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청준, 「소문의 벽」
잡지사 편집장으로 일하는 ‘나’는 술에 취해 하숙방으로 들어가다가 생면부지의 사내를 만난다. 사내는 다짜고짜 내 등덜미를 붙잡고 자기를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는 누군가에게 쫒기고 있다며 하숙방에 숨겨 달라고 부탁한다. 사내를 거절하지 못한 나는 사내를 하숙방으로 들인다. 하숙방에 들어온 사내가 하는 말이 놀랍다. 자기는 쫓기는 사람이 아니라 ‘미친 사람’이라고 사내는 주장한다. 나는 도통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 정말로 미친 사람은 자신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내가 스스로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걸 보면 그는 분명 미치지 않았다. 사내의 기행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사내는 궁상맞게 방구석에 처박히더니 좀처럼 잠을 자려고 하지 않는다. 술에 취한 나는 사내가 그러든 말든 먼저 잠이 들었는데, 때때로 잠이 깨어 보면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형광등 끈 것을 확인했는데도 말이다.
사내에 대한 궁금증이 인 나는 이튿날 아침, 근처 정신병원을 찾아간다. 사내의 기이한 행동이 그의 말처럼 미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에서 나는 간밤에 환자 하나가 병원을 탈출했음을 알게 된다. 사내는 그럼 정말로 정신병자였단 말인가. 간호원을 통해 나는 환자의 이름이 ‘박준일’인 것을 알게 된다. 박준일, 필명으로는 박준인 이 사내를 나는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간밤에 사내 얼굴이 낯익다는 느낌을 받은 까닭이 밝혀진 것이다. 2년 전만 해도 주목을 받던 젊은 소설가 박준은 왜 스스로를 정신병자로 말하는 상황에 빠졌을까? 이 소설은 주인공 박준이 진술공포증에 빠진 이유를 추리 기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진술공포증은 말 그대로 자기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을 가리킨다. 박준의 주치의인 김 박사는 박준이 진술을 거부한다며,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 미친 척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미친 사람이든, 미친 척하든 사람이든 박준은 똑바른 정신으로 세상과 대면하길 피하고 있다. 한때는 총망 받던 소설가였던 그는 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박준이 쓴 소설을 읽고, 정신과 의사인 김 박사와 대화를 나누며 서서히 박준의 정신을 망가뜨린 장소로 접근한다. 박준이 쓴 소설은 주로 괴이한 행동을 하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괴이한 인물과 박준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현실에서는 직접 말하기 힘든 것을 박준은 괴이한 인물로 허구화하여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준이 잡지사에 투고한 소설에는 괴상한 버릇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꾸중 들을 일이 생기면 곧잘 광 속 같은 데로 숨어 들어가 잠이 든 척했다. 그런데 그 꼴이 참 괴상했다. 그는 숫제 죽은 사람 시늉을 냈다. 그런 장난 때문에 그는 어른들에게 더 심한 꾸중을 듣기도 했지만, 그런 그의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버릇은 더욱 익숙해져 그가 대학생이 될 무렵에는 하나의 진지한 휴식술로까지 발전을 했다. 일종의 자기최면과도 같은 이 기술로 그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제 마음을 다스렸다. 결혼을 하고나서도 이 버릇은 이어졌다. 틈만 나면 가사(假死)의 잠에 빠져드는 남편을 어느 아내가 곱게 보겠는가. 아내는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은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분이 좋지 않아 가사의 잠에 빠진 그가 정말로 깨어나지 않는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기술에 흠뻑 빠질 만큼 그를 두렵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박준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은 그날, 박준이 다시 내가 사는 하숙집에 찾아온다. 나는 박준을 설득해(?) 병원으로 데려간다. 미쳤든, 미친 척을 하든 박준을 병원에 데려가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지 않은 일로 판명된다. 김 박사는 박준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이론으로 그를 치료하려고 한다. 김 박사의 이러한 치료 방식은 박준의 소설을 대하는 잡지사 문학 담당 안의 태도와 유사하다는 데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환자의 진술을 통해 비밀을 찾아내려는 것은 그 비밀에 대한 의사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아셔야죠. 이건 어디까지나 치료 행위거든요. 환자에게 자기진술을 계속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치료 행위란 말입니다. 환자의 비밀은 어차피 환자 자신의 입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난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구요.” 확신에 찬 얼굴로 단언하고 있었다. (191쪽)
“편집이라도 할 수 없죠. 저로서는 이 시대의 요구라는 것을 일단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사실을 말씀드리면 전 그 소설이 어떤 식으로 완성되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그런 것은 별로 관심을 두어보지 않았어요. 제겐 소재 해석만이 문제였죠. 작가가 어떤 소재를 만나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은 그 작가가 자기의 시대 양심에 얼마나 투철해 있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지어주는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박준의 소설은 바로 그런 점에서 저의 기대를 외면해버렸어요. 제가 박준의 소설이 충분히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은 그런 저의 관심 속에서지요.” (196~197쪽)
김 박사는 박준에게 진술을 강요하고 있고, 안은 박준이 진술한 내용을 시대 양심에 비추어 해석하고 있다. 진술을 하든, 진술을 하지 않든 박준은 어떤 기준에 맞추어 판단되는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김 박사에게 박준의 소설을 참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김 박사는 ‘치료 행위’라는 명목으로 환자의 입을 어떻게든 열려고 한다. 김 박사가 말하는 ‘치료 행위’는 안에게서는 ‘시대 양심’으로 변주된다. 안은 시대 양심이 살아 있는 문학을 선호한다. 시대 양심이 살아 있으면 좋은 문학이고, 시대 양심이 드러나지 않으면 나쁜 문학이다. 좋고 나쁜 것을 가르는 기준은 그가 생각하는 시대 양심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옳으니 박준의 소설은 당연히 그른 것이다. 김 박사는 왜 박준이 쓴 소설을 자기진술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안은 왜 박준이 쓴 소설에서 시대 양심으로는 비출 수 없는 어둠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R지에 연재되다가 돌연 중단된 박준의 <벌거벗은 사장님>을 먼저 살펴보자. 제목에 드러나는 대로 이 작품은 사장님이 벌이는 기행을 권력의 횡포와 연계시킨 작품이다. 주인공은 말단 직원들이 타는 통근차를 끄는 운송부 소속 직원이다. 그는 느닷없이 사장 차를 운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주인공은 달갑지 않다. 사장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한 달이 지나면 이유도 모른 채 회사를 그만두기 때문이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사장 차를 몰게 된다. 어느 날 사장이 깊은 산골짜기로 차를 몰게 하며 주인공에게 오늘 밤 일은 다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장은 미리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산골짜기에는 호화롭게 치장된 비밀의 집이 있었다. 사장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그곳에 모여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보고 싶은 온갖 쾌락을 하룻밤 사이에 모두 즐겼다.
그 집은 그러니까 사장으로 상징되는 권력자들의 온갖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사장이 한 달마다 운전수를 갈아치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셈이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주인공은 어떻게든 비밀을 지키려고 한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회사에서 내쫓기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진실을 알고 있는 주인공의 독특한 위치에서 뻗어 나왔다. 다른 직원들이 모르는 진실을 혼자서만 아는 처지가 그는 답답해 견딜 수 없다. 그렇다고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다. 그는 자연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거리를 둘 뿐만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 언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는 이미 자신이 내쫓길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럴수록 그는 아무도 믿지 못한다. 심지어 마누라에게까지 의심을 눈초리를 보낸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장 차를 몰 수 있을까. 주의력 결핍 때문에 그는 운전수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회사에서 쫓겨난다.
이 소설에서도 진술과 관련된 문제가 나온다. 주인공은 진실을 안다. 하지만 그 진실을 발설하면 주인공은 회사에서 쫓겨난다. 회사에서 쫓겨나도 상관없다면 주인공은 거리낌 없이 진실을 밝힐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두면 집안은 엉망이 된다. 주인공이 만약 김 박사를 만난다면 이 비밀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비밀을 밝힌다는 건 제 목숨을 내놓는 일과 같다. 목숨을 걸고 마음 편히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김 박사는 바로 박준의 이런 미묘한 지점을 놓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박준 또한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진술을 강요하는 것은 곧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살기 위해 정신병원을 스스로 찾아간 박준은 그래서 살기 위해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안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개인 문제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회사 동료들과 연대를 해서 사장과 맞서는 상황을 안은 시대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박준에게 요구하지 않았을까.
박준의 비밀은 다소 어이없게 밝혀진다. 화장실 못에 걸린 신문지 조각에서 나는 박준을 인터뷰한 기사를 발견한다. 그 기사에는 박준을 진술공포증에 빠트린 정확한 이유가 나와 있다.
어렸을 때 겪은 일이지만 난 아주 기분 나쁜 기억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6.25가 터지고 나서 우리 고향에는 한동안 우리 경찰대와 지방 공비가 뒤죽박죽으로 마을을 찾아드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경찰인지 공비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또 마을을 찾아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우리 집까지 찾아들어와 어머니하고 내가 잠들고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어머니더러 당신은 누구의 편이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 사람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지독한 복수를 당할 것이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상대방이 어느 쪽인지 정체를 모른 채 대답을 해야 할 사정이었다. 어머니의 입장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버린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219쪽)
박준은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말하고 있다. 전짓불 뒤에 숨은 사람은 전짓불 앞에 환하게 드러난 사람들을 향해 누구의 편인지를 묻는다. 둘 중 하나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나뉜다. 실제로 박준은 선택을 잘못해 살육을 당한 마을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진술을 강요당하는 어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두 목숨이 어머니 입에 달려 있다. 전짓불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는 박준이 여동생에게 남긴 중편소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소설에서 박준은 앞서와 비슷한 상황을 제시한다. 전짓불을 비추는 대상만 다를 뿐이다. 어느 경우에는 순경이고, 어느 경우에는 공비이다. 순경이든, 공비든 박준에게는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선택을 잘하면 살아남고, 선택을 잘못하면 죽는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 G가 신문관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말로 고백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청년운동단체의 간부직원인 G는 어느 날 불온스런 음모의 피의자가 되어 어딘가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신문관은 사건과 관련된 일은 묻지 않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진술하라고 요구한다. G는 신문관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이곳에 끌려온 이유도 알 수 없다. 자신이 지금 하는 말이 어떤 식으로 처리될지 알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진술을 해야 한다. 진술을 해야 무죄든, 유죄든 결론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G의 말은 전짓불에서 전짓불로 이어진다. 공비들이 경찰 흉내를 내며 마을로 들어온다. 공비를 경찰로 착각한 사람들이 경찰을 옹호하자 공비들은 가차 없이 사람들을 죽였다. 이번에는 정말로 경찰이 마을로 돌아온다. 경찰을 공비로 오인한 사람들이 공비를 옹호하자 경찰들이 그 사람들을 또 죽였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어느 날 밤 G의 집에 또 다시 경찰인지, 공비인지 모를 사람들이 와 방안으로 전짓불을 비춘다. 전짓불 뒤에 숨은 목소리가 이 집에는 왜 남자들은 없고 여자와 아이만 있느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원래 남자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남자들이 누구를 따라갔느냐는 말이 전짓불 뒤에서 들려온다. 어머니는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전짓불이 어머니에게 진술을 강요한다. 어머니는 결국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을 하기 시작한다. 애원을 해도 전짓불은 요지부동이다. 남편은 누구를 따라갔으며, 아주머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다. 그래도 말을 하지 않자 전짓불 뒤에서 ‘반동’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공비다. 늦게나마 정체를 알아낸 어머니가 그쪽으로 애원을 해서 주인공은 간신히 화를 면한다. 그날 밤 전짓불의 강요에 못 이겨 선택을 했다가 누군가의 손에 살해를 당한 마을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철저히 전짓불과 연관시켜 말을 한다. 어느 날 드디어 신문관이 G의 진술을 중단시킨다. 그리고 심판이 내려진다. 신문관이 원하는 정직한 진술에 실패한 G는 말할 것도 없이 유죄를 선고받는다. 유죄를 선고한 첫 번째 근거만 그들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첫째로 당신은 우리에게 체포당해 있다는 사실, 그것을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당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를 우리에게 당신에 체포당했다는 사실―지금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출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체포하게 된 경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도 그것을 잘 모르고 있지만 우리 역시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당신이 우리에게 체포되었다는 사실, 우리들 쪽으로 보면 그것이 곧 당신의 최초의 혐의점이며 그것으로 우리에겐 당신을 신문할 권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최초의 혐의 사실과 그리고 우리들이 당신을 신문할 권리를 쉬 인정하려 하지 않았어요. 물론 당신은 그것을 말한 일이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심중에선 그것이 더욱 용납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훌륭한 유죄 심증의 이유가 되었지요. (235~236쪽)
혐의가 있어서 체포한 게 아니라 체포를 당했기 때문에 혐의가 있다는 논리다. G는 어이가 없다. 당연히 자신이 받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자기를 신문할 권리 또한 쉬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G가 유죄라는 근거가 되는가? 그들이 내세우는 두 번째 근거와 이와 마찬가지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신이 줄곧 우리의 정체에 대해 불요부당한 의문을 품고 있었던 점입니다.”(236쪽)라고 신문관은 말한다. 신문을 받는 사람은 신문을 하는 사람에게 의문을 품지 않아야 하는 논리(?)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신문을 하는 사람은 권력을 쥐고 있다. 폭력을 동반한 권력이다. 신문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잡혀왔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권력 앞에 적나라한 상태로 놓인다. 벗어날 곳은 없다. 권력이 유죄라고 하면 유죄이고, 무죄라고 하면 무죄이다. 신문을 당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자유를 억압당한다. 하긴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혐의도 없이 G를 잡아갈 리 없다. 신문관 앞에서 펼쳐지는 G의 진술은 이리 보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자의 비극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G는 그래도 끝까지 논리에 기댄다. 음모의 심증만으로 형벌이 선고될 수는 없다는 G의 말에 신문관은 이미 형벌은 집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법정에서 선고되지 않은 형벌이 이미 집행되고 있다고? 신문관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당신의 전짓불과 나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이미 스스로 선택한 당신의 수형의 고통이지요. 그리고 당신은 그렇듯 스스로 선택한 수형의 고통 속에 이미 반쯤 미친 사람이 되었거나 앞으로도 계속 미쳐갈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심판에 앞서 자신의 형벌을 그렇게 스스로 선고받고 있는 것입니다……”(238쪽)
무서운 논리다. 신문관 앞에 끌려간 것 자체로 G는 마음속에 공포를 내면화한다. 그래서 어떤 일을 벌일 때마다 G는 그때 일을 생각하며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할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선택한 것 같은 수형의 고통. 이 고통 속에서 G는 서서히 미쳐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신문관은 장담한다. 박준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박준이 일부러 미친 척한 이유가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미친 사람의 가면을 둘러쓰고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나는 자기진술을 강요하는 김 박사의 치료 행위가 박준에게는 전혀 맞지 않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고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김 박사는 박준의 진술을 얻어내기 위해 그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몬다. 병실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 후 전짓불을 켜 들고 들어가 그의 얼굴을 내리비친 것이다.
박준에게 전짓불은 편안한 어둠을 난도질하는 살해 도구이다. 김 박사는 박준이라는 사람은 보지 않고, 정신 치료라는 이론만 중시한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이론을 들이댄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박준은 자신과 상관없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 두려운 자극을 “두꺼운 소문의 벽”(250쪽)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소문을 낸 사람은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소문은 언제나 다른 소문을 부르고, 다른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부른다. 말이 말을 낳는 형국이라고 할까. 박준은 이러한 소문의 벽이 자신의 소설쓰기도 간섭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잡지사 문학담당인 안과 같이 소문은 시대 양심이라는 개념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시대 양심을 드러내는 문학이라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것이 문학의 기준이 되어버릴 때 박준이 쓰는 소설은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게 정작 문제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퍼뜨리는 ‘소문’은 전짓불 뒤에 숨어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 목소리와 빼닮았다. 불빛에 환히 드러난 사람들은 왜 자신이 누구 편인지를 밝혀야 하는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평온한 어둠을 휘젓는 전짓불은 결국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사람들을 빠뜨리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미친 척했던 박준을 정말로 미친 사람으로 만드는 괴물의 가공한 능력을 보라. 그리고 그 괴물 주변에서는 괴물의 비논리를 논리로 가다듬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김 박사가 그렇고, 안이 그렇다. 거대한 괴물은 수없이 많은 작은 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은 괴물 편과 괴물 반대편을 가른다. 괴물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운전사’의 비극적 신세와 다르지 않다. 살아남으려면 비밀을 지켜야 한다. 박준은 그 비밀을 지키지 못했기에 결국은 권력이 만든 사회로부터 추방당하고 만다. 그는 과연 어딘가에 살아있기나 한 것일까
|
|
[도서] 소문의 벽 이청준 저 문학과지성사 | 2011년 08월 18일 개인적인 공부를 하다가 문학 파트에 이 책의 일부가 실렸는데 뒷 내용이 궁금해서 구매하게 되었다. 책의 내지 편집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한 것도 후회되지 않는다. 거의 외국문학만 읽다가 현대문학을 읽어서 깔끔한 문장에 즐거웠다. 개인적으로 내가 아직 문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글이 깔끔하고 서사가 흥미로웠다. |
|
이청준 작가의 작품은 수능 문학에서도 자주 출제되는 것들이 많았기에 찾아보게 되었다. 물론 다른 작가들의 저서들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소설 하나하나 작가 특유의 문체가 느껴지기보다는 그 글 자체, 내용에 몰두할 수 있다는 밋밋함이 좋았던 기억이다. 내용상으로는 주인공 '박준'은 소설가이다. 그는 억압된 상황과 작가의 사명 의식 사이에서 절망하고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병리 현상을 겪는다. 서술자 '나'의 추적 결과, 한국 전쟁 당시의 '전짓불의 충격'이 박준의 공포증의 원인임이 밝혀진다는 내용이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점들이 인상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