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작품, 그림이나 조각 같은 것들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단점은 자주 갈수가 없다는 것이다. 혼자 어딜 가는 것에 익숙치 않은 나는 영화도 집에서 혼자서 컴으로 보는 편이라서 미술관을 혼자 간다는 것은 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나중에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난다면 충분히 남는 주말에 혼자서 미술관 사책을 할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대용으로 나는 그림이 나온 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미술작품은 직접 눈으로 봐야 해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진으로 보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작게 축소되어 있는 사진으로 찍어 놓은 그림을 볼때면 직접 커다란 그림을 볼때는 볼수 없었던 세밀한 부분까지도 볼수가 있는 때가 있어 가끔은 책으로 보는 작품들이 내 손안에 들어 있는 작품인양 즐거운 마음을 가질때도 있다. 또한 내가 느끼는 책으로 그림을 보았을때의 이로운 점 한가지는 전 세계에 있는 유명한 작품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한꺼번에 볼수가 있다는 것이다. |
|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보기 싫은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멕시코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는 [도로시 헤일의 자살]에서 실제 투신한 여자배우의 자살 과정을 3단계로 걸쳐서 보여주고 [디에고와 나]에서는 프리다 칼로의 초상화가 나오는데 머리카락이 목을 옥죄는 그림을 보여준다. 남편 디에고와의 관계에서 항상 고생하고 속상해 하는 모습이 자살로 표현되는 것이다. <검은 미술관>은 보기 싫은 껄끄러운 그림들, 보면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그림들, 보기 싫어하는 그림들을 보여주고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에서 목차는 크게 나누어서 ‘검은 개인을 그리다’와 ‘검은 사회를 그리다’로 나뉘어진다. 검은 개인에서는 인간 내면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그림들이다. 희망 자학, 고통, 죽음, 공포 불안 등 개인 내면의 특성에서 나타나는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고, 검은 사회에서는 전쟁의 폭력, 종교, 집단 등 개인 외부의 것들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우면서도 그 동안 예술에 대한 편견에 쌓여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작가들도 지상의 땅을 밟고 살며, 내면의 고통이 있는 사람일진데, 무조건 아름다움, 고상함만 찾는다는 것도 사람들의 과도한 욕심이 아닐까? 예술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조금 더 마음을 열어 세상을 바라본다면, 내 안에 있는 편견과 고뇌에 대해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작가의 마음에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 본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더라도 나중에 남는 것은 찌꺼기요 쓰레기다. 예쁘고 향기로운 꽃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더럽고 냄새 나는 거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결국 인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꺼림직하고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들과 함께하고 우리 내면에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될 테니까.
|
|
학교 다닐 때, 서양 미술사나 한국 미술사 수업을 수강하면서 무슨 욕심에선지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와 김원용, 안휘준의 <한국 미술의 역사>를 구입했었다. 결과적으로 이 책들은 그저 내 책장을 장식하는 책이 되어 버렸지만 왠지 뿌듯했다. 가끔 그림이 보고 싶은 날, 차려 입고 어디 나가기는 싫은데 그냥 마음이 그런 날에는 바닥에 배 깔고 이 책들을 펼쳤다. 텍스트는 뒷전이고 그저 그림을 보는 재미였다. 아름답고 신비롭고 화려한 그림들에 그저 아는 것 없지만 눈요기를 했었다. 꽤 많은 도판들을 담은 책들이라 간접적으로 나마 참 많은 그림들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받아보고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 같다. 아마, 이런 그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
|
|
|
이 책의 기획을 읽었을 때, 읽어본 적은 없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들었던 '무서운 그림'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아름답거나, 예쁜 그림이 아닌 무서운 느낌을 주거나 불편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바탕에 둔 정서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다시한번 미술에 관한 책이다. 미술책은 그 안에서도 분야를 달리해가며 읽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불편한 진실', '잔혹한 아름다움', '불평등의 균형' 등등 이 책에 등장하는 그림과 내용들을 보다보면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법한 단어들의 어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다워보이는 그림들의 일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거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가 비정상적이기까지 하다. 사실 그림이, 아니 예술이 꼭 아름다워야한다는 규칙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에는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책의 한 구절에 등장하는 가족이란 아무 문제가 없어야한다고 정의해두는 것 처럼 말이다.
일전에 가봤던 한 음악회에서 현대음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도통 귀에 편안한 소리라고는 들려주지 않고 거의 소음에 가까운 띵땅소리만 들리길래 너무 재미없어한 기억이 있다. 음악도 역시 부드러운 또는 조화로운 소리를 들려주어야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아름답지 않은 그림이었음에도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사람의 삶이란 위대한 작가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늘상 아름다울수만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 내 삶의 어려움을 투덜거림이라는 수다로 소모해버리는 대신 그림으로 표현하여 위대한 예술을 남긴 작가들이 다시 한번 존경스러워졌다.
책에서...
p64 1년 후, 10년 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현재의 인생은 끊임없이 반납된다. 오직 미래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현재들'만 있는 삶이, 지금 우리 삶 같다. 인간에겐 유보시킬 행복이란 없다는 말이 무색하게 말이다.
p107 오늘날에도 어머니는 가장 평화롭고 자애로운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다. 하지마 주위를 둘러보자. 이 땅의 모든 어머니가 성모마리아처럼 모성 그 자체로 살아가고 있는지.
p113 누군가에게 족쇄가 되는 고정관념은 폭력이다.
p117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게 뭐야?"라는 말처럼, 부모는 '보장자산'이며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취하는 몰염치와 이기심은 졸지에 가족으로서의 권리가 된다. (중략) 부모 역시 자식의 '보험'이다.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데" 또는 "내가 널 위해 얼마나 희생하며 살았는데"같은 부모의 말에 자식들은 숨 막혀 죽는다. 그렇게 효도는 '채무'가 되며, 평생 못 갚는 부모의 희생을 자양분 삼아 자식들의 죄의식도 날로 자란다.
p123 즉 아픈 이를 돌보며 두렵고 혹은 지쳐가는 가족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슬프지만, 이것이 가족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이다. (중략) 가족간에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 바로 가족 간에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p136 문제는 이 교육이 아이를 더 수준 높은 교양인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이 전쟁같은 삶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방어적 성격'이 크다는 사실이다.
p190 한 사람이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많은 사람이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고 했다.
p198-199 먹고살기 급급하지 않기에 올바름을 택할 수 있고, 당장 자기 자식들 굶는 모습, 피눈말 나는 것 안볼 수 있으니까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중략) 평생 시험에 안 드는 환경에서 끝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자들이 착한 얼굴로 세상을 낙관적으로만 보며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이제껏 사회의 어두움을 보지 않고 살아도 됐기 때문일 것이다. |
|
<무서운 그림>을 읽고 나서였는지 약간은 식상함이 드는 책이었다. 예로 든 작품도 그렇고 서사 구조도 그렇고 닮은 느낌이 많은 작품이다 보니 그런 생각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라는 본질을 묻는 작가의 글을 진솔함과 진정성이 넘쳐난다. 동전의 양면처럼 흑과 백,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지닌 우리 인간은 작품에도 이런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 왔다. 검은 미술관이란 결국 인간의 어두운 내면이 드러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붓으로 세상과 소통했던 수많은 화가들이 그려낸 작품을 통해 우리의 어두운 심연과 마주선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책의 장점은 서양의 명화 외에도 국내 작품을 싣고 있다는 점이다. 고등어라는 작가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화가였는데, 이점만으로도 이 책이 주는 장점은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
|
난쏘공과 논문 때문에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어두운 그림들을 다룬 책이라 숭고와 관련된 내용이 있을 것 같아서 리뷰어 신청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맥락은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숭고'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숭고한 예술은 고통을 통해 힘을 키워준다. 숭고한 예술은 인간이 실천이성의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적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통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해석을 가로막는 권태야말로 우리 삶에서 축출해야 하는 태도라는 이야기다. 베이컨의 그림은 권태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림을 볼 때마다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충격을 주니까 말이다. 고통을 '자원화'하는 힘을 준다는 것, 그것이 베이컨 그림의 최대 미덕이 아닐까 싶다." p. 66
"그런 끈적한 욕구를 제어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것을 선물 받았지만, 고야의 말대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나니 말이다. 전쟁 같은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탈 인간화가 제어되지 않는다면 평상시에도 냉혹함, 잔인한 본능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 안에 비인간적인 사악함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것을 잘 통제하고 제어하는 것은 분명 의무이다." p.77
왠지 비슷한 분량,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진 장들 때문에, 지면이나 인터넷 공간에 꾸준히 게재한 칼럼을 모은 책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식에 있어서는 예술 작품에 대한 감성적인 김영숙의 에세이들이 생각났다. 저자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에 대해 마음껏 화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기 직전에 최대한 객관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미술사를 다룬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편"을 읽었기 때문에 그 책과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이 두 책을 읽은 후 나에게는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성 문제가 남았다. 아래에 쓴 이유들 때문에 예술이 사회성을 가지려면 최대한 자율적이어야 한다는 실러의 주장이 납득되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일상 자체가 전쟁 같다. '인간의 소모품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국가 경쟁력 향상, 높은 경제 성장률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위해 노동자들은 쉽게 희생양이 된다... 내 자식이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도록 학원 안에 가둬놓고 어릴 적부터 교육전쟁을 치른다. 문제는 이 교육이 아이를 더 수준 높은 교양인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이 전쟁 같은 삶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방어적 성격'이 크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면 삶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 치열해진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말이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절규가 되는 것이다." p. 136
책은 크게 개인의 어두움과 사회의 어두움을 표현한 그림을 다룬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개인적으로 앞부분은 상당히 재미있었고, 뒷부분은 공감되는 문장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도덕 교과서보다도 상투적인 사회 비판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좀 불편했다. 저자는 사학을 전공했고 기자이다. 사회 문제를 보는 틀을 갖추었고, 사회 문제들을 실제로 가까이에서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그림을 읽는 방식도 예술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다. 부제처럼 이 책 자체가 그러한 노선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술에서 어떤 교훈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일의 위험성을 보았다. 말이 많아질 수록 효과는 반감되는 것 같다. 도상을 해석해주는 내용(가끔 너무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은 유용했고 납득이 되었으나, 그림에 사회 윤리적인 의미 부여를 하면서부터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주려고 드는 선생님처럼 너무 친절하다. 그림 자체는 읽어주고 힌트는 던져주되, 비판과 깨달음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둘 수는 없었을까?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공간에 사회의 한 분야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앞뒤 맥락과 다양한 입장의 스펙트럼은 무시된 채 단순화되기 쉽다. 현실은 이렇게 몇 마디로 압축시킬 수 없는, 좀 더 복잡한 공간이 아닌가. 한 책에 이렇게 많은 분야를 다 비판하려 들면, 그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교회와 교사 학생 관계를 비판하는 부분이 불편했다. 천주교인 저자는 종교 중에서도 개신교 만을 굉장히 미워하는 것 같다. 일부 큰 교회들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기에 비판의 맥락은 납득이 되지만 모든 개신교인들이 '개독교인'처럼 사는 것은 아닌데 도매금으로 욕 먹는 느낌이었다. 교사와 학생 사이도 그들이 개인적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사회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데, 그러한 맥락은 무시한 채 교사쪽에서 일방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리고 학생은 희생 당하고 있다는 듯한 논지가 불편했던 것 같다.
난쏘공도 아닌데 본의 아니게 공격적인 리뷰를 했다. 사실 저자의 문체가 잘 읽어져서 책장이 잘 넘어가는 책이었다. 내가 느낀 불편함들은 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고, 아마 사회 문제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부분에서 통쾌함을 느낄 독자도 많을 것 같다. 책에서 진중권의 그림자가 엿보이는데 다른 독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다. "폭력과 성스러움"과 함께 사회에서 왕따를 만드는 부분에서는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이 생각났다. 인간의 어두운 부분과 관련이 깊을 '성'이라는 소재 때문에 진중권의 아내 미와 교코가 쓴 "성의 미학"이, '죽음'이라는 소재 때문에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이 생각났다. 그러한 소재와 표현이 진중권의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 작가의 현대미술 작품을 다룬 부분을 보며 경기도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이 생각나 반가웠다.
실러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보니 비극적인 예술에 대한 논의에서 눈이 번쩍 뜨인다.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은 '이야기'가 되어 연극 같은 상품으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신기한 건, 고통스러운 삶이 극화되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쉽게 감동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이다. 연극이라는 예술로 아름답게 포장된 고통은, 너무도 간단하게 관객들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관객들은 그 고통 앞에서, 어떠한 수고스러움 없이 단지 눈물만 흘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도덕적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 데 만족하며 객석을 뜨면 그만이다... 사실 비극을 봐도 우린 멀쩡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저 비극은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극화된 타인의 고통은 관찰자의 자아를 흔들기는커녕 그것을 한층 공고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무대 위의 슬품에 동요되긴 하겠지만, 곧바로 내 우월한 처지에 대한 안심과 자족감이 부지불식간에 뒤따라오니까. 결국 동정이란 우월감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p. 173-174
실러의 비극론과 정 반대되는 이야기이다. 실러는 등장인물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생존에 위협을 주지 않는 고통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비극이, 실제로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만났을 때 저항할 수 있게 하는 도덕적 힘을 길러주는 일종의 예방주사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는 비극이 관객에게 심리적 우월감과 위안을 줄 뿐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비극적인 예술은 감상자에게 전혀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할 만큼 무능한 것일까?? 나는 실러의 주장에 더 납득이 간다. 저자는 이번에는 고통과 비극을 표현한 그림을 들어 앞의 주장과 반대 되어보이는 주장을 한다.
"벡신스키의 그림이 인기 있는 이유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벡신스키 작품 특유의 신비함 덕분이다. 이 신비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드러내기 꺼려하는 인간의 깊은 심연에 고인 어둠을 공개된 곳으로 끄집어낸다... 그림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대감이 형성된다. 결국 벡신스키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 두 가지 중 하나로 거론했던 '죽음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은 첫 번째 이유와도 연결된다. 상상력으로 일군 신비한 그림들은 주위 사람들과 연대하게 만들고, 결국 그 연대는 죽음이라는 '재앙' 앞에서 견딜 힘을 주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자아는 길들여지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서로 손을 맞잡을 일만 남은 셈이다. 옆 사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동지이며, 이 동지들과 '연대'를 통해 '게으를 권리'를 찾아나가는 것, 그것이 곧 일상의 불안과 공포에서 탈출할 지름길이 될 테니 말이다." p. 189
비극적인 예술을 통해 인간 내면은 강해지고, 고통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저자는 더 나아가 인간이 수동적으로 감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동질감을 발견하고 연대하게 된다고까지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체제 사회 구조에 짱돌을 들고 연대하라던 우석훈의 "88만원 세대"의 결론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비극에 대한 저자의 앞의 주장보다는 뒤의 주장에 더 납득이 된다.
|
|
사실 그림에 대해 아는게 없다.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TV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고흐의 몇몇 그림들과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루벤스의 '내려지는 예수'정도. 그리고 작년에 읽었던 그림에 마음을 놓다라는 책에서 봤던 프리다칼로의 그림들. 내 수준이 이것밖에 안된다. 그림을 모르면서 그림을 알려는 노력도 안한다. 성경이라도 제대로 읽어서 무수히 많은 영감을 받아 그러졌던 종교적 회화, 조각들의 의미라도 파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난 정말 아무것도 못한다. 올 초에 프랑스에 다녀오신 울 시엄니도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 대부분의 내용과 의미를 작가가 누군지 몰라도 설명할 수 있으셨다고 했다. 그 얘기를 시누이를 통해 들었는데 내가 참 느끼는게 많았다. 어떻게 보면 사람의 교양수준을 알수 있는 척도로 보일만도 하고만. 난 정말 그림에 문외한이었구나.
지은이가 내 코드에 맞을것 같다며 선물해줬다. 난 이런 그로테스크한 어둡고 칙칙하고 음산한 그림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 너는 나한테 이 책을 선물한거니? -_- 그런 몽환적인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림까지 그럴것이라는 편견을 버려라.
책은 개인과 사회라는 큰 주제로 나뉘어 그 문제점을 중심으로 그림이 선정되어 있다. 이 책에서 프리다 칼로가 또 등장하는것 보니 정말 별스러운 인생을 살다간 여자인가싶다. 남편이 어지간한 바람둥이인데다 칼로의 동생과도 부정을 저질렀다 한다. 뭐 이런 막장불륜인생의 피해자가 있는가. 그림에 그녀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얼마나 가학적인지. 나로써는 가늠할 수 없는정도의 상처인것 같다. 이것은 예술적 승화라고 보기에는 참으로 민망할정도의 그림인 것이다. 몇번찔렀을 뿐인데 라는 작품은 남자가 프리다인지 누워있는 여자가 프리다인지... 아니면 그 둘다인지도 모를 묘한 인상을 준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서 서리가 내린다던데 그 참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그림으로 마치 복수를 하는 것처럼.
그밖에 인상깊었던 그림들이 몇점 더 있다. 모성의 무게에 눌린 어머니상. 조반니 세간티니의 '악한 어머니' '욕망의 징벌'의 그림은 세상이 우리의 어머니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 시선을 느낄수 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가. 어머니도 사람이고 여자인데 내가 사는 세상도 그저 국가 차원에서 출산을 장려하고 여자는 무조건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그런 차별적 잣대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죄인일까. 소박맞아 정당한 것일까. 그 보이지 않는 속박의 굴레는 여직껏 여성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것은 아닌지. 꼭 내가 어머니이여서 말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는 어머니의 역할에 너무 많은 짐을 지워주는 것같아 안타까웠다. 그런데 비단 이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명화에 그려진 어머니상 역시 그렇다. 섹스라는 쾌락만 즐기고 아이를 낳지 않는 어머니를 벌하는 그림인 욕망의 징벌만 봐도 그렇다. 애는 뭐 혼자 낳나? 아버지의 죄는 온데간데 없고 어머니만 때리는 이 잔혹한 그림 같으니. 그림을 그린 화가도 어머니가 없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하던데 그 영향이 그림에 많이 나타난듯 하다. 엄마의 울타리가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살지 않았으리. 그런 한스러움이 느껴진다고 할까.
폼페이의 화산재로 화석이 되어버린 남녀를 보는것 같은 그림. 즈지스와프 벡신스키의 '무제' . 삶과 죽음이 느껴지고 뭔가 가슴이 뭉클해오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 관계, 즉 연대함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재앙을 극복할 해결책 역시 사람들이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할 시점이라고 말하는것 같다. 같이 있으면 두려움은 반감된다. 자본주의 재앙에 맞서는 너와 나의 자세. 서로 의지하라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우리나라에 일어난 역병때문에 이러한 연대는 커녕 집안의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을 기세다. 연대는 고사하고 같이 있었다간 우리가족이 몰살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러다가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건 아닌지 심히 염려된다. 그림의 의도가 참으로 무색해지는 요즘이다. 그림을 통해 마음의 위안보다는 불안을 얻었다고 해야 맞을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별스럽고 기괴한 그림에 마음을 빼앗긴다. 왜 그런거지? 순자의 성악설이 그 이유를 뒷받침하는 걸까? 착한 모습보다는 악한 모습에,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추하고 더러운 모습에 열광하는 추잡한 인간내면이 있기때문이라고 고전이 나에게 말하는것 같다. 책은 재미있었고 나에게 많은 심상을 남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