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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검열할 수 밖에는 없는 현실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모던클래식 049]
"사랑도 검열할 수 밖에는 없는 현실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모던클래식 049]" 내용보기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로 아랍 아니 이슬람문학을 귀동냥하고 오르한 파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학에 맛을 들인 독자들에게 이번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특히 미국에 의해 악의 축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획득한 시아파 이슬람의 본산이라 할 이란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선
"사랑도 검열할 수 밖에는 없는 현실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모던클래식 049]" 내용보기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로 아랍 아니 이슬람문학을 귀동냥하고 오르한 파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학에 맛을 들인 독자들에게 이번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특히 미국에 의해 악의 축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획득한 시아파 이슬람의 본산이라 할 이란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선 호기심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책을 손에 잡게 된다. 여기서 호기심이란 그동안 무슬림세계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기대감이란 파묵의 작품이 터키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계열의 좀 릴렉스한 문화사상적 소산이라면 만다니푸르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색다른 느낌의 작품배경이란 점에서 호기심과 기대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또한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가장 노른잔 땅위에 테헤란로가 버티고 있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서울로가 존재하고 있듯이 이란이라는 나라는 우리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극히 단순한 측면에서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햇살 가득한 테헤란의 어느 봄날 차도르를 쓴 여학생이 대학 정문앞에서 "독재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피켓팅 시위로 시작되는 소설은 왠지 그 제목에서 말하는 사랑이야기보다는 정치색이 상당히 감미될 것 같은 느낌을 던져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영희와 기영이라는 보편타당성을 획득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야기가 전개된다(이러한 이름의 상징성이 픽션과 팩트(마치 있을법한 사실) 사이를 교묘하게 줄다리기 하게 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랑이야기라는 작품과 이와 병행하여 사랑이야기에 대한 부연설명과 검열관 페드로비치의 시각으로 바라본 올바른 작품의 타당성과 이를 적극적으로 때론 자포자기식으로 변명하는 작가의 또다른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특한 면이라면 소설속에 등장하는 작가 본인을 포함한 인물들이 마치 자기만의 의식을 가지고서 작가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틀에서 벗어나 저마다 각자의 길을 가는 듯 보여지는 솔솔한 재미를 더해 준다. 마치 작품을 접하는 독자들이 무게 중심이 제대로 서있지 못한다면 어디로 휘둘리지 모르는 부비트랙을 요소요소 배치해놓고 마치 그 덫에 걸리기만 기다리는 고약한 포식자와 같은 시선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런점들이 파묵의 사랑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오묘한 느낌을 전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심리상태의 섬세한 묘사(특히 사라에 대한 다라의 상상력) 압권으로 다가온다. 로멘스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면 의당 한두번의 야릇한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대게 그동안 서구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실상 포로노그래픽 수준의 강도가 아니면 그저 내러티브의 연속상 불가피하게 삽입되는 장면정도로 밖에 인지될 수 없을 만큼 서구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게 실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 신비의 베일을 한거풀씩 벋겨 나가는 묘사들(소설시작전에 벌써 사전적으로 이란과 이슬람이라는 다소 폐쇄적인 정보가 주입된 상태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묘사들이 오히려 더 자극적으로 감정이입에 몰입하게 된다. 가히 패티시즘의 화려한 승화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작가의 심리묘사는 말줄임표를 통해서 다소 앞서가는 독자들을 당혹스럽게까지 하고 있다. 또한 이란 민중들의 숨김없는 목소릴 대변하는 딱따구리의 소리를 통해서 기저에 깔려있는 이란 사회성을 들추어 내고 있다. 작가는 극히 사적인 영역의 로멘스와 공적인 영역의 사회성을 동시에 거론하면서 이 두 요소가 별개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와 검열관의 날카로운 신경전 그리고 시대상을 풍자한 유머러스한 자조와 조롱은 얼마전 무대에 올린 <웃음의 대학>과 비슷한 플롯을 엿 볼 수 잇게 한다. 웃음의 대학이 문학작품에 대한 검열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작품은 이란이 처해 있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자조적인 목소리의 대변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정국가를 대변하는 페트로비치와 이에 항거하지만 결국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다라 그리고 또 다른 이면에 정치와 무관할 수 밖에 없지만 가장 소외받고 있는 여성상을 대변하는 사라를 통해서 이란의 현주소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는 차도르를 입고 있지만 차도르를 벗는 순간 로멘스에서 한단계 격상된 사회소설로 둔갑해 버린다. 이러한 플롯은 소설속에 두가지 나레이션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전체 내러티브에 반영되어 있는 유니크한 구조와 맞물리면서 색다른 방향타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에 온갖 종류의 책들, 영화들, 그리고 사람들을 등장시키면서 작가는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서 차도르속에 숨겨진 욕망들인 자신의 조국 이란의 모든것을 벋겨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간에 이러한 사전적 인센티브(이란작가의 작품, 이슬람문화 배경등)와 더불어 전문 리뷰지의 "페르시아 문학과 쿤데라,칼비노,요사의 감수성을 지닌 현대 이란의 대표작가의 작품으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라는 미사여구는 실상 페르시아 문학를 접해볼 기회도 자주 없거니와 문학적 전문성마저 떨어지는 일반독자들에겐 그저 무의미한 표현일수도 있지만(이는 찌든 빨래를 깨긋하게 빨아주면 더할나위 없는 세탁기에다 최첨단의 부가기능을 붙여놓고 마치 이 부가기능이 세탁기 본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카달로그에 혹해서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독자들은 그래도 이런 저런 부가기능이 장착되어 있는게 세탁기를 돋보이기 한다라는 자족감을 가지게 할 만큼의 안도감 내지는 속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다소 억측스러운 표현 같지만 이 작품을 다 읽더라도 페르시아 문학의 진수를 맛볼순 없지만 그래도 내러티브의 탄탄함과 개인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절묘하게 버무린 작가의 필력만으로도 후회 없는 선택으로 남을 것이다.

 



l******e 2011.08.08.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염탐, 속삭임, 한숨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염탐, 속삭임, 한숨" 내용보기
염탐, 속삭임, 한숨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를 읽고       코카콜라코프   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맞춤법도 문단 정렬도 아니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쓴 사람의 '생각'을 본다. 물론 문체가 통신어체거나 문단 끝이 들쑥날쑥하면 신경쓰이기는 한다. 그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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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탐, 속삭임, 한숨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를 읽고

 

 

 

코카콜라코프

 

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맞춤법도 문단 정렬도 아니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쓴 사람의 '생각'을 본다. 물론 문체가 통신어체거나 문단 끝이 들쑥날쑥하면 신경쓰이기는 한다.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내용과 형식에 치중한다. 그러나 '검열'은 이 내용과 형식의 표현을 자중한다. 풀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들 사이를 울타리로 갈라 놓는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사유재산이 다른 양들과 섞이지 않도록 보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나라 고유의 형식을 지키고 이어 나가는 것,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갈라 놓은 양들은 울타리 너머로 '나가려고' 시도한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넘는다는 나폴레옹의 말마따나 양들은 울타리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나가려고 한다. 울타리 너머의 양들은 어떤가? 뿔은 제멋대로 치솟아 있고 털은 수북하거나 듬성듬성 나 있다. 제각기 모양이 다르다. 검열은 이 울타리 너머 양들을 '불량'으로 취급한다. 그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양과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양, 이 둘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저 양은 양이 아니고, 이 양은 양이 아닌가? 양은 양이 아닌가?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에서 화자로 나오는 작가는 검열을 뚫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출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검열관인 페트로비치는 사사건건 그를 막는다. 페트로비치는 어떻게 해서든 작가의 이야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판에 박힌 쪽으로 끌고 나가려고 한다. 작가들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고전주의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작가 나름대로의 시선과 해학이 묻어난다. 하지만 페트로비치는 특정 ''에 그 내용을 맞추어 넣을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 병에 이야기를 넣은 순간, 병마개로 막아 버린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지니가 병 속에 갇히듯 이야기는 갇혀 버린다. 사라가 대학에서 배우는 천년 전의 시들은 다 '정확한 의도'대로 '풀이'가 되어 있고, 사라는 그걸 외워야만 한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해설을 읽고 글의 의도를 외우는 것. 어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수능 언어영역에 출제된 것을 보고서 신기한 마음에 풀어 보았다가 다 틀리는 영광을 맞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시험 문제를 낸 사람이 틀린 것인가? 그 어느 쪽도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검열'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천년 동안 병마개에 막혀 보존되어 있다면, 와인처럼 숙성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코카콜라라면?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 드럭스토어에서 약으로 팔다가 지금은 수많은 충치를 생산해 내는 해악으로 손꼽히는 코카콜라라면 어떨까 

사라와 다라는 와인이 아니다. 둘은 코카콜라에 가깝다. 그들은 배워서는 안 되는 것, 현대적 산물인 '사랑'을 배운다. '사랑'은 기존 이란 전통에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 그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외국의 문물들로 '사랑'을 배우고, 늙어빠진 검열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기회를 노린다. 사라의 약혼자 '신바드'는 기존 이란 전통에 입각한 인물이다. 다라는 그 반대축에 서 있는 인물이다.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전통'에 얽매이는 순간, 굳어버린다. 다라는 사라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약혼자의 존재를 밝히는 사라도, 그 약혼자도 쉬이 용서할 수가 없다. 다라는 '신바드'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는 사랑 이야기의 흔한 '비극적 요소'. 하지만 신바드는 다라의 존재를 안 순간, 포기한다. 그렇다면 다라는 행복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역시, '전통과 관습'이라는 검열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들의 사랑은 이들의 사랑을 위한 병에 담겨야 한다. 막걸리는 단단한 자기 병에, 소주병은 초록색 유리병에, 맥주는 짙은색 유리병에 담아야 한다. 코카콜라는 알루미늄 캔에 담아야 하고. 각자 어울리는 용기가 따로 있다.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가 말한다.

"선생님, 영화를 더빙하는 과정에서 저들을 오래전에 생이별을 했다가 지금에야 다시 만난 남매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다면 저들이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영화 분야 전문가가 반대하고 나선다.

"선생님! 그렇지만 인디언 전통 방식으로 둘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둘은 손을 맞잡고 인디언 천막으로 갑니다. 인디언 여자들은 이란 여자들이 결혼식에서 그러는 것처럼 웁니다."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가 대답한다.

"그 문제 역시 해결책이 있습니다. 영화를 더빙할 때, 인디언 하나가 이것이 오래전 생이별을 경험하고 이제야 다시 만난 형제자매들을 다시금 형제자매로 맺어주는 인디언 전통 의식이라고 말하게 하는 거지요."

X가 말한다.

"이 장면을 자르시오."

160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는 말한다.

"미국 감독들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어떻게 눈도 안 보이는 병신이...."

순간, 그는 자기가 영화 분야 전문가와 똑같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습에 나선다.

(생략)

반미 분야 전문가가 말한다.

"중령이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고층 건물 하나를 들이받았다면 훌륭한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243

 

그러나 검열은 이 '용기'들을, 그리고 그 내용물들을 일일히 검사하고 '올바름''그름', 두 쪽으로 나눈다. 그렇다면 코카콜라는 어디에 들어갈 수 있는가?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이므로, '늑대와 함께 춤을'이 검열되고 잘려나가 원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던 것처럼 변해야 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하나만 말해두자. 김 빠진 콜라는 맛이 없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그렇다면 검열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자유가 풀려나면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다. 검열이 사라진 후에는 있기 전보다 '결혼'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과연, 결혼한다고 해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 영원할까? 고전시 시린과 호스로는 아름답게 이어지고 끝났지만 사라는 응급실에서 '결혼 이후'의 시린을 본다. 남편 호스로에게 큰 상처를 입고 실려온, 신부 시린을. 사라가 '창녀'로서의 삶을 상상해 보는 건 다라와의 사랑을 소중한 그대로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창녀''구매자'의 관계라면, 그들은 서로의 환상을 서로에게 뒤집어 씌운 채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것, 집세와 내일 먹을 식량, 배급표, 직장에 신경쓰다 보면, 자칫하면 그들의 '사랑'이 오염되지는 않을까? 다라 또한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영원한 신부, 서정주의 시처럼 신랑이 손도 대지 않고 나가버린 방에 남은 신부는 화자가 손을 대는 순간 가루로 화해 사라진다. 환상 또한 그렇게 건드릴 수 없는, 물적인 것이다. 건드리는 순간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검열'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을 더 아름답고 영원하게 해주는 것인가? 화자는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작가들이 수많은 은유와 돌려 말하기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한번 걸린 것을 또 걸리게 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고심하고 고심한다고 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중동권의 시들의 은유는 그들의 '소심'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과감함, 검열에 맞서고자 하는 저항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검열'이라는 벽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벽을 넘으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을 넘는다면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인가?

 

1848년에 독일이 혁명 후 검열을 폐지했을 때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렇게 썼다. ", 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검열이 없는데 내가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검열과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검열 없이 글을 쓴단 말인가? 그동안의 스타일과 문법, 좋은 습관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마이클 키엘만, '우연한 걸작' 198

 

영화 '타인의 삶'에서 나오는 작가는 검열 때문에 그의 작품을 상연하지 못하거나 고쳐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저항 세력을 꾸린다. 하지만 막상 검열이 사라지고 나자 그는 미묘한 회의감에 빠진다. 이제 누가 그 '과감함'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하이네 또한 사라지는 검열에 대해 한탄했다. 어쩌면 페트로비치의 말을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페트로비치는 작가들을 닦달하는 '뮤즈'가 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사라는 다라와 곧 결혼할 사람인 척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으러 가고 다라는 사람들을 피해 전혀 낭만적일 수 없는 장소인 응급실에서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낭만적이지 않은 장소가 낭만적인 곳이 될 때, 그 때가 낭만 소설의 빛나는 순간이다. 이 빛나는 순간들로 인해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점점 더 '숭고'해진다.

이렇게 검열관이 플롯 속으로 끼어드는 일은 허다하다. 일본 연극 '웃음의 대학'에서 검열관은 작가를 탄압하는 역할이었다가 이내 작가와 함께 대본을 쓰고 소통하는 인물이 된다. '뮤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대본을 읽고 연기를 직접 해주기도 한다. 물론 가끔씩 제국주의적인 면모 때문에 찬물을 끼얹을 때도 있지만, 어찌 되었거나 검열관은 그 작가의 작품을 '인정하고' 그와 '소통'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트로비치 또한 창조에 한 몫을 하는가? 만다니푸르는 페트로비치의 손을 빌릴 생각이 없었다. 페트로비치는 다라에게 '암살자'를 보내면서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고, 그로 인해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게다가 그는 더 나아가 '소설 속 인물'을 사랑하게 된다.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 '방해자'가 되는 것이다.

 

페트로비치는 말한다.

"제발 사라를 이 오입쟁이의 집에서 나오게 해 주십시오. 그녀를 집으로 보내요! 나 자신은 신바드를 중국에 보내 연필을 사 오게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내 이야기의 플롯은 어떻게 하고요?"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다라의 손이 그녀를 만지게 두는 것을 금지합니다."

454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훌륭하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창조성을 발휘해서 사라가 이 혐오스러운 다라와 끝내도록 하십시오."

458

 

'방해자'로 인해 또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날 것인가? 아니면 그 때문에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엉망'으로 끝날까? 작가는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검열''방해자'의 소재로, 그리고 미묘한 면에서 '보호자'의 소재로 쓰인다. 작가가 사라와 다라의 사랑을 위해 열심히 애쓰지만 만능 점쟁이의 말마따나 '주문'이라는 비현실적인 매체가 있지 않는 이상, 픽션에는 픽션으로 맞서지 않는 이상 가망이란 없다. 무엇보다도, 외부적 검열보다도 더 큰 방해물이 있으므로.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쉽게 퇴치할 수 없는그들의 내부에.

 

 

 

국경에 서서

 

이 소설이 매력적인 점은 바로 '검열'이라는 소재를 '깊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검열을 다루었다는 건 검열에 통과될 만한 올바른 텍스트나 검열에 통과하지 못하고 끝내는 사형 선고까지 불러일으킬 과감한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검열'은 곧 검열을 하는 과정과 그 검열되는 텍스트를 동시에 다 다뤄야 재현할 수 있다. 잘려나가는 텍스트들과 그에 따른 갈등, 시련, 분쟁.

검열이란 것이 무엇인가? 소설 속에 씌여진 일을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보고 심각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소설을 그저 픽션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 전통에 위배된다는 시선으로 보게 된다면 소설이야말로 '추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떻게든 자신의 소설을 출판하고자 한다. 그래서 페트로비치에게 찾아가고,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맞서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렇게 소설을 '쓰는 과정'을 씀으로서, 작가는 자연스레 '검열'의 존재를 드러낸다. 금지된 것을 금지되지 않게 쓰기 위해서, 금지된 것 또한 살아 있다는 것을 역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사라가 '창녀'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이탈 욕구는 '검열'에 걸려 사라진다. 하지만 이미 쓰여졌다. 줄이 그어진 문장들은 이미 '쓰여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도 '실제 일어난 것처럼 다루는 검열' 때문에, 망령처럼 소설 속 플롯을 떠돈다. 죽은 게 분명한 시인이 자연스럽게 페트로비치에게 말을 붙이고 점쟁이는 소설 안과 밖을 넘나들며 서술한다. 이란의 '검열'을 피해서, 합법과 위법의 위태로운 경계선을 걷는 것이다. 자칫하면 한 쪽으로 넘어질 수 있는. 페트로비치는 그 '검열'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한다. 사라에게 바람직한 사랑을 이루게 해주고 싶어하며, 다라라는 '해악'을 경계하고자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반대로 다라의 사랑을 이뤄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들의 알력 다툼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검열은 사라와 다라의 안에도 있다.

 

"내가 만지게 두어도, 이 다라라는 인물은 너무 서툴고 혼란스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분명 자기가 어떤 집에 터키옥 색으로 페인트칠을해 준 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려 할 겁니다."

455

 

그때, 마치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이, 그녀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얼어붙는다.

"무슨 일입니까, 사라? 무슨 일이예요?"

"내가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첫번째 본 것이 재스민 덤불이었어요......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나를 무섭게 했어요. 이제는 마치 무서운 눈 한 쌍이 덤불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459

 

사라는 다라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약혼자'라는 존재를 어쩔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긴다. 다라는 그런 사라를 갑갑해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다라 또한 '검열'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웃이 자신과 사라의 사랑을 엿볼까봐 겁이 나서 계속 망을 본다. '위험'을 무릅쓴다기 보다는 그들 안의 '검열'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하지만 막상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는 순간, 둘이서만 한 방에 있는 순간마저도 다라는 망설인다. 그의 안에 있는 '검열'의 관념이 그들을 뜯어 말리기 때문이다. 그건 옳지 않다, 옳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강박에 가깝다. 사라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덤불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보았다고 여기는 것, 이 시선은 진짜 다라의 이웃이 훔쳐보는 것일 수도 있고 페트로비치의 '참견'일 수도 있다. 혹은, 그들 안에 있는 검열의 눈일지도 모른다. 그들 자신밖에 느낄 수 없는. 이들은 '곱사등 난쟁이의 시신'을 피해 집안으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들 안에 있는 검열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검열'된 사랑들에 대하여, 검열된 사람들에 대해 그 '관습'이 옳지 않고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처벌'받을 때,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이내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그들 무의식에 있는 '검열'의 뿌리 때문이다. 그 뿌리는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친친 감아매고, 그들의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사라와 다라가 현대 소설을 보고 영화를 봐도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들을 옭아 매었던 '검열'은 그들을 '구세대'로 묶어둔다. 이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사실 페트로비치가 예상한 쪽에 가까워진다. 작가는 애쓴다. 그의 텍스트가, 그의 의도대로 갈 수 있도록. 허나 검열에 사로잡힌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 이야기의 비극이다. 아서왕 이야기에서 기사와 왕비는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밖에 선택할 수가 없다. 작가가 이 '검열'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도 '검열'을 피한 외국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검열'이 되살아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사람들이 법정으로 줄줄 끌려가고 있고, 사람들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입을 다문다. 암호명조차도 쓸 수가 없다. 인터넷은 '한 꺼풀'만 들추면 다 드러난다. 원래는 드러날 수 없는 체계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운영을 누가 잡고 있는가? 권력과 자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많은 '은유'를 쓴다. 특정 동물로, 혹은 대중적인 작품들로. 그래도 우리 내부에 검열을 들이진 말자. 그 검열로 인해 또다른 '비극'을 생산해 내지 않도록.

 

 

 

s********4 2011.08.07.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서평] 단순한 그러나 너무나 복잡한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서평] 단순한 그러나 너무나 복잡한" 내용보기
만다니푸르라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작가가 쓴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라는 이 소설을 읽기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소설의 줄거리만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간단하다. 한 좌파적 성향을 띠고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이후에 퇴학당한 한 남자(다라)와 어린 대학 신입생 여자(사라)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이 둘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 그리고 이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서평] 단순한 그러나 너무나 복잡한" 내용보기

만다니푸르라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작가가 쓴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라는 이 소설을 읽기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소설의 줄거리만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간단하다. 한 좌파적 성향을 띠고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이후에 퇴학당한 한 남자(다라)와 어린 대학 신입생 여자(사라)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이 둘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 그리고 이 이야기를 검열하는 검열관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 하지만 소설은 저자 자신의 독백, 두 연인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랑, 그리고 소설가와 검열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의들을 둘러싸고, 계속적인 의식과 시점의 전환, 시간의 전환, 여러 가지 창작 과정의 문제들이 어떠한 일정한 방식도 찾을 수 없는 구조로, 다시 말해  전혀 일관적일 수 없는 구조로 전개된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바로 몇 가지 이야기 해 볼 수 있는 포인트들을 살펴보자.  


1. 먼저 소설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Censoring an Iranian Love story>라는 제목. 아마 좀 더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이란식 사랑 이야기의 검열>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란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검열. 이 소설을 이끌어 가고 있는 두 주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란식 사랑 이야기의 검열>이라는 이 책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사랑 이야기를 그려내는 소설인가, 아니면 이 이야기에 대한 검열의 과정을 그려내는 소설인가?


2. 작가에 따르면,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종교적 시각에 따라 모든 저작물에 대한 극심한 검열로 인해(당연히 이슬람 율법에 따른), 어떤 이야기도 그대로 출판되기는 불가능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검열로 인해 소설가는 밥을 굶고, 출판사는 문을 닫는다. 하지만 작가는 무조건 검열이라는 것에 대해 무한하게 적대적인 듯 하지는 않다. 물론 소설가의 자조섞인 말에 따르면 이란의 작가들은 검열을 담당하는 '종교 및 문화 지도부'의 사사건건의 개입을 피해나가기 위해 벼라별 문체, 단어, 문장들을 써내게 된다. 말하자면 그런 이유로 더 나은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 어쩌면 이 작품 내에서 검열은 일종의 창작행위의 이면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예술적 진리를 예술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은 검열관들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만든다. 그렇다면 창작이 있는 그대로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검열이란 무엇이며, 검열과 창작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당신들 가운데 누구도 이 영화를 진실로 이해했다고 생각지 않소. 이 영화는 본다는 것의 기술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 보는 것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기술 말이오. 영화예술과 그것의 시각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겉으로는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진부하고, 눈멀고, 종잇장처럼 얇은 삶을 펼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영화는 상이한 삶과 기이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으니 말이오. 그런 다음 영화의 기거법으로, 모든 운전자들과 경찰들과 가족들과 교장 선생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는지 보여 주는 거고. 그러나 이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이한 삶과 기이한 캐릭터마저도 아니라고 할 수 있소. 정작은, 본다는 것이 얼마나 영화적인 기술인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지요. 내가 감독이었다면 영화의 제목을 달리 지었을 것이오. '영화의 향기' 혹은 '예술의 향기'...... 처음부터 다시 틀고 여러분은 모두 나가 주시오. 혼자 보고 싶으니." -p244-45


검열관 x. 나는 그에게서 <장미의 이름>에서 튀어나온 호르헤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자신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서, 이 진리가 위험한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통제하려는 자들 - 종교 혹은 정치를 우위에 두고 - 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은 일정 이상 서로 닮아 있다. 보라. 눈먼 검열관 x의 말은 예술에 대한 매우 깊은 이해를 담고 있는지를. 비록 눈은 멀었으나, 예술적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이 맹인에게 있어, 검열이란 예술을 잘못 '볼' 수도 있는 자들의 불순한 '바라봄'을 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물어야만 할 것이 있다. 과연 그의 '정화'는 예술 자체를 위한 것인가, 혹은 정치 또는 종교 - 이란이 신정체제인 관계로 - 를 위한 것인가? 예술 자체의 고유한 진리를 위한 정화가 아니라, 외부적인 일자 또는 큰 타자(the Other)를 위한 정화가 이루어지며, 예술이 변질될 때. 여기에 어울리는 다른 이름은 없을 것이다. '재앙'이라는 이름 이외에는.*  

3. 먼저 검열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사랑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누구에게나 사랑이란 참 골치아픈 문제다. 하지만 또 어찌보면 매우 상투적인 그런 문구와 이야기들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라와 사라의 이야기가 그렇다(적어도 소설의 전반부에 있어서). 다라는 어느날 사라를 보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이란과 세계의 현대 문학의 걸작들 일일이 점을 찍어가며 자신의 사랑을 전한다. 마치 비밀스러운 암호를 전하듯이. 사라는 이 흥미롭지만 치명적인 전희를 통해 결국 얼굴도 모르는 다라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매우 흥미로운, 그러나 동시에 매우 전형적인 이야기. 그러나 이 이란식 사랑 이야기는 결코 이러한 클리쉐(cliche)와 같이 진부한 방식에 빠진 채로 전개되지 않는다.


4. '감금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문구를 들고 시위 현장에 나갔던 사라. 그녀는 그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녀를 자유주의자로 폄하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미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그리고 종교적인 순수주의자들은 그녀의 피켓팅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이라 말한다. 도대체 이 문구는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문구가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드러나는 일종의 전복을 위한 복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전형적인 (이란식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사랑 이야기의 플랏을 그리고 있는 전반부와는 달리, 소설의 후반부는 일종의 혼란으로, 심지어 작가 조차도 이야기가 자신의 손을 떠나버렸다고 말할 정도의 혼돈으로 빠져들어간다. 사라는 더 이상 수동적인 주체, 혹은 다라가 빠져버린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인 사랑의 주체가 되어간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있었던 히잡을 벗어버린 사건을 떠올려 보라. 이란이나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여성이 히잡을 벗어버리는 것은 단순한 법의 위반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권리를 포기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라의 제지에도 사라는 오래된 육필본 시집을 얻기 위해 히잡을 벗어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어떠한 정치적인 또는 종교적인 규정 또는 금제도 그녀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여성적 주체의 모습을 통해 보자면, '감금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이 일견 모순적인 문장에는 공산주의자에게도, 헤즈볼라에게도, 자유주의자에게도 있을 수 없는 정치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성적인 금제와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적 성역할로부터의 해방의 차원을 말이다.


5. 그로 인해 대상적인 지위에 머물던 사라는 주체적인 지위로 나아간다. 그녀는 다라를 적극적으로 시험하고(다라의 투옥 사건을 상기할 것), 사랑을 위해 안정된 혼처를 포기하기도 하며(매시간 수염을 다듬어야 하는 중국산 연필 장수 신밧드), 사회적 시선과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와 함께 소설가 역시 자신이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내고 있는 이 두 연인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된다.**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의 구도에서 벗어난(사라는 더 이상 대상이 아니며, 다라 역시 더 이상 완전한 주체가 아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무너진(선을 긋고자 노력하는 소설가는 페트로비치의 사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더 이상 이야기 외부에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닫히지 않은 채로 끝을 맺고 있다. 어쩌면 이 '닫히지 않은 채로 끝을 맺는다'는 표현 자체에 모순이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정작 소설을 끝냈으나, 검열은 끝나지 않은...


6. 어찌 보자면 중요한 것은 결국 이란식 사랑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란식 검열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랑 이야기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소설의 줄거리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검열이 부가되어 이야기는 완전히 제멋대로, 비일관적으로 흐르게 되며,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마치 일종의 보충물(supplement)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라가 지닌 정치에서 벗어나는 정치의 급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검열로 인함은 아닌가. 비록 작가가 말한 통제의 상실이 검열로 인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검열 역시 사랑이나 예술의 과정을 오직 하나 뿐인 정치-종교적 관점을 통해 정화해내지는 못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이 갖가지 모순으로 가득 찬 이란식 사랑/검열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사는 아드소에게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들은 결코 혼자 죽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재앙이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호르헤는 결국 장서관을 불태웠고, 물론 장님 검열관 x는 아니지만, 페트로비치는 사라에 대한 집착으로 다라를 죽이려 하며, 결국 소설은 비완결로 끝이 난다.


**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꼽추 난장이의 이미지가 의미심장하다. 이 꼽추 난장이는 아마도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패러디일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왕궁의 광대였던 꼽추 난장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재봉사에게 초대받아 저녁을 먹다가 음식이 기도에 걸려 죽는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유대인 의사의 집앞으로 치워지는데, 유대인 의사는 이 시신을 밟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게 하며, 자신이 죽인 줄 알고 집 굴뚝에 시체를 넣어둔다. 이런 식으로 난장이의 시신은 돌고 돌게 되는데, 이 이야기만 놓고 볼 때 난장이에게서 별다른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죽은 난장이'의 응시, 연인들을 쏘아보고 있는 그 응시에서 이 꼽추 난장이가 페트로비치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검열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도 하다. 말하자면 소설가는 검열로 인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된 것이다. 죽은 꼽추 난장이의 응시, 죽은 이의 응시는 '유령'의 응시다. 국가라는 실존하지 않는 것의 '유령적 신체'. 페트로비치는 바로 이런 유령적 신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 어쩌면 이 '검열'이라는 것을 일종의 보충물(supplement)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전혀 핵심적인 것(사랑 이야기)이 아니라, 그저 곁다리로 더해졌을 뿐인데, 원래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린, 혹은 더해진 것으로 대체되어 버린 그런 것. 말하자면 데리다가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에서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그대로 위험한 보충물 말이다.



j******n 2011.08.16.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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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수많은 드라마, 영화, 사랑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랑에는 언제나 훼방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훼방꾼은 때로는 주인공의 연인을 질투하는 다른 누군가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의 부모님과 가족이 되기도 한다. 혹은 주인공들 각자의 오해 때문에도 그들의 사랑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중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주인공들이 이를 극복하고,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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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수많은 드라마, 영화, 사랑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랑에는 언제나 훼방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훼방꾼은 때로는 주인공의 연인을 질투하는 다른 누군가이기도 하고, 주인공들의 부모님과 가족이 되기도 한다. 혹은 주인공들 각자의 오해 때문에도 그들의 사랑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중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주인공들이 이를 극복하고,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여기 장애물로 인해 사랑을 방해 받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장애물은 사람이 아니다. 아니, 물론 ‘페트로비치’라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사실상 페트로비치라는 인물이 의미하는 ‘검열’과 이러한 ‘검열’이 존재하는 이란의 사회적 제도가 바로 주인공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곧,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는 비단 주인공 다라와 사라의 이야기가 아닌, 이런 검열이 존재하는 사회적 제도 하의 이란에서 살아가는 남, 녀의 이야기이다.  

 

 

 

이란의 모든 사랑 이야기는 연인의 이별, 죽음의 웃음, 사탄의 조롱으로 끝이 났다.

(책 표지 중中)

 

 

 

이란에서는 남녀는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손을 잡을 수 없고, 한 공간에 단 둘이 있을 수 없으며, 심지어 나란히 걸을 수도 없다. 여자는 히잡과 차도르를 써야하고, 남자는 긴 소매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책 속의 사랑 이야기들은 불건전한 것으로 간주되어 대부분 검열되어 잘려나가기 일쑤고, 너무 많이 잘려나가 아예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페트로비치의 검열로 인해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새드엔딩으로 끝을 맺게 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작가들은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 행복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는 한 작가가 있다. 그는 페트로비치의 눈을 피해 은유와 상징 등을 사용하며 다라와 사라의 사랑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써내려간다.

 

 

 

 

 

그리고 이 우주 속에서 처음으로, 그들의 눈이 만난다.

 작가인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몇 가지 난관에 부닥친다. 십중팔구 이 지점에서 페트로비치의 엄정함이 강화될 것이고, 그는 즉시로 ‘그들의 눈이 만난다.’라는 부분에 줄을 그을 것이다. 나의 두 번째 문제는, 설혹 정치 시위 현장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더 이상 애정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영화관 폐허 앞이라 해도, 이란의 젊은 남녀가 인도 위에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서서 서로의 눈을 마주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랬다간 사회 부패 방지 운동 순찰대가 출동하여 단박에 그들을 체포해 갈 것이다.

(p. 76)

 

 

나는 이렇게 쓸 것이다.

 말을 잃은 채, 두 쌍의 눈동자는 긴 침묵을 검게 물들였다.

(p. 78)

 

그러나 수많은 소설들을 난도질해 온 페트로비치의 눈을 쉽게 피해가기는 어렵다. 페트로비치는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며 소설의 방향과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를 바꾸어 놓으려 한다. 심지어 작가가 쓴 주인공들조차 작가의 손을 벗어나려 하고, 작가를 원망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책 속의 주인공들 역시 작가가 의도치 않은 행동들을 하며,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사랑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당신은 나를 이런 식으로 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나를 이렇게 주눅 들고 한심하게 쓰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지렁이와 다름없이 써 놓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그렇게 썼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해도 꿈틀거리며 고통을 참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당신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나를 이렇게 썼지만, 나는 두 동강을 내고 두 개의 지렁이로 변하고 마는 한갓 지렁이처럼 쓰이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그토록 비참하게 써냄으로써 당신은 나를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그 모든 고통과 고난을 써 주었습니다! 나를 채찍질하여 신이 있다고 수긍하게 만드는 고문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살인을 쓰겠습니다!”

(p.364)

 

 

 

이 책의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은 진한 필체로 인쇄되어 있는 문장들을 통해 책 속의 작가가 쓰는 다라와 사라의 사랑 이야기를 볼 수 있음과 동시에, 작가가 직접 화자가 되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 과정을 직접 풀어 나가는 형식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편의 사랑 이야기와, 작가의 속마음과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왜 이런 내용과 문장을 책에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늘어놓는 작가의 변명을 통해 이란의 상황을 파악하고, 검열을 피하기 위해 줄을 그어 놓은 문장과 작가의 은유적, 상징적 표현들을 감상하느라 다라와 사라의 이야기보다 작가의 뒷이야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제도에 대한 비판을 아주 특이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책. 그러면서도 자유롭게 사랑을 하고, 사랑 이야기를 보고 읽을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했던 책이었다.

 

 

 

 

 

 

 

 

 

*

다라가 사라를 보고 저 아가씨야말로 자신이 사랑에 빠져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그날, 시라즈에서는, 내가 나 자신의 외로움을 발견하는 익숙한 발작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이와 같은 감정적인 발작에 시달린다. 특히 내가 행복할 때, 무언가를 성공시켰을 때,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그런 드문 순간, 그 즉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설움이 내 온 존재를 삼켜 버린다.

(p. 143)

 

 

사라는 미소를 짓고 다라의 발을 가리키며 묻는다.

 

“왜 이래요?”

“모르겠습니다. 내 발에게 물어보십시오.”

“목소리는 왜 떨려요?”

“내 심장에게 물어보십시오.”

 

이 문장과 함께 사라의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한다. 다라가 묻는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몰라요. 우리의 운명에게 물어봐요.”

“우리 운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몰라요, 우리의 숙명에게 물어봐요.”

 

다라는 생각한다. 나는 우리의 운명이 용기 없고 비참하고 검열 당한 작가의 손에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p. 163-164)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질문에 직면한다. 페트로비치라는 존재 때문에 우리 이란 작가들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써낼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을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랑 이야기가 검열당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왜 지난 몇십 년 동안 훌륭한 이야기들이 쉬이 나오지 않은 것인가. 오늘날의 세계는 작가들에게 더 이상 사랑 이야기를 위한 영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p. 253)

 

 

말해 보라, 사랑이야기에 연인이 다투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게 가능한가? 혹시 질투도 없고 오해도 없는 사랑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사랑을 알고 있다면 내게 알려 주기 바란다. 다서 그 사랑과 사랑에 빠져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분명히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야기로 인해 한 개의 자살폭탄이 줄어들지도 모를 일이다.

(p.255)


l*********8 2011.08.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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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속에서도 피어오르는 열정과 열망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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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니 얼마전 M본부에서 했던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가 생각났다. 채널을 돌리다가 볼 프로그램이 없어서 케이블로 보게된 양희은의 노래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로 지인들을 불러모았다. 몇몇 노래는 들어봤지만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의 노래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그녀의 노래인생에서 듣게된 '검열' 때문에 음반을 수거하고 방송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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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고 나니 얼마전 M본부에서 했던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가 생각났다. 채널을 돌리다가 볼 프로그램이 없어서 케이블로 보게된 양희은의 노래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로 지인들을 불러모았다. 몇몇 노래는 들어봤지만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의 노래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시간을 거슬러 그녀의 노래인생에서 듣게된 '검열' 때문에 음반을 수거하고 방송에 나오지 못한 일화에 대한 이야기가 생경하게 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는 이유였다. 예를 들면 제목이 너무 선정적이어서 음반이 회수되고, 가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회 분위기와 맞지 않아서 방송에 나오지 못했다.

 

몇 십년전만 해도 우리도 '검열'이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비록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발이거나, 미니스커트가 짧아서 걸리는 시대를 넘어서서 통금시간도 없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세대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불온서적'이라고 붙이는 명명하는 책들이 존재하기에 보이지 않는, (혹은 조금 엿볼 수 있는) 잔재들이 남아있다.

 

여기, 샤리아르 만다니푸르가 쓴 <이란의 검역과 사랑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이란의 '검열' 속에서도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작가의 열망과 열정 그리고 거기에 대두되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열거한다. 표출할 수 없으니 당연하게도(!) 은유적인 표현으로 그들의 마음을 대신한다. 그 속에서 작가의 마음은 열망하고, 열정적인 땀방울이 솟아 오른다. 급기야 마음속에서 폭발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쓰는 표현들, 상징들, 티비나 언론 매체들이 쓰고 있는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쓰고 싶은 단어이던가.

 

햇살 가득한 테헤란의 봄날, 차도르를 쓴 사라가 대학 정문 앞에서 "독재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서있다. 그 속에서 지난 일년 동안 많은 책 속에 암호로만 사랑고백을 하는 남자 다라의 이야기가 이 책의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 가운데 작가가 있다. 이란의 검열 정책에서 그의 사랑이야기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란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랑 표현이 허용된 나라가 아니며, 사랑하는 두 남녀가 한 공간에 있어서도 안되고, 손을 잡을 수도 없으며 심지어 나란히 길을 걷을 수도 없다.

 

마치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는 복잡한 거미줄이 얽힌 지뢰밭 사이에서 작가는 그들이 쳐놓은 그물망 사이에서 그들 특유의 생존방식을 구하고 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처럼, 작가의 열망과 욕망을 신화에 빚대어 표현한다. 어떤 시대든 암흑의 시대였던 곳에서도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듯이 작가는 사회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고발하고, 그의 글쓰기는 점점 더 깊고, 깊은 세계로 빠져든다.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야기는 무거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작가의 시점으로 가다가 다시 그가 쓴 소설의 이야기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시점 사이에서도 전혀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다. 책을 읽더라도 주로 영미권 소설이나, 일본, 유럽권의 책을 자주 읽곤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좀 더 깊게 이란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동안 알았던 이란의 표면적인 모습들은 물론이고 그가 속사포처럼 해준 이야기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오랜만에 읽는 웃음과 해학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l****9 2011.08.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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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나라 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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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 안 지 일 년이 되었고 많은 단어와 문장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 봄날에서야 처음으로, 어린 여자는 젊은 남자의 얼굴로 자신의 눈길을 던지는 것이다…….. 이 두 문장에 담긴 역설에 놀라지 말라. 이란은 역설의 나라이므로……. p. 25   역설의 나라 이란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작가는 검열의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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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 안 지 일 년이 되었고 많은 단어와 문장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 봄날에서야 처음으로, 어린 여자는 젊은 남자의 얼굴로 자신의 눈길을 던지는 것이다…….. 이 두 문장에 담긴 역설에 놀라지 말라. 이란은 역설의 나라이므로……. p. 25

 

역설의 나라 이란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작가는 검열의 눈을 피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설을 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랑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도리어 자기 스스로가 작품을 써나가는 와중에 철저한 검열을 하게 된다. 보통,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검열관인 페트로비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정원 곳곳을 향해 뻗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식물에게 허락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요.  p.459

 

작가는 검열, 억압, 감금의 사회 체제에 대한 분노나 억울함을 독자들에게 호소하기 보다는, 다라와 사라의 사랑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따뜻함, 사랑, 인간애를 보여주며 그의 메시지를 보다 더 강렬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그는 독자와 대화를 하는 형태를 통해, 하나를 쓰고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의 실상, 이란 현대 문학에서의 ‘….’의 중요성, 금지된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눈 먼 검열관이 여인의 향기를 검열 하는 도중, 눈이 보이는자문 위원들보다도 그 영화를 진정으로 감상하고, 그들을 다 내보낸 뒤 혼자보고 싶다고 하는 장면 에서와 같이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역설적이게도’ …인간애를 발견하게 된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내용을 특유의 위트와 유머로 풀어내어 읽는 내내 피식 피식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하며 그가 말하는 소위 이란식 스토리텔링에 빠져들게 하는 작품이다.

 

b******m 2011.08.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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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북클럽] 1차 모임 후기 / 달의 궁전
"[민음 북클럽] 1차 모임 후기 / 달의 궁전" 내용보기
내일이면 개천절이군요. 징검다리 휴일이에요, 여러분. 단군 만세! 만세! 만세! 금요일 출근 생각에 다소 씁쓸하기도 하지만 개천절의 의미 따위 등지고서 하루 실컷 놀고도 정상 급여를 받는단 사실 하나에 만세 삼창이 절로 나오는 화요일 밤입니다. 그리고 지금 어쩐지 ‘페트로비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신다면 이번 모임 도서,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를 참 알차게 읽었다
"[민음 북클럽] 1차 모임 후기 / 달의 궁전" 내용보기

일이면 개천절이군요. 징검다리 휴일이에요, 여러분. 단군 만세! 만세! 만세! 금요일 출근 생각에 다소 씁쓸하기도 하지만 개천절의 의미 따위 등지고서 하루 실컷 놀고도 정상 급여를 받는단 사실 하나에 만세 삼창이 절로 나오는 화요일 밤입니다. 그리고 지금 어쩐지 페트로비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신다면 이번 모임 도서,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를 참 알차게 읽었다는 증거 아닌 증거이니 각자의 가슴을 뿌듯하게 한 번 쓸어내려 주셔요. , 거기 당신, 세상에, 짓궂어라. 그렇다고 내가 해드릴 순 없잖아요? 그렇지만 그대의 가슴이 태평양처럼 넓고 바위처럼 단단하다면 꽤 고려해 보겠어요.


나란 사람, 참 저질인 걸 숨기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취소선 낭비가 좀 많은 것 같기도 한데, 제가 앞서 쓴 몇 문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이어지는 후기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 아니, '없'습니다. 그 귀한 말씀들 모두 고스란히 담지 못해 안타깝네요. 후기가 말씀 드린 날보다 많이 미뤄진 점 반성하고 있으니 좀 봐주세요. 이게 다 술과 남자 때문이에요.


내 못난 손글씨와 기억에 근거하여 적기 시작합니다. 토론 내용이 말씀하신 분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의 달면 그대 옆구리의 제일 말랑한 살을 골라 꼬집어 버릴테니 알아서들 하세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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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명: 달의궁전 (cafe.naver.com/darlgung)

-1차 모임 도서: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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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레삭매냐, 찬란햇,기하, 헤르메스, 랑발, 두근두근, JH, 삽하나 + 깍두기 '시진' + 온라인 참여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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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법은 따로 있다!


시진 : 남녀 사랑 이야기에 작가가 직접 나서서 말을 하고, 검열관까지 간섭하는 등 독특한 소설인 듯.

두근두근 : 나도 소설의 형식이 참 특이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중반쯤 읽다 보니 나머지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더라.

JH  :
속도가 정말 안 나가더라.또 결말이 중요치 않은 소설이기도 하다. 끝까지 다 읽지 않아도 작가의 의도 등 쉽게 파악할수 있더라. 신선했다.

기하 : 누군가가 내게 이 책을 읽는 법에 대해 조언해주길래 그대로 실행에 옮겨 보았다. 세 번 나눠 읽으라는 것. 첫째, 굵은 글씨만. 둘째, 굵은 글씨와 취소선의 문장만. 셋째, 가는 글씨를 중점에 두며 처음부터 모두 합쳐서. 이렇게 읽으니 의미가 다층적으로 들어오더라. 또 초반엔 굵은 글씨, 가는 글씨 등으로 작가 나름의 원칙이 지켜지고 있으나 후반부로 갈수록 이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굵은 글씨만 읽으면 내용이 이어지지가 않으니 참고할 것.

삽하나 : 짝짝짝. 굉장한 팁이다. 감사. 



#
페트로비치의 어마어마한 상상력 = 이란, 혹은 우리의 현재 모습


헤르메스 : 이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이란의 감독과 여배우가 시상식에서 가볍게 뺨에 키스를 한 것만으로도 반이슬람적 행위로 비난을 받지 않나. 책에도 모사데크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오기도 하는데, 당시 정권 전후로 여성들의 히잡이 벗겨졌다 다시 쓰게 되는 변화가 있었다. 탈레반 등장 이후 여성 억압이 두드러진 아프가니스탄도 이들과 비슷하다.

시진 : 사실 우리나라도 문화적으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 사례가 여기 저기서 속출하고 있지 않나. 말 까딱 잘못 했다간 잡혀가기 일쑤.

레삭매냐 : 옛날에
훈족이 온다고 하면 어린아이가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도 이런 꼴. 특히 자유는 있으나 자본이 이를 통제한다는 사실이 무섭게 다가왔다. 때문에 21세기는 자기 검열의 시대라는 생각. 어찌보면 이란보다 자유롭지 못하지 않나.

어렸을 때 매직으로 줄이 여기 저기 그어진 타임지를 구입한 추억도 떠오르기도 한다. 정치적 발언은 물론 사랑과 같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문장조차 검열의 대상이라니 안타깝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검열관 페트로비치의 상상력이 더 뛰어난 것이 아닌가. 평범한 문장도 페트로비치의 지나치게 과장된 상상력 탓에 검열에 걸려들고 만다. X라는 앞이 보이지 않는 영화 검열 감독관(p.156)
늑대와 함께 춤을 이란 영화를 두고 하는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이를 통해 서방에 대한 피해 의식을 드러내지 않았나싶다. 또 이런 모습이 역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미국 폭격에 대한 공포심과 해방감이 대립하고 있는 것. 실제 이들이 미국에서 쏜 위성을 감지하기 위해 미국에서 그 감지장치를 사들여 써먹고 있지 않나. 이 같은 역설이 흥미로웠다.

헤르메스 : 검열하니 이 이야기가 떠오르더라. 두 명의 스님이 순례를 하고 있던 도중 강가에서 매혹적인 여인을 만나게 된다. 스님 A는 여인이 딱한 나머지 과감히 여인을 업고 강을 건넌다. 이를 두고 스님 B는 걷는 내내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자 뒤를 돌아보며 스님 A , 난 이미 그 여인을 강을 건넘과 동시에 떠나 보냈는데 넌 왜 아직도 품고 있느냐  라고. 검열이란 이 같은 것이 아닐까.

삽하나 : (여인과 스님이 엮이지 않는다며 속으로 실망한다.)



# <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의 정체성은 


레삭매냐 : 숨그네를 쓴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인이지만 책은 독일 문학으로 분류된다.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의 경우 미국에서 이란의 언어로 쓴 책. 그렇다면 어떤 나라 문학으로 보아야 할까?

헤르메스 : 미국에서 썼으니 서양 사람들을 두고 썼을지도. 20년정도 기다려야 이란 문학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웃음). 읽는 내내 프랑소와 트뤼포의아메리카의 밤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에서는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는 이 영화와 비슷하게
이란에서 소설이 이렇게 쓰여진다 라고 보여주고 있는 것.

랑발 : 단순하게 난 이란 문학이라는 생각.



#
기타 아랍 문학에 대하여


레삭매냐 : 덕분에 제 3세계 문학권에 관심이 많이 가기 시작했다.

헤르메스 : 이 책의 스타일이 이란 등 아랍의 전형적인 스타일인가?

기하 : 아니다. 이 책은 그들의 일반적인 기승전결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아랍 문학은 대체로 마지막을 틀어버리고, 열어두는 것이 특징. 천일야화처럼 말이다.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는 전통적인 스타일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또 민족의 특성을 드러내는데 지역 이름이 많이 언급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걸 참고하면 좋을 듯.

우리나라엔 한국외대에 번역본이 많다. 남산 도서관에 가면 아랍문학이 책장 두 칸 정도만 차지하고있을 뿐. 또 예전에 이슬람 사원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더라. 덕분에 번역된 책도 하나 받기도 하고.

레삭매냐 : <석류나무 그늘 아래라는 아랍권 작가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스페인 사람들이 아랍책을 불사 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야만적이라고 하며 마치 성벽이 불타는 것처럼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헤르메스 : 이 책에서도 불태워진 작품 등 구하기 어려운 개인의 기록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기하 : 그냥
더워서 인지도?

모두 : 하하호호.



#
기타 등등 목소리들


기하 : 표지가 인상적. 민음사에서 펭귄판본 표지를 그대로 따왔던데. 표지에 실린 글도 실제 영문판내용.

레삭매냐 : 작가의 블랙유머가 눈에 들어오더라. 미국사람들은 꼭 필요한 것만 발명한다고 하면서 '바이아그라'를 언급한다. 불능이라고 비꼬는 것.

레삭매냐 : 지명이 수시로 언급되는데, 낯설어서인지 잘 와 닿지 않았다.

헤르메스 : 왜 있지 않나, 우리나라에도. 테헤란로.

모두 : 푸헤헷. (정말 푸헤헷- 하며 다들 멍청히 웃었다.)
랑발 : 번역이 정말 좋았다는 생각. 우리말로 풀어낸 듯 자연스럽게 읽혔다. 또 굵게 표시된 까만 글씨를 보니 박민규의 소설이 떠올랐다.

시진 : 마틴 에이미스의머니도 떠오르더라. 이 책에서도 작가가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삽하나 :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 술집에 앉아서 주인공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헤르메스 : 이 작품이 자칫 오리엔탈리즘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란 문학의 성격이 모두
이렇다 라고 보여질 수도. 나쁜 면만 지나치게 부각될 수도 있고.

찬란햇 : 사실 종교 자체로만 봤을 때 여성 억압이 이렇게 심할 수가 없다. 단지 지배자들이 통치라는 수단으로 남과 여를 갈라놓은 것. 또 이슬람 교도여성 중 종교적 신념에 차도르를 쓰는 이도 있는데, 이것이 통치라는 도구적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은 차도르를 쓰지 않기도 한다고 들었다. 재스민 혁명을 생각해보면 작가적 허구가 과장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근래 들어 서양 문화도 많이 노출된 상태인데, 이 작가의 말처럼
지금도 정말 이럴까 하는 마음에 갸우뚱한다.

랑발 : 미국에서 주목을 받은 책으로 알고 있다. 이란문학이 세계화 될 수 있다는 좋은 기회라고 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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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풀이에서.







# 코다리탕 집에서-1

삽하나 : 레삭매냐님의 'Viagra' 발언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국내에선 /비아그라/로 통하는데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바이아그라/ 로 발음하시더라.

레삭매냐 : 왜 그런 걸 굳이 기억하고 ㅠ ㅠ


# 코다리탕 집에서-2

삽하나 : 벽화가 특이하네요. 사진 찍을까?

찬란햇 : 저도 찍어볼래요.

이모님 : 그거… 사람 죽었어.

찬란햇, 삽하나 : ?!??!?!?!??!?

(알고 보니 그림 그린 분께서 돌아가셨다는 말 ㅠ ㅠ)







# 해물 칼국수 집에서

모두 : 후루룩. 후루룩. 후루루루루룩.

(정말 맛있었어요! >ㅅ <)

s********8 2013.10.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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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라는 국가의, 작가와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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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제 뉴스에 이란의 한 여성과 관련된 소식이 눈에 띄었다. 여자가 청혼을 거절하자 남자가 그녀의 얼굴에 염산을 부어 끔찍한 화상을 입게 된 사건이 이란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란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법 집행이 거행되고 있어서 가해자인 남자에게 똑같이 염산을 부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하고 화상 입게 하는 형벌이 내려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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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제 뉴스에 이란의 한 여성과 관련된 소식이 눈에 띄었다. 여자가 청혼을 거절하자 남자가 그녀의 얼굴에 염산을 부어 끔찍한 화상을 입게 된 사건이 이란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란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법 집행이 거행되고 있어서 가해자인 남자에게 똑같이 염산을 부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하고 화상 입게 하는 형벌이 내려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피해자 여성 측에서 가해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적절한 보상과 사과를 받는 것으로 끝내겠다는 의사를 보여 그 남자는 자신이 한 짓을 그대로 당하지 않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뉴스 국제란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그 기사는 낯설었다. 여전히 받는 대로 되갚아 주는 식의 법이 실행되는 나라가 있구나, 이란이라는 곳은 우리의 상식 속에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어둡고 비통한 이야기, 죽은 화자와 유령이 죽음과 파멸이라는 예측 가능한 결말과 함께 꿈틀거리는 이야기를 써내는 데 지친 이란의 작가이다.”

 

“혁명의 초창기, 책 한 권이 인쇄되고 나면 발행인은 그 가운데 세부를 분화 및 이슬람교 지도부에 보내 인쇄소에서 출고하여 유통해도 좋다는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를 집어 들었을 때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도 바로 작가가 이란 출신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동안 이란문학을 접해본 일이 한 번도 없었기에 처음 만나보는 이란의 소설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이란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도 뉴스에서 들은 게 전부라 사실 조금은 두렵고 무서운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작가는 어떤 문학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다시피 ‘검열’이라는 단어가 들어감으로서 창작활동을 하기 힘들 거라는 예측이 가능했기에 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많은 이야기들, 그중에서도 사랑 이야기는 문화 및 이슬람교 지도부를 통과해 나오려다 보면 부상을 당하거나 팔달리를 잃거나 아니면 결국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소설에는 크게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다라와 사라, 그 둘의 사랑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 그리고 작가가 쓰고 있는 작품을 검열하는 페트로비치. 이란이라는 나라는 대놓고 ‘빅브라더’가 존재하는 국가다. 국가의 통제 하에 국민들은 자유를 잃고 감시의 눈을 항상 견디며 살아야 한다. 여성은 신체를 가리는 히잡과 부르카를 항상 쓰고 다녀야 하며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껏 표현해 낼 수 없다. 그 속에서 작가는 다라와 사라라는 남녀 주인공을 설정하고 사랑이야기를 쓰고자 갈망한다. 하지만 페트로비치라는 검열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기검열까지 해가며 작가로서 최선을 다해 작품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이 책은 검열될 만한 문장들에 고스란히 줄이 그어져 있는 편집 형식을 띤다. 그리고 다라와 사라의 사랑이야기가 쓰인 부분은 볼드처리가 되어 독자들이 자칫 헷갈릴 수 있는 상황을 방지하려 한다. 사실 형식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소설 속에 작가가 등장하여 그 작가가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 속을 자유자제로 들락날락 한다는 점이다. 정확한 경계도 없이 이리저리 시도 때도 없이 작가는 마음껏 이야기를 쓰다가도 현실로 돌아와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런 형식을 정확히 무어라 말하는지 문학 용어는 모르겠다. 액자 구성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다르기에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나는 이런 형식의 글을 경험한 바가 없어서 흥미로웠다. 때때로 혼란스러운 면도 없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허나 소설 속 작가가 자신이 쓰고 있는 글에 대해, 그리고 이야기 속 주인공인 다라와 사라에 대해 깊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형식을 빌림으로서 이 책의 제목인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에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란이라는 국가의 검열에 대해, 그리고 그 나라의 젊은 남녀가 사랑하기 위한 노력과 방법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감정에 대해 서술하는데 매우 적합한 형식이라 느꼈다.

n*****2 2011.08.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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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플롯이 주는 새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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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차도르에 가려진 희미한 국가. 가끔 북한과 함께 '핵'관련 뉴스로 종종 등장하는 나라. 그렇게 이란은 내게 도무지 이미지가 손에 잡히지 않아, 무얼까 하고 생각조차 못해본 세계다. 그리고 차도르대신 교정지에 얼굴을 가린 여성의 눈빛이 담긴 표지를 본 순간, 이 책이 담고 있는 무게와 밀도가 그동안 보았던 소설과는 분명히 다른 아우라를 갖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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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차도르에 가려진 희미한 국가. 가끔 북한과 함께 '핵'관련 뉴스로 종종 등장하는 나라.

그렇게 이란은 내게 도무지 이미지가 손에 잡히지 않아, 무얼까 하고 생각조차 못해본 세계다.

그리고 차도르대신 교정지에 얼굴을 가린 여성의 눈빛이 담긴 표지를 본 순간, 이 책이 담고 있는 무게와 밀도가

그동안 보았던 소설과는 분명히 다른 아우라를 갖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했던 문명을 스스로 가두어 버린 나라에서 작가는 소설속에 고스란히 자신을

등장시키며 이 이야기를 입체적이고도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사라와 다라, 페트로비치, 작가 그리고 이야기를 좀 더 신비러운 층으로 이끌어주는

시라즈의 시인과 곱사등 난쟁이, 마법 행상인까지.

다른 소설의 등장인물과는 확연히 다른 구성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어떠한 방식으로 알려야할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등장인물 중 여타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페트로비치의 역할에 대해서 흥미로웠던 것도 그 탓인 것 같다.

(검열하던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라를 사랑하는 것도 또한 흥미로웠던 부분)

그리고 작가보다 더 큰 통제권을 쥐고 있는 그와 그를 둘러싼 만성화된 공포와 폭력의 이란사회에 대한

호기심은 어느덧 사회에 대한 불만과 알지못했던 세계에 대한 미안함이 교차되기도 한다.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던 독특한

소설이었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앞으로 사랑 이야기가 선명해지길, 이란의 모든 사라와 다라에게 용기의 박수를 보낸다.

 

"당신네 집 앞마당에 있는 그 꽃밭에... 그 재스민 덤불...."

"네, 손을 본다는 것이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니. 하지 마요.... 정원 곳곳을 향해 뻗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식물에게 허락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요." (p459)

7*******e 2011.08.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