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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말의 수기>를 읽고 미친말이 마광수 교수 본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어릴적 예언으로 서양여자와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속에 이혼이라는 아픔과 책을 내놓은 때마다 금서로 낙인찍히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고 구속까지 당하고, 또한 동료들의 따돌림으로 인하여 우울증과 함께 학교를 휴직해야만 했던 쓰라린 기억이 이 책을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총 22장에 걸쳐서 마광수 교수님의 인생역경 및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글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감명과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연애를 위한 연애가 아닌 진짜로 사랑에 빠져서 하는 연애를 우리는 못하고 있습니다. 점잖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알려질까 두려워서 사생활에 전전긍긍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자들은 밤문화에서도 학자로 살아가길 기대하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인간이하의 치한으로 몰려 사회에서 매장을 시키고 있기때문일 것입니다. <에로스>장에서 피력한 에로스가 정신적 사랑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는 근거가 육체적 아름다움에 있으며, 인간 육신의 아름다움이 지식과 덕이 아름다움으로 발전할 수 있고, 그것은 더 나아가 영혼의 아름다움으로까지 승화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이 원래 선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는 학교에서나 사회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딱히 결론이 나지 않고 본인의 개인 주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성이 선이나 악에 있지 않고 오직 식욕과 성욕에 있다고 주장한 고자의 학설은 프로이트의 본능설과 어느 정도 흡사한 이론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는데 자라난 환경 때문에 누구는 선하게 되고 누구는 악하게 된다는 식의 이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광수 교수님은 성격상 남을 도와주는 일에 언제나 발 벗고 나서고,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기댄다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을 매번 당하고 있는데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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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미친 말의 수기>는 수필형식을 띤 소설이다. 작가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니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그것이 다른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실 마광수교수는 야한 글쓰기로 익히 우리에게 알려져 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시대가 그렇게 만든게 아닌가 싶다. 요즘은 마광수 교수의 글 들보다 더 야한 글들이 인터넷을 마구 떠돌아다니는가 하면 케이블 방송 등에서는 낯뜨거운 장면들도 엄청나게 틀어대는데 말이다. 요즘 마광수 교수가 소위 문제시 되었던 글들을 썼다면 아무도 그 야함에는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라보고 이미 놀란지라 이번에는 솥뚜껑임에도 출판사도 작가도 자가검열을 마쳤다고 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그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씁쓸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작가도 출판사도 얘기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지말고 달을 볼 것을...
특별히 마광수교수의 글을 옹호하는 편도 아니지만 불편해 하는 편도 아니다. 다양한 시선으로 다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들을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불편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마광수 교수의 새 책이 나왔다고 했을때도 읽어 볼까 말까 잠시 생각했다. 그가 얘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또 세상의 잣대로 가타부타 얘기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미친 말의 수기>는 기존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마광수 교수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꾸게 만드는 작품인 것 같다.
평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작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는 사람은 기존 시선과는 다른 시선으므로 삐딱한 시선으로 비춰지기 일쑤다. 나는 이런 시선을 반긴다.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며 살아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야 발전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로 마광수교수의 삐딱한 시선이 좋다. 야한 글이거나 아니거나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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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라는 이름을 들으면 야한 소설부터 떠오르곤 했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읽은 적도 없으면서. 그래서 도대체 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글을 쓰는 것인가 궁금했었다. 근데 이 책을 통해서 뭔가 그에 대해서 조금 알 것도 같은, 그런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미친 말의 수기를 읽고 나서의 첫 느낌은 그의 머릿속을 잠깐 둘러보고 나온 느낌이다. 수필식 장편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읽은 나는 22가지의 이야기 중에 소설 같은 것도 보이기는 하지만 전부 그의 수필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떤 이야기는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가기도 하는 반면 어떤 이야기는 읽다가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즐거웠다. 아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정도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가장 큰 깨달음(?)같은 게 있다면 야하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야한 것’은 몰래 봐야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 경우를 곰곰 생각해보니 친구에게 ‘나는 몇 살 때 ‘실수로’ 야한 ~를 봤어, 그런 건 처음이야‘ 라고 하면 친구는 굉장히 충격 받은 얼굴로 ’나는 ‘그런 건’ 아직도 볼 생각을 안했어‘ 라는 식으로 들으면 안 될 걸 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문득 났다. 어렸을 때 야한 무언가를 본 게 그렇게 잘못인가? 어차피 커서 알게 될 거 어렸을 때 제대로 알려주지 왜 그렇게 항상 어둠의 루트를 통해 야한 것들을 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어보면 ‘야하다’라는 표현이 단순히 성적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다보니……. 이 책에는 야한 것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도 나온다. 결국 어딘가 다 비스 무래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책을 읽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책의 겉표지에 그려진 오줌 누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읽는 내내 꽤 즐거웠다. 나이 드신 교수님 말투는 과연 어떨까 하고 고민도 해봤는데 읽고 나서 보니 전혀 문제없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책을 읽다보면 말투 때문인지 쉬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 책들이 있는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고 깔끔하고 뭔가 내 맘에 쏙 들어온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에 마광수 교수님의 다른 책들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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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조적 불복종'이라는 말을 일종의 화두로 삼고서 지금까지 여러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란 반드시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항과 불복종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문화사적으로 보면 새로운 창조를 시도한 사람들은 기존의 진리나 윤리 등에 대해 '삐딱한 눈길'을 보낸 사람들이다." (10쪽)
마광수의 시학은 한마디로 '야함의 시학'이다. 그가 주창한 '야한 정신'은 기존 상식에 대한 전복적인 도발을 의미한다. 마광수는 일찌기 1979년 28살의 나이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시를 발표하고 난 뒤, 1989년에는 첫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출간한 바 있다. 저자에게 '야함'이란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는 순수한 본능의 세계를 의미한다. 또한 마광수의 시학은 '카타르시스의 시학'이기도 하다.
"문학에 종교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상적 메시지를 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면 문학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저 '교양서'정도밖에 안된다. 문학은 잠재의식에서 솟구쳐 오르는 본능적 일탈 욕구의 표현이어야 한다. "(59쪽)
물론 나도 '찬양문학' 혹은 '교조문학'에 반대한다. 그러나 도를 넘지만 않는다면 중국의 노신,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독일의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처럼 사상적 혹은 철학적 메시지를 등장인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현현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지나친 배설욕구에만 집착하는 카타르시스 위주의 예술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바로 그런 배설욕구에만 치우친 폐해를 극명하게 보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고 마광수의 카타르시스 시학관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문학이나 음악과 회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욕동을 추동하고 만족시키는 감정과 본능의 하수도 문화이기도 하다. "권태는 변태를 낳고 변태는 창조를 낳는다"는 저자의 문학적 지침이나, 모든 예술창작의 목표를 이드와 초자아 사이의 소통자 역할로 보는 저자의 시각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또한 잊지 말하야 할 점은 마광수가 야함에 기반한 육체주의 문학 그리고 문학의 카타르시스 작용을 강조하는 이유도 앞서 언급한 '반항의 시학'과 연관이 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광수는 오래토록 지속된 한국 문단의 보수성과 도덕적 위선, 그리고 지식인의 권위주의와 금욕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문학의 정신을 도덕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주의적이고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매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 떠오른다. 저자는 자신을 바로 비운의 천재 이상에 비유하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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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다는 저자에 대한 의구심이 더 강해서 읽게되지 않나 싶다. 마광수라는 저자에 대한 느낌은 아주 확연하게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 같다. 솔직히 나도 저자에 대해 잘 모른다. 항상 호평보다는 비평을 더 많이 들어야 했고, 또 그의 작품은 항상 초창기의 작품들과 비교되며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곤 한다. 그의 사고관은 확실히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 구석이 분명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유독 그에게만 혹독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지는 않나 싶을때도 있다. 그도 참 피곤하기는 하겠다. 그의 책을 읽고나면 어떤 선명한 개운함보다는 이게 뭐지 하는 의아심이 생길때가 더많았다. 물론 이책도 마찬가지다. 책소개글에 나와있듯이 생각의 전환을 해볼수 있는 시간은 되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그의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내자신이 너무나도 고정관념에 묶여있지 싶다.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을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읽었을 그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혼자 하지 않고,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내놓을수 있는 용기로운 자가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지금에 이르고 보니, 그의 생각이 솔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살아보고 결혼을 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라는 말을 해 파란을 일으켰던 적이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어느정도 젊은사회에서 이해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는 시대를 앞서가기는 한다. 우리가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볼때 은근히 바라는 것은 간접경험을 통해 장밋빛 인생을 맛보고자 함이다. 그렇지만 또 그는 이 책에서 결코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게 사실일지언정 읽는 이로 하여금은 씁쓸함을 선사함은 분명하다. 그의 책은 항상 개운치 않음과 함께 또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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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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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과연 유용한 것일까? 아니 희망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극한 비관론자의 자아도취 같은 말이지만 아직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오지 못한 희망이란 놈을 알고 있다면 희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판도라는 인류 최초의 여자이자 모든 선물을 합친 여인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모든 남성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천하절색의 여인이라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한 판도라는 신들에게 선물 받은 상자하나를 가지고 지상에 내려온다. 누구도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였지만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는 상자를 열고 만다. 상자 안에 갇혀있던 것은 질병과 재앙, 그리고 희망이었다. 문제는 질병과 재앙은 재빠르게 빠져나와 인간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느림보인 희망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희망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재앙과 질병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희망만이 인간을 보호해줄 유일한 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희망마저 판도라의 상자를 빠져나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재앙, 질병, 희망이 뒤섞인 혼돈의 세계가 되었을까? 아니면 인간사회는 희망이 담긴 ‘달콤한 마취상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희망은 인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호적이지 않다. 오히려 희망은 필요이상의 낙관론을 지배한다. 이는 현실이라는 한계상황을 회피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며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심어준다. 야한 남자 마광수 교수의 ‘미친 말의 수기’, 그의 전작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가 추구하고자했던 야한 책의 본능적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책이다. 그의 발상은 스스로 창의적이라 할 정도로 세상이 바라보는 시각과는 상당한 차이를 느낀다. 그래 이렇게도 사고할 수 있겠구나 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마광수 교수의 에피소드는 술술 읽힌다. 그는 타고난 본능의 소유자다. 자신의 철학으로부터 민감한 성의 주제까지 거침없는 의견을 발산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추하지 않다. 오히려 감추는 자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런데 왜 우리사회는 아니 학문풍토는 획일적이지 못하면 팽을 당하는 것일까? 그의 일관적인 주제는 본능이다. 인간은 본능을 속일 수 없다. 단지 억제하거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할 뿐이지 결국 모든 것은 본능으로 회귀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야한본능은 극히 일상적이다. 단지 그는 본능적인 자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의 이러한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책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마교수의 딴지걸기는 책의 제목에 대한 가벼움과 프라하의 봄으로 재해석된 영화의 가벼움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가벼움에 대한 해석을 인간과 사회로 구분을 짓는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무거운 존재로 인식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상엔 가벼운 관계가 훨씬 많아 보이며 무거운 주제엔 별다른 관심이 없다. 하지만 사회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는 무거운 주제에 익숙하다. 특히 문학에서 창작의 가벼움은 무거움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것은 가벼운 주제다. 절대적인 무거움과 상대적인 가벼움, 정작 인간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존재가치마저 잃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비판적이고 복종하지 않고 기존의 패러다임에 반항하는 이들에게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언론이 앞 다투어 그런 상황을 정리해 버린다. 사물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음에도 일방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마광수 교수의 수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해체시켜 버린다. 삶을 대하는 그만의 태도와 자세, 왠지 거북하지만 쿨하다. 그만이 전하는 생의 메시지가 본능을 조금이라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과 우정과 인연에 관한 그만의 에피소드를 가볍게 들어보는 것도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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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마광수 교수의 생각은 시대를 역행하는듯 보이지만, 그속에서 새로운 세계에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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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작가의 책은 미친 말의 수기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고 어떤 내용의 이야기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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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저자의 책들은 흔히 야한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있다. 그리구 야한 이야기를 많이 쓰는 작가로도 알려져있는 작가이다. 하지만 난 이분의 책을 한번도 읽어본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엔 꼭 한번 읽어 보고싶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읽으면서 느낀건데 우리들의 속마음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책이였던것 같다. 장편소설이라고 하지만 내가 읽어본 결론은 소절보다는 그냥 수필같은 소설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리구 마광수씨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이 채은 본이이 지금가지 써왔던 글을 보면 본이이 써왔던 기존의 이야기를 뒤집어 버린 책이였던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