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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자꾸 대중역사서를 읽게 되는 것일까? 제대로 지식을 쌓으려면 1차 사료나 전문학자의 고전명저라고 꼽히는 책들을 읽는 것이 훨씬 나은데 왜 자꾸 신간 대중역사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졌던 의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는 순간, 나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았다. 나는 대중 역사서들을 통해 1. 우선 쉽게 통사적 지식을 얻기를 원하는 것 같다. 2. 내가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해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고 다른 평가를 접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3 현실의 모습을 과거 역사를 통해 더 명확히 보거나 현실을 헤쳐나갈 지혜를 얻기를 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세 가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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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를 갈망하고, 민초들의 삶을 개선하려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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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현재의 답을 찾다 누구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도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일생이 더해져 만들어져 온 것이 역사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되어지고 후대사람들에게까지 그 이름을 떨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역사를 살피다보면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오기되는 기록들이 많고 그것은 권력싸움에서 힘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선시대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당쟁을 생각하게 된다. 마치 권력을 향해 거칠 것 없는 무자비한 싸움을 통해 백성의 안위나 정책의 대의는 상실되고 오직 당파의 이익만을 앞세워 상대편을 꺼꾸러뜨리려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이 또한 본질은 사라지고 겉모양만 남아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정치가로 송시열(1607~1689)을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 그 송시열의 당파와 등을 지고 대결을 벌렸던 사람인 윤휴(1617~1680)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시대 인조반정 이후 효종, 현종, 숙종 대처럼 국, 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효종의 북벌정책이 무너지고 청과 명나라 틈바구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조선의 관료들은 1, 2차 예송 논쟁이라는 것으로 다시 한바탕 내분을 겪는 시기였다.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바로 조선 중, 후반기 송시열과 대척점에 서있었고, 천문, 지리, 병법, 역사를 넘나드는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윤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에서 개혁을 꿈꾸었던 많은 사상가들이 정적에 의해 그 꿈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목숨을 내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윤휴 역시 그렇게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다. 묻힌 역사를 꺼내 대중과 공유하고 소통하려는 역사학자 이덕일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윤휴에 관한 이 책은 주자학이 모든 학문의 지표로 되었던 시대 주자를 해석하고 학문의 본질에 접근하려했던 사상가, 시대를 앞선 개혁을 꿈꿨던 정치가로써 윤휴를 주목하고 있다. 무엇보다 효종의 죽음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북벌에 대한 의지가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국제 정치가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점이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등을 지게 하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아야 했던 것이다. 특히, 지패법과 호포법, 만인과, 체부, 수레제작 등 윤휴가 제기했던 다양한 정책은 당시로써는 급진적인 개혁으로 양반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당파를 불문하고 지지를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과 동등한 사대부의 일원으로 치부하는 송시열과 노론 세력에 의해 왕권을 추락하고 신권이 우위에 선 상황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정치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이러한 틈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내 놓아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대의를 실천하는 그 중심에 윤휴가 있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 그렇게 죽여왔던 시대, 그런 증오의 시대의 유산은 이제 청산할 때가 됐다. 백호 윤휴의 인생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저자 이덕일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윤휴의 죽음이 상징하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윤휴를 재조명하는 것은 잊힌 한 사람에 대한 흥미를 넘어서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왜곡된 정치 현실과 역사를 바로잡는 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점이 잊힌 윤휴를 현실로 이끌어 내는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역사를 보는 동안 늘 주목되는 점은 ‘역사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일 것이다. 같은 사건,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도 무엇을 어떻게 보고자 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천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덕일이 역사를 보는 시각이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지금 현재를 올바로 살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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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 그는 누구일까? 광해군대부터 숙종대까지 조선중기를 살아냈던 사람.. 이괄의 난과 정묘, 병자호란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다녔다. 주로 젊은 시절을 여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에 외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기는 했으나 거의 독학하다시피 자신의 학문을 정진했다. 열아홉살때 십년이나 연장자였던 당대의 석학 송시열로부터 자신의 독서가 부끄럽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보고 그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오기 전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던 그가 중국에서 오삼계의 반청(反淸)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숙종대에 관직에 오른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를 불러들였던 숙종의 속마음을.. 숙종에게는 송시열을 견제하기 위한 인물이 바로 윤휴였음을.. 숙종이 누구인가? 교묘하게 당쟁의 힘을 이용하며 왕권을 다졌던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대부분의 일생을 포의(布衣-여기서 포의는 베옷이다.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입는 옷이기도 하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로서 보내어 정치적인 면보다도 학문적인 업적이 더 많다는 사람이 윤휴다. 원래 당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예송논쟁으로 서인측과 틈이 벌어지자 남인으로 활약했다. 기해예송때는 벼슬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송시열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빗대어 지적하였고, 갑인예송때도 같은 기준으로 서인측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던 까닭이다. 예송논쟁... 정말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보내야 했던 시절을 대표적으로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송시열이라는 이름 석자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이긴자가 쓴다 했고,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예송논쟁이라는 말이 나오면 당연하게 뒤따라 나오는 이름이 바로 송시열이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그다지 의롭지 않은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동안 그사람에 대한 평을 어떻게 들어야 했는가를 곰곰히 따져볼 일이다. 북벌론조차도 그의 의견이 아니었음을 이제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정치현황과 지금의 정치현황은 판박이다. 그러니 당연하다.
예송논쟁이라는 것이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어째서 그 따위 논쟁에 허송세월을 해야만 했는지...모두가 제 잇속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속에 자신의 입지를 굳힌 송시열이었지만 효종이 급서한 뒤 장례절차를 시시콜콜 따졌던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었다.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참최복(3년)으로 할 것이냐, 기년복(1년)으로 할 것이냐가 문제의 시초였다. 효종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소현세자의 아우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효종이 적장자냐 아니냐와 결부되어 있었기에 중요한 문제였다. 이를 두고 윤휴는<의례>에 근거하여“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고 말하며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할 뿐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의례> 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외규정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의 자식을 이르는 칭호이기는 하지만,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신들이 <의례>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목이 또다시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할 것을 상소하고, 윤선도가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들 수 있다고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을 꺽지는 못했다. 그 문제로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다. 윤선도를 포함한 남인들이 유배되거나 축출된 것을 보면.. 그러다가 효종비의 상으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또다시 불거진다. 서인들은 송시열의 주장대로 대공복(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유생 도신징의 상소로 인하여 기년복으로 번복되고 말았다. 그 일로 인하여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실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에 근거를 두기는 하였지만 대체적으로 왕가의 예나 당시 양반계급의 예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말해 둘째아들이라는 효종의 출생순서만을 중히 여겼다는 말이된다. 이 책속에서도 그런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글쓴이의 분석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결국 파직되는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윤휴와 송시열에 대해 다시한번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다. 내가 배웠던 바로는 효종의 북벌론을 도왔던 사람이 송시열이었다. (검색해보면 지금도 그렇게 나온다) 그런데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동상이몽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인 북벌보다는 이념적인 북벌만을 강조했던 게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에게는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대의명분이었다는 말이다.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유교적 명분을 내세워 신분차별에 더욱더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었던 것도 송시열이었다. 책에 따르면 그가 주장했던 성리학 역시 살짝 변형되어져 원래의 주자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당시 송시열의 오만함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효종이 죽음으로써 잠잠했던 북벌론이 윤휴의 등장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고, 윤휴가 내세우는 북벌론이 실제적인 북벌론이다보니 당시의 서인에게는 발등의 불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적인 북벌론을 외쳤던 윤휴의 업적을 따져보자면 이렇다. 도체찰사부를 설치하고 무관인 만과를 실행하여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려 하였다. 또한 전차나 화차를 개발, 보급하고자 했던 것도 윤휴였다. 군권통합을 요구했던 도체찰사부의 설치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책을 통해 보여지는 윤휴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보게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호패법을 지패법으로 바꾸어 신분차별을 약화시키려 노력했다. 끝내 실행되지 못했던 것은 백성을 부리고 싶어했던 양반계급의 반대때문이었다. 윤휴는 숙종에게 오가작통을 주장, 실행하기도 했다. 농경을 서로 돕고, 어려움을 서로 이겨낼 수 있다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각종 조세의 납부를 독려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던 게 오가작통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휴는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던 사람인 듯 하다. 오직 북벌만을 생각하며 관직에 올랐던 그였기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고문을 당하고 유배길에 오른 그에게 피맺힌 버선을 갈아신으라고 권유하던 자식에게 돌아가는 형국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신이 반면교사가 되기를 원한다며 갈아신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교사라는 의미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이라는 걸 생각해본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느꼈을 후회가 내게도 전해져오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사문난적(斯文亂賊)..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다. 유교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사문난적이라고 말한다. 유교를 반대하는 사람.. 다시말해 송시열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라는 말도 될 것이다. 성리학, 즉 우리나라만의 유교학을 정립시킨 것이 바로 송시열이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유교의 교리자체를 반대했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끝없는 당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이 그를 버리기로 작정했던 이유가 바로 당쟁으로 인한 왕권의 흔들림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휴의 죽음은 반란의 중심에 있었다거나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것까지는 없었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울림이 크다. 책을 덮으며 이덕일이라는 글쓴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소개글을 찾아 읽어본다. 색다른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을 몇 번 읽어보았는데 그 때마다 이채롭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고, 큰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도 솔직한 말일게다. 판에 박힌 역사관은 아닌 듯 싶어 그의 이름이 보이면 다시한번 시선을 두게 된다. 그의 역사관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사람이 있어 고마움을 느끼게도 된다. 그가 보여준 이 작품속에서 당시의 상황과 결부되었던 많은 사건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일전에 논산여행길에 둘러보았던 돈암서원과 윤증고택이 떠오른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되새긴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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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윤휴와 진외가 쪽의 친척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미 정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던 송시열은 오랜 시절의 친구, 윤휴를 관직에 천거할 정도로 두터운 신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지녔지만 출사를 거부하는 윤휴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고 또한 그의 학문적 성취도를 깊이 흠모하였다. 만약 윤휴가 송시열과 뜻을 같이했다면 조선은 또 한명의 위대한 성리 학자를 배출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윤휴는 경신환국과 허견의 옥사에 연루되어 송시열이 주축이 된 서인과 숙종에 의해 사사된다. 역사가 이덕일님은 조선의 이면을 들추어내는데 탁월한 재주(?)를 지니신 분이다. 그의 일관된 주제는 역사의 단면에 감추어진 비밀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에게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당쟁이 조선을 파국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중심에 케케묵은 주자의 성리학이 사대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조선은 예의 나라라 불리고 싶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의 신하이고 싶었고 대국의 소국으로 만족하길 원했다. 수십 번의 크고 작은 침략은 애교로 봐줄만하다. 무려 36년간의 일제치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의 나라 조선?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과 1674년 일어났던 예송논쟁은 조선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권력을 위해 왕권을 견제하려는 서인, 왕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남인, 둘 간의 당쟁은 결국 승자의 집권과 패자의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선도, 허목의 주장에 동참한 남인은 송시열을 사사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예송논쟁은 윤휴와 송시열 간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남기게 된다. 결국 송시열은 오랫동안 흠모해왔던 윤휴의 성리학적 이견을 물고 늘어진다. ‘사문난적,’ 송시열은 평생 주자가례를 신념으로 여겼던 인물이다. 하지만 주자를 폄하하고 성리학만이 사물의 진리라는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윤휴의 주장에 결별을 선언한다. 후대 사가들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이 북벌론에 대해 극히 미온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최종목적은 당권을 유지하는 것이었지 북벌은 위기 대응책으로만 만족했다는 것이다. 윤휴가 재평가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선대왕들의 치욕을 기억하는 숙종에게 북벌은 필연적인 과제였을 것이다. 윤휴는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군대양성을 주창하고 중앙집권 강화를 주장한다. 윤휴의 강군 양성론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결국 청나라와의 관계 악화를 가져온다. 결국 윤휴는 북벌론 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윤휴는 정치의 희생양이었을까? 서인과 남인의 피튀기는 정쟁 속에 위대한 유학자의 기개는 꽃을 피우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절개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린 정치가 진실 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치가 진실 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회를 지배하는 지형도는 이러한 흐름을 가장 잘 평가한다. 성리학의 대가로 불리는 송시열 역시 말로가 그리 좋지 않았다. 흔히 유학자는 자신의 신념에 목숨을 건다고 한다. 그렇다면 송시열과 윤휴는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둘은 유학 이전에 국가와 백성이라는 큰 틀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입장이 맞는다는 논리만 되풀이하여 정국을 혼란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성리학은 조선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1910년 윤휴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무려 300년이란 시간동안 윤휴의 사상과 이념은 성리학이란 그늘에 가려 침묵을 지켜야했다. 윤휴를 기억하며 혼잡스러운 현대정치를 끄집어내본다. 누가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의기 있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가? 권력과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대중은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인기에 영합하고 제 할 말 하지 못하는, 무엇보다 세상에 타협하려는 정치인들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왜 우린 윤휴에 대해 알아야 하는가? 그 흔한 사당하나 없는 학자의 기개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 이덕일님의 탁월한 지필이 돋보이는 윤휴와 침묵의 제국, 위대한 성리학자의 기개를 되짚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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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이덕일 선생님의 팬이다. 선생님의 저서 ‘조선 왕을 말하다’ 시리즈가 내용이나 구성면에서 너무 좋아서 3권이 나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라는 낯선 주제의 책이 신작으로 나와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책 제목과 간략한 설명만 봤을 때, 책의 내용은 선생님이 자주 다루던 서인 세력과 그에 맞선 인물에 대한 내용인 거 같다. 초창기 저서인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나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과 비슷한 문맥의 책일 것이다. 하지만 윤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일단 책 제목부터가 상당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윤휴’, ‘침묵’, ‘제국’, 윤휴는 책을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큰 뜻을 품었던 개혁가이다. 침묵은 윤휴의 주장들이 철저히 외면당했던 당시의 상황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윤휴의 뜻대로 개혁이 이루어졌다면 조선이 대륙으로 진출해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정묘, 병자호란이 지난 후, 효종, 현종을 거쳐 숙종의 때가 되겠다. 당시 중국을 다스리던 청나라는 삼번의 난으로 남방지역이 혼란스러워서 서서히 북벌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서인 세력은 표면적으로만 북벌을 주장할 뿐, 기득권 유지하기에만 급급했다. 한 번도 벼슬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학문적 명성이 자자해서 ‘포의 신’으로 불리던 윤휴는 당시 유학의 종주이자 서인세력의 당수라 할 수 있는 송시열을 대적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던 윤휴가 본격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효종이 죽으면서 벌어진 1차 예송논쟁 때문이었다. 예송논쟁은 효종의 국상으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1년을 입어야 하느냐, 3년을 입어야 하느냐 문제가 쟁점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세력은 1년을 주장했는데 이는 조선의 왕을 중국황제의 신하처럼 여기면서 왕실에 대해 사가의 예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숱한 논쟁 끝에 결국 상복 적용은 1년으로 정해졌고, 이는 나중에 자의대비 조씨의 죽음으로 인해 벌어진 2차 예송논쟁에서 크나 큰 모순을 일으키게 됐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통해 주목을 받은 윤휴는 숙종의 권고에 따라 몇 번의 거절 끝에 벼슬을 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항상 주장하던 북벌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청나라가 삼번의 난으로 혼란스럽던 때였다. 벼슬에 오른 윤휴는 적극적으로 제안들을 내놓으면서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는데 주요 제안들을 보면 - 지패법 - 호포법 - 오가통제 - 만인과를 비롯한 군제개혁 이 제안들은 한마디로 백성들의 고통을 줄임으로서 그들의 생활을 든든하게 하자는 것인데, 이는 곧 군대의 강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모든 제안의 초점은 북벌론에 맞춰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을 위하는 것은 귀족들의 특권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고, 윤휴는 사실상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만 했다. 서인세력의 끊임없는 모함을 받은 윤휴는 사약을 받고 결국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의 죽음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민중을 생각하는 행정가이자, 시대를 이끌어나갈 개혁자였을지 모르겠지만 뛰어난 정치가는 아니었던 거 같다.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윤휴를 등용하고자 했던 것은 기반이 약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북벌론 및 여러 개혁이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윤휴는 숙종의 니즈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중국의 전국시대 때, 뛰어난 인재였던 상앙은 진 효공 앞에서 유세를 할 기회를 얻게 된다. 상앙은 왕도와 덕치에 대해서 열별을 토하지만 효공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결국 마지막에 상앙이 패도에 대해서 설파했을 때, 효공은 상앙을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이처럼 윤휴가 먼저 숙종의 의중을 파악했더라면 결국에는 숙종이 윤휴에게 더욱 신뢰와 힘을 실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개혁안들만 주장하다보니 서인세력들에게 공격당할 빌미만 제공했고, 숙종의 자리를 위태하게 만들었다. 결국 숙종 입장에서도 윤휴에게 등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 철저히 죽음으로 몰게 만들어서 서인세력들을 안심시켜야 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침묵해버린 역사가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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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도 나타나듯이 윤휴라는 인물은 세상에 드러나면 안되는 뭔가 베일에 가려 숨기고자 하는 인물로 느껴진다. '윤휴'는 과연 어떠한 사람인지 많은 궁금증을 생기게 한다. 이 책은 윤휴라는 조선후기의 학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우리에게 윤휴라는 이름은 생소한데 윤휴와 대립하는 인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송시열과의 관계도 흥미롭게 전개해 나간다.
윤휴는 효종, 현종, 숙종 세명의 임금이 집권했던 조선후기에 살았던 인물로 일정한 스승없이 학문을 일구며, 음지에서 생활을 하지만, 삼대 임금에게는 그 능력을 인정 받아 수차례 벼슬을 내린다. 하지만, 한사코 사양하다 벼슬길에 오른다. 윤휴는 남인으로 조선 왕실을 절대적인 왕실로 인정하고 계급적 차별을 없애고 상평제, 지폐법, 오가통법, 호포법등을 주장하며, 백성들의 생활 개선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윤휴는 북벌을 추진하려면 국가가 강해야 하고, 국가가 강하려면 백성들 이 부유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폐지 하기 위 해 애썼다.
윤휴와 대립되는 송시열은 서인으로 겉으로는 북벌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만, 정작 속마음은 조선 왕실을 왕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명 황실의 신하로 인정하고 있었다. 윤휴가 내세우는 정책들은 서인들에게는 반감을 갖는 내용들을 담고 있어 서 서인들의 영구 집권과 사대부들의 특권 유지를 위해서 무리하게 혐의를 씌워 사약을 내리게 하여 유언조차도 못 남기게 하였다.
현재까지도 우리에게는 윤휴의 북벌론을 송시열이 주장한 것으로 바뀌어 국사 교과서에 올려져 있다하니 윤휴의 억울함을 3백년이 지난 현시점에 이덕일선생님의 이 책으로 바로 잡아지길 바래본다. 조상들의 역사가 많은 은폐와 잘못된 기록으로 우리에게 역적이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 생을 바친 존경 받아야할 인물이 은 폐되는 모순적인 내용이 참으로 안타깝게 와 닿는다. 이덕일선생님 처럼 우리나라 역사에 애정을 갖고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 여 잘못된 역사들을 바로 잡아 주시는 분들이 많이 생겨서 우리 아이들에게 는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잘못된 역사을 알 수 있었던 아주 유익한 시간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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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해야 한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의 기록이다. 아니 단지 문자상으로 전하는 기록이 아니라 그 시대를 말해주는 화석같은 그런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현대를 살아가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금석같은 역사가 잘못 서술되어 있었고 아니 잘못 해석되어 전해내려오고 어느 한편의 이익에 부합되어 왜곡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는 아주 간단명료한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을까? 물론 이부분에 대한 대답 역시 모호한 상태이다 적어도 한국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겐...
중국의 역사를 두고 우리는 춘추필법에 의한 자기합리화식의 역사라고 촌평을 하고 일본의 역사왜곡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에는 자국사인 한국사에 대한 깨끗함이 깔려 있음을 넌즈시 내포하고 있는 표현임과 동시에 역사기록 만큼은 제대로 하는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근데 과연 우리 한국사는 왜곡이나 춘추필법식의 역사와 정말 무관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솔직히 1980년대 문교부검증교과서로 국사를 공부한 나(이후의 국사교사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어지지만)는 선뜻 '네'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그만큼 그동안 공교육에서 배웠던 역사와 실상의 역사는 많은 격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흥미롭기도 한 것이고 새롭게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들이 매번 한국사 바로알기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이덕일선생의 저작들을 접하면서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전작이 김종서에 대한 평가에서도 역사 행간에 감추어져있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듯이 이번 백호 윤휴에 대한 저작인 <윤휴와 침묵의 제국>역시 사초를 기초로 하여 면밀한 분석과 애리한 판단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인식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고 있다.
사실 백호 윤휴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그다지 없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당쟁사에 관심있는 독자들이라면 숙종조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되고 청남의 영수정도로 당쟁사에 집중된 사안과 관련되어 있는것이 일반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윤휴는 일반독자들에게 생소하다면 생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노론(서인)중심의 사관으로 기술된 조선후기 기록물들에 의하면 윤휴는 상당히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어 사사된 공공의 적으로 남아 있기에 더욱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부분들이 왠지 모르게 윤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우암을 당수로 하는 서인들에게 심지어 같은 남인(탁남계열)들에게 사문난적에 상종하지 못한 인물로 평가되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연히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한번쯤은 윤휴에 대해서 올바르게 접근해보고 싶은 유혹을 가져 오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번 역사평설을 통해서 윤휴에 대한 그동안의 역사적 평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동안 당쟁사라는 접근방식을 탈피해서 인조반정에서 시작되어 양대호란을 걸치면서 진행되었던 조선시대 후기 전반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까지 겸하고 있어 윤휴 개인뿐 아니라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의 변화까지도 다루고 있는 저작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동안 인지되지 못했던 감추어진 혹은 왜곡되어진 한국사의 진실을 파헤져 나가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전반적으로 그동안 교육받아 알고 있었고 그러리라고 생각되어진 부분들이 한쪽의 시각만으로 바라본 역사였다는 점에서 이번 저작 역시 많은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된 계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점과 전작이었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도 조모조목 반박했던 북벌과 서인들의 실체등을 통해서 윤휴와 당시 시대상을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해야겠다.
이미 왜와의 7년전쟁과 양대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는 그야말로 풍비박산난 상태로 신분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더불어 나라 존속이 심각한 국면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광해군조의 실리외교가 엉뚱한 명분으로 짓밟히면서 조선은 세계정세(동북아정세)와 역행하게 되고 국왕이 삼배구고두라는 오점을 남기면서 군주국가와 사뭇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형국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는 죽은자식 불알잡기하듯 존명이라는 명분에만 매달리면서 민생은 파탄났던 것이다. 오히려 패망하지 않은것이 신기할 정도로 국가 정체성 자체를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지패법과 호포법, 오가작통법, 서얼허통만이 북벌을 가능케함과 동시에 민생을 추스리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백호 윤휴의 사상은 어찌보면 당연한 주장이지만 비뚤어진 주자학 계승자들의 눈엔 그야말로 사문난적이나 공공의 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윤휴라는 이름은 시대의 금기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바로 잡는 것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역사인 한국사부터 바로 잡지 못한다면 이또한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그동안 왜곡된 혹은 한쪽의 시각만으로 평가된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내실을 다지고 외부의 주장에 올바른 반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책은 독자들로 다시한번 역사를 어떻게 관조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깨워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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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는 1617년 대사헌 윤효전의 아들로 태어나 벼슬과는 담쌓고 평생을 초야에 은거해 오다 숙종1년때 몇번의 부름을 거부한 끝에 늦은 나이인 만 58세의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입 한다. 그의 출사이유는 백성들이 잘 사는 방법으로 오로지 북벌대의를 시행하는 길이라 생각을 한다. 윤휴는 북벌을 위해서 섞어빠진 사대부들을 뒤로 하고 백성들에 주목을 한다. 윤휴는 백성들이 북벌의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 후 신분제의 틀을 해체내지 완하하는 것이 사회발전에 크게 이바지 할거라 보고 법이나 정책이 백성들 중심으로 재정비 되어야 한다고 생각, 양반과 사대부의 기득권을 타파하는 지패법과 호포법을 주창한다. 그 이유는 북벌을 하자면 나라가 튼튼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고 신분마다 다른 재질로 만들어 차고 다니는 호패법을 없애고 모두가 종이에 신분을 적어 다니는 지패법으로 신분차별을 없애려 한것이다 , 정권의 실세인 송시열이 수장인 서인과 남인과의 갈등구조 속에서 현실적으로 북벌대의가 그의 의도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왕권의 정통성을 무시한, 서인들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시대적인 소론,노론 등 당쟁의 휘모리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조선후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조선시대의 당쟁의 고리가 인조반정이후에 득세한 서인과 그에 대응하는 남인과의 처절한 싸움이 조선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져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구조 개혁에 힘을 썼던 윤휴. 그러나 주자학을 학문하던 송시열등에 의해 심하게 배척을 받기도 한 선비였다. 둘은 많은 부분에서 라이벌이었지만 윤휴는 천문, 지리, 병볍, 역사등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상가 였다면 송시열은 공자와 맹자의 원전을 자유롭고 독창적인 학문을 모색했다. 윤휴는 과감하고 실천적인 학자였다. 송시열이 북벌에 대해 내용상의 반대를 한 반면에, 윤휴는 실질적인 프로그램을 짜 북벌을 이루려고 했다. 그만큼 윤휴의 사상은 개혁적이었다. 저자는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죽어서 까지 금기시 된 이름이었던 시대의 풍운아 윤휴라는 인물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는 ‘윤휴를 죽였던 당시 체제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밝히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도 “윤휴가 사형당한 후 조선은 침묵의 제국이 되었다. 더 이상 그와 같은 생각은 허용되지 않았다. 윤휴와 같은 생각은, 특히 그런 생각을 표출하는 것은 사문난적으로 가는 초청장이고, 저승으로 가는 초청장이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윤휴의 삶과 사상을 복원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음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었음을 이야기 한고 있다. 그만큼 조선 후기 사회는 다른 생각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아주 경직된 사회였던 것이다. 실제 백성들을 위한 정치는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희생시키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만큼 잊어져간 사람인 윤휴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이덕일 작가 우리의 역사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던 책읽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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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5월 20일. 서대문 밖 여염집에서 장독(곤장을 맞아 생긴 상처의 독)에 신음하던 윤휴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 세상에 남길 마지막 말을 남기기 위해 먹과 붓을 요청했지만, 이마저 거부당했다. 그는 역모에 가담했을까. 하지만 죄목 어디에도 ‘역(逆)’이란 말은 없었다. 윤휴는 사약을 마시면서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인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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