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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늑대의 경쾌한 시학
네 번째 시집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문학동네, 2017)에서 김상미는 시든 사물들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시드는 것들은 시간의 습격을 받은 사물들이다. 「오렌지」에 표현되는 대로,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에서 시인은 시드는 것들이 펼쳐내는 마지막 안간힘을 발견한다. 안간힘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시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시간을 향해 펼치는 시든 것들의 안간힘에 감동하여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의 남은 한 줌의 삶/ 흔쾌히 베어 먹는다”. 시든 오렌지를 거침없이 베어 먹는 시인의 이 모습은 시집의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두려움 없이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 속으로 스스로 빨려 들어간다.
「전광석화」라는 시를 보도록 하자. ‘공부’ 앞에 붙은 ‘열심히’를 떼어내고 “학교 외의 삶을 가진 아이들에게로” 간 사람(‘나’)이 있다. 아이들은 ‘공부’ 대신 “세상의 얼룩”을 갖고 놀았다. 그들은 어른들에게서 밀수입한 ‘생각’들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이 좋아 거울 앞에 서서 그들을 흉내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다만 “그들의 ‘얼룩’이 내 몸에 묻어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시인 K가 되어 아이들이 벌어던 “지독한 유희”에 빠져 있다. 시인 K는 “악착같이 세상의 얼룩을 빨아먹고 뱉어내고 또 빨아먹는”다. 세상의 안쪽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를 벗어나 세상의 바깥에서 펼쳐지는 얼룩을 악착같이 사랑하는 김상미의 시작(詩作)이 시인 K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늑대 한 마리를 그렸다 크고 무시무시하고 털이 무성한 그러자 스무 마리의 늑대사냥개들이 나타나 둥그렇게 늑대를 둘러쌌다 20대 1의 팽팽한 살기(殺氣)가 먹고 먹히기 직전의 살인적 에너지를 뽑아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늑대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들 그럼에도 침착할 정도로 도저한 늑대의 자신감! 오른쪽과 왼쪽, 뒤쪽과 앞쪽, 사방팔방에서 튀어오르는 핏빛 외마디 비명소리들! 픽픽 내팽개쳐지는 개, 개, 개들의 시체 20대 1의 피비린내 나는 압도적 승리! 그 앞에서 홀로 포효하는 불굴의 전사 나는 그를 색칠했다 굽힐 줄 모르는 순백의 혈통 작렬하듯 단숨에 내 영혼 휘저어놓고 우아하게 흰 목털을 곤두세우며 웃는 거대한 야성! 이제는 지구 위에서 영원히 사라진 하얀 늑대 한 마리 - 「하얀 늑대」 전문
“눈물나게 외로운 전광석화”(「전광석화」)의 시학은 위 시에서 “거대한 야성!”을 상징하는 하얀 늑대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전광석화처럼 아주 짧은 시간에 펼쳐지는 야성의 향연은 “20대 1의 팽팽한 살기(殺氣)”에서 뿜어 나오는 “살인적 에너지”와 더불어 시작된다. 시인은 “크고 무시무시하고 털이 무성한” 늑대 한 마리를 상상한다. 무려 20마리의 사냥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포효하는/ 불굴의 전사”로서 늑대를 시적 세계로 불러냄으로써 그녀는 “이제는 지구 위에서 영원히 사라진” 늑대라는 실재(the real)와 거리낌없이 만나고 있다. 시인의 말마따나 하얀 늑대는 “굽힐 줄 모르는 순백의 혈통”으로 “작렬하듯 단숨에 내 영혼 휘저어놓”았다.
시인 K의 이름으로 불려 나온 하얀 늑대의 야성은 시인이 지향하는 시 세계의 일단을 에둘러 보여준다. 그녀는 사회가 강제하는 질서 밖으로 전광석화처럼 뛰쳐나간다. 수많은 사냥개들이 달라붙어 시인의 야성을 길들이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침착할 정도로 도저한 늑대의 자신감!”으로 시인은 “핏빛 외마디 비명소리들!”이 난무하는 이 세계를 유유히 활보한다. 길든 사냥개들의 폭력을 두려워하는 늑대는 “거대한 야성!”을 상실했으므로 늑대의 계보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늑대 자체가 아니라 그 늑대가 도저하게 펼쳐내는 야성, 곧 자신감이다. 시인은 이 늑대의 야성으로 “시발놈들!”(「똥파리」)이 지배하는 세상과 맞서고, “비열한 신사 숙녀분들.”(「비열한 거리」)의 세계로 거칠게 뛰어 들어간다.
하지만 비열한 신사=숙녀들이 지배하는 세계는 예상보다 굳건하다.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를 참조한다면, “늑대들과 노는 것, 아무리 외로워도 늑대들과 노는 것”은 이제 꺼림칙하고 고통스런 일로 변해버렸다. 야성을 잃은 세계에서는 “개념 없는 시가 개념 있는 시보다 더 잘 먹”힌다. 짧은 시가 대세가 되어 긴 시들이 서 있는 자리(이 시집에 실린 김상미 시는 대부분 길다!)를 시나브로 잠식해 들어간다.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는 양치기들은 “미리 봐둔 서정적 비상구를 통과해 제집에서 편안히 히트작들을 써대고 있”다. 양심을 지키는 “내 인생의 안뜰에 쌓이는 건 타인의 쓰레기들”이라는 시인의 진술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인은 “누가 뭐래도 내 소원은/ ‘이 얼마나 멋진 날인가’로 시작하는 시를 써보는 것”(같은 시)이라고 선언한다. 누가 뭐라든 시인은 자신이 소망하는 시를 쓰려고 한다. 그리고 그 속으로 황홀하게 빨려 들어가길 애타게 소망한다. 주목할 점은, 시인의 이러한 소망이 “그러니 누가 내 팔목을 쓰윽 그어 주렴”에 드러나듯 제 목숨을 거는 상황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게 시 쓰기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팔목에서 스며 나오는 피로 시인은 어제는 짧은 시를, 오늘은 긴 시를 쓴다. 피가 곧 시가 되고, 목숨이 곧 시가 되는 김상미의 이러한 시작(詩作)은 나른한 봄날 오후, 울부짖는 병아리에게 “검은 만년필 주사”를 놓는 “우리들의 너무나도 외로운 한 아이”(「봄날의 한 아이」)와 상당히 닮아 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팔목에 주사를 놓을 뿐이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그녀는 도대체 어떤 시 세계에 이르려고 하는 것일까
「꽃밭에서 쓴 편지」라는 시에서 시인은 “파닥파닥 상상력이 뒤쫓아 다니는 어린아이의 발자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파닥파닥 뛰는 상상력은 ‘나’를 버리고 떠난 그 사람에게서 놓여날 때 비로소 펼쳐진다. “그대가 좋아하는 꽃들”을 바람 부는 벌판에 내던져버림으로써 시인은 그 사람과 이룬 인연을 미련 없이 떨쳐낸다. 이제 그녀에게 그 사람은 운명이 아니다. 운명적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어린아이처럼 파닥파닥 뛰는 상상력은 이러한 집착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집착에서 놓여난 상상력이니 그것이 어디로 달려갈지는 “그건 아무도” 모른다. 말 그대로 경계가 없는 상상력의 세계로 그녀는 하얀 늑대처럼 포효하며 달려나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잘 가라, 내 애인들이여,”(「바다로 간 내 애인들」)를 외치며, “밥의 힘”(「밥의 힘」)으로 빠르게 달리는 이 야성의 시인은 “내가 사랑한 시”(「내가 사랑한 시」)를 찾기 위해 즐거운 외출을 하고 있다. 그 외출의 현장에서 시인은 “평생 잊지 못할 난생처음 봄”(「난생처음 봄」)을 기다리기도 하고, “타버린 그대 마음속 지독한 탄내 같은 시집(詩集)!”을 들고 독자들을 향해 “― 계속해서 읽어주어요, 제발”이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고양이와 장미」에 나타나는 대로, “사랑에 빠진, 사랑에 투신한 모든 것들의 사랑스러움”을 느껴보기도 한다. 체험과 추체험이 어울린 시의 현장에서 시인은 “5월 장미밭을 통째로 삼키는 황홀한 고양이”와 거침없이 놀고 있다. “그들의 도도한 쾌활함”에 푹 빠진 시인의 이 모습이 어찌 보면 김상미 시인이 시를 통해 추구하는 “아름다운 야성”의 세계인지도 모르겠다. 고양이처럼 가볍고 쾌활한 시를, 하얀 늑대처럼 거칠게 사회의 질서와 맞서는 시를 그녀는 추구하고 있다.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치고 바지는 언어의 세계를 그녀는 경쾌한 움직임으로 보여주고 있는바, 시인은 무엇보다 그 경쾌함으로 비열한 거리를 두려움 없이 활보하는 시인 K의 모습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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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시인이지만 제목이 마음에 드는 시집이라서 구매했다. 김상미 시인의 네번째 시집이라는데 이전 시집을 읽어 본 적이 없어서 나름 기대를 하고 있다. 세번째 시집 이후 무려 14년만에 나온 시집이라니 어떤 내용일지도 궁금하다. 표지 색깔도 맘에 들고. 4월에 출간된 시집이라 초록색이 더 맘에 든다. 소설과 다르게 시집을 볼때는 내맘대로 아무데나 펼쳐서 보는 편이다. 목차에서 맘에 드는 제목의 페이지부터 볼 때도 있고 해설을 먼저 볼 때도 있고 그냥 아무데나 펼쳐서 볼때도 있고.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 「오렌지」 중에서 매시간 지나가는 기차처럼 우리 삶에는 머묾보다 떠남이 더 많고, 매번 불타는 그 떠남 속에서 나는 늙어가지만, 나는 내 위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좋아요, 마음이 저리도록 나를 꼭 껴안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푹 파묻히게 하는 내 애인처럼, 삶은 격렬하고 또한 한없이 적막하지만,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인생은 짧아지고 숨막히는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서서히 세상에서 멀어져가지만, - 「철로변 집」 중에서 때로는 행복한 책 한 권 때문에 임종을 앞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책을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 「죽지 않는 책」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