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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9번째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에 이어 2탄이 나왔다. 작년 8월에 접했던 장정일 님의 날 것 그대로의 독서 분투기. 꼭 1년 만이다. '독서는 극히 개인적인 쾌락'이란 독서론이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라는 독서론으로 발전하더니, 이 책에서는 '사회적 독서'론을 이야기한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에 대한 나의 리뷰 빌리거나 사거나 버리기에 애매한 책, http://blog.yes24.com/document/2593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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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독서일기를 쓴 것이 몇 해 째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기는 것은 이제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다. 가끔 나의 블로그 명이 서평이 아닌 `일기'여야 하는지, 스스로 불만을 제기해본 적이 있다. 서평이라고 하면 어떤 서적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과 평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 내가 맘편히 독서일기로 지칭한 것은 나의 글이 아직 무언가를 비평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책과 마주하고서도, 그 책의 지은이에 주눅들지 않고, 책의 주장에 반격할만한 내공이 한참은 부족한 것이다. 반면, 일기라고 하면 형식과 내용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 형식의 자유로움 때문에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듯' 어떤 책이나 작가에 대해선 날카로운 비평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네이밍'의 사유는 장정일 때문이다. 알다시피 장정일은 많은 시와 소설을 썼다. 그는 소설 한 편 때문에 구속되는 불운을 겪기도 한 작가다. 그런 치열한 글쓰기를 해 온 그지만, 1993년부터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책으로 펴내고 있다. 시간이 지나 그의 독서일기는 7 권째를 마지막으로 제목을 바꿨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는 이름을 바꾼 독서일기의 두번째 시리즈다.
그의 소설 한 편 읽어보지 못한 게으른 독자지만, 나는 그가 펴낸 첫번째 독서일기를 잊지 못한다. 1993년 1월부터 1994년 10월까지로 부제가 붙은 그 책에는 날짜와 그날의 일정과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이 담겨 있다. 일기 형식을 독후감과 혼합한 것이다. 어떤 날의 일기는 책을 빌리고, 레코드를 구입하고, 책정리를 한 것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 파격적인 독후감은 그 이후로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장정일이 독서일기를 시작한 그 나이에 이르렀을 때, 나또한 그 형식을 좇아 인터넷에 독서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1권 첫 장에는 아주 짧은 서문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유명한 서문은 독서일기를 쓰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의욕과 동기를 불러올만 했다. 책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명쾌하게 `쾌락' 때문이라고 답변한 것. 작가로서 행복한 저자되기만큼 갈망하는 것이 어떤 책을 정성들여 읽은 후, 그 들뜸으로 나름의 후기를 적는 `행복한 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아 몸 가운데 눈을 가장 소중히 했다는 작가, 그의 쾌락 독서론은 20여 년이 지나 어떻게 바뀌었을까?
"무릇 책을 읽는 일은 도가 아니다. 이번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이 그렇듯이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로 난 길이다." 서문, 책을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온다, p.11
시간이 흐르고 군입대를 준비하며 독서로 소일하던 청년은 이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다. 반면, `동사무소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을 소망하던 작가는 문예이론을 가르치는 초빙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7권째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던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8번째부터 이름을 바꾼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서평을 더 이상 `일기'안에 담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미 어떤 무게와 전문성을 갖고, 세인의 이목을 받는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그는 좀더 격식을 필요로 했을까?
일기라는 형식을 버림으로써, 이 책은 전문 서평으로서 날개를 달았다. 작가의 일상을 훔쳐보던 독자들의 한가지 재미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책에 대한 장정일의 끊임없는 욕망과 서평자의 균형잡히고 날카로운 필력이다. 한 번의 필화사건을 겪었지만, 여전히 그는 살아 있는 권력에 대고 쓴 소리를 할 줄 아는 작가다. 문단의 비중있는 작가들의 작품도 그의 비평적 균형감각의 예외가 될 수 없다. 권력과 권위 모두에 주눅들지 않는 서평자의 담담한 나레이션, 서평의 진수를 느끼기에 충분한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일상이라는 흥미요소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의 서평은 흥미있다. 비평의 칼날을 벼리고 책과 저자와 해설자를 나름의 방식으로 요리하기 때문이다. 그의 서평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책과 저자에 맞서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비중있는 작가의 작품은 작가의 중량감 때문에 쉽게 비평하기 어렵다. 일단, 독자는 배우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런 글 뒤편에 실리는 일종의 주례사 비평들은 대개 칭찬 일색이다. 이중적인 견제를 받는 독자가 어떻게 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안을 갖겠는가?
그에 비하면 장정일이 책을 다하는 자세는 탈권위적이며, 자유분방하다.
"이 책을 땅바닥에 패대기치지 못한 것은 도서관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p.372) "아해(해설자)는 <심청>을 가리켜 `우리 문학사 전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부하고도 무시무시한 현존을 포착한 소설'이란다. `빨기' 대장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빨아줄 수 있죠? 이제 해설자는 자신이 쓴 <심청>의 찌라시를 꼭 자식들에게 읽혀야 할 것인데, 그 자식들이 아둔하지 않다면 반드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이, 빨기대장, 비평이 뭐야?" (p.387)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고의 무능력자로 판명될 공산이 큰 이명박의 연설 원고는, 지금 누가 쓰고 있는걸까? 모두 이바카체 같이 허다한 책을 읽고, 글을 갈고 닦는 자들임에 분명하다."(p.249)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에 굴복하는 것은 다르다. 책읽기를 통해 장정일은 쾌락에서 현실로 돌아왔다고 썼다. 그렇다면 책읽기의 궁극적 목적은 현실의 나를 찾는게 아닐까? 아니 현실의 나를 단련하는 것이다. 그 팽팽한 대결의 과정에서 비평은 탄생한다. 독서일기의 후신격인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은 분명하다. 일기가 비평이란 새옷을 입고 당당히 책과 맞서는 일이다. 그래서 장정일은 비평의 핵심을 객관, 공감, 비판 사이의 균형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균형을 갖추지 못한 서평은 제 정신을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가끔은 책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책읽기를 돌아봐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반성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관행대로 가기 마련이다. 책읽기도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만나는 한 권의 책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저자며, 당신에게 무언가를 주장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가르치려 한다. 당신이 줏대없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어쩌면 책을 읽을수록 바보가 될 것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리즈는 책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서평 책이다. 이 책을 단순히 한 작가의 독서편력에 대한 궁금증으로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책읽기는 몹시도 주관적인 선택(취향)의 과정을 거친다. 그 선택에 관여할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표지 사진이 독특하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책들이 집안 곳곳에 탑모양으로 쌓여 있다. 열려진 문 사이로 무언가를 열중하며 읽는 장정일이 보인다. 시원스레 깍은 장정일의 까까머리가 빛난다. 내가 이십대 일 때도, 그는 이런 자세로 책을 읽었다. 작가의 나이 이제 지천명에 다다랐다. 그 시절, 정정일은 나의 책읽기의 길잡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처럼 많이 읽고, 그처럼 잘 쓰고, 그처럼 책읽는 삶을 동경하게 했다. 여전히 그는 변치 않고 책을 모으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가 책을 요리하는 솜씨가 부럽다. 장정일보다 많이 읽진 못했지만 나는 젊다. 더 많이 읽고 쓸 시간이 있다. 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여전히 장정일은 독자에겐 책읽는 사람의 미래다.
201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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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즐겁게 읽었던 터라 두번째 책도 망설임없이 집어 들었는데 이 책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 뒷 표지라고 말하면 작가에게 실례가 되는 것일까? "저는, 책을 읽는 일에서 처음으로 쾌락을 느낀 어느 때부터 다른 사람의 글이나 책을 읽는 행위가 마치 제가 그 글이나 책을 쓰는 것인 양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각 속에서는, 제가 읽어주기 전에 그 글이나 책은 아예 존재한 적이 없는 게 되죠. 유아적이고 독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바쳐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에 공감하고자 했습니다...그렇게 저는 많은 책들의 의사 저자가 되고 양부가 되었습니다. 저에겐 그게 쾌락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책을 유아적(?)이고 독단적(?)으로 보고 쾌락을 느껴 쓴 서평을 읽고 쾌락을 느껴 또 독후감을 써보는 나는 거울에 비친 거울속의 거울속의 그 무엇을 희미하게라도 붙잡게 되는 것일까?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지성인이라면 거의 본능적으로 소설을 피한다」라는 장에 묶여 있는 글들이다.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1984년』으로 유명한 소설가인데도 그가 「소설의 옹호」라는 에세이에서 소설의 위상이 극도로 낮아졌다며 "나는 결코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말이 10여년 전에는 변명하는 말로 들렸지만, 요즈음에는 의도적으로 자랑이라도 하듯 말해진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할 필요조차 없다...분별 있는 사람을 찾아가 '왜 절대 소설을 읽지 않는가?'라고 물어보라. 그러면 그 이유가 광고 목적으로 고용된 삼류 서평가들이 써놓은 형편없는 단평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940년대 영국에서도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혼은 죽은 것이다"와 같은 '광고성 서평', '주례사 서평'탓에 소설 독자가 떨어져 나가고 소설의 위상이 떨어졌다고 진단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출판사와 매체로부터 자유로운 아마추어 서평가를 쓰자는 순진 소박한 제안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요새는 아동용 책이 아니라면 전집으로 책을 구매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예전에는 조금의 여유라도 있는 집이면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선집 등이 마루에 보란듯이 꽂혀 있었고, 나의 중고생 시절을 돌아보아도 용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학교앞 책방에서 삼중당 문고를 고르는 일이 큰 기쁨 중의 하나였다. 물론 저렴하다는 것과 들고 다니기 편하다는 것 때문에 그 당시 진정으로 완전 소중한 책들이었다. 근래에 다시 세계문학전집이 꾸준히 간행되어 읽을 것이 마땅치 않을 때 골라읽는 즐거움을 주는데, 저자는 세계문학전집은 여기 속한 책들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맹신을 주고,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한다는 '수집병적인 독서'를 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경고하며 찬물을 끼얹고 있다. 유럽과 영미문학 중심으로 짜여 있으면서 어떻게 세계문학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와 통속문학의 범주에 드는 작품이 선정되거나 수준미달의 역자나 부실한 해설의 문제를 지적하는데는 공감이 간다. 놀라운 것은 세계문학사에 대한 책이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이 근대문학의 쇠락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나도 책을 신전의 기둥처럼 쌓아놓고 원없이 읽고 싶지만 수도사처럼 딱딱한 침대보다는 푹신한 침대가 좋다. 그래서 나는 장정일처럼 살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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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혼은 죽은 것이다", "평생 놓쳐서는 안 될 한 권의 책"과 같은 광고성 서평을 보고 고른 책이 결국 '버린 책'이 돼버린 경험을 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주례사 서평'과 달리 "이 책을 땅바닥에 패대기치지 못한 것은 도서관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라고 혹평도 마다하지 않는 깐깐한 서평가 장정일의 서평집 <빌린 책/산 책/버린 책 2>이 나왔다.
그는 '서평자란 서평을 쓰는 동안 도덕성이 마비되는 사람'이라고 했다는, 신랄한 서평을 많이 쓰기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을 닮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는 오웰의 작품이 3편이나 등장한다(<나는 왜 쓰는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코끼리를 쏘다>). 장정일의 서평집을 고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건, 장정일의 서평을 읽다보면 책을 보는 안목이 커질 뿐 아니라 더불어 '세상을 보는 눈'이 번쩍 떠지는 통렬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통렬함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언론에 CEO들이 인문학과 고전 읽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는 기사가 마치 '미담'처럼 소개되곤 한다. 그런데 그분들은 뭐하러 인문학을 배우고 고전을 읽으실까? 소비자와 피고용인을 더 효과적으로 쥐어짜기 위해? 노조와 공생하고, 비정규직을 차츰 줄이고, 하청 업체를 동반자로 대접하고, 입사와 진급에 있어 남녀와 지역을 차등하지 말고, 기부 문화에 앞장서며, 환경 기준 엄수를 지속가능경영의 원리로 삼고····. 뭐 이런 게 그대들의 인문학이고 고전 읽기일 텐데. - 본문 가운데
책을 읽는 데는 대략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별 생각 없이 글자를 따라가며 읽는 것이고, 둘째는 글의 내용을 '그런 건가' 하면서 그대로 수용하며 읽는 것이고, 셋째는 작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읽는 것이다. 이른바 비판적 글 읽기는 '장정일식 독서일기'의 최대 강점이 아닌가 싶다.
'까칠한 독서 가이드' 장정일이 읽은 100권의 책
전작에 이어 이번에는 문학작품 비평까지, 동서양을 망라하고 장르를 넘나드는 100여 권의 많은 책들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사회적 독서'로 혹은 '쾌락의 독서'가 되기도 하면서 읽는 이에게 다가온다. 그 첫 포문을 연 것은 인권에 관한 책 이야기다.
이명박 정권 들어 인권 서적이 자꾸 나오는 것은 분배의 양극화와 복지 정책에 대한 홀대가 시민의 권리인 사회권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기 때문이고, 거기에 전선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권은 본래 정치적이다"는 앤드류 클래펌의 명제와 만난다. - 본문 가운데
우리는 보통 인권하면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 또는 '하늘이 부여한 권리' 따위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인권은 정치적인 것으로, 하늘에서 저절로 부여받았다는 천부인권은 원래 없다, 현실에 바탕을 둔 시민권의 역사가 인권의 역사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인권은 정치적이다>(앤드류 클레펌)는 신선하고 공감이 많이 가는 책이다. 역시 장정일다운 책 선택과 서평이 흥미롭게 읽힌다.
인권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방자유주의 진영에서 나온 '자유권'과 옛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이 강조한 시민의 권리인 '사회권'이 있다는 사실. 노동할 권리와 노조를 결성한 권리에서 교육받고 치료받을 권리 등의 실질적인 삶을 돌보는 사회권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자유권이 곧 인권이라는 일방적 인식은 밖으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오히려 사지로 몰아넣는가 하면 안으로도 비정규직에 대한 냉대와 재개발 지역 철거민들의 주거권 투쟁을 외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감정노동'의 폐해를 다룬 <친절은 상대방을 베는 칼>, '코리아 인권'을 제시하는 <북한의 인권은 왜 선택적이어야 할까>, 교육 불평등의 심각성을 말하는 <콩 심은 데 콩만 나는 교육> 등 우리 사회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내 그 거울 앞에 서게 하는 책들과 장정일만의 서평이 이어진다.
독자를 거울 앞에 서게 하는 장정일만의 서평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권해도 불안하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 현명한 것으로 통하고 "손해 보더라도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은 순진한 어리석음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 아이들이 커가는 일을 차마 지켜볼 자신이 없다. (줄임)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 본문 가운데
이어지는 2부와 나머지에서는 기업과 권력, 언론, 도시, 전작에는 없었던 문학에 관한 영역까지 탐색한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라는 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 당시 발언으로 마치 회색빛의 암담한 묵시록처럼 들렸던 말이었다.
대통령도 CEO 출신을 뽑더니 일하기 좋은 나라가 아닌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된 기업국가 한국은 이미 그들만의 파라다이스가 되버렸다(요즘에는 아예 교과서에 '민주주의 국가'란 표현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말로 바꾸려는 태세다, 물론 여기에서 자유는 구속의 반대말이 아닌, '자유시장경제'의 탈을 쓴 줄임말이다.) 권력이 시장으로 즉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재벌들에게 넘어감으로서 생기는 문제를 다룬 책들을 장정일이 놓칠 리 없다.
예전처럼 권력이 재벌에게 '삥'을 뜯는 게 아니라 이젠 역으로 재벌이 비자금으로 권력을 '섭외'(영향력 있는 인사에게 뇌물을 주는 일을 말하는 삼성만의 용어란다)하고 장학생으로 관리하게 되면서 법조계, 언론계, 학계, 공공기관 등 사회 곳곳을 병들게 한다는 김용철의 양심선언 책 <삼성을 생각한다>와 <굿바이 삼성>(김상봉 외), <한국 사회, 삼성을 묻는다>(이병천 외) 등에서 장정일은 "이 책을 읽고 삼성을 생각한 당신이 과거의 조명자일 뿐 아니라 미래의 선구자"라고 말한다. 장정일이 전작에 이어 또 한 번 삼성을 거론하는건 그들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심각성을 절실하게 느껴서겠다. 재벌의 세습경영을 따라하여 현대차 노조가 이루어낸 '세습취업'을 떠올려보라.
권력이 재벌에게 넘어가고부터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대학이다. 시장과 기업의 하수인이 된 지 오래인 미국 대학들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들, <대학 주식회사>(제니퍼 위시번)는 기업이 대학의 학문적 자유를 어떻게 자신의 이익에 맞게 유린하는지를 풍부한 사례로 설명한다. 문제는 미국이나 우리의 대학은 기업보다 국가로부터 더 많은 보조비를 받고 있는 때문에, 이런 현상은 공유재를 탈취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책으로 사는 사람...다음 서평집이 기대되는 이유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가 궁전을 뜻하는 팰리스(palace)나 성을 뜻하는 캐슬(castle)로 명명되는 것은 현대의 특권층이 단순한 부자에 머무르지 않고 '중세의 귀족'처럼 차별화 하려는 전세계적 징후임을 말하는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마이크 데이비스 외), <포스트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움베르트 에코) 등은 모순을 향해 치닫는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뛰어나지만 종으로서의 인간은 우둔하다'는 잠언을 실감하게 하는 원전 이야기 <켤 수는 있어도 끌 수는 없는 불> 편도 빼놓을 수 없다. 장정일은 여러 책들을 빌어 네 개의 원전신화(청정신화, 가격신화, 안전신화, 대체불가능 신화)를 조목조목 해체해버린다. 지구 온난화와 공동체의 삶을 걱정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당장의 이익에만 충실한 기업과 결탁한 정치 엘리트를 향해 '너 그만해!'라고 소리칠 수 있는 힘과 용기로 화하는 날이 어서 오길.
이외에도 평소 역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볼때마다 혁명은 왜 성공하는 순간 폭력이나 독재에 빠지고 마는지 궁금했었는데, 내 속을 알기라도 하듯 <혁명은 왜 괴물을 낳는가>라는 부제의 서평글이 등장한다. 이 부분이 더욱 흥미로운 건 이명박 대통령이 시민사회와 종교계, 많은 사람들의 숱한 반대와 이견에도 불구하고 부득불 4대강 개발 사업을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장정일, 그에게 묻는다면 단연 책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한 건 책 표지와 저자 소개란에 나온 빡빡 민 머리를 하고 수북히 쌓아놓은 책을 읽는 수도사 같은 지은이의 사진 때문이다. 그의 치열한 독서관이 느껴지기도 하고 다음 서평집을 기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에이미 굿맨 외)를 논하며 'G20 홍보물'에 쥐 그림으로 그라피티 작업을 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박정수를 위한 장정일의 탄원서 형식의 글이 책에 나온다. 내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곱씹게 한 문장을 소개한다. "'G20'행사가 선진조국 창조에 필요불가결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소수나마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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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리즈를 읽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구입하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은 읽는 책의 범주가 다양할테니 . 평소 내가 읽는 책들의 범주를 벗어나 좀 더 다양한 텍스트를 원할 때 이렇듯 독후의 서평을 모은 책도 한 두권쯤 구입하게 된다.
90년대에 읽었던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편년체라면 2011년도에 읽은 <빌린책,산책,버린책>은 기전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은 날짜순으로 엮어낸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책의 목록을 찾기가 쉽지 않으나 책을 읽게 된 배경이나 책을 읽었던 시기에 작가의 마음주변에서 일어나는 감상등이 살짝살짝 보여 아마추어같은 그 느낌이 좋았는데.
이 책에서는, 아마추어에서 프로패셔날의 경지에 이른 서평가의 모습이 보인다. 비슷한 내용이나 주제를 다룬 책들을 읽고 비교견적하듯 서평을 쓴 글들을 읽으며 작가가 읽는 책의 범주와 그 책들을 읽고 습득한 것을 비교견적하며 써내는 글재주에 혀를 내두르게 되면서도 예전 "독서일기"때의 모습보다는 과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니 몇 백쪽 분량의 책을 단지 두서너쪽으로 압축해서 전달하는 그의 글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거니와 읽기 위해 읽는, 서평을 쓰기 위해 읽어야하는, 서평가의 고달픔에 대한 생각이 꼬리가 되어 책읽는 중간중간 옆길로 길게 새어나갔다.
책읽기가 좋아서 그리고 읽은 느낌을 적어두고 싶어서 시작한 글쓰기로 보였던 초기의 <독서일기> 작가가, 이제는 쓰기 위해 읽기도 하겠구나 (아니 어쩌면 읽기보다는 쓰기에 더 방점이 부여된 것처럼) 느껴지는 서평가라는 전문 직업군의 대표주자로 재무장한 것처럼 보였고 그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무미건조해 보인다.
작가의 해박함과 꾸준함이야 여전히 부러웠지만. 읽고 싶은 책을 느긋하게 읽고 여기에 아마추어처럼 느낌만 올려두는 정도로도 책읽기의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건 너무 심한(!) 자기만족일까.
*** 30쪽 가량으로 조지오웰에 대해 언급했던 부분, 반갑게 읽다. 독설가로도 평가되는 장정일이 조지오웰을 그 대상으로 삼은 것도 반가웠고 조지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나 <숨 쉬러 나가다>를 읽고 느꼈던 내 생각들과 장정일의 평가가 크게 다르지않음이 또한 반가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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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은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희곡을 쓰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그의 독후감을 모아 펴낸 책을 주로 읽게 되었다. 이번이 두 번째 책이고, <시사인>에 연재하는 그의 <독서일기>도 빠짐없이 읽어보고 있다. 뭐랄까. 그의 글은 군더더기가 없고, 날카롭다. 특히, 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 되지 않는 책에는 거의 경멸 수준의 비판을 가한다. 좀 과하다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세계에서 동업자의식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의 글에 믿음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글에서뿐만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아웃사이더’이다. 그의 작가소개를 보면, 무서운 아버지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가 독서였으며, 그의 어릴 적 꿈은 하급 공무원을 하면서 일찍 퇴근해 새벽까지 좋아하는 책을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제도권 교육은 중학교로 연을 끊었으며, 성인이 되기 전에 옥살이하는 곡절까지 겪었다. 나중에 그가 쓴 소설이 외설논란으로 법정에까지 가게 되고 그는 두 번째 수감된다. 그때의 기록은 그를 변호했던 강금실 변호사의 책<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 나와있다고 한다. 정작 국내에서 외설판정을 받은 그의 책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일본에서 발간되는 등 해외에서 더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대부분의 목록이 비문학이다. 특히 2권에서 다룬 책들은 인권, 사회주의, 역사 등의 분류아래 묶여 있는데, 유일하게 소설을 다룬 챕터가 ‘지성인이라면 거의 본능적으로 소설을 피한다’라는 분류로 소설 일부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서문에서도 저자는 ‘사회적 독서’를 제안하고 있으며,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라고 과거 쓴 그의 글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가 시인이며 소설가인데, 독서일기에서 문학을 다루고 있지 않은 이유가 뭘까? 오히려 약간은 위악적인 태도로 ‘소설을 읽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뉘앙스를 은근히 드러내는 듯도 하다. 과거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원래 정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크지 않았단다. 80~90년대 그의 화두는 미적 완성과 문학적 정복이었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과중한 목표였으며, 문학적 완성이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하는 자신의 몫이라고 여겼던 것같다.
그가 정치적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도 2002년 노무현이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그의 고향 대구에서 주변 사람들이 한 나라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빨갱이’라고 낙인 찍는 것을 보고 나서다. 노무현이 빨갱이라면 진짜 문제고, 빨갱이가 아니라도 그것을 만들어내는 구조는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 거다. 그때 이후 그의 화두는 ‘나와 정치적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는 구도가 어떻게 가능하고, 그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할까’였다고 한다. 그래서 관련 소설도 쓰고, 사회적 의제에 본격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작 그가 쓴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60여권의 목록 중 내가 읽은 것은 <삼성을 생각한다> 한 권뿐이다. 나도 사회적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록은 어렵기로는 넘사벽이다. 내가 앞으로 읽어볼 책도 그리 많지는 않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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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를 읽게 된 계기는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권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2권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 지 궁금했다. 이 책을 계기로 요즘에는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책으로 출간된 것도, 온라인에서 보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서평도, 책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선이다. 같은 책을 읽고도 이렇게들 느낌이 다르고, 같은 책을 같은 사람이 읽어도 읽는 시기에 따라 느낌이 정말 다른 것이 서평이다. 세상에는 책도 많고 서평도 많다. 그것만 찾아 읽어도 하루가 금방 가고 지루하지 않다.
이 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에는 내가 읽은 책이 한 권도 없었다. 그 점이 가장 놀랄만한 일이면서 공감할 수 있는 계기는 오히려 감소했다. 어쩌면 1권에서 너무 푹 빠져버렸기 때문에 2권은 조금 밋밋한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관심분야가 아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여서 그럴까? 약간 아쉬운 점은 그것이다. 1권에 비해 읽어보고 싶다고 따로 메모해 놓은 책의 권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세상에는 책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1권의 강렬한 느낌 때문에 다음에 장정일이 독서일기 형식의 책을 또 내게 되면 꼭 찾아 읽을 것이다. 예전에 이미 발간한 책들도 한 권 씩 찾아 읽어보고 싶다.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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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를 몇 권 더 구매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명칭으로 나오던 시절 5권까지를 구매했던 기억이 나서, 그 이후에 나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6』과 이 책을 동시에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2011년이라면 작년에 출간된 것이니 저자를 통하여 새롭게 포획된 책들을 살필 수 있겠구나,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카트에 넣어서 살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마음을 잡아 끄는 책이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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