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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새에게는 길이 없다> - 새의 비상, 그리고 작가의 길
다시 읽고 싶은 본문 내용
단. 칸. 방. 어릴 적 우리 집은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들판 한가운데 내려앉은 둥근 초가지붕 하나. 마당과 경계 없이 사방으로 탁 트인 논과 밭. 새들의 울음을 싣고 흐르던 낮고 긴 강. 둥글게 그어졌던 지평선 그림자. 그리고 네 식구가 누우면 군불이 약해도 훈훈하기만 했던 방. 내가 태어나 이십 년 동안 살았던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했다. -「자기만의 방」일부
백화송 가지에 찰나의 순간 동안 바람이 얹힌다. 가만히 지켜보면 가지는 우는 것이 아니라 전율의 몸을 떤다. 연주자가 거문고의 현을 켜듯 바람이 가지를 켜는 것이다. 지난여름 내내 붉은 이야기를 피워 올리던 배롱나무도 백송 곁으로 다가선다. 여린 듯 강인한 백송의 몸피를 닮으려는 몸짓이다. 그 모습에 감전이 된 나도 미더운 사람 같은 나무에게 바싹 다가선다. 백화송을 스쳐 흐르던 바람이 가슴 안으로 흐른다. 내 몸도 현이 되어 소리 없이 떨린다. 가끔은 백화송 곁에서 꿈꾸는 배롱나무가 되고 싶다. -「바람의 현」일부
겨울산에 눈발이라도 내리면 사람도 순백의 고운 나무가 되는 것을. 고운 빛, 고운 색깔이란 말에서 문득 젖은 음성 하나 묻어나온다. “색깔 고븐 옷 좀 입고 댕기라.” 아득한 내 어머니 목소리다. -「얼음재」일부
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서 가만히 눈 겨루기를 해 본다. 넝쿨진 등나무 사이로 햇솜 같이 나부끼는 신비스런 눈발에 잠시 눈 멀미가 인다. 순결한 성자의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무의 모습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싶다. 떨어지는 눈발이 켜켜이 나붓대도 나무는 잔가지 하나 흔들림 없이 눈발을 맞이한다. 동動과 정靜의 엄숙한 만남에 마음이 찡해진다. -「눈발에 서는 나무」일부
글을 쓰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사람의 가슴을 흔드는 일일 것이다. 울림으로써 영혼과 소통하는 일은 아닐까. 흐르는 물이 모난 돌을 깎아내듯 혼으로 쓴 글 줄기는 석상 같은 마음마저 흔들 수 있지 않은가. -「그립게 다가서는」일부
가만히 생각해 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육(肉)을 감싸는 것이 생의 배내옷이라면 마지막 육에 입히는 수의는 혼(魂)의 배내옷이지 싶다. 그동안 이승에서 혼이 걸치고 있던 무거운 육체를 벗어 두고 가벼운 삼베 배내옷 한 벌 갈아입고 저승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 「혼의 배내옷」일부
‘뻘흙 속에 발을 담그고 생명의 겨울뿌리를 훑는 새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향은 뻘흙 같은 곳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겨울에도 수초가 싱싱한 뿌리를 내리듯이 고향은 가시적인 공간이 아니라 원초적인 장소라고 여겨졌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동안 고향을 잃은 게 아니라 스스로 찾지 않았던 것이다.’ - 「겨울 소리」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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