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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읽은 리처드 플레너건의 《먼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이차대전 당시 버마전선에서 일본군 포로가 된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소개하면서 일본군의 비열함을 고발한 내용이었다. 지나고나서 내 기억에 남은 것은 그 책의 제사(題詞)인 파울 첼란의 "어머니,그들은 시를 써요."였다. 짧은 시구가 주는 강렬함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최근에 실비 제르맹의 책 《마그누스》에서 다시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의 일부분을 읽고 나니 파울 첼란의 시를 찾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파울 첼란이 평생 발표한 시집에서 고른 시들이 골고루 들어있어서 부분적이라 하더라도 시인 파울 첼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을 풀어주었다.
앞에 소개한 두 권의 책은 모두 이차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 파울 첼란의 시가 소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파울 첼란의 모든 시들이 당시 유대인 학살을 마음에 두고 쓰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파울 첼란의 시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산문 모두가 실려있다. 시인은 시가 아닌 글로는 수상 소감 두 편과 산문 단 한 편만 남겼다고 한다. 수상소감문 두 편 중에 게오르크 뷔히너 상 수상문인 <자오선>이 아주 유명하다고 하는데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파울 첼란이 게오르크 뷔히너가 쓴 단 네 개의 작품을 모두 아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수상소감문을 썼기 때문이다.
파울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도시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 번역으로 생계를 해결할 정도로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히브리어,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러시아아어, 영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으나 그의 부모와 민족을 살해한 독일인들의 언어인 독일어로만 시를 썼다. 그리고 그의 소재는 늘 대학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1970년, 우울증으로 자살하기까지 많은 시를 남겼고, 그의 시들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영감을 주었다. 처음에는 길었던 시들이 점차 짧아지는 것은 그가 갈수록 실어 상태에 빠졌던 것과 연관이 있어보였다.
파울 첼란의 시를 번역한 전영애 교수는 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치면서 우리 나라에 독일 문학을 소개하는 부지런한 역자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노력이 인정 받아서 2011년에는 독일에서 괴테 연구가에게 수여하는 괴테 금메달까지 받았다고 한다. 외국 작품은 번역자의 능력에 기댈 수 밖에 없는데 시의 번역은 특히 더하다. 다른 시들은 앞으로 더 읽어서 그 묵직한 의미를 새겨야겠지만 <죽음의 푸가> 만큼은 해설이 잘 돼 있어서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었다. 시 한 편 한 편마다 역자가 써놓은 주석이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어 고마웠다.
어제 있었던 북미 회담의 결과를 놓고 이런저런 말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보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 만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가 전쟁 때문에 죽기를 바라고 상처 때문에 고통스럽기를 바라겠는가. 자신의 아이가 고아가 될 수도 있고 노인들이 힘없이 희생되기를 바라겠는가. 전쟁 때문에 고통 받는 많은 소설 들을 읽으며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어떤 댓가도 가볍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읽은 파울 체란의 시들은 전쟁이 주는 고통 때문에 평생 괴로워했던 한 시인의 생애와 그의 시를 읽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내심에 갖고 있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전쟁을 체험한 사람들은 후세들에게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미워하게 하려고 이토록 온 생애를 바쳐 문학으로 증언했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마음이 가라앉았다. 파울 첼란은 자신이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1958년에 받은 브레멘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Flaschenpost)' 같습니다, - 분명 희망이 늘 크지는 않은- 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요. 한 편 한 편의 시들도 이런 식으로 도중에 있습니다. 무언가를마주해 있는 겁니다. 무얼 마주해 있느냐고요? 열려 있는 것, 점령할 수 잇는 것을 향해서,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現實) 하나를 향해서요.223쪽
아래는 파울 첼란의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죽음의 푸가> 전문이다. 검은 우유는 죽음을, 우리는 전쟁의 희생자를, 한 남자는 가해자를, 그리고 흔한 독일인 여자 이름인 마르가레테와 흔한 유대인 여자 이름 줄라미트. 삽으로 자신의 무덤을 파게 한 나찌와 숨막힐 듯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을 밀어넣어 질식하게 한 순간,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섬찟할 만큼 시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모르고 읽는다면 시는 은유에 불과하다고 믿을 것이다.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충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 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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