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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백가흠작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예스에 이 작가 인터뷰가 나온다. 얼굴이 곱고 예쁜편에 속하는 작가가 마음에 든다. 기생오라비같은 외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작가에게 실례가 됐다면 미안합니다...좋다.
"조대리의 트렁크"는 신문 귀퉁이 사회면의 네모칸을 읽는 기분이었다. 눈을 못떼고 끝까지 읽고 욕을 퍼붓는 식. 아...그가 또 이런 단편집을 내다니! 진즉 나온지 알고 있었으나 며칠전 뒷산에 있는 시립 도서관에 가서 빌렸다. 요즘 일이 없으니 방에 뒹굴며 못 읽은 책을 읽는 것보단 뜨거운 태양열을 받으며 광합성도 하고 땀도 좀 흘리고 마지 못해 너무 더우면 침도 좀 흘리고...뭐 어때?...그러면서 뒷산까지 헥헥거리며 올라가 회원증도 만들고 책도 빌렸다. 우리 가게 아랫 골목 노래방 쥔장 할아버지도 문학 할배였다니...아휴...멋지셔라. 도서관에서 뵈니 검은 뿔테가 더 두꺼워 보였다. 흠..흠.
8편의 단편으로 엮은 소설집. 그 중 몇 편은 조대리의 트렁크처럼 사회면의 작은 박스같은 분위기를 띠고 그 중 두편 정도는 글쓰는 작가가 나로 등장해 작가 자신의 변화무쌍한 감정과 쓰기의 어려움을 단편으로 쓴듯하다.
더위를 식히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을 정도로 간담이 서늘해 진다. 귀신도 안나오고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도 없는데 단편들이 하나같이 냉바람 맞듯 시리다. 이 작가...페미니스트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같이 일하던 실종되어 버린 림혜숙을 짝사랑한 키 작은 농장주 김씨. ..그런, 근원-어느날 집 나간 아버지와 시집가버린 어머니, 버려진 소년 근원과 동생 근본. 소같은 덩치로 의자에 엉덩이 반만 걸치고 걸을 때 소리 안 나게 뒤꿈치 들고 걷는 근원. 있는듯 없는듯 존재감을 없애고 싶지만 소만한 덩치때문에 숨길수 없는 근원의 존재.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키 작은 정수기 영업사원 남자, 망해사라는 절에 버려져 키 큰 여자와 결혼했으나 딸 하나를 두고 이혼한 남자. 딸이 생일 선물로 진짜 파워레인져를 사달라고 하여 파워레인져 옷을 사입은 정말 정말 버스 손잡이도 안 닿는 키 작은 남자.
왜 백가흠 단편속 남자들은 저 모냥이냐고요~~~좀 치사하거나 야비하거나 음흉하지를 못하고 남자구실이나 제대로 할까?의심하게 만든다.
남자구실 제대로 하는 ㅡ쁘이거나쯔이거나-의 오십줄 농촌노총각 시종씨와 동생 기종. 코리안드림으로 베트남에서 시집온 쯔이. 아무리 우애 좋다고 한 여자를 성노예로 부리다니..헐~! 어떤 분도 베트남 여인과 결혼했는데 여자가 너무 답답해 하여 6개월 동안 시내를 매일 밤 돌아 다녔다고 했다. 결국 너무 징징대서 집으로 보냈단다. 다문화가족센터도 있고 같은 국적의 친구를 만나게 할 수 있었을 텐데...중요한 건 사랑도 없이 타국에서 아버지같은 남자와 살게 된 여성의 마음은 어떤 심정일까???
윽...아무튼 뭐가 뭔지 잘 모르겠으나 끔찍하고 역겹고 멍때리는 단편이라 더위는 잊을 수 있다는 깨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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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은 아니었는데, 신작이 나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기대돼서 두근거리고, 두려워서 두근거리고. 앞서의 두 권 책으로 대중성까지는 아니어도 골수 마니아 독자층을 어느 정도 확보한 작가의 세 번째 책은 과연 어떨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의 전작들은 존재하나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성향을 지녔다.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영화로 치면 <쏘우> 류는 아니고 <큐브> 같은. 역시나 순전히 내 기준으로 이번 책은 영화로 치면 <디아더스> 정도였다. 나쁜 녀석을 천신만고 끝에 때려눕히고 가까스로 덮인 천을 들추면 거기 있는 건 나(우리)라는 것. 그러나 지리멸렬하고 졸렬하고 속물적이며 잔인하기까지 한 나와 우리를 가슴 아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 많은 일의 가해자이기도 한 나와 우리는 또한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것. 그래서 뼛속까지 미워할 수는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작가는 세 번째 책을 가지고 고민을 많이 했나 보았다. '그래서'와 '힌트는 도련님', 'p'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작가로서의 고민은 차라리 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 털어놓고 창작의 고통을 독자에게 상담하려는 시도처럼도 보인다. 실제로는 독자가 그렇게 착각하도록 유도한 것일 수 있겠지만 편하게, 작가와 대담하는 느낌으로 이 소설들을 읽어냈다. 그러자 작가가 친구처럼 느껴졌다. '창작의 고통과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 삶의 고비 고비를 이런 고민과 함께 넘어가지 않나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분도 되었다.
책 전체에서 여전히 그는 '떠밀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떠민 것은 떠밀린 당사자가 속한 크고작은 공동체(국가에서 마을, 이웃, 가족)이거나 역사이거나 자본주의이거나 이념이거나 전쟁이거나 '자기 자신'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떠밀리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그걸 알아차리느냐, 직시하고 아파하느냐의 차이를 가지고 들여다 본다. 작가만이 가진 눈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작가의 이런 시선이 좋다. 그는 자신의 눈이 미치는 영역까지는 고개 돌리지 않고 떠밀린 구석 구석을 관찰하고 그걸 글로 전달한다. 혹자는 작가의 '실천'에 대해 이견이 있겠지만 나는 작가적 실천이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얼핏, 1930년대 이후 전후까지의 작가들의 글맛이 느껴지는 건 그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는 떠밀린 자들의 삶이 그렇기 때문일지, 혹은 이 작가의 성향이 그런 건지, 혹은 읽는 독자의 성향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톡톡 튀고, 기막히고, 무릎을 치게까지 만드는 최근 문장들에 비해 백가흠의 문장은 평이하기까지하다. 스타일이 고전스럽다. 책을 읽고 나서도 여러 날 생각했다. 특별히 새롭지 않은 느낌 때문이었다. 내 이야기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고전적이라고 좋게 표현할까, 진부하다고 표현할까. 다 떠나서 내 스타일이다. 그리고 좋았다. 모두의 뇌리에서(마음에서) 옅어져 가는 그런 이야기들을 다시 끌어내 주어서. 그나저나 통(痛)을 읽는 내내 온몸이 가려워서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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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어떻게 퍼져나가고, 작가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힌트는 백가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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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면 얼굴은 변한다. 성격이 변하기도 한다. 외부의 변화는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내부의 변화는 감지하기 어렵다. 변화는 좋을 것일까, 나쁜 것일까. 어떤 변화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좋은 쪽으로 받아들인다. 오랜만에 백가흠의 단편집과 읽으면서 백가흠이 변화와 만났구나 생각했다. 겨우 한 권의 단편과 장편소설을 읽었을 뿐이고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렇게 판단하기로 했다. 시니컬한 분위기는 같았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호쾌한 소설이라는 건 아니다. 뭔가 기묘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걸 암시하는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의 소설은 소문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 읍에서 두 명의 여인이 사라진다. 한 명은 황 약사의 며느리 장 약사로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소문이 난다. 다른 하나는 농장에서 일하는 탈북여성 림혜숙과 그 딸이다. 농장의 김 씨는 림혜숙을 애타게 찾으려 하지만 약국집은 남들에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처럼 단련된 소문은 기괴한 소문으로 확장되고 이를 대하는 김 씨와 황 약사의 태도가 흥미롭다. 예측 가능한 결말을 살짝 뒤틀린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몰입할 수 있는 소재와 전개가 좋다. 백가흠답다. 표제작 「힌트는 도련님」과「그래서」와 「P」는 작가의 자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힌트는 도련님」는 소설 쓰기의 고단함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화자인 ‘나’와 ‘나’가 쓰는 소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마감을 앞두고 소설을 쓰지 못하는 작가의 괴로움과 동시에 작가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반면 「그래서」는 작가가 아닌 은퇴한 비평가의 이야기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게 하루 일과인 노인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이어간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의 교류도 전혀 없다. 그런 그에게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소설가 백이 등장한다. 글씨가 사라지는 절망적인 글쓰기로 고통받는 소설가 백은 백가흠의 분신이 아닐까 싶다. 자전소설을 쓰겠다고 펜션을 운영하는 희경에게 전화는 거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P」는 10년이라는 시간의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기를 원하는 P와 희경의 대화로 소설에 대한 고민을 만난다. 세 편의 소설을 통해 백가흠의 소설에 대한 애정 혹은 고단함을 상상해본다. 약자와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시선도 여전하다. 150센티미터의 작은 키로 회사나 사회에서 있는 듯 없는 존재인 이혼한 정수기 영업사원의 분투기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와 고엽제 피해자로 약에 취해 비참하게 삶을 견디다 결국 죽음을 맞는 원덕 씨의 이야기「통(通)」과 베트남에서 농촌으로 시집온 어린 신부 ‘쯔이’와 소통하지 못하는 남편과 시댁 식구의 갈등을 그린 「쁘이거나 쯔이거나」는 약자와 변두리의 삶을 잘 보여준다. 특히 아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쯔이를 대하는 시댁의 폭력은 잔혹 그 이상이다. 「그런, 근원」은 어린 시절 집을 나가 사라진 아버지와 동생과 자신(근원)을 버리고 재혼한 어머니가 죽어가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다. 든든한 울타리가 없이 성장한 근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던 중 만난 사장에 눈에 들어 매니저로 일한다. 화려한 세상에 입문했으니 근원은 과거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를 그렇게 대우하는 이는 없다. 어머니를 만나면 자신의 삶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뿐이다. 어쩌면 이 소설집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근원이 찾고 싶었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아니었을까. 소설가에게 근원은 소설 쓰기의 즐거움과 동시에 소설로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다. 사느라 자신의 근원을 잊고 사는 독자에게는 부재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삶과 사회의 근원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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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백가흠 작가님과의 인연을 언급하고자 한다. 난생 처음 참가한 문학캠프에서 사회를 보던 분이 바로 백가흠 샘이였다. 사실, 그 전까지는 작품을 접해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작가였지만 부드럽게 사회보시는 모습에 반해버렸달까. 문학캠프 강연회 막간에 퀴즈가 진행되었는데 승부욕이 발동한 내가 손을 번쩍 들고 정답을 맞혔고, 그에 대한 부상으로 작가님의 책을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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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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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단편집을 읽는 일이 그리 유쾌하거나 인상적이게 느낄만큼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는 책을 읽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탓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글을 잘 쓰는 작가란 단편집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힘을 가지는 사람이기에 그동안 읽었던 작품 중에서 만족스런 작품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최근에 읽었던 작품 중에는 하진의 『멋진 추락』정도가 그나마 단편을 읽는 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고 할까. 그런데 이 책. 별 애정 없이 커다란 기대 없이 심드렁하게 책을 펼쳤다가 뭔가 반짝반짝 빛나는 원석을 발견한 느낌이었다...라면 좀 과하려나? 아무튼 내딴에는 단편집에 대한 나름대로의 까다로운 기준선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작가는 그 기준을 훌쩍 뛰어넘는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주위의 많은 지인들은 저자의 전작들이 워낙 폭력적이고 남성적이라서 이 책이 과연 그 저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라는데 솔직히 나는 전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이 부분에서는 어떤 평도 하지 못하겠다. 다만, 현실의 바라보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독자들의 눈에까지 스트레이트로 투영시켰던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특히 책 속에는 마치 저자 자신의 이야기인양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등장하고는 하는데 이 주인공들의 생활을 지켜 보다보면 정말 글 쓰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리얼한 심리와 현실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마감에 쫓겨 허둥대고 편집자의 전화를 가장 무서워하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글을 쥐어짜내려는 그 간절함과 촉박함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편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역시 이야기의 실체를 조심조심 따라가다 보면 괴기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갑자기 마을에서 실종된 인물들을 둘러싸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을 거치면서 엄청난 크기로 과장되기에 이르고 그런 소문들이 단련되는 과정들은 ‘공포’라는 한 단어로 귀결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하나하나의 단편들이 닮고 있는 누군가의 인생, 또 다른 누군가의 고난하기 그지없는 삶들을 작가는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섣부른 동정을 바라지도 꼬일대로 꼬여만 가는 비참함으로 무장하지도 않는다. 이런 오버스럽지 않은 팽팽한 긴장감을 짧지만 강하게 유지하고 있기에 그의 이번 단편이 왜 대단한가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여 졌다. 그래서 난 짧은 호흡 속에서 계속 전진하는 이야기의 즐거움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이 책을 건네주련다. 아~ 이 마약 같은 단편의 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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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의 팬이다. 불편하지만, 치명적인 중독성이 있다. 이번 소설집도 그럴까 했는데... 백가흠의 소설 세계에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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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뜸한 작가들이 있다. 신인 작가의 첫 단편집, 혹은 계간지에서 발견한 낯선 이름의 작가의 글을 재미있게 읽고 문득 ‘이 작가는 왜 다음 책이 안나오는거야?’ 묻게 되는 순간 [힌트는 도련님]은 그에 대한 대답이다. 소설집에 담긴 8편의 이야기는 하나의 완성된 글이며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었다. 각기 처지가 다른 두 여인의 실종이 한 마을에서 일어나고 그 실종을 둘러싼 소문이 어떤 식으로 바뀌어 가는지를 다룬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 거구의 근원이 천만 원을 들고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는 [그런, 근원]은 사체가 묻혀있는 조용한 공간이 나오고 이야기의 초점은 사체도 사람이었던 그것이 죽었던 이유도, 상황도 중요하지 않다. 그 위에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런 연유로 두 이야기는 각기 다른 하나의 완성된 글이면서도 왠지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은 장편의 에필로그처럼 여겨졌다. 뉴스에서 보았던 베트남 신부의 자살이 연상되는 [쁘이거나 쯔이거나], 계간지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통] 그리고 이 8편의 이야기를 아우르고 있는 [P]까지 이 작가가 그 동안에도 계속해서 열심히 쓰고 있었구나, 고심하고 있었고 또 이렇게 멋진 한 권의 책을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작가의 다음책을 기다리고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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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연히 여성작가인 줄 알았다. 이번에 출간된 단편집 제목 『힌트는 도련님』을 보고는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제목에서 상큼한 연애를 떠올렸다. 설명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는 없다. 이 책이 가을의 사랑은 쓸쓸하다는 편견을 깨주길 원했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잘 어울리는 사랑을 만나고 싶었다. 책 소개를 읽으며 나의 터무니없는 상상력에 웃음이 나왔다. 백가흠은 여성작가가 아니었고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상큼한 연애를 다룬 소설도 명랑한 소설도 아니었다. 작가의 데뷔년도를 보니 2001년이다. 기억에 없지만 단편 한두 편 정도는 읽었을 지도 모른다. 이왕 제목에 꽂인 김에 읽어보자 생각했다.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일은 늘 설렌다. 『힌트는 도련님』에는 표제작을 포함하여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에선 한 달 간격으로 실종된 한 여자와 그녀의 딸, 그리고 또 한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녀들은 북한에서 온 림혜숙과 그녀의 딸 그리고 황약사의 며느리이다. 어딘가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진실과 무관하게 각색되어 퍼져 나간다. 사실 이웃들은 진실엔 관심이 없다. 그녀들의 실종은 지리멸렬한 일상의 흥밋거리일 뿐이다.
「그런, 근원」은 근원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가 죽어가는 어머니를 찾아가다 빈집에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와 때밀이를 하던 중 매니지먼트를 하는 사장의 눈에 띄어 트로트 가수 캐쉬의 매니저가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근원은 현재의 자신은 맨몸으로 때밀이를 하던, 비루한 일상을 살던 예전의 근원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장에겐 같은 사람일 뿐이다.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는 허수경의 동명의 시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한 남자가 있다. 갓난아기였을 때 절에 버려졌다. 마흔 넷에 키 150센티미터, 이혼을 했고 딸은 아내가 키운다. 직업은 정수기 영업사원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도 동정이 가는 이력이다. 동물원에 정수기를 팔고 나오다가 자기 얼굴을 닮은 낙타를 보다 잠이 들다 붐비는 버스를 타게 되고 핸드폰을 잃어버리게 된다. 파워레인저가 필요한 건 아이들만이 아니다. 그들이 부실한 삶을 사는 것은 자신을 존재하게 한 근원,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부재한 탓일까? 한때 평론가였지만 지금은 독서를 하며 혼자 살아가는 노인에게 죽은 소설가 백이 찾아온다. 「그래서」를 읽으면서 왜 읽는가, 라는 고민과 왜 쓰는가, 라는 고민을 했다. 빨간 장갑의 그녀의 말처럼 외롭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는 행위, 글을 쓰는 행위는 외로운 작업이다. 외롭기 때문에 외로운 행위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힌트는 도련님」에선 마감이 지났지만 소설을 쓰지 못한 소설가, 자괴감으로 글쓰기를 그만두려는 소설가이자 일식집에서 카운터를 보고 때로 음식을 만드는, 어머니에게 결혼독촉을 받고 선을 보는 서른여섯의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가라는 사실,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 고봉산 백도령이란 별명으로 인해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읽힌다. 소설가의 창작의 고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P」에서 솔숲펜션을 운영하는 희경은 10년 만에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해 자전소설을 쓰고 싶다는 P의 전화를 받는다. 희경은 P와 호재와 우영과 함께했던 버섯 마을에서 보낸 시간을 회상한다. 「P」의 마지막엔 P가 쓴 소설이 자전소설 같지 않다는 희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P의 아내가 등장한다. 「힌트는 도련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전소설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긴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그리고 소문은 단련된다」를 읽으며 타인의 불행을 흥밋거리로 삼는 심리가 무서웠는데 「통」을 읽으면서는 전쟁의 폐해보다 동료의 아픔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는 행태가 씁쓸했다. 「쁘이거나 쯔이거나」를 읽으며 인간의 그릇된 욕망은 어디까지 갈까 생각했다. 「통」의 원덕 씨는 약의 부작용으로 환영을 봤지만 「쁘이거나 쯔이거나」의 그들 역시 ‘약의 부작용’으로 환영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들의 형제애가, 모성애가 섬뜩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근원이 부재한 사람들이다. 부모가 없거나 자신이 살던 곳에서 자의반 타의반 떠나온 사람들이다. 근원을 잊은, 혹은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현실이 버거운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 찾아야 할 것들은 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이의 삶은 소설이 되지만 어떤 이의 소설은 내 삶 속으로 들어 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소설을 쓰는 일이 지난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숭고해야 하는 이유다. 소설가는 삶에 힌트를 주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