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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어느 날 15살의 소년은 몸이 아팠는데 한 여인이 다가와 집으로 데려와 하루밤 돌봐준다. 둘은 나이차에 상관없이 여름 소나기처럼 짧지만 열정적으로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또 그렇게 한순간 헤어진다. 시간은 흘러 소년은 이제 법대생이 되고, 어느 법정의 참관객으로 갔다 거기서 나치 전범 재판을 받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이야기는 그 뒤로도 20년의 시간을 더 흘려보내며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관통하며 영향을 미친다. 얼핏 영화는 십대의 미소년과 연상의 여인과 운명적 사랑을 그리거나, 아니면 남자의 잠재된 성적 로망을 자극하는 듯하지만,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한나와 이를 말없이 지켜보게 되는 마이클의 두번째 조우부터 영화가 전하는 메세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겠만 두가지 관점에서.
한나, 악의 평범성 혹은 천박한 무사유의 숙명 한나 슈미트란 이름이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떠올리듯 영화 속에서 재판을 받는 한나의 법정 진술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닮았다.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낼 여죄수를 본인이 직접 개입해 선발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한나는 '계속해서 밀려 들어오는 새로운 죄수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보내야했다"며 별 다른 죄책감없이 답한다. 또한 공습으로 교회가 불타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안에 갇혀있는 줄 알면서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결과적으로 그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잘못에 대해서도 '통제 불능의 혼란을 막기 위해 간수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댄다.
이런 한나는 흡사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나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실존 인물과 닮았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아르헨티라로 도피해있다 결국 이스라엘의 모사드에 붙잡혀 1960년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비슷한 진술을 한다.
아이히만은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되풀이했다. 그리고 칸트까지 인용하며 명령은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비록 그 내용이 수백만의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는 것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일과 자신의 책임을 연결 짓지 못한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히만에게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광기로든 뭐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해선 네이버 캐스트에도 소개되어 있으니 한번 읽어봐도 좋겠다. )
아이히만의 악행은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에 기인한 것이지,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의 결론이다. 상투적이고 관행적인 그리고 표준화된 시스템과 제도는 우리가 모든 일에 일일이 주의를 요하지 않아도 되는 분명 사회적 순기능을 갖고 있지만 아이히만처럼 특별히 사유능력이 없는 이들에겐, 아니 어느 누구라도 그런 일상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주어진대로, 시키는대로 가치판단 없이 행위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은 아이히만의 기질을 갖게 된다. 지금 현실에서 맞딱트리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와 비상식과 불의한 상황과 사건에 대해 우리는 그것에 적절히 감응하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가련한 한나는 바로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 사유의 불가능으로 비롯된 천박하지만 그렇다고 어리석거나 악마적이진 않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진정한 무사유''의 전형인 셈이다. 그런 한나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를 가르친다고 변화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 과오이자 책임이다.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하는 설정은 결국 무사유의 상태를 의미한다.
책 읽어주는 남자, 마이클은 사랑일까? 장면 하나.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된 한나를 위해 마이클은 십년동안이나 책을 읽은 걸 녹음한 테잎을 보내준다. 예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위해 책을 읽어줬던 것처럼. 장면 둘. 마침내 한나가 이십년만에 출감한다는 교도소측의 전화를 받고선 예상과 달리 마일클은 담담한 채 그의 표정에선 불편함까지 엿보인다. 이 두가지 상반된 장면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나에 대한 그의 감정과 태도는 분명 단층적인 것은 아니다. 긴 세월에도 변함없는 첫사랑의 감정? 혹은 연민이나 동정?.. 다분히 복합적인 요소의 결정체일테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마이클 자신의 면책을 위한 행위임에 불과할 수 있다. 진실을 밝혀 법정에서 불리한 상황에 몰린 한나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부끄러운 과거를 공공연히 드러내야했기 때문에 결국 나서지 못한 양심적 가책. 영화가 끝나갈 무렵 마이클은 앞서 불타는 교회 안에서 어머니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던 여인을 찾아간다. 그리고 한나가 전해달라고 부탁한 돈뭉치를 건네며 이제 그녀를 용서해줄 수 없겠느냐고 묻는다. 그때 그 여인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거든 극장에 가던지, 책을 읽으세요. 난 그녀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어요" 라고 쏘아붙이는데 이 대목이 마이클의 태도를 근원적으로 설명해준다고 본다. 한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의 감정에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정죄의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정죄를 해줘야할 상대방(한나)의 바람과 상관없이 자기가 임의로 설정한 범위. 딱 거기까지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애적인. (마이클은 그러한 행위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어간다)
수십년만에 만난 마이클을 보고 한나는 여전히 그를 아이(kid)라고 부른 데에는 그의 여전한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인격적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는 한나의 무사유의 결함도 마찬가지지만 단지 그만의 개인의 차원이 아닌, 인간 자체의 일반적 속성이자 결함일 수 있다.(가령 부모가 죽은 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제서야 생전에 제대로 효도못한 것을 애통해하고 후회하곤 한다. 하지만 설령 부모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땐 과연 달라질까 .자책의 의미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함일뿐이다)
결국 한나와 마이클은 둘 다 불완전하고 미성숙의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 자체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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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와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막걸리와 전이 떠오르는것과 마찬가지로 지나간 옛 사랑의 기억이 떨어지는 빗방울에 비춰 생각난다. ‘그(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들은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간다 라고 느낀다. 그러한 이유는 ‘첫’ 즉, 처음이라는 경험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렸을 적에는 무엇을 하든 다 처음하는것이고 기억되는 순간이 많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경험이 많아지고 그와 더불어서 안 해본것보다는 해본것이 많아지는 순간, 체감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 이렇게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 많은 경험을 하지만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첫 이성친구와 교제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한다. 첫 만남, 첫 사랑, 첫 키스 등등 그러한 처음 순간에 한 모든 추억들은 그 후에 이성교제하는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더 리더는 한 남자의 첫 사랑이 얼마나 그의 삶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이클(데이빗 크로스)는 자신보다 연상인 한나(케이트 윈슬렛)을 사랑하게 된다. 그치만 그 사랑은 결실을 맺지못하고, 한나의 일방적인 결별로 인해 그들은 헤어지게 된다. 그 후, 8년이 지나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법정에서 피고석에 앉아있는 한나를 보게된다. 그리고 이 장면부터 영화는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를 다루게 된다.
한나는 마이클과 이별 후에, 나치수용소에서 일하게 된 것에 대한 재판을 벌이게 되는데 이 재판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많은 문제를 보여준다.
한나는 재판을 받게 되는 중, 자신이 알고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걸 깨닫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는 그녀는 글도 못읽는 문맹이었을 뿐더라, 무지했기 때문이다. 즉, 그녀에게 있어서 상부에서 명령을 지킨것인데 그것이 왜 잘못인가를 깨달을 만한 지혜가 부족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나치수용소에서 같이 일한 동료들은 그녀가 그들의 리더였다고 몰아세우고 그녀는 결국 그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그랬다고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된다..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 우리는 그녀는 상부에 명령을 따르는 한 개인일 뿐인데, 그녀가 처벌받는다고해서 죄가 없어지는것이냐, 그 상부를 처벌해야하는것 아니냐는 문제와 그녀가 뉘명을 쓰게 되는장면에선 죄가 없는 사람이 오히려 죄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문제점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영화는 이것을 물어본다.(물론 그녀가 죄가 아예없는건 아니고, 무지하긴 했지만 법 앞서는 무지가 용서되지 않는 다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역사적 문제점을 표현하고, 관람객들에게 되묻는다는것 자체가 이 영화가 로맨스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이다.
영화를 보는 중에 주인공 마이클에게 답답한 심정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이클은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재판관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도 쉽게 내린 결론은 아니다. 그의 교수와 상담을 하는듯 그도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게 되지만, 결국에는 그녀를 아직도(8년이 지난 이 순간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고자 그 비밀을 덮어두려고 했던 것이다. 아마, 그가 그녀의 자존심을 생각하지 않은채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그녀의 형벌을 줄일려고 했다면, 그는 그를 떠나버린 그녀를 사랑한다기 보다는 경멸하고 증오했다고 해석하는게 맞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순간 그의 이런 판단은 후에 이어지는 장면과 이어질 수 있고 많은 남성들이 공감하면서 가슴 먹먹하 게 볼 수 있었던 장면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에선 남자주인공인 마이클 못지않게 한나 역시 많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한나는 사무직으로 승진하게 되지만, 문맹이라는 것이 드러날까봐 마이클 떠난다. 어린 마이클과의 사랑보다 자신의 약점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고, 동료들에 의해 누명을 씌면서도, 종신형을 선고받으면서까지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것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그녀의 자존심은 자살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둘의 사랑을 애기하고 있지만 그 내면으로 들어가면, 갈등과, 수치심 자존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난 후, 분명 로맨스영화를 한편 보았지만 꺼림직한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것 같다. 로맨스장르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보고나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시시콜콜한 사랑애기로만 해석되는 남녀관계를 이렇게 역사와 개인적 딜레마를 한껏 담은 모습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감독의 표현력에 감명받은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소재로 진공포장하듯이 꾹꾹 눌러담은 문제의식은 나로서 한번더 생각해보게 하였다. 이로인해 나는 그 동안 내가 알게 모르게 영화편식을 해왔던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수업을 통해 조금더 영화에 대한 견문을 넓힌거 같아 나에겐 뜻깊은 시간이 되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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