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마디로 번역이 엉망이다. 어쩜 이렇게 엉터리일 수 있는가? 28 페이지 정도 읽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경제적인 지출을 무릅쓰고 원서를 구입했다. 아니나 다를까 원래 내용을 너무나도 엉터리로 옮겨놓은 것이다. 퓰리처상에다가 미국 도서 대상을 받은 책을 이렇게 엉터리로 바꾸어 놓다니... 예를 들어 보자. 우선 용어를 잘못 선택한 것이 많다. paradox를 이율배반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그냥 패러독스라고 하든가 역설이라고 했어야지 이율배반이라니. 엄연히 패러독스와 이율배반은 다르다. 또 다른 것으로 self-reference가 있다. 이를 재귀준거라고 했는데 원래 이는 자기 자신을 참조한다, 다시 자기로 되돌아와 가리킨다는 의미로 썼는데, 우리 말의 재귀준거가 이러한 뜻을 나타내는가? 이밖에도 잘못된 부분이 수두룩하다. 다음은 문장의 번역인데 내가 보기에는 역자도 모르는 말을 그냥 적어놓은 부분이 수두룩한 것 같다. 번역을 하려면 최소한 역자는 이해하고서 번역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어설픈 우리 말로 바꾼 부분이 있는가 하면 의역을 한다는 것이 원문의 의미를 180도로 바꾸어 놓은 부분이 많다. 25쪽 밑 부분에 나오는 문장을 예로 들 수 있다. 밑에서 10째줄부터 시작되는 문장은 나라면 다음과 같이 번역할 것 같다. ***** 어떠한 집합이든 평범한 집합(run-of-the-mill set)이나 자신 포함(self-swallowing) 집합, 둘 중에 하나이어야지 둘 모두로 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평범한 집합들의 집합' R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얼핏 보면 R은 평범한 집합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R이 평범한 집합일까, 자신 포함 집합일까"를 따져보고 나면 이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으리라.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든 결국 R은 패러독스인 것으로 유도되므로 R은 평범한 집합도 자신 포함 집합도 아니다. 실제 한 번 해 보기를. ***** 이것이 훨씬 이해하기 좋지 않은가? 번역서의 문장은 어색하고 이해도 잘 안 된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어색한 부분, 오역이 수두룩하다. 비전공 대학생 수준의 번역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일권 앞부분을 읽다가 포기하고 원서로 옮겨 읽기로 했다. 한꺼번에 상하권을 샀는데 돈이 아깝다. 나도 나이지만 이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던 앞선 독자들이 참 불쌍하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을까? 번역서로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천재라고 봐야 하나? 또 미디어 리뷰를 보니 그럴 듯 하게만 쓰여 있다. 그 사람들 진짜 제대로 읽은 것일까? 원서의 내용도 일반인한테는 그리 쉽지 않을 텐데 엉터리 번역서를 읽고 그렇게 그럴 듯 하게 추천사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역자의 경력을 보았다. 독문학 전공이다. 호프스태더는 컴퓨터 과학, 인지 과학 전공의 학자이다. 수학이나 컴퓨터를 전공했어야, 아니 최소한도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이러한 서적을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좋은 책을 망쳐 버렸다. 출판사는 당장 이 책을 리콜하라. 책은 리콜 대상이 되나 안 되나?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 주시기를... |
|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번역서"가 아직도 판매가 되고 있다니 무척 씁슬합니다. 원전을 폄하한다고 생각지 마십시요. 원전은 몇십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름답습니다. "번역서"의 품질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꽝"입니다. 첫 단추부터 오역을 시작해서 역자후기의 오만방자(무식하면 용감하나?)함까지 이 번역서가 첨 나왔을때 치를 떨었던 기억이 나네요. 누가 내 부모님을 욕하는 이상의 모욕감을 느꼇던 거를... 참.. 제가 감히 말씀 드리건데 이 번역서는 오역의 절정입니다. 번역자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엔 ㅈㅈ대학에 계신걸로 아는데) 이글을 보시고 모욕감을 느끼신다면 제게 직접연락하시요. (사족)지금 다시 보니 이 번역서가 "인문일반"의 카테고리에 분류되어 있군요... 하하.... 정확히 말하자면 이책은 자연과학(? 더 정확히는 수학-괴델)과 예술(음악-바하,미술-에셔)를 아우르는 책입니다. 다른 서점은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yes24의 식견이 참 거시기 하군요... 번역자가 인문학자라 인문계열이라.. 하하.. 물론 Dr. Yellow에 비하겠읍니까만 이 번역자 양반도 그 반에 반은 되지 않나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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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이미 20세기의 삶을 산 작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작가, 로렌스 스턴(Laurence Sterne). 일찍이 괴테는 “스턴을 읽고 나면 나 역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했으며, 맑스 역시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에 영향을 받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전갈과 팰릭스」라는 소설을 남기게 된다.
호프스태터는 ‘영원한 황금 노끈’, 혹은 거칠게 말해 ‘뫼비우스의 띠’로 이해할 수 있는 재귀순환(self-recursion: 다시 처음의 출발점에 도달하는 현상)의 문제를 음악가이자 작곡가 바흐, 건축가이자 화가인 에셔, 그리고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괴델의 대표적인 이론과 작품을 통해 기상천외하게 그려나간다. 한 눈에 봤을 때 전혀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 이 세 대가를 하나의 목소리로 만든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묘미라고나 할까. 그러기 위해 재귀순환과 관련된 이들의 작품을 조금씩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온갖 환상적이며 지적인 언어유희와, 탄탄한 단어 배치를 통해 논리적인 전개를 이끌어가며, 또 다른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이들의 대화를 간단히 살펴보자.
어지간한 독설 이상으로 뭇사람에게 심지어는 신에게마저 혹평을 가하는 니체지만, 최고의 찬사를 보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로렌스 스턴이다. 로렌스 스턴에게 보낸 니체의 찬사는 결국 그 자신에게 돌려 줄 수 있는 우리의 찬사이기도 하다. 니체의 찬사로 이 글을 마치려는 것, 나는 물론 호프스태터가 감히 니체만큼 자유로운 영혼인지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혁신적이고 현란한 글쓰기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확신이 섰기에 그것으로 마무리 짓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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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책은 그 책이다. - 내용에 대하여 보물이다. 이 책은 쓸 당시도 젊었을 저자가, 평생동안 궁금해오고 꾸준히 품어 만든 생각의 진주들을 담고 있다. 완숙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쉬운 말로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해하고 씹고 되새김질해서 더 멋진 것을 만들어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능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의 마지막 부분 논평에 보면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던 통찰을 가지고 코멘트하는데 정말 놀랍다. 형식 체계와 기호 논리, 인공 지능, 에셔의 그림에 대해 각각 따로 다룬 웬만한 책들보다 낫다. 따라서 이 책의 아주 적은 일부만을 읽고 좌절하고 끝내더라도 괜찮다. 그래도 얻을 것이 많다. - 이 책을을 내가 읽을 수 있을까를 테스트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1장에 나오는 MU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어본 다음 (1) 문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의 말 자체가 이해가 안된다. - 그런 분들은 어쨌든, 이 수수께끼를 낑낑거리며 풀어보기를 권한다. 이걸 푸는데 열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그 시간이 아깝지 않다. 분명히 그것이 평생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 과정 없이는 이 책의 진도를 나가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를 열 시간 투자해서 무슨 말인지 감을 잡는다면 이 책을 도움을 받아 읽을 수 있다. (2) MIU를 가지고 규칙을 적용해서 대여섯가지 정리를 만들었다 - 역시 그래도 답을 끝까지 찾아보고 한시간정도 고민하면서 답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있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는데 필요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읽기 좋을 때니 인내심을 가지고 읽기 바란다. (3) 이 수수께기를 왜 내는지 안다 - 이 책을 끝까지 다 즐기면서 읽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번역에 대하여 이 책에 대한 번역 논란이 많다. 나는 이중적이다. 괜찮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애증의 책이다. 처음에는 옹호했는데 나도 욕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겠다. 그만큼 기대가 커서 그럴 수도 있다. 우선 오마이뉴스 차재엽 기자의 한마디를 인용하겠다. "처음 이 책이 출판된 건 1979년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20세기가 다 끝나가던 1999년에야 번역본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다." 이게 역설적으로 대단한 것이다. 이 책을 20년만이라도 한국에 소개하고 번역한 박여성의 번역은 그래서 기념비적이다. 번역을 해냈고, 다른 나라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달라붙어 하던 일을 혼자서 잘 해냈다. 이 책은 일단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 술술 읽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번역을 비판하며 이 책을 차라리 원서로 읽는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다방면에 익숙한 독자라도 한국의 독자든은 최소한 세배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나도 이 영어판을 94년쯤에 샀는데 책꽂이에서 먼지만 모으고 있었다. 이 번역이 없었으면 이 책을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옹호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오역들이 있다. 이해하기 어려워서 주의깊에 읽어야 하는 부분일수록 결정적인 오역들이 있다. 13장, 14장이 특히 많이 아쉽다. 그 사이에 있는 G선상의 아리아 같은 것은 치명적이다. 가장 핵심적인 콰인의 역설이 뒤집힌 것이다. "Yields falsehood when preceded by its quotation" yields falsehood when preceded by its quotation. 을 "자신의 인용보다 선행하면 오류를 얻으리라"는 자신의 인용보다 선행하면 오류를 얻으리라 라고 번역했는데. (1) 앞뒤가 바뀌었다(preceded by가 헛갈렸다). 인용이 선행하면 오류를 얻으리라고 해석해야 한다. (2) 직역하면 "인용이 앞선다면 거짓을 낳는다"는 인용이 앞선다면 거짓을 낳는다. 쯤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아~ 번역 안된다. 일단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거짓이다' 라고 잘라 번역하고 싶지만 만연체로 yeild falsehood라고 이장님처럼 말하면. 의역하면 "인용이 문장 앞에 오면 거짓이다"는 인용이 문장 앞에 오면 거짓이다. 는 것이다. 이 말은 '거짓말쟁이 역설'의 다른 버전으로 모순이 되는 묘한 말이다. 인용이 먼저 나왔으므로 이 말 전체는 거짓인가? 이를 판명하기 위해서는, "인용이 앞선다면 거짓이다"로 시작하는 이 말 전체가 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문장은 14장의 주된 논의를 끌고 가는 중요한 말이다. 문장이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을 둘러싼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또 모순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면서 괴델의 불완전성 원리를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온지 이제 십오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명백하고 치명적인 오역이 수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은 이 부분이다. 앞부분의 2성 인벤션은 제목 자체가 오타가 있다 "2성 이벤션". 이런 것은 재쇄 찍을 때 조금만 건드리면 되는 것인데 아쉽다 (이 책의 뒷표지 아래에 있는 숫자들은 꾸준히 판을 거듭하면서 업데이트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오역은 어색한 번역이 아니라 내용 이해에 분명히 걸림돌이 된다. 여러 분들은 조금 공격의 수위를 낮추어서 성실하게 오역을 지적했으면 좋겠고, 번역자는 겸허하게 사람들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개정판을 냈으면 한다. 세세한 곳에서는 조금 문제가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데는 큰 무리는 없는 번역일 뿐만 아니라 큰 흐름에서는 잘 되었다. 이 책의 주제 중 하나는 모든 것이 규칙에 의해 작동한다면 - 그 규칙을 운영하는 다른 규칙(메타 규칙)도 있을 것이고 또 메타 규칙을 지정하는 메타 메타 규칙도 있을 것이다 - 사람은 왜 자기가 모르는 것도 깨닫고 바로 익숙해지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마음이 이러한 체계 안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이 책의 부분 부분 어색한 부분이 있어도 전체를 이해할 수는 있다. 특히 번역이 왜 어색한가를 찾아낸다는 것은 이 책에서 다루는 인간의 형식을 초월한 사고이다. 그래도 나는 번역을 주로 읽되 어색한 부분이 나올때마다 원서를 참조하라고 하고 싶다. 그래도 돈은 안 아깝다. |
| 봉가드 문제라는 게 있다.(http://www.cs.indiana.edu/~hfoundal/res/bps/bpidx.htm) 지능지수 측정 문제와 비슷하다. 지능이란 무엇일까. 봉가드 문제를 풀어나가다 보면 지능이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변형해 나가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연수가 무한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가보지 않고서도 무한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까. 경험하지 못한 확실성, 그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사람은 어떠한 행위 중에도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본다.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수식체계를 통해 괴델은 수학의 새로운 가능성 (또는 절망) 을 만들어냈다. 스스로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기계는 가능할 것인가. 현란하고 아름다운 변주곡같은 이 책에서 호프스태터는 인공지능에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나도 믿고 싶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내 이해와 사랑을 원하는 기계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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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 이 책에서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보았다. 호기심에서 집었지만 끝까지 읽게 된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한다. 호프스태터는 괴델,에셔,바흐라는 서로 다른 세 분야의 전문가들을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어서 설명한다. '재귀순환'이 그것인데, 그의 논리가 워낙 탁월하기 때문에 독자는 의심의 여지를 품지 못한다. 또한 그는 재미를 돋구기 위해 다양한 일화와 흥미있는 '대화'를 제시한다.
이 책은 사실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다룬 책이다. 수학, 미술, 음악에서 전문적인 세 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글라스 호프스태터는 최대한 독자에게 다가서서,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고 애를 쓴다. 덕분에 고등학교 정도의 수학실력만 가지고도 내용 이해에는 크게 무리가 없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번역이다. 물론 수많은 언어유희와 시각적 언어구사는 사실상 그대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수많은 주석은 역자의 노력을 나타내지만, '제곱'이 있어야 할 부분에 '제곱근'이 있다든가, 영문을 그대로 번역해 놓아서 이해하기 힘들다든가 하는 부분은 짜증이 날 정도이다. 어쨌든, 내용상 충실함은 지적 유희를 즐기는 독자에게 충분한 만족을 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그리고는 그 메타-메타-요정은 메타-요정이 했던 것보다 두 배나 바르게, 요정이 가진 은 램프와 똑같은, 다만 금으로 도금된 램프를 그의 옷주름 속에서 꺼낸다. 그런데 그것은......라는 점만 빼고는 금으로 된 다른 메타-메타-메타 램프와 똑같았다.....는 다시 메타-메타-램프가 그의 옷 속에 숨겨놓은 메타-메타-메타-램프 속으로 빨려들어오고, 메타-메타-메타-요정보다 절반이나 늦은 속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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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은 과연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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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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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일련의 역설들, 내부적인 역설들 속에서 스스로 전개되어야 한다."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한길사, P.87)
<괴델, 에셔, 바흐>. 사실 이 책은 좀 난해하지만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다지 대중적인 책은 아니라서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겠지만 이른바 '잡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잡학'이라고 하니까 뭔가 쓸데없는 지식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는데, 현대 철학에서 '잡학'이라는 요소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예를 들어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 정신분석학, 음악, 미술, 물리학 등을 아우러는 잡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것처럼.
이런 측면에서 이 책 역시 여러 각도로 독해할 수 있다. 현대철학의 핵심을 건드리는 이론서로도, 예술적인 문체를 자랑하는 고급 에세이로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다양한 지식영역을 횡단하는 설명서로도, 배타적인 과학자 집단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저작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이 책의 제목이 되고 있는 '괴델, 에셔, 바흐'.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바흐의 카논, 에셔의 그림, 괴델의 정리는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호프스태터는 음계(바흐의 카논), 계단(에셔의 폭포), 역설(괴델의 정리)에서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시작한다(서장:음악-논리학의 헌정). 무한히 상승하는 카논 이상한 고리의 첫 번째 예로 든 것이 바흐의 '카논'이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1685-1750)는 1747년 프로이센 제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주제를 받아 '음악의 헌정' 이라는 작품을 작곡한다. 알려진 대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굉장한 음악애호가여서 궁정의 실내악 연주회 때에 직접 플루트를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카논'과 '푸가'로 구성된 이 '음악의 헌정'에는 일반적인 카논과 전혀 성격이 다른, 무한히 상승하는 순환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이 카논은 키(음조)가 C 마이너임에도 다른 카논과 달리 종결될 때 D 마이너에 있다. 조바꿈이 일어난 결과이다. 조바꿈이 연속적으로 몇 번 진행되면 처음 키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카논은 끝이 처음으로 다시 연결되도록 구성되었기 때문에 처음 키인 C 마이너로 되돌아가야 한다. 신기하게도 이 카논은 여섯 차례의 조바꿈을 통하여 본래의 키로 복귀하게끔 작곡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종지부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로 연결되며, 이 과정을 통해 바흐는 한시적인 기호 속에서 '신의 음성'을 들려줘야하는 음악의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고자하는 비밀을 드러낸다. "바흐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 상승하는 카논은 무한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논리적 결과에 매료되었"다고 하면서 '푸가의 기법'이 전회(轉回)로 연주되어도, 역행(逆行)으로 연주되어도 똑같은 화성적 기법을 풀고 있다는 사실은 이 출발점과 소실점이 같다는 '헝클어진 고리'로 이뤄진 진리의 모순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처음에 C 마이너에서 출발하여 키의 계층 구조를 따라 더 높은 키로 올라갔으나 다시 처음 키인 C 마이너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가 계층구조를 가진 체계에서 어떤 수준을 따라 위쪽(또는 아래쪽)을 향해 이동하다가 느닷없이 본래 출발했던 곳에 다시 돌아와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동한 행적은 '고리' 모양이며 출발했던 곳에 되돌아온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이상한 고리라고 명명한 것이다.(pp4~14) 에셔 에셔의 석판화 '폭포'에서도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한다. 에셔(1898-1972)는 패러독스를 주제로 여러 편의 걸작품을 남긴 화가이다. 현대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은 알든 모르든 그의 그림들, 정확히는 석판이나 목판화들을 한두 개 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가 1961년 발표한 '폭포'(p15, 아래 그림 참조)는 불가능한 물체라 불리는 삼각형을 3개 연결하여 그린 석판화이다.
위 그림에서 보듯 폭포의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놀랍게도 처음에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고리의 각 부분에서는 한 곳도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지 않지만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고리 전체가 분명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패러독스를 느끼게 된다. 폭포의 물길을 따라 가다 보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pp14~19). 에셔는 이 <폭포> 뿐만이 아니라 '두 개의 손이 서로 다른 손을 그리고 있는 그림'(p888, <손을 그리는 손>, 1948)이나 'ABCD 네 꼭지점을 가진 사각형에서 A에서 B로 올라가는 계단 B에서 C로 올라가는 계단, C에서 D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D에서 A로 올라가는 계단 그림'(p16,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1960) 등 에셔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은 이런 '재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호프스태터는 이를 無限自己再歸性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불완전성의 정리 이상한 고리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을 위해 사용된 에피메니데스 패러독스에서도 발견된다. 괴델(1906-1978)은 25살의 나이에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했다. 괴델은 "나는 증명될 수 없다"라는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논리식을 구성하여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했다. 이 논리식은 에피메니데스의 패러독스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경 크레타 섬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진 에피메니데스는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불멸의 명제를 남겼다. 이른바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이다. 패러독스는 본디 그 자체는 모순이 없지만 참도 되고 거짓도 된다. 예를 들어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러나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한편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참말이 된다. 이와 같이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은 동시에 참도 되고 거짓도 된다.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명제는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명제로 바꿀 수 있다. 이 명제는 다시 "A : 다음 문장(B)은 거짓이다"와 "B : 앞의 문장(A)은 참이다"의 두 명제로 분리 가능하다. 두 명제는 제각기 의미가 완전하며 패러독스가 없다. 그러나 두 명제가 합쳐지면 에피메니데스 패러독스와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므로 이상한 고리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증명될 수 없다"라는 괴델의 논리식은 거짓이라면 증명이 가능하지만 참일 경우에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참이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하므로 모든 수학적 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pp20~29) 이 불완전성의 정리에 대해서 필자가 설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테고, 이 명제는 사실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내놓은 <수학원리>를 겨냥한 것이었다는 게 통설이다. 모든 수학적 진리를 자신의 체계 안에서 입증하고자 한 <수학원리>의 야심찬 포부는 괴델의 정리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이 <수학원리>는 너무나 난해한 책이라서 다 읽은 사람이 저자 두 사람과 괴델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수학계의 정설(?)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수학의 이러한 '무모순성'에의 추구의 역사에 대해서는 이진경, <수학의 몽상>, 푸른숲 참조). 결정적인 것은 이 <수학원리>의 '허점'을 증명하는데 <수학원리> 내부의 방법론만이 쓰였다고 한다. 여기서 또다시 '이상한 고리'가 형성된다. 어쨌든 이러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한계, 나아가서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성 스스로의 힘에 의해 밝혀낼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수학 아니, 전학문적 성과를 통털어 첫손가락 꼽히는 업적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사이의 경계 이렇게 음악, 미술, 수학에서 이상한 고리의 사례를 발견한 호프스태터는 이것을 사람의 두뇌와 마음에 대한 견해로까지 밀고 나아간다. 그는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이원론적 접근방법으로는 사람의 마음이 뇌에서 출현하는 이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뇌와 마음을 서로 다른 수준으로 구분시키는 방법론에 의해 뇌 속에서 의식이 생성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마음을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두뇌를 하드웨어에 비유하고 두뇌가 떠받들고 있는 마음에서 의식이 출현하는 것처럼 컴퓨터 역시 하드웨어의 지원을 받는 소프트웨어에서 의식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고리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컴퓨터가 사람처럼 마음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제 10장 '기술층위와 컴퓨터 체계'). 그의 이러한 관심은 음악, 미술, 수리논리학은 물론이고 인공지능과 분자생물학, 나아가 선불교까지 동원하는, 한마디로 모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넘나들며 언급된다. 워낙에 방대한 분량이고 깊이 있게 파고드는 부분도 많은지라 100% 다 이해하고 넘어가기 힘든 측면이 많다. 개인적으로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이율배반, 또는 무모순성을 언급하는 부분에 나오는 재귀순환, 혹은 재귀준거의 수학적 증명이다. 수학적 지식이 얕은 입장에서는 복잡한 기호(처음 보는 수학적 기호도 많다)만 쳐다봐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 말이다. 인공지능 어쨌던 이런 과정을 거쳐 결론 부분인 제 19장 '인공지능 : 전망'에 이르러 컴퓨터 프로그램이 음악을 작곡할 수 있을까?, 정서를 기계에 프로그래밍해 넣을 수 있을까?, 천하무적의 체스 프로그램이 나올까?,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인간과 동일해질까? 등등과 같은 열 개의 질문을 던져 놓는다. 이 질문들 중에서 일부는 이미 우리 생활에서 보편화되고 있는 형태로까지 나아간 것(이미 체스는 컴퓨터가 인간을 이기는 상황에 도달했다. 물론 이것이 컴퓨터의 연산방식이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컴퓨터보다 훨씬 복잡한 논리적 연산을 요구하는 바둑의 경우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도 있지만 이 책이 쓰여진 게 1979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의 이 질문들은 꽤나 선구적이었던 셈이다. 처음 이 책이 출판된 건 1979년인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20세기가 다 끝나가던 1999년에야 번역본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다. 좀더 젊은 시절에 읽었더라면 내 인생이 좀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 동안 필자는 이 책을 두 번 정도 숙독했지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숱하게 있다. 모든 걸 다 소화하고 넘어갈 순 없겠지만 언젠간 그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안고 기꺼이 또다시 안개속 미로를 헤엄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책이다. 필자의 이런 바램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듯, 호프스태터는 국역본 <괴델, 에셔, 바흐>의 '한국어판에 부쳐'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던져 놓는다. 인생에 남아도는 시간이란 없습니다. 인생은 별도의 공간과 사치를 허용할 정도로 길지 않습니다. 그 짧은 일부분에서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시각이 전해진다면, 그것은 저의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p. xix) 하지만 그의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시각을 '제대로' 읽어내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해볼만한 노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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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온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아마 읽어 보셨으면, 많은 부분에서 번역이 잘못되어 있고, 원서로 읽는 것이 더 좋다는 의견들이 많은데, 아직도 판매가 되는 것을 보면 아쉽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 마자 난해한 번역체에 좌절을 하고 글을 남깁니다. 훌륭한 원서 가치를 번역에서 많이 훼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20~30페이지를 읽다가 더이상 의미가 없는 듯 하여, (이해가 간 것은 오직 단어의 뜻 뿐이지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만 읽고 서평을 남깁니다.
다음에 나올 때는 좀더 좋은 번역으로 나왔으면 좋겠네요.
다른 분 구매시 참조하셨으면 해서 글을 남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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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사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전미 도서 대상까지 받았다는데 다른 책 광고에서 그걸 본 것 같지는 않지만, 인터넷을 뒤져가며 참조될 만한 글을 찾았으나 없었고, 그래서 에셔의 판화 그림 복제본 하나 사서 벽에 붙여놓고 가끔 들여다 본다. 어제 책 정리라도 해볼까 하고 뒤지다가 열불나게하는 그 책이 또 눈에 띄길래 다시 인터넷을 찾았더니 예쓰24에 욕이 버글버글 올라와 있었다. |
| 세 명의 인류사의 위대한 지성들을 하나의 고리로 묶는것은 쉽다.... '지식과 영감의 질적' 문제가 아니라 바로 '관심의 유무' 여부이기 때문.... 작자가 가진 관심사의 편력에 따라 프레게+몽드리안+베토벤이나 하이젠베르크+마그리트+스트라빈스키 연결고리 등의 다양한 모티브를 생성할 수는 있으나.... 근대와 현대를 잇는 중요한 지적혁명에 기인하자면.... 수많은 스킴 중에서 창조적 현대성을 읽어내는 작자의 놀라운 감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지성 한계의 기저를 이루는 재귀순환와 모든 예술품의 운명적 발현이라 할 수 있는 원점회귀에 관한 사유의 근거를 제시하는 놀라운 스토리텔링은 가히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고전반열에 올려놓을만 하다.... 다만 작자가 가진 세 가지 사상의 이해와 애정어린 설명(?)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잡은 세 위대한 사상가의 연결고리 파악과 독창적 제시까지는 경악을 금치못할 점이긴 하나.... 그러한 스킴을 가지고 진정으로 작자가 하고싶은(비판과 재해석)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파악하기 무척이나 힘들다.... 세가지 지성에서의 약점과 난점, 비예지성, 현대사회로의 반작용성 같은 범인들이 손대기 힘든 동시대를 살고있는 바로 현대지성의 고뇌를 읽고 싶었던 본인의 바램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렸다.... 분명 이러한 저작은 또 다른 새로운 저작을 만나게 마련이다.... 보완서가 되건 후속서가 되건 아니면 비판서가 되건.... 이 저서와 어떤 방법으로던지 연계된 또 다른 저서를 기다린다.... .... 애초에 원서로 읽어버려서 요소요소 드러나는 전문성과 프레이즈간 의미의 연결이 두께만큼이나 무척이나 힘들었었고, 더불어 이 책이 가진 진가 역시 몸소 체험하기가 불가능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러한 번역서는 번역 자체의 퀄리티 여부를 떠나 분명 가뭄에 단비같은 존재렸다.... 인용된 수많은 레퍼런스까지 다시 원서로 읽어야 되는 막연함과 피학에 가까운 시간적 압박을 일거에 해소시켜주었다고나 할까.... 행간에서 말하고자하는 주제를 파악하기만 하면 되는 독자의 노력만 남겨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