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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과학이 모든것을 해결해준다는 믿음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서구의 합리주의 영향이 많이 작용한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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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는 게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반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우리 조상들보다는 무척 많이 알고 있지만. 나 같은 경우만 해도, 내가 관심 있는 분야는 어느 정도 알겠지만(그것도 제한된 부분에서만) 세상에 널린 수많은 지식을 모두 다 얻을 수는 없는 법.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말이다. 지식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십 년 전쯤일까? 하지만 그때도 지식보다는 지혜가,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석학들의 저서 속에 간간히 들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요즘은 이성, 지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긴 어렵고, 지식이 모든 것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말에 동의하는지 아니면 머리만 끄덕거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젠 지식이 특정인의 소유물이기보다 검색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보니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의식이 더 중요하게 되었고,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객관, 합리라는 단어보다 인간답게 풀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안다는 것. 이제는 한계에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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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역습
문명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인류가 그동안 행했던 많은 지식에 바탕을 두고 실천했던 많은 행위들이 지금 우리 인류에게 다시 재앙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최근에 발생해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일본의 지진사건은 지진이 가져온 쓰나미 보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이 만들었던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을 목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불행한 일정도로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해결이라는 결론에 접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우리가 믿었던 많은 과학적 진전은 지금 우리에게 다시 많은 부분에서 경고하고 있다.
[지식의 역습]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고, 저자가 '엘덴 베리'라는 사실에 더 흥미를 끌어 책을 읽게 되었다. 수십 년 동안 고향에서 농부의 삶을 살면서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그는 농사와 함께 여러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편리함과 풍족함이라는 것을 쫓아 무엇이든 개발해오면서 그것이 인류를 보다 더 살기 좋은 환경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더 누리기 위해 늘 무엇인가 쫓기듯이 살아오고 있다. 지금 이순간의 일상도 늘 마찬가지다.
유난히 비가 잦은 올 여름이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형국이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기상이변은 지금 우리가 어디쯤 서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여름이 오기 전에 올 여름은 무척 더운 여름이 될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저자는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을 근거로 삼는 현실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 누누이 지적한다. 그리고 산업발전이라는 이름아래 행해지고 있는 기업들의 탐욕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정당화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기업의 끝없는 욕망이 인류에게 어떤 파괴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경고한다.
'물론 실험실 안의 과학은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하다. ... 기업의 손에 넘어가 상업화되거나 응용될 때 과학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다. 과학은 과연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적절한 경고를 발표하는 책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과학이 실험실을 떠나 기업의 손에 넘어갔을 때 과학은 그 자체만으로 위험을 스스로 정화하거나 중단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며,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인류의 피해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 무지가 점점 큰 위력을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는 점점 파괴되어 가는 것이다. 그는 결국 우리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것들이 결국 최종 손익계산서에서 순 손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벌써부터,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징후들은 너무도 많은 곳에서 발견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꼭 기업이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배경에 한 몫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인식하고 모색할 때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실로 엄청난 파괴를 목격했고, 이렇게 파괴된 것들은 우리가 '진보'라고 명명하는 그 어떤 이익으로 보상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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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원자력발전으로 인해 편리한 삶에 길들여 있다. 일본 원전 사고로 인한 조건적인 원전 반대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고치지 않는다면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지난 30여년 동안 원자력발전이 양질의 전력을 저렴하고 풍부하게 공급함으로써 국가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국민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농업ㆍ공업용지 공급을 목적으로 바다를 막고 개펄도 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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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근본을 보기 전에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길은 과연 올바른 길인가 하는 일차적인 의문을 가져본다. 사실 이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매너리즘과 수동성에 대한 회피의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인식을 조금 벗어나 제 3자적인 시선과 약간의 근본적 지식이 있다면 답은 금방 나올 수 밖에 없다. 이 사회와 세상이 추구하고 몰아가는 모습은 상당히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이어서 지구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 인류는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제 그다지 깊은 고민이나 폭넓은 인식이 필요한 깨달음은 아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내가 사는 곳 어느구석에서부터 또는 지구 어딘가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자멸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시키는 동력인 인간의 지식은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끊임없이 파괴하고 순환시켜 만들어내는 문물과 새롭고 신기해보이는 수많은 지식들에 의해 인류는 자멸의 길을 걷고있다면 그것은 무익한 지식이 되지 않을까. 사상가인 저자는 그렇게 말한다. 인류가 지식을 쌓아갈수록 무지함도 함께 쌓인다고 말이다. 우리가 분석하고 전문화시켜 알아만 가는 지식들, 그리고 무언가를 창출하고 이윤을 만들어내려는 사회집단들의 모습은 결국 지식의 독점을 통한 무지의 일반화만 확산시키고, 반드시 추구해야만 하는 개개인과 사회의 인간성은 이윤앞에서 깡그리 무시되는 상황은 서로가 공존해 나갈 수 있는 보편과 일반화된 교류 및 성찰적 상황에서 보면 매우 이기적이며 위험한 모습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나 역시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에 속해있으면서 서양의학이 지니는 이기성과 비인간성에 고민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다른 의학을 배척하면서 첨예한 지식을 독점하게 되며 하나의 지식계급으로 군림하는 모습이 종종 불편할 때가 있다. 의학이 삶속에서 보편화된 모습으로 함께 공존하지 못한 채, 3자적 입장에서 아픈 이들로 하여금 의존을 강요하고 차가운 검사기계와 화학물질의 영향하에 두는 모습이 그다지 인간적이지 못해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하자면 이반 일리히가 말한 지식독점을 통한 계급화를 연관지을 수 있다. 결국 병원이 병을 만들고 학교가 무식을 만들어내며 기술이 무능을 만들어내는 딜레마,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깊어지는 딜레마를 우리는 분업과 분석을 통한 발전된 사회라 부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지금의 모습, 대체 언제 어디서 얼마나 많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조차 알 수 없어 되돌아가 볼 용기도 내지 못하는 이 형국은 깨달아도 걸어나갈 수 밖에 없는 자멸의 길의 본질이 아닐까. 저자도 결국 근원적 해답을 땅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그는 농사를 짓는다. 땅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얻어내고 최대한 천천히 성찰하며 얻어내는 것들을 통해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모습을 찾으려 노력한다. 독특한 것은 그는 망가진 자연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호와 보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교란을 통해 서로 영향을 받는 자연적 혼란을 자연 자체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근본적이며 성찰적인 답을 땅에서 찾는 이를 또다시 만나게 되었다. 확신에 가까운 답을 얻어낸 기분이랄까.. 성찰과 사고의 사소한 차이만 존재할 뿐, 인간과 사회의 삶의 근본을 땅과 성찰, 또는 인문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에는 내가 바라본 모든 이들에게 공통되는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사회에 있어 땅과 인문학은 자연스레 배척되어버린 것들이 아닌가. 이 책에 대한 한가지 불만은 해석에 따른 단어의미의 혼동이다. ignorance라는 단어를 '무지'로 해석해 사용했는데, 내용을 읽다보면 단순한 무지의 뜻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순전히 모른다는 뜻과는 다른, 지금의 사회가 풀어가는 지식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의 '상대적 모름' 또는 '상대적 무시'의 의미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는 지금 인류가 선천 또는 후천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무식 또는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묘한 차이인데 문맥상에 있어 어떤 어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근본에의 성찰이 혼동되지는 않는다. 또하나의 성찰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 반가운 책읽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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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것들은 언제나 파괴된다. 그리고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것들은 그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축이 필요하다. 흩어져 있는 지식은 언제나 하나로 합쳐지기를 하고 우리가 실감하고 있는 것들과 판이하게 다르게 당위성을 지니면서도 평이함을 유지한다. 이는 지식에 국한되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오해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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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같은 생태시스템을 보면 그 조화로움과 질서정연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숲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요소들 - 땅, 나무, 꽃 등을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수한 동식물들이 존재들이 펼치는 향연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요소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물론 인간의 입장이기 때문에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기쁨과 슬픔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연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면서 초래된 비극들을 생각해본다면, 만약 있을지도 모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은 차라리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초원이나 아마존의 밀림, 유럽과 미국에 있는 거대한 산맥들, 광대한 바다 속 미지의 세계들은 저마다의 존재감을 확실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구라는 거대한 시스템 역시 하나의 멋진 세계로 운영하는데 뛰어난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인간들이 지식과 이성, 힘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하고 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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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델 베리를 처음 안 것은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통해서였다. 그는 생태주의자, 환경주의자이며, 문명비평가, 사회평론가, 실천주의자이기도하며 또한 작가이다. 위의 모든 직함을 다 수용하고도 무엇보다도 그는 늘 농부였으며, 지금도 변함없는 농부이다. 따라서 농업과 환경과 인간에 대한 고민을 담은 그의 글은 탁상공론일 수가 없다. 그의 피부로 만나고 겪은 실제상황이면서 실제 고뇌이고,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한 담론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그가 쏟아놓은 인간의 무지의 대한 토로는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오늘날의 자연환경은 곳곳에서 인간을 향해 공격하고 있다. 이는 본래 자연의 본성이 아니며, 다만 인간의 무지로 인해 자연에게 건 전쟁의 결과일 뿐이라고 웬델 베리는 주장한다. 인간의 오만은 우리가 가진 한계와 효능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인간이 모든 것을알고 있거나,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가설 아래, 자연환경을 포함한 생태계와 세계를 좌지우지 할 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방종하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더 나은 경제적 부와 발전, 진보라는 미명하에 다른 인간과 자연을 상대로 무한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실제적 권력을 휘두르는 자는 소수의 인간일뿐이지만, 그외의 다수는 소수의 폭력을 묵인하거나 방관하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 전체의 폭력으로 확대한다. 자연에는 인간 또한 포함된다. 그렇기에 소수의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에는, 인간 본성의 파괴 역시 뒤따른다. 따뜻한 마음과 겸손, 배려, 돌봄 등 인간의 본성은 무지와 오만, 편협함, 불완전하고 위조된 지식 아래에서 철저히 파괴되고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이용하기 위해서만 타자를 인정하고 있다. 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만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 어떤 종류의 인간이 그외의 다른 인간들을 향한 폭력을 허 하셨을리 없듯이, 또한 인간만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모든 자연환경을 인간 좋을대로 이용하라고 하셨을리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은 무지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갖은 것으로 부터 더 갖고자 하는 마음이 폭력을 부른다. '더'라는 욕망은 지금 현재의 상태를 부정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더'는 '완전'으로 오역되어 끊임없이 타자를 공격하게 하고, 결국 타자를 향한 폭력은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 된다. 이는 자연환경의 파괴로 멈추지않고, 곧 전인류의 공멸로 이어진다.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은 과학을 통해 지구가 아닌 다른 대안을 상상할 수 있겠으나, 나로서는 실현가능성을 얼마만큼이나 내포한 상상인지 알 수 없고, 이 상태로 거칠어진 인류가 비교만족을 얻기 위한 타자없이 인간 스스로 만족할 만한 완벽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을지도 믿을 수 없다. 이에 웬델 베리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탐욕의 경제학을 지금처럼 계속 굴려갈 때, 결국 우리모두가 살상되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다. 개개인이 탐욕의 경제학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때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겠느냐고 묻고 있다. 소수의 인간을 위한, 소수의 경제를 위한, 소수의 권력을 위한 탐욕을 이제라도 멈출수 있어야 우리 모두가 같이 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지금보다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아직은 있다고 믿기에 저자는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전쟁이 발발하면 대통령을 비롯해 전쟁에 찬성하는 행정부의 모든 각료와 국회의원이 연령과 신분을 막론하고 즉각 민간인 신분으로 전투 부대에 합류해야 하며, 어떤 전쟁이든 종결되는 시점까지 전쟁에 개입하는 군수산업체의 모든 임원과 주주의 연소득 상한성은 해당 기업의 공장 노동자의 연소득을 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조항을 헌법에 넣어야 한다'(212쪽)는 웬델 베리의 주장은 거칠고 과격하다. 현실성이 없으며 도저히 실현될 것 같지않지만, 그러나 통쾌하다. 마땅히 옳은 이야기이고 그럴 수만 있다면 인류 스스로 공멸하게 될 결과는 초래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주장이다. 통쾌하지만, 왠지 실현성이 없는 위의 주장과 달리, 베리는 좀더 구체적인 희망으로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장소를 존중하며, 산업을 유치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좀 더 현명하게 큰 규모에 대해 생각하고 대처하며, 자연과 인간의 모태인 땅에 대한 파괴에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때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웬델 베리는 이 책의 배경을 미국 사회와 정치, 농업경제에 촛점을 맞추고 썼지만, 이 책의 배경은 꼭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같다. 그렇기에 더더욱 절절하게 책의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다. 무엇보다, 먼 미래를 내다 보지 않는 편협한 권력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개발과 발전에만 목을 매고 있는 우리의 정치인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더나은 발전된 조국을 위해 날이면 날마다 땅을 갈아엎는 토건업자들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나만 살고 말 미래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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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관리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땅과 바다와 하늘에 걸쳐서 많은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영역들을 우리의 뜻에 따라서 개척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발견하고 확장한 우리들의 세상은 결코 우리들의 마음대로 움직일수만은 없다. 흔히들 말하듯 우리는 우리의 영역을 땅과 바다와 하늘로 넓혀왔지만, 결코 그것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혹은 우리가 그 영역들을 정복하기는 했을지 몰라고, 결코 그 영역들을 우리들의 마음에 들게 안전하게 관리하지는 못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가까운 예로 금년 여름에 우리들의 수도 서울의 강남 한가운데를 덥친 그 어마어마한 비를 생각해보라. 문명과 부의 상징이었던 서울 중에서도 강남이 한순간에 물폭탄을 맞고 그 기능을 상실할 정도가 되었다. 엄청난 자금을 퍼부어 공사중이던 4대강의 치수사업도, 강물이 우리들에게 가한 역습으로 인해 군데군데 파괴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힘이 무척 커진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아직은 인간이 모든 것을 제대로 관리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 좀 더 발전된다면 어떨까. 우리가 좀더 주의하고, 좀 더 많은 노력을 가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간내에 엄청나게 커지는 인류의 지식의 축적을 통해서 우리는 마침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쓰나미로 인한 일본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유출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 혹은 아직까지 우리가 생각해보지는 못했지만, 장차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재앙들에 충분히 대비하고 그것들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수 있을까. 예컨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의 인류의 발전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책이다. 이 책이 말하는 공동체로의 회귀는 사실 한두번 언급된 내용들이 아니다. 수많은 지성들이 인류가 만들어 올린 찬란한 문명의 탑이 스스로 붕괴해 내릴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수많은 석학들이 우리들이 가야 할 곳은 다시 소규모 공동체로의 회귀임을 밝히는 저서들을 내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내용들을 잘 요약하고 정리하면서, 다른 책들이 우리에게 주장했던 것들을 무척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책이다. 공동체.... 맞은 말이긴 한데... 허황된 공상주의자들의 이상적인 주장으로 생각하던 나에게도 무척 마음에 다가오는 책이었으니 말이다.
공동체에서 기본적인 소비를 하고 남은 생산력이 있어야 인류의 지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공동체로 돌아가고 산업화된 농업의 상당부분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축적된 인류의 지적인 자산을 전면적으로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적인 삶의 지혜를 회복하되, 과거의 공동체적인 사회보다 훨씬 발달된 정보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서비스 부분을 상당히 포기한다면 우리는 과도한 소비와 환경의 파괴를 막고, 인간의 문명화된 삶과 이 지구가 부양할 수 있는 인간의 착취의 한계를 맞추는 노력을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지식이 우리를 언제까지나 더욱 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오래된 미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잘못 생성된 관념이 우리의 뒤통수를 공격하는 그 시간이 오기전에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지식을 다시금 되돌아보며, 꼭 필요한 지식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책이 바로 그런 노력을 해 나가는 무척 중요한 책이라는 생각이든다. 우리가 앞으로 쌓아가야 할 지식은 바로 이런 지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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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요즘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지식이 있어서 세상은 점점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점점 욕심이 커가고 배고픈 사람들이 많아져가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10억의 인구가 풍요로운 먹을 거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50억의 인구는 10억의 먹을 거리를 위해 살거나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지식의 역습>이란 제목을 본 순간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졌답니다. 과연 지식이란 것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하게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웬델 베리는 전세계 지식인들이 최고의 신뢰와 존경을 보내는 농부철학자랍니다.
웬델베리는 경제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할 수 없는 것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 시장에 의해서 가격이 매겨져 소중한 것들이 매도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경제 발전은 발전이나 보존이 아니라 착취라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달려온 경제 발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고, 지금 우리의 경제가 이대로 괜찮은지 따져보게 합니다. 우리 나라는 4대강 살리기란 자연훼손에 명목하에 벌어지는 대해 이대로 지켜봐야 하는 것인지 어쩌면 대재앙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 오지는 않을까 두렵게 합니다.
웬델베리는 기업이 점점 오만해진다고 합니다. 기업의 정신은 복합적이고 추상적이고 물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이며 탐욕스럽고 극도록 실용적이다라고 합니다. 기업은 그럴듯하게 위조된 지식으로 무장되고, 인유에 이바지하는 지식은 외면하고 있어서 기업의 정신에는 겸손한 지식이 없다라고 말하다. '기업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덩치를 키우기 위해 무슨일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언제나 대중에게 자연에게 우리의 미래에 떠넘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의 기업, 특히 대기업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 국민이 가질 소득의 45%를 차지하는 대기업...그러면서 그들은 지금도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물려줄 자연까지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있음이다. 기업이 진짜로 이웃처럼, 지역의 생태를 보존할 책임으로 가지고 있는 기업이 있을까?곰곰히 생각해보았어요. 이윤을 위해서라면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음을 우리는 수시로 보고 있다.
그리고 웬델 베리는 과학을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과학이 발달되어 무엇이 인간을 이롭게 했을까? 오존층에 구멍이 나고, 점점 저산소 지대를 만들어가고, 산성비, 체르노빌사건, 유해 폐기물 매립으로 일어난 사건(러브 캐널)등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마다 과연 과학은 통제되고 있는 것일까? 과학의 발전된 지식이 기업의 손에 넘어가 상업화 되어 가고 용용화 되어 되면 어느새 과학은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웬델 베리는 말합니다. 우리의 생태계에 입힌 피해의 해결택은 오로지 한번에 농장하나, 숲하나, 땅 하마지기를 치유하는 방식이라고... 파괴적인 힘은 또다시 파괴를 가져오게 되고, 오만은 더 큰 오만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현가능한 1인 혁명만이 우리에게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지식대신에 무지를 선택하고 겸손의 지혜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산업화, 기계화된 동업은 그저 생산성만을 높일 뿐 생태계 복원에 대해서는 외면한 것이고, 전쟁으로 세상의 가치 있는 것들을 돈, 상품, 주식 등 다양한 형태의 추성적 부로 바꾸고 있습니다. 점점 세상의 소수가 소유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웬델 베리는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역습>을 읽으면서 지식이 인간을 풍요롭게 하고 있는 것인지, 그럴듯하게 위장된 가짜 지식에 현혹되어 죽어라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도록아 보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동안 인간은 양심, 전통과 같은 내면적인 것을 기억하고 겸손한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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