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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너무 예뻐 고른 책이다. 인간이 완성되기 까지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영향을 받게 되는 요소들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간추려 이야기로 만들고 그것을 꽃으로 비유한 책이다. 삶의 변곡점이 되었던 일화들을 골라서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이 되었다. 1991년 발간되어 꾸준한 사랑을 받았던 루쉰 산문집의 개정판. 구판 역시 루쉰의 산문집 한 권을 전부 번역한 것이 아니라 편역한 것이었다. 십여 년이 흘러 다시 펴낸 이 책에서는 변화된 현실을 감안 새로운 글을 골라 번역하기도 하고, 일부만 실렸던 글을 전문으로 싣기도 했다. 초반부는 어린 루쉰과 가족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본 유학과 후지노 선생님, 글과 문학이 의학보다 사람을 고치는데 중요하다고 느끼며 문학의 길을 가게 된다.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중국 민중을 깨우고, 중국의 현실을 질타한 루쉰의 글들은 시대와 장소가 변한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한 울림을 전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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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가에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을 보았다. 여기서 '보았다'는 그 책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의미이지, 그 책을 다시 읽었다는 건 아니다. 반가웠다. 대학 시절 한 번 읽었고, 직장을 다니면서 또 한 번 읽었다. 이번 가을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루쉰(노신)의 마음도 요즘 내 마음 같았을까. 대학시절 '아큐정전'을 읽었으면, 그 짧은 소설이 가진 거대한 힘 앞에서 나는 절대 이런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 시대는 루쉰의 시대가 아니므로, 그런 소설을 쓸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도는 법. 우리 시대가 다시 이렇게 어두워지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잘못된 것일지라도 과거는 흐릿해지며 아름다워지기 마련이고, 그 과거 화려했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겐 끔찍했고 비합리적이었으며 심지어 절망적으로 죽음을 불렀던 그 때 그 시절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그리고 말없고 무관심하고 심지어 자신의 일로 닥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지금 당장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손사레를 치는 대중은 오직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요즘, 루쉰(노신)은 다시 읽을 만한 작가가 되는 셈이다. *** 2005년 1월 15일 메모한 글. 노신의 여러 글들을 모아 옮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이욱연 편역, 도서출판 창)를 읽었다. 노신의 글들을 벗 삼아 세상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중문학을 전공하신 백원담 교수에게 강의를 들은 이후, 노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다가 최근 홍대 앞 헌책방에서 이 책이 눈에 띄어 구입하여 읽게 되었는데, 대학 때나 지금이나 역시 거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현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가는 이다. 페어플레이도 그만한 상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추근(秋槿: 중화민국의 여성혁명가)여사가 바로 밀고로 죽었다. 혁명 후 잠시 <여걸>이라고 불리더니, 지금은 입에 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혁명이 일어나고, 그녀의 고향에 도독(都督: 군사 책임자)이 부임했는데, 그녀의 동지인 왕금발(王金發)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주모자를 체포하고, 밀고 서류를 수집?조사하여 복수를 하려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 주모자를 석방하였다. 듣자니, 이미 민국이 된 마당에 구원(舊怨)을 새삼스레 다시 들춰내 무엇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차 혁명이 실패한 뒤, 그 왕금발은 원세개의 앞잡이에게 총살을 당하였다. 여기에 힘을 도운 자는 바로 그가 석방해주었던 사람, 추근을 살해한 그 주모자였다. 그 자는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러나 그 곳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는 자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중에서, 143쪽 혹자는 문학은 궁할 때 탄생한다고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오히려 궁할 때는 문학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만 해도 곤궁해지면 사방으로 돈 구하러 다니느라 글이라곤 한 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월급을 받게 된 다음에야 책상에 앉아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바쁠 때 역시 문학은 나오지 않습니다. 짐을 진 사람은 짐을 내리고서야 글을 쓸 수 있고,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놓고서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 <혁명시대의 문학>중에서, 213쪽 여기서 조금만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생계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공산당의 특기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큰 착오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것을 실행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입니다. 둘째, 애인을 위로해 주십시오. 그런 것은 혁명으로의 길과는 정반대라는 게 세상의 여론인 듯하나, 이는 개의할 바가 못 됩니다. - <미래를 지나치게 밝게 본 잘못>중에서, 176쪽 * *
노신을 읽고 느낀 바를 조금 적어보려다가 그만 둔다. 차라리 노신의 산문집을 한 번 더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소설가를 이웃과 그의 주변 사람들은 쉬지 않고 욕을 해대다가 어떻게 운 좋게 그 소설가가 베스트셀러라도 만들면 '그러게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칭찬해대는 게 사람들이니. 그러면 그 소설가가 대단한 걸까? 나는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확실하게 고전주의자이다. 먹여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그는 돈을 벌어야한다. 어떻게든. 예술은 그 다음 문제다.
사람들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위대하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독재자가 한 사람을 죽일까, 아니면 <모나리자>를 태울까 할 때,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모나리자>를 선택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즉 한 사람의 목숨이 '모나리자'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나이가 들고 보니, 만 년 전 세상이나 지금 세상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죽게 될 것을 조금씩만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산다면 이 세상은 분명 좋은 세상이 될 터인데.
희망을 만드는 것은 현실의 고통 때문이지, 미래에 대한 낙관 때문이 아니다. 애초부터 미래란 없어도 무방한 종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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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회상하며 써 내려간 루쉰의 서정적 산문인 '아침에 꽃 저녁에 줍다'는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추천목록에 포함되어 알게되어 읽게 되었다.
내용은 1926년도의 10편의 산문으로 되어있는데 1. 개,고양이,쥐, 2. 키다리와 산해경, 3. 24효도, 4. 오창묘와 제놀이, 5. 무상, 6. 백초원에서 삼미서옥으로, 7. 아버지의 병환, 8. 사소한 기록, 9. 후지노 선생, 10. 판아이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침의 꽃을 저녁에 줍다. 누가 사실 아침 꽃을 저녁에 줍고 싶겠는가?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루쉰은 "물론 아침 이슬을 함초롬히 머금은 꽃을 꺽는다면 색깔도 향기도 훨씬 더 좋을 터이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왜 아름답고 예쁜 아침 꽃을 꺽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을까? 저녁이면 아침은 이미 과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저녁도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흘러간 시간에 불과하다. 시간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의식한 루쉰은 아침과 저녁에 집착하지 않고, 꽃을 줍고자 한것이다.
가볍게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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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쫒겨다니는 긴박한 정치적 상황에서 다분히 개인적이고 에피소드에 가까운 과거 회상이 위주로 된 이 책을 왜 쓰게 되었을까. 책을 다 읽고 루쉰의 약력을 보고서야 나의 궁금증이 풀렸다. 이 책을 집필한 것이 1926년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나이 마흔쯤에 쓴 글이었다. 그리고 난 올해로 정확히 마흔이 되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서늘하게 느끼게 되고 더불어 자꾸 내 지난 삶을 이쯤해서 한번은 정리가 필요하다는 간절한 마음이 든다. 루쉰도 마흔이라는 나이의 무게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한 후 10년 후에 그는 정말로 삶을 정리했다. 무덤덤하게 읽었는데 책을 다 덮고 나니 마음 한 켠이 아프다. 루쉰의 과거 회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운명을 달리한 사람도 있고 소식도 모르고 생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 대한 루쉰의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과 애처로움이 마음 아프게 한다. 아침 꽃의 진정한 의미는 저녁에 알 수 있기 때문에 루쉰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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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루쉰의 어린시절의 일화, 일본유학, 귀국 이후 활동에 대한 단편집이다. 그러니까 문인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의 모습을 쓴 회고 에세이다. 나의 조각 지식으로는 루쉰은 문학을 통해 민족계몽에 힘썼으며 같은 이유로 유명 외국 작품들을 번역해 중국에 소개하는 일에 매진했다고 알고 있었다. 너무 지적이고 세련된 생각이지 않나. 그래서 루쉰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몽활동을 했으며 그 무기를 '문학'으로 선택한 이유도 궁금했다. 그리고 <아침 꽃 저녁에 줍다>가 수년 전 국내 출판사들 사이에서 저작권이 풀리면서 출간 붐이 일었던 것도 나의 기대에 한몫했다. 기대를 가지고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다가 물음표 상태로 한 권을 다 읽었다. "응? 이게 뭐지?" 결과부터 말하자면 대 실망. 어린 시절 회고 에세이라서 실망한 건 아니다. 다만 그의 '생각' 부분이 너무 적어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장면이 나와 기대를 했지만 그냥 지나가는 부분이 많아서, 어이가 없어서 그랬다. 예를들어 이런 부분. 루쉰은 일본 유학시절 의대를 다니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중국인들이 매우 무시당하고, 중국인들 마저 같은 국민이 처형당하는 모습에 박수를 치는 광경에 그들을 계몽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매우 기대 했다. 그가 문학 계몽을 하기로 결심한 부분인 것 같아서다. 하지만 책은 이렇게 적고 있다. -책 발췌 -------------- (중국 사람이 일본 경찰에 의해 총살당하는 장면의 영화를 학생들에게 상영해주는 장면. 126페이지) "만세!"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환성을 울렸다. 이런 환성은 영화를 볼 때마다 터져 올랐다. 그러나 나는 이 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그후 중국에 돌아온 다음에도 나는 범인을 총살하는 것을 무심히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도 어떤 이유인지 술 취하지도 않고서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구나! 하지만 그때 그곳에서 나의 생각은 변했다. ------------------------ 일생 일대의 사고의 전환이 되는 상황을 회고하며 '그때 그곳에서 나의 생각은 변했다'라고만 적고 있다. 모든 장이 이런 식이다. 책을 덮을 때까지 나를 실망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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