존하기 위해 구차하게 솥에 기름이나 두르고 있다니, 그건 진짜 요리사의 자질이 아니지.”
“알겠습니다.”
ㅡ
물건을 확인하기 전 법당으로 향한다. 언제나 그렇듯 대웅전 천장의 만다라 그림 밑에 정확히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오직 이곳에서만이 미륵의 미소를 마주볼 수 있다. 각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누군가 필시 미륵을 옮긴 것이 될 터이므로 지난 몇 개월 나는 예민하게 굴어왔다. 그러나 보라, 지금 가짜가 분명한 저 미륵은 너무도 당당하게 내게 수줍은 미소를 부려놓고 있다. 장인들의 솜씨가 뛰어나서인지, 아니면 주지가 무슨 요술을 부려놓은 건지 나는 트럭에 실린 진짜와 보대에 놓인 가짜를 거의 구분할 수 없다. 주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걸음 뒤로 물린다.
가짜 부처를 향해 절을 올린다. 백단향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저 얼굴은 오직 하나일 필요가 없는 얼굴이다. 아니 마음만 먹으면 둘도 셋도 만들어낼 수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지난 몇 개월간 무엇에 그토록 집착했는가. 세상에 딱 하나만 존재한다고 믿었던 미륵의 얼굴, 그 얼굴이 어리석은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해진다. 혹시라도 밖의 것이 가짜가 아닐까. 주지가 패망해가는 나의 앞날을 비웃으며 한판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혼란 가운데 쉽게 대웅전을 뜨지 못한다. 시게오가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대웅전을 빠져나왔다.
ㅡ
진군나팔 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찢어와.
눈을 뜨자 사방의 문들이 열리며 엷은 빛이 갈래갈래 쏟아지고 있어. 꿈인가, 생시인가, 관사 밖 하늘로 연기를 뿜으며 국적 불명의 비행기가 추락하는 중이야. 이름 모를 새들이 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고, 새들은 죄다 날개가 검은데 저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 하늘 아래 숨을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관사를 지키는 수비병도, 잡일을 하는 중늙은이 여자도 보이지 않아. 도망쳐야 해. 어디선가 죽은 자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도대체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내 오빠로부터, 아니면 일본인들로부터, 아니면 만주로부터? 나는 방안을 빙빙 돌며 생각에 잠겼어.
문을 열고 조심스레 복도로 나섰어. 소나무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일본식 복도엔 햇살이 칸칸이 머물고 나는 해를 꾹꾹 눌러 밟으며 걷기 시작해. 모두 어디로 갔을까. 전쟁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앗아가버렸는지 비명과 고통, 불안으로 북적이던 공간 속에 오로지 나 홀로 남겨진 느낌이야. 몸이 가벼워. 마치 날개라도 돋은 듯이. 마음만 먹으면 훨훨 날아서 조선 땅에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사내들이 전부 죽어버린 거겠지. 내가 잠든 사이에 전쟁은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사라진 게 분명해. 눈을 뜨고 사내들이 죽어가는 걸 보지 않았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세상의 사내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겠지.
가엾은 첸, 혀가 잘린 그 사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장교식당은 3백 보쯤 떨어진 건물 2층에 있어. 사내들이 전부 죽은 거라면 첸도 죽었겠지. 복도 밖으로 나서자 비가 내리려는지 하늘이 갑자기 우중충해졌어. 먹구름이 사령부 건물을 메우는가 싶더니 비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해. 하늘은 마치 사진을 찍듯이 가엾은 인간의 풍경 속으로 연신 빛을 터뜨리고, 사방이 밤처럼 어두워지고 틈틈이 천둥이 창문을 흔들었어. 그 속에서 검은 망토를 입은 사람의 형체가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나.
?잘 들어, 넌 살아서 여길 빠져나갈 수 없어. 가서 복수를 해. 혀 잘린 첸의 복수를, 끌려와 죽어간 조선 청년들의 복수를, 놈이 잠들거든 허리의 권총을 꺼내 . 안전 고리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 정확히 놈의 심장을 겨눠야 해. 그럼 너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돼. 실패하거든 부엌칼이라도 가져다가 놈의 심장에 욱여넣어. 피가 솟구치거든 장렬하게 놈과 함께 죽어. 어차피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기는 힘드니까. 죽고 산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죽어도 꽃은 피고 아침은 와.
후드득 빗소리가 사라지고 오빠의 환영도 엷어졌어.
동시에 먼 곳에서 울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나를 현실로 불러냈지.
첸의 요리를 씹으며 요리를 품평했고 내게 맛보게 해주었어. 그리고 종종 기억 속 제 어머니의 요리와 비교하길 즐겼어. 첸의 요리에 반했다기보다는, 성질이 다른 첸의 중국요리를 통해 제 어머니의 맛을 끄집어내려 애쓰는 것 같았어. 하지만 요리에 대한 한 사내의 고단한 노력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따스한 국물 몇 모금을 들이켜고 났을 때 사내의 적(敵)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요리사의 혀를 앗아간 죄를, 주방에 개처럼 묶어두고 그를 살려둔 죄를.
ㅡ무얼 기다리지?
오빠의 망령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려.
ㅡ국수, 이 사내에게 국수를 먹이고 싶어.
ㅡ그새 놈에게 정이라도 든 거야? 놈이 첸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정말 몰라? 어서 일어나, 자비 따위를 베풀 시간이 없다.
ㅡ지금까지 첸의 목숨을 연장해준 것도 그야.
국수 한 그릇을 먹을 시간만은 주고 싶어. 어차피 죽게 될 테니까. 앙숙처럼 상대를 겨누던 칼과 매일 끓여 바치던 요리는 뜨거운 국수 한 그릇으로 화해하게 되겠지. 나는 그 마지막 순간을 저들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아.
ㅡ아냐. 놈은 겁쟁이일 뿐이야. 다가오는 적들 앞에서 엉뚱한 쪽으로 생각을 돌리고 싶었겠지. 지금 요리 따위가 다 무어란 말이야?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야. 먹고 마시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적이나 우리나 마찬가지.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을 들은 자들이라면, 제 동료의 갈비뼈를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한번이라도 본 자들이라면 누구도 감히 먹는 것 따위로 한심한 수작을 부리진 못해.
ㅡ제발, 내 앞에서 사라져.
ㅡ당장 권총을 집어. 더는 시간이 없어.
오빠의 망령이 삿대질을 시작해.
머리맡으로 기어가 총집에서 권총을 빼냈어. 내 몸의 가장 누추한 안쪽에서 후드득 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아. 나뭇가지가 꺾이고 동맥의 움직임이 멈춘 듯.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떨리는 손으로 총을 다시 집었어. 절구 방망이를 든 것처럼 무거운 총신. 이렇게 무거운 총으로 사내들은 서로를 겨누고 서로의 목숨을 빼앗나? 어둠 속에 웅크린 오빠가 다시 속삭이기 시작해. 침착해! 먼저 안전손잡이를 풀어. 그렇지.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앞쪽으로 미는 거야. 그래, 그다음 놈의 눈을 봐. 두려워하지 마. 놈의 머리통을, 아니 심장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돼. 놈을 죽인 전공을 소비에트 놈들 따위에게 빼앗길 순 없어. 어서, 우리 손으로, 조선의 이름으로 놈을 죽여.
철컥, 방아쇠를 당기지만 기대했던 총소리는 나지 않아. 두 번, 세 번, 오빠의 안색이 멍이 든 것처럼 변해가. 제기랄, 탄창이 비었군. 총을 총집에 꽂아, 어서. 주방으로 가. 가서 칼을 가져다가 놈의 심장을 찔러. 마지막 기회야. 나는 총집에 총을 도로 꽂고 일어났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오빠라는 최면, 아니 오빠라는 몽유병이 나를 덮친 것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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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ㅡ
*이 글은 , 어째선지 나의 리뷰 , 한줄평에 등록이 안되서 다시 등록을 했었어요 . 현재 문의 중입니다만 , 두개의 같은 글은 복잡해서 카테고릴 바꾸는 중에 수정버튼을 누른다는게 삭제버튼을 고이 눌러 주시고 , 거기에 확인버튼 " 사살까지 해버렸어요 . 덕분에 정성껏 남겨주신 댓글이 ... 사져졌습니다 . 너무 속상하고 아까운데 ㅡ 욕심부리다 , 다 잃은 현장을 보시고 계신겁니다 .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