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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서, 한문학 자료를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로 바꾸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4년 넘게 몰입해온 다산 관련 논문을 한자리에 모았고, 다산 친필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어디든 찾아갔으며, 새 자료를 수소문해서 만나고, 정리해서 번역하고 논문으로 썼고, 손에 못 넣으면 안절부절 몸이 달았다. 그렇게 모은 자료로 쓴 논문이 20편을 넘겼다.
다산 정약용은 40세인 1801년 강진에 귀양 와서 57세인 1818년 여유당으로 돌아갔다. 강진에서 다산은 훗날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함께 완성했다. 강진 체류 기간 동안 네 차례 거처를 옮겼으며 제자 그룹도 셋으로 나뉜다. 사의재 시절 읍중 제자 황상과 이청 그룹과, 해남 윤씨가 중심이 된 다산초당 제자 그룹, 대둔사와 백련사 승려로 구성된 전등 제자 그룹이다. 다산의 교학 방식은 모두 여섯 단계로 구분하며, 차례와 단계를 매우 중시하는 단계별 교육, 제자들의 성품과 특장을 살펴 전공을 두어 문학과 이학의 구분을 둔 전공별 교육, 제자의 처지와 인성 및 개성을 살펴 그 사람에게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칭찬과 꾸지람으로 상황에 따른 처방을 내려주는 동기유발형의 맞춤형 교육, 평소 초서를 통해 바탕공부를 다진 후 구체적 작업 매뉴얼을 제시해 실전연습을 시키는 실전형 교육, 문답과 토론을 통한 쌍방향 토론형 교육, 전체 작업 공정에서 역량에 따라 작업을 안배하되 개성을 고려하여 역할을 분담하고 과제에 따라 전담 책임을 두어 공동작업으로 진행하는 집체형 교육이다.
강진의 여러 제자 중 다산이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과의 사이에 오간 깊은 애정과 정성스런 가르침의 실상이 녹아있는 서간첩은 한 편의 감동 드라마이다. 15세 때 만난 그를 몹시 아껴 <삼근계>의 가르침으로 훈도했고, 문학에 재능있는 그에게 시를 가르쳤다. 황상의 <치원유고>를 보면 다산은 황상에게 1804년 5월에 지은<설부>를 시작으로 1805년 4월 1일부터는 매일 한 수씩 4월 30일까지 30수의 부를 짓게 하여 일정한 목표를 정해놓고 실천하는 정과실천의 방식을 적용한다. 서간첩의 수신자는 모두 황상이다. 17세였던 황상이 학질에 걸려 고생할 때 써준 편지는 이런저런 증세를 물으며 걱정하는 마음이 넘쳐나고, 학질이 뚝 떨어지라고 <절학가>를 지어준다. 1808년 봄 다산이 거처를 다산초당으로 옮기면서 황상은 스승을 따라오지 않았다. 초당 제자들과는 신분상의 차이도 있었고, 부친 사망 후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도 작용했으리라. 1836년 2월 스승의 회혼례에 맞춰 천 리 길을 걸어 마재를 찾은 황상과 다산은 말없이 울기만 한다. 다산은 세상을 뜨기 이틀 전 황상에게 마지막 편지와 <규장전운> 등의 책과 노잣돈까지 챙겨준다. 삶의 끝자락에서까지 제자의 안위를 살피는 스승의 마음이 참으로 눈물겹다. 스승을 향한 황상의 진실한 태도와 한결같은 자세는 정학연, 정학유 형제와 추사 형제, 이재 권돈인 등 여러 경화사족에게 큰 감동을 준다. 그가 조성한 일속산방 또한 어린 시절 스승이 일러준 이상적 주거의 모델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실현한 공간이었다.
초의는 다산이 불가의 비유를 끌어와 끊임없이 채근하고 닦달하여 깨달음의 길로 이끈 제자였다. 중간 중간 불법의 허망함을 지적하여 유가 쪽으로 이끌려는 욕심도 감추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글은 제자에 대한 다산의 사랑을 보여준다. <금당기주>에 수록된 내용은 대부분이 초의가 소장하고 있던 제가들의 친필 시문첩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은봉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만일암실적>과 <제만일암지>는 실은 다산이 지었으며 은봉과 다산의 교분은 매우 두터웠고, 진불암과 만일암 등을 왕래하며 그와 교분을 나누었다. 만일암과 관련해서 써준 다산의 글은 훗날 전등계로 이어져 <대둔사지>와 <만덕사지> 편찬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되며, 그 출발에 혜장이 있었다. 혜장은 강진 유배 초기 다산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기고만장하던 그를 다산이 단 한 차례의 질문으로 격침시켜 고분고분하게 했던 일이 문집에 나오며,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혜장이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빈번히 왕래하며 마음을 나누는 벗이 되었다. <아암집>과 <다산시문집>에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시문들이 적지 않다.
다산의 이상주거론은 벼슬을 떠난 사족의 자족적 생활공간의 구체적 모델을 제안했다는 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단순한 공간 배치에 그치지 않고, 원포 경영을 통한 경제생활과 생활 속에 학문과 예술을 통해 운치를 깃들이는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오늘날 웰빙 관점에서 보더라도 주목하고 음미할 만한 점이 적지 않으며, 조선 후기 호남 원림의 한 이상적 모델로까지 승화되었다. 다산은 합리적인 사고를 강조했던 실학자로서, 재테크에도 상당히 능했다. 귀양지 강진에서는 원포를 직접 경영해 먹을거리를 자급자족했고 근처 자투리땅을 매입하여 그곳의 소출로 생활을 꾸렸다.
이인행의 <신야집>과 <신야속집>에는 다산과 이인행 사이에 오간 같은 남인 학자 사이에 벌인 논쟁 기록이다. 다산은 영남학계의 융통성 없는 고식적 태도를 일러 '안동답답(安東沓沓)'이란 말로 표현한 말이 있으며 곡산 부사 시절 <퇴계집>의 일부를 얻어 공부한 비망기를 엮어 <도산사숙록>을 펴냈을 만큼 퇴계의 높은 학문을 존경했다. 하지만 퇴계의 후학들이 고식적 태도를고수하며 작당하여 편을 갈라 선배를 배척하고 스스로 젠체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비판했고, 한집안끼리 분란을 지어 싸우는 형국에 이른 것을 깊이 개탄했다.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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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자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다 사람을 보는 시각에는 다양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시각도 그렇지만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시각 역시 그렇다. 무엇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이기에 그 멋을 기준으로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기준이라는 것이 사람의 다양한 측면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는 것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경우가 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시각의 편협성이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그러한 시각이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하더라도 대중들 앞에 서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통합적인 시각이 필요함은 굳이 부연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당연함이 현실에서는 당파적 이해관계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당연히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류를 최소화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객관적 자료가 뒷받침된 평가가 이뤄지는 것이리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진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자료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이는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 일이지만 학문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견지해야할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런 면에서 주목받는 인문학자 중 한사람이 정민이다. 그는 문헌상에 나타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이 녹아있는 글을 해석하고 동시대 사람들에게 공유되도록 노력하는 학자다. 그의 저작 ‘다산의 재발견’이 출간되는 배경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산 정약용에 대한 자료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어디든 달려가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했다. 한번 찾아가 안 되면 수차례 다양한 방법을 통해 확인하고야 마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그간 저자가 발간하는 책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폭넓은 독자층이 형성된 것이리라. ‘다산의 재발견’은 조선 후기 정약용과 관련된 미 발굴 자료나 새롭게 세상에 나타나 전후 사정에 맥락을 이어주는 자료를 바탕으로 왜곡되었거나 사실이 잘못 알려진 다산 정약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귀중한 논문들을 모아 놓은 저작물이다. 자료 한편이 가지는 중요성과 의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앞 뒤 맥락이 끊긴 기존의 자료에서 충분치 못했던 사실이 새로 발견된 자료로 인해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자료가 주는 가치가 어떨지 상상을 뛰어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정약용의 유배기간인 1801년부터 1818년까지가 중심이다. 새로 발굴한 다산 친필첩을 중심으로 '다산의 강진 강학과 제자 교육', '다산의 사지 편찬과 불승과의 교유', '다산의 공간 경영과 생활 여백', '다산 일문의 행간과 낙수' 4개의 큰 틀로 구분하고 분류하여 22개의 논문으로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배지 강진에서 정약용이 이룬 업적에 비해 그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점들이 있었다고 한다. 저자가 이번에 새로 발굴하고 정리한 자료로 인해 많은 의문점이 해결되었으며 심지어 잘못 알려진 일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료들로는 강진 유배시절 교유했던 수많은 제자, 승려, 자녀에게 쓴 시뿐 아니라 산문 등의 조각난 친필 편지(서첩)들을 통해 역사적 맥락, 문화적 맥락, 전후의 개인적 맥락 속에서 맞춰내 다산의 면모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의 발굴이 전공한 학자들이나 관계자들에게는 둘도 없는 중요성이 있겠지만 때론, 일반 독자들에게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 보다는 역사적 인물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이 책 ‘다산의 재발견’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부자론’에서 보여주는 생활인으로써의 정약용 모습 같은 것이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우리 역사에서 학문적 업적으로 보면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고 광범위한 사람이라서 우리와는 다른 한발 건너에 있는 아주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져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일상적인 모습에서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아버지이며 부인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남편이기도 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은 그 거리감을 줄여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유배당한 사실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임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불행한 일로인해 그가 남긴 업적을 보면 그렇게만 볼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긴 세월 정약용이 겪었을 몸과 마음의 고통을 넘어 학문의 성취를 이룬 일은 우리 역사가 갖는 보석 같은 일이 되었다. 이제 후학들은 그의 학문적 열정과 정신을 현 시대에 어떻게 살려내야 하는지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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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나이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의 서간첩에 대한 연구서《다산의 재발견》은 한국학에서 주목할만한 수작이다. 국문학자 정민은 다산 친필의 서간첩을 '다산의 강진 강학과 제자 교육', '다산의 사지 편찬과 불승과의 교유', '다산의 공간 경영과 생활 여백', '다산 일문의 행간과 낙수(落繐)' 4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5년여간 발표해온 기간논문 20편 이상을 한데 엮은 책이라 간혹 중복되는 내용도 눈에 띄지만 1801년부터 1818년까지 다산의 18년간 강진 유배시절을 다산의 친필 서간에 드러난 교유관계를 바탕으로 재구성하고 더불어 서신 내용에 드러난 다산의 인간적인 면과 스승로서의 면모를 복원하고 있다. 저자가 발품을 팔아 재구성한 다산의 실물 자료들이 한눈에 요연하게 드러난다. 저자의 노고가 없다면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일반 대중들의 눈앞에 전개되는 행운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황상에게 보낸 서간첩《다산여황상서간첩》, 호의에게 보낸 서간첩《매옥서궤》, 혜장에게 보낸 서간첩《견월첩》과 《다산시문집》에 누락된 <산거잡영> 24수 등이 있다.
"다산은 강진 체류 기간 동안 거처를 네 차례 옮겼다. 제자 그룹도 셋으로 나뉜다. 첫째는 사의재 시절 읍중 제자 그룹이다. 황상과 이청 등이 그들이다. 둘째는 해남 윤씨가 중심이 된 다산초당 제자 그룹이다. 18제자의 이름이 남아 있다. 셋째는 대둔사와 백련사 승려로 구성된 전등 제자 그룹이다."(61쪽)
저자는 다산의 제자 교학 방식을 단계별 교육, 전공별 교육, 맞춤형 교육, 실전형 교육, 토론형 교육, 집체형 교육으로 구분한다. 다산이 아끼던 제자 황상과 초의에게는 학문하는 마음가짐으로 혜(慧),근(勤),적(寂)의 삼요(三要)를 강조하고 이에 다시 찬견(鑽堅), 적력(積力), 전정(顓精)의 단계를 제시한다. 초의와 같은 승려들에게 경학공부의 바른길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간혹 불가 선문답의 대화체를 빌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미몽을 깨우치곤 했다. 예컨대《백열록》에 있는 다산과 세 명의 제자들(순암, 초의, 법훈)간의 선문답이 그러하다. 순암은 다산초당의 주인이었던 윤단의 장남 윤규로의 4남인 금계 윤종진(1803-1879)을 말한다. 초의 의순(1786-1866)은 다산이 가장 사랑한 승려 제자이고 다산과 추사와 더불어 18세기 조선 후기의 내로라하는 다벽(茶癖)의 대명사다. 법훈은 아암 혜장의 법제자인 침교 법훈(?-1813)이다.《백열록》은 현재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암은 모름지기 진로에 쇄탈하고, 의순은 실지를 실천하도록 해라. 법훈은 모름지기 깨달음의 관문에 투철해야 한다. 순암이 묻는다. 어찌해야 세상일에 쇄탈합니까. 스승은 말한다. 가을 구름 사이의 한 조각 달빛. 의순이 묻는다. 어찌해야 실지를 실천합니까. 스승이 말한다. 날리는 꽃 제성에 가득하도다. 법훈이 묻는다. 어찌해야 깨달음의 관문을 투득합니까. 스승이 말한다. 새 그림자 찬 방죽을 건너가누나."(170쪽)
"淳也須灑脫塵勞,詢也須踐蹋實地,訓也須超透悟觀。淳問:如何是灑脫塵勞?師曰:秋雲一片月。詢問:如何是踐蹋實地?師曰:飛花滿帝城。訓問:如何是超透悟觀?師曰:鳥影渡寒塘。"(6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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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이라 하는 게 갑자기 출현하진 않았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마지막으로 들뜨게 만들었던 이 기운은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와 함께 사그라들고야 말았다. 국사책의 일부를 장식하는 당시를 향해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출생지, 유배지 등에서 그의 이름을 건 축제가 진행된다. 여전히 학문과 현실과의 괴리는 많은 이들을 괴롭히는 숙제와도 같은지라 시간이 오래 흐른다 하여도 다산을 향한 그리움은 클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도 성리학적인 사고로부터 180도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양반이었기에 지배계층으로서의 위용을 간직하려는 조금의 마음도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전의 많은 양반들과는 달랐다. 그저 글만 읽는 서생들과 달리 그는 스스로 제 삶의 공간을 가꾸고 생활을 고민했다. 물론 유배생활이 그를 그리 만든 바도 없진 않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기록들을 엿보고 있자면 우리는 다방면에 걸친 그의 족적을 발견하게 된다. 말 그대로 박학다식인 것이다. 이 입체적인 인물은 제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 하여도 다 담아내기 힘들 것 같다. 책의 두께가 상당함에도 다산의 모든 면모가 다 담겨 있다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대다수의 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도 다산에 관해 조금이라도 깊게 들어가본 적이 없기에, ‘재발견’이라는 단어에는 꽤 어울리는 책이었다. 아무래도 부제로도 달린 ‘다산은 어떻게 조선 최고의 학술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했는가?’라는 문장이 강렬해서일까? 책의 앞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다. 일명 맞춤형 교육에 관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대강의 짐작에 의하면 과거의 교육은 왠지 획일적이었을 것만 같다. 김홍도가 남긴 그림이 너무도 강렬한 인상으로 내게 남은 탓일까, 책을 암송하고 기준에 부합치 못하면 벌을 받는 형태의 교육에 부합하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런데 다산은 달랐다. 다산의 유별남 혹은 특출남이 여기에 있는 건지 아니면 그 당시의 교육이 으레 그랬던 건지, 다산은 제자들의 특징에 집중했다. 이학과 문학으로 구분하여 전공을 정하여주었고, 과거공부하는 자와 시/고문 따위를 공부하는 자로 제자들을 나누기도 하였다. 또한 체격이 왜소하였던 순암에게는 조선의 명정승 이원익과 제나라 명재상 이야기를 들려주며 북돋워주기도 하였으니 사람됨됨이에 귀를 기울이는 배려의 리더십을 펼쳤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한다. 그 자체가 성공적인 삶으로부터 조금은 떨어진 위치에 있는 자였기에 제자들 중 몇몇은 과거 낙방 후 등을 돌렸다고도 하나, 성취지향적인 그들의 삶에 그렇다 하여 다산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치 아니하였을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한 가지 더, 흥미로웠던 점은 바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이었다. 알게 모르게 유학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고는 하나 상대가 승려라 하여 다산은 무시하거나 외면치 아니하였다. 오히려 경전을 빌려 상대에게 다가가기 위한 준비를 행하고 때로는 선문답을 행하며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대화를 시도키도 하였다. 긴긴 유배생활 동안 미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드높은 학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과는 다른 학문적 입지를 가진 자들과의 끊임없는 교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역시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바를 시사한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을 접지 못해 안달내고, 급기야 상대에게 상처를 가하는 걸 제 인생 최고의 목표마냥 여기는 사람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다름과 틀림은 동의어가 아니며, 다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신의 고매함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임을 다산은 제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많은 내용들은 저자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들이다. 곳곳에 흩어져있던 다산의 흔적을 찾아 저자는 움직여왔다. 몇몇은 다산의 기록으로 그간 여겨져왔는데 깊이 있는 고찰을 통해 아들 정학연의 글씨임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 소장한 자료를 허심탄회하게 공개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료 공개는 손해가 나지 않는, 언제나 윈윈의 결과를 낳는다는 저자의 말을 가슴에 새겨본다.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자료들이 우리의 역사엔 참으로 많을 게다. 마치 퍼즐의 한 조각 조각을 맞추어나가듯 흩어진 기록들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노고가 지속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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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휴머니스트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도서관에서 때묻은 오랜 책들을 뒤적여 다산 선생의 글을 읽곤 했었다. 정약용이라는 이름 석자만 보여도 어느새 내 두 손위에 책이 올려 져 있었다. 부러 이해를 쉽게 하려 아동 위인전에서 찾아 읽기도 했고, 다른 느낌과 다른 정보를 얻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타 출판사책을 찾아 읽기를 거듭하곤 했다. 그러면서 남모르게 흠모해왔던 인물이었다. 이번에 만난 도서, '다산의 재발견'이라 함은 기존에 있던 내용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는 예시어 같아 나를 설레게 했다. 어떤 사실이 나올까, 라는 설레임은 이내 빨리 읽고 싶은 조급증과 함께 지식 해갈이라는 흥분까지 더해 주었다.
다산 선생이 18년 유배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계급의 제자를 양성한 것은 이미 알려진 바다. 동문 밖 술집, 즉 사의재 시절 읍중 제자인 황상과 이청 그룹, 해남 윤 씨가 중심이 된 다산초당 그룹과 대둔사와 백련사 승려로 구성된 제자 그룹이 그것이다. 특히 선생은 황상과 승려 제자인 초의에 대한 신의와 정이 각별하여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선생이 다양한 제자들을 양성한 만큼 단계별, 전공별, 맞춤형, 실전별, 토론형, 집체형 별로 제자들의 교학 방식을 달리했다는 점이다. 선생이 가장 아끼던 제자 황상은 15세 어린 나이에 [삼근계(늘 근면할 것을 강조한 말)]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속산방을 손수 지어 그곳에서 초서를 계속하며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했던 유일한 제자다. 물론 출세욕이 강해 스승을 음해한 제자(이청<이학래>으로 추정함)도 있었고, 선생이 해배될 즈음엔 곁에 제자들이 거의 떠나고 없어 그 허전함과 적막함이 컸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자들마저도 선생은 탓하지 않았다. 선생은 제자들의 학문과 삶의 태도와 정신, 사제지간의 정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한 가르침을 끊임없이 전해 주었고, 혹 이별하여 멀리 떨어져있을 때조차도 편지로 대신하였다.
다산 선생이 제자 초의에게 준 글이 무더기로 실린 신헌의 [금당기주]를 발견함에 있어 작가는 넘쳐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하물며 독자인 나도 이리 기쁜 것을. 1809년 초당으로 선생을 처음 찾아간 24세의 초의는 선생이 일생의 벗으로 함께 살고픈 소망을 품었던 제자다. 초의는 많은 시를 지어 스승을 향한 애틋한 앙모의 정을 피력했고, 그 때마다 선생도 답신을 꾸준히 보냈는데, 배우는 사람에 대한 당부글이 특히 눈에 띈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혜慧와 근勤과 적寂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는 것으로, 무릇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으며 고요하지 않으면 온전히 정밀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은 초의가 승려 신분이었던 것을 감안하여 불교와 유교를 비판하는 방식의 강학을 펼치기도 했다. 더불어 불교(선생은 유교보다 불교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짙었는데, 불제자인 초의에게도 불제도의 그물을 박차고 나와 자신과 운유사방雲遊四方하며 대자유의 경계를 누려 큰 깨달음을 얻으라 당부하곤 했다)가 무당 푸닥거리하듯 그저 부처님 전에 복이나 비는 풍조가 성행하여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열정이 사라졌음을 통탄했다. 또 아무리 승려일지라도 육식을 통해 건강을 보할 것을 당부한 선생이 괴짜인 것 같으면서도 더 멋져보였다고나 할까. 학문에 통달하였음에도 안빈낙도하는 선생의 청렴한 성품, 거기에 고명처럼 얹은 깜찍한 괴벽으로 보였다.
다산과 비슷한 연배거나 조금 위였던 승려 은봉은 대둔사 만일암을 중수한 후 다산을 찾아와 기문을 부탁했던 인물이다. 이에 선생은 [중수만일암기]를 써주었는데, 은봉에게 보낸 편지가 7통, 만일암을 위해 지은 글이 5편에 달하는 자료내용이 흥미롭다. 시기적으로 다산이 백련사에서 혜장을 처음 만났던 해는 1805년이었으므로 은봉은 혜장스님의 소개로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초당에서 다산의 글씨를 받아 목판에 새겨 걸어둘 셈이었던 다산은 운봉에게 조용히 훗날을 기다리라며 만약 현판을 걸면 당장 달려가 부숴버리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1811년 다산의 해배 풍문이 나돌자 이를 축하하려던 은봉의 계획에 대한 묵살은, 다산이 죄인의 신분으로 괜한 구설수에 말려드는 것을 염려해 한 말이었다지만, 그의 섬세하고 대쪽 같은 강단에 은봉이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찌됐든 1813년까지 대둔사의 굵직한 일의 책임을 맡았던 은봉은 대둔사의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가 지은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제만일암지]와 [만일암실적]은 은봉이 제공한 옛 관련 자료를 전해 받은 다산 선생이 지은 걸로 시정是正되었다.
초의, 하의와 함께 법맥을 이은 삼의三衣의 한 사람인 호의는 다산 정약용과 같은 정씨를 가져 선생이 유난히 아끼던 제자로 다산보다 17세 아래였다. [매옥서궤]에는 다산의 편지가 13통, 맏아들 정학연의 것이 2통 등 모두 15통의 편지를 합첩한 책인데, 완호에게 보낸 1통을 제외한 간첩簡帖의 수신자가 모두 제자 호의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1813년부터 1815년까지, 강진 다산초당에서 대둔사로 보내진 수신자가 같은 다산의 친필 편지가 한꺼번에 13통이나 공개된 건 굉장히 드문 사례라고 한다. 더불어 다산이 [대둔사지]를 진두지휘해 편찬한 사실과 승려들과의 교유상, 불교사 그리고 다산초당 후반 생활까지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 [매옥서궤]의 내용이 공개된 건 역사적으로도 그 자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초면에 기고만장한 연파 혜장의 기를 꺽은 이후 우의를 돈독히 다졌던 그가 술병이 도져 40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죽자, 다산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들의 첫 만남이 당시 혜장나이 34세(다산이 51세)인 걸 감안하면 그들이 나누었던 우정기간은 길어야 7년에 불과했다. 그 사이 다산이 혜장에게 준 글을 모은 [견월첩]을 보노라면 그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각별했던 사이였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산은 혜장을 평하기를, 행동에 거침이 없고 속내를 감추는 법도 없다 했으며 직선적인 그의 행동을 보노라면 마치 자신의 분신을 대한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한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혜장의 교만한 기운을 누그러뜨리려고 후에 아암兒菴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또 다산은 혜장에게 [화엄경]과 [능엄경]과 같은 불경을 빌려 학습하고, 혜장은 그로 인해 [주역]을 배우고 상당히 깊은 수준의 토론을 주고받는 등 각자가 지닌 학문을 교류하며 즐거운 나날을 함께 했다. 호의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죽은 혜장의 시문을 교정하다 문득 사무치는 그리움에 안타까웠던 다산은, 혜장을 자신이 만난 승려 중 으뜸으로 치면서 호의에게 시율에 더욱 정진하여 혜장의 뒤를 잇길 바란다며 적극 도와주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이 외에도 새로 찾은 다산의 [산거잡영] 24수, 대흥사 천불전 부처의 일본 표류와 [조선표객도]를 비롯하여, 자족형 생활공간으로 포치와 국세, 주거 내외주변 세세한 곳까지 골고루 고려한 다산의 이상주거론, 아들 정학연과 대둔사 승려와의 두륜산 유람을 노래한 한시, 제자 황상의 일속산방 경영과 산가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어느 것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것이 없고, 소중한 정보가 아닐 수 없어 곳곳에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기도 하며 며칠에 걸쳐 정독했다. 날렵하고 시원스럽게 쭉쭉 써내려진 다산 선생의 필체를 보면서 대학시절 배우다만 서예를, 선생의 유배지 풍경을 그린 묵화를 보면서는 전공 한국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뭐하나 매진하지 못한 점에 부끄러웠다. 황상처럼 선생으로부터 [삼근계]의 가르침을 부단히 받아왔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다산 선생과 같은 훌륭한 스승에게 넓고 깊은 배움을 전수받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까지 유배시절 다산 선생과 교유했던 제자들 중심으로 새로이 발견 입수한 자료들을 몇 가지 적어보았다. 이 한 권의 책을 펴내어 그동안 잘못되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다산 선생의 지인들과 제자, 또 그분의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신 작가 정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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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을 좋아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한경에서도 백성들을 위하여 책을 쓰고 한 편으로는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어지러운 나라를 위하여 온 몸을 희생했던 다산 정약용, 내가 대학 졸업반 때 전남 강진에 갔다가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의 초당을 보고 온 후 부터였다. 다산이 1801년 황사영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다산 초당이 있다. 이곳에서 다산은 후학을 가르쳤고, 책도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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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읽은 다산 관련 책이다. 두께도 만만찮고, 가격도 만만찮아 망설이던 차에, 도서관에 구입 신청을 하니 마침 책이 구비되어 있다고 하여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내심 낼름 누가 대출해갈까 달려가서 대출하여 읽었다. 사실 안에 있는 내용 대부분은 내가 이해하기에 어렵기도 했고, 또 굳이 모두 이해할 필요가 없는 책이긴 했지만, 다산과 관련한 자료를 모으고, 학술적으로 정리해 낸 저자의 노력에 감탄과 감탄이 연이어 나왔다. 다산은 역시 대저자답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긴 했는데, 위에 적은 대로 내 능력과 정성이 부족하여 모든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조금 더 다산의 사상과 만나기 위해서는 같은 저자의 지식경영법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 읽어 놓고도 책을 놓기가 망설여져서 몇 번 돌아보다 오늘 책을 반납했다. 인상깊은 책이었고, 언제든 다시 빌려볼 수 있을테니 다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