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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잔악무도한 행태를 보고하다.【학살의 정치학】
"미국의 잔악무도한 행태를 보고하다.【학살의 정치학】" 내용보기
출간 7개월만에 프랑스에서 200만부가 팔려나갔다는 《분노하라》라는 책의 광고문구와 제목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직격탄으로 분노하라!고 외치는 이 책의 제목처럼 《학살의 정치학》을 읽으며 나는 심하게 분노했다. 힘있는 기득권 집단(=국가)을 생각하며 억울함을 삼켰다. 학살과 정치학이라니..정치학이라는 학문에 학살이라는 입에 담기 거북스러운 단어가 붙는
"미국의 잔악무도한 행태를 보고하다.【학살의 정치학】" 내용보기


출간 7개월만에 프랑스에서 200만부가 팔려나갔다는 《분노하라》라는 책의 광고문구와 제목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직격탄으로 분노하라!고 외치는 이 책의 제목처럼 《학살의 정치학》을 읽으며 나는 심하게 분노했다. 힘있는 기득권 집단(=국가)을 생각하며 억울함을 삼켰다. 학살과 정치학이라니..정치학이라는 학문에 학살이라는 입에 담기 거북스러운 단어가 붙는다는건 그만큼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이니 과거에는 일어났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자행되지 않는다고 마냥 보고만 넘겨서는 안될 불편한 사안이다.


인류가 생겨나면서부터 약육강식, 먹고 먹히는 관계,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먹어치우고 짓밟고 올라서는 행태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중심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세계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경쟁,동맹국 모두가 유럽과 아시아에서 몰락하게 되었지만 직접적인 손상을 전혀 입지 않았던 미국은 오히려 전쟁을 거쳐 경제,정치,군사적으로 더욱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서 있다. "세계 인구의 6.3%에 불과한 미국이 세계 부의 50%를 갖게 됐다"-전후 외교정책 백서(조지 캐넌)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뭘까?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자 군사대국이다. 근래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S&P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고등급인 AAA에서 한단계 하락시킴으로 인해 경제나 주식시장이나 크게 들썩이고 있는것 자체도 세계는 미국에 의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인거 같다. 

그들이 군사대국이 되기까지의 절차는 수많은 악행을 거쳐오면서 발전했다. 학살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불편하다. 강대국이라는 명목하에 반평화범죄,반인도주의 범죄,전쟁범죄, 인종청소 및 학살이라 일컫는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도 자기들은 도덕적으로 우월한것마냥 턱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자신들이 저지른 씻을수 없는 모든 범죄(학살) 앞에서도 당당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건 언론플레이가 큰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언론은 미국이 저지른 학살 앞에서는 관대하고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행위는 과도하게 부풀려 왜곡과 동시에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는것이라고 고발한다. 시민들은 언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론은 우리의 귀와 사고를 세뇌시키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1970년 노암 촘스키와 이 책의 저자중 한명이 집필한 '반 형멱의 폭력:대학살의 실상과' 에서는 학살을 크게 네가지로 나누고 있다. 미국 자신이 자행하거나 미국의 주요 이익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학살', 미국의 동맹이나 종속국이 수행한 '자비로운 학살',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사악한 학살'과 이것의 하부유형으로 '가공의 학살'이 있다. 이 내용과 맞물려 이 책도 진행되고 있다. 학살 앞에 건설,자비같은 단어가 붙는게 어찌 이렇게 속이 뒤틀리는지 모르겠다. 그 어떤 학살 앞에도 이런 단어는 붙여서는 안되는거 아닌가? 아무튼, 미국 정부가 이름 붙인것도 아닌데 괜히 그네들의 속이 보이는거 같아서 발끈한다. 

대표적인 예의 학살을 하나만 꼽고 이야기를 진행하자면 건설적인 학살의 예로 이라크 제재(와 침공)을 들 수 있다. 이라크,쿠웨이트전이 끝난후 이라크가 자신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는데 기인해 미국과 영국이 사이좋게 이라크를 묵사발로 만들어버린 경우다. 이들은 대량살상무기를 든게 아니다. 그것보다 더 끔찍한 짓거리를 저질렀다. 전쟁으로 무너져내려 있는 상태에서 재건을 위한 물자조달의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특히나 식수 재건 시스템의 발을 묶어버린게 인간에겐 제일 큰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물만으로도 일주일을 버틸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 조치로 인해 더 살아남을 수 있는 5만여명의 어린이들이 죽어나갔다니..어찌 분노하지 않을까. 무기로 쏴죽인다고만 해서 학살이 아니다. 미국은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수단을 끊어버림으로 인해 대량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근런데 더 웃긴건 모든 학살 앞에서, 그것이 기사화되거나 학살이라는 단어로 뿌리박힌건 찾아보기 힘들게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미국의 언론이다. 사망자는 몇십,최고 몇백만명이 되어도 은폐하거나 왜곡해서 보도하는. 이것은 세계 어느 언론이나 비슷한 문제인거 같다. 우리 나라도 비껴갈 수 없는.


이 책에서 보여지고 있는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았지만 학살의 종류(사악한 학살-다르푸르,코소보,르완다 자비로운 학살-이스라엘,크로아티아 가공의 학살-라차크 등, 이미 다른분의 리뷰에서 자세하게 언급이 되어있기에^^)나 미디어에 몇번의 숫자로 노출되었다는건 사실 따지고 보면 제일 중요한 사안은 아니다. 이것은 표면적인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것보다는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여전히 미국을 위시해 자행되고 있다는게 중요한 문제 아닐까? 그리고 이런 가혹행위와 수많은 희생자들을 초례하는 전쟁과 학살의 구체적인 대안방법이 없다는 것이 더 씁쓸한 일이다. 평화기구가 있으면 뭐하나. 그들도 강대국의 편이고 테러와 인총차별과 무분별한 살육은 오늘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w*****8 2011.08.18. 신고 공감 18 댓글 26
리뷰 총점 종이책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나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나" 내용보기
학살이라는 단어의 뜻을 국어사전에는 ‘가혹하게 마구 죽임’이라고 했다. 힘 있는 집단이 힘없는 집단을 마구 죽이기에 이 단어는 태생이 비극적이다. 내가 기억하는 학살도 다 비극으로 다가온다. 최근의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벌어졌던 학살이나, 이념 문제로 인해 생겨난 많은 양민학살 등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전 세계는 이런 학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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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이라는 단어의 뜻을 국어사전에는 ‘가혹하게 마구 죽임’이라고 했다.
힘 있는 집단이 힘없는 집단을 마구 죽이기에 이 단어는 태생이 비극적이다. 내가 기억하는 학살도 다 비극으로 다가온다. 최근의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벌어졌던 학살이나, 이념 문제로 인해 생겨난 많은 양민학살 등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전 세계는 이런 학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에 일어난 노르웨이 총기난사 학살사건의 범인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은 반무슬림, 반페미니즘, 반다문화주의, 우파 극단주의자의 모습을 시인했는데 놀랍게도 역사 속에 나타난 학살사건들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살의 정치학’은 노암 촌스키의 ‘반혁명의 폭력 : 대학살의 실상과 선전’이라는 책의 목차를 따라 학살을 4가지로 구분한다. 그리고 학살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의미를 풀어나간다. 묵직한 주제의 책이지만 감추어진 진리를 발견한다는 즐거움 속에서 찬찬히 읽어볼 수 있다.


1. 건설적인 학살

미국 자신이 자행하거나 미국의 주요 이익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대표적인 것이 이라크 침공이다. 저자는 지난 30년 동안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학살로 대이라크 경제제제를 꼽고 있다. 그 이유는 1949년 8월 제네바 회담 추가 의정서에서 민간인의 생존을 위해 보호해야할 필수적인 항목을 규정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투수단으로서 민간인을 굶주리게 하는 행위와 민간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항목에 대해서는 공격이나 파괴, 제거 등을 할 수 없다고 결의했는데 이 일에 가장 앞장 서야할 미국정부는 이 의정서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유롭게 이라크 경제제제를 취했고 그 결과 5세 이하의 유아 사망률이 1989년에 비해 두 배로 높아졌고 1990년대 말까지 50만 명의 어린이가 죽음을 당했다고 UNICEF와 세계보건기구가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UN 이라크 인도주의 문제 조정관이었던 데니스 할레데이(Denis Halliday)는 이와 같은 행위가 “학살행위”라며 비난하고 사임했다. 또한 그의 후임자 한스 폰 슈포넥도 이와 같은 행위는 UN 경제사회이사회가 정한 “국제 인도주의법과 인권법에 명백하게 위배된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미국은 정교한 방법으로 이라크 민간인들의 인명손실을 100만 명 이상으로 늘렸지만 미국의 언론은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범죄행위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했고 미국의 적과 미국이 선정한 공격대상에 대해서만 학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런 모순에 대하여 이 책은 투기디데스의 말을 인용하며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권리란 대등한 힘을 가진 상대들 사이에서만 들먹일 수 있을 뿐이다. 강한 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약한 자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2. 사악한 학살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학살로 정의한다.
대표적인 것이 다르푸르 사태다(수단의 정부군과 반군의 싸움으로 인해 150만 명 이상이 희생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수단의 아랍계 지배자와 아프리카계의 흑인 희생자들의 인종분규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미국과 유럽의 백인들과 언론이 만들어낸 거짓이라고 말하며 문제의 본질을 복합적인 원인에서 찾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물 부족과 농업생산의 감소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의 언론은 다르푸르의 분쟁을 ‘학살’로 규정했고 미국인의 3/4은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지지했다. 그 결과 서방국가의 관료들이나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 NGO들, “인권운동” 명망가들, 그리고 언론은 다르푸르 위기를 무슬림 아랍계 가해자가 흑인 아프리카계를 핍박하는 “학살”로 규정하는데 성공했고 따라서 다르푸르는 사악한 학살로 규정되었다. 이 성공은 미국이나 서방국가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가자지구 등에서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게 된다. 나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르완다 대학살 등의 전쟁에 대하여 우리는 왜곡된 진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역시 미국이나 NATO군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세르비아 인들을 악마로 만들어놓고 자신들의 공격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세르비아인들을 기소하고 처벌했다. 그러나 영국의 국방장관이었던 조지 로버트슨 조차 1999년 1월에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들에게 살해당한 사람보다 코소보 해방군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했다는 사실을 보면 승자 편에 섰던 미국이나 Nato의 군사적 개입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정의라는 이름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정의는 힘 있는 자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 힘의 원리를 완벽하게 보여준 것이 르완다 사태다. 우간다가 르완다애국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르완다를 침략했기에 내란쯤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이 책은 분명한 침략전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대리인 우간다와 르완다애국전선을 내세워 인근 4개국을 조종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은 이들의 침략에 대해서 어떤 비난과 정전도 요구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르완다애국전선을 지원한 미국의 계획은 1991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놀랍게 닮았다고 한다. 이때의 학습효과가 이라크 침공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3. 자비로운 학살
미국의 동맹이나 종속국이 수행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요한 하수인이자 대외원조의 수혜자다. 미국의 중동정책에 비상한 영향력을 가진 이스라엘은 타국의 영토를 자유롭게 침범하면서도 국제사회로 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배경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할 때 15,000 – 20,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과 난민을 살해했음에도 UN 안전보장이사회로부터 어떤 제제나 위협도 받지 않았다. 1984년 팔레스타인 난민캠프를 말끔하게 정리하는 갈릴리의 평화라는 대규모 작전을 벌였는데 이때 최소한 800명에서 3000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량살상은 학살행위’라는 결의안을 통과 시켰지만 언론은 이 사실을 다루지 않았다. 또한 이스라엘이 가자를 침공했을 때도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확고하게 지지하며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이스라엘의 권리를 언제나 지지할 것입니다” 라고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힘 있는 자의 논리를 비꼬아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하등인간인 아프가니스탄인과 이라크인 들에게 무슨 짓을 하든 면책 받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슨 짓을 하든 면책 받아야 한다.’ (163쪽)
하등인간을 개조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우리시대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자비로운 학살에 대하여 언급하며 그 뒤에는 항상 든든한 미국이 배경으로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4. 가공의 학살

학살의 참상을 자세하고 묘사하고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을 정당화한다.
1999년 1월 17일자 뉴욕 타임스는 “총상을 입거나 사지가 훼손된 알바니아계 주민 45명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섬뜩하게도 눈알이 도려내졌고 두개골이 함몰되었으며 시체 한 구는 목이 잘린 것”이라고 자세히 묘사했다. 이런 원색적인 표현은 전 세계의 이름 있는 지도자들의 원성과 규탄으로 이어졌지만 이것도 미국의 전쟁준비 조직인 유럽안보협력기구의 하부기관에서 만들어낸 정치적 조작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젊음의 한 때 유행했던 유머 하나를 떠올렸다.

아빠가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갔다. 아빠는 열탕에 들어가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열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들이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좋아?” “좋지~ 너도 들어오렴."
아들은 신나게 열탕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얼마나 뜨거웠을까? 놀란 아들이 탕을 나오면서 하는 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나!”

흔들리고 있지만 초강대국인 미국, UN, 전 세계의 유수한 언론사, 지식인들 그리고 NGO 단체등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가치에 대하여 이 책은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신나게 고발하고 폭로하며 진실을 찾으려는 자세는 마음에 와 닿지만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표지 글처럼 ‘우리 편이 저지른 가혹행위가 무죄라면 적이 저지른 학살도 무죄이다’ 이렇게 서로에게 면죄부를 주면 해결되는 것인가?


문득 에밀졸라와 드레퓌스 사건이 떠올랐다. 

1894년 11월 젊은 유대인 포병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넘겼다는 이유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악마의 섬에 유배 되었다. 2년 뒤에 프랑스 육군의 다른 장교가 진범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지만 군법회의는 그 증거를 묵살하고 진범을 만장일치로 무죄로 인정했다. 1898년 1월 저명한 소설가 에밀 졸라가 파리의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 라는 격렬한 공개서한을 발표하므로 인해 드레퓌스 사건은 공론화 되었고 결국은 진실이 밝혀지고 말았다. 
이 시대에도 그런 양심가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노암 촌스키도 그런 부류중의 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은 것도 그의 이름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고 지금도 그 진실을 수호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은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믿는다. 역사는 그들에 의해서 움직여 왔으니까…….
‘학살의 정치학’은 역사를 보는 소수의 입장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죽었다 해도 많은 이유와 아픔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수백만의 사람이 학살을 당하고 죽은 이유에 대하여 한 가지 입장으로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논쟁이 필요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소수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고 다수가 자신을 점검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성숙한 나라, 성숙한 사회라는 생각을 한다. 늘 소수는 의롭고 진실의 편에 설 것이라는 것도 편견이겠지만 최소한 이 책은 소수의 생각이 옳다고 손들어줄 수 있다.
 



YES마니아 : 로얄 j*****r 2011.07.29. 신고 공감 12 댓글 25
리뷰 총점 종이책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는 것, 그래서 진실이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는 것, 그래서 진실이다." 내용보기
학살, 학살이라는 단어는 듣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온몸을 전율시킨다. 또한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결코 비켜나갈 수 없는 일 이기도 하다. 일제 무단강점기는 차치하고라도,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학살이 이루어졌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나타나는 학살 대부분을 북한이 전쟁에 패하여 쫓겨가면서 저지른 것으로 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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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학살이라는 단어는 듣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온몸을 전율시킨다. 또한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결코 비켜나갈 수 없는 일 이기도 하다. 일제 무단강점기는 차치하고라도,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학살이 이루어졌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나타나는 학살 대부분을 북한이 전쟁에 패하여 쫓겨가면서 저지른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북한뿐만 아니라, 아군이나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도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제주 4.3학살이나, 노근리학살, 광주학살이 그 대표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학살이 역사의 이면에 숨겨져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일차적으로 저지른 자들의 은폐와 왜곡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것은 철저히 부인하고, 은폐하며, 적들이 저지른 것은 왜곡과 과장을 하여 미디어를 동원하여 선전하며, 국민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에 동원된 미디어들도 그 비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어쩌면 미디어들이 추구하는 이익이라는 것이, 권력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노암 촘스키가 쓴, 이 책 [학살의 정치학]은 그 동안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 아니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알려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부터 2009년 사이 미국은 최소한 29개국에서 극도로 심각한 군사적 개입을 실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개입을 한 명분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투자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 이라고 공개적으로 표명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높은 생활수준- 자유, 민주화, 인권 등 -을 희망하는 제3세계 대중의 자연스런 요구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 이었다고 밝힌 적은 더욱이나 없었다. 그들이 언제나 동원하는 수사는 국가안보였다고 한다. 냉전체제에서는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대중과 국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그 후에는 자신들이 공격해야 할 대상을 악의 화신으로 만들고, 미국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므로 국제법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모든 미디어와 선전수단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일반대중들도 미국이 벌이는 범죄나 학살에 대해서는 무한한 포용력을 갖게 되었다고 이 책의 저자인 노암 촘스키는 말한다.

 

일찍이 노암 촘스키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인 범죄행위를 연구한 책 [반혁명의 폭력]에서 학살을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건설적인 학살로 이는 미국 자신이 자행하거나, 미국의 주요이익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경우이고, 두번째 자비로운 학살은 미국의 동맹이나 종속국이 행하는 학살이다. 나머지 사악한 학살과 가공할 학살은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은 무시하고 은폐하기에 급급하지만, 적대국이 저지른 학살은 대대적으로 쟁점화 하고 비난한다.

 

이들이 벌이는 반평화범죄, 반인도주의범죄, 전쟁범죄, 인종청소 및 학살의 역사는 제국주의적 설계의 중심에 인종차별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희생자는 언제나 유색인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는 자신들은 우월하며 비유럽인들은 열등하다는 편견에 빠진 유럽인들이 지역마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되어 온 것은, 그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인들의 시각을 통렬하게 반박하고 있다. 노암 촘스키 또한 그들이 유색인들에게 저지르는 학살의 진실을 통하여, 그들의 위선과 이중잣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들, 미국과 서구세력이 건설적인 학살이라고 부르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와 침공이다. 저자는 지난 30년간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은, 1990년 걸프전 이후 실시된 대이라크 경제제재라고 말한다.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실시된 이러한 제재는 걸프전때 파괴된 수도, 위생, 전기공급시스템을 복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정부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미국은 이런 봉쇄의 결과가 질병의 창궐과 유아사망률의 증가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았고, 실제로 역사를 통틀어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라크 인들이 이 제재로 죽었다고 한다. 어린이 50만을 포함하여 추정사망자수가 80만에 이르는 이 봉쇄조치를 놓고, 미국은 UN대사의 입을 빌어 치를만한 가치가 있는 대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이나 서방세계의 어느 누구도 이런 발언에 대해 비난조차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방관자가 아니라 집행자가 되는 경우, 희생자수가 아무리 많아도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며, 그들은 사후에라도 그것을 책임지려는 어떠한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라크침공은 13년간의 경제제재보다도 더욱 심각한 100만명 이상의 사람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군의 인명손실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정치인, 미디어, 지식인사회 등 미국의 기득권집단과 서방언론은 이라크 민간인 피해에 대해 경시하는 자세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미국언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서방의 언론들이 이러한 학살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그들 역시 인종차별주의적 제국주의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들은 또 자비로운 학살로 유고연방 해체과정에서의 크로아티아 폭풍작전, 아프카니스탄에서4500명을 학살하고 묻어버린 다슈트--레이리 사막 학살사건, 터키의 쿠르드족 학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 그리고 중남미에서 수십년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는 테러정권이 벌인 학살 등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역시 자비로운 학살의 백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 아닐까 싶다.

 

미국의 중요한 하수인이자 대외원조의 수혜자 이스라엘, 그들은 타국의 영토를 침범하면서도 보호자로부터 야단을 맞거나 경멸 받지 않으며, 어떤 정책적인 견제도 받지 않을 정도로 국제관계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하여 약 2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국제사회로부터 어떤 제재나 비난을 받지 않았으며, 2006년 재차 침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비무장 여성, 어린이, 노약자가 수용되어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사브라와 샤틸리에 대한 잔혹한 공격은 이 전쟁의 결정판이었다고 한다. 또한 2008년 가자지구 침공은 초반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살육이었음에도, UN은 진상조사를 거부하고, 미국상하 양원은 만장일치로 이스라엘을 지지했으며, 서방언론들은 학살이라 거의 부르지도 않았다. 학살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은 테러리스트, 이스라엘은 자위행위, 미국과 서방언론이 그 학살을 보는 관점이다.

 

사악한 학살과 가공의 학살은 또 다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똑 같은 학살이지만 건설적인 학살이나 자비로운 학살은 학살이라 불리지도 않지만, 대부분 정확한 진상이 은폐되고 감추어진다. 서방언론에서 제대로 다루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악한 학살이나 가공할 학살은 인류에 대한 죄악, 인종청소 등으로 불리며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다만 은폐되고 감추어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건설적인 학살에서는 학살 그 자체가 감추어지고 은폐되지만, 사악한 학살에서는 진실이 은폐되고 가해자가 감추어 진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다르다.

 

사람들은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전쟁 - 보스니아전쟁, 코소보전쟁 등 -들이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전쟁 중 가장 왜곡되게 알려진 경우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아프리카 호수지역에서 더 참혹한 침공과 반란과 내전이 있었고, 더 심하게 훼손되고 왜곡된 진실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르완다 사태는 흔히 후투족이 소수민족인 투치족을 살육한 것으로 서방세계에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방세계의 주요 부문이 가해자와 희생자를 완전히 뒤바꾼 사기극 이라고 한다. 우간다가 사실은 자기들의 하급부대인 르완다애국전선을 도와서 르완다를 침공하지만, 이들은 이미 침공 전부터 미국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지원을 원없이 받을수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투치족인 르완다애국전선이 지나가는 길에는 참혹한 시체만이 남아있었다. 희생자가 수백만이 넘는 학살극이 밝혀지면서 UN이나 르완다인권침해 국제조사위원회, 르완다범죄처리 국제재판소등에서 조사를 하였지만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은 기구에서 추방되고, 그들의 증언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고 한다. 서방언론이나 영향력 있는 국제 NGO들도 그들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 이었다.

 

2011년 현재,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상 어디에선가는 우리들이 모르는 학살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학살이란 단어의 사용 이면에는 거대한 정치적 편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디어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누가 미국의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를 알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미디어나 지식인뿐만 아니라 서구적인 NGO들도 미국과 서방의 노선을 추종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미국 자신이나 그들의 추종자가 대규모 잔혹범죄를 저지르면 그 잔혹행위는 건설적인 것이 되고, 희생자들은 우리가 분노하고 관심을 기울일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가혹행위가 미국의 적이거나 무너뜨려야 할 대상국가의 소행이라면, 그 잔혹행위는 사악한 것이 되고 희생자는 우리가 주목하고 동정하며, 대중적 연대감을 보여줄 가치 있는 대상이 된다. 이런 잔혹행위를 무시할지, 아니면 비난할지를 구별하는 능력이 그 행위자가 적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학살의 정치학이라고 한다.

 

책 표지에 쓰여있는 문구가 눈을 아프게 찔러온다. 우리편이 저지른 가혹행위가 무죄라면, 적이 저지른 학살도 무죄이다.



k*****1 2011.07.29. 신고 공감 11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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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이면-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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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변한다. 아니 변했다. 냉전이 종식되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 책에서는 미국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는 파헤치고 있다. 그들은 진정 세계 평화의 수호자이며, 세계 경찰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무법자인가? 분명 과거에는 명분과 대적할 적이 있었다. 과거는 공산주의라는 큰 악몽과 맞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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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변한다. 아니 변했다. 냉전이 종식되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 책에서는 미국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는 파헤치고 있다. 그들은 진정 세계 평화의 수호자이며, 세계 경찰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무법자인가? 분명 과거에는 명분과 대적할 적이 있었다. 과거는 공산주의라는 큰 악몽과 맞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지금 공산주의는 거의 퇴색되어버렸기에, 미국에 대적할 상대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는 전쟁산업과 자원에 대한 욕구로 세상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와 싸우고, 이런 싸움들을 지원한다. 미국자신을 위해서.

 

과연 국제정의는 무얼까?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를 한번 생각해본다. 역사적으로 많은 백인들의 범죄행위는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누구를 보호해야 한다는 보호책임과 인도주의적 개입은 전지구적 질서와 불개입의 규범을 무시한다. 이스라엘의 공격할 수 있는 주권, 그러면 주변 국들은 침략당할 주권만 있는가? 미국의 비대칭적 지위는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다. 또 미국과 현지 군부엘리트와 과거의 식민지 매판자본의 결합으로 자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미국 국가안보논리, 그러나 미국을 공격할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미국의 공격의 대상은 악의 화신이다. 미국은 도덕적 우월한 나라이면 국제법상 예외인가? 침략범죄를 판결대상에서 제외하고, 위장 중립, 백인의 천부적인 우월성, 중요한 것은 누가 힘을 갖고 있는가? 이다.

 

이라크는 왜? 우리들의 안방에 생중계된 최초의 전쟁, 과연 이것이 전쟁인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냥 침략 같았다. 너무 일방적인 힘의 차이로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막강한 이라크의 군대와 화학무기는 없었다. 미국의 화려한 전쟁쇼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다. 이런 화려한 쇼 뒤에는 전략폭격으로 인한 사회기반시설을 파괴로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미디어의 편견, 우리는 일방적으로 미국의 방송이 내뱉는 말들을 의식적, 무의식적 받아들이기만 한다. 가끔 나오는 알자리라방송은 거의 무시한다. 지들 편이니 저런 이야기를 하지, 그럼 우리는 미국편이란 말인가?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왜일까? 우리의 우방에서 출발하여 오랜 군부지배기간에 세뇌되어왔다. 그리고 미국의 문화에 중독된 결과일 것이다. 미국의 정의의 사도이며,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슈퍼맨이다. 그럼 다른 나라들은 다 악당이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란 것이다. 석유가 풍부한 이 지역이 미국에게 필요하기 때문이고, 미국은 힘을 가졌다. 그러기에 명분이 필요했고, 그 명분은 사악한 화학무기였다. 그리고 조용히 점령했고, 전후 복구사업의 대부분의 이익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기업들이 가져갔다. 

 

숨겨진 아프리카의 비극 다르푸르,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의 인도주의와 인권파국으로 알려지지 않는 학살이다. 흔히 아랍계 지배자와 아프리카 흑인 희생자간의 인종분규로 알려져 있으나, 환경문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원인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생긴 생태위기로 촉발된 물부족과 농업생산의 감소, 토지문제 등에 기인한 문제이다.

 

르완다와 우간다. 우간다의 무세베이와 르완다의 키가메 과연 이들은 그들의 종족과 나라를 해방시킨 구원자인가 아니면 살인자인가?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르완다애국전선이 살육의 향연을 주도했고, 그 뒤에 있는 미국과 프랑스가 있었다. 과연 내란인가 침략전쟁인가 무세베니와 르완다애국전전은 미국의 이익에 봉사한다. 전도된 가해자 희생자 관계 구조는 미국측의 선전을 충실히 전달한 언론에 의해서 만들어져 갔다. 국제적 인도주의 법의 심각한 위반 혐의로 르완다 범죄처리 국제재판소에 의해 기소된 사람은 후투족 뿐이었다. 그리고 필릴구체비치의 카가메에 대한 평가 그는 학살자가 아니라 떠오르는 별이다. 그러나 희생자들을 보라 누가 얼마나 죽고, 희생을 당했는지? 역사는 진실을 말한다. 과연 르완다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가 터져 버린 것이다. 미국의 기본정책으로 우간다의 자원전쟁으로 착취와 재원조달을 위해서 전시경제 체제가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나토와 세르비아의 인종청소로 알려진 그곳, 하지만, 이것은 보스니아 무슬림선전가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이 이면에 크로아티아 폭풍작전, 크로아티아 영토 내 세르비아인 학살은 치밀한 대규모의 인종청소(학살)이었다. 과연 우리가 본 세르비아의 만행은 어디서 벌어지고, 왜 일어났는지 우리는 관심이 없다. 과연 세르비아인들은 학살자였나, 희생자였나.

 

아프가니스탄, 발견된 대형무덤 탈레반전사들의 죽음, 누가 그들을 대량학살했는가? 적이면 다 죽여도 되는가? 미국이 깊이 관여한 사건이기에 자비로운 숙청이나 건설적인 학살의 언저리로 분류로 거의 지면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쿠르드족, 이라크와 터키에서의 대규모 탄압, 인쇄매체는 어떻게 다루는가? 미국의 공식적인 적인 사담후세인 정권이 쿠르드족에게 가한 탄압은 의미 있는 것이지만, 미국의 핵심동맹이자 나토회원국인 터키가 쿠르드족에게 가한 탄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동티모르의 리키차 살육사건, 인도네시아의 침공 그러나 동티모르는 바쁜 세계의 주목을 받을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미국은 중미에서 수십년 동안 테러정권을 지원했고, 이들은 미국의 지원으로 마야원주민을 근절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미국의 중요한 하수인, 대외원조의 수혜자이다. 이스라엘의 침략과 전쟁범죄는 누가 처벌하고 막는가? 아무도 없다. 자유세계의 미디어는 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논리만을 반복적으로 전달하는가? 그 뒤에는 미국이 있다. 이스라엘의 변명, 이스라엘 국방군은 민간인과 민간목표와 군사목표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을 말하는 언론은 적다. 하지만, 희생자를 보라. 그것도 민간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또 다른 변명 이스라엘의 자위권, 그럼 팔레스타인이자 그 주변 나라의 자위권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보호책임, 이스라엘은 테러로부터 자신을 정당하게 방어했다는 논리, 그럼 왜 테러를 하게 되었을까? 힘센 놈과 힘 없는 자의 싸움은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까. 이스라엘은 진실과 도덕을 압도하는 훌륭한 선전체계 덕분에 하등인간을 자유롭게 죽이고 인종적인 청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이스라엘은 국제적인 제재를 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

 

매체에서 학살이라는 단어는 증가했지만, 단어 사용에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이 만들어 낸 거대한 불평등과 면책문화가 만들어 낸 비극이다. 자신의 정권과 체제가 제 3세계 민중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이것이 학살의 정치이다. 우리 편이 했던, 적이 했던 범죄행위는 다 범죄행위이다.

 

여기 언급된 많은 사건들이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주류 매체나 언론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대부분 미국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우매하다. 이 말이 맞는 말인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매체가 내뱉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것은 그런 것이다.  가 없다. 귀찮다. 자신들의 일생생활만으로 벅차고 힘들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이 책의 한 장을 장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 매체의 무비판적 수용, 간단히 역사책을 펼쳐만 봐도 누가 가해자인지, 어떤 이유로 이런 분쟁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순간의 사건으로 점화된 학살이 아니라 불만과 대립 그리고 증오가 만들어낸 작품인 것이다. 티벳에 대한 우리의 잣대, 우리는 국익이라는 이름아래 침묵하는가? 우리의 과거는 어땠을까? 우리도 이들 같은 시대가 있었다.

 

* 르완다에 대해서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걸, 제발 전해주세요!

고통은 너를 삼키지 못한다. 등을 읽어보시면 좋을듯

 



YES마니아 : 골드 p*******t 2011.10.06. 신고 공감 10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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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논리에 합당한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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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 시절(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반공교육이란걸받았던 기억이 난다.   북한 공산당은 사악한 여우 혹은 귀신처럼 잔인하고 무서운 것들,미국은 우리를 잘 살게 해주고 우리를 도와준 우리가 고마워해야 하는 나라...그 어릴적 교육이 얼마나 뿌리 깊었던지 왠만해선 미국에 대한 나의 생각이별로 달라지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런 저런 책들과 역사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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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 시절(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반공교육이란걸
받았던 기억이 난다.   북한 공산당은 사악한 여우 혹은 귀신처럼 잔인하고 무서운 것들,
미국은 우리를 잘 살게 해주고 우리를 도와준 우리가 고마워해야 하는 나라...
그 어릴적 교육이 얼마나 뿌리 깊었던지 왠만해선 미국에 대한 나의 생각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책들과 역사를 통해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는 척 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침략을, 살인을 눈감아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좀 더 앞당기기 위해 원자 폭탄을 터트렸고
북위 38도선을 경계 삼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만 35년이란 긴 시간동안 조선인들이 얼마나 독립과 자유를 기다렸는지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는지는 이들은 관심조차 없었고,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자기 나라의 세력을 넓히느냐만이 관심 대상이었다.  그들에 의한 잔인한 행동은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냉전시대가 끝나고 누가 적인지 누가 우리편인지 알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전쟁을 통해 많은 이익을 거머쥔 미국에게 냉전시대의 종식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을 통해 고통받고 아파한 사람들이 지구촌 곳곳에 있는 반면 그것을 발판 삼아 막대한 부를 움켜줜 나라도 있었다.  
인자한 얼굴을 하고 무엇이든 다 도와줄 것처럼 웃음짓는 미소 다른 편에
사악한 칼날과 독을 품고 있는 나라...

그들은 비대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책을 수립하고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미국의 우위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낮은 생활수준을 즉각적으로 개선시키려는 대중의 욕구 증가로 인한
극도로 심각한 군사적 개입을 실행했다.  
과연 누구에게 이로운 군사적 개입인지, 누구를 위해 살인을 하고 그 살인을 눈감아 주는 것인지...

그들은 참으로 다양한 학살을 자행한다.
건설적인 학살, 자비로운 학살, 사악한 학살, 가공의 학살..
듣는것 만으로도 충분히 소름끼치는 행위들...

학살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  :  가혹하게 마구 죽임...
총으로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학살은 아니다.
그 학살을 눈감아 주고 뒤에서 부추기는 것도 학살이라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최고의 자리에서 다른 나라들을 움켜쥐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웃는 얼굴로
총과 칼과 무기를 마구 휘두를 그런 나라...
그들은 이라크, 코소보, 르완다와 콩고 공화국등 많은 나라들을 쥐고 흔든다.

21세기가 되어서도 미국과 미국의 동맹, 그리고 미국의 하수인들은...
거대한 불평등이 만들어낸 면책의 문화를 여전히 즐기고 있다.
이 면책의 특권은 그들의 도덕적 우월성이나 정의로운 행동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우월한 경제적, 정치적 힘에서 나온 것이다 (page 225)

예전 작은 아이가 유치원 다닐때 했던 말이 기억 난다.
"엄마....  미국은 좋은 나라고 북한은 나쁜 나라예요?"
편가르기식으로 다른 나라를 이야기 하는 것은 웃기지만 그때는 그런 말을 했었던것 같다.
이 세상에는 나쁜 나라 좋은(?) 나라가 있는게 아니고 우리나라에게 이익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생각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고...
오늘 우리에게 좋은(?) 나라였던 나라도... 언제 뒤통수 칠지는 아무도 모르는것 같다고...


아이는 물론...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조금 더 크고 나면 나라간의 힘과 이익에 대해서 알게 될거라고
그때를 위해서 나쁜나라 좋은 나라에 대한 선입견은 없어야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의 머릿속에선 또 어떤 나라를 무관심 혹은 침묵으로 학살에 동조할지...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칼날을 휘둘렀다는 생각을 했다..

YES마니아 : 로얄 k*****3 2011.08.21. 신고 공감 8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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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4] 정치수단으로서 학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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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의 <반(反)혁명의 폭력>은 학살을 “건설적인 학살”, “자비로운 학살”, “사악한 학살”, “가공의 학살”(사악한 학살의 하부유형)이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미국 자신이 자행하거나 미국의 주요 이익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건설적인 학살, 미국의 동맹이나 종속국이 수행한 것은 자비로운 학살,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것은 사악한 학살과 가공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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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촘스키의 ()혁명의 폭력은 학살을 건설적인 학살”, “자비로운 학살”, “사악한 학살”, “가공의 학살”(사악한 학살의 하부유형)이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미국 자신이 자행하거나 미국의 주요 이익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건설적인 학살, 미국의 동맹이나 종속국이 수행한 것은 자비로운 학살,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것은 사악한 학살과 가공의 학살이다.1)

 

미있는 것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침공범죄가 국제적 범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모든 악의 집합체로서 다른 전쟁범죄와 구분되는 최고의 범죄2)라고 하면서도 1991년 이후 13년간 지속된 미국과 영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대량사망은 인도주의적인 전쟁과 보호책임이라는 당위성에 의해 치장되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2003 3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라크 민간인의 인명손실은 98,000명에서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인명손실의 절대 다수가 폭력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임이 밝혀졌지만 미디어와 지식인들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침공-전쟁의 결과라는 사실도 인정한 적이 거의 없다3)는 점에서도 이러한 미국과 그 동맹국의 이중잣대는 잘 드러나 있다.

 

디어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 ‘다르푸르 사태의 경우에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크리스토프가 아예 처음부터다르푸르  (사태)“’수단의 아랍계 지배층아프리카계 흑인 수단인사이의 갈등으로 진단4)하였는데, 이는 분쟁의 과정에서 미디어들이 계속해서 잘못된 관점을 주입하여 벌어진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 ‘다르푸르 사태근본원인을 살펴보면, 최소한 부분적으로 기후변화 때문에 생긴 생태위기, () 물 부족과 농업생산의 감소가 (폭력사태를) 촉발5)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놓는 경우도 있다. ‘르완다 사태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학살의 정치학에서는 기본의 상식과 달리 미국과 그 대리인인 우간다의 조종을 받아 소수부족인 투치족이 다수부족인 후투족을 학살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처럼 기존의 상식에 따라 다수부족인 후투족이 소수부족인 투치족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책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하지만 소수부족인 투치족을 학살하였다는 다수부족인 후투족이 정권도, 재산도, 심지어 목숨마저 빼앗겼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전범으로 재판에 선 후투족 출신 고위장교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도 소수부족인 투치족이 다수부족인 후투족을 학살했다는 입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따라서 보다 확실한 증거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이 책의 주장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며, 이는 곧 미국과 그 동맹국의 영향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받은, 미디어들이 진실을 왜곡했다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러한 점을 볼 때, 학살도 전쟁처럼 정치의 또 다른 수단인 셈이다. 아마 번역자도 그렇기에 학살의 유형과 사례를 설명하는 이 책의 제목을학살의 정치학이라고 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슬며시 불편해옴을 느꼈다. 진실을 위한 폭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수의견에 대한 존중이 소수는 늘 의롭고 진실되다.’라는 잘못된 편견과 오만에 빠져 타락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 순간의 방심으로 흙탕물을 뒤집어 쓰면 그나마 진실을 폭로하는 역할조차 못할 수도 있으니까.

결국 무기력한 우리들은 그저 이 책 표지에 쓰인 대로 우리 편이 저지른 가혹행위가 무죄라면 적이 저지른 학살도 무죄이다.라는 말만 되내이며 진실을 위한 소중한 불씨를 보존하였다고 자위할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뎌지겠지만, 아프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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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암 촘스키 外, <학살의 정치학>, 박종일 옮김, (인간사랑, 2011), pp. 27~28

2) 노암 촘스키 外, 앞의 책, p. 37

3) 노암 촘스키 外, 앞의 책, pp. 65~66

4) 노암 촘스키 外, 앞의 책, p. 80

5) 노암 촘스키 外, 앞의 책, p. 82

w******f 2011.08.04. 신고 공감 7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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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일어난 많은 인재, 누구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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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 이 글은 그 관점에 따라 얼마나 상황이 달리 인식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아랍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빈 라덴과 다른 세계에서 생각하는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다르다. 세계에서 그를 보는 관점은 악의 화신이다. 테러의 원흉이고, 모든 인류의 공적이다. 그런데 아랍계에서 과연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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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 이 글은 그 관점에 따라 얼마나 상황이 달리 인식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아랍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빈 라덴과 다른 세계에서 생각하는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다르다. 세계에서 그를 보는 관점은 악의 화신이다. 테러의 원흉이고, 모든 인류의 공적이다. 그런데 아랍계에서 과연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어 주는 영웅이 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우리에겐 왜 빈 라덴이 악한 존재로만 인식될까? 미국과 아랍 둘 중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이 옅은 세계의 사람들도 빈 라덴이라고 하면 테러리스트로만 분류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책은 그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한다.

약자에 대한 증오는 미국의 경제력과 교묘한 정치적 선전 탓이다. 그리고 그 일에 동참한 미국의 미디어 세력과 동참한 각국의 이권의 문제들이 교묘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인 선전과 교묘한 여론 형성은 미국이 행하는 모든 것은 정당화 되고, 그 반대편에 선 자들은 어떠한 일이라도 악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너무 간과한 채 주어지는 왜곡된 정보에 휩쓸려 판단을 하고 있다. 지금 세계에서 행해지는 인간들에 의한 많은 학살의 현장, 진실이 너무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과 미국의 하수인은 오랫동안 여러 차례 침공행위를 자행하면서도 완벽한 면죄부를 받아왔고, 이라크 침공에서도 미국과 미국의 제일 하수인이 최고의 국제범죄와 그것에 이어질 대량 잔혹행위의 범죄행위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국제적 정의’가 이런 원칙에는 적용되지 않는 -그리고 기득권 미디어와 지식인들이 이를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도가 힘 있는 자의 필요에 멋지게 순응하고 있는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본문 속에 나오는 이 한 단락의 글은 이 책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잘 전해 준다. 학살의 현장에서 대한 보다 바른 시각을 원하고, 그것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잘 드러난 글이다.

작가는 많은 예들을 제공한다. 멀리로는 월남전부터 가까이는 이라크전,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살의 현장을 제공한다. 그것이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국가들이 사주하고,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무고한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강대국이 벌인 반평화 범죄, 반인도주의 범죄, 전쟁 범죄, 인종 청소 및 학살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일은 제국주의적 설계를 바탕으로 하여, 중심에는 인종 차별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국주의적 설계의 중심에는 항상 백인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의 희생자는 언제나 유색인이었다. 서반구 세력이 수십 년에 걸쳐 원주민을 청소할 때 도덕적으로 각성되었다는 기독교 세계 내부로부터의 반대는 미미했다. 이러한 그들의 논리가 현재의 상황에도 지속되고 있는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백인의 천부적인 우월성에 입각한 그들의 사고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고가 숱한 유색인들을 학살하고도 스스로 정당성을 획득하는 그들의 논리에 바탕이 되고 있다. 그리고 시대가 흘러가면서도 그 사고는 변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의 우월의 논리가 무수한 인간들의 생명을 탐했다. 그것이 지금도 나타나고 있고, 그들이 우월한 자들의 입장에 있는 동안은 지속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일들은 군주국가의 논리를 적용시키면 될 듯하다.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군주의 논리가 정당화 된다. 군주는 비교적 폭력적이라도 신의 능력을 입었다고 생각하기에 누가 도전을 할 수가 없다. 이처럼 경제력과 무력을 갖춘 우월주의 사상이 가득한 기득권자들의 무례한 사고가 정당화되고, 그들의 무리한 학살의 행위도 정당화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역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역지사지하여 약소국의 입장에서, 제삼국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각에는 우월주의에 빠진 자들의 범죄적인 행위가 너무나 참혹하게 다가온다. 그것을 그는 고발하고자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광주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잘 안다. 기득권의 정치세력들이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력을 행사하고 그로인해 무고한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에는 폭도들을 징벌한 것으로 미화되었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민주화 정부를 거치면서 그 사건의 현장인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고, 폭도들로 몰렸던 그들은 민주 투사로 명예회복을 했다. 그 명예회복이 세상에서 사라진 그들에게 얼마나 보상이 될런 지는 모르지만,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자명한 일이라 보여 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위 광주가 문제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일 세상이 변하여 백인들이 몰락하고 유색인종들이 세계에서 우위에 접했을 때, 위의 내용들이 어떻게 반전되어 어떠한 상황으로 발전할까? 물론 그 당시의 집권 논리에 따라 또 국지적으로 상황들은 전개되겠지만, 가진 자들이 스스로를 절제하지 않은 한 역의 논리가 전개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존엄성 문제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이다. 그러한 사실이 망각된 전쟁과 학살의 정당화는 어떤 경우에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진 자의 논리에서 비롯된 많은 전쟁 그로인해 죽어간 많은 사람들, 도덕도 기득권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건설적인 학살, 사악한 학살, 자비로운 학살, 가공의 학살이라는 제명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그 사실들의 실상을 제공한다.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으로 바라로는 학살의 현장을 제공한다. 물론 어느 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늘 양면성을 지닌 입장에서 인간의 생명을 운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일깨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잔인했던 현장을 목격하면서 가슴 아픈 시간을 지녔다.



j****3 2011.08.20. 신고 공감 6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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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정치학...방조하는 언론의 추악함을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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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권리란 대등한 힘을 가진 상대들 사이에서만 들먹일 수 있을 뿐이다. 강한 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약한 자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투키디데스-대규모의 학살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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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권리란 대등한 힘을 가진 상대들 사이에서만 들먹일 수 있을 뿐이다. 강한 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약한 자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투키디데스-

대규모의 학살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자행해 왔던 학살은 부지기수였고, 인간의 역사는 살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성의 입구를 봉쇄해 성 안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거나 불을 질러 아비규환을 만들거나 한 마을 전체를 도륙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 살륙의 광분이 휩쓸었던 때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떤 아픔도,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통절감이라도 느껴야 하건만 그런 기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학살을 하고서도 이리 당당한 것은 위장된 명분의 정당성 때문이며 단순한 광기에 의해서라기보단 보이지 않는 손의 전략적 지원이 다각도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살륙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배제되거나 증폭되며 대량 살상은 목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진행된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영혼의 불감증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학살의 정치학'은 학살의 현재적 상황과 이를 중심으로 정교하게 짜여진 그물망이 구조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전세계의 경찰 국가를 자임하며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치를 높이기 위해 미국이 전방위적으로 어떤 행보를 보이는지 노암 촘스키와 에드워드 S.허먼, 데이비드 페터슨은 상세하게 일러준다. 특히 이 책에서 3명의 공저자가 보여주려는 것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행태에 언론이 직간접적으로 어떻게 관여되어 있으며 어떤 형태의 편향적 기사로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이다. 즉, 이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한 고발임과 동시에 그들의 행위를 교묘하게 덧칠하여 다른 이미지로 변조하고 방조한 언론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질타이다 .

현지 정세를 알 수 없는 일반인들이 가치 판단를 내릴 수 있는 실제적인 근거는 언론의 보도 자료이다. 그 보도 자료를 믿고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 자료에 대한 암묵적 신뢰를 나타내며 이는 언론의 근본적 기능에 대한 신뢰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론이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편파 왜곡까지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직무 유기이며 직권 남용이다.

그런 행태가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언론사의 대주주가 기득권 부류에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므로 기업의 이윤에 맞추어 기사는 일정한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으며 세계 정세의  판도에 따라 정치적 편향성을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미국의 이익에 맞춰 실리는 기사들은 사람들의 판단을 오도한다. 현재 미국내 미디어는 학살에 관한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사보다는 자국의 정책에 따라 취합하여 선택된 기사를 싣고 있다. 이 책의 공저자들은 이처럼 추악한 미디어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라 일러준다.

'학살의 정치학'은 건설적인 학살과 사악한 학살, 몇 가지 자비로운 학살과 가공의 학살, 이렇게 4 부류의 학살로 나뉘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학살을 나누는 기준은 전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이다. 따라서 살해된 사람의 수의 많고 적음은 별개의 문제로 치부되고, 중요한 것은 단 몇 천명이라도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면 기사거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 기사는 과장과 왜곡을 거쳐 신문지면에 올려지게 되며 일거에 주목을 받는다. 학살 현장도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실리지만 살륙의 회오리 바람이 휩쓸고 간 현장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기사에 실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 설사 실린다 해도 몇 줄로 요약돼 실리며 기사로서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미디어는 이제 미국의 신실한 대변인이 되어버렸다.

아울러 이 책에서는 국제 역학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조명해 준다. 국제 질서의 수호라는 명분하에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유엔의 최대 지원국이란 힘을 동원해 유엔의 실질적 주인으로서 전세계를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그리하여 이제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유엔이 유엔다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건 그나마 미국이 동의를 했을 때 뿐이다.

가치중립적이지 못한 기사는 기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 언론의 힘은 사실적인 보도와 진실의 추구에서 나오는 것이지 화려하게 치장된 거짓글로부터 기인할 수는 없다. 그런 사실을 언론인들이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언론은 변질되었고 그들의 눈에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인 죽은 사람들은 자신들과는 별개의 종이 되어버렸다.


타국의 한낱으로 치부되는 이름없는 죽은 자를 향한 관심이 사라질 때 언론은 이미 중환자와 다름없게 된다. 만약 언론이 더 나아가 그들을 마치 없었던 사람인양 치부할 때 언론이 회생할 수 있는 길은 미로가 될지 모른다. 펜의 힘이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이 얼마나 무섭고도 무거운 말인지 이 책은 내게 떠올리게 한다.



d*********2 2011.08.27. 신고 공감 5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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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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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에서 나온 ‘학살의 정치학(The Politics of Genocide)’을 보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데다가 ‘학살의 정치학’을 번역한 박종일님이 번역을 맡은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의 ‘벌거벗은 제국주의(Naked Imperialism)’, 와카쿠와 미도리(若桑みどり)의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존 벨라미 포스터와 몇 명의 저자가 쓴 ‘생태논의의 최전선’등의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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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에서 나온 ‘학살의 정치학(The Politics of Genocide)’을 보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데다가 ‘학살의 정치학’을 번역한 박종일님이 번역을 맡은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의 ‘벌거벗은 제국주의(Naked Imperialism)’, 와카쿠와 미도리(若桑みどり)의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존 벨라미 포스터와 몇 명의 저자가 쓴 ‘생태논의의 최전선’등의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포스터의 분류에 따르면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이다. ‘생태논의의 최전선’의 한 챕터인 석유 정점과 에너지 제국주의라는 글에서 포스터는 “미국의 에너지 제국주의는 이미 전쟁확대로 귀결되고 있다.”는 말을 했다.(117 페이지) 한편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에 의하면 전쟁은 여성의 예속에 기초를 둔 가부장적인 지배 모델을 유지하기 위한 폭력 장치이다. 미도리에 의하면 전쟁은 인류 역사의 어느 시기에 사적 소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흔히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군산복합체(의 나라)라는 말을 연상한다. 그것은 막대한 이윤을 취하는 괴물(‘침묵의 봄’의 저자인 레이첼 카슨은 “이윤과 생산의 신들”이라는 표현을 썼다.)로 전쟁을 부추기는 실체이다. 미국의 엔진이 전쟁과 시장이니 군산복합체는 전쟁 수행의 주체와 시장의 한 축이 결합된 셈이다. 미도리는 “부지런히 아이를 낳는 여자. 부지런히 죽이는 국가'라는 말로 젠더 분업과 그에 기반을 둔 전쟁을 리얼하게 표현했다. ‘학살의 정치학’.. 노암 촘스키, 에드워드 허먼, 데이비드 페터슨이 함께 쓴 이 심상치 않은 책이 말하는 학살이란 전쟁의 다른 이름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학살은 결국 대부분 미국이 저지른 전쟁을 말하기에 우리는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는 책을 한 권 더 마주하게 된 셈이다. 책의 서문격인 ‘들어가면서’란 글에는 미국의 학살에 대해 침묵하거나 왜곡, 축소, 무시 하는 학자들, 잔학행위를 관리함으로써 시민들을 오도하는 이해당사자들의 실태가 잘 언급되어 있다.

촘스키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범죄 특히 적의 범죄일 때는 우리는 극도로 분노하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의 범죄일 때는 분노를 다스리거나 부인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49 페이지) ‘학살의 정치학’은 제목이 말해주듯 학살을 건설적인 학살, 사악한 학살, 몇 가지의 자비로운 학살, 가공의 학살 등으로 나누었다. 이는 학살을 정치적 편견 또는 입지와 필요에 따라 분류하는 미국 중심의 서방의 시각을 고발하는 의미가 있다.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에 가해진 경제 제재를 대량 파괴의 제재라고 표현한 글을 통해 역사를 통틀어 대량 살상 무기에 의해 살해된 사람보다 더 많은 이라크인들이 죽었다고 지적한 사람도 있다.

‘학살의 정치학’을 읽기 전 나는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르완다에서의 학살 사건을 접했다. 지글러는 유엔의 르완다 식량 지원이 소수파인 투치족에 대한 대량 학살을 주도한 다수파인 후투족 체제파가 재기할 발판을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학살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지적하면서도 후투족의 학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회의가 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는 바른 판단이 아니다. 르완다의 경우 다수파인 후투족이 학살 세력이라는 주장과 소수파인 투치족이 학살세력이라는 주장이 엇갈리는데 실상은 이렇다. 르완다 학살은 서방세계의 주요 부문에 의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뒤바뀐 경우이다.(105 페이지) 저자들에 의하면 소수종족인 투치족을 기반으로 하는 르완다 애국전선이 독재체제를 수립하고 후투족을 살상한 배경에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르완다 정부에 대한 압박(르완다 정부군과 애국전선의 병력을 통합하라는)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선전을 충실하게 따른 미디어가 있다.(111, 113 페이지)

다르푸르 학살은 사악한 현실로 분류되고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콩고민주공화국의 학살은 관심에서 배제된 것은 잔혹행위 관리프로그램의 대표적 작동 예이다. 다르푸르에서의 학살을 사악한 학살로 분류함으로써 미국 등의 서방국가들의 조종을 받는 폭력을 관심 밖으로 배치시킨 전략은 간교하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몇 가지 자비로운 학살편에 나오는 ”미국의 하수인 국가"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에서도 미국 및 서방 미디어의 2중적이고 편파적인 보도 태도는 예외 없이 가동되고 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한 번도 국제적인 제재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살의 정치학‘은 미국의 사악하고 위선적인 실상을 드러낸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편파적이고 파괴적인 미국 정부와 그 정부의 선전기관 역할을 한 언론, 무책임한 지식인들, 정치에 무관심한 미국인들이 주역을 맡은 드라마를 본 것 같다. 물론 드라마란 표현은 기막힌 현실을 의미하는 말일 뿐이다.

어떤 이는 누가 미국에게 세계의 경찰 역할을 위임했느냐는 질문을 던지지만 문제는 미국이 편파적이고 지극히 자국 이익에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큰 줄거리만 이야기해도 미국은 르완다 학살,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학살, 터키와 이라크의 쿠르드족 학살에 직접 관여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한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으며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승인하고 군사, 외교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의 시장 근본주의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고 기독교적 선민의식은 적대세력을 사악한 악의 무리로 규정하게 하며 자국의 행위를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한다.

“이라크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사례를 통해 전쟁, 자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는 김동춘 교수의 글이 기억난다. ’학살의 정치학‘은 역작이다. 하지만 사례를 나열하는 데 그쳤을 뿐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방증이라고 해야 할 것을 반증이라고 한 부분(180 페이지), 클린턴을 글린턴으로 표현한 부분(195 페이지) 등의 작은 오류도 눈에 띈다. 물론 관련 책들을 더 읽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저자들과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http://anuloma01.egloos.com/10763669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document/45386267
http://www.texter.co.kr/04_review/review2_board_view.php?no=10744&book_no=8239&id=texter
m******1 2011.08.19.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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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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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미국이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추악한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런 미국을 감싸주고 부추기기까지 했던 <추악한 언론들>이 아직도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언론은 그 어떤 독재자의 광기보다 무섭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독재자들을 옹호하던 <언론들>을 보며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정신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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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내내 <미국이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추악한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런 미국을 감싸주고 부추기기까지 했던 <추악한 언론들>이 아직도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언론은 그 어떤 독재자의 광기보다 무섭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독재자들을 옹호하던 <언론들>을 보며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처럼 행동하는 <정치>와 <언론>을 보면, 온누리에 <정의>를 외치던 것이 모두 뻘짓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과연 <정의로운 정치>는 없는 것일까?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은 온누리 방방곡곡 '분쟁'이 일어나는 곳이면 달려가기 바쁘다. 그런데 그곳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미국이 <학살>을 자행하고 있단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언론은 제 식구 감싸기만 하고 도는 걸까? 상식적으로 보아도 전쟁에 참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무고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것도 우습지만, 그래도 누가 보더라도 '정의의 편'인 미국이기에 조금의 잘못은 감싸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독재가가 <학살>한 것보다도 더 심각한 <학살의 현장>에 미국이 서 있었다면, 또 미국에 발걸음을 맞추는 <동맹국>들이 이를 묵인하였다면,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 일게다.

  <정의 구현>에 앞서 <자국 이기주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국제연합(UN)과 같은 <인류 보편적인 기구들>이 왜 미국 등 <강대국>의 이익에 앞장 설 수밖에 없는지 답이 나온다. 예컨대, 르완다에서 '후투족' 대통령이 '투치족' 시민들을 무차별학살을 자행했을 때 당연히 미국 등 강대국들은 분쟁에 개입해서 더이상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다. 물론 당연히 르완다에 경제적, 정치적 입김을 전혀 주지 않고서 <공정>하게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르완다에 '후투족'이 집권을 하든, '투치족'이 집권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 다만, 어느 쪽이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며, 또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냐만을 따져서 <학살의 책임>을 묻는다. 이는 <정의>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너무나도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작용인 셈이다. 또 국제기구 역시 그런 미국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냥 행동하기 일쑤다.

  마찬가지로 <이라크 전쟁>에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참전한 까닭도 '후세인 독재자'로부터 억압받는 이라크 민중을 구한다는 명분은 찾아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오직 '석유와 가스'라는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라크'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길 바랄 뿐이다. 이미 후세인도 죽은 마당에 이라크에서 미군이 아직도 죽어나가는 현실이 무엇을 말하는가 말이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이라크에서 자행된 <미군과 그 동맹군에 의해 벌어진 민중 학살>에 대한 그들의 언론이 <그들이 벌인 학살>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아랍인들의 무분별한 테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보도된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아도 <힘 센 놈>하고 <이미 싸움에 진 놈>하고 싸우면 누가 더 큰 손해를 보는지는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언론>은 이라크 전쟁 때 '그들'이 자행한 '학살'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자제하고, 학살 당한 설움과 울분을 터트린 이라크 및 함께 상처 받은 아랍인들의 <저항>을 <테러>라고 고쳐 부를 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또 어떤가? '그들'이 적으로 간주하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시민을 사살한 숫자보다 <미군>에 의해 '학살' 당한 아프가니스탄 시민이 훨씬 더 많단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모두 <탈레반>이 뒤집어 쓰고 미군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하는 것이 아프가니스탄에 해방을 가져다 주고 민주주의 정권이 바로 설 때까지 미국이 앞장 설 것이라고 <광고>하기에 바쁘다. 이는 <언론>이 해야할 바른 짓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런 언론의 <못된 장난>은 서방국가와 그 동맹국들이 <이-팔 문제>에 있어서 <이스라엘> 편만 들도록 만드는 일등공신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통계적으로 보았을 때, 테러나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 1명이 죽을 때 팔레스타인 사람은 10명이 죽었단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민가를 공격할 때 아무도 <학살>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테러>니 <만행>이니 이런 끔찍한 낱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쓴단다. 응당 테러에 맞서 싸운 또 하나의 정의의 용사가 탄생한 셈이다. 과연 그럴까?

  또 미군과 그 동맹국들이 이라크를 침공하게 된 원인 가운데 <후세인이 '쿠르드족'에게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는데, 동맹국인 터키에도 '쿠르드족'은 살고 있으며 이들도 수모와 학살을 당하기로는 이라크와 그닥 다르지 않았단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를 근거로 터키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떠벌리지 않는다. 왜? 당장 터키를 공격하는 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

  이 책을 보니, <학살>을 바라보면서 그 어떤 나라도 이득이 없으면 개입하길 꺼리는 현실이 절망스럽다. 그리고 그런 나라들이 외치는 <정의구현>에 앞으로 진정성을 찾을 수 있을지 회의스럽다. 또 우리도 'G20'이라고 떠벌리면서 이런 <학살>에 동참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심정이다. 아니 이미 했었었는지도...

  그리고 또다시 <언론>에 대해 실망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언론인의 본분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시민과 국민과 전세계 인민들에게 '사실' 보도만 하면 그뿐일까? 또 시민의 안전과 국민의 이익, 그리고 전세계 인민들의 행복을 위해 <감춰야 할 건 감추는 한다>는 정치인들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언론인의 바른 자세일까?

  혼란스럽다. <정의>를 좇자니 <눈 앞에 득실>이 아쉽고, <이득>을 좇자니 <대의 명분> 없는 일이라 부끄럽기 그지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선을 긋는다면 <이득>을 위해 <떳떳하길> 포기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 그것이 내 이익과 내 나라의 이득을 보장해줄지언정 인류 보편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그것이 당장의 이익이 있을 지라도 멀게 보면 더 크고 더 끔찍한 보복이 줄지어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말이다. <9.11 사태>가 왜 일어났겠는가? 정말 평화롭고 정의롭기만 한 미국에게 그런 끔찍한 사건을 안겨준 것일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행동해야 할 것이다. <정치>도, <언론>도...



YES마니아 : 로얄 z******8 2011.08.12. 신고 공감 4 댓글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