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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아이였고, 지금은 어른이다. 그리고 노인이 된다. 인간에게서 아이들은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우리들과 아이의 갭은 단지,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관계인가? 아니면 우리의 배움과 현재의 배움의 충돌 아닐까? 세대간의 충돌이나, 단절이라는 말이 제법 나오는 사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부족한 것 아닐까? 시대는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는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왜 자기, 자신의 세대로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재려고 하는가?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이지만, 우리이지는 않다. 어쩌면 우리는 맞으면서 커온 세대다, 그러기에 우리는 폭력을 멀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여기에는 맞으면서도 이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자조의 심정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 줄어든 체벌은 과연 우리가 원하는 아이의 배움과 성공으로 이끌어 가는 길인가? 사랑이라는 한쪽의 길로 만으로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로 어른과 같이 대접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들도 세상을 바라보는 작은 인간으로써 나름의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러기에 교육은 사랑과 훈육의 중용의 길로 가야 적절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이야기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로 시작된다. 들려 온 FM 방송에서는 ‘니혼대학 전공투’가 흘러나온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의 명확한 의식. 우리가 싸울 상대는 어른이란 걸 잊으면 곤란해, 남자와 여자가 함께 들어가 있으면 어른들이 뭐라고 말할 것 같아? 그들은 이미 어른들의 반응과 행동을 읽고 있다. 그들의 해방구도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해방구를 선언하며 행동하고 있다. 어른들의 반응. 아이들의 행동에 전공투 부모는 “저 애들도 이대로 가면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저런 행동을 하는 게 분명해.” 하지만, 대부분 부모는 걱정만하고 있다. 왜 그럴까라는 생각은 아이들의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 매스컴은 모든 것을 흥미거리화 한다. 어떻게 보면 특이한 사건이기에 시청자의 흥미거리이니. 하지만 문제를 풀려는 노력은 없다. 물론 아이들을 이해하는 부모도 있지만, 이런 부모는 소수인 것 같다. 세상의 일은 “세상에는 이치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다 인과관계로 파악할 수 없는 일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중학생들의 유쾌한 반란. 드디어 만들어진 그들만의 해방구,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지키는 마음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남겨진 여자아이들은 무슨 임무를 맡고 있는지? 이야기 속의 아이러니, 진짜로 납치 된 친구(아이)와 노숙자 할아버지를 통해서 본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 서로(친구로써)에 대한 인식. 무엇 때문에 아이들은 서로를 알아볼 기회도 갖지 못했는가? “너는 생각보다 좋은 녀석이었어.” 요즘 아이들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같은 급우끼리도 알 시간과 마음도 빼앗겨버린 지금의 상황, 시대는 변해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들은 ‘전쟁은 싫다. 인간은 구제불능이다. 도둑질은 싫다.’고 말하면서 커 나간다. 친구로서의 인식 “너는 이미 옛날의 아키라가 아니야”, 어른들은 우리에게 “말 잘 듣고 공부함 하면 돼”라고 말한다. 그러는 어른들은, 과연 도덕적이며 잘 살고 있나, 어른들이 바라는 것에는 친구가 없다. 아이들의 교육은 누구의 책임인가? 가정교육과 교사의 책임, 아니 사회의 책임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 아닐까? 우리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들 엄하게 관리해야 정상적으로 자란다.” 과연 이런 생각이 좋은지? 전공투 세대의 자식들은 좀 다른 자유로운 모습인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 참 말로는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이가 다시 일어서고 못 일어서고는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우리들 대부분 “침착하게만 살면 먹고 살기 힘들어, 세상이 다 그런 거야.”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7일간에서 배움. 해방구에서 사랑을 담아서, 그들은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우리의 날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사람의 인생은 불꽃 같은 거야.”, 아 우리의 불꽃 같은 인생, 다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그 어렸을 때의 끊임없이 떠오르는 많은 의문과 고민들. 전쟁세대인 할아버지가 던진 평화의 메시지. “전쟁에 나가지 마라.” 그의 경험이 어린 세대에게 배움을 준다. 또 같이 행동하면서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노인)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가르침도 준다. 노인들은 우리에게 삶을 통해 배운 지혜를 전하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하며 배워가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어린이였고, 어른이고, 곧 노인이 된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길이기에 현명하게 삶을 맞았으면 한다. 세상에서 나쁜 것은 어린애든 어른이든 나쁜 건 나쁜 것이다. 그들의 큰 외침 “우리는 지금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어른들만의 세상 너희들의 행복을 위해서야. 아이들은 말한다. “착한 아이는 꼭두각시다. 자신이 아니다.”라고.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눈에 비친 부모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모순적인 인간, 세상도 이와 비슷하게 비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스스로 모범이 되지 못하면 그들에게 배움과 깨달음을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는 그 나이, 중학교 1학년 때 어떤 생각을 했고, 무슨 일이 있었나? 어떻게 보면 지금 상황보다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개 비슷한 형편의 아이들을 모아놓았지만, 그래도 성적이며 가정의 형편에 따라 나누어지는 친구그룹들, 하지만 내 주변에 학원이나 과외라는 단어는 거의 없었다. 우리들은 서로를 경쟁상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같은 친구(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모두 경쟁자들이다. 지금의 아이들을 보면 학원이 친구나 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기가 어렵고, 맞벌이가 늘어났고, 많은 삶의 무게를 핑계로 아이들 교육을 너무 학교나 학원 그리고 사교육에 맡겨버린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20년 전에 발간된 소설인데,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의 교육이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삶이란 시대가 변해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 것인지. 이야기 속에 아이들이 던진 많은 질문 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교육이 어떻게 변하면 이런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별로 나아진 것도 없다. 교육이 이 시대의 진정한 문제점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아이들의 외침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아이들의 7일간의 노력과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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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가출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다른 짓은 뒤늦게나마 시도할 수 있지만 가출은 십대에 해야 제격인데 말이다. 물론 성인도 가출할 수 있지만, 자칫 훌쩍 홀로 떠난 여행으로 비쳐 상황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곤란하다. 또한 적당한 구실을 마련하기도 버겁다. 십대라면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라던가, 학습 중심의 교육제도 불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도 아니면 물결치는 자유에 대한 무조건적인 갈망! 무엇을 갖다 붙여도 그럴싸한 구실이 되어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십대 가출은 부모 속을 제대로 썩이긴 하지만 더러 서로의 가치 추구에 대해 깊이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보다 커다란 세상으로 내딛는 힘찬 발걸음을 선물하므로 결코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문제다. 여기, 떼거리로 가출한 소년들이 있다. 아니, 대놓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소년들의 이야기가 있다. 사반세기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소다 오사무 소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자의식이 형성되어가는 열네 살의 통쾌한 질주를 그리고 있다. 해방구. 스물두 명의 자의식이 똘똘 뭉친 빈 공장은 십수 년 전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공투 세대가 공권력과 대치하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역의 이름으로 거듭난다. 한때 똑같은 품질과 규격의 제품을 수없이 생산하다 중단된 공간은 저마다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소년들을 잉태한, 거대한 자궁으로 변모한다. 각자의 색감을 들고 태어났으나 사회에서 유용하면서도 순응하는 인간으로 제조하는 교육 시스템의 컨베이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아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해방구는 그들을 품는 아늑한 자궁이 되어준다. 다시금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각자의 색감을 되찾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의 때가 켜켜이 쌓인 어른들이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 부모, 선생님 말 잘 들으며 공부나 하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뭐? 해방구? 당장 내려와! 허나 속마음과 달리 한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설득한다. 사회생활의 이력만큼이나 놀라운 카멜레온 색깔 바꾸기 재주. 돌덩이를 숨겨놓은 카스텔라를 내밀지만 내동댕이친다. 어쭈! 한번 해보겠다고? 폭력성이 꿈틀, 고개 들었지만 가까스로 인자한 교사상을 연출한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고교 진학에 문제가 될까 저어한 엄마들의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 과보호로 아들을 나약하게 만든 엄마도 아들을 더 이상 길들일 수 없다. 버려진 공장은 약간의 작업으로 요새로써 모자람이 없었고, 자기네들의 의지를 지키는 소년들은 요새를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손색없기 때문. “잘 안 되는 이유는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보통 동물을 어떻게 길들이지? 개나 말을 조련하듯이 채찍으로 길들이면 반드시 잘돼가게 되어 있어. 이게 비법이야. 자네들도 머릿속에 잘 넣어두게.” (P. 222) 존중받지 말아야 할 마땅한 인간이 있을까.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가진다. 성숙하지 않은 만큼 덜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은 같은 크기다. 허나 안타깝게도 태반의 교육자들은 피교육자들의 그것과 자기의 그것을 같은 무게로 쟤지 않는다. 성장과 배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는다. 한 학급 남아들의 집단행동은 사상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존재감을 느끼기 위한 시도였다. “부패한 사람이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거 아냐. 부패하지 않는 사람치고 바보 아닌 놈 없고, 그런 놈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P. 273) 개인의 안위보다 나라의 충성이 먼저인 군국주의 잔재가 개인의 인간다운 생활보다 체제 유지가 급선무인 사회를 지탱하고 있나? 군군국주의 교육의 희생자이기도 한 교장이 군가를 부르며 해방구에 재차 방문하는 광경을 보면 측은하면서도 무섭다. 시간이 흘러도 쉽게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려는 체제의 속성, 그 속성을 유지케 하는 부패, 부패에서 실속을 챙기려는 교장 같은 사람. 과연 아이들은 해방구를 지킬 수 있을까.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한데 대체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이지? “어떤 게 좋은 어른인데요?” “잘난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지.” (P. 73) 부모나 선생의 리모컨 조작대로 움직이는 아이라면 잘난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겠지. 그렇게 어른이 된 아이는 다음 세대 아이를 품질 검사 완료한 상품처럼 포장하려 들겠지. 몰개성을 재빨리 습득하면 안전하다고 판단내리겠지. 인간의 다양성을 속박하는 사회 장치에 저항하는 것은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겠지. 흐르지 않는 물은 악취를 풍긴다는 것을 망각한 체하며. “져도 좋잖아. 하고 싶은 걸 할 수만 있다면.” (P. 29) 합리화라는 그럴싸한 허울을 뒤집어 쓴 사회와 그 사회를 떠받고 있는 기성세대에 경종을 울린 애송이들의 반란은, 실은 결연한 의지보다는 캠프의 흥겨움에 가깝다. 그렇지만 늘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님을, 중학교 1학년도 충분히 세상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음을 7일 동안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규격화된 틀로 붕어빵 굽듯 아이들을 대했던, 적당히 눈 감으며 안온을 추구하던 어른들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속수무책이다. 알고 보면 세상에는 승부가 필요치 않은 경우도 꽤 있다. 진다고 해도 속상하지 않는 이들과의 맞붙음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다음에 우리가 모두 없어져도 별은 저렇게 빛날 거야.” (P. 51) 아이들이 빠져나간 해방구를 침입한 어른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허둥대는 것도 잠시, 온갖 망상을 끄집어내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이를 때, 어쩌면 그들은 하멜른의 어른처럼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을 터. 섣부른 반항에 지나지 않다고 여긴 사건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 빛이 수백 광년 떨어진 곳까지 전달되어 그곳에서도 여전히 빛나길. 프랑스 68혁명을 짐작케 하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의 잔상에 이어, 프랑스의 68혁명 열기가 일본 열도를 달굴 무렵 고등학생이었던 무라카미 류가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며 쓴 소설 <69>를 원작으로 제작한 동명의 영화의 잔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각기 다른 인간이 지닌 색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세력에 대항하는 길은 오직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69> P. 242)’임을 해방구 아이들은 몸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멋들어지게 해방구 문구를 쓴 아키모토는 다 부족하지만 미술 과목만은 우수하다. 체육엔 별다른 자질이 보이지 않으나 전자 기계에 남다른 눈이 있는 사토루, 레슬링에 빠져 살다보니 레슬링 중계에 탁월한 재치가 돋보이는 아마노 등 아이들마다 각기 다른 다양한 색감을 지니고 있다. 적확한 자기 색을 찾으면 아이들은 질리언 린처럼 비상할 수 있다. 어렸을 땐 주의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학습장애아 취급을 받았으나 춤에 남다른 관심이 있음을 발견해 준 한 사람 덕분에 뮤지컬 <캣츠>, <오페라의 유령>의 안무가로 활동한 발레리나 질리언의 푸에테(한 다리 발끝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다리로 휘젓듯 32회전하는 여성 무용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테크닉)를 그려본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자의식을 형성해가는 사춘기 소년들의 각각의 고유색을 지키기 위한 유쾌한 몸부림이다. 어른 또한‘다름’을 인정받고 싶은 성장기를 다 거쳤을 텐데, 그런 적 전혀 없었다는 듯 시치미 떼는 꼴이 역겨워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분명한 주제의식과 해학의 장치가 자연스레 서사에 녹아들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깔깔대며 마지막 장을 덮으면 먹장구름처럼 밀려오는 우리의 현실은 독자로 하여금 씁쓸함을 감출 수 없게 만드는데, 이는 이 소설이 지닌 가벼움 속의 감춰진 묵직함의 미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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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싸울 동지들이 다시 해방 강당에서 시계탑 방송을 재개하는 날까지 일시적으로 이 방송을 중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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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언니 집에 갔다. 밤 10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집에 가니 조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냐고 물으니 학원 마치고 수영 갔단다. 참고로 조카는 초등학교 6학년이다. 언니보고 얘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너무 어렸을 때부터 무리하는 것 같다고 하니, 자기가 생각해도 그렇단다. 학원가서 공부하는 것이 남들 다하는 기본이 되어버려 자기 아이만 안 보내자니 불안하단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이 수준이 높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란다. 어느 날인가는 조카가 언니에게 “엄마 나 이번에 1등 하면 아이폰 사 줄거야?” 그런다. 공부가 일종의 거래인 셈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네가 1등만 해봐라. 해달라는 것 다해준다.”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일류지상주의를 꿈꾼다면 일본도 일류지상주의를 꿈꾸는 우리나라와 사회분위기가 비슷한가보다. 이 책이 1980년대 중반에 나온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우리 아이들이 하고 있음직한 고민과 일탈에 대한 이야기인 것을 보면 말이다. 커오면서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아무리 잘 해준다 해도 가출 한 번 꿈꾸지 않고 사춘기를 보내기는 참 어려운 일이지 싶다. 나름 모범생이긴 했지만, 나도 가출을 꿈꾸던 적이 있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당황해 하실 부모님의 얼굴을 상상하며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행동에 옮기지 못한 건 순전히 겁이 많고 소심한 나의 성격 탓이다. 이 이야기는 그런 나보다 훨씬 행동력 있고 용감한 우리들의 모습이랄까. 아니, 우리가 꿈꾸던 것들에 대한 대리만족격이랄까. 아이들이 이런 공격을 감행해 온다면 상당히 걱정스럽고 두렵고 위협적인 상황이 되어 당황해 하는 어른이 이미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아이들의 해방구 - 이유 있는 전쟁 포고 중학교 1학년, 생각하기에 따라 아직은 한참 어린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들, 전쟁으로 생명에 위협을 받았던 적도 없고, 형편이 어려워 피죽으로 연명한 적도 없던, 맹랑하고 깜찍한 아이들의 7일 동안의 전쟁선포. 만족할 수 없는 어른들을 향한 전쟁을 위한 보루인 아이들만의 성(城) 해방구를 생각해 낸다. 행동하라 그러려면 뭉쳐라 시작은 역시 부모의 명성에 맞게도 도루이다. 지금 도루의 부모는 조그만 학원을 경영하고 있지만, 1960년대 시절 니혼 대학 투쟁 학생 부부다. 그때의 열정을 고스란히 받은 아이답게 도루는 이번 일을 계획하고 친구 에이지와 함께 뜻을 같이 할 아이들을 모은다. 마마보이 히데야키, 폭죽공장 아들 데쓰로, 병원집 아들 나오키, 공부만 아는 가즈토도, 결국 반 남학생들이 모두 뭉친다. 이들은 장소준비, 식량비축, 방송준비 등 제법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행동하고, 여학생들은 밖에서 지원군이 되어준다. 돈으로 부정한 아버지는 돈으로 응징하라 의외의 상황으로 이들의 전쟁포고 첫째 날, 나오키가 유괴되고 학부모들은 모든 아이들이 함께 유괴된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아이들은 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밝힌다. 아이들의 기지로 경찰들이 잡지 못하는 유괴범 다나카를 먼저 잡게 되고, 무사한 나오키는 아이들과 해방구에 함께 하면서, 평소 낙태수술로 번 부정한 돈으로 바람피는 아버지가 밉기도 하고 형편이 어려운 다나카를 돕기를 원한다. 아이들이 머리를 짜내어 만들어 낸 007작전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권위에는 망신을 체벌을 가할 수 없다는 교육법에도 아랑곳 않고 학생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일삼는 체육선생님, 이를 알면서도 교내 질서 유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눈감아주는 교장선생님은 현재 학생들보다는 퇴직 후 자신이 맡을 자리에 더 관심이 많고, 이 때문에 이 사건이 조용히 끝나기를 바란다. 과외에 힘을 더 쓰는 담임선생님 야시로. 학생들은 자신들의 해방구를 반란의 시작으로 생각하는 선생님들을 미로에 초대해 망신을 준다. 비행 청소년? 테러리스트?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려 하는데, 이를 묵인하면 무정부주의자나 테러리스트가 될 거라는 지나치게 비약적인 우려와 악의 싹을 일찌감치 도려내기 위해 진압이 필요하다는 경찰, 아이들을 범죄자로 만들 수 없다는 학부모들, 결국 어른들은 아이들의 해방구를 와해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는데, 어라? 아이들은 어디로 간 걸까.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 아이들은 김알지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황금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들이 잘 못할 때면 저 아이가 누굴 닮아서 저러나 라고 생각한다. 물론 해답은 먼 데서 찾을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덕승재 德勝才 : 덕이 재주를 뛰어넘게 하라! “이번 시험 잘 보면, 네가 원하는 거 사줄께”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의 4남 2녀의 아이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 낸 전혜성박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자신의 어린 아들이 100점 맞은 성적표를 자랑하듯 보여주자 “그런데 엄마는 우리 아들이 공부 잘 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이 더 좋은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이 덕승재이기를 바랬던 엄마의 큰 마음이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 건 아닌지. 才德兼無(재덕겸무) 謂之愚人(위지우인) 재주와 덕이 둘 다 없는 사람을 가리켜 우인(어리석은 사람)이라 한다. 德勝才(덕승재) 謂之君子(위지군자) 덕이 재주보다 많은 사람을 가리켜 군자(인격자)라 하고, 才勝德(재승덕) 謂之小人(위지소인) 재주가 덕보다 많은 사람을 가리켜 소인(속물)이라 한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속물도 되어선 안될 것이고, 우리의 아이들도 그렇게 키워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도 한 때는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의 공통된 말이 있다. “요즘 것들은 영~~ 예의도 없고 참 말세다 말세…” “우리 때는 그러지 않았어.” 몇 천년 전에 돌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문자들을 힘들게 번역해보니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서 큰일이다”라는 내용이었다나. 수천 년 전 어르신들도, 지금의 어르신들도 한 때는 어린아이였고 젊은 시절이 있었다. 물론 뉴스나 각종 매체를 통해서 부모를 버린 패륜아, 독거노인 문제 등등 인륜이 흔들리는 내용을 심심찮게 접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체벌하는 선생님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어 신고하는 아이들도 있다. 모든 것은 시대를 반영한다. 요즘 아이들 무섭다고 버릇없다고 수군대는 어른들도 다들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때론 부모의 간섭이 싫었고 선생님의 권위가 싫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 기성세대가 혹은 사회가 아이들을 ‘다른 건 필요 없고 공부만 잘 하면 된다’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한번씩 반성해 보아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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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들이나 부모, 어른들이 하는 일에 만족스러운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감히 반란을 꿈꾸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기껏 하루 이틀의 가출 쯤을 감행 할까. 그것도 간 큰 아이들이나 가능할뿐. 그러나 어른들 세계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고 가감없이 비판 할 수 있는 것은 구세대가 아닌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자 순수의 용기가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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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던 날, 2학기 모드에 들어서면서 왠지 아이에게 참고서 뿐 만 아니라 다른 읽을꺼리도 덤(?)으로 사줘야겠다는 생각에, 아이와 함께 예스를 쭉~~ 둘러보다가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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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 오사무 (ぼくらの七日間戦争)-야만적인 사회와 위선적인 어른들의 향한, 줄이 끊어질 정도로 신명난 놀이판 프롤로그 : 이미 예전부터 해방구 방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주파수를 알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일단 ‘아이들’, ‘우리들만의’ ‘해방구’ 이런 말들에 대한 거부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들 ‘함부로 건들지 마시라고요’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누구들 ‘꼰대 선생님과 부모님’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라고 못난 성질을 드러내게 되는 가슴 속 어딘가에 있는 부끄러움에 기인한 거부감이었다. 차라리 나는 그렇지 못해 셈이 난다고 하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혁명’ ‘투쟁’ ‘운동’ 이런 단어들에 대해서는 은근히 에둘러 피했음을. 어차피 그 시대에 나는 꼬맹이였잖아, 내지는 어차피 지금은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질주의’가 판치는 사회잖아, 이렇게 잘도 숨었더랬다. 근데 「우리들의 7일 전쟁」이 숨어 있던 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말한다. 일본 영화 ‘우리들과 경찰아저씨의 700일 전쟁(700 Days Of Battle: Us Vs. The Police, 2008)’을 본 적이 있다. 1979년 여름,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7명의 악동들이 자신의 마을에 새로 온 ‘경찰아저씨’의 과속단속에 불만을 품고 복수를 계획하여 실행하는 내용인데, 그 복수의 내용이 폭풍의 저전거 타기, 경찰아저씨 변태 만들기 등 유쾌하기 그지없다. 인물 간 대결 구도나 마지막에 불꽃놀이가 나오는 것 등 많은 부분이 ‘우리들의 7일전쟁’과 닮아 있는데, 저자가 다른 것으로 보아, 아마 1985년에 출간된 <우리들의 7일 전쟁> 이후로, 이러한 양식 혹은 구성은 일본 문화에 크게 영향을 준 것 같다. ‘지브리 애니’‘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우리들’시리즈(전29권)는 일본 청소년 문화의 상징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한때 우리사회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통하는 ‘엄석대’의 상징성처럼 말이다. 1. 예비 지식, 도쿄 대학 투쟁 전공투 ‘해방구’ 도쿄대, 니혼대를 중심으로 서서히 운동의 물결이 높아져가던 전공투 운동은 1969년 1월 도쿄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에 이르러 단번에 정점에 도달했는데 대학 측의 요청을 받은 8500여 명의 경찰기동대가 도쿄대 안으로 돌입, 봉쇄된 건물의 바리케이드를 잇달아 제거하면서 학생들을 체포했다. ‘해방구’란 바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권력을 맞서 싸웠던 공간을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그 전공투 세대의 2세들이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뒤에 ‘해방구’를 만들어 이번에는 부모 세대들과 대치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토록 불타올랐던 정렬은 어느새 꺼져버리고 기존 체제에 편입하여 고도의 경제성장이라는 파도에 몸을 실었고, 결국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오로지 경쟁에 이겨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 종업식이 있던 날, 스물한 명의 아이들이 도쿄 시내 한복판에 있는 페허가 된 공장 건물에 들어가 해방구를 만들었다. 이 해방구는 오로지 아이들만의 세계이자, 아무한테도 명령을 받지 않은 장소를 의미한다. 일단 어른들의 해방구와 아이들의 해방구에는 목적의 문제에서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어른들에게는 확고한 사상이나 논리가 있었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외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 일을 계획하고 동참한다. 그럼 아이들의 ‘해방구’는 그저 객기에 불과할까? 절대 아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그만큼 단단하고 거대하다는 것이다. 학교 교육법 11조 ‘교장 및 교원은 교육상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감독청이 정한 바에 따라 학생 및 아동에게 징계를 가할 수 있다. 다만, 체벌을 가할 수 없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이 문장을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어른들로 인해 폭력은 점점 지능적이고 가혹해 지고 있는 현실, 해방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에서 해방되다니. 너는 중학생이야. 중학생한테 공부 빼면 뭐가 남는다고 그래?”이렇게 말하는 부모. 아이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발버둥친 것이다. 본능에 의한 발악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회도, 어른도 영악하게 변형된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방구. 이 말을 입에 담으니 제 가슴이 확 뜨거워집니다.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저는 전공투 세대입니다. 돌이켜보면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우리의 청춘은 바리케이드 안에 있었습니다. 폭풍처럼 왔다가 폭풍처럼 사라져간 그 뜨거웠던 시절. 그 열기는 대체 어디로 가버렸나, 불은 꺼져버린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이 도쿄 한복판에 해방구가 등장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 전공투 세대의 아이들의 의해서.... 지금부터 제가 그 아이들에게 왜, 무슨 목적으로 해방구를 만들었는지 인터뷰해 보겠습니다.” 2. 대응과 응징;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지 않은 소년, 소녀들 “잘 들어보세요. 그 아이들은 기존 질서를 깨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묵인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틀림없이 무정부주의자나 테러리스트가 될 겁니다. 그 아이들은 옛날 전공투가 한 것과 똑같이 학교를 쳐부수려 들 거란 말입니다. 당연히 아무 흔적도 남지 않도록 철저히 말살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암세포와 같습니다. 증식하면 손을 쓸 수 없게 돼서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다행히 지금 정도에서 도려내면 아직 늦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해방구 안에서 FM 송신기에서 밖으로 FM 방송을 내보낸다. 억압된 사회에서 은밀하게 자유를 갈망하며 송출되는 방송과도 다르고 인류에게 재앙이 닥쳐 모든 문명이 사라지고 폐허가 된 상태에서 남은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전달되는 방송과도 다르다. 헌법에는 언론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는 현실이기에, 이 자유는 유쾌하고 통쾌하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나는 꼼수다’가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이 방송에서는 기존 언론에서 접할 수 없었던 신랄한 정치풍자들 들을 수 있다. 말 그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큼 쌓여 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치유효과를 사람들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치유효과가 있은 것 같다. 물론 스포츠 아나운서를 꿈꾸는 아마노에 의한 레슬링을 중계톤은 위트도 넘친다. “이다음에 우리가 모두 없어져도 별은 저렇게 빛날 거야.”쓰요시가 말하자 모두 잠잠해졌다. 등에서 느껴지는 콘크리트 바닥의 따뜻함에 기분이 좋았다. 세상에는 응징 받아 마땅할 나쁜 어른들이 많다. 이 작품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체면과 이익 때문에 학생들을 해방구에서 끌어내려는 무자비한 교장을 교육의 상징으로, 종업식 날 유괴를 당해 피치 못하게 뒤늦게 합류하게 된 나오키의 부모님이(물론 ‘돈’이라고 보는 게 더 명확하겠지만) 가정의 상징적인 역할을 받아 기꺼이 아이들의 통쾌한 복수를 당하게 된다. 우리나라 관점으로 보자면 아이들의 무기는 바로 ‘놀이’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대중적인 재미를 주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아이들은 분명 ‘다이달로스’의 아이들임이 틀림없다. 아이들은 폐공장의 물건들을 활용하여 최고의 미로를 만든다. 교장과 교감과 생활지도주임교사는 미로에 들어가 갖은 종류의 스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한다. 이때만큼은 기꺼이 큰 소리도 웃어도 된다. 왜냐하면 이곳은 놀이판이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탈춤이 양반을 희화화해 조롱하고 익살스럽게 놀리고 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이 된 양반들의 경제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민속놀이였다는 것에 빗대어 본다. 유괴범으로부터 나오키를 구해내고 도리어 그를 도와주게 되는 웃지 못 할 상황과 자신들을 괴롭히는 어른들과 사회에 응징의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개성을 들어낼 수 있었다. 스포츠 아나운서가 꿈인 아마노는 마음껏 레슬링 중계 방식을 응용했으며, 전자 기계에 능숙한 사토루는 FM 방송을 할 수 있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항상 반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던 겐지도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아이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오합지졸에 엉망진창인 말썽꾸러기가 모여서 불편하기 그지없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데도 누구하나 불평이 없다. 그 안에서는 각자가 빛이 나니까. 아이들의 복수의 결과는 ‘권력’과 ‘부’를 파괴가 아니라 ‘희화화’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본디 우리들은 ‘희화화’를 통해 마음 깊이 간직된 슬픔이나 공포의 기분을 토해내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감정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상처를 치료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에 사라진 아이들을 보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가지고 와서 자신들의 과오를 깨닫는 모습은 너무 즐거워 슬프기까지 하다. 3. 불이 꺼지고 불꽃이 피어오르다 ‘우리의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싸울 동지들이 다시 해방강당에서 시계탑 방송을 재개하는 날까지 일시적으로 이 방송을 중지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우리 뒤에 반드시 우리보다 더 용기 있는 젊은이가 해방구에서, 전 일본 아니 전 세계에서 성난 파도처럼 진격을 개시할 것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이 길을 선택할 것이다. P319’ 한 판 제대로 놀았다. 죽음의 무도가 죽음 앞에서의 인간 평등을 노래하긴 했지만 계급의식과는 거리가 멀듯이, 어른을 조롱하는 아이들의 7일 전쟁에서의 조롱은 어른과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제의에 가깝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위계, 위엄, 격조를 객기와 조롱으로 무너뜨림으로써 사람들의 ‘의식’을 깨어놓았다. 아이들은 그들 삶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 또한 미래의 아이들에게 삶의 기준이 되는 7일일 만들었다. 진정으로 무서운 단어가 있다. 호러, 괴물, 사이코페스, 귀신, 범죄 이런 불편한 어감을 가진 단어가 아니다. 나는 ‘편하다’는 단어가 참으로 무섭다.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긍정적인 이 단어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부정적인 면을 띄기도 한다. 편해서 행복하다가 아니라, 편해서 불안하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어떻게 보면 ‘편하게 생각해서’라는 말은 즉, 무슨 일이든 굴복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소설 속 아이들의 부모님의 세대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이제껏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들도 그렇게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말로는 ‘편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편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는’삶을 말이다. 이 순간, 아이들은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P220 나처럼 이 세대와 저 세대의 중간에 끼여 있는 입장에서는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은 묘하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배제된 채, 그렇다고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된 느낌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은 지금도 아이들의 해방구에서의 방송이 귀에 울리어 퍼진다. 결코 꺼지지 않았으면 하는 소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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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같은 반 남학생 21명이 모두 실종되었다면? 게다가 그들이 고작 중학교 1학년이고, 하필이면 여름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가는 도중에 실종된 것이라면? 1985년에 출간된 이 일본 소설의 시작은 바로 여기부터다. 끝없는 불안 속에서 학부모들은 유괴 아니면 사고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이들끼리만 놀러 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계획적인 ‘집단 가출’이었다. 어른들의 강요와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전쟁’을 결심한 것이다. 한 달 전 문을 닫은 회사 건물을 ‘해방구’ 삼아 그렇게 14살 남자 아이들의 합숙과 투쟁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세상인 해방구에서는 제일가는 모범생도 공부를 안 한다. 프로 레슬링의 광적인 팬도 TV를 안 본다. 대신 아침 6시면 일어나서 어른들과의 싸움을 위해 운동을 하고, 미리 챙겨두었던 음식을 먹는다. 방학식 날 유괴를 당해 해방구에 함께 오지 못한 친구를 구해내는가 하면, 위선적인 어른들에게는 벌을 내린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전쟁을 중계하는 ‘해방구 라디오 방송’도 내보낸다. 사춘기의 특징 중 하나는 비판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들도 그랬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어른들의 위선과 비도덕적 행동을 훤히 꿰고 있었고, 그것을 비판할 줄 알았다. 그래서 해방구에서의 7일 동안 아이들은 세 가지 복수를 한다. 선생님들에게, 나오키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구미코의 아버지에게 말이다. 사실, ‘폭력적인 체육 교사 사카이, 아이들을 인격체가 아니라 개나 말처럼 채찍으로 길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장 선생님, 산부인과 의사로서 낙태를 통해 번 돈을 애인에게 쏟아 붓는 나오키의 아버지, 건설 회사를 운영하며 학부모회장이지만 교장의 뒤를 봐 주고 시장의 부정선거를 돕는 구미코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교장 선생님의 비인도적인 교육관도 놀라웠지만 자신의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또한 당황스러웠다. 해방구에 모이기 전, 어른들의 부도덕을 진작에 알아채고도 아이들은 묵인하거나 굴종하거나 혹은 ‘일진’이 되어 반항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해방구에 모인 후에는 어른들이 숨기고 있는 잘못을 끄집어내 만천하에 공개하고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어색하던 친구와 처음으로 대화를 하는가 하면, 학교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의 재능도 펼쳐보였다.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아이들은 건강하게 살아난 셈이다. 나는 어서 이 책의 2권을 읽고 싶다. 총 29권짜리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만 읽었을 뿐이니 말이다. 인생에 한 번쯤은 어른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집단 가출을 하는 것이 괜찮은 경험일 수도 있다. 그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앞으로 28권이나 더 있다면, 이 아이들의 미래가 무척이나 궁금하고 걱정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부모님하고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만 하면 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아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우린 지금부터 간식 시간이걸랑요.” 하지만 대한민국에도 이렇게 외치고 싶은 청소년이 잔뜩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반항하고 싶은 청소년,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님, 아이들의 마음이 궁금한 선생님들께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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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읽게 된 책 [우리들의 7일 전쟁]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책. 인터넷에서 본 '학생이라는 죄로' 라는 글을 본적이 있다.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명단에 올라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입고 공부라는 벌을 받고 졸업이라는 석방을 기다린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을 떠올리면 무척이나 공감되는 말이었다. 게다가 .어른들은 중학생이 된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는 대신 "지금은 힘든것도 아니야, 고등학교는 얼마나 힘든데....언제 정신 차리려나? ㅉㅉ" 오히려 겁을 준다. 그래서 우리들의 행동에 무조건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보는 어른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려준 책속의 1학년 2반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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