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사람은 책을 읽는 순간의 즐거움으로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경우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이 읽는 재미에만 그친다면 전 그 책을 읽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읽고 나서도 마음이 웬지 편하질 못합니다. 강한 향기로 코를 즐겁게 하지만 그 향기가 두고 두고 코끝에 마음에 남지 않는다면 그 향기는 맡지 못함만 못한것과 같은 이유일껍니다. 한 권의 책은 저에게 한 분의 스승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하고, 이 사회의 전반에 대해 이해하게 하며, 나아가 이 사회에 제가 할 수 있는 자그마한 길을 일러줍니다. 그러기에 책을 읽는다는건 저에게 그리 쉬운일이 아닙니다. 내면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며, 사회에 대해 분노하게 되고, 때론 자그마한 감동에 쉬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책이 책에서만 그쳐버리는거, 한 줄의 글이 생활속에 체화되지 못하고 단지 현학적 허세로만 그쳐버리는건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을 읽다 이 책을 추천하는 대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 제목이 주는 묘한 매력은 이 책에 대해 더 알게 만들었고 펼쳐든 책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달걀의 겉모양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은 타원형이다. 따라서 이는 애초에 세울 이유가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둥지에서 구르더라도 그 둥지의 반경을 벗어나지 않도록 고안된 생명의 섭리가 여기서 드러난다. 만일 원형이었다면 한번 굴러버리는 경우 자칫 둥지에서 그대로 멀리 이탈되기 십상이며, 각지게 되어 있다면 어미새가 품기 곤란했을 것이다. 그 타원형은 그래서 생명을 지키는 원초적 방어선이다. 따라서 이것을 세워보겠다는 것은 그런 생명의 원칙과 맞서는 길밖에 없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둥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진 생명체를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고정시켜 장악하겠다는 생각은 '콜럼버스의 달걀'을 가능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그래서 그것은 상식을 깬 발상전환의 모델이라기 보다 생명을 깨서라도 자신의 구상을 달성하겠다는 탐욕적, 반생명적 발상으로 확대된다. 이 글은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수준에선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발상전환을 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늘 채찍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비단 저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보편적 진리(?)이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 사회에 통용되는 진리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콜럼버스의 달걀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뒷받침하는 사고의 원형이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정작 필요한 발상의 전환은 달걀을 어떻게 하면 세울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갇혀 그 답을 모색하는 일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달걀의 모양새가 왜 타원형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의 사고를 되돌아보게 만들며, 이 사회 전반에 대한 분석과 대안을 제시합니다. 사회전반의 문화, 정치, 경제등이 서구의 모습을 그대로 닮지 못해 안달하며 그대로 답습할려 하는 이 사회에서 이 책은 그 모든 것과 맞서며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며 이 나라의 참된 나아 갈 길을 모색합니다.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함정이 사회의 언론에 들이대는 날카로운 칼날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파시즘적 야만 통일운동에 대한 비판과 대안 그리고 해방신학까지 이런 굵직 굵직한 주제들을 거침없이 다루며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뜨겁게 끌어안게 만듭니다. 그리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나오는 소식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듭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은 마음을 편하게, 지친 영혼을 쉬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그 사회에 깊숙히 들어갈것을 바랍니다. 남이 흘리는 피땀의 대가로 그냥 앉아서 편하게만 살지 않겠다, 이 땅의 주인은 나이며 이 땅의 역사는 나로부터 만들어진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아니 이 사회에서 흘러가는 모습의 이면에 담긴 본질을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