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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 오래된 역사병 김인희 푸른역사/2017.11.9. sanbaram 우리의 조상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갖는 때가 있다. 넓은 만주벌판을 내주고 한반도 안으로 영역이 줄어들면서 호방한 기운을 잃고 현상유지에 급급했던 역사를 공부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갖는 것 또한 누구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더구나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 되고나서 통일을 염원하면서도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타협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만주와 중국 대륙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고 고조선과 치우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욕망이 인다. 그러나 뚜렷한 진전이 없이 재야사학자와 제도권 학자간에 대립의 골만 깊어지고 있다. <치우, 오래된 역사병>의 저자는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언어인류학을 공부했다. <한국과 먀오족의 창제신화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동이신화, 태양을 쏘다>, <동호, 퉁구스의 가신신앙>, <흰바지야오족 사회와 신앙>, <소호씨 이야기>,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등이 있다. 신화와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치우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로 치우의 실체를 바로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 한국과 중국은 모두 치우가 동이족이라 생각하지만 각자 동상이몽를 꾸고 있었다. 중국은 치우가 동이족으로 중국 사람이며, 한국인이 스스로 치우의 후손이라 하니 한국인 또한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동이족인 치우는 한인의 조상으로 고토을 빼앗기고 한반도로 이주했기 때문에 산둥성 일대는 고대 한국인의 영토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쪽 주장이 타당한가 상나라 시대에는 치우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치우로 지칭되는 구체적인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주나라 시대에 이르면 황제(皇帝)와 치우(蚩尤)가 전쟁을 하는데 황제는 주나라의 소왕을 지칭하며 치우는 초나라를 중심으로 한 묘민을 지칭한다. 이들이 전쟁을 한 이유는 창강(長江) 중류 지역의 청동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춘추시대에 이르면 풍부한 광물자원을 이용하여 강대국이 된 초나라가 중원을 침략하고 제나라와 진나라를 중심으로 중원 국가들은 초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이것이 기주대전이다. 중원 국가와 초나라의 대결은 전국시대 역사작가들에 의해 황제(黃帝)와 치우의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한나라에 이르러 사마천은 기존의 사서를 종합하여 중국 고대사를 완성한다. 사마천은 황제(黃帝)를 요 임금 이전에 배치하여 중국 모든 제왕의 시조로, 치우는 황제와 전쟁을 한 적으로 기술해 악인 이미지로 고정된다. 그러나 이 무렵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치우가 전쟁신으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전쟁신으로서의 이미지는 이후 한국과 먀오족이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수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치우는 황제와 대립의 위치에 있으며 난과 악의 이미지로 치와 선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중국, 먀오족, 한국에 의해 각기 다른 역할이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조상이 되어 중국을 통합시키는 기능을, 먀오족은 고대 영웅이 되어 세계 각국에 분산되어 있는 먀오족을 응집시키는 기능을, 한국은 화려한 고대의 부활을 통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았다.(p.274)’ 그러나 위와 같이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쓰는 심사(心史)가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을까? 찻잔 안의 태풍이오, 혼자 읽는 나만의 역사일 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서주시대 문헌에서 역사는 하나라의 우 임금에서 시작하는데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면 요 임금과 순임금이 우 임금의 앞에 놓이게 된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황제의 지위는 나날이 높아져 인류 제왕의 시조로 인식되었으며 한나라에 이르러 황제는 요 임금과 순 임금 앞에 놓이게 된다. 한나라 시대 사마천은 황제(黃帝)를 중심으로 신화를 정리하고 체계적인 계통을 세워 오제,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라는 하나의 연속적인 형태로 연결하게 된다. 황제, 전욱, 제곡, 요, 순, 우는 가공의 역사를 위하여 상제(上帝)에서 인왕(人王)이 되었고 신화의 역사화가 확립된다.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서 중국신화의 역사화가 완성되었으며 황제로부터 중국사는 시작되게 된다.(p.93)” 음양가와 도가황로파에 의해 황제(黃帝)는 우주의 중앙에 위치하며 우주만물의 운행을 주관하는 자로 지고지존의 위치에 올랐다. 고대 중국에서 중앙의 색은 황색으로 ‘황제(黃帝)’라 부른 것도 이러한 연유이다. 한족 왕조가 정통이라는 관념 아래 황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치우를 정벌한 것은 정의가 사악함을 이긴 것으로 탐욕스러운 치우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초기 치우는 황제의 신하로 명명될 만큼 긍정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었으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반란을 일으킨 악인의 이미지가 강하되고 한나라에 이르러서는 사악함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상 동이족에 대한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선진문헌과 금문에 등장하는 동이이고, 다른 하나는 진한 이후 문헌에 등장하는 동이이다. 선진문헌의 동이는 신석기부터 진(秦)나라 이전까지 산둥성을 중심으로 거주해온 집단을 의미한다. 진한 이후의 동이는 진한 이후부터 사용되는 개념으로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이민족을 지칭한다. 따라서 두 동이가 지칭하는 집단, 존재 시기, 거주 지역이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다.(p.152)” 진한 이후에는 중국 동북 지역의 거주민을 동이족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삼국지>에서는 동이족 국가로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 한, 진한, 변진, 왜가 있다”고 하여 퉁구스계, 예맥계, 한계, 왜계 민족을 총괄하고 있다. 진한 이후 동이족 개념이 산둥성에서 동북 지역으로 변화한 것은 중국의 통일로 인해 중국인들의 세계관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화이변경(華夷邊境)의 확대로 인하여 동이족이라고 지칭되는 민족이 산둥성에서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대부분 내용은 중국 문헌의 내용을 차용한 것이다. “주로 치우 형상의 묘사와 치우의 주요 사건, 치우 후예의 행방에 관한 내용은 같거나 비슷하다. 치우의 군신 이미지와 황제와 탁록대전, 치우 후예의 이동과 한족과 융합 등의 내용은 중국 고대 문헌상의 기록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따라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중 치우와 관련된 이러한 기록은 모두 중국 고문헌 중의 기록에 근거하거나 인용하고 발췌하여 편집했음을 알 수 있다.(p.242)” 대부분의 기록이 중국 문헌자료에 근거하고 있는 이들 문헌이 과연 민간에 전승되던 이야기를 기반으로 작성된 것인지 의심이 든다. 따라서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근거로 한 이덕일의 주장은 아전인수격의 문헌 인용이기에 성립할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현재 중국학계의 공통적 주장은 ‘치우는 신석기시대 산둥성 일대에서 활동한 동이족이었으며 황하 중류 지역의 화하족인 황제와 전쟁을 하여 패배하고 남방으로 이주하여 삼묘가 되었고 이들이 현재 먀오족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쉬쉬셩이 치우가 동이족이라고 주장한 이래 궈모뤄, 옌원밍, 리쉐친과 같은 중국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들이 계승했으며 고고 유적과 연결하여 설명했다.(p.258)” 일부 한국인들은 한국인의 조상인 치우가 산둥 지역에서 활동했으니 고대 산둥 지역은 한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중국인인 치우가 한반도로 이주했으니 한국인은 중국인이며 더 나아가 한반도도 중국땅이라고 생각한다. 영토를 접하고 있는 두 나라는 고대사를 중심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철저한 이론적 준비가 없다면 자칫 중국에 의해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타이완의 유심성교에서 치우의 후손이라며 단군부터 김정일까지 한국의 역대 제왕을 제사하며 한국사를 중국사로 포섭하려는 것이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치우와 관련하여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반드시 고대사 연구에서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치우 역사병이 발발한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텐안먼 사태이다. 이를 봉합하는 과정에 중국공산당은 한족중심주의를 강화했고 먀오족은 한족의 철천지원수 치우를 내세워 대항했다. 한국 또한 중국 내 치우열풍의 영향을 받아 치우를 내세워 민족주의를 강하화려 했다.(p.280)” 최근 중국의 민족주의는 위험수위를 넘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정치가들이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드배치를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중국의 시도가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저항적 성격의 근대 민족주의와 달리 최근 중국의 민족주의는 공산당이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였으며, 중화사상과 결합하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근대 민족주의와 구분하여 이를 신민족주의라 명명할 수 있다. 신민족주의가 가진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국, 각 민족의 지식인들이 먼저 자국 내의 역사 왜곡에 대해 지적하고 시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치우는 역사 속 인물이기는 해도 중화사상을 강화하기 위해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의 면모로 변형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에 들어서는 소수민족들을 끌어안기 위한 방편으로 황제와 염제에 이어 치우까지 자기들의 공동 조상으로 한 신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그 예로 옛날 치우와 황제가 싸웠다고 하는 북경 인근의 줘루현(고대 탁록이라 추정)에 중화삼조당을 건립하여 삼조문화론을 대대적으로 홍보 육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치우는 고대 동이족이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진이 통일 국가를 건설하면서 화이변경의 확대로 동이족의 위치가 중국 동북쪽으로 이동하여 우리의 역사 영역을 지칭하게 되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의 역사를 왜곡한 것을 되풀이 하거나, 내게 유리한 문헌만을 인용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기에 앞장서 바른 역사를 세워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우리의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읽으면 좋은 참고가 될 것이고, 고대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는다면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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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은 모두 치우가 동이족이라 생각하지만 각자 동상이몽를 꾸고 있었다. 중국은 치우가 동이족으로 중국 사람이며, 한국인이 스스로 치우의 후손이라 하니 한국인 또한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동이족인 치우는 한인의 조상으로 고토을 빼앗기고 한반도로 이주했기 때문에 산둥성 일대는 고대 한국인의 영토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쪽 주장이 타당한가 상나라 시대에는 치우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치우로 지칭되는 구체적인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주나라 시대에 이르면 황제(皇帝)와 치우(蚩尤)가 전쟁을 하는데 황제는 주나라의 소왕을 지칭하며 치우는 초나라를 중심으로 한 묘민을 지칭한다. 이들이 전쟁을 한 이유는 창강(長江) 중류 지역의 청동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춘추시대에 이르면 풍부한 광물자원을 이용하여 강대국이 된 초나라가 중원을 침략하고 제나라와 진나라를 중심으로 중원 국가들은 초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이것이 기주대전이다. 중원 국가와 초나라의 대결은 전국시대 역사작가들에 의해 황제(黃帝)와 치우의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한나라에 이르러 사마천은 기존의 사서를 종합하여 중국 고대사를 완성한다. 사마천은 황제(黃帝)를 요 임금 이전에 배치하여 중국 모든 제왕의 시조로, 치우는 황제와 전쟁을 한 적으로 기술해 악인 이미지로 고정된다. 그러나 이 무렵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치우가 전쟁신으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전쟁신으로서의 이미지는 이후 한국과 먀오족이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수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치우는 황제와 대립의 위치에 있으며 난과 악의 이미지로 치와 선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중국, 먀오족, 한국에 의해 각기 다른 역할이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조상이 되어 중국을 통합시키는 기능을, 먀오족은 고대 영웅이 되어 세계 각국에 분산되어 있는 먀오족을 응집시키는 기능을, 한국은 화려한 고대의 부활을 통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것을 요구받았다.(p.274)’ 그러나 위와 같이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쓰는 심사(心史)가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을까? 찻잔 안의 태풍이오, 혼자 읽는 나만의 역사일 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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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좀 늦게 나온 감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