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꺼운 이론서를 즐겨 읽는 나는 "이론이 실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상투적인 문구에 사소한 위안과 용기를 얻고는 한다. 김현 선생도 생전에 그랬나보다. 이 책은 1964년 이후 쓰여진 비평론을 제외한 불문학 관계 글을 대부분 수록하고 있다. 미래파와 다다를 포함한 초현실주의에 대한 연구와 샤토 브리앙과 말라르메를 비롯한 낭만주의 연구가 돋보인다. 김현 선생은 나르시스 신화를 통해 시와 시인의 본질을 밝히려 한다. 나르시스가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본 것은 바로 악의 모습이었다. 나르시스에 대한 김현의 독해는 기본적으로 보들레르와 말라르메의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나르시스의 갈망과 욕구는 세계 속에서의 자기의 발견을 촉구하는 악의 욕구라는 것이 이들의 논점이다. 시인의 근원적 욕구는 바로 '악에의 욕구'이고 시는 악을 통한 존재와의 응답이며, 시인은 나르시스처럼 악이 자기 존재의 초석이라는 것을 자각한다는 얘기다. 시인의 상상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의 불일치는 시인의 불행을 조성한다. 악이란 다름아닌 상상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의 간극이다. 칼 샌드버그의 말을 빌면 "시란 대지 위에 살면서 바다로 도망가려 하는 바다 동물의 일기이다". 이처럼 시인은 육지라는 현실적 세계에 살아가며 바다라는 상상적 세계에 대한 욕망과 갈증을 항상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다. 김현의 초현실주의 연구는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고 산만한 경향이 있다. 초현실주의의 가계도는 멀리는 보들레르, 사드, 로트레아몽과 랭보, 가까이는 1908년의 미래파와 다다를 포함한다. 여기에 혁명철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무의식의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접목된다. 필립 마리네티는 1909년 2월 <미래파의 선언>을 발표하고 맥락없는 단어, 통사론의 거부, 시적 유추의 자유를 주장하고 아카데미를 공격하고 문화의 저장소인 미술관과 도서관을 불태우라는 절규를 던진다.1916년 트리스탕 차라에 의해 태동한 전위적 문학운동인 다다이즘은 절대적 자유를 위한 거부와 파괴와 더불어 가치들의 전복을 주장했다. "미래파·다다는 초현실주의에게 일종의 방향감각과 역사의식에 대한 끊임없는 각성제로서, 그리고 사드-로트레아몽-랭보의 이 트리니테는 초월의 방법을, 마르크스는 초월의 필요성을, 프로이트는 초월의 한계를 각각 전해 주었다."(29쪽) 김현은 초현실주의에서 도덕적 태도로서의 '욕망의 해방'과 시적 기술의 태도로서 '상상력의 자유'를 도출해낸다.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은 문학적 측면에서 사고의 순수한 자동주의, 어떤 미적 선입견에서도 벗어난 사고의 받아쓰기, 사고의 순수한 놀음(자유로운 상상력), 새로운 시적 기술(記述)의 방법(자동기술법)을 추구했고, 철학적 측면에서 어떤 형태의 높은 실재에 대한 믿음, 꿈의 전능(욕망의 해방), 생의 기본적 문제의 해결로서의 꿈의 전능, 도덕적 선입견에서의 탈출, 철학적 태도 등을 강조했다. 뒤플레시스는 초현실주의적 기교 혹은 방법을 유머, 기이한 것, 꿈, 광태, 초현실주의적 대상, 미묘한 빈 병, 자동기술법 등 일곱 항목으로 정리한 바 있다. 브르통은 자동기술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가능한 한, 당신의 정신을 집중하기에 기분좋은 장소에 자리잡은 다음에, 무엇에 대해 쓸까를 정하게 하라. 그리고 당신은 할 수 있는대로 가장 수동적 상태에 몰입하라. 당신의 본능, 능력, 타인의 그것들은 추출해 내버리라. 그리고 문학이란 모든 것에 이르는 가장 하찮은 길이라는 걸 상기하라. 빨리, 미리 인지한 주제 없이,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다시 읽을 염도 나지 않을 정도로 빨리 쓰라. 처음 구절은 아주 동떨어져서, 매초마다 객관화되는 것만을 요구하는 의식적 사고에, 그것이 이상한 구절이라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동떨어져 올 것이다."(76쪽)
김현의 프랑스 낭만주의 연구에서 '낭만주의'는 1789년 이후에서 1차대전 전에 이르는 프랑스 사회의 상상 체계로 샤토브리앙의 낭만주의와 보들레르, 말라르메와 랭보의 상징주의를 거쳐 사맹과 베를렌 같은 후기 상징주의까지 포괄하고 있다. 낭만주의 신화는 쇠퇴와 조락의 이미지를 강조하는데 병들어 죽어가는 미인과 황혼에 대한 경도가 특색이다. 특히 가을, 황혼, 슬픔, 여자의 죽음은 모든 멜랑콜리 시학의 주된 테마가 된다. 낭만주의자들의 미적 이상인 여성의 전형으로 금발, 검은 눈, 옛날 의상과 장식, 루이 13세풍 등을 강조한 것은 네르발, 고티에, 말라르메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