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중국에서는 ‘상가구(喪家狗)논쟁’ 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공자를 ‘집 잃은 개’(喪家狗 로 비유한 이 논쟁은 공자에 대하 비하시비로 까지 이어졌고, 논쟁의 중심에 이 책의 저자가 쓴 [상가구]란 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본인이 쓴 [상가구]가 전혀 공자를 비하하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니며, 공자에 대해 바로 알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 책 또한 중국정부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고 있는 ‘공자열 현상’에 찬물을 끼얹는다. 공자의 뜻과는 달리 성전(聖典)이 되어버린 논어를 해체하고, 논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재조명하기 때문이다. 논어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논어라는 책 그대로를 읽는 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논어는 공자문하에서 남긴 대화록으로 일부는 선생의 말(言)이고, 일부는 학생의 말이다. 따라서 논어는 공자시대에 경(經)이 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공자의 학이 신성시 된 것은 공자 사후의 일이고, 이데올로기화 된 것은 한나라 때 라고 한다. 그럼에도 당시는 논어가 경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고 사서의 범주 안에 머물렀으나, 청대에 이르러 경으로 배열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논어를 읽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공자를 이데올로기화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공자를 정치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한나라 유자(儒者)들이 취한 것이고, 도통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 한 것은 송나라 유자들이 취한 것이며, 그리고 유학을 종교로 삼은 것은 근대 이후 서구의 기독교에 자극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논어를 읽을 때 공자를 정치화하고, 도덕화하고, 종교화 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읽는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논어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올바른 논어 독법은 처음에는 종(縱)으로 읽고, 나중에는 횡(橫)으로 읽는 것 이라고 한다. 공자는 전국시대 유세하는 제자백가중 한 사람으로, 그가 했던 말은 일반 백성에게 했던 말이 아니고 군주나 엘리트를 대상으로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논어는 길고 두서가 없는 글이 되었으며, 따라서 논어를 읽을 때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종으로 읽는다는 것은 인물에 따라, 그 인물이 산 연대를 따라 읽는 방법이다. 논어에는 156명이라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횡으로 읽는다는 것은 주제에 따라 채록하는 방식으로 읽는 것으로, 논어 20편에는 연결되는 서술이 없고 집중된 주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논어를 해체하여 읽었다는 저자, 먼저 종으로 찢으면서 인물을 해체하였고, 횡으로 찢으면서는 사상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전으로서의 이미지를 해체하여 논어 찢기를 마쳤다고 한다. 공자의 사상은 체계적이지만, 논어는 체계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저자, 그가 해체한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논어를 체계화 시킬 수 있다. 논어, 위에서 아래로 찢기 (인물을 해체하다) 공자는 살아있을 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죽은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칭해진다. 그러다가 한무제에 이르러 성인으로 정부의 공식 승인을 받게 된다. 사마천은 그런 공자를 사기에 편입 시킨다. 저자는 논어를 읽고,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기의 [공자세가]를, 그의 제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니제자열전]을 읽으라고 권한다. 사마천의 붓끝에 묘사된 공자 역시 때를 잘못 만나고 뜻을 이루지 못한 유자로 되어있다. 공자의 이름은 구이고 자는 중니 이다. 춘추시대 말기를 살았던 그의 조국은 송나라이었고, 부모의 나라는 노나라 이었다. 송나라의 귀족이었던 그의 조상은 공자의 증조 할아버지때 노나라로 이주하였으며, 노나라는 공자의 출생지이자 주거지였고 명실상부한 부모의 나라이었다. 공자는 우리에게 성인(聖人)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마 조선시대 성리학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성인(聖人)을 설명하려 하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형상이 사람과 너무 다르면 괴물이 되어 친근한 느낌이 사라지고, 사람과 똑같이 그리면 속인이 되어 신성한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에 들어와 복원되는 공자의 상은 모두 우리들의 상상 속에 있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에게는 3천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공자가 직접 가르쳤던 학생을 70제자라고 부르는데, 이들 중 35명에 대한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나온다. 실제로는 77명이라고 하는 70제자 중 논어에 등장하는 사람은 29명이다. 공자가 초년에 노나라에 머물 때 받아들인 학생이 5명,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후 받아들인 학생이 8명, 열국을 주유하고 말년에 노나라에 머물 때 받아들인 학생이 11명, 그리고 연대를 알 수 없는 학생이 5명이라고 한다. 이들 중 자가 자로인 중유는 논어에 출현 횟수가 가장 많은 인물이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4과(四科)라 불리는 덕행, 언어, 정사, 고문헌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이 네 과목에서 과목별로 뛰어난 제자 10명을 우리는 10대 철인이라 부른다. 개인의 수양과목으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학문인 덕행의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정치적, 외교적 재능을 가르치는 언어의 재아와 자공, 관리의 능력을 가르치는 정사의 영유와 계로, 그리고 고대의 인문학인 고문헌의 자하와 자유가 바로 그들이다. 후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보면 공자가 가운데 있고 제자들이 양편에 있는 4배12철의 모습을 하고 있다. 4배란 4명의 2급 성인으로 복성 안연, 종성 증삼, 술성 공급, 아성 맹가를 말한다. 12철은 10대 철인중 2급 성인인 안연를 빼고 전술사, 유약, 주희를 추가하였다. 이들 중 70제자 범위 밖에 있는 공급, 맹가, 주희를 빼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자문하 13명의 현자가 된다. 공자생전 공자-안연의 도가 100년 후에는 공맹의 도로, 그리고 1600년 후에는 공자-주자의 도로 바뀌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공자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자가 어떻게 평했을까? 논어에 등장하는 인물은 공자, 공자의 아들, 공자의 제자를 제외하면 125명 이라고 한다. 이들 중 42명이 공자시대 이전의 인물이고 나머지는 당대의 인물이라고 한다. 공자의 인물품평은 옛 사람에게는 후하고, 당대 사람에게는 박했다. 그러기에 성인(聖人)은 모두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찾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누었다. 상류층에 속하는 군자, 관리가 되어 정계에서 노는 자와 벼슬을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는 자가 그것이다. 공자는 미자, 기자, 비간, 백이 숙제와 같은 이들 은자에 대해서는 감탄해 마지 않았으나, 그들은 대부분 공자를 깔보았다고 한다. 당대 사람들 중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 많았고, 세상을 피해 숨은 선비들에게 도덕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들을 본받지는 않았다. 그의 활동범위는 역시 관료사회 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자, 농민, 군인과 결합하는 길을 걷지 않았다. 논어, 옆에서 옆으로 찢기 (사상을 해체하다)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은 어떠했을까? 저자는 먼저 공자의 계급적인 입장과 역사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공자의 조상은 본래 송나라의 대귀족 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귀족중심적인 계급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것이 눈앞에 보이는 귀족이 아니라 앞서 살았던 귀족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지 다 가르쳤지만 모두 군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모든 사상은 군주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역사관은 복고적이었다. 좋은 사람은 대부분 고대에 살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복고를 위한 복고는 아니었으며, 사회를 바꾸고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구제하는 강렬한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옛사람에게 천명(天命)은 하늘이 내린 명이었다. 그리고 공자에게 있어 그것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뜻하기도 했다. 고대에 있었던 천인(天人)사상에서 공자는 하늘보다 사람을 중시한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천 자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어떤 영향이 있느냐 하는 천명과 관련된 것 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인성에 관해서도 사람과 사람은 본래 비슷하다고 보았다. 단지 후천적인 나쁜 습관으로 인해 달라진다고 보고 교화를 중시 여겼다. 공자가 사람을 품평할 때, 최고 등급으로 삼은 것은 인(仁)이 아니라 성(聖)이었다. 인한 사람은 군자보다는 한등급 높지만, 성인보다는 낮은 사람이었다. 당시에 공자가 성인으로 본 사람은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왕, 문왕, 그리고 무왕 이었다. 공자는 성인이 되려면 총명해야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대중을 구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려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아무리 인격이 고매할지라도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인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인한 사람은 은자에게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는 농사를 싫어하고 정치에서 손을 떼지를 못하였기에 그들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고, 끝없이 통치자에게 권고하고 메 달렸다. 또한 그가 말하던 성인이나 인한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죽어서 보이지 않기에 힘써 생각하고, 생각에 부족함이 있기에 더욱 더 생각하게 된다고 보았다. 결국 공자의 인물품평기준은 도덕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일반인들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인격이 높으면 군자이고, 낮으면 소인이 되었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은 원래 귀족과 천민이라는 계급적 개념이었으며, 따라서 공자의 이러한 기준에는 계급적 편견이 담겨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여성에 대한 관점도 당대사회가 그러했듯이 성적 차별 관념이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특히 덕(德)과 예(禮)를 많이 논하였다. 덕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 예는 자신과 타인을 구속하는 것이고, 덕은 예로 수렴되었다. 공자가 덕의 항목으로 꼽은 것은 인(仁), 의(義), 효(孝), 우(友), 충(忠), 신(信), 관(寬), 서(恕), 공(恭), 경(敬)의 10항목이었으며, 공자가 말하는 예는 조화를 귀히 여기고, 간소함을 귀히 여기고, 검소함을 귀히 여기는 것 이었다. 그렇다면 공자는 누구에게 배웠을까? 공자는 특정한 누구에게 배우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특이한 것이 있다면 공자에게 음악을 가르친 악사들도 있다는 점이다. 또 공자가 보았던 책들은 아마 시, 서, 예, 악, 역, 춘추에 관한 것들 이었을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 육예는 공자가 후대에 전한 것 이었다. 그는 자신이 말 한대로 전하기만 했을 뿐,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述而不作) 이들 육예중 논어에 등장하는 것은 시경, 서경, 주역 세가지라고 한다. 논어, 성전(聖典)으로서의 이미지 찢기 공자는 죽어서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후대사람들이 말하던 성인과 공자가 말하던 성인은 다르다. 공자는 성인이란 총명한 사람이어야 하고, 성왕으로서의 권력과 지위가 있어야 하고, 죽은지 오래된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은 스스로 총명하지도 못하고, 권력과 지위가 없었으며 따라서 성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공자사후 자공, 재아, 유약등 그의 제자들은 공자가 받는 여러 의혹에서 공자를 방어하고, 또한 그의 절대적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성인의 기준에 수정을 가하여 공자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맹자는 성인이 없을수록 성인이 더욱 필요한 법이라며, 공자를 살아있었던 성인으로 만들었고, 순자는 성인들 가운데 공자는 다만 권세를 얻지 못한 자였다고 주장한다. 맹자시대에 이르렀을 때, 공자는 이미 결코 변치 않는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공자의 제자들이 그토록 스승을 성인으로 추대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스승이 성인이 되어야 제자도 성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옛사람들이 논어를 읽을 때 보인 가장 큰 결함은 성인을 존숭하고, 도를 수호하려고 한데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늘날 중국에는 논어를 읽는 세가지 독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종교로 세우는 것으로 공자를 유교의 교주로 내세운다. 다른 하나는 헌법으로 세우는 것으로 공자를 국가의 상징으로 삼는다. 마지막 하나는 도덕을 재건하고 스스로 분발하며 가르치며 잘 배우도록 권하는 것 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독법이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 공자는 인문학자였다. 공자가 전한 고전문화 육예는 모두 문학, 사학, 철학에 해당된다. 인문학의 특징은 무용(無用)함에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공자의 가치를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먼저 그는 당시 학식이 가장 깊은 사람이었으며, 교육가로써 문화적인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회평론가 이었으며, 백가쟁명의 시대를 연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오늘날 우리는 두 종류의 공자를 만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나는 논어에 나오는 살았을 때의 진짜 공자이고, 다른 하나는 공자 사당 안에 모셔져 있는 가짜 공자라고 한다. 우리 또한 조선시대 유학의 영향을 받아 공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으며, 아니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런 우리에게 성인으로만 추앙하고 있는 공자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또한 고전의 독법이라는 것이 단지 텍스트에 나와있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종(縱)으로, 횡(橫)으로 해체하여 보는 것임을 알려준다. 논어를 이해하기 위하여, 공자와 당대 사람들의 인생을 따라가보고, 또 그들의 사상을 해체해보았다. 다시 한번 논어를 읽는다면 예전과는 다른 감흥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
아마 말이 많았나 보다. 리링의 『집 잃은 개(상가구, 喪家拘)』 얘기다. 『논어, 세 번 찢다』는 『집 잃은 개(상가구, 喪家拘)』 비판에 대한 반론이자, 『집 잃은 개(상가구, 喪家拘)』의 보완이며, 종합이다. (『집 잃은 개(상가구, 喪家拘)』은 아직 읽지 못했다) 리링은 공자를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종교나 (헌)법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지식인, 사회비평가로 보고 그 자리로 돌리려 하고 있다. 원래 공자 자신도 스스로를 그러함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본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는, ‘성인(聖人)’으로서의 공자가 아니라, 한 시대의 인물로 있는 대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인간’으로 이해하지 ‘성인’으로 숭배하지 않는다.”, 『논어, 세 번 찢다』 473쪽)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리는 공자를, 『논어(論語)』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는 ‘고리타분’이라는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봉건(封建)’이라는 말도 떠오른다. 왜 그럴까? 공자 자신은 스스로를 결점도 있고, 보통의 사람이라고 했음에도, 그는 상징적으로 떠받들여져 과오 없는 인물로, 그 이름만 내세우면, 그 책만 내세우면 만사 OK가 되어버리는 상황이었고, 지금도 많은 경우 그렇다. 그러니 공자와 『논어(論語)』를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이름과 그 책에 주눅 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 와중에 왜곡되고 그 왜곡을 통해 그릇된 이념이 주입되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바로 저자가 얘기하는 ‘복고의 광풍’이다. “『논어(論語)』)를 읽을 때 가장 바보 같은 것은 그것을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다. 멀쩡한 공자를 공자로 이해하지 않고 긴장하면서 성인으로 숭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성인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대목이 있으면 반드시 빙빙 돌려 미화하고 신화하고야 만다.” (34쪽) 리링은 그러고 보면 용감하다. 주류 정도가 아니라 거의 신성시까지 하고 있는 공자에 대해 조금 다른 얘기를 꺼내는 것은, 비록 ‘무용(無用)’을 내세우는 인문학자일지라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비록 자신은 그런 파장까지는 예측을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말이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중국이 이렇게 짓밟혀가는 것은, 온통 거짓말과 유언비어로 날조되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임으로써 짓밟혀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8쪽) 그렇다고, 그가 쓴 『논어, 세 번 찢다』는 공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우리말 제목이 ‘찢다’이기 때문에 ‘논어’와 ‘공자’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지만, 정작 원래 제목은 『논어종횡독(論語縱橫讀)』으로 논어를 종으로 횡으로 똑바로 읽는다는 의미이고, 부제도 ‘성인의 이미지를 벗겨내야 진짜 공자가 보인다’이다. 바로 알자는 것이다. 공자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성인의 이미지를 벗겨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리링은 성인의 이미지를 벗겨낸 공자는 어떤 인물이라 쓰고 있는가? “공자는 성인이 아니라 민간의 학자이자 사립학교의 선생님이었을 뿐이다.” (20쪽) “『논어(論語)』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상은 대중이 아니라 엘리트이다. 그는 예수나 붓다와는 달리 전혀 군중 노선을 걷지 않았고, 대중의 영웅도 아니었다.” (22쪽) “공자가 관심을 가졌던 일은 오직 군자와 관련이 있을 뿐, 소인과는 – 그리고 여성과도- 무관했다. ... 공자는 솔직하여 엘리트의 입장이면 엘리트의 입장이지 대중과 친한 척할 게 무엇이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23쪽) “공자의 일생은 매우 불행했다. 어릴 때도 그는 불행한 아이였으며,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에도 눈물로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비극적인 인물로 처음과 끝이 모두 불행했다. 이것이 진실이다.” (68쪽) “때를 잘 못 만나고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참된 모습이다.” (71쪽) “공자는 변치 않을 것을 무척 강조했으며 중간에 그만두는 것을 반대했다. ... 좋은 쪽으로 말하자면 집요한 것이고, 나쁜 쪽으로 말하자면 완고한 것이다.” (100쪽) “세상을 피해 숨은 선비들이 좋기는 좋았지만 그는 이들을 본받지 않았다. 그의 활동 범위는 역시 관료사회였다. 그는 노동자, 농민, 군인과 결합하는 길을 걷지는 않았던 것이다.” (216쪽) “공자의 복고 사상은 복고를 위한 복고가 아니다. 마치 유럽의 ‘문예부흥’처럼 이른바 복고란 사실은 강렬한 현실적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고대를 빌려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을 고대에 의탁했는데, 그 목적은 사회를 바꾸고 이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구제하자는 데 있었다.” (226쪽) “우리는 그를 ‘전무후무한’ 자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그건 그 어르신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일이 된다.” (246쪽) “그는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 그는 농사짓는 일을 매우 싫어했다. ... 그가 택한 것은 통치자에게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이었다. 원칙도 버릴 수 없고, 운명도 저버릴 수 없으며, 기회는 더욱 놓칠 수 없다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276쪽) “공자는 ‘술이부작 述而不作’한 사람이다. 즉 그는 전하기만 했을 뿐 만들어내지 않았다.” (365쪽) “공자에게 독서는 독서를 위한 독서가 아니었다. 그에게 독서는 투입된 것이고 벼슬은 그로 인해 산출된 것으로, 그것에는 매우 강렬한 공리적 목적이 있었다.” (388쪽) 그러니까 공자는 무던히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즉, 정치를 통해) 공부를 했던 사람이다. 은둔한 사람을 좋아했지만, 스스로는 그러고 싶어 하지 않았다(비록 그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잘못된 위치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리고 그가 꿈꾼 세상이 철저히 엘리트 중심, 즉 귀족 중심이라는 점은 시대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만한 것이다(그가 민중 중심이 아니라 해서 현대에 와서 비판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리링이 보는 공자의 가장 큰 공헌은 무엇인가? 공자가 학자와 교육자로서, 사회평론가로서 지극히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무엇보다는 그가 바로 백가쟁명의 시대를 연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나는 공자의 가장 큰 공헌은 그가 ‘과녘’이 된 데 있다고 본다. 묵가도 그를 비판하고, 도가도 그를 비판하는 등, 선진시대 제자백가는 누구나 그를 비판했는데, 이로부터 백가쟁명이, 사상적으로 미증유의 자유가, 학문적으로 미증유의 발전이,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휘황찬란한 시대가 생겨났다.” (492쪽) 세상에 제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공자.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추앙받고, 오늘날도 살아남아 이처럼 논의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만약에 그가 정치가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처럼 많은 제자를 길러내지 못했을 것이고, 그처럼 많은 얘기를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실패가 그의 성공을 가져온 셈이다. “무정한 운명 앞에서 그는 깨어 있었던 것이다.” (427쪽) (2013.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