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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이라는 단어의 뜻을 국어사전에는 ‘가혹하게 마구 죽임’이라고 했다. ‘학살의 정치학’은 노암 촌스키의 ‘반혁명의 폭력 : 대학살의 실상과 선전’이라는 책의 목차를 따라 학살을 4가지로 구분한다. 그리고 학살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의미를 풀어나간다. 묵직한 주제의 책이지만 감추어진 진리를 발견한다는 즐거움 속에서 찬찬히 읽어볼 수 있다.
그 힘의 원리를 완벽하게 보여준 것이 르완다 사태다. 우간다가 르완다애국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르완다를 침략했기에 내란쯤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이 책은 분명한 침략전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대리인 우간다와 르완다애국전선을 내세워 인근 4개국을 조종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은 이들의 침략에 대해서 어떤 비난과 정전도 요구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르완다애국전선을 지원한 미국의 계획은 1991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놀랍게 닮았다고 한다. 이때의 학습효과가 이라크 침공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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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학살이라는 단어는 듣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온몸을 전율시킨다. 또한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결코 비켜나갈 수 없는 일 이기도 하다. 일제 무단강점기는 차치하고라도,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학살이 이루어졌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나타나는 학살 대부분을 북한이 전쟁에 패하여 쫓겨가면서 저지른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북한뿐만 아니라, 아군이나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도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제주 4.3학살이나, 노근리학살, 광주학살이 그 대표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학살이 역사의 이면에 숨겨져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일차적으로 저지른 자들의 은폐와 왜곡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것은 철저히 부인하고, 은폐하며, 적들이 저지른 것은 왜곡과 과장을 하여 미디어를 동원하여 선전하며, 국민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에 동원된 미디어들도 그 비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어쩌면 미디어들이 추구하는 이익이라는 것이, 권력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노암 촘스키가 쓴, 이 책 [학살의 정치학]은 그 동안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 아니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알려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부터 2009년 사이 미국은 최소한 29개국에서 극도로 심각한 군사적 개입을 실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개입을 한 명분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투자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 이라고 공개적으로 표명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높은 생활수준- 자유, 민주화, 인권 등 -을 희망하는 제3세계 대중의 자연스런 요구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 이었다고 밝힌 적은 더욱이나 없었다. 그들이 언제나 동원하는 수사는 국가안보였다고 한다. 냉전체제에서는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대중과 국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그 후에는 자신들이 공격해야 할 대상을 악의 화신으로 만들고, 미국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므로 국제법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모든 미디어와 선전수단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일반대중들도 미국이 벌이는 범죄나 학살에 대해서는 무한한 포용력을 갖게 되었다고 이 책의 저자인 노암 촘스키는 말한다. 일찍이 노암 촘스키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벌인 범죄행위를 연구한 책 [반혁명의 폭력]에서 학살을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건설적인 학살로 이는 미국 자신이 자행하거나, 미국의 주요이익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경우이고, 두번째 자비로운 학살은 미국의 동맹이나 종속국이 행하는 학살이다. 나머지 사악한 학살과 가공할 학살은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은 무시하고 은폐하기에 급급하지만, 적대국이 저지른 학살은 대대적으로 쟁점화 하고 비난한다. 이들이 벌이는 반평화범죄, 반인도주의범죄, 전쟁범죄, 인종청소 및 학살의 역사는 제국주의적 설계의 중심에 인종차별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희생자는 언제나 유색인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는 자신들은 우월하며 비유럽인들은 열등하다는 편견에 빠진 유럽인들이 지역마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되어 온 것은, 그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인들의 시각을 통렬하게 반박하고 있다. 노암 촘스키 또한 그들이 유색인들에게 저지르는 학살의 진실을 통하여, 그들의 위선과 이중잣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들, 미국과 서구세력이 건설적인 학살이라고 부르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와 침공이다. 저자는 지난 30년간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은, 1990년 걸프전 이후 실시된 대이라크 경제제재라고 말한다.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실시된 이러한 제재는 걸프전때 파괴된 수도, 위생, 전기공급시스템을 복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미국정부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미국은 이런 봉쇄의 결과가 질병의 창궐과 유아사망률의 증가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았고, 실제로 역사를 통틀어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라크 인들이 이 제재로 죽었다고 한다. 어린이 50만을 포함하여 추정사망자수가 80만에 이르는 이 봉쇄조치를 놓고, 미국은 UN대사의 입을 빌어 치를만한 가치가 있는 대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이나 서방세계의 어느 누구도 이런 발언에 대해 비난조차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방관자가 아니라 집행자가 되는 경우, 희생자수가 아무리 많아도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며, 그들은 사후에라도 그것을 책임지려는 어떠한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라크침공은 13년간의 경제제재보다도 더욱 심각한 100만명 이상의 사람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군의 인명손실이 상당하다는 이유로 정치인, 미디어, 지식인사회 등 미국의 기득권집단과 서방언론은 이라크 민간인 피해에 대해 경시하는 자세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미국언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서방의 언론들이 이러한 학살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그들 역시 인종차별주의적 제국주의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들은 또 자비로운 학살로 유고연방 해체과정에서의 크로아티아 폭풍작전, 아프카니스탄에서4500명을 학살하고 묻어버린 다슈트-에-레이리 사막 학살사건, 터키의 쿠르드족 학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 그리고 중남미에서 수십년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는 테러정권이 벌인 학살 등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역시 자비로운 학살의 백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 아닐까 싶다. 미국의 중요한 하수인이자 대외원조의 수혜자 이스라엘, 그들은 타국의 영토를 침범하면서도 보호자로부터 야단을 맞거나 경멸 받지 않으며, 어떤 정책적인 견제도 받지 않을 정도로 국제관계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하여 약 2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국제사회로부터 어떤 제재나 비난을 받지 않았으며, 2006년 재차 침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비무장 여성, 어린이, 노약자가 수용되어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사브라와 샤틸리에 대한 잔혹한 공격은 이 전쟁의 결정판이었다고 한다. 또한 2008년 가자지구 침공은 초반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살육이었음에도, UN은 진상조사를 거부하고, 미국상하 양원은 만장일치로 이스라엘을 지지했으며, 서방언론들은 학살이라 거의 부르지도 않았다. 학살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은 테러리스트, 이스라엘은 자위행위, 미국과 서방언론이 그 학살을 보는 관점이다. 사악한 학살과 가공의 학살은 또 다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똑 같은 학살이지만 건설적인 학살이나 자비로운 학살은 학살이라 불리지도 않지만, 대부분 정확한 진상이 은폐되고 감추어진다. 서방언론에서 제대로 다루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악한 학살이나 가공할 학살은 인류에 대한 죄악, 인종청소 등으로 불리며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다만 은폐되고 감추어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건설적인 학살에서는 학살 그 자체가 감추어지고 은폐되지만, 사악한 학살에서는 진실이 은폐되고 가해자가 감추어 진다는 점에서 그 본질이 다르다. 사람들은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해체과정에서 일어난 전쟁 - 보스니아전쟁, 코소보전쟁 등 -들이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전쟁 중 가장 왜곡되게 알려진 경우로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아프리카 호수지역에서 더 참혹한 침공과 반란과 내전이 있었고, 더 심하게 훼손되고 왜곡된 진실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르완다 사태는 흔히 후투족이 소수민족인 투치족을 살육한 것으로 서방세계에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방세계의 주요 부문이 가해자와 희생자를 완전히 뒤바꾼 사기극 이라고 한다. 우간다가 사실은 자기들의 하급부대인 르완다애국전선을 도와서 르완다를 침공하지만, 이들은 이미 침공 전부터 미국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지원을 원없이 받을수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투치족인 르완다애국전선이 지나가는 길에는 참혹한 시체만이 남아있었다. 희생자가 수백만이 넘는 학살극이 밝혀지면서 UN이나 르완다인권침해 국제조사위원회, 르완다범죄처리 국제재판소등에서 조사를 하였지만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은 기구에서 추방되고, 그들의 증언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고 한다. 서방언론이나 영향력 있는 국제 NGO들도 그들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 이었다. 2011년 현재,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상 어디에선가는 우리들이 모르는 학살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학살이란 단어의 사용 이면에는 거대한 정치적 편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디어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누가 미국의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를 알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미디어나 지식인뿐만 아니라 서구적인 NGO들도 미국과 서방의 노선을 추종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미국 자신이나 그들의 추종자가 대규모 잔혹범죄를 저지르면 그 잔혹행위는 건설적인 것이 되고, 희생자들은 우리가 분노하고 관심을 기울일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가혹행위가 미국의 적이거나 무너뜨려야 할 대상국가의 소행이라면, 그 잔혹행위는 사악한 것이 되고 희생자는 우리가 주목하고 동정하며, 대중적 연대감을 보여줄 가치 있는 대상이 된다. 이런 잔혹행위를 무시할지, 아니면 비난할지를 구별하는 능력이 그 행위자가 적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학살의 정치학이라고 한다. 책 표지에 쓰여있는 문구가 눈을 아프게 찔러온다. 우리편이 저지른 가혹행위가 무죄라면, 적이 저지른 학살도 무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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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변한다. 아니 변했다. 냉전이 종식되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 책에서는 미국이 저지른 수많은 범죄는 파헤치고 있다. 그들은 진정 세계 평화의 수호자이며, 세계 경찰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무법자인가? 분명 과거에는 명분과 대적할 적이 있었다. 과거는 공산주의라는 큰 악몽과 맞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지금 공산주의는 거의 퇴색되어버렸기에, 미국에 대적할 상대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는 전쟁산업과 자원에 대한 욕구로 세상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와 싸우고, 이런 싸움들을 지원한다. 미국자신을 위해서. 과연 국제정의는 무얼까?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를 한번 생각해본다. 역사적으로 많은 백인들의 범죄행위는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누구를 보호해야 한다는 보호책임과 인도주의적 개입은 전지구적 질서와 불개입의 규범을 무시한다. 이스라엘의 공격할 수 있는 주권, 그러면 주변 국들은 침략당할 주권만 있는가? 미국의 비대칭적 지위는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다. 또 미국과 현지 군부엘리트와 과거의 식민지 매판자본의 결합으로 자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미국 국가안보논리, 그러나 미국을 공격할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미국의 공격의 대상은 악의 화신이다. 미국은 도덕적 우월한 나라이면 국제법상 예외인가? 침략범죄를 판결대상에서 제외하고, 위장 중립, 백인의 천부적인 우월성, 중요한 것은 누가 힘을 갖고 있는가? 이다. 이라크는 왜? 우리들의 안방에 생중계된 최초의 전쟁, 과연 이것이 전쟁인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장면들이 많았다. 그냥 침략 같았다. 너무 일방적인 힘의 차이로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게 막강한 이라크의 군대와 화학무기는 없었다. 미국의 화려한 전쟁쇼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다. 이런 화려한 쇼 뒤에는 전략폭격으로 인한 사회기반시설을 파괴로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미디어의 편견, 우리는 일방적으로 미국의 방송이 내뱉는 말들을 의식적, 무의식적 받아들이기만 한다. 가끔 나오는 알자리라방송은 거의 무시한다. 지들 편이니 저런 이야기를 하지, 그럼 우리는 미국편이란 말인가?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왜일까? 우리의 우방에서 출발하여 오랜 군부지배기간에 세뇌되어왔다. 그리고 미국의 문화에 중독된 결과일 것이다. 미국의 정의의 사도이며,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슈퍼맨이다. 그럼 다른 나라들은 다 악당이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란 것이다. 석유가 풍부한 이 지역이 미국에게 필요하기 때문이고, 미국은 힘을 가졌다. 그러기에 명분이 필요했고, 그 명분은 사악한 화학무기였다. 그리고 조용히 점령했고, 전후 복구사업의 대부분의 이익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 기업들이 가져갔다. 숨겨진 아프리카의 비극 다르푸르,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의 인도주의와 인권파국으로 알려지지 않는 학살이다. 흔히 아랍계 지배자와 아프리카 흑인 희생자간의 인종분규로 알려져 있으나, 환경문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원인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생긴 생태위기로 촉발된 물부족과 농업생산의 감소, 토지문제 등에 기인한 문제이다. 르완다와 우간다. 우간다의 무세베이와 르완다의 키가메 과연 이들은 그들의 종족과 나라를 해방시킨 구원자인가 아니면 살인자인가?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르완다애국전선이 살육의 향연을 주도했고, 그 뒤에 있는 미국과 프랑스가 있었다. 과연 내란인가 침략전쟁인가 무세베니와 르완다애국전전은 미국의 이익에 봉사한다. 전도된 가해자 희생자 관계 구조는 미국측의 선전을 충실히 전달한 언론에 의해서 만들어져 갔다. 국제적 인도주의 법의 심각한 위반 혐의로 르완다 범죄처리 국제재판소에 의해 기소된 사람은 후투족 뿐이었다. 그리고 필릴구체비치의 카가메에 대한 평가 “그는 학살자가 아니라 떠오르는 별이다.” 그러나 희생자들을 보라 누가 얼마나 죽고, 희생을 당했는지? 역사는 진실을 말한다. 과연 르완다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가 터져 버린 것이다. 미국의 기본정책으로 우간다의 자원전쟁으로 착취와 재원조달을 위해서 전시경제 체제가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나토와 세르비아의 인종청소로 알려진 그곳, 하지만, 이것은 보스니아 무슬림선전가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이 이면에 크로아티아 ‘폭풍작전’, 크로아티아 영토 내 세르비아인 학살은 치밀한 대규모의 인종청소(학살)이었다. 과연 우리가 본 세르비아의 만행은 어디서 벌어지고, 왜 일어났는지 우리는 관심이 없다. 과연 세르비아인들은 학살자였나, 희생자였나. 아프가니스탄, 발견된 대형무덤 탈레반전사들의 죽음, 누가 그들을 대량학살했는가? 적이면 다 죽여도 되는가? 미국이 깊이 관여한 사건이기에 자비로운 숙청이나 건설적인 학살의 언저리로 분류로 거의 지면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쿠르드족, 이라크와 터키에서의 대규모 탄압, 인쇄매체는 어떻게 다루는가? 미국의 공식적인 적인 사담후세인 정권이 쿠르드족에게 가한 탄압은 의미 있는 것이지만, 미국의 핵심동맹이자 나토회원국인 터키가 쿠르드족에게 가한 탄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동티모르의 리키차 살육사건, 인도네시아의 침공 그러나 동티모르는 바쁜 세계의 주목을 받을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미국은 중미에서 수십년 동안 테러정권을 지원했고, 이들은 미국의 지원으로 마야원주민을 근절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미국의 중요한 하수인, 대외원조의 수혜자이다. 이스라엘의 침략과 전쟁범죄는 누가 처벌하고 막는가? 아무도 없다. 자유세계의 미디어는 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논리만을 반복적으로 전달하는가? 그 뒤에는 미국이 있다. 이스라엘의 변명, 이스라엘 국방군은 민간인과 민간목표와 군사목표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을 말하는 언론은 적다. 하지만, 희생자를 보라. 그것도 민간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또 다른 변명 이스라엘의 자위권, 그럼 팔레스타인이자 그 주변 나라의 자위권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보호책임, 이스라엘은 테러로부터 자신을 정당하게 방어했다는 논리, 그럼 왜 테러를 하게 되었을까? 힘센 놈과 힘 없는 자의 싸움은 정당하게 싸울 수 있을까. “이스라엘은 진실과 도덕을 압도하는 훌륭한 선전체계 덕분에 하등인간을 자유롭게 죽이고 인종적인 청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이스라엘은 국제적인 제재를 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 매체에서 ‘학살’이라는 단어는 증가했지만, 단어 사용에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이 만들어 낸 거대한 불평등과 면책문화가 만들어 낸 비극이다. 자신의 정권과 체제가 제 3세계 민중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이것이 ‘학살의 정치’이다. 우리 편이 했던, 적이 했던 범죄행위는 다 범죄행위이다. 여기 언급된 많은 사건들이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주류 매체나 언론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대부분 미국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우매하다. 이 말이 맞는 말인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매체가 내뱉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것은 그런 것이다. 왜 가 없다. 귀찮다. 자신들의 일생생활만으로 벅차고 힘들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이 책의 한 장을 장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 매체의 무비판적 수용, 간단히 역사책을 펼쳐만 봐도 누가 가해자인지, 어떤 이유로 이런 분쟁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순간의 사건으로 점화된 학살이 아니라 불만과 대립 그리고 증오가 만들어낸 작품인 것이다. 티벳에 대한 우리의 잣대, 우리는 국익이라는 이름아래 침묵하는가? 우리의 과거는 어땠을까? 우리도 이들 같은 시대가 있었다. * 르완다에 대해서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걸, 제발 전해주세요!” 고통은 너를 삼키지 못한다. 등을 읽어보시면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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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민학교 시절(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반공교육이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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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 촘스키의 <반(反)혁명의 폭력>은 학살을 “건설적인 학살”, “자비로운 학살”, “사악한 학살”, “가공의 학살”(사악한 학살의 하부유형)이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미국 자신이 자행하거나 미국의 주요 이익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건설적인 학살, 미국의 동맹이나 종속국이 수행한 것은 자비로운 학살,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것은 사악한 학살과 가공의 학살이다.1) 재미있는 것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침공범죄가 “국제적 범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모든 악의 집합체로서 다른 전쟁범죄와 구분되는 최고의 범죄”2)라고 하면서도 1991년 이후 13년간 지속된 미국과 영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대량사망은 인도주의적인 전쟁과 보호책임이라는 당위성에 의해 치장되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2003년 3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라크 민간인의 인명손실은 98,000명에서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인명손실의 절대 다수가 폭력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임이 밝혀졌지만 미디어와 지식인들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침공-전쟁의 결과라는 사실도 인정한 적이 거의 없다3)는 점에서도 이러한 미국과 그 동맹국의 이중잣대는 잘 드러나 있다. 미디어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있다. ‘다르푸르 사태’의 경우에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크리스토프가 “아예 처음부터” 다르푸르 (사태)를 “’수단의 아랍계 지배층’과 ‘아프리카계 흑인 수단인’사이의 갈등”으로 진단4)하였는데, 이는 분쟁의 과정에서 미디어들이 계속해서 잘못된 관점을 주입하여 벌어진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즉, ‘다르푸르 사태’의 근본원인을 살펴보면, 최소한 부분적으로 기후변화 때문에 생긴 생태위기, (즉) 물 부족과 농업생산의 감소가 (폭력사태를) 촉발5)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꿔놓는 경우도 있다. ‘르완다 사태’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학살의 정치학>에서는 기본의 상식과 달리 미국과 그 대리인인 우간다의 조종을 받아 소수부족인 투치족이 다수부족인 후투족을 학살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처럼 기존의 상식에 따라 다수부족인 후투족이 소수부족인 투치족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책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하지만 소수부족인 투치족을 학살하였다는 다수부족인 후투족이 정권도, 재산도, 심지어 목숨마저 빼앗겼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전범으로 재판에 선 후투족 출신 고위장교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도 소수부족인 투치족이 다수부족인 후투족을 학살했다는 입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따라서 보다 확실한 증거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이 책의 주장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며, 이는 곧 미국과 그 동맹국의 영향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받은, 미디어들이 진실을 왜곡했다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학살도 전쟁처럼 정치의 또 다른 수단인 셈이다. 아마 번역자도 그렇기에 학살의 유형과 사례를 설명하는 이 책의 제목을 <학살의 정치학>이라고 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슬며시 불편해옴을 느꼈다. 진실을 위한 폭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수의견에 대한 존중이 ‘소수는 늘 의롭고 진실되다.’라는 잘못된 편견과 오만에 빠져 타락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 순간의 방심으로 흙탕물을 뒤집어 쓰면 그나마 진실을 폭로하는 역할조차 못할 수도 있으니까. 결국 무기력한 우리들은 그저 이 책 표지에 쓰인 대로 “우리 편이 저지른 가혹행위가 무죄라면 적이 저지른 학살도 무죄이다.”라는 말만 되내이며 진실을 위한 소중한 불씨를 보존하였다고 자위할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뎌지겠지만, 아프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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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 이 글은 그 관점에 따라 얼마나 상황이 달리 인식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아랍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빈 라덴과 다른 세계에서 생각하는 그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다르다. 세계에서 그를 보는 관점은 악의 화신이다. 테러의 원흉이고, 모든 인류의 공적이다. 그런데 아랍계에서 과연 그렇게 생각을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어 주는 영웅이 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우리에겐 왜 빈 라덴이 악한 존재로만 인식될까? 미국과 아랍 둘 중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이 옅은 세계의 사람들도 빈 라덴이라고 하면 테러리스트로만 분류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책은 그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한다.
약자에 대한 증오는 미국의 경제력과 교묘한 정치적 선전 탓이다. 그리고 그 일에 동참한 미국의 미디어 세력과 동참한 각국의 이권의 문제들이 교묘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인 선전과 교묘한 여론 형성은 미국이 행하는 모든 것은 정당화 되고, 그 반대편에 선 자들은 어떠한 일이라도 악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너무 간과한 채 주어지는 왜곡된 정보에 휩쓸려 판단을 하고 있다. 지금 세계에서 행해지는 인간들에 의한 많은 학살의 현장, 진실이 너무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과 미국의 하수인은 오랫동안 여러 차례 침공행위를 자행하면서도 완벽한 면죄부를 받아왔고, 이라크 침공에서도 미국과 미국의 제일 하수인이 최고의 국제범죄와 그것에 이어질 대량 잔혹행위의 범죄행위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국제적 정의’가 이런 원칙에는 적용되지 않는 -그리고 기득권 미디어와 지식인들이 이를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도가 힘 있는 자의 필요에 멋지게 순응하고 있는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본문 속에 나오는 이 한 단락의 글은 이 책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잘 전해 준다. 학살의 현장에서 대한 보다 바른 시각을 원하고, 그것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잘 드러난 글이다.
작가는 많은 예들을 제공한다. 멀리로는 월남전부터 가까이는 이라크전,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살의 현장을 제공한다. 그것이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국가들이 사주하고,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무고한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강대국이 벌인 반평화 범죄, 반인도주의 범죄, 전쟁 범죄, 인종 청소 및 학살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일은 제국주의적 설계를 바탕으로 하여, 중심에는 인종 차별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국주의적 설계의 중심에는 항상 백인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의 희생자는 언제나 유색인이었다. 서반구 세력이 수십 년에 걸쳐 원주민을 청소할 때 도덕적으로 각성되었다는 기독교 세계 내부로부터의 반대는 미미했다. 이러한 그들의 논리가 현재의 상황에도 지속되고 있는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백인의 천부적인 우월성에 입각한 그들의 사고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고가 숱한 유색인들을 학살하고도 스스로 정당성을 획득하는 그들의 논리에 바탕이 되고 있다. 그리고 시대가 흘러가면서도 그 사고는 변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그들의 우월의 논리가 무수한 인간들의 생명을 탐했다. 그것이 지금도 나타나고 있고, 그들이 우월한 자들의 입장에 있는 동안은 지속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일들은 군주국가의 논리를 적용시키면 될 듯하다.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군주의 논리가 정당화 된다. 군주는 비교적 폭력적이라도 신의 능력을 입었다고 생각하기에 누가 도전을 할 수가 없다. 이처럼 경제력과 무력을 갖춘 우월주의 사상이 가득한 기득권자들의 무례한 사고가 정당화되고, 그들의 무리한 학살의 행위도 정당화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역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역지사지하여 약소국의 입장에서, 제삼국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각에는 우월주의에 빠진 자들의 범죄적인 행위가 너무나 참혹하게 다가온다. 그것을 그는 고발하고자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광주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잘 안다. 기득권의 정치세력들이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력을 행사하고 그로인해 무고한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에는 폭도들을 징벌한 것으로 미화되었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민주화 정부를 거치면서 그 사건의 현장인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고, 폭도들로 몰렸던 그들은 민주 투사로 명예회복을 했다. 그 명예회복이 세상에서 사라진 그들에게 얼마나 보상이 될런 지는 모르지만,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자명한 일이라 보여 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위 광주가 문제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일 세상이 변하여 백인들이 몰락하고 유색인종들이 세계에서 우위에 접했을 때, 위의 내용들이 어떻게 반전되어 어떠한 상황으로 발전할까? 물론 그 당시의 집권 논리에 따라 또 국지적으로 상황들은 전개되겠지만, 가진 자들이 스스로를 절제하지 않은 한 역의 논리가 전개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존엄성 문제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이다. 그러한 사실이 망각된 전쟁과 학살의 정당화는 어떤 경우에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진 자의 논리에서 비롯된 많은 전쟁 그로인해 죽어간 많은 사람들, 도덕도 기득권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건설적인 학살, 사악한 학살, 자비로운 학살, 가공의 학살이라는 제명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그 사실들의 실상을 제공한다.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으로 바라로는 학살의 현장을 제공한다. 물론 어느 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늘 양면성을 지닌 입장에서 인간의 생명을 운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일깨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잔인했던 현장을 목격하면서 가슴 아픈 시간을 지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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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권리란 대등한 힘을 가진 상대들 사이에서만 들먹일 수 있을 뿐이다. 강한 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약한 자는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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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에서 나온 ‘학살의 정치학(The Politics of Genocide)’을 보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데다가 ‘학살의 정치학’을 번역한 박종일님이 번역을 맡은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의 ‘벌거벗은 제국주의(Naked Imperialism)’, 와카쿠와 미도리(若桑みどり)의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존 벨라미 포스터와 몇 명의 저자가 쓴 ‘생태논의의 최전선’등의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포스터의 분류에 따르면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이다. ‘생태논의의 최전선’의 한 챕터인 석유 정점과 에너지 제국주의라는 글에서 포스터는 “미국의 에너지 제국주의는 이미 전쟁확대로 귀결되고 있다.”는 말을 했다.(117 페이지) 한편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에 의하면 전쟁은 여성의 예속에 기초를 둔 가부장적인 지배 모델을 유지하기 위한 폭력 장치이다. 미도리에 의하면 전쟁은 인류 역사의 어느 시기에 사적 소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http://anuloma01.egloos.com/10763669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document/45386267 http://www.texter.co.kr/04_review/review2_board_view.php?no=10744&book_no=8239&id=tex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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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미국이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추악한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런 미국을 감싸주고 부추기기까지 했던 <추악한 언론들>이 아직도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언론은 그 어떤 독재자의 광기보다 무섭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독재자들을 옹호하던 <언론들>을 보며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처럼 행동하는 <정치>와 <언론>을 보면, 온누리에 <정의>를 외치던 것이 모두 뻘짓거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