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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혜문스님의 우리 문화재에 대한 남다른 의식으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과 <조선왕실의궤>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위 책은 일본 황실로부터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 오기까지의 과정이 실려있다. 우리 정부조차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때 민간인들이 환수위를 꾸려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귀중한 문화재를 찾아올 수 있었다. 특히 <조선왕실의궤> 중에는 대한제국 황후였던 명성황후의 장례식 과정이 담겨 있는 의궤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명성황후 장례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자극한 것은 명성황후를 죽인 칼 '히젠토'를 일본 후쿠오카에서 만난 것, 명성황후를 죽이고 국부검사를 자행한 기록 <에이조 보고서>를 입수한 것"이 혜문스님에게 문화재 환수 운동을 펼치게 된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죽인 데라사키, 나카무라 다테오, 도오 가츠아키의 증언과 당비 명성황후를 바라본 일본의 입장을 보면 조선인 우범선이 직접 살해했다는 말은 꾸며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민비는 진살로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당대 석학 외무대신 김윤식도 민비의 학문이 넓고 깊음에 경탄했다고 한다. 일본의 조선 정책에 있어서 화근은 오롯이 민비 한 삶에게 있다."
명성황후의 살해를 '시해'로 표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혜문 스님은 시정을 촉구한다. '시해'란 신하가 임금을 죽일 경우 표현하지만 명성황후는 외부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므로 '시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문화재 환수 운동은 '유형의 문화재를 반환' 받는 차원을 넘어서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를 바로 잡는 운동'이어야 한다. 환수 운동을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은 '종이와 먹으로 쓰인 실록'이 아니라 '빼앗긴 민족의 자존심'과 '실록에 기록된 역사의 정신'이다. 도쿄대학교로부터 되찾은 <조선왕조실록>은 '기증'의 형태가 아니라 '환수'가 되었어야 한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문화재의 유형에만 얽매이고 그 속에 담겨진 정신을 간과한 소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