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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5년전, 우리에게도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있었다.
"불과 35년전, 우리에게도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있었다." 내용보기
지금은 아득한 옛날 일같이 생각되지만 불과 35년전만해도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다. 밤 12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는 집밖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밤 11시쯤 되면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버스와 택시도 마지막 손님들을 기다렸다. 물론 사람들 역시 귀가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2시가 가까워지면 골목길에선 발자국 소리들이
"불과 35년전, 우리에게도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있었다." 내용보기

   지금은 아득한 옛날 일같이 생각되지만 불과 35년전만해도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다. 12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는 집밖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밤 11시쯤 되면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버스와 택시도 마지막 손님들을 기다렸다. 물론 사람들 역시 귀가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2시가 가까워지면 골목길에선 발자국 소리들이 어지러웠고, 여기저기서 야경대원들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갈라놓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풍경들이 매일 밤 12시를 전후하여 펼쳐진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한 질곡을 말해주는 이런 야간 통행금지는 해방직후 미군정에 의해 시작되었다. 194598일 이후 통행금지 시간에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1982 15일 폐지될 때까지 우리 현대사의 한 풍경이기도 했다. 야간에 일어나는 각종 비상사태를 파악하고, 도적과 같은 자들을 색출하여 도시를 안정시키기 위해 시행되었다는 야간 통행금지는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많은 뒷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런 야간 통행금지는 현대에 생긴 산물일까?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도 야간 통행금지 제도가 있었다. 인정(人定)이 되면 도성 문을 닫고, 파루(罷漏)가 되면 도성 문을 열어 통행인의 출입을 통제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 [통제된 시간과 공간]은 조선시대에 실시되었던 야간 통행금지 제도인 야금제도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조선시대 야간 통행금지의 대상, 공간과 시간 그리고 통제의 방법 등에 대해 쓰고 있는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35년전 경험했던 그것과 하등 차이가 없음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오래된 현재 혹은 미래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태양을 보고서 시간의 흐름을 짐작했다. 낮에는 해시계를 통해서, 그리고 밤에는 물시계나 혹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별자리를 보고서 시간을 판별했다. 따라서 시간은 아무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을 안다는 것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국가는 이런 시간의 흐름을 일반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북과 징을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도성 문의 개폐 시간을 알려주는 예비 종소리인 인정과 파루이다. 인정과 파루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을 기준으로 정했다. 따라서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인정은 대략 밤 9시가 넘은 시간인 2경에, 파루는 새벽 4시경인 53점이었다. 오경이란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를 다섯등급으로 나누고, 각 경은 다시 5점으로 나누었다. 예를 들어 33점이라 하면 오후 1150분에서 1210분 전후를 뜻한다. 지금의 자정에 해당되는 셈이다.

 

  조선시대 야간 통행의 금지, 즉 야금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한 것은 태종 원년인 1401년이다. 도성의 치안유지를 위해 시행된 야금제도는 초경3점 이후부터 53점 이전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자는 모두 가두는 것이었다. 지금 시간으로 보자면 오후 8시에서 다음날 새벽 4시반까지이다. 세조 때에는 야금 시간이 2경부터 4경까지로 2시간정도 단축되지만 더욱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야간통행증을 소지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통행을 금지시켰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경수소에 알려 순라군이 목적지에 데려다 주고 다음날 진위여부를 따져 죄를 물었다고 한다. 통금을 어긴 3품이하의 관원은 모두 가두었고, 3품이상의 관원은 시종을 가두었다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궁성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가 뜰 때 열었으며, 도성문은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인정과 파루 제도가 폐지되는 1895년까지 494년간 시행되었다. 특이한 것은 남자나 여자 모든 사람이 2경부터 통행이 금지되지만, 남자의 경우는 초경부터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 초경부터 2경까지는 여자들만이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시행된 내외법(內外法)의 영향으로 여자들이 대낮에 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던 까닭에 부득이하게 시행된 것이었다. 또 한가지 섣달 그믐날과 설날,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각각 하루씩 3일간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현대에 들어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절, 크리스마스 이브 날 1년중 유일하게 통행금지가 해제된 것과 같았다. 왜 하필 성탄절 전날 통금을 해제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도성 안 치안은 그런대로 체계가 확립되어 있었지만, 도성 밖은 거주하는 백성이 적고 또 지역이 넓은 관계로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선중기 이후 한성 부근의 인구집중과 경강지역 상업화로 인해 도성 밖 거주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강력범죄도 증가했다. 이에 따라 국가는 방위시설을 정비하고 치안력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한강변 나루에 별장을 배치하고 나루를 경유하는 왕래인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간 통행금지의 효과를 위해 당연히 야간 순라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야간 순라는 16세기까지는 좌우포도청과 좌우순청에서 담당했으나 선조 이후에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게도 순라의 임무가 주어졌다고 한다. 이들은 각기 순찰구간을 총 40개로 나누어 순찰을 돌았으며, 상대적으로 치안이 중요한 지역은 중복되는 부분이 발생하기도 했다.

 

  야간의 통행금지는 정3품 직제학 이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었으며, 액정서나 승정원, 삼사, 의금부와 같이 관사의 잡무를 수행하는 시종이 공무수행을 이유로 야간에 왕래할 경우에는 야간통행증인 범야물금체(犯夜勿禁帖)를 발급받았다고 한다. 범야물금이란 야간통행금지를 어겨도 처벌하지 말라는 뜻이며, 체는 상관이 7품이하의 관원에게 내는 공문서를 말한다.

 

  순라군들의 장비로는 어둠을 밝히는 등, 경고를 알리는 작은 종, 그리고 쇠 방망이와 수갑으로 쓰이는 쇠사슬을 가지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것들이 얼마나 효과적 이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야금을 어긴 자는 범야(犯夜)행위로 처리하여 범야 시간에 따른 처벌을 하였다. 속대전의 기록을 보면 초경과 5경에 걸린 사람은 장 10, 2경과 4경에 걸린 사람은 장 20. 그리고 한 밤중인 3경에 걸린 사람은 장 30대에 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범야인 대부분은 음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액정서나 승정원의 시종들을 범야인으로 잡은 경우에는 범야인의 소속 관사와 야금을 담당하는 기관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고,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끼고 도는 자들의 행태는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에 고소를 금할 길이 없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 현대사의 질곡으로 여겨졌던 야간통행금지 제도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의외이다 싶다. 책을 읽다 보니 예전에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일어났던 여러 웃지못할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야간에 나가래도 내가 싫지만, 그 시절 피치못할 사정으로 야간에 일을 보게 될 때 가슴 졸이며 경찰과 숨바꼭질 하던 기억은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기억이다. 어떤 제도이든 그 본래의 목적을 벗어날 때, 피해를 보는 것은 선량한 백성들 임을 조선시대의 야금제도를 통해 다시 한번 알게 된다.

k*****1 2017.11.02. 신고 공감 5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