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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이건 영어식 발음인 줄로 알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라고 했는데 모르긴 해도 그게 러시아식 발음일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어식 발음으로 더 잘 알려있으니 그냥 편하게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가 간질병 환자라는 건 익히 잘 알려진 바다. 그리고 역사상 위대한 인물 몇몇이 같은 병을 앓기도 해 한때 천재병(?)으로도 불린 것으로 알고 있다. 저자는 신경과 전문의다. 그러니 간질병에 대해 오죽 잘 알고 있을까? 간질병이 어떤 병인지에 관해선 단편적으로 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책을 보니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우선 저자의 간질병에 관한 설명을 보자.
간질병 환자가 발작을 일으키면 사람들은 그의 치열한 사투를 혐오스럽게 지켜봤을 테니 본인은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병을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였다. 놀라운 건 발작이 일어날 때 그처럼 육체적으로는 힘이 드는데 영적으로는 “현실의 찬란한 순간이 즐거운 환희의 아침”으로 들려오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희망이 생생한 이슬방울처럼 영혼을 적시듯 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글을 쓰는 소재와 기회로 삼은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전반에 걸쳐 간질병이 자주 나오는 것도 다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측두엽 간질의 전형처럼 보이는데 그것의 특이점은, 중독성 글쓰기와 성욕감퇴증, 과잉종교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의 그처럼 많은 저술은 바로 이런 증세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기도 하다. 또한 성욕감퇴증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는 두 번째 부인에게 서만도 4명의 자녀를 얻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 의학적 소견이란 건 정말 소견일 뿐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여성을 혐오했다고 하는데 그게 성욕감퇴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 것을 보면 의학적 소견이란 걸 간단하게 무시할 수도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책의 첫 부분에서 간질병에 대해 이런 설명을 들으니 도스토옙스키가 일생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살았을지 깊은 한숨이 쉬어지면서도, 사람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꽃 피우는 존재라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겠다 싶다. 무엇보다 간질병에 중독성 글쓰기가 있다니 살짝 부럽기도 했는데 그렇다고 나도 간질병을 원한다는 건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단지 내가 새롭게 깨닫는 것은 인간의 질병은 반드시 해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질병에도 신의 감추어진 섭리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간질병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유로지비 즉 바보 성자다. 이 유로지비는 자신의 안락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존재들이다. 이를테면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나, 우리나라엔 바리데기가, 그의 작품에선 <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병든 세상을 헤아리고, 용서와 베풂을 실천하는 성자로 거듭나며, 그의 간질병은 신께 받은 천형이 아니라 신의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수난과 고행으로 탈바꿈 시키며, 그를 19세기 근대의 길목에 들어선 유로지비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세계 4대 강국의 반열에 드는 러시아에서 이제 더 이상 유로지비를 찾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난했던 시절 잊을만하면 찾아 와서 온 동네를 활기 있게 해 주던 각설이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병을 통해서 현대 문명과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발달된 과학과 의료 체계만이 최선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21세기 현대 과학과 첨단 의료로 봤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는 불구폐질자로 너무나 쉽게 낙인찍을 것이라고 했다. 즉 그가 그처럼 위대한 대문호가 될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이다. 그것은 19세기니까 가능했을 거라고. 특별히 그의 주 무대가 러시아가 아니고 유럽이었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광인과 비정상인을 감금하고 화형에 처하는 광기의 역사가 지배했던 시대였다. 또한 현대의 의료체계를 가장 먼저 도입해 고흐처럼 일찍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했던 유로지비들은 마녀 사냥의 먹잇감이 되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도스토옙스키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작품에 그런 유럽을 조롱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이 부분을 읽는데 순간 아찔했다. 도대체 문명의 발달 특별히 현대의 의료 체계가 인간을 살리기보다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감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린 그것이 최선인 양 그것에 맡기는 걸 주저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만든 질병 분류에서 조금만 비껴나가도 환자 딱지 붙이기를 서슴지 않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구제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우울증으로 내몰고 그들의 자살을 방조해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아픔이나 질병의 고통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심을 고갈시켜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간질은 뭐란 말인가? 도스토옙스키는 그것을 묵묵히 견디며 예술혼을 불태웠는데 그냥 아픔을 해결해 줘야할 환자로만 보았다면 우린 평생 도스토옙스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아찔하지 않은가? 문득 요즘에도 그런 작가가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지는 않지만 한 세기 전 우리나라의 이상이 그랬다지. 그의 천재성은 처음부터 발현이 것이 아니다. 폐에 병이 들고 죽기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천재란 소릴 들을 만큼 심오한 작품을 쏟아냈다고 했다. 그만큼 인간의 고통은 때로 숭고할 수 있는데 그걸 현대 의학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차단해버린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가 평생을 걸쳐 주장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이다. 전통으로의 회기. 전통으로의 복고. 그는 어쩌면 그것을 위해 그처럼 많은 글들과 말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신경 뉴런 하나로 인간을 규명하려고 하는 오늘 날의 과학을 부정하려하지 않았다. 우주의 삼라만상과 무한 광대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과학의 공식과 법칙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녹슨 경박한 물질주의의 상투를 잘라내 버리고 싶어 했다. 저자는 말한다. 문명의 빛이 퍼지면서 어리석은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던 거룩한 존재들은 힘을 잃고, 그에 따라 믿음조차 시장에서 거래되는 산업으로 변질되었으며, 예술의 정신도 변패되어 미가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과학만 득세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그리하여 과학과는 무관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맑은 영혼이 빚어낸 고졸(古拙)의 아름다움도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나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왜 이 세대를 의심하려 하지 않는가? 왜 비판하지하지 않는가? 그러면 그런가 보다 무관심, 무감각으로 일관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과학이 득세하니 종교에 대해, 신앙에 대해 나 스스로 입을 닫아버린 건 아닌지? 도스토옙스키의 신앙이 그저 그의 간질병의 증상중 하나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얼마나 그를 무시하고 무례를 범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새삼 다시 한 번 글의 힘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또한 자신의 병을 내치지 않고 끌어안으며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켜 나갔던 도스토옙스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사실 처음 책이 다소 어렵고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저자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상당한 애정과 경의가 느껴졌고, 그러기 위해 선택한 텍스트를 미처 따라 갈 수 없었던 나의 일천한 지식이 부끄러워졌다. 결코 읽기엔 만만치 않았지만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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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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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살았던 시대배경, 가족환경, 개인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흥미롭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간질병 환자였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책을 너무 길게 써서 완독하기 어려운 러시아 작가이며, 그가 쓴 책은 <죄와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백치>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신경과 전문의가 보는 간질병 환자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어떠할까? 매우 흥미로웠다. 간질병에 대해서도 상식이 부족한데, 그러한 병이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인용되는 작품의 글을 보면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한다. 여전히 두께의 압박이 있지만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9세기 러시아의 뻬쩨르부르그 뒷골목에 살며 글을 썼다. 첫째 아내는 신혼초에 도스토예프스키의 간질 증상을 보고 기겁해서 별거했다하고, 두 번째 아내는 자신의 속기사였다가 결혼을 한 헌신적인 여성이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 정치범으로 사형에 처하기 5분 전에 극적으로 풀려났고, 10년의 수형생활도 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간질병환자였으며, 대문호였지만 병적인 노름꾼이었고,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앓았던 측두엽 간질병은 세 가지 특성을 띠는데, 중독성 글쓰기, 성욕감퇴증, 과잉종교증이다. 이 세가지 특징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장황한 글쓰기, 성적묘사가 있을 법한 부분에 생략으로 일관하며, 러시아 정교만을 정통으로 하고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간질병을 앓아 대인공포증이 있었던 것 외에도 인종주의자이며, 골상학에 심취되었다든가, 여자,노인, 병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잉여인간으로 하찮게 여겨 소설 속에서 혐오범죄의 대상이며, 전쟁을 찬양하는 등 정상적으로 보기에 어려운 사람이지만, 니체가 영향을 받았고, 다시 히틀러가 니체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그의 영향력이 엄청났다고 보겠다. 저자는 19세기 러시아의 부조리한 사회와 현재 21세기 한국 사회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는데 그 통찰력에 안타깝지만 동의하게 된다. 고시텔 작은 방에서 고군분투하는 흙수저, 권위적인 관료들, 높아지는 병원비와 오만한 의사들. 세월이 지날수록 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자리 그대로인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고전은 시대를 불문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것이겠다. 신경전문의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분석한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다. 러시아 문학과 역사,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에 큰 관심을 갖게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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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부터 규칙적인 습관이 생겼다. 아침저녁으로 알약 3알씩 복용한다. 그래도 4알에서 3알로 줄어든 것이다. 사실 그 약의 종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병원에서 처방을 내린 대로 잘 먹고 있다. 간질로 쓰러지고 난 이후부터였다. 간질로 쓰러진 전후 사정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눈감고 일어났더니 병원이었고, 집이었고, 다시 병원이었다. 한 달간 입원해있던 병원에서 아침 진료마다 의사가 묻던 말은 “아침 반찬이 뭐였냐?”였다. 하지만 제대로 답해본 기억은 없고, 울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지금은 일상이 된 습관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쓰러진 이후 기억력은 많이 감퇴하였고, 의욕은 사라졌다. 혹시나 밤에 쓰러져 호흡곤란이 올까 봐 가족들은 늘 노심초사했다. 한번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큰누나가 울먹이며 나를 안고 있었는데, 발작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간질은 더러운 병이라고 취급받았기 때문에, 누나의 울음이 이해가 갔다. 우습게도 간질을 앓고 나니 작은 것들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한다. 더 심하게 쓰러지지 않은 것과 간질 덕분에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아야 할 명분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지금껏 많은 위인도 간질을 앓았다는 기록이다. 정신 외과에 가면 간질에 대한 안내 책자가 있는데 그 내용에는 항상 똑같은 말로 간질을 소개하고 있다. 누구나 앓을 수 있는 흔한 질환이며, 수많은 위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도 간질 환자였다고 소개해준다. 그리고 그 소개 글에는 늘 도스또예프스키가 빠지지 않았다. 대문호라는 칭호가 늘 따라다니는 도스또예프스키도 간질 환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지금처럼 의료기술도 많지 않고, 간질이 오면 쓰러져야 했을 텐데 어떻게 수많은 대작을 집필했는지 궁금했다. 책 <어리석음의 미학>은 이런 궁금증을 풀어줄 내용과 더불어 전근대의 병든 사회의 이면을 꼬집는다. 도스또예프스키 작품의 병적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진단한다. 책에서는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을 통해 토스또예프스키를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그중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그의 소설에서 시간의 흐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질은 기억이 끊기는 현상이기에, 도스또예프스키는 기억의 흐름으로 이야기를 서술한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주인공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자화상과 같았고, 단편화된 기억은 혼란한 시대상과 그의 자라왔던 어릴 적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했고, 자식을 떠나보냈으며, 감옥살이를 겪었고, 노름으로 탕진하는 등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지냈다. 그 혼란과 방황 속에서 그는 글로 자신을 분출했다. 또 하나 놀라운 점은 도스또예프스키는 간질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발작할 때마다 그는 무너지기보다 글에 계속해서 녹여냈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도리어 시대상을 잘 표현해낸 작품이 되었고, 병적인 인간 군상의 최전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현대와 비교해서 보여준다. 매일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해소할 길이 없는 현대인의 모습은 토스또예프스키 작품 속 인물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무거운 이야기다. 과연 200년이 지난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사는 건지 생각해보게 한다. 행복한 미래를 바라보며, 불행한 삶을 사는 우리의 정신적 고통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매일 먹는 간질약의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지금, 인정 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 더욱 처절하다. |
![]() 시대를 초월해 대문호로 인정받는 것이 꼭 그 사람의 됨됨이나 인격 역시 훌륭해야 한다는 전제를 바탕에 둔 것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엄청난 작품을 쓴 작가의 모습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나 작가로서 가지는 위대함, 또는 비범함이 더해진다면 작품과의 시너지는 더욱 커질테니 작품과 더불어 작가의 삶 또한 소설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또예프스끼란 이름만 들어도 죄와벌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나는 읽는데 실패했지만.. 그외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어쨋든 그가 대단한 작가임을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심각한 간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발작을 일으키기 일쑤 였고 그 시절 간질병은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병 중의 하나였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귀족적인 삶을 살지는 못했다.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고 더러운 뻬쩨르부르그 뒷골목에 살았으며 간질병으로 인한 발작이 언제 어떻게 생길지 모르기에 사람을 만나지도 밖을 돌아다니지도 않는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간질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창작의 원동력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저리치는 발작의 순간은 삶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자극제와 같았다. 또한 대부분 간질병 환자들이 발작 전후에 의식을 잃어 가는 것과 다르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기록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기에 확실히 비범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영광과 치욕, 빛과 어둠, 상승과 추락, 사랑과 증오, 믿음과 불신, 천사와 악마.. 양 극단을 넘나드는 그의 삶의 이력과 사상이 고질병인 간질병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대문호 도스또예프스끼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예술혼이 주조된다. 이 책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정신, 그리고 작품과 인물들의 심층적인 분석과 그 시대의 시대상과 함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모습을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살던 19세기 러시아의 뻬쩨르부르그의 뒷골목은 더러운 오물과 악취를 풍기는 병과 세균의 온상지였다. 장티푸스,결핵,콜레라등 수많은 병균들이 들끓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암울한 곳이다. 이런곳에서 간질병을 앓으며 글을 쓴다면 과연 희망적이고 긍정적 기운이 담긴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렇기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은 잔인한 살인이나 각종 정신병을 앓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중엔 자신의 정신상태나 가치관을 투영시킨 인물들이 많으며 그로 인해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는 대문호라기엔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성을 혐오하고 자신의 종교 이외에는 모두 경멸하며 유럽에 대한 절대적인 적대심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일지라도 대문호라는 칭호를 받기는 커녕 학계에서 매장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살아야 했던 암울한 시대상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도스또예프스끼는 사회범으로 교도에 수감되며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또 실제 사형수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까지 있다니 그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건강한 정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결핵균보다 더 독한 혐오와 경멸, 증오라는 세균이 자란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침을 뱉고 이를 갈게 만드는. 하지만 19세기 러시아 뒷골목의 처참한 상황이 낯설지 않은것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와 크게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백신이나 보건위생이 발달하여 옛날처럼 결핵이나 콜레라에 걸려 아무런 치료 없이 그냥 죽어가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지금 우리에겐 더 큰 질병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갉아 먹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울증이나 치매는 본인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고통 받게 되는 현대인들의 가장 큰 질병 중의 하나이다. 백신이나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마음의 병들은 그와 더불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뗄 수 없는 고독과 합쳐지면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결핵 발생률, 유병률, 사망률, 항생제 내성발생률 모두 최고 수준을 달리고 있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 고독사에 이르는 노인들의 마지막이 더이상 특별한 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고독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모두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로 몰려 들지만 공동체 의식이나 일체감을 찾아 보긴 힘들다. 항상 쫓기는 듯한 생활과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언제나 피로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또한 부를 거머쥔 일부의 사람들이 대다수의 시민들을 조롱하고 기만하는 행위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암울한 소설 속의 시대보다 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21세기 지금이 그때보다 얼마나 더 많은 발전을 한 것인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문명생활에는 누구나 거부하기 힘들고 단념하기 불가능한 편리함과 안락함, 화려함 같은 것이 있다. 그 대신 불안과 우울을 늘 안고 살아가야 한다. 비록 그의 소설은 잔인하고 암울한 인물과 이야기로 가득하며 자신 역시 고독하고 우울한 인생을 살았고 간질병을 앓았지만 그는 자신의 병을 초월하여 그 고통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 대단한 사람이란것을 느꼈다. 병으로 인해 고독하고 기댈곳 하나 없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 같은 삶을 살며 끝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글 쓰기를 포기하지 않은 집념과 그 재능은 충분히 대문호라 칭호되기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사상이나 가치관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가 겪은 수많은 고초와 고통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병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건강한 정신과 몸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그가 표현해 낸 많은 인물들의 심리와 그 당시의 사회상과 빗대어 지금 우리의 21세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신적 질병과 문제들을 들춰내어 지각하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을 내가 펼쳐볼 수 있는 마음의 결심이 생기기를 바래본다. 그는 진정 21세기의 의사들을 가르칠 수 있는, 19세기의 거룩한 병자였음에 틀림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