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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이고 낯설고 아름답다. 독창적이고 낯설고 어렵다.
특히 두 가지 면에서 굉장히 독창적이고 낯선 작품이다. 첫 번째는 이것이 과연 소설인가 하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가 허구인지 경계를 구분할 수가 없다. 게다기 신문 보도 자료 같은 사진의 수록은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 도전하는 느낌을 준다. 두 번째는 여행기를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이다. <토성의 고리>는 영국의 동남부 지방을 여행하는 한 여행자(마치 구도의 길을 찾아떠난 순례자와 같은 분위기)가 들려주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여행자를 따라다니며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은 영국의 동남부가 아니라, 인류의 문명과 그 잔해이다. 공간감각을 자주 잊어버리게 된다. 시간과 시간이 교차하는 가운데 공간에 대한 지각도 몽롱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여행자를 따라 영국의 한 지역에 서있는 눈앞으로 인류의 문명사가 흘러간다.
여행기의 형식을 빌어 사실과 허구를 직조한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한 시대 전체가 끝나는 건 한순간의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43).
<토성의 고리>를 읽는 내내 긴 장례행렬을 따라 걸으며, 한 때 화려하게 피어났으나 이제는 잔해만 남은 현장을 목격하며 쓸쓸함을 추모하는 경건한 조사같은 느낌을 받았다. <토성의 고리>를 읽고 난 후의 느낌을 한 문장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인류문명의 추모기도와 그 경건한 감동"이라고 요약하고 싶다. 폐허로 변해버린 숲과 저택, 멸종된 청어, 버려진 공장, 몰락한 도시, 화려한 전성기를 지나 이제는 서서히 파고드는 쇠락의 흔적, 화자가 걷는 길에 만난 풍경은 화려했던 과거에 정비례하는 비애감에 젖게 만든다. "그전에 그는 창문을 장식하는 튤립나무, 스톡, 애스터들, 먼 동인도에서 차와 설탕, 조미료, 쌀 등을 가득 담고 항구에 도착하는 궤짝, 둥근 꾸러미, 나무통들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꼈지만, 이제부터는 가끔씩 자신은 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될 때마다 거대한 저택과 호화로운 배를 가졌지만 결국 비좁은 무덤에 묻힌 그 암스테르담 상인을, (...) 그 상인을 떠올렸다"(60).
그러나 과거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남겨진 폐허는 우리가 걸어갈 그 (인생의)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폐허에 가까이 갈수록 망자들의 신비로운 섬에 와 있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졌고, 그 대신 미래의 어떤 대재앙으로 파멸한 우리 자신의 문명의 잔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278).
얼마나 해박해야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자, 독서의 문제는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것! <토성의 고리>는 (적어도 내게는) 한 번 읽고 그 진의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은 <토성의 고리>를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뉜다는 한 작가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눈으로는 글자를 읽고 있는데, 생각은 자주 길을 잃었다. 상상력 부족인지, 집중력 부족인지, 이야기의 흐름을 자주 놓쳤기 때문이다. 세계가 주목하고, 지성들이 극찬한 "대단한" 작품의 수준 높은 지루함에 도전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권한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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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과 제목인 토성의 꼬리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우선 토성의 꼬리는 거대한 띠처럼 보이지만 수 많은 작은 고체 알갱이들이 마치 위성이 행성 둘레를 공전하는 고리를 이룬다. 그리고 서로의 인력에 의해 우주로 이탈하지 않고 토성의 주위를 돌며 거대한 띠를 이룬다. 즉 수많은 알갱이들이 하나의 작은 이야기들이고 그 작은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또 다른 완성된 이야기를 형성한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하나의 사건과 사건들이 모여 역사를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토성의 꼬리>는 10일간의 여행경험을 담은 기행문이지만, 우리가 보통의 여행에서 느끼는 경험과는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저자는 영국의 동남부 지방을 여행하며 그 여행지에서 추억을 떠올리고 그곳에 얽힌 사건과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 속에는 개인의 행동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되는 지를 보여주는 데, 시공간이 한데 뒤섞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현실에서 어느 순간 수백년전의 역사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과거와 현실 그리고 허구와 사실이 뒤섞여 책을 읽다보면 어디부터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혼란스럽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역사 다큐를 보는 느낌이다. 우리에게는 낯선 역사적 기록이기에 책의 내용은 난해하다.
저자인 W. G. 제발트가 길에서 얻는 경험은 독특하다. 우리도 여행을 한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러 미술관을 가거나 궁정이나 유적지를 찾는 것은 모두 과거로의 여행이다. 하지만 그 길에서 우리는 과거의 화려함을 찾으려 하지 파괴와 혼란의 역사를 찾지는 않는다. 반면 저자는 우리가 궁금해하지 않는 아픈 과거들을 찾아낸다. 폐허로 변해버린 숲과 저택, 버려진 공장과 몰락한 도시를 지나가며, 한때는 화려했으나 이제는 쇠락해버린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가며 그 흔적이 화려할 수록 저자가 느끼는 절망감은 더해진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페허의 기록을 통해 지금 인류가 누리는 문명 역시 어느 순간 쇄락해버릴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수많은 찬사를 받은 작품이지만 저자의 이야기가 낯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유렵의 역사라는 것과 우리가 역사에서 폐허와 절망의 경험을 찾는 경험이 드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의 과정을 가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그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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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영국 순례'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10장으로 구성된 <토성의 고리>는 작가가 1992년 8월 북적대는 도시가 아닌 공허한 풍경을 가진 영국의 동남부 도시들로 여행을 떠났고, 마주친 주변 환경과 그와 맞물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최근 EPL(England Premiere League)에 한국 선수의 진출이 눈에 띄게 활발하여 축구를 보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맨체스터’는 물론 언급된 ‘번리’, ‘블랙번’, ‘노리치’ 등의 도시들이 꽤 낯이 익을 것이다. 영국은 축구가 거의 생활이라는 단어자체로 설명이 된다는데, 축구팀의 연고 지명이 <토성의 고리>에서 발견되니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써퍽 카운티’를 시작으로 해서 1년간의 도보 여행을 떠났지만, 그가 만났던 곳들에서의 파괴의 흔적들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기조력으로 인해 파괴된 달의 잔해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지구 밖의 우주 이야기에 귀가 번쩍하지만, 제목이 다른 의미로 쓰였다는 것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파괴의 현장에서 슬픔을 느끼고, 인간, 자연 등 파괴되어 가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위기의식을 깨닫고 성찰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한마디로 난해하다는 한 단어로 설명이 될까? 작가에 대한 공부가 많이 부족했던 탓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이해하고 소화하기 위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또한 여행기에 맞는 에세이 장르에 포함될 것만 같은 글인데, 거기다가 사실과 허구가 교묘히 섞여 있다는 옮긴이의 말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사진들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이 실려 있어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감이 안 잡힌다. 그 대신 사진들이 있어 지루함이라는 단어를 쫓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옮긴이의 말이 <토성의 고리>를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을 주고 있어, 먼저 이 책의 끝부분에 있는 옮긴이의 말부터 읽기를 추천한다. 사실 이 책을 택한 이유가 작가 ‘W. G. 제발트’에 대한 설명이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었는데, “현재 가장 많이 토론되고 있는 작가”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이나 입장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이 무척이나 개성이 있고,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에 딱 맞는 설명인 듯하다. 옮긴이가 언급한 미로나 멜랑콜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미로에 갇혀 있는 느낌, 멜랑콜리한 상태였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처음 생각했던 느낌의 책이 아니어서 안타깝지만, 새로운 시선과 생각을 갖고 있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 제일 큰 수확인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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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독일 출신 작가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숭배자와 연구자를 거느린 작가라는 말에 바로 궁금증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어떤 글을 썼기에? 책을 펴고 깜짝 놀랐다. 대화가 없고 단락이 없다. 그저 쭈욱 이어지는 글속에는 온갖 상식이 넘쳐난다. 백과사전을 옆에 놓고 아무데나 한쪽을 열어봐도 정보가 가득한 듯한 그런 느낌이다.
전쟁, 사라져가는 자연, 전쟁으로 상처로 모든것들을 잃어간 나라, 사람, 투쟁이라는 이름하에 명분을 내세웠다가 피폐해지는 모습 그리고 그 가족의 삶. 온갖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있다. 이런 이야기인가? 싶어서 따라가다보면 잠깐 한눈 파는 사이 또 다른 이야기가 주도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건과 이야기들.
전쟁으로 인해 그 스러져가는 모든 살아있었던 그리고 사용했던 귀하딘 귀하게 만들어졌던 것들. 가끔 사람들이 스러져가는 한계성을 볼때마다 나무들이 참 부럽구나...자연이 참 부럽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은 그대로 있는데 그 주위를 맴돌던 역사속에 살던 사람들은 스러져 간다. 그 스러져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오래된 아주 오래된 나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라는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런 느낌이 이 책속에는 종종 등장한다.
가슴에 전율을 가져오게하는 그런 글.
난징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는데 난징에 황제군이 점령하고 천왕이 목숨을 끊자 그에 대한 충성심으로 적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을때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얼마전 영화 [낭징! 난징!]을 본적이 있는데 난징이란곳이 아주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니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대학살이 일어났을 것이고 말이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중국에 마약을 팔기위한 행보는 정말 섬뜩하기만 하다. 이부분에서 영국의 우월성으로 맺어진 강화조약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
역사와 인생, 그리고 유한하기만 한 삶의 모든 것들이 덧없음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담아내고 풀어냈는지 그의 해박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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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를 읽고 토성에 대해서 인터넷 지식에 쳐봤다. 토성은 모든 면에서 목성과 비슷하나 조금씩 크기가 작다. 토성의 지름은 약 12만 km로 지구의 9.1배, 부피는 지구의 760배이다. 하지만 질량은 지구의 95배 정도에 불과해 평균 밀도는 0.7g/cm3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행성들 중에서 가장 작을 뿐 아니라 물보다도 더 작은 것이다. 이 때문에 토성의 표면중력은 지구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자전속도는 목성 다음으로 빨라서 적도가 극보다 10%나 더 부풀어 올라 행성들 중에서 가장 납작한 타원체 형상을 하고 있다. 토성의 빠른 자전속도로 인하여 대기의 격렬한 흐름이 표면의 줄무늬와 반점을 만들어낸다. 목성형 행성들은 모두 고리를 갖고 있지만 토성의 고리는 특히 크고 밝아서 유명하다. 고리는 행성 주위로 공전하는 먼지와 입자들이 모여서 평평한 원반 형태를 한 것인데 토성의 고리 입자는 거의 대부분 얼음으로 되어 있으며 먼지와 다른 화합물이 약간 섞여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오래 만에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개체인 토성에 대해 알 기회가 있어 의미가 있었다. 소설의 제목이 <토성의 고리>여서 너무 신기하였다. 역시 작가만의 창의력과 상상력의 탁월함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화자는 영국의 서퍽 지역을 여행한다. 이미 한물가버린 도시, 잊혀져버린 저택, 길도 제대로 찾기 힘든 시골 마을, 관광객이 사라져 버린 해변 등등. 저자는 이런 공간적 물질에 숨기어진 것들을 시간의 지식으로 홀연히 밝혀내고 있다. 정말 우리들이 잊혀버리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다시 풀어내면서 새롭게 상기시켜가는 저자의 날카로운 필력들이 아주 돋보이게 하는 작품 같다. 작품의 진행되는 과정들을 보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였던 이야기들을 통해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한 자연과 사람과 장소와 인간성의 파괴를 아무 가감 없이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황폐해져 버려 버림을 받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서 역사를 통해 역사책에 흔히 표기된 시대에 따른 제국들의 영토 지도처럼,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허상의 지식들을 과감히 날려 버리고 인류가 자행한 여러 비극에 대한 날것의 진실을 접하게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바람직한 윤리의식과 잊혀 진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은 우리들이 꼭 지니고 추구해 나가야 할 자세이다. 이런 좋은 소설을 통해서 내 자신의 모습을 초심의 마음에서 종심까지 갈수록 노력하는 모습을 변화되었으면 하는 각오도 갖게 된다. 작가가 작품에서 말하는 내용을 통해서 독자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추구할 수 있다면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토성이라는 행성을 이용하여 독창적이고 낯설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낸 작가의 위대함에 존경을 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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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들면, 여행기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정도로 범상치않은 작품의 세계를 만난다. 이 작품은 제발트의 ‘소설’이다. 저자가 화자인 듯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고, 논픽션 산문 같지만 실제와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되어있다. 이런 면모들 때문에 극찬을 받았을까. 아우스터리츠보다 먼저 쓰인 그의 세 번째 소설, 쉽지 않을 것이란 각오를 하며 펼쳤다. 제발트. 일단 이 작가에 대한 공부가 좀 필요한 작품이다. 비록 나는 하지 않았지만. 1944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문학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이민을 떠나 1973년 알프레드 되블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뮌헨의 독일 문화원에서 근무했고, 20년이 넘게 교수생활을 했다. 저서로는 <공중전과 문학><아우스터리츠><현기증. 감정들><자연 이후 기초시> 등이 있고, 출세작 <이민자들>로 유명하다. 여러 문학상을 쓸었던 현대문학사에 중요한 작가이다. 처음 접하는 지식적인 이야기가 생각보다는 쉽게 읽혔다. 행로도 저자가 관심 있게 생각하는 구도로만 흘렀다. 즉, 어디를 가나 그의 시선은 2차 대전과 엮였고, 꼭 그 전쟁이 아니더라도 제국주의의 다양한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에서 그 사유가 많이 정차되었다. 소재들은 툭툭 던져지고 툭툭 끊기면서도 그 흐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저 사유를 따라가는 것으로 만족할만한 책이다. 던져주는 모든 소재에 화자 자신도 오래 머물지 않았고, 독자가 그 작업을 하기에는 책은 너무 방대한 사유를 쏟아내고 있다. 무슨 이야기가 ‘이어질지’ 계속 기대하면서 보게 되는 작품이다. 혹자는 ‘매혹적인’사유라고 평하지만, 사실 말 많은 할아버지의 ‘지적 너스레’를 호기심 있게 들어주는 손녀가 되어야 하는 작품이지 않는가 하는 부분에 달하기도 한다. 학식 있는 작가의 대단한 작품이라고 해서 유머나 위트를 기대하지 말자. 문단구분도 페이지 넘겨가면서 찾아야 하고, 문장 하나도 호락호락 맺어지지 않는 작품이다. 저자의 색깔이 많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개성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 특유성일 수도 있어 저자의 네 번째 소설이자 마지막 작품인 ‘아우스터리츠’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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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제목을 보고 SF소설이리라 예상했지만 전혀 예상과는 다른 종류의 소설이었다. 그 느낌을 말하자면 새롭고 낯설고 난해하다. 고대 왕국이 있던 영국을 여행한 후에 쓴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토성의 고리란 제목이 붙었을까? 토성의 고리란 토성의 기조력으로 인해 파괴된 달의 잔해를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해도 영국 고대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과 토성의 고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무엇인지 깊은 은유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이책의 작가 W. G. 제발트는 수많은 찬사를 받고 있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작가에 대한 찬사를 보고 나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 쉬이 읽을 수 있는 성격의 책은 아니다. 번역의 탓인지 문화의 탓인지 지식이 없는 탓인지 읽어나가기에 쉽지 않은 이 작품은 세계문학고전들을 떠올리게 하는 난해함과 모호함, 은유로 뒤덮여 있는듯하다. 읽다보면 정말 실제로 일어난 여행기같기도 하지만 일기문 형식의 창작 소설이라고 하니 허구가 어느정도 섞여 있으리라. 해박하고 상세하게 설명되어있는 고대의 흔적, 저자의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직쩝 찍었다는 사진을 보면서 이것이 실제 기행문인지 소설인지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진실인것인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스스로 창조해나가고 그것을 스스로 파괴해오면서 진행되어왔다. 전쟁과 살육의 참상, 희생자들, 그들의 고통의 목소리들은 어느새 세월의 흐름속에 묻혀버렸지만 그 잔해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런것들을 돌아보는 화자의 생각은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지식과 어우려져 혼란스럽게 하고 잇지만 그 폐허들을 보면서 저자가 화자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인류문명의 잔혹함을 비판하고 절망하는 듯하면서도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듯하다. 앞으로 그런일은 반복되지 않아야 하고 그것은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깊은 뜻이, 미처 내가 읽어내지 못한 것들을 담고있는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은 이유를 약간이지만 어느정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출간된 여행기, 기행문 형식의 소설은 많이 있어왔고 몇권의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이렇게 독특한 시선으로 접근하고 많은 것을 읽어내는 작품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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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10일간 영국 동남부 여행을 하며 그는 하루에 한장씩 10장에 걸쳐 영국이 아니라 인류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루씩 그를 따라가며 읽은 책은 아주 무거우면서도 독특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부르고 또 그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불러온다. 책의 시작을 보면, 나는 병을 앓았고 퇴원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 사이 한 친구는 세상을 달리했다. 건강했던 그 친구가 죽다니.. 그런데 누구보다도 상심한 사람은 그의 절친인 또다른 친구일 것이다. 그 친구은 어떠어떠한 성격인데 이런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마침 나는 토마스 브라운의 해골에 대해 조사하던 차 그 친구가 소개한 사람이 논문을 보내주고...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이렇게 배경 같은 이야기를 한참 읽노라면 글 사이사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느새 시작하고 있다. 10일간의 여행에 대한 기행문의 형식이지만, 그 여행에서 저자가 떠올린 추억들, 한가지 한가지 사건에 얽힌 뒷 얘기들,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의 행동이 어떻게 역사에 나타나고 역사를 바꿔나가는지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문맥은 어느새 바뀌어 있고 이야기는 수백년의 역사를 넘나든다. 이 과정을 능숙하게 풀어나가는 저자의 방식은 꽤나 매력적이다. 이런 얽힌 실타래 덕분에 현실과 창조, 역사와 상상의 구별이 아주 어렵다. 그는 인류가 만들어온 파괴와 혼란에 대해 슬퍼하지만 담담히 이야기한다. 한때 화려했으나 이제는 퇴물이 되어버린 저택(2장), 짧은 기간 유럽 최고의 휴양지였으나 이제는 실업자로 넘치는 도시(3장), 유럽 문명의 발전 뒤에 가려진 식민지 착취(5장) 등의 이야기에서 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류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이야기(7, 8, 9장)까지 그는 퇴락과 문명의 그림자, 산업의 변화와 도시의 흥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담담하게 설명한 뒤 붙이는 한마디 감상이 그의 본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3일째 이후의 글에서였다. 바다를 보는 사람들을 처음에는 방랑 민족의 남은 인원이 구원을 기다리는 것으로 비유하다가 곧 공허와 함께 남아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때 그것은 단지 그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느낀 절망감과, 구원의 기대, 그리고 그 뒤의 공허함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가 걸어온 길에서 본 것은 전쟁과 폐허의 뒷모습이고 인류가 남긴 유산의 그림자이다. 그에게 희망은, 미래는 오로지 절망 뿐일까? 제발트가 말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반성이다. 이제까지 유럽 문명과 자본이 만들어 놓은 폐허를 보았지만 그는 절망하기보다는 반성하고 변화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누에나방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국의 누에알이 페르시아로 넘어가는 것은 수천년이 걸렸고, 그 뒤 유럽의 이탈리아까지 퍼지는 것은 천년이 걸렸다. 이 양잠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것은 불과 오십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p.325). 그리고 이 양잠업은 다시 영국으로, 독일로 퍼지게 된다. 종교와 전쟁과 국가 산업과 관련된 양잠업이지만, 글의 마지막은 장례식의 검은 비단 이야기로 마친다. 장례식에 입어야 하는 검은 비단이나, 거울에 검은 비단을 덮는 네덜란드의 습속은 한편으로는 미신이자 과장된 사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문명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하나이기도 하다. 저자는 문명의 발전은 수많은 그림자를 남겼고 사치과 과장도 그 한부분이지만 바로 그 부분이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저자는 유럽인이기에 유럽 문명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사색하고 경험한 바를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유럽 문명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 시대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애잔함과 지켜주고 싶은 안타까움을 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아닐까. 주류가 생각없이 달리려고 할 때, 그러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책을 읽은 뒤 왜 책의 제목이 토성의 고리인지를 이해했다.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가장 큰 특징이자 다른 행성과 구별하는 표시이다. 그렇지만 그 고리는 대부분 얼음과 먼지로 만들어져 있는 얇은 층이다. 제발트가 말하고자 하는 문명에 대한 사색과 자기반성이 인간을 인간으로, 삐뚤어진 문명을 건강한 삶으로 이끄는 표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참고, 토마스 브라운,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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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준비에 들떠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은 들떠있지만 준비에 들떠있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가기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책상위에 겹쳐 쌓여있고, 여유를 두고 처리해도 되는 일들이 앞당겨지면서 관련 자료를 여기저기 빨리 받아내느라 전화질을 해대고 일 마감을 해버리고 있는 중이다. 그 마무리 해야 할 일들 중에는 여행을 가기 전에 끝내야 하는 책들이 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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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글이었다. ‘독창적이고 낯설고 아름답다!’ 는 평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닌 듯했다. 이름마저도 낯선 제발트. 아무런 준비 없이 공격당한 내 마음은 싱숭생숭,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람마다 특색이 있다. 누군가가 희망을 맛볼 때 다른 누군가는 같은 상황에서도 절망을 느낀다. 그것이 타고난 습성인지 환경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에 의한 선택인지 알 길은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염세주의자이기 보다는 긍정적 사고에 물들고 싶어 할 것이다. 이 작가가 태어난 것은 1944년. 패망한 독일의 피폐함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그 시절 작가는 너무 어렸다. 자신도 모르게 온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경험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굳건함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던 독일 경제를 고려할 때 그의 우울한 심상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는 의문으로 남는다. 교통사고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줄 그 스스로가 알진 못했을 터이니, 죽음을 앞둔 사람의 복잡한 심경이 글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고도 할 수 없겠다. 대체 무엇이 그에게 현대 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혹은 무거운 시각을 가져다준 것일까? 이런저런 의문들은 답을 찾을 수 없어 그만 내려놓고 글을 살펴본다. 사실과 상상의 모호한 결합.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작가의 사고가 작용한 결과물인지 파악이 힘겹다. 배경은 전쟁의 끄트머리 혹은 그 이후. 주인공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핑크빛 미래를 그릴 만한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바라본 세상은 철저히 파괴되었기 보다는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그리는 무언가 였는데, 그리 편안한 시각은 아니었다. 현대인이 이룬 화려한 문명으로부터 느끼는 매스꺼움. 같은 인간을 다르게 대하는 사람들의 비열함에 대한 냉철한 시각. 일반적이라고 볼 수 없는 분위기가 작품을 시종일관 이끌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는 느낌,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바로잡아야만 할 것 같단 생각. 안타깝게도 작가는 그 이상은 제시해주고 있지 못한 듯했다. 무엇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해결책인지, 그것까지 제시해주었으면 정말 좋으련만, 그러나 이런 불편함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우리 일상에서 항시 접해온 것들이다. 현실에서는 불편하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 없는, 너무나 일상화된 것들. 왜 소설을 통해 접하면 불편한데 현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그것이 어쩌면 작가가 그려내고자 하는 바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나 당연시 되어온 것들에 대한 일종의 문제제기. 현실에서도 아무런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고 있기에, 작가로서도 굳이 방안을 던져주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에만 치중한 것이 아닐까 라는 확신. 당연히 편할 리가 없었다. 문제가 발생하면 저마다 해결책을 찾기에 급급해 하는 게 이 세상의 법칙인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그러나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만연한 세상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에 어느 누가 그리 쉬이 순응할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가 10년이요, 이 작품이 쓰여진 건 1995년이니 그 때로부터 1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특정 국가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으며, 그 국가가 이야기하는 게 진리이자 정의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모습은 예전보다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작가의 선견지명처럼 미래는 막연히 낙관해서는 아니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땀 흘려 방법을 강구하고 이제껏 걸어온 방향을 뒤틀고자 안간힘을 써야 하는데 우리 인간이 참으로 무지하여 아무 것도 행하고 있지 않은 건 아닌지를 되묻게 된다. 이 소설처럼 불편해야만 하는 진실은 너무도 편안하게 끌어안은 채, 그 진실이 내 심장에 거대한 구멍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