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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책을 다 읽은 후 이 책이 왓츠업 총서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what’s up이라는 인사말이 미국흑인 노예제도의 폭력성을 비극적으로 증언하는 말이었다는 왓츠업 총서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어원에 이야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의 발행사를 읽을 때마다 아마도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노예 사이에서의 말 그대로 밤사이 안녕했냐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 맥락에서 유지되어 오던 지금 흑인들의 언어가 에보닉스로 미국표준언어와 구별 지으려는 움직임을 뚫고 ‘왓츠 업’처럼 주류 문화에서도 쓰이는 말이 되는 경우가 있다. 식민지기에 인간 아닌 조선어 사용(자)에 대한 고찰과 현재 우리의 언어사용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식민지기의 문학과 문학가의 친일이라는 이름 지워진 전향문학이 있었다. 방민호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대일협력이었을 그들의 문학은 친일이라는 이름 외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일까. 식민지기의 문학에 대한 논쟁은 늘 뜨거운 감자이다. 그런데 황호덕 교수의 ‘벌레와 제국’은 조금 더 나아간다. 식민지기의 제국주의적 정책, 특히 언어 말살을 기조로 한 식민/자국화를 현대철학이론을 중심으로 살피고 황국시민/벌레로 나뉘게 한 언어사용, 그리고 문학을 살펴봄으로써 언어를 중심으로 한 저항과 전향의 모멘텀을 볼 수 있었던 연구는 그저 문학비평으로만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남겨진 문학들을 재조명하거나 현대의 문학비평에 대한 앞으로의 많은 연구에도 영감을 줄 터이다. 식민지기의 강렬한 근대문학으로서의 재조명이 그들의 전향성을 파악하는 과정과 더불어 또한 다양해지길 바란다. 식민지기의 조선 문학, 당시가 묘사된 일본문학, 각종 문헌자료가 사례로 등장하면서 저자의 이야기는 새로운 문학비평작업의 일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새로움이란 작품의 일관된 언어습관을 분석함으로써 작가의 의도 혹은 작가의 성향을 읽는 재해석작업과 언어와 신체의 한계에 대한 해석을 해내고 전향 문학가의 작품 내에서 전향성과 문학가의 윤리성을 읽어내며 문학내의 전향자 그 반대방향의 저항적 언어사용의 가능성까지를 읽을 수 있는 ‘다른 시점’을 의미한다. 친일/민족주의로 구분되던 당시의 문학/문학가에 대한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는 저자의 시도가 반갑다. 이는 방민호 교수의 일제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와도 함께 재해석과 끊임없는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게도 할 것이다. 역사란 새로운 자료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문학의 의미는 고등학교 시험문제의 답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사의 유동성에 다름 아닌 문학과 언어 표현 구조의 의미 또한 달리 접근하고 다양하게 읽어낼 시점을 제시하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이 흥미로움이 끝까지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의 일본의 남다른 식민관, 식민지를 식민지로 칭하지 않고 ‘일본’의 ‘확장’ 혹은 영토의 ‘내부’로 전제하려는 매보다 무서운 폭력으로 인해 이 책의 제목이 실감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아니라면 법외권 존재(동물)이 되며, 이에 합법적으로 저항하려면 저자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일단 일본국민으로서 일본 헌법에 의지하며, 국어(일본어)를 사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싸워야 한다. 이는 저항이 아니라 자신을 일본인으로 순응하는 전제나 다름없기 때문에 저항의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이제 시민으로서 생명을 선물 받았으니 죽음을 증여함으로써 일본인-인간이 될 차례인가. 기꺼이 천황의 가미가제가 되어서 당시의 정치적 신화는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이었을 뿐 아니라 키에르케고르의 ‘성서’의 아브라함의 종교적 호명과로 다르지 않은 모습을 가진다. 창씨개명을 통해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호명할 수 밖에 없었던 식민지기에 종교의 매커니즘에 비할 수 있는 식민/자국 정책은 일본 내지이기도 한 식민지 뿐 아니라 현재 일본의 근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신화는 어떠한가. 생명의 선물과는 다른 형태인 각종 정치경제적 신화는 홉스의 자연법에 의해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라는 개념에 회의를 느끼게 한다. 저자는 이렇게 십수년에 불과한 식민지기의 문학과 현대철학의 접점들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읽을 방법을 제시하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벌레와 제국’의 벌레는 영제로는 animal이었는데 이 표현의 의미는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감옥-식민지 안의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서의 입=항문이라는 동물성만을 요구당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서의 벌거벗은 삶, 그 자체이며 언어와 무한성을 가지는 신, 언어와 생명의 유한성을 가진 인간과 비교되는, 유한하면서 언어를 갖지 못한 하이데거의 동물개념과도 다를 바 아니며 동시에 김사량의 일본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벌레’이다. 배급을 받기 위해 고쿠고로 말해야 하는 입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압착시키는 정치성을 가지고 있다. 식민의 사회계약 하에서 당시 문학 안의 감옥에 갇힌 캐릭터들은 두 언어를 왕복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이고 이 ‘무명’에서 말하면서 싸는 입=항문의 존재들은 감옥 내에서의 공포의 일본어의 부름에 답하면서 일본인/일본어 사용자/인간으로 교도된다. 여기에서의 이중언어는 이중간첩의 ‘이중’의 의미에 가깝게 해석할 수 있으나 우리가 여기에서 쉽게 떠올리는 엘리트/상류층에서보다는 하위층이 다언어에 더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식민지 감옥이 그러한 언어의 생명정치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로 언급하고 있으며 당시의 소설 일부들이(이광수의 ‘무명’ 포함)그곳에서 사용되는 폭력적인 일본어를 음차한 한글로 식민지적 이중언어 상황을 표시하고 이 ‘언어상황’을 폭력적으로 단일화하는 힘을 재현한다고 말하고 있다. 폭력성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재일조선인문학의 표지인 ‘아이고’와 같이 감옥에서도 감탄사로서 다른 어떤 언어로도 번역되지 않는 비명, 내지름, 토해냄이 ‘말하는 입의 유일한 흔적’/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점이 된다. 언어라는 로고스에서 벗어나 아닌 발화/비명는 의미와의 결합을 분리하는 의미에서 해체적이고 언어의 정치학을 거부하여 非언어인 모어 그 자체의 순수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말과 글로서 非人을 극복하고 저항하는 바로 그 지점 또한 읽어낼 수 있을 터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비유기적 신체를 구사하는 방법이 되고 있는 문학의 지점으로 채만식의 ‘신체적 임의로움’에 대해 주목한다.(안목있는(?)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었던...) ‘다른 길’을 산책하는 주인공이 조선인 거주구역(주어진 신체/비유기적 신체의 한계지점)의 경계를 뛰어넘어 모리나가까지 훌쩍 이동하여 조선어사용지와 일본어사용지의 경계를 신체를 이용한 공간(이데올로기)의 장소화와 그 확장을 엿본 것이다. 조금은 확대해석이 아닌지에 대해 고려하기 이전에 우리가 식민지기의 문학을 이렇게 깊게 미학적이거나 다양한 철학적 기준으로 들여다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제국의 신화가 매커니즘적 국가와 행정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저항의 싹을 제거해버린다. 시민으로서 합류하는 순간 일본인/인간이 되면서 매커니즘의 자동기계가 탄생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호모 사케르인 조선인/조선어 사용인은 지금 우리나라의 제국주의적 모습과 영어를 제외한 (제3세계 노동자를 비롯한 모어사용자를 비롯하여)타언어사용자에 다를 바 아니다. 한용운의 시에 가득한 토해지는 언어/모어는 드러냄으로서 인간임을 증명하는 힘을 가진다. 모어는 문화이면서 자신을 타자화 키지 않는 말하기이자 타인 또한 타자화/호모 사케르화를 막는다. 저자의 언급대로 우리의 영어신봉은 저자의 언어정치학에서 비켜져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저자의 말대로 늘 고통의 소리는 우리말로 소리 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 특정언어의 권력은 또 다른 언어 사용자를 호모 사케르로 전락시킴으로서 폭력이 되며 스스로의 말과 언어를 박탈함으로서 제국주의의 식민호명에 다를 바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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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만을 접했을 때, 약간 자연과학적인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시에 스친 생각이 벌레와 제국이라 잘 어울리지 않는 제목인것 같았다. 내 추측이 잘못 된 것이었다. 물론 과학적인 글은 맞지만, “미발표 신작들이 포함된 연작소설에 가까운 것”이었고, 전공논문 모음집 성격이 강한 글이었다. 상당히 어려운 책이 아닐까? 아니 우리의 글과 문학을 말하는데 아주 낮 쓴 느낌이 난다. 우리의 관심이 적은 부분이라서 그런 것 아닐까? 우리의 문학, 그것도 아픈 기억의 문학은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상황이 아닐까. 식민지, 우리에게 어떻게 보면 치욕적인 역사 하지만, 식민지라는 상황은 어쩌면 근대(근대성)의 보편적인 역사 경험이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는 식민지 조선과 그 문학을 언어, 생명정치, 테크놀리지를 통해 파악한다. 국민문학 “공적 담화와 사적 담화 사이에 위치한 문학이 국가라는 공공성에 의해 봉합됨으로써 내면을 없애버리는 운동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 이고, “인간은 신과 관계 맺기 위해 신화(와 종교)를 필요로 하며, 동물과 구별하기 위해 언어를 필요로 하며, 신과 동물의 대지에 뿌리내리기 위해 몸을 통한 경작과 기예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언어는 더 이상 동물과 인간을 갈라 놓는 구분이 아니다. “국가 가체가 하나의 기계적 조정의 메커니즘이 된 것이야말로 근대 국가의 본질적 변화이다.” 점령과 식민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는 규정하는 것은 한국은 무력에 의한 불법적 점령, 북한은 교전상태로 규정로 규정하고 있기에, 식민지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도 보편주의 주장, 불법으로 취득된 지역임을 강조하고, 전쟁과 평화 사이의 과도기적 상태로 보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조선의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먼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적 조선의 절대파악을 위해 신화가 답이었다. 또 사회주의는 신화론과 경합하게 될 또 다른 신화의 일종이었다. 한 집단의 신념체계와 신화의 세기, 이를 통해 서양=문명, 중국=천하 의 통념을 극복하고, 조선을 부계문화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신화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이성의 결과인 근대의 제도들을 거꾸로 거대한 신화로서 변질된다. 언어와 삶에서 돌아온 과거. 내선일체와 현실주의적 대응, 적과 동지의 명확한 결정과 협력문제, 조선어와 국어로 명확한 구분이 필요했다. 한편으로는 철저히 차별을 해소한다는 조선어 해소론과 또 다른 쪽에서는 조선어 방언론, 방언이란 한 사회 전체의 관계성 속에 존재하는 한 거의 번역불가능한 언어이다. 조선어학회사건과 창씨개명, 악덕통치와 민족말살기도, 조선어학회사건은 민족해방과 민족국가건설의 탄압이었다. 이중언어사용자의 상황 그리고 일경과 검열, 죽은 편지는 유령처럼 떠도는 글들이다. 제국의 의지로 우편의 장악과 해석의 교권확보를 통해 실현하였다. 그러나 제국의 헌법은 비밀을 침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조선어는 비밀을 만드는 언어로서 사라져야 할 것이었다. 내선일체에 따른 일본어교육으로 인해, 단일언어주의에서 이중언어 상황으로 변한다. 일본은 서구에 대항하여 동아시아를 근대화한다는 명목으로 더욱 탄압한다. 그 당시의 조선인의 인간됨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어를 쓰게 된 아이러니. 국가의 지식은 전향의 모멘트를 통과해 근대의 초극이라는 명제에 근접하고 있었다. 기술의 지배와 협력, 문명개화에 반대하는 양이의 사상, 일본의 조망 하지만, 폭력과 제 산업을 천왕 대권 아래 복속시키려는 기본 전제에서 실행된 정책들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개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다. 역사와 기억 사이의 식민지, 역사의 공적 기록과 개인의 사적인 사건들의 기억의 갭이 발생한다. 또 일제 관료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공정성을 강조하고, 사실과 책임을 회피한다. 역사는 사실과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당시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 “눈물만이 마음을 표현해내는 길이었다.” 시민이 된 후 동물이 된다. 이방인, 이교도가 되고 동물이 된다. 증기기관으로서의 근대, 근대정신이란 근대양식과 제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식민지란 근대국가의 예외이면서 예이고, 따라서 하나의 한계개념이다. 국민국가라는 기계에 의해 생겨난 동물들, 인륜의 국가가 해체되고 매커니즘으로서 국가가 전면화되는 시점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식민지에서 준제국으로 부상한 우리.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인간의 비명을 듣는 일은 식민지와 근대를 통해 배운 유일한 앎이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분출되는 목소리 혹은 비명을 듣는 일이야말로, 오늘과 같은 극단의 예외의 시대에 어울리는 앎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시대와 식민지시대의 상황과 텍스트를 분석한 심도 깊은 글인 것 같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는 좀 무거운 주제와 내용인 것 같다. 그리고 쉽지 않은 내용으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나 전공자들에게 더 적합한 것 같다. 물론 일반 독자들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보면 이해 할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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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 7/8/9 마지막 도서는 문체, 분량, 기한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최고의 난이도를 보여주었다(리벼c님 책 늦게 도착하면 마감기한 연장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잊으신 듯...). 이 책은 현대철학자들의 논의에 기반하여 근대문학과 언어에 대해 연구한 논문들을 묶은 책인 것 같아보인다. 어떤 책의 서론을 읽을 때 이 독서는 어떻겠구나 감이 오는데, 이 책을 펴자마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쾌하게 잡히지 않는 학술적인 문체에 숨이 막혀왔다. 생소한 인명과 단어, 한자어나 외국어, 대량의 주석도 그렇지만 학문 공동체에서 당연히 알 것으로 전제한 내용을 쏟아내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논문이나 학술서적을 읽다보면 가끔 학문이나 학술적 글쓰기에도 세대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다.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 논문의 문체는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윤구병 선생님께서 지식인은 제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하셨던 말씀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났다. 이 책에서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 내용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도 전에 독자가 독서를 포기하게 될 위험성을 보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전달불가능성'을 의외의 곳에서 만난 셈이다. 은연 중에 독자를 소외시키는 학자, 비평가의 언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저자가 연구자로서 갖는 전문성은 탁월해보이니 꾹 참고 읽으면 개개인이 얻을 수 있는 면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탓인지, 근대에 대해서는 미시사를 다룬 책만 읽어서 그런지 일본 제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입장 자체가 잘 잡히지 않았다. 서론에서 '일제 강점'과 '식민'이 다르며 한국도 일본도 예나 지금이나 '식민'이라는 단어 사용하기를 꺼리고 강점(한국), 내지/외지를 구분(일본)하는 식으로 그 단어를 피해갔다고 저자는 말한다. 김구는 일본에 속하기 싫어했고 최재서는 일본에 속하고 싶어했다. 그들의 입장 차이는 일제의 통치를 '강점'으로 받아들인 입장과 '식민'으로 받아들인 입장을 대표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논의를 극단으로 몰아가 '식민'의 입장에서 조선인들이 처했던 현실을 논의하겠다고 밝힌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책 내내 저자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서 사실을 기술하는 듯이 '식민'을 기반으로 그 시대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저자의 가치판단은 무엇인가? 내용 이해의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문장을 또렷이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독서 과정 중 내내 이 질문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이 책을 통해 '일제는 강점이 아니라 식민을 기반으로 통치를 했다, 친일로 전향한 지식인들은 식민을 옹호했던 것이다'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는 저자의 행위 속에 특정한 방향성을 가진 가치판단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우리 시대에 '식민사관'에 대해 팽배해 있는 가치판단처럼 이 책도 불온한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좀 더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참신한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서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저자의 글들이 전체적으로 불온한 논조를 띠고 있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왜냐하면 위의 모든 의구심과 궁금증이 에필로그에서 싹 풀렸기 때문이다. 일제 통치에 대한 그의 입장이 잡히지 않았던 것은, 그가 식민주의에 대해 계보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하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제 치하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겪었을 내면적인 갈등에 대해 좀 더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당대 '지식인'들이라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견문도 넓혔으니 바보는 아니었을텐데, 일제가 '내선일체'나 '대동아공영' 허황된 주장을 퍼뜨릴 때 왜 협력했을까 항상 궁금했다. 정말 지킬지 안 지킬지 확신할 수 없는 일제의 그 공허한 약속을 어떤 이는 마음 깊이 믿었을지도 모르고, 어떤 이는 현실적으로 취할 것만 취하자는 실용주의적인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저자가 제시한,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이 아시아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일제의 논리가 생각보다 탄탄하고 치밀해서 식자일 수록 납득할 만한 것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 같은 그 암울한 시대에 반은 일제의 협박에 의해, 반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제의 논리를 내면화하며 전향한 지식인도 꽤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먼 훗날인 지금 친일파로 분류되는 그들을 쉽게 비판해버리기 전에,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어떤 입장에 섰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물론 친일로 전향한 이후 그들이 누렸을 혜택에 대해서는 분명 책임 추궁을 당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근대문학 연구자로서, 당대 언어와 문학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즉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 같아보인다. 개인적인 관심사인 '숭고(말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감각불가능한, 전달불가능한)'가 떠오르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많은 사라진 자들, 빼앗긴 목소리들이 있었으리라. 지배자archons란 기록관archeion을 의미하고, 지배는 당연히도 스스로의 논리에 합당하지 않은 기록들을 재ash로 돌린다. 그 재의 더미- 입 밖으로 내어지지 못한 말들의 영원한 침묵. 들을 수 없지만 들어야만 하는 이것. 이제 더는 말할 수 없는 타자들- 불태워진 목소리들을 상상하는 윤리 속에서 어쨌든 우리는 '쓰인 것'을 해명하는 '과학'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나의 해명, 나의 결론은 여전히 애매하고, 그런 한에서 결론이 될 수 없는데, 어떤가 하면 적어도 지금의 나의 '사적' 아카이브에는 '다른' 말이 많지 못하다. 그것이 어렵다. p.227"
(아리스토텔레스-)하이데거(-현대 철학자들)의 신-인간-동물-기계를 가르는 '유한성'과 '언어'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저자가 논문들을 재배치하는 기본 토대가 된 것 같다. 차례를 보면 무한하고 언어가 있는 '신', 유한하고 언어가 있는 '인간', 유한하고 언어가 없는 '동물', 그리고 언어와 유한성을 넘어서는 '기계' 도식에 따라 본문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의도가 정말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읽었다.
"1장: 신화와 정치, 믿음과 약속의 체계들", 여기에서는 천황을 상징으로 신격화된 국가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북계 신화를 재발견하려고 했던 노력을 다룬다. 천황은 대대적인 의식을 통해 신민에게 인간 혹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증여한다. 이러한 상황은 투쟁을 통해 인권을 쟁취한 유럽과는 다르다. 그러나 세상에 선물은 없다는 데리다의 말처럼 신격화된 국가는 권리를 선물하고 목숨을 요구한다. 저자는 책 내내 일본의 겉과 속의 차이를 계속 드러낸다. 겉으로는 내지인과 외지인을 동등하게 대할 것을 약속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내지의 외연을 계속 넓혀나가면서 외지를 먹어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특히 저자는 그 시대에 언어를 통해 나타나던 차이와 차별에 집중하고 있다. 신격화된 국가가 목숨을 요구하는 것은 조선인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과연 그 탐탁지 않은 '권리'라는 것이 온전한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2장: 언어와 삶- 상황과 제도들"에서는 고쿠고(일제 시대의 국어가 된 일본어)와 조선어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근대의 민족 담론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언어일 것이다. 민족어는 민족 정신을 환기시켜 독립운동을 부추길 것이라는 일제의 두려움과, 언어가 통일되어야 군인들을 비롯한 조선인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으리라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내지의 외연을 대륙으로 넓히는 과정에서 조선어 없애기는 곧 조선 없애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일본어를 발음할 수 없는 조선인은 항상 차별 받는 타자, 소수자가 되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식별하는 방법으로 발음하기 어려운 일본어를 말해보게 했던 사례는 유명하다. 당대 지식인들은 조선어 사용에 대한 논리를 만들어내었다. 그 중 하나는 '조선어 해소론'이었다. 일제의 논리가 납득되어서이든,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든 그들은 조선어가 아닌 고쿠고를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고쿠고를 전용하는 것이 내선일체를 완성하는 길이고, 차별 받지 않으면서도 내지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에 의해 조선인은 어떤 목적을 위해 모국어를 버릴 것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영어 몰입 교육'의 논리가 생각났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도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어서인지 다음 장에서 그에 대해 언급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은 미국 제국주의의 치하에 있는 것일까. 조금 길지만 기억해두고 싶은 부분이라 옮겨본다. "영어로 말하기. 예외적 순간이 모든 상례적 삶을 조직하고, 예외 속의 능력이 인간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 가는 오늘날, 다시 김사량을 읽는다. 영어강박에 강력하게 붙들린 한국의 오늘을 언어정치학의 관점에서 문제제기하며 '언어'와 '인간'을 질문할 때 우리가 처음으로 떠올리는 순간이 식민지 혹은 식민지의 일본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외재적 힘에 의해 강요된 일본어와 '자발적 선택'의 형식을 취한 영어 몰입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어를 선택한다거나, 언어를 특정한 '목적'과 관계시키는 움직임은 언제나 강한 비윤리성을 포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일본어든 영어든, 그에 대한 선택은 선택이 불가능한 자들에 대한 배제와 '포기'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일언어주의는 인간의 오랜 이상이었고, 또 구체적인 삶에서 종종 부딪히는 '실용적 필요'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용'의 근거를 묻는 일이다. 인간은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산다. 그 행복은 언제나 일종의 '느낌'이고 지금 이순간과 관련되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래를 위해 지금을 양보하라는 주장은 언제나 틀렸다는 사실이다. 장혁주나 김사량 같은 조선 문인들의 일본어, 강용흘의 영문학, 재일조선인 문학이 표시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며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조건 속의 몸부림과 분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례를 참고하며 하이데거는 인간과 동물과 신의 존재론적 차이를 유한성mortality과 언어language라는 표지를 통해 구별했다. 인간은 유한하나 언어를 소유하고 있다. 신은 언어를 가지지만 무한하다. 동물은 유한한 존재이나 언어를 소유하지 않는다. 여기서 언어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나 근원이다. 유한한 인간에게서 그들의 언어를 빼앗고, 새로운 언어 속에서만 인간의 지위를 부여하려 할 때 허다한 인간은 인간도 동물도 아닌 어떤 것, 즉 벌거벗은 삶의 영역으로 추방되고 만다. 인간은 언어를 가진 '생명체'이다. 이때의 언어란 형이상학적인 말logos을 뜻하지만 이 '말'은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phone/voice'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언어란 결코 선택이나 실용적 도구가 될 수 없다. 유한한 존재에게 100년 후의 행복이나 자식 세대의 행복을 말하며 현재를 포기하라고 할 수 있을까. 80세 남짓한 삶의 몇몇 예외적 순간을 위해 전 인생을 저당 잡힌 인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무한한 존재가 아니다. 타자의 언어를 익히는 일 자체는 언제나 윤리적인 요청이자 매우 정당한 주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익을 위해 타자의 언어, 특히 힘 있는 언어를 익히려 할 때 그것은 일종의 폭력에의 동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일본어나 영어에 대한 욕망이 어떤 타자들을 배제하는지, 어떤 인간들을 비인간으로 만들게 될지를 생각해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김사량의 글을 포함해 식민지말의 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바로 지금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언어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남의 말을 배우되, 나의 삶과 남의 삶 모두에 호혜적인 방식으로 배워야 한다. 영어를 배우되, 잘 배우고 즐겁게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한편 또 다른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전히 우리가 들어야 할 고통의 목소리가 한국어 사이에서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과 행복했던 순간들이 이 한국어 목소리를 통해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작위와 폭력을 동반한 채 언어를 배우는 일이 결코 윤리적으로 정당할 리 없다. pp.423-425" 또한 일제의 검열 제도에 의해 쓰여진 모든 글은 마치 '엽서'처럼 되어, 조선인 모두는 우편불안에 빠진다. 가장 내면적이고 비밀스러운 내용을 담는 일기와 편지에서조차 잠재적인 수신자는 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 언어를 빼앗긴 조선인은 비인(非人), 벌레가 된다.
이러한 논의를 이어가서 "3장: 생명정치, 말하는 동물의 비명들"에서는 언어를 빼앗기고 동물화된 조선인의 모습을 그린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특히 언어를 다루는 작가들은 곤란에 빠졌다. 일본어로 글을 썼느냐의 여부만으로 그들의 입장을 따지기에는 조금 복잡한 측면이 있다. 근래 재조명되고 있다는 김사량의 입장이 바로 그렇다. 저자는 그가 조선과 조선어를 사랑했기 때문에 일본어로 글을 썼다고 주장한다. 일제를 비판하기 위해 내지인을 대상으로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한 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내지에 대한) 지방문학으로서 아쿠타가와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단다. 아무튼 번역, 일본어 소설에 파편적으로 조선어를 넣기, 한글로 조선인이 발음하는 일본어 표기하기와 같은 김사량의 작업들은 고쿠고와 조선어의 경계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를 빼앗겨 동물화된 조선인들의 비명을 담은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일본어나 영어로 쓴 소설에서 '아이고'를 각각 가타가나,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것은, 내지인이나 외국인들에게 조선인이 조선어로 고통에 대한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언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입이라는 인간의 신체 기관은 '말하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기관이지만, 언어를 빼앗긴 조선인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 압착되어 버리고 동물화 되었다.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은 이중언어 구사 환경에 놓였을 뿐 아니라 이중적인 공간에 살았다. 근대 미시사를 다룬 책을 읽을 때에는 '모던 보이가 산책을 좋아했구나'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넘기곤 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들의 산책에 담긴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일본 문화를 모던한 것이라며 동경하고 향유하고자 했던 지식인들은 외지 안의 내지를 산책, 구경한 후 조선이라는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감각적으로 생경한 공간이었고 후자는 감각적으로 친밀한 장소였다(이 부분에서 저자는 중립적인 경성에 대해서는 공간space이라는 단어를, 경성을 신체 정치적으로 논의할 때는 장소topos라는 단어를 사용하겠다고 한다). 저자는 채만식이 그의 단편 '종로의 주민'에서, 주인공이 경성 속 일본인 명동을 산책하는 장면은 묘사하지 않고 건너뛰고 그 경계에서 종로로 나온 후는 모든 지명을 조선어로 기록하면서 세밀하게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내지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일본인을 경성으로 '이식'했기에, 신체적 장소를 빼앗기고 조선인이 겪었던 고통을 채만식이 의도적으로 드러냈다는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에게 종로는 체화된 장소, 몸 그 자체였던 것이다.
"4장: 국가의 기예와 그 사상적 구도"에서는 기계화된 국가와 통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언어와 역사, 일제의 기술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통치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곧 푸코와 아렌트가 나올 때가 되었다 싶었다. 근대의 에피스테메는 과학적 사실성을 추구하는 것이었기에, 일제 말기로 갈 수록 과학기술은 신격화되고 통치는 기예적으로 변한다. 국가와 지식인은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메커니즘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이렇게 되고 보니, 마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대표되는 '악의 평범성'처럼 일제에 속했던 통치 관료들은 전후 과거 청산 과정에서 책임 추궁을 피해갈 구멍을 확보한다. '위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안 시켰는데 말단이 잘못 적용했다'와 같은 변명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즉 통치의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 장 첫 번째 절의 주요 사료가 된 우방협회의 '조선총독부 관계자 녹음기록'의 대화에서도 관료들의 그러한 자세가 드러나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한편 저자는 녹음기록이나 회고록이 사료로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거시사가 승자에 입장에서 남겨진 기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미시적으로 남겨진 그러한 증언과 회고도 사료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관료들의 변명처럼 왜곡과 은폐의 위험성 또한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ㅂㄷ 교수님의 '기억과 상상'이 떠올랐던 대목. "'개인의 기억 속에는 집단적 성격이 내재한다.' 따라서 '개인의 기억'과 '집단적 기억'은 서로 간섭하는데, 역사에서는 후자의 간섭력이 언제나 더 압도적이다. "개인은 사회적 기억의 틀에 의존하면서 기억을 소환해낼 수 있고, 각각의 기억은 사회적 기억에 녹아드는 순간에야 교육 내용, 개념이나 상징으로 변형되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사회적 사상 체계의 일부가 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베네딕트 앤더슨 이래의 '상상의 공동체'론에 접속된 연구로서 앤더슨 스스로가 "상상의 공동체" 증보판에서 '기억과 망각'이라는 장을 덧붙인 바 있다. 소위 상상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만들어진 전통, 즉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때, 상상의 공동체는 '기억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일부러 비워 놓은 무명용사 기념비나 무덤에 대한 의례에서처럼, 우리는 기억하는데, 무엇보다 상상을 통해 그렇게 한다. pp.518-519"
"유한한 인간은 말이라는 전달 가능성 안에서 영속을 꿈꾸고, 그러하기에 기꺼이 죽음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죽지만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위해서, 어떤 일반의지를 위해서 죽으며, 이 의지와 함께 기록됨으로써 기꺼이 죽는다. p.527"고 하는 아렌트적인 문장, 여기에서 문학에서 정치적인 것을 회복시키고 싶어하는 저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목소리와 언어를 담은 문학은 정치적인 것이고, 또한 정치적일 것을 요청받는다. 입 주위에 근육이 있다는 나꼼수 정봉주 의원처럼 말을 잘 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아니면 크레인 위에서 투쟁하면서 말의 목소리화를 통해 무력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거나. 어쨌든 언어는 정치적인 것이다. 결론에서 저자는 말이 고기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는 이 때, 문학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하며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던지는 것 같았다.
책을 읽는 것이 여러모로 고통스러웠지만 어렵게 배운 것일 수록 소중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베이컨의 숭고한 혹은 감각적인 그림들이 생각났다. 고통 받는 예수수난상을 마치 구경 당하는 고기로 표현한 그림. 얼굴이 뭉개져 말할 입이 없어진 자화상, 또렷이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 충격으로 다가오는 그의 그림들이 생각났다. 언어를 빼앗겨 말이 목소리로 격하되고 벌레가 되었던 조상님들, 그리고 여전히 국가로부터 별반 고기나 기계와 다르지 않은 취급을 받는 듯한 우리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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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보고 생각했다. '제국'은 일본제국을 뜻하고, '벌레'는 제국의 식민지인이었던 조선인을 뜻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리 '벌레'가 되어버렸다던 '카프카'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하루 아침에 벌레와 같은 신세로 전락한 조선인들이 멀쩡한 사람인데도 더러운 벌레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가혹한 현실을 그린 책이라고 한 발짝 더 짐작했다. 그리고 표지에 그려진 '벌레'를 보고서 분명 내 짐작이 맞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표지의 그림은 분명 <카프카>가 지은 소설 속 '벌레'의 모습이 틀림없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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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근대를 이야기할 때는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 생활은 강제적으로 일본화되어야 했다. 일본에 의해 자행된 식민정책은 우리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로인한 흔적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맴돌고 있다. 육체적, 정신적 아픔을 보듬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들고 있다. 우리 문학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소설이나 시, 수필 등을 찾아서 읽는 편이 아니다. 자연히 문학 연구나 문학 비평에 대한 책을 들여다 볼 일은 더더욱 없었다. 현재 우리 문학계에서도 문학 연구나 문학 비평에 대한 활발한 활동이 눈에 띄지 않는 시점에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생경한 책으로 다가왔다. 다른 문학 연구나 문학 비평에 관한 책과 달리 일제시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사전적인 배경 지식도 많이 부족한 터였다. ‘벌레와 제국’ 이라는 책제목도 이해하기 힘든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호기심도 작용하였다. 책은 식민지말 문학의 언어, 생명정치, 테크놀로지 등 3개의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먼저 1장 ‘신화와 정치, 믿음과 약속의 체계들’ 에서는 식민지말 일본 사회의 신화를 들여다봄으로써 일본이 자신들의 신화를 식민통치에 어떠한 식으로 이용했는지,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천황제를 어떠한 식으로 유지했는지 등에 대해 다루고 이에 대한 대항신화로서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과 부계문화론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2장 “언어와 삶-상황과 제도들” 에서는 식민지말의 문학을 유도한 상황과 제도를 언어 정책 차원에서 살펴보면서 조선어(문학) 해소론, 조선어학회사건을 소개한다. 3장 “생명정치, 말하는 동물의 비명들” 에서는 채만식, 이광수, 김사량의 소설을 분석하고 국어가 되어버린 일본어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어떻게 전향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4장 “국가의 기예와 그 사상적 구도” 에서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국가의 지배를 매커니즘으로 이해하는 국가론이 비등해지던 1930년대 중후반의 상황과 그 상황에서 식민지 지배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당시의 사상계에 대해서 살펴본다. 현재의 상황이 아닌 일제 식민지 시대 상황을 설명하고 있어서 생소한 부분도 눈에 많이 들어왔다. 개략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만만치 않는 분량과 많은 각주, 그리고 쉽게 다가오지 않는 용어들은 책을 읽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게 했다. 그리고 한 번 읽어서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들을 흡수하기에 부족한 것 같다. 내게 다가오는 책 내용만큼이나 한일 양국은 아직도 그 실타래가 잘 풀려지지 않는 느낌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 시절을 거쳐오면서 당시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탓에 아직까지도 국민적인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지나온 과거라고는 하지만 한일 양국이 가진 미묘한 분위기와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감안한다면 우리들의 입장에서 당시를 정리하고 비판하는 자세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문학 연구나 문학 비평에 대한 글들을 찾아 읽는 편이 아니어서 읽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한 색다른 글을 읽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는다.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우리 땅에서 이루어졌던 문학의 흐름을 통해 당시를 읽고, 현재의 우리는 어떤 문제 의식으로 접근을 해야할 지를 가늠해 보아야하지 않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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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일본의 식민지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책들은 그 장르를 불문하고 참으로 다양하게 나와 있다. 이 책 역시도 언뜻 보면 그런 책들의 일종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특별히 식민지말 문학의 언너, 생명정치, 테크놀로지라는 세 분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책과는 달리 어떤 역사적 흐름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딱 식민지말이라는 그 당대의 특정 시대를 지목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총 4장에 걸쳐서 3가지의 주제어에 맞는 식민지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1장에서는 먼저 신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화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고, 존재해 오고 있다. 우리에겐 우리 고유의 단군 신화가 있어서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이는 것처럼, 식민지말의 일본에 나타났던 혹은 일본이 주장하고자 했던 신화를 들여다 봄으로써 그들이 식민지배의 통치와 정치에 대해 신화를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혹은 그 시대의 신화는 일본의 천황제에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에 대항한 반신화론과도 같은 우리나라 학자들의 신화론을 함께 게재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이해의 장을 마련한다.
2장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라는 제도를 확고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언어를 어떤 식으로 지배하고, 나아가 그 지배를 바탕으로 우리민족을 지배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장에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예로 들어서 한 나라의 언어와 학문, 언론을 지배함으로써 종국엔 그들의 삶까지 지배하고자했던 일본의 제도를 엿볼 수 있으며, 우리 나라의 사례 이외에도 일본의 제국주의의 피해국이였던 중국의 사례를 함께 접할 수 있을 것이다.
3장에서는 실제 채만식, 이광수, 김사량의 소설을 분석하여 식민지말 일본어의 지배로 인한 작가들의 전향과 저항 정치를 동시에 볼 수가 있다. 더이상 일본어는 외국어가 아니며, 국어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서 일본의 정치에 저항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전향한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저항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품 분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이나 그 운영을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원리로서의 메커니즘적 접근과 그에 따른 필요로 등장한 기술 지배 즉, 테크놀리지적 접근에 대한 서술이다. 흔히들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식민지배를 했다는, 자신들의 지배로 우리나라의 기술과 산업이 발전했다는 면피적 주장과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일부 식민지하의 지배자들과 지식인, 또는 그들을 포함한 일본측의 주장이 다분히 녹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많이 다루어진 시대에 대한 쉽지않은 주제들을 가지고 책을 써내려 갔고, 그 내용 역시 쉽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문학과 언어와 사회, 그리고 기술 지배(테크놀리지)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적 흐름과 각 문제계(問題系)들의 유기적 연결이 자연스럽게 어울어진다. 또한 과거의 이야기를 그 속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분석과 파악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 인식과 그에 대한 고찰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독자들로 하여금 과거청산이라는, 양국의 재정립이라는 산재해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나름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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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치욕이고 많은 문제를 야기를 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간 아직까지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시대인 일제 강점기의 문학작품과 작가들의 이야기를 풀어 내고 있는데 그당시의 지식이 일천하여서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 살았던 지식인들의 고뇌와 행동이 보이는것 같다.
1. 벌레 자신의 조국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하면서도 그러한 행동이 문제를 야기를 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 인하여서 자신의 것들을 읽어버린 식민지의 국민들이라고 할수가 있는데 일반적인 국민이 아닌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활을 하였던 지식인층인 작가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면서 식민지의 문제를 바라보고 행동을 하였는지와 그들의 심리적인 문제를 벌레라는 생물을 통하여서 말을 하고 있는것 같다.
벌레라는 생물도 자신의 거주지와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강력한 존재에게는 아주 작은 문제로 보여지는데 그러한 벌레와 같이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이 사용을 하는 나라의 언어로 작품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아닌 식민지를 지배를 하는 나라의 언어로 작품을 쓰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여야만 하였던 사람들의 아픔을 벌레라는 단어를 사용을 하여서 나타내고 있는것 같다.
식민지에 살고있는 원주민들은 식민지의 지배자들의 눈에는 아주 나약한 벌레와 같은 존재로 보이는데 자신들의 강력한 무기와 지배로 인하여서 아무런 행동도 못하고 무엇을 한다고 하여도 미약한 저항만을 하였던 존재이기 때문에 벌레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도 이상이 없을것 같다.
2. 제 국 자신들이 영위를 하는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나라들의 무력을 동원을 하여서 자신의 나라의 지배를 받게 만드는 나라들이 일명 제국인데 제국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모든 것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보고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문화들을 말살을 하고 그들의 고유한 정서를 없애어서 자신들의 문화를 심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한다는것이 문제라고 생각을 한다.
3. 일본의 딜레마 일본은 과거에 자신들의 나라에 많은 선진문화를 주었던 나라들인 중국과 조선을 지배를 하면서 식민지로 다루기 위하여서는 다른 서구의 제국들이 지배를 하였던 피부의 색깔로 구분이 되는 나라들과는 다르게 오로지 시민들이 말을 하는 언어의 차이만이 있는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문제를 야기를 하고 있었다.
식민지라는 사실을 인정을 하지않고 자신들이 도움을 주고 있다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를 하면서 자신들의 야욕을 숨기고 있는 시기에는 작가들이 작픔을 만들고 그것으로 생활을 하는 한편에도 무리가 있지만 가능은 하였지만 계속된 전쟁의 확전으로 인하여서 군인들이 부족하고 모든 여력을 전쟁에 동원을 하면서 느슨한 체제의 유지가 아닌 모든 것을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늘어 나면서 작가들의 생각에도 많은 문제가 발생을 하였다.
4. 작가들의 고뇌 자신들이 생활을 하고 말을 하는 언어를 사용을 하여서 작품활동을 못하고 자신들의 나라를 지배를 하는 일본의 언어로 작품활동을 하여야 하고 그러한 작품들도 그들의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생산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작가들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발생을 하였다고 볼수가 있을것 같다.
그 당시의 일제 강렴기를 살았던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그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좋은 작품인것 같다.
일제의 야욕에 맞써서 싸움을 하였던 작가들도 있지만 자신의 지조를 버리고 버리고 그 당시의 시류에 영합을 하였던 작가들이 느끼었던 어려움도 보이는 책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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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와 제국》은 국문학자 황호덕의 식민문학에 대한 연구논문집이다. 1910년대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최재서, 최남선, 채만식, 이광수, 김사량 등 친일문학담론을 통해 식민지 근대성을 다룬 연구서로, 학계에 발표한 논문들을 엮은 책이기에 각 논문간의 통합된 문제의식이 다소 취약한 편이다. 저자가 비록 서문에서 언어, 생명정치, 테크놀로지 이 세 가지 인식틀을 기반으로 근대국가의 내재적 특성과 식민지 문학의 특징을 탐구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여전히 통합된 사상적 그림이 불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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