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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핫팩을 그러쥔 듯 몸이 덥다. 문득, 그렇다. 설마 덥기까지야... 아침의 내 생각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곗바늘에 채여 비틀대거나 휴일 아침의 게으른 얼굴처럼 초췌해졌다. 계절의 변이(變異)는 그렇게 갑자기 다가와 얼굴을 쿵하고 부딪히거나, 콧김을 훅 뿜고 달아나는 것이다.
박민규의 두 번째 소설집 [더블 side A]를 읽었다. 일전에 읽었던 [카스테라]의 여운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삼 월이었고, 춘곤증 1리터를 원샷한 기분이었고, 안 그래도 머리가 책상의 윗면과 가까워지려는 시기에 굳이 소설을 읽을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그랬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작가가 직접 마스크를 쓰고 촬영한 표지 사진이다. 또라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거나, 내리거나, 번지다가, 문득 멈춰 섰다. 멕시코의 전설적인 레슬러 '블루 데몬'과 '엘 산토'를 모티프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문학상 시상식에도 이 가면을 쓰고 나갔다고 하니 또라이라는 내 생각이 맞거나, 때리거나 흘러내렸을 것이다. 아마도. 18편의 단편을 두 권에 나눠 묶은 이 책은 상·하권이 아니라 side A, side B로 나뉜 음반과 같은 느낌을 준다. 박민규의 소설이 다른 작가와 차별화되는 주된 이유는 작가의 상상력과 뛰어난 문장력 덕분이겠지만 그와 더불어 행갈이와 여백 등의 시각적인 장치를 통하여 소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독자들에게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블-sideA]에는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근처'를 비롯하여 '누런 강 배 한 척', '굿바이, 제플린', '깊', '끝까지 이럴래?',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굿모닝 존 웨인', '축구도 잘해요', '크로만, 운'의 9편이 실려 있다.말기암 판정을 받은 40세 독신남의 귀향을 통해 죽음과 존재의 성찰을 시적으로 그려낸 '근처'는 박민규 작가의 변화와 발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카스테라]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그려냈다면 [더블]에 실린 작품들은 죽음과 삶이라는 본원적인 질문을 향해 더 깊이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이 끓을 때까지, 또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말없이 갈라진 허물의 등짝을 바라본다. 죽음도... 저런 걸까? 행여 삶이란 허물을 벗고,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저 틈을 빠져나온... 그리고 다시, 오래전에 죽었을 매미의 삶을 나는 떠올려본다. 수면(水面)이란 허물을 벗어던지고, 잘 우러난 얼그레이의 향이 코끝까지 번져온다. 남은 삶이 문득 홍차가 되기 직전의 뜨거운 물처럼 느껴진다. 번진다, 번진다" ('근처'-1권 p.16)
자식들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의 대부분을 내어주고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한 노인의 시선을 그린 '누런 강 배 한 척'도 '근처'의 연장선에서 다루어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란//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실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연명(延命)의 불을 끄고 나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창을 열고, 나는 베란다로 나간다. 긴 하루의 늦은 밤이다. 흐르고 흐르고 흐르는 차들의 불빛들로, 언뜻 저 멀리 도로가 길고 긴 강물처럼 느껴진다. 아득하고, 멀다. 이제 그만//건너고 싶다.//저 누런 강, 나는 한 척의 배처럼" ('누런 강 배 한 척'-1권p.65~p.66)
특이한 것은 [더블]에 실린 작품 중 많은 것이 작가에 의해 시도된 실험적인 작품이라는 점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SF적이거나, SF스럽거나, SF비스무리한 작품들이 미래스럽게 펼쳐진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심해 탐사라는 특이한 소재로 쓰여진 '깊'이 그렇고,다른 우주의 이야기를 다룬 '크로만, 운'이 그렇다.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작품은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였는데 작가는 어둠 속 망루에서 끝도 없이 보초를 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시니컬하게 다루고 있다. 나는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렸다. 소설의 분위기도, 양이 등장하는 것도 어쩐지 서로 유사한 면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박민규 작가도 하드하면서도 보일드한 세계의 끝과 같은 원더랜드를 배경으로 삶과 죽음,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지구의 울음소릴 듣고 싶었어. 이어지는 고요 속에서 샘케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꼭 한번은 말이야. 하지만 실은 인간의 울음소리가 아닐까? 드미트리가 속삭였다. 룸도 인체의 확장일 뿐이야, 조금 전의 소리도 그 인체가 낸 울음이고, 룸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깊'-1권p.135)
주중에 하루 휴일이 끼여서 그런지 일주일이 후다닥 지나간 느낌이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곧 있을 봄비스러운 미래를 예고하는 것일 테지만 나는 여전히 겨울스러운 오후의 외투를 입고 박민규의 SF스럽거나, SF비스무리했던 소설들을 생각하며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다. 달다, 또는 쓰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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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소설집. 정말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있던 책. 2010년에 출간된, 출간되자마자 바로 구입했던 책. 이제서야 첫 장을 열어본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년) 이후 박민규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리고 그 이후 출간된 책들을 구입하고 읽고 그랬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글을 읽어도 글이 아니라 글자만 보는 것 같아서 한동안 떠나 있었다. 그리고 이 책 <더블>이 아마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당연한 마음에 구입했지만 읽지 않고 있었던 책, 아마도 그냥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고 여러 작가들의 책을 읽었으니 이제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볼까. 책을 읽기 전 박민규 작가의 최근 소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봤는데, 없다. 이 책 <더블>이 그의 마지막 책이다. 이럴수가. 그래서 그 동안 그의 이름을 잊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면 보통, XXX 작가의 신작,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그 동안 박민규 작가의 책은 본적이 없던 것 같다. 오랜 만에 읽은 박민규 작가의 책 <더블>, 아직 side A 만 읽었는데, 이것은, 정말 좋다. 천재 아니야? 이런 짜릿한 기분이란, 오랜 만에 느껴본다. side A에는 모두 9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리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부터 SF적인 이야기까지 다양한 장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고 꽉 찬 느낌, 역시 오랜 만이다. '그래, 이런 맛에 박민규의 책을 읽었었지.' 잠자던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이다. 박민규에 대한 세포가.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한 작가가 하나의 책에서, 물론 2권이지만, 볼 수 있다니. 그리고 속지(이 부분은 side B 리뷰할 때 다시 이야기해야지)에 있는 글, 그림, 그리고 헌정사.
어라, 작가 사인이 있네. 작가 사인을 모으는 버릇은 예전부터 있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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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을 눈앞에 정렬해 본다. 마스크를 쓴 두 명의 박민규가 등을 맞대고 있다. ‘Double ArtBook’이라는 표제를 단 속지(?)도 함께 놓아 본다. 코팅지로 된 책 표지의 질감 때문에 작가가 드러내고자 했다는 ‘LP 같은 느낌’을 얻을 수는 없지만, 이 자체로 하나의 ‘물건’이라는 생각만큼은 뚜렷하다.
2005년 이후 발표된 작품들 18편을 묶은 박민규의 신작 소설집 <<더블>>을 두고 어떤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소설집마다 의례 있는 해설비평도 없고 작가의 약력조차 지워버린 마당에, 라는 생각을 지워준 것은 더블이 하나의 물건이라는 느낌이다. 그의 소설들이 사물의 질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무게가 있으며, 그 무게로 가라앉지 않도록 발판 또한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민규의 소설 세계에는 바닥이 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이 어떻게 짜이든, 발을 디딜 수 있는 단단한 바닥 곧 우리의 일상이 전개되는 현실의 층이 거기에 있다는 말이다. 하루키나 몇몇 젊은 작가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현실성이 박민규의 모든 소설에는 뚜렷이 있다. 박민규 소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근처>나 <낮잠>, <아치> 등에서만이 아니라, SF로 분류될 수 있는 <깊>이나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아스피린> 등에서도 우리는 사건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땅바닥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특정 장소를 가리킬 때뿐 아니라 장르문학 고유의 가상의 공간일 때도 그 땅바닥은 확실히 존재한다.
인물들이 발을 디디고 사건이 뿌리를 박는 이러한 바닥은, 일견 가볍고 경쾌해 보일 수 있는 문체가 담아내는 무거운 이야기들을 지탱해 준다. 원리를 말하자면 반대로 써야 할 것이다. 무거운 이야기들을 제시하기 위해 단단한 바닥이 마련되었다고. 박민규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독특한 문체 외에 말이다.
박민규의 소설이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음은 따로 말할 것도 없이 분명하다. 한 편 한 편마다 책장을 다 넘긴 뒤 잠시 눈을 감아 보기만 해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박민규 소설 세계의 바탕색이라는 점 또한 자명해진다. 그가 풀어내는 사건들 그가 제시하는 인물들은 항상 우리의 삶에 닿아 있다. 사회의 하중을 견뎌내는 평범한 사람들이 땀과 눈물, 똥오줌을 분비하면서, 우리의 몸이 지구 위에서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하는 무게를, 새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박민규의 소설들은 하나의 물건으로, 사물로서, 자신의 무게를 갖는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일이 고통스럽거나 괴롭기는커녕 매우 즐겁다는 점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대답이 제시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인 저 독특한 문체와 눈에 띄는 행갈이 방식, 글자의 크기를 달리한다든가 글자에 색을 입힌다든가 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형식 등이 한쪽 이유라면, 현실을 자유로이 초월하면서 일상의 소재를 독자적으로 변형시키는 거침없는 상상력이 다른 이유가 된다. 이 중에서, 박민규 소설 읽기가 즐거워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상상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상의 결과가 아닌 문학이 어디에 있겠느냐만, 박민규가 펼치는 상상의 세계에는 독특함이 있다.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황당하다 싶을 정도의 상상을 펼치지만 그러한 상상이 사실주의적인 기술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하나고, 상상을 펼치는 작가의 시선이 인류와 우주에 닿아 있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다. 상상 속에도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이 우리의 일상에 닿아 있으며, 이 일상은 소외된 자들의 끈끈한 것인데,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우주 속의 인류라는 지평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깊>이 보여주는 문명에 대한 통찰이 그러하고, <끝까지 이럴래?>에서 확인되는 종말과 비루한 일상의 병치가 그래서 가능하며, <양을 만들 그분께서……>의 적나라하고 부조리한 상황 또한 앞서 말한 바 일상과 지평의 거리를 한눈에 담는 시선 속에서 하나의 소설로 포획된다. <크로만, 운>이나 <굿모닝 존 웨인>, <龍×4>, <아스피린>, <딜도가……>, <슬> 등 장르문학으로 분류될 법한 작품들은 물론이고, <근처>나 <누런 강 배 한 척>, <낮잠> 또한 그러하다. 다분히 이상화된 추억이 가리키는 인간적 인류적 보편성과 일상의 쇠잔한 육체가 일깨우는 현실이 ‘바로 이 작품’으로 구체화된 데는 양자의 간극을 개의치 않는 상상의 힘이 작동하고 있다. <루디>나 <별>, <아치>는 어떠한가. 죽음과 살인의 문턱을 앞에 둔 극한적인 상황과 일상현실의 문제가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 놓인 채, 스토리를 풀어내는 작가의 시선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다. 우리 시대의 단면을 통찰하는 시선과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질적인 삶들의 현장, 이 둘 사이의 거리가 경계를 모르는 상상력에 의해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박민규 소설에 일반적인 것이어서 <<더블>>뿐 아니라 <<지구영웅전설>>이나 <<핑퐁>>, <<카스테라>> 등에서도 어김없이 확인된다(박상준, 「한없이 초라한 인류에게 주는 박민규의 영가」, <<크리티카>> 4, 2010 참조). 이들 작품에서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상상의 나래를 펴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처럼 잔잔하고 담담하게 은근히 상상의 세계를 깔아놓든, 그의 소설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대위법이 자리한다. 이 시대에서 소외되어 눈물콧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일상이 땅바닥을 딛고 제 무게를 지탱하는 한편, 그 비루한 현실의 비루함을 보다 근본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작가의 시선이 하늘과 별과 우주 가운데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더블>>을 포함한 모든 작품에서 뚜렷한, 하늘과 땅 사이의 이 거리를, 박민규 특유의 문체가 슬쩍 가려주고, 두 근본에 닿아 있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상상력이 채우고 있다.
이 문체와 이 상상력 덕분에, ‘사회에 대해 비판적․반성적이되 가치 평가 체계를 내재한 완결된 의미체를 용납하지 않는’ 박민규의 소설이 독자의 사랑을 받게 된다. 풀어 말하자면, 그의 이야기를 즐겁게 따라가다 읽기를 마치고 보면 마음속에 어느새 깊은 의미가 뚜렷한 잔상을 남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 잔상이 중독성이 있어 다시 그의 소설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일상의 파노라마를 극적으로 펼쳐주면서 우리네 삶의 속살을 땅과 하늘에 그려놓는 방식, 박민규 소설의 중독성은 여기서 유래한다.
우리 문단에서 <<더블>>이 갖는 이질성을 새삼 말할 필요가 있을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둔한 말로 지금껏 표현해 본 박민규의 소설 세계 자체가 21세기 한국 문학계에서 실로 독특한 것이다.
<<더블>>이 보이는 장르문학 관습의 활용은 이 맥락에서 거론할 것이 못 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 등에 대해서 그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조건적으로 반영론을 고수하는 완고함이나 조금 자유로워졌다 해도 여전히 재현의 미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면, 바로 그러한 이유로, <<더블>>을 두고 장르를 이야기할 일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팬덤의 세계에서 본다면 박민규는, 너무, 무겁고 그만큼 거리가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더블>>의 이질성은 그것이, 꿋꿋하게 그래서 새삼스럽게, 육체의 무게를 끌며 우리가 맞닥뜨리는 일상생활의 현실성을 중시한다는 데서 온다. 넓고 유려한 상상의 날갯짓에 의해 언뜻언뜻 보이는 이러한 현실성, 그것을 이루는 몸뚱이와 땅바닥으로 해서 <<더블>>은 하나의 사물처럼 자신의 자리를 오롯이 지키고 있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박민규의 소설 세계는 서로 이질적인 많은 것들을 흡수하지만, 잡동사니가 뒤섞여 있는 장난감통이 아니다. ‘박민규적인 것’과 ‘박민규답지 않은 것’에 ‘장르적인 것’까지 표면상으로는 혼재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하늘과 땅바닥에 걸쳐 근본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한편 형식의 가벼움으로 읽는 고단함을 달래주는 그의 소설 세계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이끄는 웜홀이다. 우리 문단에 튼실하게 뿌리를 박은 사물인 그 구멍은,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길을 열어내는 하나의 채널일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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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꺼내 읽고 있자니 옆에서 마누라가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네.”라고 한 마디 거든다. 맞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란 소설로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신예작가(이젠 신예라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박민규가 현재 시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다. 이 소설집 ‘더블’은 2010년 11월에 출간되었다. 출간되자마자 구매 놓기는 했는데, 이걸 읽으면 더이상 읽을 수 있는 박민규 작가의 소설이 없어진다는 서운함에 책장에 꽂아 놓고 다음 소설이 나오면 읽어야지 하면서 방치해둔게 벌써 4년이 넘었다. 그동안 뭐그리 바쁘게 살았는지 하는 생각도 들고, 도대체 박민규 작가는 4년이 넘도록 신작을 내지 않고 뭐하는지라는 뜬금없는 야속함도 약간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소설이 줄 수 있는 긴장감을 모두 담아 넣기에는 단편소설은 너무 짧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단편소설을 즐기지 않을 뿐더러, 박민규 작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어 모든 작품에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내 취향에 딱 맞는 소설들이 몇 작품 실려 있다. Side A에서 맘에 드는 작품은 ‘근처’와 ‘누런 강 배 한 척’이란 작품이다. ‘근처’라는 소설은 시한부를 선고 받아 고향에 돌아와 죽음을 준비하는 중년의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지만 주인공의 나이가 좀 더 많아서일까 죽음을 좀 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조금 다르다.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말없이 갈라진 허물의 등짝을 바라본다. 죽음도… 저런 걸까? 행여 삶이란 허물을 벗고,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저 틈을 빠져나온… 그리고 다시, 오래전에 죽었을 매미의 삶을 나는 떠올려본다. 수면(水面)이란 허물을 벗어던지고, 잘 우러난 얼그레이의 향이 코끝까지 번져온다. 남은 삶이 문득 홍차가 되기 직전의 뜨거운 물처럼 느껴진다. 번진다. 번진다 번짐이 멈춰선 그 순간 이 삶도 끝날 것이다. 다른 무엇으로, 성질이 바뀔 것이다.” “삶도 죽은도 간단하고 식상하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 세계가 누구의 것도 아니란 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 이쪽은 삶, 이쪽은 죽음… 나는 비로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누런 강 배 한 척’이란 소설은 2007년도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으로 작품집으로 접한 바가 있는 소설이다. 정년퇴직한 초로의 사내가 평생을 모은 돈과 평생을 걸쳐 마련한 집을 처분한 돈을 자식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 위해 털털 털어 넣고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죽음을 위해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더는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견디기 함든 것은 고통이나 불편함이 아니다. 자식에게서 받는 소외감이나 배신감도 아니다.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굼하지 않은데,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며 삼십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소하고 뻔한,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를 똑같은 속도로 더디게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알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몰라서 고생을 견디고, 몰라서 사랑을 하고, 몰라서 자식에 연연하고, 몰라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실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연명(延命)의 불을 끄고 나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BOOK : 2013-00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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