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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이기도 한 메이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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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라는 시대》 1권이 메이지 천황이 등장하고, 일본이 근대화의 길이 접어드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다면, 2권에 접어들어서는 일본이 제국주의화하면서 일본 내의 상황보다는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의 갈등이 주로 다루어진다. 그 다른 나라에서도 특히 중요하면서 많이 다뤄지는 나라는, 당연히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다. 바로 그래서 2권을 읽는 느낌이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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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라는 시대1권이 메이지 천황이 등장하고, 일본이 근대화의 길이 접어드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다면, 2권에 접어들어서는 일본이 제국주의화하면서 일본 내의 상황보다는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의 갈등이 주로 다루어진다. 그 다른 나라에서도 특히 중요하면서 많이 다뤄지는 나라는, 당연히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다. 바로 그래서 2권을 읽는 느낌이 1권을 읽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2권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행위들을 일본이 생각하는 바를, 다시 외국인 연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읽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적지 않은 괴리가 존재한다. 어느 것이 옳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도 든다. 그건 조금은 유쾌하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그것을 전적으로 인정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것도 하나의 시각이다.

 

2권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우리에게 너무나도 아픈 역사이면서, 또 세계적인 격동의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2권의 첫 장은 임오군란으로 시작한다(여기서는 한성사태라고 쓰고 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여기선 민비라 칭한다)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그리고 청일 전쟁이 다뤄지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었다. 청나라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의화단의 난이 있었고, 러일 전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1905년의 을사 늑약(물론 이런 용어는 쓰지 않는다)이 다뤄지는데, 1910년 한일 합병(여기의 표현이 그렇다)에 이어지기 전에 한 장에 걸쳐 이토 히루부미와 안중근에 대해서 쓰고 있다(이토 히로부미의 비중 때문에 그런 것이긴 하지만, 안중근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다루는 것도 이례적이다 싶다). 그리고 1912년 메이지 천황은 세상을 떠난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했던 한일 사이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부분, 혹은 우리가 별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을 언급하자면, 안중근과 한일 병합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안중근에 대해서부터 보면, “안중근이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인물은 의심할 나위 없이 메이지 천황이었다.” (1345)라고 쓰고 있다. , 안중근은 한일 관계의 악의 근원은 오로지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이들에게 있고, 메이지 천황은 평화를 존중하고 한일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한국 합병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국인 중에는 이토가 착수한 개혁에 감명 받은 자가 꽤 있었고, 또 일본과 협력 체제를 취함으로써 한국에 물질적 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는 자도 있었다.” (1355)

정말 그런 자들은 있었다. 이른바 친일파라고 하는 이들인데, 이들이 일부의 한국인을 의미할 수 있는지 굉장히 의문이다. 그런데 도널드 킨은 송병준이나 이용구 같은 이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한일 합병을 옹호했다는 사실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 결과가 결국은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고 쓰고 있지고, 일본의 의도 자체에 선한 부분이 없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대륙에서 일본의 다음 단계 침략을 위한 도약대의 기능 말고는, 한국에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라고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도널드 킨은 합병의 강제성에 대해서도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역사의 쓰라린 부분이기도 하고, 일본인들의 시각에서 외국인 학자가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이 책은 메이지 천황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근대화를 이루고, 또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는지를 아주 흥미롭게, 또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 과정은 순조로운 과정이 아니라, 갈등의 과정이면서도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에 취한 듯 행동했던 일본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메이지 천황이 있었다. 메이지 천황이 그 과정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냥 이름뿐인 책임자였는지, 그 과정을 능동적으로 이끌어간 지도자였는지 확정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없는 일인 듯도 하다. 메이지 천황이 그냥 일본이었었느까 말이다. 그가 무엇을 하였든, 무엇을 하지 않았든 일본은 그렇게 했을 것이고, 그 일본의 상징이 바로 그였다.

 

도널드 킨이 쓰고 있듯이, 메이지 천황에 대한 우상화는 독자적인 특질을 갖춘 한 인간으로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양의 군주국으로부터 열강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국가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로서다. 딱 그런 역할이었지만, 그는 너무나도 그 역할을 잘 해낸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YES마니아 : 골드 이달의 사락 n*****m 2020.11.15.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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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메이지유신을를보면 왜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를보면 왜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내용보기
메이지유신만큼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면서 제대로 이해못하는 사건이 없다.왜 조선은 그런 근대국가로 건국도 못하고 열강에 뒤쳐져 오늘날까지 한국이 일본보다 대우를 못받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론 19세기조선의 국내개혁정치의 실패때문이지만 주원인은 근대일본국민의 서구화를위한 노력과 근대정치의식이 큰몫을 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태어난 19세기말중반 일본의 사정
"일본의 메이지유신을를보면 왜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내용보기
메이지유신만큼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면서 제대로 이해못하는 사건이 없다.왜 조선은 그런 근대국가로 건국도 못하고 열강에 뒤쳐져 오늘날까지 한국이 일본보다 대우를 못받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으론 19세기조선의 국내개혁정치의 실패때문이지만 주원인은 근대일본국민의 서구화를위한 노력과 근대정치의식이 큰몫을 한다.
사카모토 료마가 태어난 19세기말중반 일본의 사정을 보자.당시 일본은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서 낙후된 나라였다.쇼군정치와 다이묘들의 구습에 젖은 일본의 위정자들은 근대화를 할 의지가 거의 없었다.
저자는 조슈와 사스마번의 하급사무라이들이 중심이된 메이지유신이 서양을 모방한이래 일본은 어떻게 19세기 민족주의의 각성아래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화에 매진했고 일본이 메이지유신후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근대국가를 확립하는데 톡톡히 이용했는지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쇼군은 권력을 내놓지않으려 발악했고 사무라이들은 보신전쟁같은 내전으로 패를 갈라 싸웠다.
하지만 일본의 위정자들처럼 난학을 보급시키고 포루투칼등의 통상을 통해 세계정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막부파와 반막부파가 각기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치열하게 싸운 걸보면 외세에 무지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페리제독에의한 강제적 문호개방후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 약소국의 호소는 소용없다는 걸 일본인들은 눈물겹게 깨달았다.세계는 이미 제국주의의로 가고있어서 일본이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위정자들이 근대화없이는 생존이 불가함을 깨달은 것이 천운이라고 볼수있다.개항후 일본도 당연히 물가폭등과 사회불안이 따라왔고 민심이 동요했다.
위정자들은 상대를 멸문시키는대신 정적들과 타협하여 천황파들이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를 죽이지않고 유형보내고 천황을 복권시킨 건 유혈사태를 피한 지혜이기도하다.뒤따른 폐번치현과 사민평등,소학교설립등등 서구문물의 도입으로 일본인들은 서구화에 눈을 떴다.
하지만 1973년 11월의 징병 조서(詔書)가 공포될시 민란이 일어난 걸보면 일본인들도 신체제에대한 저항이 만만치않았다.사무라이들의 신분도 없어지고 촌락의 천민들과 구분이 없어진 평민들은 불만이 대단했다.
돈으로 징병을 면제받는 세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제개혁뒤 그가 총리대신으로 일본이 강대한 군국주의 국가로 출현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걸보면 시류를 잘탔다고 할수있겠다.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 뒤에는 이런 인물이 있었다.당시 태평양전쟁의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청년장교로서 러일전쟁에 종군할만큼 일본은 인재풀이 형성되어있었다.
그당시 일본만해도 메이지유신후 부국강병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쇄국의 조선은 무지몽매했다.그래서 만만한 조선이 일본의 눈에 띄인 것이다.
하급 사무라이인 메이지의 주역인 그들에게도 근대화란 개념은 낯설었을 것이다.당시 일본인들도 이토 히로부미같이 유학파가 아니고는 입헌왕정이든 민주공화정이든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았을 것이다.시대사조에 앞서간 이들은 평생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을 추구하다 비명횡사한 것과 것과 별개로 그들은 천황을 옹립하여 민심과 대의명분을 얻는 지혜를 짜냈다.
그들도 일본의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젊은들이였다.
반면 조선은 모두 우울안 개구리처럼 국제정세에 시야가 좁았다.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이 열강의 제국주의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자신들도 그렇게 변모해야한다고 여긴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까?
당시 영국이나 외국에서 유학을하고 생각이 서구화된 정치인들은 로쿠메이칸같은 문화시설을 짓고 서양의 문물에 익숙해져 일본이 문명국임을 과시하며 서구 선진국의 인정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소국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유럽인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근대 국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일리가 있었다.
가장 부러운 것은 이토히로부미나 후쿠자와 유키치같은 사가현의 정치인들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근대화에 성공할 영민한 정치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다루히토가 초안하고 이토가 공포한 제국헌법을 보자.
1889년, 제국 헌법은 아시아 제국의 어떤 헌법보다 진보해 있었다. 그리고 유럽 제국의 몇몇 헌법보다도 자유주의적이었다. 하지만 이 헌법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의 천황 및 천황에 부여된 주권의 강조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헌법의 수여는 일본에서의 대의(代議) 정체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날 공포된 상유(上諭)는 제국 의회가 1890년에 소집되면서, 의회 개회로 헌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메이지시대에도 특히 하루코황후같이 신분높은 이들이 나서 여성에게도 전문역할을 부여하고 교육을 중시하는 풍조가 유행했다.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일본에도 근대식 학교들이 세워졌고, 특히 이전과 달리 여성교육도 시작되어 여학교들도 세워졌다. 당연히 여성이 산업화에 동참하기시작한 후 사회변화가 생겼다.
왜 조선은 그렇지 못했을까?조선의 권력자들은 오직 양반 지배층만을 위한 관습과 전근대사회에 집착했다.그들에게 입헌정치란 권력을 내놓는 것이었기때문이다.아니 개화에대한 의지자체가 없었다.
이승만과 서재필이 주관한 독립협회가 군주전제정치를 비판한 최초의 민간조직이었으나 박해로 해산했다..
서글프게도 동시대의 조선은 근대화에 가망이 있었을까? 개화운동의 가장 큰 박해자가 고종이었으니 당시 조선은 근대화의 가망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조정이 개화운동을 핍박하는 구한말의 상황에서 이승만같은 이들은 무엇을 할수있었을까?김옥균의 시체를 부관참시할만큼 야만적인 조선정부에게 근대화는 꿈같은 일이었다.가령 이노우에가 조선의 전권대사로 파견되었을시 그는 일본 정부의 개화 정책과 같은 방식으로 조선 정부를 개혁할 생각이었으나 조선 정부가 비협조적이며 재정적 개혁 등에 반발했다고한다. 이노우에의 일본인 재무고문관은 예산을 정하고 지출을 제한하려했다. 그러나 이것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조선 국왕은 무시했다.무능한 군주인 고종은 책임감이나 국가와 백성을 위한다는 의무감따위는 없었고 일신의 안위만 꾀해서 한일합방이후 자신대신 오명을 뒤집어쓴 을사오적을 위로했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다.
일본이 제국주의의 옹호자로 동양평화를 위해 영국과 결탁해 조선을 보호국화하겠다는 명분으로 한일합방을 하게될때까지 고종은 유유부단했었다.이것은 일본뿐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유사한 제국주의의 명분이었다.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저격했을시 그가 동양평화를 위협한다고 고발했다지만 실상 이토가 조선을 합병하는 걸 반대했다는 건 아이러니다.
러일전쟁후 일본이 조선을 한일합방한 것에는 이런 열강들의 묵인이 있었다.륀순학살로 여론이 악화되자 노기 마레스케가 순사(殉死)할만큼 러일전쟁의 피해는 막강했지만 이 전쟁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우위를 결정지었다.거기에 러시아에게서 배상금을 톡톡히 받아내어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을 자극한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본처럼 부국강병과 사민평등은 고사하고 조선은 여전히 전근대적 존왕양이적 사고에 매여 무지했다. 자유민권사상은 근대문명에서 가장 이른 민중계몽운동이자 입헌정치의 척도이나 조선의 지식인들조차 그걸 받아들일 사고가 준비되어 있지않았다.
한편으론 저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사의 다른 면도 기술한다.그의 동양평화와 일본제국주의에대한 인식이 지금까지 독자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것도 눈에 띈다.
ㅡ안중근은 반일주의자가 아니었다. 안중근이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인물은 의심할 나위 없이 메이지 천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안중근의 가장 통렬한 고발 가운데 하나는, 이토가 의도적으로 천황을 기만했다는 것이다. 안중근에 의하면 천황이 바라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예속 따위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이었다. 안중근이 천황의 생각을 알게 된 것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선언한 선전 포고서에서였다. 안중근은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수많은 승리 기사를 읽고 기뻐했다. 백화의 앞잡이인 러시아의 패배를 한국과 청나라 동포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기뻐했다고 안중근은 말하고 있다. 안중근이 오직 하나 유감스럽게 여겼던 것은 러시아가 전면 항복하기 전에 일본이 전쟁을 중단한 일이었다.ㅡ
일본의 식민통치가 악랄했지만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식민지가 된 원인은 조선을 근대화못한 고종과 유교에 젖은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던 조선조정이 책임져야하는 것이었다. 구한말 피폐해진 백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군주독재와 왕권의 유지에만 급급했던 조선왕조는 개화보다 외세에 기대어 왕조의 안위만 생각할만큼 한심했다. 황후에게 휘둘리며 매관매직을 일삼은 고종은 개화는 생각지도않았고 황국협회따위나 만들며 군주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고 조정대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할때 문명개화에 앞장선 것은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같은 선각자들이였다.양반관료들은 파벌다툼에만 열을 올리고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러일전쟁이나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사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유리걸식하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한일합방이후 일제에의한 의병들의 토벌로 조선이 초토화될때 고종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고종은 러시아에 줄을 잘못 선지도 모르고 궁중에서는 굿을 하며 이승만같은 개화사상가들을 투옥하여 죽이려한 것외에는 없다.
반면 일본의 위정자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해 고분군투한걸보면 부럽다못해 존경스럽다.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우리에게는 원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애국자이자 선각자들이였다.미국인인 저자가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토록 상세히 이해하고있다는 것이 놀랍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동전의 양면같은 이중성도 있다.메이지유신을 잘 이해한다면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미묘한 국제관계를 타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a***2 2024.01.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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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라는 시대 2-도널드 킨] 같은 시대를 같은 방법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었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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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 과연 메이지 천황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국에서의 고종은 망국의 군주로서,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유부단하고 무능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를 재평가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감안해도,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본의 작업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책에 나온 천황에 대한 평가와 비교해 볼 때, 극
"[메이지라는 시대 2-도널드 킨] 같은 시대를 같은 방법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었던 인물" 내용보기

고종과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 과연 메이지 천황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국에서의 고종은 망국의 군주로서,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우유부단하고 무능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를 재평가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감안해도,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물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본의 작업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책에 나온 천황에 대한 평가와 비교해 볼 때, 극명하게 대립을 이룬다. “일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양의 군주국으로부터 열강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국가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p.1066)”에 합당한 평가들이 주로 나온다.

성공한 군주와 실패한 군주. 그리고 성공한 군주가 실패한 군주를 신하로 부리게 된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거나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두 사람 모두 전근대에 태어나 근대의 격동기를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헤쳐 나가고자 했다. 한 쪽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방법으로, 한 쪽은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책의 많은 부분은 메이지 천황의 순행과 군사 훈련 참관에 할애되어 있다. 특히 순행도중 학교를 반드시 들러 교육을 강조했다. 이는 고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산흥업을 장려하고 신식군대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주 무대는 현장이 아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특성에 기인한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던 한국과 유명무실했던 천황과 실권을 쥐고 있던 막부, 분권적 성격이 강했던 일본과는 기반자체가 다르다. 그렇기에 각자 개인의 목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선의 국왕은 모든 것을 가져야만 했다. 사직을 지키는 일이 백성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인의 권력이 강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애초에 가진 게 없던 천황은 달랐다. 오히려 갑자기 본인에게 주어진 권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는 적극적인 활용보다는 중재를 택했다. 이렇게 가진 게 달랐던 고종에게 모든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근대화를 성공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다소 억울할만하다.

아니면 역사적으로 고종에게 허락된 시간과 메이지 천황에게 허락된 시간이 달랐는지도 모른다. 메이지 천황의 최대 공적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군림했다는 점. p,1087” 뿐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평한다. “메이지 천황에게 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인물은 가장 허물없이 마음을 터놓는 경우에도, 자신과 조상에 대한 생각이 염두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는데다가 여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나타낼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p.1069” 한국인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메이지 천황보다는 고종의 면모가 인간적으로 동정이 간다. 알 수 없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미운 사람이 낫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은 인간적인 면모로 평가할 때에 한정되지만.

결국 긴 책을 읽고서도 메이지 천황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겠다. “전기 작가의 소임은 대상을 눈앞에 소생시키는 데 있다. p.1069”고 말한 저자가 실패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저자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전부 다했다. 다만, 대상이 문제거나 독자인 내가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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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황은 사실 자유를 빼앗긴 양심의 수인이었다. 10년 전, 벨츠 박사가 일기에 쓴 적이 있었다. 천황은 공식적으로 어머니를 1년이면 몇 차례 의례적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하인 생모는 자유롭게 방문할 수 없었다. ‘기묘한 에티켓의 정화다!’하고 벨츠는 평했다. 천황은 에티켓, 즉 예식을 깰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기 전에 한 번 만나고 싶어한 천황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p.873

언제나 그런 것처럼 천황의 이름으로 나오는 조칙의 경우 어느 부분이(만약 있다면 말이지만) 천황 자신의 표현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아마 이 조서의 내용은 한국의 현재의 운명에 관한 천황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현재의 우리 눈으로 볼 때, 한국을 일본에(p.940) 합병한다는 결단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은 중대한 과오를 범했음을 알 수 있다. 한일 합병이 상호의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 한국인은 지금까지의 외교 경험을 비추어 이런 일을 예견했어야 했다. 외국(일본)을 위한 이익은 언제나 한국인에게 번영을 가져다주려는 그 어떤 욕구보다 우선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이런 사실도 알고 있어야 했다. 설사 그들의 명목상의 국왕이 쾌적한 은거 생활을 누리는 일이 허용된다 하더라도, 한국 대중은 착취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근대 문명의 모든 방면에서 한국인보다 진보해 있던 일본인은 틀림없이, 그리고 주저 없이 그 우월성을 이용할 터이니까. / 그리고 자국의 정부가 공언하고 있는 목적을 순진하게 믿고 있던 일본인들은 이런 점을 깨달았어야 했다. 총독을 앉히고 한국을 지배하는 군인들은 대륙에서 일본의 다음 단계 침략을 위한 도약대의 기능 말고는, 한국에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p.942)을 말이다. 이런 일은 쉽사리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합병의 최악의 국면을 우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일본인은 지배 민족으로 오만하게 굴었고, 한국인은 일본인의 지배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그것은 한국인을 때때로 굴욕적으로 만들었다. / 한국 정부가 설혹 일본의 지배가 한국 국민에게 미칠 영향을 예견했다 하더라도, 이 시점에서는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합병 조약에서는 왕과 귀족에게 우대 조처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마 상류 계급이 만족하는 한 무지한 대중이 불만을 가진다 한들 큰 문제가 아니라는 일본인의 신념을 반영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 비슷한 태도는 인도에서의 영국인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p.943

위대한 왕이란, 예를 들면 스페인의 펠리페 2세처럼 국사를 스스로 조종하기를 바라는 자(p.1039)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우수한 대신들을 신뢰하고, 왕권의 위엄으로 이를 지원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1912.08.22. <코레스퐁당

메이지 시대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1860년대의 개국에 이어지는 반세기 동안 일본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혁에 매료된 연구자들에 의해, 아마 예상할 수 있는 모든(p.1066) 각도에서 연구되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천황이 그 연구 대상이 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 메이지는 국민들 대다수에 의해 우상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적인 특질을 갖춘 한 인간이라서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양의 군주국으로부터 열강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국가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로서 였다. ... 그러나 천황의 치세를 살아본 일본인의 수가 착실히 감소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메이지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명칭으로만 남겨지고 있다. 그의 갖가지 업적 또한 그를 섬기던 군인이나 관리의 업적과 분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p.1066

전기 작가의 소임은 대상을 눈앞에 소생시키는 데 있다. 헨리 제임스의 이름 높은 전기 작가 레온 에델이 일찍이 말한 것처럼, 전기 작가는 그 대상에 흠뻑 빠져야한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에게 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인물은 가장 허물없이 마음을 터놓는 경우에도, 자신과 조상에 대한 생각이 염두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는 데다가 여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나타낼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p.1069

아마도 그의 최대 공적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군림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점이 거의 같은 시대 인물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비슷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비탄에 잠긴 나머지 군주로서의 임무를 소흘히 했다며 오래도록 신문의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의 오랜 치세 덕분에 위대한 군주라는 명성을 얻었다. p.1087

 

YES마니아 : 플래티넘 이달의 사락 s*******1 2020.04.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