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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와의 만남
지난 여름, 구병모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녀의 글을 읽고 단번에 팬이 되었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직조하는 그녀의 글 솜씨에 매료된 때문이다. 특히나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건 소재를 대하는 그녀의 접근 방식이었다. 그녀는 다루기 힘든 소재에 대해 둘러 말하거나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 직접적이지만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녀 글의 또다른 특징은 도회적 정서에 있었다. 작중 인물들에게서 우리 고유의 정서적 특징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작품 전반의 분위기는 꽤 따스했다. 피를 나누지 않은 남인데도 가족 보다 나을 수 있음을 제시하는 그녀의 글 '위저드 베이커리'를 통해, 다음 세대의 사랑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열기로 흐물흐물 녹아버린 질척한 초콜릿보다 냉한 곳에서 딱딱한 상태로 있는 초콜릿을, 즉 뜨거운 사랑보다 이성에 의해 의도적으로 식혀진 차가운 사랑을 제시하고 있었다. 쿨한 그녀의 글이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의식주의 문제를 넘어 이제 삶의 양식이 관심사가 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정으로 끈끈하게 뭉쳐진 관계보다 사람 사이의 여백을 존중해 주는 관계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은 맑은 공기가 피부에 닿는듯 그렇게 신신선하게 느껴졌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이렇게 읽혔다 그랬기에 구병모의 근작 '고의는 아니지만' 에 대한 기대치는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에는 7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었다. 난해하진 않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 출격을 준비하는 비행기처럼 단단한 채비를 하고 대기중이었다.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담담하면서 기괴한 이야기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들이 편치 않은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에 의해 도배된 현실이 얼마나 힘들어 보이는지 차라리 우리가 발을 딯고 있는 이 자리가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마치 ……같은 이야기 구병모는 시인을 등장시켜 비유가 사라진 도시를 보여준다. 언어를 소재로 글을 이끌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기발함이 놀랍기만 하다. 도입부는 SF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흔적 조차 찾기 힘든 폐허의 도시는 왠지 삭막하고 메마른 느낌을 불러온다. 그녀는 비유가 사라진 도시를 통해 언어가 단순히 사전적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준다. 언어란 우리의 생각과 느낌 정서의 총체로, 비유를 없앴을 때 우리의 정서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그려주었다. 비유를 금지시킨 이 도시의 시장이 결국은 미무르라는 괴물로 변해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시인이 발견한다는 마지막 장면은, 수사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켜준다. 타자의 탄생 가장 흥미있었던 단편이었다. 어느날 한 사내가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구덩이와 사내 사이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다. 살기 위해선 사내를 둘러 싸고 있는 금속성 주물을 절단해야겠지만, 배 이하부터 왼팔까지 몸에 꼭 붙어 있는 주물을 제거하려면 사내도 다치게 된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 경위와 직전까지의 기억도 사내에겐 없다. 몇 년째 취직을 준비하던 사내는 아내와도 거리가 멀어져 있음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나 관공서, 방송국은 호기심 어린 몇 번의 관심을 보이다 말고, 그는 이제 사람들에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곰팡이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만다. 한 인간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구병모는 잔인하리만큼 자세하고도 찬찬히 보여준다. 그녀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는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야 하는 사내가 측은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재수없이 걸린 사내에게만 해당되는 걸까? 구병모는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는 사내의 마지막 말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사내의 말은 메아리가 될 뿐이다. 누구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유언 같은 경고마저도 허공으로 떠돌고 마는 불합리와 불확실한 우리 시대의 비극을 보여줄 뿐이다. 고의는 아니지만 한 유치원 여교사의 이야기다. 그녀는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아이도 교육 현장에서 제외되서는 안된다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 나름의 철칙으로 인해 녀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까지 아이들을 위해 감내한다. 그러나 그 수고스런 배려가 경제적 여건이 어려운 아이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녀는 모른다. 어느날 아이들이 그녀에게 뚱한 소리로 반발을 하자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몰아치며 그녀는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하고 만다. 그 때 저만치 건너편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즉시 깨닫고 후회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날 저녁 그녀는 퇴근 길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녀의 실언이 목숨을 앗아갈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엎지러진 물인 것 만은 확실했다. 그녀의 죽음을 대하는 아이들의 반응이 은근하고 싸늘하다. 이 섬찟한 반응에 대한 답이 이 소설의 주제다. 조장기 사람에게서 나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새떼가 달려들어 사람을 쪼아 먹는다는 이야기다. 히치코크의 영화에서나 볼 듯한 그림이 그려진다. 하늘을 까맣게 덮고 있는 새떼의 모습은 장관이 아닌 두려움을 떠올리게 한다. 새떼의 공격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은 별 강좌를 다 듣는다. 그런데 삶에 지친 여대생이 그 모습을 보며 죽은 자를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힘든 세태를 구병모는 여대생의 입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누군가의 살점을 뜯어먹었을 새떼를 보고 '살점의 승천'이라며 부러워하는 여대생의 얼굴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절망의 냄새가 새떼를 부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무엇이 어린 그녀를 그토록 벼랑으로 몰았을까? 삶의 힘겨움이 처연하게 드러나는 글이다. 어떤 자장가 다른 사람의 논문을 대필하며 사는 젊은 엄마의 이야기다. 그녀의 꿈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하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남의 논문을 써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을 위한 논문을 쓰리라는 희망 하나로 그녀는 힘겨운 삶을 버텨나가고 있다. 어린 자식은 엄마의 사정은 아랑곳하지않고 오로지 놀아주기만 원한다. 게다가 밤에 잠을 안자는 아이 때문에 그녀는 요즘 기한 내에 논문을 마치지 못하고 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그녀는 상상 속에서 아이를 징벌한다. 세탁기에 넣고 빨거나 전자레인지에 넣고 굽거나 냉장고에 넣고는 가둬버린다. 그녀는 아이가 위태로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꺼내주지 않는다.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 엄마는 상상도 못할 상상을 한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어린 자식을 죽이는 상상 말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을 사는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에게 가정과 일의 병행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생각케 한다. 그런데 구병모는 마지막에 아내와 어린 아이가 서로 껴안고 자는 모습을 남편이 보게 한다. 실제 벌어진 일이 아니어서 고맙지만 동시에 한숨이 쉬어지는 결말이다. 기쁨은 잠간이고 현실은 계속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희망을 말하는가, 아니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계속될 삶의 고단함을 말하는가. 재봉틀 여인 감정을 제거해야만 살 수 있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극이다. 어린 소년은 자주 교사에게 구타를 당한다. 무지막지한 구타는 이미 사랑의 매가 아니었으며 어린 소년이 비행 소년이라는 근거는 글에서 찾을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소년은 시장통의 한 수선집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 봉합해 버리고, 재봉질을 해준 아줌마의 자식이 된다.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소년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표현할 감정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고 절망감에 빠진다. 청년인 소년은 결국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양어머니를 살해한다. 양어머니의 몸에는 온갖 바늘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감정이 고통을 더 깊게 만든다 생각했던 두 사람은 결국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더 비참한 생을 살았을 것이다. 구병모는 어린 소년이 감정의 출구를 봉쇄해야만 했던 이유를 자세히 알려 주었으면서도결과를 비극적으로 그려낸다.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장치라는 삶의 희비를 그녀는 아프게 알려준다. 곤충도감 구병모만의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글이다. 이 글의 화자는 고등학생 소녀다. 소녀는 자신의 아빠의 아들, 그러니까 배다른 오빠에게 몇 년 전 강간을 당했다. 그 충격으로 아빠는 술에 절어 살다 길거리에서 동사하고 엄마는 사람들의 소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사가 버린다. 소녀의 엄마는 생계를 위해 어느 건물 일층에 자리를 얻어 식당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건물 다른 층에 오빠가 이사를 온다. 소녀는 알고 있다. 사실 그 때의 일은 강간이 아니었으며 서로 원해서 이뤄진 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소녀의 오빠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말이 없으며 먹는 것도 거의 없이 죽은 듯이 살고 있다. 오빠의 몸에는 그 때의 일로 반생물-반기계가 주입돼 있다. 전자발찌로도 성범죄자의 성폭력을 제재할 수 없게되자 나라에서 성범죄자들의 몸에 반생물-반기계를 주입한 것이다다. 성적 흥분의 강도에 따라 반생물-반기계는 커지고 흥분이 극에 달했을 때 놈은 송아지만한 거대곤충이 되어 온 몸을 찢고 튀어나오게 된다. 소녀는 오빠를 증오하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생기길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오빠와 자신이 아직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오빠를 그 곤충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로 한다. 소녀는 아무도 없는 날 오빠를 유혹한다. 평소 감정의 변화를 일체 보이지 않던 오빠의 호흡이 달라진다. 오빠의 몸이 폭발하던 순간 몸을 찢고 나온 것은 놈의 날개가 아니라 천사의 날개 같다. 구병모는 사랑을 해체한 후 사랑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근친간의 경계와 나이의 경계, 생과 사의 경계가 그녀의 손 안에서 사라지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라는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질문을 이 글은 던지고 있다. 성범죄라는 도덕적으로 가장 비루한 삶의 자리에 있는 자와 강간을 당했던 어린 소녀를 통해서 말이다. 마침내 다 읽었다 역시 구병모는 능수능란했다. 머뭇거리거나 배회함 없이 이야기 속으로 돌진했고, 난데없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앞뒤 상황 설명도 하지 않은채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공간을 독자에게 주었다. 환상으로 도피하지 않고 환상을 현실의 자리로 끌고 왔다는 (문학평론가, 황광수) 말은 적합한 표현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과함이나 모자람 없이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가는 그녀에게서 폭우 속에서도 갑판에 꿋꿋이 서 있는 믿음직한 선장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전체적으로 구병모의 글은 날카롭고 날이 서 있었으며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메마르거나 건조하지 않은 건 그녀의 글 안에 있는 습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읽어 갈 수 있었다. 또한 소름 이 돋을 만큼 구체적이고 강렬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이맛살이 찌푸려지지 않는 건 구병모가 그 속에서 냉정을 잃지 않은채 중심을 잘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에 나오게 될 그녀의 글을 기대하고 있다. 한 색깔 안에서도 미세한 채도의 차이와 다양하고 풍부한 질감이 그녀의 글에서 나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기다리는 기쁨이 무엇인지 나는 지금 구병모를 통해 배우고 있다. * 자음과 모음 <파과> 출간기념! 구병모 작가 작품 리뷰대회 '고의는 아니지만' 3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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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필연도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구병모 작가의 글은 늘 내 주위를 맴돈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혜성같이 등장하더니(사실 곡절없는 등단이란 있을 수 없지만) '아가미'로 맘껏 자맥질을 하다가, 급기야 짜~안하고 '고의는 아니지만'을 선사한다. '나, 이런 작가야' 뚜렷한 색깔로 그 이름을 아로새긴, 구.병.모. 간만에 재미와 감동(지극히 개인적인 추억 때문에...)을 두루 선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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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산다는 것, 더구나 가진 것에 의해 삶의 질이 결정되는 생태계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항력적 고역이다. 또한 사회적 동물이라느니 공동체의 연대니 하며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실상 그것이 인간의 일상적 삶에서 실천된다든가 이타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단지 외형상 그렇게 보일뿐이며, 자기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만 그렇다는 것이 현실임을 훨씬 많이 경험한다. 이 소설집을 구성하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이러한 일상의 현실적 삶의 부조리하고 부당하며 불온함으로 점철된 세상과 인간들을 투시하고 있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 대해 인색하다. 못 가진 자에 대한 배려는 가진 자에 대한 차별이고 분별없음이라고 항변한다. 갖지 못한 자는 무심함이란 부성실과 부당함으로 대처한다. 희생자는 이들 두 분별없는 계층에 세심한 배려를 하려는 자가 되고 만다. 무엇이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도 타자의 무관심과 읽기의 실패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소유와 경쟁의 이익추구라는 자본주의 미덕만을 칭송하는 체제의 불편한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
비유의 언어가 금지된 도시를 배경으로 한「마치.....같은 이야기」란 작품은 바로 이러한 인색하고 외곬의 획일화된 불통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경제적 효율의 추구라는 미명하에 한 단어에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닐 뿐 은유나 상징적 표현을 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확한 의사전달을 위해 의미를 복잡하게 하는 비유는 낭비이기에 금지한다는 것인데, 모든 것을 손익계산과 이익의 추구라는 경제 가치를 최고의 미덕이라 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도덕적 양심과 감성이 효율성에 추방당한 사회. 이러한 사회가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이라고 말하는‘미무르’같은 괴물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 두렵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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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고의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나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을때 우리는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위해 변명을 하게 된다... 고의는 아니었다고...
구병모작가의 소설 <아가미>를 읽고 많은 독자가 그러하듯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가미가 있는 한 소년의 부드럽고 따뜻한 자맥질이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고 어쩌면 그럴수도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리고 다시 읽게 된 그녀의 소설집 이번에는 단편 7작품으로 그녀의 성향을 맘껏 느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독서등하나만을 의지하고 첫장을 펼치니 마치... 같은 이야기라는 단편이 나온다. 직유와 은유가 사라진 미래의 도시에 관한 이야기 솔직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생각했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단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먼저 다른분들이 쓴 리뷰들을 읽어봤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다시 나를 자극한다. 책을 덮고 오늘은 푹 자고 내일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잤다..
현실이라고하는 것에 발이 묶이고 얽매여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고통 어찌보면 극단적이랄 수 있겠지만 그러한 고통을 소설이라는 것의 특권인 기발한 상상력으로 엮어낸 알토란같은 작품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상의 괴물인 미무르처럼... 이라는 이야기가 듣기 싫어 직유, 은유를 모두 금지시켜버린 한 도시의 시장 어쩌면 그는 ~~~처럼이 아닌 진짜 괴물이었을 수도 있다는..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년 공무원준비생인 한 사나이... 어느날 술에서 깨어보니 도시 한복판 거리 한 가운데 알 수 없는 주물에 꽁꽁 갇히는 신세가 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점점 부패해가는 자신의 모습... 그는 말한다.. 구멍은 어디에 있나고..웬지 옴싹달싹하지 못하고 정해진 틀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넓은 정방형 탁자에서 엄마가 준비해준 준비물로 재미있는 수업을 하는 아이들과 협소한 원탁에서 준비물을 가져오지 못해 손으로 풀을 으깨가며 수업을 하고 있는 아이들 교사는 나름 공평하게 아이들을 대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또 그것에 대해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는데 ... 정말 고의는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말실수을 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목숨까지 잃게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미 한번 저질러진 말과 행동은 그것을 아무리 정당화하려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좀더 신중해야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비관,부정,죽음,,,이러한 부정적인 기운의 냄새를 맡으면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쪼아먹어치워버리는 새떼..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상상하게 하지만 그 새들의 부리 아래에는 이미 삶을 포기하고 비관으로 쩔어있는 인간의 군상들이 놓여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어두운 밤, 새벽에 다리마저 온전치못한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구닥다리 컴퓨터를 가지고 남의 리포트나 논문을 대신쓰며 살아가는 한 여자... 그 여자 옆에서 잠도 안 자고 칭얼거리는 아이가 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노를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행하는, 그것도 세탁기에 집어넣고 오븐에 돌려버리고 냉장고에 갇어버리는... 섬뜩한 상황... 맘속으로는 무슨 짓을 못하랴만은 출구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절박함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많은 바늘로 감정을 꿰매어버린 남자.. 자신이 표현하는 감정으로 인해 더욱 고통받았던 남자는 차라리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사랑의 감정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을 한다.. 감정표현에 어색하고 있는 그대로의 맘을 표현하고 살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을 쎄게 꼬집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성폭력자들의 몸속에 무엇인가를 주입하고 그 범죄자가 다시 그러한 맘을 느껴 성욕이 생기면 그것은 진화하여 곤충으로 변해 그의 몸을 뚫고 나와버린다...생각치도 못했던 상상이다..
이렇게 모든 작품들속에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부분이 녹아있다. 물론 그것을 표현하고 극복하고 일깨워주는 도구로 사용된 것들이 어찌보면 기발할 수도 , 어찌보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가미를 가지고 태어난 한 소년을 통해 무엇인가를 얘기해주고자 했던 작가의 또 다른 의도들은 나에게는 충분히 소설로서의 재미와 의미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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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특별히 애정하는 작가, 칠병모도 아니고 팔병모도 아닌 구병모 선생의 신작에 관해 수다를 좀 떨어 볼 생각입니다. 구는 카드에서도 아주 중요한 숫자로 족보가 아니면 가보가 최고인데 족보가 들어오기란 쉽지 않고 실제로 가보로 땡을 잡는 경우도 많으니 실로 이 구란 숫자는 생각보다 대단한 위력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가 선생의 필력 또한 가보 수준이인지라 제가 애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 때릴 거야?
아주 미친듯이 따끈따끈한 갓 뽑아낸 응가 같은 작품은 아니지만 여하튼 출간한지 삼개월이 채 안되었으므로 김은 모락모락 안 오르더라도 아직까지 냄새마저 가시지는 않은, 진열대 이열 정도는 충분한 수준의 신작임은 확실합니다. 이 책은 소설집이에요. 두 편의 장편 뒤에 나온 대를 이은 단편집이랍니다. 두 편의 걸출한 장편을 세상에 내보이면서 또 언제 단편까지 썼나 싶을만큼 자글자글한 느낌을 가진 일곱 편의 소설이 옹기종기 엽기적인 내용으로 풍자적이면서 사회적 비판적인 알레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굳이 대단한 짱구를 굴려가며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생각지 않는다 해도 대충 아하, 내 너 언제가는 이럴 줄 알았지 싶은 내용으로 구성된 소설들이었는데요, 이것은 전작 장편 아가미의 말미에서 등장했던 모지리 선생의 좁은 시야를 콕 집어내던 그 찰나의 통찰력이 그야말로 활활, 단편으로 그리고 제대로 완성도 있게 지펴진 모양새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환상과 엽기와 제법 그럴듯한 상상으로 뒤엉킨 각각의 단편들은 현 정부라고 해도 좋고 현 정책이라 해도 좋고 그게 아니라면 니네 옆집 혹은 내일 있을 니네 집 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직접적인 풍자의 세상을 보여줍니다. 날카롭지요. 칠도 아니고 팔도 아니고 역시 구인지라 짚고자 하는 내용의 날이 잘 벼려져 있습니다. 성가지고 장난하지 말라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아무리 야동 김본좌의 대를 잇고 싶은 소망을 가진 꿈나무라고 해도 아무 성이나 마구 즐기는 변태는 아마 아니니까요.
첫장을 끊은 단편에선 사실 그녀의 특장점인 장문 퍼레이드가 아직 덜 영글어 성긴 느낌이 살짝 들었던 바람에 아아, 이것은 그러니까 아가미로 도약하기 이전의 습작 장문의 결과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추측 같은 걸 좀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내 다음 단편에서부터는 완연히 달라지고 노련해진 장문들의 나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한편 한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때마다의 기대감이 점점 증폭되는 기분을 일단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장편에 강한 작가들이 단편에 약하다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많기 때문에 내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은 단편집임에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보여주어 기뻤고 어쩌면 기대하지 않아서 더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중요한 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소재와 매끄러운 전개로 으흠, 이야기꾼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주는 이 작품집은 흡사 과거 이기호의 단편집 <최순덕 성령충만기>라든가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의 재림을 보는 듯 했습니다. 기묘한 상상과 기발한 내용 전개와 그를 둘러싼 뻔뻔한 넉살 같은 점이 아주 유사한 형태로 표현되었는데요, 이기호 씨한텐 조금 미안한 얘기이지만 실력은 구병모 씨가 한 수 위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 기호 씨이고 구, 병모 씨이기 때문은 분명히 아님을 밝히면서 넉살 좋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달변 혹은 일필휘지의 느낌으로 써내려간 느낌이 단 한 편으로 구라계의 대부로 입성하신 천, 명관 씨의 <고래>라든가 성석제 선생의 작품 같은 동종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 구 씨께서 이들 중에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천도 잡을 만큼- 여기는 까닭은 일단 한국 문학에서 참으로 유니크한 몇 안 되는 맛깔 장문 공력의 보유자일 뿐더러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녀의 놀라운 어휘력에 있습니다. 누구처럼 새로운 단어랍시고 북한어를 끌어대지 않아도, 747 보잉 항공기가 활주해도 될만큼 너른 공간에 빨간 고추 말리듯 단어들을 늘어놓고 마음껏 뽑아 쓰는 그녀의 공력은, 가히 타의추종을 불허한다꼬 지는 생각합니데이. 그런 무한 단어 말랭이와 그들의 절묘한 조합으로 일궈내는 감칠맛나는 장문을 읽고 앉았노라면 과연 그녀는 공부 좀 한 국문과 출신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단 말입니다.
여하튼 몇몇 단편은 시든 콩나물 대가리처럼 끝에 가서 푹 고꾸라지는 등의 약점을 다소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편애란 바로 이런 것, 별다섯은 물론이요, 베스트 단편 코너에 참으로 간만에 이 책을 올릴 예정입니다. 읽으면서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 소설은 그거면 된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그게 이야기 때문이든 문장 때문이든 아니면 뭔가 곰곰이 씹어볼 주제가 있어서이든 뭐면 어때. 덮고 아쉬우면 그 놈이 장땡. 그러므로 구병모 아주머니께서는 빨리빨리 다음 작품을 발표하여 독자에게 보답하자. 놀다 지쳐 돈 떨어지면 그때나 슬쩍 한 편 써내는 그런 작가는 되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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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꿋꿋하게 응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상처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중도에 멈추지 않고 집요할 정도로 모조리 까발려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처를 이처럼 끝까지 파헤치는 것은 강하지 않으면 하기가 어렵다. 강함은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하기에 강한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나는 구병모 작가와는 이 '고의는 아니지만'으로 처음 만났지만 이런 까닭으로 지금 내게 있어서는 가장 매력적인 작가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표지에는 단촐하게 소설이라고만 나와 있으나 사실은 소설집인 이 '고의는 아니지만'은 다 마음에 드는데 딱 하나가 아쉽다. 바로 수록된 작품의 순서이다. 소설집은 2009년 부터 현재까지 발표되거나 미발표된 작품들로 묶여져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순서가 그렇게 정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왕이면 시간순으로 배열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을 읽어보니 작가가 작품마다 그 때의 사회와 분명히 서로 조응하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투쟁기이다. 그 시간의 지층마다 상처로 절망으로 작가를 익사시키려 했던 사회에 굴하지 않고 저항과 희망으로 열심히 자맥질해 온 기록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그의 호흡이었고 문학은 그의 무기였다. 더 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는 더 크게 헤엄쳤고 그렇게 이 소설집은 헤엄친 거리만큼 더욱 넓고 깊어진 성찰의 여정과도 같다.
이건 작품을 시간순으로 배열해 보면 바로 드러난다.
2009년에 발표된 '재봉틀 여인'과 '곤충도감'을 개인 차원의 얘기로, 뒤이은 2010년에 발표된 '마치... 같은 이야기'나 '타자의 탄생'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사회' 자체에 대한 얘기로, 그 후 2011년에 발표된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그런 사회 속에서의 개인으로 살아가는 나'에 대한 얘기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시야는 넒어지고 있다. 이건 물론 단순히 바라보는 지점들이 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쪽으로 옮겨간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니다.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사회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에 대한 분명한 자각 끝에 옮겨가는 이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시야가 넓어지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결과인 것이며 그 깨달음이란 다름아닌 사회가 은폐한 진실을 다시 찾아옴으로 이루어진다.
소설의 여정은 그 되잧아오는 진실들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과 같다. 사회로 부터 익사당하지 않고 저항하려는 자아 역시 그 되찾은 진실에 양육되어 무럭무럭 자란다. 몸의 비만은 자아의 비만이다. 그리고 굴하지 않는 의지의 비만이다.
가장 먼저 발표된 '재봉틀 여인'과 '곤충도감'을 일단 들여다보자.
이 두 이야기는 모두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절멸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봉틀 여인'에서 사회가 가하는 구조적 폭력을 피하기 위해 보다 무리없이 섞일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선을 잘 꿰메두고 있었던 소년은 결국 원하는대로 그 사회와 하나가 되려는 결정적인 순간 갑작스럽게 결별을 당하고 만다. '곤충도감'의 주인공 남녀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만 한 쪽이 파열해 버린다. 이렇게 모든 관계는 하나가 되려는 순간 어느 한 쪽이 파국적 결말을 맞아버린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설은 분명 그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고 하지 않는다. 바로 사회 자체가 그 파국의 원흉임을 드러낸다. 어떻게? '재봉틀 여인'의 소년을 보자. 그가 그렇게 감정선을 꿰매야 했던 것은 선생님의 폭력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어른들의 사회 그 자체를 대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소설의 첫문장에서 작가는 일부러 '어른들의 관용어'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어른과 아이의 언어적 대조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편가름이며 그렇게 소설 속 개인들이 단순히 개인들이 아닌 그 속한 무리의 대표로 보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선생님의 폭력을 어른 일반의 폭력으로 치환시킨다. 그 치환을 통해 선생님의 자리는 라캉식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 질서를 그 근저에서 구조화시키고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 이동한다. 선생님의 폭력은 소설 속 교장과 선생님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속한 사회적 소통의 진실한 단면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또한 대상이 아이들이기 때문에 양육이다. 그들은 길러진다. 가르치는 어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소통하도록! 폭력이다. 폭력은 일방적이다. 거기에 대화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려와 이해의 차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가하는 자의 일방적 명령과 강요가 있을 뿐이다. 한 쪽은 말하는 입만 있고 듣는 쪽은 오로지 귀만 있는 관계. '재봉틀 여인'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소년은 폭력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그저 재봉틀로 기울 수 밖에 없다. 소년은 점점 진정한 자신의 신체를 잃어가고 어른의 폭력에 길들어진 변형된 신체가 된다. 그러면 소설에서 과연 재봉틀 여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설에서의 개인이 프로이트적 오디이푸스 삼각형에서 한 꼭지점을 맡고 있는 인물들의 상징으로 유형화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재봉틀 여인은 물론 어머니를 표상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로 부터 폭력을 당한 아들에게 위안은 늘 어머니 몫이었다. 그녀는 어루만져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역할을 했다. 거기서 연고로 상처가 봉합되었듯이 재봉틀 여인은 소년의 상처를 재봉틀로 봉합한다. 재봉틀 여인이 바로 어머니의 상징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여기서 소설의 진실이 나타난다.
이 소설은 얼핏 환상 소설의 외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진실은 한 가정내에서 자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회적 소통의 진실된 단면이기도 한 폭력을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일차적 사회화 임무를 맡고 있는 가정의 원형적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폭력 유전의 핵심적 공간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서의 폭력은 어디까지나 소통, 즉 의사 교류의 유형으로써의 폭력이다. 가정에서 아들은 흔히 아버지의 권위로 상징되곤 하는 사회 질서를 준수할 것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있지 않나?'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고 위안을 준다. 하지만 그 위안은 어떤 위안인가? 어떤 치유인가? 그것은 그저 일시적인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위안과 치유가 아버지의 폭력이 재차 반복되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 자식으로 해야 할 도리, 혹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참아라는 등의.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아버지 질서의 전복을 꿈구는 아들의 기를 죽여 놓는다. 일방적 폭력의 강요로 존속하는 가정의 생명을 그런 식으로 연장한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트너인 것이다. 경찰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나쁜 경찰과 좋은 경찰로 이루어진 파트너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안과 치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른 대안도 없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방식 속에서 그저 또 하나의 아버지로 되어 버리는 것 말고는.
아들은 자신의 자아를 잃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작가가 이 소설에서 고발하는 하나의 원형으로써의 가정이 가진 진실이다. 아들의 진정한 자아와 아버지의 질서는 양립 불가다. 아버지의 복제가 되는 것 말고는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감정을 잃어버린다. 더이상 자신의 감정으로 무엇을 느껴볼 수가 없다. 이만큼 자신의 순수 자아를 상실해버렸다는 걸 잘 나타내주는 게 또 어디있을까? '재봉틀 여인'은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양립 불가능한 이유가 애초부터 가정 자체에 뿌리박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가정은 또한 사회의 일차적 사회화 기관이다. 그렇다면 사회 자체가 오로지 그 폭력적 소통 말고는 다른 방법은 모르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소년 소녀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자아를 희생당한다. 이러한 희생을 막고 그들을 이러한 일방적 폭력으로 부터 해방할 길은 없을까? 그것이 바로 뒤이은 작품 '곤충도감'의 화두이다.
소설의 남자는 사회로부터 비밀리에 레이저로 곤충을 주입받는다. 이 곤충이 바로 소년 소녀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순수 자아를 상실하게 만드는 사회 질서를 의미하고 있음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분리불가능성이다. 이식된 존재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의 것에 오래도록 길들여지게 되면 과연 그것이 내 천성인지 아니면 단순히 길들여진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아이들도 그렇다. 일방적으로 오래도록 가치관을 주입받으면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의 판단이고 어느 것이 강제로 이식된 가치관인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특별히 '아비투스'라 말했다. 사회화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 사회적 관습들이 마치 내 본성처럼 달라붙어 또 하나의 신체처럼 떼어내기 어렵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비투스가 되어버린 신체로 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사회 관습이 켜켜이 코드화되어버린 신체 자체를 절멸시켜 버리는 것. 그 뿐이다. 폭발, 파열. 과연 이 말 그대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의 신체는 산탄총을 맞은 수박처럼 파열해 버린다.
그런데 그 상황이 흥미롭다. 하필이면 그가 파열하던 순간이 성관계를 나누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남녀 사이의 일대일 성관계야 말로 개인의 주체성이 가장 명확히 형성되는 순간이라 한다. 즉 한껏 고양된 남자의 주체성이 외부의 것으로 철저히 이식되고 변형된 아비투스적 신체를 깡그리 날려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파열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같이 있던 여자는 죽음이 아니라 남자가 해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두 작품에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공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다. 타자와의 대화,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들어설 수 없는 공간으로써의 사회. 두 작품은 그 형상을 드러낸 것과 같다. 이제 관측은 좀 더 깊은 곳을 향한다. 그 다음 작품에서 시점이 사회 자체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작가에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소설집에는 가장 첫머리에 나오나 2010년의 작품인 '마치... 같은 이야기'는 사실은 지금 한국 사회를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오로지 실용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유법이 금지되고 오로지 직설법만 통용되는 소설 속 공간은 MB 시절 표현의 자유 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떠들석했던 '쥐벽서' 사건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G20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형사기소까지 되어버렸던 사건을 그 그림을 그렸던 강사는 단적으로 상상력과 권력과의 싸움으로 정의내린 바 있다. 바로 이 상상력과 권력이 이루는 대항관계가 그렇지 않아도 '마치.. 같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상상력은 소통의 차원을, 권력은 일방적 강요의 차원을 의미한다. '재봉틀 여인'에서 드러났듯이 아버지에게 체화된 사회의 권력은 그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상대편이 반응하길 원한다. 그것이 권력이며 소통의 거부란 권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는 주인공 시인이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마치'라는 비유법적 공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카페와 권력자가 움틀고 있는 직설법적 공간의 상징인 시청과의 대비적 묘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마치'의 공간은 여러 사물들이 이리저리 뒤섞인 곳인 반면 시청은 반듯하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구획된 공간이지 않았던가? 이러한 뒤섞임이 소통을 의미하고 반듯한 구획이 권력을 의미한다는 것은 일부러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작가는 '쥐벽서' 사건이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2010년 현재의 권력에 의한 소통 부재의 한국을 소설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뒤이은 '타자의 탄생'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설 또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가져왔다. 소설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구명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는 남자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고공크레인에서 홀로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씨를 상징하고 있다. 어떻게 달리 볼 수가 없다. 소설 속 남자가 그랬듯이 김진숙시가 그 고공크레인에 구멍에 빠진 남자처럼 갇혀 있었던 이유도 권력이 소통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마치... 같은 이야기'가 소통 부재를 가져오는 사회의 일방적 권력을 드러낸다면 '타자의 탄생'은 그 권력이 이제 어떤 비극을 낳게 되는지 보여준다. 그게 바로 구멍이다. 김진숙씨나 소설 속 남자 처럼 개인들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가두는 '구멍'이 권력에 의해 사회 곳곳에 마구 생격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구멍들이 생겨나는 것에는 어떤 이유도 정해진 규칙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권력의 필요에 따라 홀연히 생겨나서 개인을 가두고 고립시키며 밥벌이를 빼앗아 버린다. 고립과 생존 위기를 한달음에 가져오는 구멍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일방적 선택에 따라 무작위적으로 생겨나므로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김진숙씨가, 혹은 소설 속 구멍 속에 빠진 남자가 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바로 지금이 말이다. 구멍에 빠진 남자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긴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고.
보다 심층으로 내려가 만나는 사회의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권력이 원하면 누구나 구멍에 빠질 수 있는 곳이라는 것. 거기에는 어떤 이유도 어떤 규칙도 없어서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그 누구도 언제든 구멍에 빠질 수 있는 잠재적 희생자라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마치 동굴 깊숙한 곳에서 회중전등을 비춘 것과도 같이 문학이란 빛 안에서 거대한 벽화처럼 나타난 진실이었다.
그 거대한 벽화는 이제 우리의 실존을 바라보게 한다. 잠재적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를. 그러므로 뒤이은 소설들, 즉 2011년에 발표된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가 '나' 자체를 화두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자신이 잠재적 희생자라는 사실은 무엇보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혹은 언젠가 받게 될 위험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로 인한 것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게 바로 2010년에 발표된 '어떤 자장가'이다. 마치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그 일상의 묘사라든가 심리적 묘사가 세세한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정말 카프카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카프카도 이 작품 속 여인 처럼 글을 쓰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방해가 되었던 존재인 '일상'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게 바로 '모든 일상적인 일'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카프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던 글은 쓰는 시간 동안 오로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던 글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글은 좀처럼 쓸 수 없었다. 사사건건 일상적인 일들이 글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에 대한 카프카의 혐오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아예 유연으로 자신이 모든 글들을 불살라버리라 할 정도였다. 그 카프카처럼 '어떤 자장가'에서의 여인도 글쓰기에 방해되는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싫어한다. 작품 속에서 방해가 되는 그러한 일상적인 일들은 특히나 그녀의 아이로 상징된다. 소설에서 여인은 종종 아이를 세탁기에 넣거나 오븐에 넣거나 냉장고에 넣어버리는 일을 반복적으로 상상하곤 하는데 그녀가 얼마나 방해가 되는 일상적인 일들을 제거하고 싶은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힘겨움을 낳게 한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그건 바로 사회다. 국가다. 정부가 저출산을 우려하며 아이 낳을 것을 종용하기만 하고 정작 더욱 중요한 육아에 대한 부담은 전혀 줄여 줄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난한 이들은 생존이 절박한지라 일 때문에 육아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데 정부는 복지 제도의 확충으로 이마저도 부담을 나눠지려 하지 않는다. 하는 것만 보면 정부는 아이를 마치 화초나 농작물로만 생각하는 듯 하다. 그저 물이나 뿌려주고 빛만 비춰주면 대충 자라게 되는 그런 정도로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잡초처럼?
여인의 고통은 정부의 그러한 무관심 때문이며 그녀의 신음은 아이를 기르는 엄마와 가난한 가정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오로지 일방 소통만 존재하는 정부의 구조적 폭력 때문이다. 개인이 고통과 신음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러므로 단 하나다. 그 구조적 폭력을 제대로 응시하고 분쇄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뒤이은 '고의는 아니었지만'과 '조장기'이다.
'고의는 아니었지만'는 제목 그대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고의가 아닐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난다. 개인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구분된 사회 구조 자체가 그 고통의 진짜 원인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유치원 교사 F가 그리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하필이면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장기'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은 그녀는 현재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을 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녀는 매일 하루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내몰리게 된 건 결코 그녀가 게을러서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노력파이고 성실하다. 하지만 국가는 폭우 피해를 받은 주인공의 가정을 구제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고 그녀는 타고난 외모 탓에 취업이 어렵다. 이렇게 그녀가 이다지도 절박한 상황에 내 몰린 건 개인의 탓이 아니었다. 진짜 원흉은 어려움을 만난 국민들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는 국가, 외모로 고용을 결정하는 것처럼 취업에 있어 부조리한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고치려 들지 않는 정부에 있었다. 두 소설 모두에게 있어서 이런 식으로 개인의 곤경과 고통은 바로 이미 구축된 사회 구조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2010년의 작품들이 '하나'의 대상으로써 사회의 모습만을 표출했다면 2011년의 작품들은 실제 사회가 어떤 식으로 곤경과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는지 그 내부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와서 작가가 그 내ㅜ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 폭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것은 이전의 작품 '타자의 탄생'에서 갇혔던 남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자기가 갇힌 이유를 헤아려보기 위함이다.
즉 구멍은 왜 만들어지는 것인가? 바로 그 이유를 추적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사회가 그 구멍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계급적으로 가장 약한 자들을 잡아먹기 위해서라는 걸 보여준다. 거기서 사회는 마치 공양을 받는 괴담속 괴물과 같다. 그 괴물이 강물에 던져지는 처녀들을 잡아먹음으로 존속하듯 사회도 그렇게 가장 약한 자들을 희생양삼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존재인 사회에게 구멍이란 그러므로 필수적인 존재이다. 개미핥기가 함정을 파고 그 속에 빠진 개미를 먹듯이 사회 역시 약한자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구멍이 필요한 것이다. 구멍이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는 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영원히 잠재적 희생자란 신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에서 약한 자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우리는 늘 뒤쳐지거나 앞에 있거나 둘 중 하나에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뒤에서 맹렬히 달려오고 있는 매머드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만 뛰고 있는 원시인들과 같다. 그것도 영원히 종착지가 없는. '고의가 아니지만'에서 유치원 교사 F의 죽음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유일하게 계급적 무리를 이루지 않아서, 즉 가장 약한 존재가 되는 바람에 결국 죽임을 당한다. '조장기'의 주인공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는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으므로 절대 새들에게 쪼아 먹힐리 없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그런 노력의 보람도 없이 가장 헐벗은 처지로 몰리게 되고 그렇게 계급적으로 가장 약한 자가 된 그녀는 새들에게 살점을 뜯어먹힐 운명에 처한다. 뒤쳐지면 죽는다. 이것이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뛰는 것으로 하루의 생명을 보장받는 게 유일한 우리의 대안이라고! 외면하고 싶은가? 그럴 수 없다. 그러지 못하도록 작가는 이 모든 소설적 여정에 촘촘히 진실을 박아놓았던 것이다. 외면할 수 없도록 보이는 모든 방향에다가. 그래서 진실은 잔혹한 것이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하는 의사가 그러하듯이.
이 소설은 그 진실을 목격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난 작가가 더없이 정직하고 강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어떤 일말의 대안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주지 않기에 더더욱. 이는 두 작품 모두 죽음의 묘사에서 두드러진다. 작가는 그 죽음을 묘사하는데 있어 미묘하게 해방의 순간으로도 읽힐 수 있도록 했다. 어떻게 읽으면 주인공들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밟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레이스'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오로지 죽음만이 이 현저한 사회의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유일한 탈출구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만큼 절망적이라고 말이다. 그걸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한다. 피하지도 말고 핑계대지도 말고 살아가는 세상의 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때문에 이 소설집을 읽고났을 때 섬뜩함부터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언제 어느 때 사회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 고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군요. 개인적 감정은 없어요. 그냥 이제 당신이 갇힐 차례가 다가온 것일 뿐..."
진실은 이러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말자. 작가가 한 줌의 절망을 위하여 그 오랜 시간을 자맥질해 온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진실된 목적은 진정한 시작에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보다 제대로 된 대안의 구축은 언제나 사태의 진실을 제대로 응시했을 때라야 가능하다. 진실에 대한 정직한 응시가 보다 올바른 구원을 가져온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응시이며 때문에 보다 제대로 된 구원을 향한 그 진정한 첫발인 것이다. 예로부터 건물을 제대로 세우려면 말뚝부터 제대로 박아야 했다. 깊이 잘 박을수록 건물은 더 오래 버틴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란 쉽지가 않다. 말뚝을 깊이 박으면 박을수록 육체는 힘들고 그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이 소설집의 고통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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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인적인 독서취향이긴 하지만, '괴기스러운'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윽', '헉' 이라고 하는 탄식이 자꾸만 터져나오는 책은 더더욱 그렇다. 구병모의 책 '고의는 아니지만'은 사실 다른 블로거님의 리뷰를 읽게 되고, 호기심을 갖게 된 책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아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구입했다.
● 조금 독창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 작가 작가의 시선은 굉장히 독창적이다. 가장 심하게 독창성을 보여준, 금속 주물에 완벽하게 하반신이 박혀버린 한 남자 이야기를 보면서 작가의 독창성은 독창성을 넘어서는 '괴기스러움'으로 돌변하게 된다. 물론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라는 놀라움과 감탄도 느껴지지만, 내용의 전개가 되면 될 수록 허탈하고 놀라는 기분이 더 많이 커졌다. 적어도 사람에게 그 지경의 시련과 고통을 줬다면 어떤 이유로 그런 고통에 빠졌으며, 결국 결말은 어떻다라는 시작과 끝의 최소한의 정돈된 느낌만이라도 있어주길 바랐지만 그냥 고난에서 시작해서 고난으로 끝나는 전개는 독창스럽기는 하지만 나의 깜냥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독창적이라서 어쩌면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주지 않는 면모를 파헤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세상 사람들이 그냥 보아 넘겨버릴 것들을 작가의 시선에서는 크게 보였을 것이고 그 부분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 나가는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은 단편으로 구성된 책속에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 아직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기에 나는 부족한 독자일지도... 이 책을 덮으면서 '어렵다' 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책을 읽으면 바로바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였다. 전개가 비교적 빠른 편이라 이야기가 흡수되는 것은 참 빠른데, 몸과 마음에서 이 책의 내용들이 쉽게 와닿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윽', '헉' 소리가 자꾸 반복되서 나오는 걸 보면 정서적으로 내게 거리감을 주는 책이 아니였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 책은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예전에 스타크래프트를 친구들과 할 때도 피칠갑을 하면서 죽는 종족보다, 기계 같아서 적어도 죽을 때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종족을 선택하는 나의 취향때문에 어쩌면 이 책의 독특한 세계관을 '징그럽다'고 내가 편파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닌지 겸허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이 책을 마주해야 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적어도 내게 이 책은 '고의는 아니지만 불쾌감을 느꼈던' 책이 아닐까 하고 돌이켜 생각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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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님의 이전 작품인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를 재밌게 읽어서 신간을 열심히 기다리고 있었다. 총 7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무엇하나 평범한 제목이 없고, 꿈같은 판타지가 아닌,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의 일들이라 더욱 그럴듯하게 이렇게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이야기를 주제로, 그 속에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내면의 악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칠 수 없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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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탄생> 한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너무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는 경우가 있다. 이를 테면 말기 암이나 불치병 선고와 같은. 그럴 때,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야, 라는 울분을 터트리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주인공은 화학적, 물리적 방법을 총동원하더라도 구조될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길 한 복판 주물 속에 복부 아래 하반신이 박힌 채로 하루하루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처음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행인들과 주민들도 시일이 지나자, 불쾌한 용변 썩는 냄새에 코를 막고 피하기 바쁘며,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이유로 시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더 이상 그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는 재래식 화장실 속에서도 매일매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더기만도 못한 인생을 연명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 가는 그의 육신을 양분 삼아, 그의 육신에 기생하는 새로운 생명들. 이 무슨 부조화 속의 조화란 말인가.
<고의는 아니지만> 10년 어린이집 교사 경력이 있는 나로서는 전율할 정도로 정교의 극치미를 보여 주는 작가의 묘사력과 상상력에 탄복했다. 편부모에 하루 한 끼 먹고 살기도 버거운 생활, 그리고 그러한 가정에 있는 자녀들을 교육하는 교사로서 갖는 책임과 의무감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것이다. 성인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예민하고 감수성이 깊은 유아들의 심리와 개인의 성향, 가정환경- 전반을 파악하여 가능한 상처받지 않고 평등하게 대우를 해주는 데 전력을 다한다고는 하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일단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교사도 한낱 인간이라는 허울을 둘러 쓰고 있기에 극한 상황에 처하면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더불어 하나의 소소한 일상에 불과한 일도 때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F교사가 그런 경우다. 아이와 부모의 입장을 골고루 배려하며 나름 최선을 다하는 F교사도 화가 치밀자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해선 안될 말을 하고 만다. 원(院) 담장 너머에서 노동을 하던 인부들을 가리키며, 너희들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어- 라는. 그녀의 말에 인부들은 일순간 하던 일을 멈춘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참회하며 야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F교사는 인부들에 의해 살해된다.
<어떤 자장가> 우리는 '사회'라는 거대한 테러리스트가 맞추어 놓은 폭탄 타이머에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숨 막히는 현실을 살고 있다. 하루 13시간 노동, 네 시간 수면에 달갑지 않은 육아와 살림까지 더해진 형편에 짬짬이 논문 대행으로 벌어들이는 약간의 소득과 자아발전으로 오는 작은 만족을 위로삼아 살아가는 한 여자. 잠 안자고 말 따먹기에 재미 들린 어린 영혼을 상대해 주다 보니, 일의 맥이 자꾸 끊김과 동시에 그녀의 인내력도 바닥난다.
냉장고에 넣어 얼릴까, 오븐에 넣어 구울까, 세탁기에 넣어 입을 막아 버릴까, 물론 갑갑한 현실로 인한 순간적 도피 현상이 불러낸 환상이다. 하지만 그런 암울한 환상이나 환영을 보는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점이,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한 상황이며심각한 사회. 국가적 문제인 것이다. 정해진 퇴근 시간을 뒤로 하고, 동료의 싸늘한 눈치를 받아가면서 상관장이 딸아이를 피해 늦은 밤까지 산적(山積)해 있는 업무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6년 전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곤충도감> 삶 자체에서 오는 공허감은 때때로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나아가 보편적 규칙이나 법에 위배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자폭(自爆)하는 용기를 주기도 한다. 계부 아들의 다정다감함은 세월따라 진보되기 마련, 소녀는 자연스레 그에게서 안정을 찾고 오히려 그의 손길을 갈구하게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외관상 남매인 둘은 이미 온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므로, 둘 사이를 이간질 할 수 있는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설령 그의 몸을 숙주로 해서 번식하는 괴물같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다 할지라도.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육신의 가루를 소녀에게 뿌리고, 그는 날개를 펄럭이며 자유롭게 비상하리라. 사마귀나 나방이 아닌 한 마리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