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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민족의 허구 혹은 신화가 깨진 것은 최근이었다. 그전까지는 순수(결)함은 자랑이요, 대세였다. 파리에 체류했던 저널리스트 고종석이 일찌감치 그 허구의 위험성과 관용의 필요함을 간파하고, 그 불온함을 전파한 책. 논리 정연한 글은 편지글 형식을 띠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하다. 과연 파리가 아니었다면, 그 생각, 그 논리, 가능했을까.
- 준수 100자평 -
☞ [내 좋은 친구들, ‘F4’와 인사하실래요?] ① 인트로 불순함을 옹호하고 개인을 우위에 놓다, 《고종석의 유럽통신》
[다음 시간에 계속] |
| 누구나가 외국에서의 여행이 아닌 생활을 꿈꾸는 이는 없다. 하지만 많은 시간동안 이런저런 책을 통해 본 프랑스라는 나라는 지식인에겐 자유라는 이름가 함게 더 없는 희망과 설레임을 전해주는 도시들을 가진 나라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고종석 씨가 프랑스에서 여행이 아닌 생활 속에서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은 이 책은 지식인이 외국생활을 통해 느끼는 문화적인 체험을 가볍지 않은 필체로 그려내고 있다. 다른 나라에 대한 향수만큼이나 현실이 많이 담겨있고, 그 현실은 한국에 있는 이들에게 또 다른 사실이 되어 교훈과 함께 생각의 틈을 벌려준다, 많은 일상의 이야기들이 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겐 여유와는 또 다른 이색적이지만, 결코 이색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은 인생의 흐름을 읽게 해 준다. 담백한 문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을 자연스럽게 비교한 이 문체들을 통해 외국에서 사유하는 것이란 어떤 느낌인지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게 한다. 더운 여름 적당한 쉼이 널려 있어서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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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이 파리에 체재하던 시절 편지글의 형식으로 발표했던 산문들을 모은 책이다. 형식이 편지일 뿐 수신자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 글들은, 장정일의 표현을 빌자면 <뇌세포를 약간 불려놓는, 착하고 순한 읽을거리>들이다. '현란한 지적 체조'를 하는 고종석을 보고 싶다면, 약간 실망할 것같다. 여기 실린 글들은 현란하기보다 그저 '착하고 순한' 편이다. 맥이 빠져 있달까.
가령, 일부 국어 순수주의자들을 질타하는 목적으로 썼을 <일석을 위한 변명>, 고종석이 깍듯이 스승 대우를 하는 복거일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을 <세계어에 대한 몽상>, 두 글은, 나중에 두 가지를 모두 노리면서 그가 썼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와 비교할 때 성급하고 헛점도 많아 보인다.
(그토록 열렬히 '불순함에 대한 옹호'를 하는 그가, 어떻게 '세계어에 대한 몽상'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가 '획일화와 구별되는 보편주의의 욕망' 운운하며 세계어에 대한 몽상을 펼쳐 놓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하는 그의 이데올로기는 뭘까'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불쾌하고, 게다가 위험한 이데올로기일텐데.) [인상깊은구절] 그래서 도달한 결론은,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 파리나 광주에 대한 소설만이 아니라 어떤 소설도 쓸 수가 없다는 거였어. 소설가가 되기엔 내 정신은 너무나 헐렁해. 내겐 '정신의 힘'이라는 게 결핍돼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슬프게 깨달은 거지. (P. 16) 인간 사이의 증오, 그리고 그것의 집단적 외화로서의 전쟁을 바라보면서, 저는 한두 가지 하찮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생각의 첫째는 사회 전체의 세속화의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단순한 정교분리를 넘어선 세속화 말이에요. (---) 종교들이란 대체로, 특히 그것이 일신교라면 더욱더, 관용의 원칙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분쟁의 씨앗으로 작용합니다. 그 하찮은 생각의 둘째는, 사실 그 첫 번째 생각과 포개지며 그것을 더 확산하는 생각입니다만, 순수성 또는 순결성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필요성에 대한 것입니다. (---) 종교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모든 교조주의, 근본주의의 심리적 뿌리는 순수(결)성에 대한 욕망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순수(결)함이냐 불순함이냐의 문제가 될 수도 있겠는데, 저는 말할 나위 없이 불순함의 편입니다. 순수함에 대한 열정, 순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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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읽을 게 없을까.란 뇌까림을 듣던 친구가 소개해준 책이었다. '가볍게,읽을 수 있을거야.' 역시, 1994-1995년에 걸쳐 파리에 머물던 작가의 자유롭고도 넘나드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마치 식후 디저트처럼 엿볼 수 있는 글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바로 그때 그 시간에 파리라는 곳에서 머물던 기억을 가진 나에게 그의 글들은, 여느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쇼팽의 묘지를 찾았던 나의 기억,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느낀 여러가지들에 대한 공감들. - 그것은 단순한 공감이라는 두어절로 표현하기엔 좀 모자란 감이 있다.- 마치 뇌속 어느 메모리를 쿡쿡 찔러 그 기억들이 조금씩 배어나오게 하는 약물같은 - 그런 글들이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도, '생각'을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과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나누려고 하는 그의 글짓이 부러웠다.그래서 책을 덮자마자 나도 그 친구에게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무언가 뾰족함을 바라면서 약간 게을렀던 일상이었는데, 적절한 환기를 주었음에 감사하며. 그리고 다시 받은 답장에서 그 친구의 기억의 한편을 공유할 수 있었음에 또한 색다른 경험이 되었던 것도 또한 감사했다. 무언가를 나누고 공유한다는 기쁨은, 무엇에 비견하기 힘든, 그러한 가치가 있다. [인상깊은구절] 제 아이들 방엔 큰아이가 국민학교 졸업기념으로 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그땐 우리 식구가 불런서로온지 두달 밖에 안된 때여서 큰아이는 외국인 반에 있었지요. 큰아이의 반 친구 여덟명 가운데, 셋은 아랍아이이고, 둘이 흑인입니다. 그 사진을 보며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혹시 큰아이가 나중에 저 사진속의 흑인 여자아이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저는 이제 그럴경우의 제 반응을 알고있습니다. 저는 흔쾌히 찬성할 겁니다. 그 아이가 흑인이어서 제 3세계 사람으로서 제가 그 아이에게 가져야 할 연대의식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아이가 내 큰아이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흔쾌히 찬성하게 될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내 아이와 그 아이의 선택이기 때문이지요, 세계시민주의로서의 개인주의는 불순함에 대한 사랑이고, 관용에 대한 경배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