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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부과하는 것에, 사람은 복종해야 하느니....바람과 파도에 맞서 봐야 소용 없도다.-세익스피어 <헨리 6세>3부 4막 3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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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한 내용을 소재로 한 글이다. 흥미와 의미를 함께할 수 있는 책이라고 여겨진다. 책은 미국이 성립하고 서부 개척을 해나갈 때의 일이다. 그 땅에 살고 있었던 기존의 사람들(인디언)이 그들의 생존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 가운데 애틋한 인정과 만남의 이야기도 그려진다. 작가는 말한다. 이 이야기는 온전히 허구라고. 그러나 현실의 어떤 이야기보다 진실성이 가미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그 결과 새로운 삶에 생명을 나눈 사람들도 그려볼 수 있고, 문화의 공존을 모색해볼 수도 있는 좋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고. 화자는 어린 시절 미친 조상 메이 도드 할머니에 대해서 들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는 정신 병원에서 달아나 인디언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그 할머니의 이러한 소문에서 그 출발점이 있다. 이것은 작가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그 상상력은 역사적 흔적과 결부되어 특별한 이야기로 전환되고 있다. 19C 후반 서부 개척이 한창이던 시기, 인디언 부족 중 하나인 샤이엔 족은 위기를 느끼게 된다. 온화한 주술 대족장이라고 이름 붙여진 리틀 울프는 백인들과 화평을 이루어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부족 대표단을 이끌어 수도인 워싱턴에 입성한다. 그리고 화의를 진행해 나간다. 요구 조건이 백인 여성 천 명을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말 천 필과 평화를 주겠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조건이다. 그러나 당시의 그들 입장에서는 말이 여인들보다 더 중요했을 수도 있으리라. 문화의 차이가 이런 화의 조건을 가져오게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울프는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동화되어 나가는 방법으로 살아남겠다는 뜻이리라. 자신들의 자식은 어느 쪽에서도 삶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리라. 청나라가 중국에 들어와 그들의 문화를 지니면서 중국 문화에 동화되어 결국은 하나가 되어 갔듯이 말이다. 현실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일이었겠지만 상상력은 무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그 조건을 수용하고 여인을 보내는 데에서 출발한다. 가는 여인들은 거의 문제성을 내포한 사람들이다. 지원자들을 제외하고는 환자, 정신병이 있는 자, 문제성을 지닌 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속에 이야기의 주인공 메이 도드도 끼어 있다. 이야기는 메이 도드의 일기 형태도 되어 있다. 차를 타고 인어언의 마을로 떠나는 장면부터 그려지고 있다. 메이는 신분이 낮은 자와 사랑에 빠져 지식들을 낳고 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 의해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던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병원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디언 동화 정책이 세워지고 메이는 자유를 찾아 인디언에게로 가게 된다. 인디언 남편에게 아이 한 명만 낳아주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조건이 그 두려운 상황에 모험을 걸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메이의 일기는 인디언의 세계로 가면서 만난 사람들, 함께 가는 여인들의 내력 등 이야기들이 행해진다. 그러면서 인디언들을 만나는 과정들이 그려진다. 신부가 되는 여행을 하면서 무리를 이끌고 있는 버크 대위라는 인물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는 메이, 그리고 스스로 자책도 한다. 버크와 많은 이야기를 통해 그 사업-문화의 동화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일-의 적절성 여부를 논의하고, 지금이라도 포기할 것을 권유받기도 한다. 아이들 아빠에게 편지를 쓰고,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가족 호텐스 언니에게 자신의 상황을 편지로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그들은 갇힌 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목적지인 인디언의 세계로 다가간다. 시간은 흐르고 드디어 인디언들을 만나는 장면에 까지 이른다. 그들은 메일 일행을 데려다 놓고 우시장에서 소를 고르듯 선택하여 고른다. 그리고 메이는 무리들의 우두머리인 리틀 울프에게 선택된다. 이 모든 과정을 그들을 이곳까지 데려왔던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들에게 선택되고 그들과 함께 가기 전 마지막 켐프에서 지내는 시간은 암담함 그 자체다. 더러는 인디언과 함께 사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고, 더러는 자포자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버크 대위는 메이에게 아직도 늦지 않으니 인디언의 소굴에 들어가지 말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안타까운 시간이 흐른다. 그 후 버크 대위 일생은 계약된 순서대로 움직일 것이리라. 메이의 남편이 된 울프는 다른 두 부인이 있다. 살림은 첫째가 하고, 메이는 둘째의 시중을 받는다. 그리고 문화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들의 삶에 목사님도 남아 참여한다. 그들을 종교적으로 순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신부들과 그곳에 남은 것이다.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목사님 일행은 그곳에 남은 신부들의 큰 위안이 된다. 그들을 안내해 주는 역할도 하고 돌보는 역할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한다. 원래 자식을 한 명 낳아주면 이혼을 할 수도 있도록 계약되어 있다. 그런데 종교적으론 이혼이란 것이 교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점들은 정리하고 부부의 삶으로 들어간다. 메이의 신혼 생활은 비교적 행복하다. 수영을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있고, 다른 백인 여성들과 모여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도 있다. 그러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어 가지고, 인디언의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메이는 가족 구성원들과도 마음을 나누고, 인디언 족장의 아내로 별 문제 없이 적응해 나가는 삶이 이루어진다. 또 메이는 신혼여행 비슷한 것을 떠난다. 수렵을 하는 울프를 따라 무리와 떨어져 함께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행복이란 것과 평안이란 것을 만난다. 아마 작가가 메이에게 선물한 시간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들 무리와 함께 사는 과정에서 위기도 만난다. 술과 관련된 부족들의 만행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몰아가고, 거리의 여자 취급을 받는 상황도 전개된다. 문화가 다른 그들의 풍속을, 윤리를 이해하지 못해 일어나는 상황으로 여겨진다. 또 다른 민족에게 납치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상황도 전개된다. 그런 가운데 분노로 동료 한 명이 죽는 사고도 발생한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이 메이의 일기에 기재되고 우리는 그 일기로 낱낱의 상황을 읽어나가게 된다. 가슴 저린 그들의 아픔이 묻어남을 본다. 인디언의 부인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냉대를 받는 상황은 진정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관계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질적인 문화를 연결시켜 보고자 한 시험이 결국은 인디언들을 구속하기 위한 절차의 하나로 해석되고 당사자들은 암담한 시간들도 갖는다. 인디언들의 자식을 낳아 서로간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들의 행위가 결국은 인디언들에게 보호구역으로 몰아넣는 결과로 나타남을 보고 여성들의 아픔은 크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보통의 백인 여성들이 아니다. 인디언의 부인들이다. 그들이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 인디언들의 설 자리는 잠식되어 가도, 비극적인 결말로 나아가는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버크는 미개인들이 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부족에 대한 연대를 포기하고 개인의 안녕을 도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미개인이 백인 세계의 ‘개인주의적 문명’속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사이엔 족에게 그런 개념은 완전히 낯선 것이다. 우리 사람들, 부족, 그리고 부족 내의 가족은 언제나 개인을 앞선다. 예를 들어 내 남편 리틀 울프의 헌신성은 더없이 고결하고, 문명사회의 교정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 이야기는 인디언들을 미국사회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한 곳으로 모이게 하고, 구속하게 되었다. 그것이 불합리하다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조건 없이 처형하는 행위도 자행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메이도 인디언들이 군인들에 의해 학살되는 현장에서 그 일에 반발하다가 총탄을 맞고 숨지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우고 있다. 주술성을 지닌 인디언 부족이 문명 앞에서 어떻게 처절하게 무너져 가는가를 육성으로 증언해 주는 글이다. 낱낱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 형태로 제시하여 신뢰성을 높이고 있다. 아마 당시의 많은 인디언 이야기들에서 소재를 얻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아픔이 되고, 오늘날 문제가 되는 다문화 가족의 아픔으로 까지 치환된다. 문명이 가져다준 폭력성 앞에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글의 내용은 후대를 통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가슴이 아픈 이야기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글이다. 문화와 문화가 충돌할 때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가야 하는가? 이때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한 쪽이 파멸하고 흡수되어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글이다. 힘이 있다고 그것만을 내세워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전쟁과 폭력의 논리로 이루어 가는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는 글이다. 사라져 가는 문명 속에 돌아보아야 할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이 글은 진정으로 인간들이 추구해야할 가치를 생각해 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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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시대 인디언과 백인들의 사투끝에 나온 두 사회의 평화안. 그것은 말 천 마리와 백인 여성 천 명을 맞 바꾸는것. 이 제안을 한 것은 인디언들로, 백인 여성들이 낳은 인디언 혼혈 아이들은 백인 사회에 순조롭게 편입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 이었다. 생각하면 참 황당하고 어이없는 제안이지만 종족보존의 큰 위기를 맞은 인디언들로서는 나름 최선의 방법 이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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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 신부를 우리에게 달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말 천 마리와 평화를 줄 것이다.” ㅡ 샤이엔 족의 대족장 리틀 울프의 제안. 천 명의 백인 신부와, 말 천 마리. 덤으로 평화까지. 얼토당토않은 제안에 허허허, 너털 웃음만 나오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 작품은, 그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자, 또 이야기의 전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에게서 ‘도덕성 문란’이라는 죄목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야만 했던 메이 도드. 그녀는 그곳에 갇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행방을 알 수 없을 뿐더러,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조차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채로 평생 살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옥죄어 옴을 감출 길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실낱같은 구출의 희망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을, 그녀가 놓칠리 없었다. 특명, ‘인디언의 아내가 되어라!’- 그래서, 그녀는, 인디언의 아내, 그것도 인디언 추장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작품은, 인디언의 아내로 살아가는 메이 도드, 그리고 다른 백인 신부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메이 도드 외에 다른 백인 여인들 역시, 벼랑 끝에서 간신히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그곳으로 가게 된 것. 아, 이 얼마나 무자비한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도 역시, 매이 도드가 느꼈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점철지어진 구원의 손길이었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들은 또 다른 생을 살아가듯, 매우 자연스럽고, 또 자신의 방식대로 인디언 아내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이, 자칫 동정을 이끌기에 충분한, 어쩌면 가련한 여성상을 내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안에서 만큼은, 그 어떤 누구보다 당당함으로 똘똘뭉친, 인디언의 백인 신부일 수 있었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꽤나 흥미가 돈다. 하지만 책을 함께 하는 한 달 여 동안, 흥미가 일었다가, 사라졌다가, 일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 그것은 아마 바쁜 일상 속에 치여있던,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던 나에게 작품의 몰입이 한순간에 폭풍이 몰아치다가, 그럼에도 쌓인 피곤을 이기지 못해 쉬이 잠들어버린, 까닭일지도 모르지, 싶다. ㅡ 실은 나, 이 역사를 제대로, 아니 전혀 모르는 까닭에, 검색한 바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허구다. 허구도 이런 허구가 없다. 역사를 다시 원점에 두고, 인디언(샤이엔족)에게 천 명의 백인 신부를 주기를 거절했던 미국 정부가 수락하는 장면이니, 논픽션이자, 픽션인 셈이다. 그런 제안은 있었으나, 실제로는 성사되지 않은 제안. 그것을 두고 작가는 고민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끝을 내버리기엔 인디언들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인디언들과 백인들의 평등한 사회 구현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그녀들의 위치는, 비록 인디언의 아내,였지만, 그녀들은 오롯한 백인이었으니, 어쩌면 약간 더 시간이 있었다면, 평등 사회는 충분히 구현될 수도, 있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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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의 책받침과 연습장 표지, 그리고 방안 벽면을 줄곧 차지했었던 여배우 “피비 케이츠(Phoebe Cates)”가 영화 <파라다이스(1982)>에 출연할 당시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베드윈 족장이 낙타 25두와 양 100마리로 여주인공 피비 케이츠를 사겠다는 제안을 했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아내를 돈이나 가축으로 사는 일이 중동과 아프리카 유목 부족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하니 문화적인 차이 면을 감안한다면 그런 제안을 영 이해 못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 어린 마음에 이 기사를 읽고 나도 피비 케이츠를 사기 위해 돈을 모아볼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 도 이겠지만. 그런데 미국 서부 개척 시절 한 인디언 부족이 백인 정부에 천명의 백인 신부들을 말 천 필과 평화를 댓가로 달라고 요구했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요구는 거절되고 아메리카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대학살로 이제는 보호 구역에 갇혀 지내는 소수 민족들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인디언들의 요구대로 백인 신부들이 인디언들에게 보내졌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참 말도 안 되는 그런 상상이겠지만 소설적 허구로는 충분히 이야기꺼리가 될 만한 그런 재미있는 상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상이 실제로 소설로 만들어졌다. 바로 “짐 퍼거슨”의 <천명의 백인 신부(원제 One Thousand White Women /바다출판사/2011년 7월)>이 그 책이다.
작가는 “저자의 말”에서 이 책은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만들어진 전적으로 허구의 산물이라고 전제하며 이 소설의 씨앗이 1854년 포트 래러미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서 북부 샤이엔 족의 족장이 미국 군 당국에게 천명의 백인 신부를 선물로 달라고 요청해왔고, 말할 필요도 없이 백인 당국은 요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평화회담은 결렬되고 샤이엔 족은 돌아갔으며 “당연히” 백인 신부는 가지 않았던 실제 역사적 사건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당연히” 안가는 것이 아니라 백인 신부들이 가는 데서 출발한다. 다만 시대적 설정과 등장인물들은 허구로 설정해서 말이다.
실제 사건보다는 20년이 지난 1874년 9월, 샤이엔 족의 ‘온화한 주술 대족장’ 리틀 울프는 백인들과 영원한 평화를 이루겠다는 목적으로 부족 대표단을 이끌고 수도 워싱턴까지 기나긴 육로 여행을 했다. 국회 의사당 건물에서 열린 회담에서 족장은 말 천 마리와 평화를 댓가로 천명의 백인 신부를 선물로 달라고 요구한다. 당연히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고, 양쪽 진영은 일촉 즉발의 상황에까지 치닫게 된다. 간신히 수습되어 질서를 되찾은 후 샤이엔 족 대표들은 퇴장 - 위대한 족장은 그 선두에서 당당하게 걸었다 - 하고, 그날 밤 워싱턴에 이 불경한 제안이 퍼지면서 시민들은 문을 꽁꽁 잠그고, 아내와 딸들의 외출을 금지했으며 도덕적 분노가 가득한 선언을 한 하원과 이교도에게 팔려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행정부의 재빠른 반응이 이어지고 이틀 뒤 분노한 시민들의 조롱과 야유를 뒤로 한 채 리틀 울프 일행은 수도를 떠난다. 실제 역사라면 이 시점에서 해프닝으로 끝났을 텐데, 흥미로운 - 실제였다면 말도 안 되는 - 현상이 전국에서 일어난다. 전국 각지의 여성들이 샤이엔 족의 신부가 되겠다고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대통령과 자문위원들이 실용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각의 다른 장관들 또한 이런 계획이 ‘인디언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옹호하면서 결혼 계획이 은밀히 추진된다. 리틀 울프 족장이 방문한 지 6개월이 지난 1875년 3월 초 샤이엔 족의 신부가 되겠다고 자원한 백인 여성 1차 지원단 48명은 기차에 몸을 싣고 철저한 비밀에 싸인 채 북부 대평원을 향해 워싱턴을 떠났다. 이렇게 “사건”의 진행과정을 설명하는 “프롤로그”가 끝나고 시작되는 본문에서는 백인 신부단의 일원인 25세 “메이 도드”가 쓴 일기 형식으로 기차를 타고 인디언 마을로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미천한 신분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던 메이는 자유 - 아이 한 명을 낳아주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조건 - 를 위해 샤이엔족에게 가기로 결심하고 기차에 오른다. 여행 중 인솔자인 버크 대위에게 연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인디언 마을에 다다른 메이는 신부 선택에서 대족장 리틀 울프에게 선택되어 그의 부인이 된다.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던 울프 족장은 메이에게 둘째 아내의 시중과 문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맡기게 되고, 메이는 행복한 시간들과 때론 위기의 시간들도 겪으면서 서서히 인디언 사회에 동화(同化)한다. 그러나 평화와 두 문명의 연결이라는 목적으로 시작된 이 인디언 신부계획은 인디언들의 캠프 근처에서 금(金)이 발견되자 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내몰기 위한 군대가 파견되면서 양 진영의 평화협정은 깨져 버리고, 계획 또한 1차에서 끝나버리게 된다. 진정으로 “인디언”들의 신부가 된 메이와 백인 여성들은 이런 현실에 가슴 아파한다. 과연 메이와 백인 신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 소설의 장르를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역사 속의 어느 사건이 실제와는 다른 결말을 낳게 되면서 역사가 바뀌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어 일종의 “가상역사소설(假想歷史小說, 또는 대체역사소설)로 볼 수 있겠다. 역사적 사실(Fact)에 허구(Fiction)를 결합한 "팩션(Faction)" 소설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일어났다면 하는 가정을 전제로 했으니 엄밀히는 가상역사소설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종종 팩션 소설들도 허구가 지나친 나머지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 - 예를 들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탈출해 유럽으로 건너와 특정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는 어느 소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겠다. 물론 예수의 부활(復活)을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 도 있으니 팩션 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장르 구분이야 어떻든 첫 시작인 <프롤로그>부터 기상천외한 이야기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 책은 주인공 “메이 도드”의 일기가 시작되는 본문에서는 도대체 인디언에게 시집을 간 백인 여성들이 어떻게 적응할까 하는 궁금증에 마지막까지 눈길을 결코 떼지 못하고 내처 읽게 만드는 참 재미있는 소설임에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너무나도 이질적인 문명(文明)에서 살다온 백인 처녀들이 인디언 부족과 결혼하여 동화하는 과정은 실제 역사가 아닌 이상 작가의 상상력과 가치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을 텐데, 예컨대 서구 문명의 우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던가 아니면 인디언 문화의 신비로움만을 부각시키는 형식에 치우치기가 쉽고,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또는 억지스럽게 그려내기가 십상이었을 텐데 실제였더라도 책 속에서 묘사하는 여러 갈등과 위기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적응했겠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개연성이 느껴진다. 그렇다 보니 작가가 분명 허구임을 밝히고 시작했음에도 혹시 미국 정부가 애써 감춰온 실제 역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 - 인디언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이 꽤나 사실적이고 개연성이 있지만 첫 시작에서 메이 도드의 증손자 "J.윌 도드”의 <들어가는 글>에서 시작되고 본문이 3인칭 시점이 아니라 메이 도드의 일기 형식의 1인칭 시점으로 이뤄진, 소설의 “형식”적인 면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이 들 정도인데,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독자들이 메이 도드가 실재 인물이냐는 물음에 작가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실망했다고 하니 이런 착각을 나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학살이라고 불러도 전혀 지나침이 없는 인디언에 대한 박해를 고발하는 것일 수 도 있겠고, 세계화라는 명목하에 이제는 “지구촌(地球村)”이라는 명칭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국가 간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지만 아직도 정치, 경제, 종교 등의 차이로 인해 분명한 “차별(差別)”이 존재하는 현실을 과거 서부 개척 시절 인디언에 대한 박해와 무엇이 다르냐는 냉소로 해석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 굳이 어떤 “의미”를 찾을 수고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미 작가인 “짐 퍼거스” 는 이런 확대 해석을 경계한 듯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고 하니 말이다. 아뭏튼 이 책, 실제로는 전혀 일어날 수 없는 - 그래도 혹시 라는 의문이 들게 하는 - 그런 상상이겠지만 소설적 허구로서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또한 작가의 당부대로 굳이 어떤 의미나 감동 포인트를 찾을 필요 없이 이야기만으로도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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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수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중략)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적에 그들이 태어난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는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시애틀 추장의 편지 중-
그들에게 조상대대로 살던 터전인 땅은 물리적인 땅이 아닌 그들의 삶이며 그들의 전부이기에 그들에게서 살던 땅을 떠나라는 말은 인디언들의 삶을 고스란히 빼앗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백인들의 이기심과 욕심이 부른 잔혹한 인디언의 역사를 배운 연후엔 그들의 죽움이 숭고하기까지 했으니 서부영화의 주인공이 내겐 더이상 영웅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미국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책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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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명백히 허구이다. 하지만 역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읽다보면 독자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기도 하고 그 사건 혹은 한 부분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천 명의 백인 신부>>는 "1854년 포트 래러미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서 북부 샤이엔 족의 이름 높은 족장이 미국 군당국에게 자기 부족의 젊은 전사들에게 천 명의 백인 신부를 선물로 달라고 요청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백인들이 이 요청을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로 간주했기에 역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 하지만 생각해보라. 인디언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알며 예의를 갖출 줄 알았던 이 부족의 요청대로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미국은 좀 더 다른 형태의 더욱 우수한 사회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지는 않았을까. 물론 모든 일이 최상의 조건에서 최상의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소설은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비록 역사와는 반대되는 조건에서 시작되었지만 무조건 이상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백인들이 우세하고 잔인하고 강력했던 그때 그 시절을 묘사한다. 그러기에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이 역사가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자꾸만 착각하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메이 도드. 그녀는 명예나 관습, 차별, 지위 등에 전혀 게의치 않는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자유로움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두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저 사랑했을 뿐인데 "도덕성 상실"라는 불명예스러운 병명을 안고. 어쩌면 그녀로서는 사랑하는 두 아이를 만나겠다는 희망 하나로, 자유를 위해 정부의 백인 신북 계획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든지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그녀는 그저 자유로움을 선택했을 뿐이니.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많은 백인 신부들은 각자의 사연을 안고 한 열차에 오른다.
소설은 주인공 메이 도드의 일기장과 그녀가 보낸 편지, 그녀의 외증손자뻘인 도드의 설명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병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계획에 동참하게 된 이유와 여행을 떠나며 그녀가 보고, 듣고, 느낀 것. 함께 하는 여자들에 대한 묘사, 인디언들과의 생활과 미국 군당국과의 정치적 관계까지... 그녀에겐 모든 일이 일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의 일기는 그녀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녀의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며 어쩌면 이 소설의 결말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시작이 아닌, 긍정적인 시작이었기 때문에 그 마지막도 그러하리라고.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설은 무척이나 현실적이다. 백인 중산층 이상의 고결한 신분이었던 메이가 인디언 생활을 하며 느낀 인간 삶의 동등성을 통해 백인 사회를 비판하기도 하고 문명인으로서 미개인들에게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잔인함에 대해서도 객관적이다. 무엇보다 백인 신부 계획을 시작해놓고 상황에 따라 그 계획을 바꾸는 미국 정부에 대한 개탄도 여지 없다.
"그러면 우리의 공식 지위는 뭐지? " 내가 물었다. "희생양일 뿐인 건가? 흥미롭지만 결국 실패한 정치적 실험? 사역 중 변고를 당한 선교사? 아니면 가장 쉽게, 자기 의지로 미개인들과 동침한 타락한 백인 여자?"...270p
처음엔 어쩔 수없이 이 계획에 자원했으면서도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는 의식으로 행동했던 많은 백인 신부들이 조금씩 그들과 동화되어가며 그들의 입장에 서게 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들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하루는 시작된다. 나는 오직 내 의무만을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떠난다. 나는 인디언 아낙이다."...377p
허구이지만 마치 진실처럼 느껴졌던 이 소설은, 소설로서의 재미와 역사적, 정치적으로서의 사고, 여성과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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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라는 개념은 의외로 정확하지 않다. 예컨대 집을 한 채 ‘소유’했을 때 처음으로 집을 구매하고 취득세와 등록세를 낸 후 집 단장을 끝냈다면 집을 소유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 살며 자식을 키우고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면 소유라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집을 10채나 100채 쯤 ‘소유’한 사람이라면 그 소유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각 집마다 세입자들이 있는데 그 세입자 중 최소한 열 중 두 셋은 항상 불평불만을 표시할 것이며 집은 수리할 곳으로 넘쳐 난다. 집을 가꾸는 기쁨보다는 관리하는 어려움이 더 많다. 만약 좋은 집주인이라면 집에 신경 쓰느라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며 악덕 집주인이라면 세입자들의 저주로 꿈자리가 사나울 수도 있고 소송에 걸릴 위험도 있다. 그래도 집값이 좋을 때는 그나마 낫지만 집값이 떨어지거나 거래가 잘 안 되거나 하면 사람이 집을 소유한 것인지 집이 사람을 소유한 것인지 헛갈리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소유란 개념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소유란 그 물건에 얽매이지 않고 단지 그 효용을 취하기만 하는 것이다. 바로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가 진짜 소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서양, 특히 농업 사회와 산업 사회를 거친 유럽과 미국은 이런 무소유나 토지공개념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의 유목민족이 가지고 있는 땅에 대한 개념이 훨씬 ‘소유’와 맞닿아 있다. 그들은 땅으로부터 온갖 물자를 얻는다. 그리고 그 땅에 필요한 사냥감 같은 것이 떨어지면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땅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각 부족들 간에 고유한 영역이 있어서 서로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한다. 각 대륙의 광활한 땅 전부가 그들의 것이지만 반면에 그들은 그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땅에 애정을 가지고 있고 땅으로부터 효용을 얻고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전혀 얽매이지는 않는다. 그 땅을 가꾸기 위해 특별히 고생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미국정부가 인디언의 땅을 탈취하려고 했을 때 인디언들은 탈취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땅도 아닌데 갑자기 나타나 영역을 구분 짓더니 불과 몇 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약속을 파기하고 새롭게 인디언 보호구역이랍시고 엄청나게 먼 땅으로 이동시켜 부족의 절반 쯤 죽이고 전혀 쓸모없는 땅에서 나머지를 굶어 죽인다. 그리고 이런 만행은 아프리카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정착과 유목의 싸움에서 정착이 승기를 잡게 되는 근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유목이 정착을 이긴 적이 없다. 결국 소유란 개념은 정착자들의 소유 개념으로 획일화되고 유목적 느낌의 소유 개념은 현재 사멸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세상의 모든 땅은 사람의 이름을 필요로 하고 자연 그 자체로 취급받지 않는다. 단지 유용한 땅이냐 아니냐가 판단의 기준일 뿐이다. 사람의 이름을 필요로 하는 땅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종족은 패배의 길을 걷는다. 이 책은 필연적으로 패배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인디언, 특히 우아함과 고결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샤이엔 족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놀랄 만큼 개성이 강한 백인 신부들이 인간과 자연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인디언들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된다는 인류 개조 프로젝트를 포함하고 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나 〈운디드니에 나를 묻어주오〉, 그리고 이 책 모두 비극이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인디언에 관련된 진실들은 모두 비극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밝게 만들기 힘들게 한다. 그러나 이 책이 다른 인디언에 관련된 책과 다른 점은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희망의 반전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그 숨어 있는 희망의 반전을 찾아 내는 힘은 저자의 오랫동안의 자연관찰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 관련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자료조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저자의 상상력에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선악의 개념, 소유의 개념, 행복의 개념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바로 그런 고민이 우리의 현재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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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최고의 소설이다. 이제까지 읽은 소설중 단연 최고이다. 문학이라는 딱딱한 범주로 이 책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기야 내가 문학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문학을 말하랴. 하지만 스토리로 치자면 할 말 많게 만드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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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험프리의 <위대한 명연설>이란 책에 소개되었던 많은 명사 중에 기억에 오래 남았던 인물이 있다. 쇼니족 추장으로 당대 가장 위대한 미국 원주민 지도자였던 테쿰세. 그는 원주민의 영토권을 주장하며 미국의 팽창주의에 맞서 싸웠고, 템스전투에 전사하였다.테쿰세의 연설들은 역사의 뒷길로 비참하게 사라진 그 시절 원주민들의 목소리와 그 사양과정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우리 땅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명연설 中 p. 39> 『한때 이들 인디언은 행복한 종족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쳐들어오는 백인들 때문에 비참해졌습니다! 당신들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자신은 그 누구와의 약속도 지키지 않으면서 우리에게는 당신들의 약속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런 백인을 우리가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 <위대한 명연설 中 p. 40> 테쿰세의 원주민 저항시기를 타고 한 50년 이상 더 내려가면 이 소설의 배경시점이 된다. 그때까지 미국은 원주민에 대한 정책은커녕 눈초리도 전혀 바뀌지 않은 상태, 오히려 원주민세력의 더 극성스러운 압박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시절이다. 샤이엔족의 족장이 직접 워싱턴을 방문하여 천명의 백인 신부를 천 마리의 말과 바꾸자고 제안했다. 원주민들은 계속되는 전쟁과 질병으로 종족의 대가 끊일 위기를 두고 결연한 마음으로 왔다. 미국은 발칵 뒤집혔지만, 곧 기득권의 정치적인 이득을 챙기고자 정신병원이나 공장에 있는 우울한 인생들의 자발적 동의서를 받아 여러 가지 포장을 통해 긴 여정을 시작한다. 주인공은 메이 도드. 부잣집 처녀가 낮은 신분의 청년과 사랑에 빠져 동거하고 애 둘 낳고 살다가 어느 날 부모의 강력한 조처로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원주민과 결혼이라는 이 제안을 받았을 때 그녀는 무조건적인 자유만을 갈망하며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기차에 올라 군대의 호송을 받는 중, 버크대위와 갑작스러운 사랑에 빠지고 여정의 마지막날밤 정을 통한다. 그리고 샤이엔족의 족장에게 발탁되어 그의 신부로 미개인의 생활에 동화되어 살아간다. 힘들고 역겨운 생활이지만 서서히 그 종족만의 특성과 문화를 존중할 수 있게 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 사람을 죽이고 난 뒤의 시체처리 부분의 잔인성, 그것이다. 중간에 미국정부의 입장이 애매하게 돌아간다. 원주민 땅에서 엄청난 금광이 있다는 소문으로 그들을 다 몰아내려는 수작이 생기고 여기서 미국여성은 철저하게 원주민과 동일시된다. 주인공을 비롯한 많은 미국여성이 해산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샤이엔족은 다른 부족을 침탈하고 그 부족 아기들의 오른손을 베어버린다. 그들의 잔혹성에 미국여성은 치를 떤다. 그리고 그 잔혹성이 저주를 내렸는지 모를 일이 일어난다. 미국의 큰 병력이 들이닥쳐서 샤이엔 부족을 쓸어버리는 일.
소설은 구성을 남다르게 했다. 훗날 여주인공의 자손이 그녀의 삶을 추적하여 일기를 얻게 되는 형식이다. 그래서 소설은 여주인공의 일기형식이 주를 이루고 초반부에 그녀의 지인에게 보내는 서간도 포함되어있다. 일기라는 형식상 아주 적나라하고 거침없는 휘지가 읽는 독자로 하여금 몰입도를 가중시킨다. 단숨에 읽히는 소설이다. 원주민의 삶과 그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시대에 원주민들이 처했던 미국과의 대치상황도 실제적으로 잘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남편이 족장으로서는 ‘테쿰세'를 연상케해서 더 흥미로웠고, 원주민 못지않는 특색 있는 캐릭터로 미국여성들을 그렸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유머가 판을 쳤다. 원주민이라고 하면 무식하고 더럽고 잔인하고 짐승 같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다. 마치 부시맨의 포학함만을 생각하면 될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이런 면을 의도적으로 미화하지 않았기에 더 사실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원주민의 문화는 그저 미개할 뿐이고, 문명인이라는 우리의 문화는 다 우월성만 존재하느냐’는 물음에는 ‘턱도 없는 소리’라고 일침을 놓고 싶어지게 했다. 인권과 자유는 마치 프랑스 국민들이 쟁취한 문명국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넘을 수 없는 장벽 같은 차별의 울타리를 쳐놓고 흑인노예를 부리는 인간들이 평등을 외치던 백인들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역사의 펜대는 늘 백인들 손에 있었다는 점에서 원주민들의 고난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신앙을 찾아 피를 흘려가며 미국 땅으로 건너온 백인들이, 보다 안락한 정착을 위해 원주민들의 생명과 자유를 무참히 살해했다는 점은 그들 자신이야말로 가장 미개한 족속임을 역사 앞에 반증하는 일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