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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반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걸어온 현주소를 보여주며,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담론과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인문과 사회, 과학 분야에 대한 책리뷰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도서문화 인터넷신문 <지데일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 참된 경제학은 생명을 섬긴다
출간 당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그의 책은 이후 간디, 버나드 쇼,
톨스토이 등의 삶을 통째로 바꿀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총 네 편으로 이루어진 본 논문들은 1년 반 전에 <<콘힐 매거진>>에 연재되었고, 지금까지 내 귀에 들린 바에 따르면 " 대부분의 독자들로부터 거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한 점 부끄럼 없이 말하건대, 이 논문들은 내가 지금껏 써 왔던 어떤 글보다 훌륭하고, 진실하며 필요한 말들만 사용했고, 또한 사회에 유익을 주는 글이라 믿는다. _ 존 러스킨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도저히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러스킨의 가르침에 따라서 내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 책 한 권을 들라면 바로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를 들겠다. _간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역설적인 표현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 다만, 이 책이 있다는 것과 존 러스킨을 아는 것만으로도 책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행복이고 행운이 아닐까 싶다.
시대의 아들, 존 러스킨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통치했던 19세기 중.후반의 영국 사회는 격동의 시기였다. 청교도 주의에 기반한 엄격한 계급 사회관과 산업혁명을 통해 도시를 기반으로 성장하던 신흥 중산층 계급으로 부터 태동하던 새로운 사회관이 충돌한 시대였다. 이 충돌 사이에서 하층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과 실업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스러져 가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훼손되어 갔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과 함께 국제무역이 활기를 띠자 국가간 자유무역을 둘러싼 논쟁이 불거지고, 근대 정치경제론이 불완전하게나마 그 이론적 토대를 막 완성한 시기였다. 밤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초기 자본주의 경제의 불빛아래 드리운 그 폐단의 그림자가 동시에 영국사회를 뒤덮던 시대였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전 유럽을 할킬 발톱을 웅크리던 시대였다.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작가요 시인, 화가, 예술 평론가인 동시에 위대한 사회 사상가로서 이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주류업으로 성공을 거둔 실업가인 아버지의 재력을 등에 업고 어릴 때부터 고전 문학과 낭만파 문학을 가까이 접하고, 유럽 여행을 수 차례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저술하였을 만큼 평생 부유한 일생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노동자 대학에서 예술을 가르치고 공장 노동자들에게 계속해서 도덕의식을 고취시키는 편지를 써 보내는 등, 경제수단으로 전락한 하급 노동자들을 참된 인간으로 구원하기 위한 그의 열정은 평생 식지 않았다. 상반되는 두 가지가 부딪히는 빅토리안 시대의 고민을 그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담은 존 러스킨은 누구나 그렇듯 시대의 아들이었다.
생명의 경제학을 위하여 러스킨의 저서 <마지막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이러한 그의 시대적 고민을 거울과 같이 고스란히 비추고 있다. 머리말에서 러스킨은 이 저서의 목적을 두 가지로 밝히고 있는데, ‘부富’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과 그 부를 획득하기 위한 선결조건을 명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목적의 사이를 연결해 주는 보이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人間’이다. 러스킨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부는 곧 ‘생명’이고, 이 부를 획득하기 위한— 즉 생명(혹은 생명력)을 얻기 위한— 선결조건은 ‘정직’과 ‘애정’ 같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어 인간으로 참 인간되게 만드는 도덕적 가치들이라 주장한다. 노동은 이 생명의 증식을 위해 죽음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고귀한 투쟁이기에 노동자들이야 말로 참 인간이고, 그렇기에 참 인간의 전형인 그들을 사회가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그의 경제학을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내는” 경제학으로 요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경제학에 따르면, 진정한 부자는 그의 안에 내재된 생명의 힘을 다해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보이지 않는 황금을 한 가득 손에 쥐고 소낙비 처럼 황금가루를 뿌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히 적시는 사람이 있어 보이는 황금을 뿌리는 사람보다 더 큰일을 행하리라.”
사회적, 경제적 약자의 다른 이름, ‘마지막에 온 이 사람’ 이를 설파하기 위해 한 매거진 위에 연재로 써 내려간 그의 펜은 D. 리카르도와 아담 스미스를 따르는 당시 정통파 경제학자가 중심이 된 독자들의 격렬한 반발로 제 4편을 마지막으로 멈춰서야 했고, 그의 인생과 같이 책으로의 탄생조차 순탄치 않았다. 경제학의 전제가 되는 부의 정의를 ‘타인에 대한 지배력’으로 규정하고, 이 상대적인 지배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과의 자유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통파 경제학을 일컬어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악마의 경제학’이라고 서슴지 않고 집요하게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위해 ‘먼저 온’ 경제학자들에게 스스로 ‘마지막에 온 자’가 되고자 한 러스킨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낮은 자리로 온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일까 죽음에 맞선 생명의 경제학, 악마에 맞선 천국의 경제학, 차가운 물질을 위한 경제학이 아닌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을 위한 경제학을 주장한 러스킨은 그렇기에 시대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넘어서 죽음에 맞서 노동하는 전 인류의 스승이다.
신약성경에 적힌 예수의 이야기 중 한 구절을 인용한 책의 제목이 그 상징적 증거로 고고히 서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20:14). ‘마지막에 온 이 사람’은 사회적, 경제적 약자의 다른 이름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서성이며 해질녘까지 인력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와 같이, 낳선 외국 땅에서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와 같이, 내일의 양식이 아닌 오늘의 양식을 위해 싸워야 하는 불안하고 간절한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장에 마지막으로 찾아 온 이들을 먼저 온 자들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러스킨은 묻는다. - 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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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 기사가 나왔다. 한달 130만원의 급여로 도저히 생활해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아내가 식당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은 비참함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1시간 강의에 33000원이면 괜찮네라고 누군가 말할지 모른다. 하긴 예전엔 1시간 강의료가 8000원이었다. 그런데 시간강사가 방학에 돈을 벌수 있는가? 전임들에게 방학은 꿈같은 시기지만 강사에게 방학은 공포의 시간이다. 교수임용을 두고 돈거래가 오간다는 것은 적어도 그 속내를 아는 사람들에겐 공공연한 진실이다. 서울의 유명사립대라고 국립대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물며 지방 사립대에서 임용관련 돈거래는 너무나 기정 사실로 들릴지 모른다. 현재 교수들도 들어올때 상납하고 왔으니 새로 부임하는 사람으로부터 상납받기를 원하지 않겠나. 일억원 내고 임용되어 몇년이 지나야 기부한 돈을 본전치기할까, 일년이면 족할까, 제의를 받은자는 머리회전을 빨리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지 모른다. 열심히 공부한 죄로 40줄까지 시간강사로 버티고 있는 사람은 아마 그 기여금마저 마련 할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일 것이다. 안타까운 목숨만 하늘로 간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19세기 사상가의 공동의 부에 대한 희망적 이상은 여전히 빛을 반짝인다. 그건 누구에게나 마음 한자리에 자애로운 주인의 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먼저 온 이와 똑같이 베풀었던 것처럼 너희도 그리하라라는 말이다. 부의 편중이 문제가 되는 요즘 세상에 귓전을 때리는 말이다. 정부는 시간강사의 처우개선에 눈을 돌려라. 그가 나중에 온 사람이라고 문전박대하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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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경제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가장 부유한 국가는 최대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내는 국가이고, 가장 부유한 이는 그의 안에 내개된 생명의 힘을 다하여 그가 소유한 내적 외적 재산을 골고루 활용해서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들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을터이다. 책은 부에 대해 심층적으로 설명한다. '부'의 이름 뒤에 감춰진 인간의 근원적 욕망은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다. '싼 가격에 사고 비싼 가격에 판다.'는 경제의 기본원리만큼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사상은 없다고 말하는 그는 인간다운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유망전도한 사업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체를 '부'로 보는 것이다. '가치있다'는 말은 곧 '생명에 유용하다'는 뜻으로 그 기능을 다해 인간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대한 경제의 법칙과 원리를 명심하라는 그의 조언, 즉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비하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소유할수 없는 것, 소비된 물건에는 누군가의 생명력이 소비되는 법, 그 결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거나 더 풍성하게 누린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한 소비라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나의 비합리적이 소비행각이 더없이 무거워져버렸다.현재는 참된 경제학에 대해 무지한 자만이 사치를 누릴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존 러스킨의 생명 경제학..우리가 겪고 있는 부의 집중과 빈곤의 악순환은 어쩌면 그의 논리로 깨부술수도 있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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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제학자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이런 고정관념을 강화시킨 서구의 한 재미난 실험이 생각난다. 바로 경제학자들의 이타심을 다른 과목 교수들과 비교한 것인데 연구결과는 경제학 교수가 보통 다른 과목 교수보다 더 이기적이고 이익손실의 계산이 더 강한 것으로 나왔다. 출중한 경제학자라면 돈 버는 경제학이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경제학에 대한 책들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죽음에 맞선 '생명의 경제학'이나 악마에 맞선 '천국의 경제학'이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의 경제학'에 대한 책들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그런 휴머니즘이 넘쳐 흐르는 경제학은 결코 경제학자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19세기의 저명한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1819-1900)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을 읽으며 부와 이상적 사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다. 존 러스킨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예술과 문화를 가르쳤던 사람으로 정통 경제학자는 아니었다. 정통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이 책의 수준은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을 경영하기 위한 경제학은 수학기호나 통계수치와는 다른 이야기를 지향할 수 밖에 없다. 존 러스킨은 '영혼 없는 인간을 가정한 경제학'에 반대하고 도덕에 기초한 경제학, 다시 말해서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을 주장했다.
저자가 서두에 밝히는 논제는 다음 두가지다. 부에 대한 합당한 정의를 내리는 것과 부의 획득은 궁극적으로 한 사회가 어떤 수준 이상의 도덕적 조건을 갖추었을 때 가능하기에 정직의 획복과 유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러스킨은 오늘날 공정무역이나 '착한 소비자' 담론이 강조하는 그런 질적인 소비태도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그는 생명을 약화시키거나 살육과 연관된 실패한 소비와 반대되는 의미로 '성공한 소비'라는 말을 하는데 오늘날의 '녹색소비'나 '생태적 소비'와 유사한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다소 풍자적인 측면이 있다. 사회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의 길을 걸어간 저자가 그의 대표작으로 '부자가 되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인 경제학을 논제로 다루고, 책 제목에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마태복음 제20장 14절을 인용한 것이라 한다.
특기할 점은 책 말미에 이 책과 관련된 마하트마 간디의 두 편의 에세이가 소개된다는 것이다. 간디는 이 책을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내 인생의 책'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가 느낀 점은 간단명료하다. 첫째, 개인의 이익이 모든 사람의 이익보다 우선될 수 없다. 둘째, 노동을 통해 생존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변호사의 직무나 요리사의 직무나 그 가치는 동일하다. 셋째, 농부의 삶과 직공의 삶과 같이, 노동하는 삶이야 말로 가치 있는 삶이다. 그리고 러스킨이 제시하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미덕으로 감사와 소망과 사랑을 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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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를 꿈꾸는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부를 창출하는 부자가 아니가 가장 존경받을 수 있는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현재의 사회는 부에 대한 동경과 욕망은 많은 편이지만, 부의 진정한 가치 혹은 부의 정의로운 분배 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경제학적인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이로 인해 이루어지는 사회의 경제적인 시스템 혹은 변화를 명확하게 판단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평등이 심화되고 삶이 더 고달파진다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점이 꽤 있는 듯 하다. 이 책이 1860년대에 출간된 책이라는 것을, 책의 마지막 ‘연보로 있는 러스킨의 생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렇게 확인을 하고 나서 놀란 점은 그 시대에 고민하고 있었던 그리고 이 책에 표현되어지고 있는 현실과 문제들이 크게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여전히 부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았으며, 정의와 정직이 경제체제의 운용에 있어서 당연하게 수반되어야 함에도 이에 대한 인식과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모든 이에게 동일한 분배를 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아직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점과 긍정적인 불평등이 아닌 다수를 힘들게 만드는 부정적인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노동의 지배력의 집중화와 이로 인한 횡포들 또한 여전히 기사를 통해서 책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부는 가난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에 대해 고민해보거나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책에서 설명되어 지고 있는 일부의 내용들은 명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정의들에 있어서도 모호하게 표현되어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들도 있어서 흥미롭게 읽은 책이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현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크게 무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정의라는 바탕으로 구성되어진 경제학의 모습들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또한, 정당한 방식으로 인한 경제체제가 그 모습을 갖추어 갈 때 보다 생산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부와 가난의 상관관계 및 이로 인한 적절한 소비의 필요성과 생명을 연장하고 유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생산과 소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 길지 않을 글이라 부담스럽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담겨 있는 생각들에 대해서는 몇몇 의문이 들기도 했고,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서 다른 책들을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하지만, 이 책의 부제인 ‘생명의 경제학’에 대해서 고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