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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정치가들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 시킬 수 있다면..
"작금의 정치가들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 시킬 수 있다면.." 내용보기
전통시대, 유배는 형벌이었다. 그것도 사형 다음가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의 정치인에 대한 무기징역형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유배를 간 사람들은 대부분이 선비였고, 선비들은 어찌되었던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주의 마음에 따라, 권력을 잡은 붕당에 따라, 그곳에서 죽을수도, 아니면 유배가 풀려 돌아와 더 큰 벼슬을 할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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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유배는 형벌이었다. 그것도 사형 다음가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의 정치인에 대한 무기징역형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유배를 간 사람들은 대부분이 선비였고, 선비들은 어찌되었던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주의 마음에 따라, 권력을 잡은 붕당에 따라, 그곳에서 죽을수도, 아니면 유배가 풀려 돌아와 더 큰 벼슬을 할수도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간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면 사면 받고, 또 공직에 나가는 현대사회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시대 유배객들을 보면서는 정쟁보다는 학식과 고고한 절개를 떠올리지만, 작금의 정치인들을 보면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멋(?)이 없어지고, 상류층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반증이지 싶다.

 

유배에 대한 기록은 중국에서는 은나라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고, 우리나라는 [삼국사기]에 등장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고, 유배하면 흔히 조선시대가 떠오를 만치 조선에 와서야 그 전성시대를 구가한 것 같다. 그러나 조선초기 귀양은 귀향(歸鄕), 즉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면 적당히 명예를 지키면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 이었다고 한다. 설사 중죄인이 되어 유배된다 할지라도, 물론 섬으로 귀양간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거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던 큰 섬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후기로 가면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조그만 섬으로 보내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내몰았다고 한다. 그리고 정쟁이 심해지면서 위리안치란 추가 조치까지 취해지기 시작했다. 위리안치란 연산군때 처음 시행된 제도로, 귀양간 사람이 머무는 집을 지붕높이까지 가시나무로 둘러쳐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키는 형벌이었다.

 

제주도, 진도, 거제도는 차례대로 조선시대 가장 많은 유배 객들이 머무른 대표적인 유배지이다. 그 중 제주도는 정온, 김정희, 송시열, 김윤식등 수많은 명사들이 유배생활을 한곳이다. 저자는 이곳의 유배객으로 정조때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30년 동안 유배되었던 조정철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고 처지를 비관하는 작품들을 모은 유배시집 [정헌영해처감록]을 살펴보면서 제주도의 풍물과 인심을 살펴보고 있다. 조정철은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 제주목사가 되어 그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니 인생지사 새옹지마란 말이 허튼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붉은 동백이 일품인 진도는 명종때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노수신이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책을 많이 읽은 선비를 꼽을 때 노수신이 빠지지 않는 것은 아마 유배지에서의 독서습관이 아닐까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또한 선조의 즉위로 유배에서 풀려나 영의정에 까지 올랐다고 하니, 유배는 정승이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른다. 또 연산군때 갑자사화에 휩쓸려 거제도에 위리안치된 당대의 수재 이행은 중종반정으로 풀려날 때까지 200여 일을 머무르면서 200여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가 그곳에서 한일은 술 마시고, 술이 깨면 시를 짓는 일 이었다고 하니, 유배라는 것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고통이 어떻게 승화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유배객들은 당시 일반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섬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자신이 머물렀던 섬들의 풍물을 글로써 남겨 당대 사람들이나, 후세사람들에게 그 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면 조식의 제자로 광해군때 70세의 나이로 백령도 유배길에 오른 이대기는 400년 전에 직접 보고 들은 백령도의 전모를 충실하게 기록한 글 [백령도지]를 남겼고, 정약전은 거제도인근 어류의 생태를 정리한 [현산어보]를 남겨 오늘에 사는 우리마저도 감탄하게 만들고 있다. 또 추사 김정희의 문인이었던 조희룡은 신안 앞바다 임자도에 2년반 정도 머무르면서 섬의 풍물을 그림으로 남겨 당시의 섬 생활을 알려주고 있다.

 

섬은 절망의 땅이자, 회한의 땅이기도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결코 살아서는 나올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정약전이 16년 유배생활 끝에 죽어서야 흑산도를 벗어났듯이, 경종때 고흥반도 나로도로 위리안치된 이건명도 마찬가지 이었다. 유배된 지 넉달만에 사사되었지만, 영조가 즉위하면서 복권되고,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유배되었던 곳에 덕양서원을 세웠다. 서포 김만중 역시 남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었고, [서포만필]을 완성하였지만 죽어서야 섬을 나올 수 있었다. 국가에서 선비를 기른 지 500년에 국권을 회복함을 의로 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냐며 80에 가까운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의해 제 나라 땅도 아닌 이역 대마도로 유배된 구한말 최익현도 죽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왕들 또한 예외일수가 없었다.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 만나 형성된 삼각주가 커져 섬이 된 서해 교동도에는 신하들에 의해 쫓겨난 연산군이 위리안치되어 있다가 역질에 걸려 죽었고, 광해군 역시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제주도로 옮겨져 그곳에서 죽었다. 왕위에 있던 15년보다 3년이 더 긴 18년을 절해고도에서 보내다 죽은 광해군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우문을 가져본다.

 

그 밖에도 저자는 군산 앞바다의 위도에 유배되었던 고려 대문호 이규보, 녹동항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신헌, [만언사]를 통해 추자도를 노래한 안조원이 있었기에 그 섬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유배는 순탄하게 진행되던 한 사람의 인생의 흐름에 대한 격리이자, 모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다. 유배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철저하게 낯선 땅과 풍토와 사람과 처지이었고, 그러기에 멀리 떨어진 섬이 최적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역사에 나타난 유배지는 절망의 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위대한 학문을 이룬 성지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정약용, 정약전 형제의 수많은 집필이고, 김만중과 정철의 문학적 가치 또한 유배가 아니었다면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책에서 14개의 섬들을 유배객의 자취를 따라 찾아보고 있다. 지금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섬들이 되었고, 또 육지와 연결된 섬들도 있지만, 전통시대 그 섬들은 일반인들이 가기 힘들었던, 바다에 의해 철저하게 고립된 절해고도이었다. 유배객의 자취를 더듬어 가는 절해고도에 대한 탐방은 유배객들과 섬에 얽힌 역사이고, 또 다른 유산 탐사기 라는 생각이 든다. 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나 또한 그 섬들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일게 만든다.



k*****1 2011.09.21. 신고 공감 13 댓글 21
리뷰 총점 종이책
[11-51] 절망의 땅, 세상과 소통하다.
"[11-51] 절망의 땅, 세상과 소통하다." 내용보기
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보다.   바람이 많아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아 자그마한 소나무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빼곡하게 솟아있어서 고슴도치 섬, 즉 “위도(蝟島)”라고 불리는 작은 섬에 이규보(李奎報)가 귀양을 간 일이 있다. 고작 20여 일의 유배생활이었지만 이미 이름 높은 문사였기에 그곳에서 대접을 받으면서 지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고슴도치 섬과의 짧은 인연은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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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땅에서 희망을 보다.

 

바람이 많아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아 자그마한 소나무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빼곡하게 솟아있어서 고슴도치 섬, 위도(蝟島)라고 불리는 작은 섬에 이규보(李奎報)가 귀양을 간 일이 있다. 고작 20여 일의 유배생활이었지만 이미 이름 높은 문사였기에 그곳에서 대접을 받으면서 지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고슴도치 섬과의 짧은 인연은 이규보(李奎報)에게도, 위도(蝟島)에게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훗날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의 모델이었다는 위도(蝟島)는 명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의 글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이규보(李奎報)는 위도(蝟島)에서의 짧은 유배생활을 마친 후 승승장구하여 당대 최고 권력자인 최우(崔瑀)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유배된 섬은 절망의 땅이었다. 좁은 감옥 안에 가두어지지는 않았지만, 유배는 대부분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기 징역형이었기에 다시 돌아간다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절망의 땅에 도착해서는 자연스럽게 유배의 고통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고통의 노래 사이사이에 임금을 그리는 연군(戀君)의 노래도 많이 섞여 있다. 그 노래가 임금의 귀에 들어가 자신을 다시 서울로 불러 주리라는 한 가닥 희망 때문이었다.1)

 

우리가 국어 혹은 문학 수업시간에 배운 향가형식의 고려속요인 정서(鄭敍)정과정곡(鄭瓜亭曲)도 그렇다. 하지만 20대의 젊은 혈기로 연산군(燕山君)에 맞선 대가로, 수 차례 한양으로 소환되어 곤장을 맞고 결국 거제도(巨濟島)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이행(李荇)의 경우에는 약간 달랐다. 비록 그가 유배생활 속에서 200여 편의 시를 지었지만, 그것은 고통을 삭히기 위한 안간힘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는 해도록(海島錄)>에 거제도(巨濟島)의 고자고개[화자현(火者峴)]높은 절개를 지키다 귀양 온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2) 고절령(高節嶺)으로 개명(改名)한 것을 기록하여, 고절치(高節峙)라는 지명이 정착하는 단서를 제공함으로써 그가 여기에 머물렀다 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정쟁(政爭)의 피바람 속에서 나로도(羅老島)로 쫓겨난 노론 4대신의 일인이었던, 이건명(李健命)은 끝내 재기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게다가 그의 장사를 지내려던 두 아들마저도 정적에 의해 죽임을 당해 세 부자가 나란히 묻히는 정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하지만, 같은 노론 4대신의 일인인   조태채(趙泰采)의 아들 조관빈(趙觀彬)은 이건명(李健命)의 뒤를 쫓듯이 나로도(羅老島)로 유배되었지만 꽃으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그들이 옹립하고자 했던 연잉군(延仍君)이 영조(英祖)로 즉위 할 때까지 끈질기게 삶을 이어갔기에 결국 유배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비분과 강개 속에서 죽음을 앞당기다.

 

흔히 연산군(燕山君)은 폭군(暴君)으로만 인식된다. 이 책에서도 연산군(燕山君)교동도로 유배 온 두 임금 중 연산군은 정치적 역학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방탕했기 때문에 임금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 업보를 지은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로 연산군이 유사 이래 문학을 가장 사랑한 임금이었다는 것도 꼽을 수 있다.3)

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고려의 왕권을 강화시킨 광종(光宗)과 연산군(燕山君)의 행적에서 유사한 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 모두 왕이 되고 일정기간까지는 선정(善政)을 베풀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어떤 이의 밀고를 계기로 폭군(暴君)으로 변모하였다고, 정치적 반대세력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정조(正祖)가 그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알려진 노론 벽파(老論 僻派)의 지도자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비밀편지들이 공개되면서, 지금까지 정조실록(正祖實錄)>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같은 공식 사료를 통해 알려진 정조(正祖)와는 다른 모습이 노출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연산군(燕山君)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을 억누르다가 도리어 측근들의 친위 쿠데타에 의해 쫓겨난 비운의 왕이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4)

 

그렇다면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어 아들의 죽음까지 본 그가 분한 마음을 못 이겨 유배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된 또 다른 임금인 광해군(光海君)은 폐위된 후 바둑돌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결국 제주도(濟州島)에서 한 많은 삶을 마쳐야 했다. 왕위를 잃은 후에 아내도, 자식도, 며느리도 하나 둘 먼저 떠나 보낸 후 치욕적인 삶을 끈질기게 영위해야 했던 그의 심정을 그가 머물렀던 섬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조선말의 몇 차례 정치적 전환의 계기가 되는 상소를 올렸던 최익현(崔益鉉)은 국권 수호를 위해 일으킨 의병(義兵)의 뜻을 펼쳐보지 못한 채, 머나먼 이국 땅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어, 비분과 강개 속에 곡기(穀氣)를 끊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분노를 학문으로 승화시키다.

 

정약전(丁若銓)하면 모두현산어보(玆山魚譜)>5)흑산도(黑山島)를 떠올릴 만큼 어쩌면 알려지지 않는 섬이었을 흑산도(黑山島)를 누구나 기억하는 곳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에 이미 소나무 벌목 금지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식목정책을 펼칠 것을 제안하는 혁신적인 논문인송정사의(松政私議)>를 남기기도 하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강산도 두 번 바뀔,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섬에 갇혀 산다면 보통 사람은 아마도 미쳐버리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이러한 긴 시간을 도리어 공부하는 기회로 삼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노수신(盧守愼)이다. 보통사람이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기나긴 진도(珍島)에서의 유배생활을, 그는 마치 감옥대학에 입학한 듯 미칠 듯이 학문을 닦아 대학자가 된 것이다.

 

70세라는 고령에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를 가서 백령도의 생태를 조사한백령도지(白鴒島誌)>를 남긴 이대기(李大期)나 종조부(從祖父)인 조관빈(趙觀彬)을 이어 제주도(濟州島)에 유배를 가서 그 곳의 풍물과 인심을 기록한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을 남긴 조정철(趙貞喆), 녹도(鹿島) 근처로 유배를 가서 녹도진(鹿島鎭) 생활의 단면을 골고루 묘사한 55편의 연작시 녹서잡절(鹿嶼雜節)>을 남긴 신헌(申櫶)은 그들이 겪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그 당시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를 남겨 주었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혹독한 현실, 예술혼을 일깨우다.

 

유배문학이라는 장르가 있듯이 혹독한 유배생활은 도리어 예술혼을 일깨우는지 다양한 장르의 걸작들을 내놓았다.

김만중(金萬重)은 함경도 선천(咸鏡道宣川)에서의 유배생활에서구운몽(九雲夢)>, 남해도(南海島)에서의 유배생활에서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저술하여 배부르면 예술을 할 수 없다는 말을 입증하였고, 부인의 자결을 머리맡에 두고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를 간 이광사(李匡師)은 절망을 딛고 처절하게 완성한 자신만의 글씨를 남겼다.

김정희(金正喜)의 심복이었던 조희룡(趙熙龍)임자도(荏子島)에서 자연을 새롭게 발견하여, 그림으로 그곳을 빛냈고, 대전별감을 지내다가 어인(御印)를 몰래 만진 대가로 추자도(楸子島)로 귀양간 안조원(安肇源)은 양반이 아니었기에 헛된 체면을 차릴 필요 없이 신세한탄과 추자도(추자도)의 삶을 늘어놓는만언사(萬言詞)>를 남기었다.

이처럼 소설, 서예, 그림, 시 등의 걸작들은 유배생활의 고난에서 피어났던 것이다.

 

 

유배객, 숨은 땅을 세상에 소개시키다.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섬들은 아마도 각각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사연들 가운데 이 책에서 소개한 유배객과 같은 손님을 만나 세상에 알려진, 일부 이야기만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들의 유배는 안타깝지만, 그들 유배객들이 없었다면 숨은 땅들은 여전히 세상과의 소통을 회피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뛰어난 문장과 빼어난 인물은 알려지지 않았던 궁벽한 땅을 세상에 알린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가 없었다면, 난정(蘭亭)이나 적벽(赤壁)이 후세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을까 6)

 

 

옥의 티

 

p. 172

작자 미상의 백령(白鴒)>(白)>로


     ※ 옥의 티 부분은 공저자인 안대회님이 원제목이 <백령진지(白鴒)>임을 알려주셔서 한자(漢字)가 아닌 한글을 지적하는 것으로 수정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서평단 선정 도서에 대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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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종묵/안대회,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북스코프, 2011), pp. 5~6

2)  이종묵/안대회, 앞의 책, p. 57

3)  이종무/안대회, 앞의 책, p. 75

4)  신동준, <연산군을 위한 변명>, (지식산업사, 2003)은 이러한 각도에서 몇 가지 사료를 근거로 논의하고 있는 책이다.

5) 공식적인 명칭은자산어보(玆山魚譜)>가 맞다. 다만 일부에서 정약용의 자산(玆山)에 대한 언급을 근거로현산어보(玆山魚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주역(周易)>에 관한 그의 의견을 엮은 자산역간(玆山易諫)>의 경우를 들어 정약전(丁若銓)이 사용한 여러 개의 호() 가운데 하나가 자산(玆山)”이라는 주장도 있다.

6) 이종무/안대회, 앞의 책, p. 106

w******f 2011.09.01. 신고 공감 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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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 아무생각도 없는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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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역사 인문서 한 권과 수필집 한 권을 잡고 읽었다.내내 꼬이고 속이는 이야기들만 읽다보니 사고의 편협함에 갇혀 점점 더러운 진(津)이 고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은 책이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와 변영로 시인의<명정40년>이었다. 결과는 대만족.변영로 시인의 <명정40. 범우사>는 그저 이 영감이 술먹고 저지른 실수담을 유쾌하게 적은 글이다. 읽는 내내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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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역사 인문서 한 권과 수필집 한 권을 잡고 읽었다.
내내 꼬이고 속이는 이야기들만 읽다보니 사고의 편협함에 갇혀 점점 더러운 진(津)이 고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잡은 책이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와 변영로 시인의<명정40년>이었다. 결과는 대만족.
변영로 시인의 <명정40. 범우사>는 그저 이 영감이 술먹고 저지른 실수담을 유쾌하게 적은 글이다. 
읽는 내내 웃었고 진정한 유머와 쾌도는 옛날 사람들에게서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읽는 내내 서늘하고 소금기 먹은 바닷바람이 내 등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문치의 나라 조선은 문인들을 처단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그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 도배, 유배, 정배 등 몸을 멀리 보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모와 가족과 떨어져서 춥고 배고프게 살아봐라.' 라는 벌이다.
그게 인간에게 있어 가장 괴롭게 할만한 것이니 위리안치가 생겼다.     

위리안치 된 조선 최고의 秀才들은 삼남지방에서 내노라 하는, 
험난하고 외로운 절해고도에서 짧으면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을 산다. 
미처 못한 학문을 닦거나 맛난 것을 먹고 유랑하는 좋은 시간(?)을 가진 이도 있지만
대부분 비참하게 들어와 비참하게 간 사람들이다. 
보통 빈집이나 인근 민가를 빌려 살았다.
그리고 지방의 관리의 감시를 받는다. 지방관아의 또 하나 중요한 일이 바로 중앙에서 유배온 정치범을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다. 그래도 맘 좋은 관리는 때때로 고기도 보내주고 입을 옷도 챙겨준다.
유배자들이 한결같이 호소하는 것은 배고픔도, 추위도 아니었다.
바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위리안치된 자들은 감시인들에게 조차 연민을 품을 만큼 처절한 외로움을 호소한다.  
어쩌면 조선은 인간을 가장 심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유배자들은 유약하고 감성적이다.
유배가 그렇게 만든 건지, 그런 자들이 정치적으로 패하여 유배된 것인지는 모른다.
1545년 을사사화 때 노수신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도로 간다. 
이 책에 쓰여 있는 노수신의 시는 새벽에 책을 읽는 내 가슴을 후벼팠다.
시는 다음과 같다.
 
새벽 달빛에 부질없이 그림자 하나 데리고 걷노라니
누란 국화와 붉은 낙엽만이 정을 담뿍 머금네
뚫어지게 보아도 구름낀 모래밭엔 물어볼 이 없어서
서성이며 정자 이 기둥 저 기둥에 기대어 보노라.
               
          <13일 벽정에 도착하여 사람을 기다리다>. 소재집 5권.

이건명은 영조의 세제책봉 문제로 청나라에 주청사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끌려가 그대로 위리안치되었다.
그는  전남 고흥에서 뱃길로 한참 떨어진 나로도에 갇혔다. 그리고 석달 남짓 살다 급하게 처형된다.
그도 여린 사람이었나 보다. 매일 절벽에 올라가 자신을 사면하는 왕명이 오길 기다리다 ,그 하루가 허망하게 지나면 술을 마시고 창자가 아홉번이나 꼬일만큼 방을 뒹굴었다. 
나는 이건명의 죽음에서 비감함을 느꼈다. 
빨리 그를 죽여 없애야 했었는지 금부도사는 최소한의 예를 갖추지도 않고 그대로 형을 집행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 있었도 예가 있는 법. 그러나 이건명을 끌어다가 억지로 의복을 벗기고, 단삼조차 걸치지 못하게 한 다음 섬에 살던 시골아이들을 억지로 도수(刀手)로 뽑아 그의 몸을 어지러히 찍고 베게 하였다. 초가에 앉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맨말로 끌려나와 옷을 벗기고 그대로 몸을 찍히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의 시신은 거적에 쌓여 비참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건명은 스스로의 충절을 노래하고 두 아들에게 다시는 과거에 공부하여 벼슬길에 나서질 말라고 당부하는 글을 쓰고 죽었다.

유배자들은 모래가 우는 섬에서 ,여인의 향기를 묻은 섬에서, 적국의 섬에서 그렇게 죽어갔다.
한결같이 사람을 그리워 하다 죽었다.
이 책에는 이한구의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섬의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섬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유배자의 외로움이 절해고도 곳곳에 사무친 나머지
귀한(鬼恨)의 미(美)가 서려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용이 아주 좋다. 
또 단락 마지막에는 섬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와 유배자들이 영정도 보기좋게 나와 있어 좋았다. 

r******5 2011.09.01.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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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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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시대 역사를 들여다보면 언제나 등장하는 형벌이 있다. 바로 유배라는 형벌이다.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유배의 형벌은 많았지만 조선 시대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다. 조선시대에 벼슬아치 네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유배를 당한 사실로 볼 때, 벼슬아치 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할 정도이다. 정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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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시대 역사를 들여다보면 언제나 등장하는 형벌이 있다. 바로 유배라는 형벌이다.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유배의 형벌은 많았지만 조선 시대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다. 조선시대에 벼슬아치 네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유배를 당한 사실로 볼 때, 벼슬아치 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할 정도이다. 정쟁이 심해질수록 형벌이 더 가중되면서 등장한 벌이 절해고도(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에 위리안치(머무는 집의 지붕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키고 개구멍 같은 작은 틈으로 먹을 것을 넣어주어 목숨을 연장하도록 한 형벌)라는 형벌이다. 이 형벌은 연산군때 처음 시행되었는데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수많은 젊은 관리를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한 연산군 또한 이 형벌로 죽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우리의 섬들은 그렇게 사람을 유폐시키는 유배지로서 고독과 절망 속에서 어떤 이는 안식과 마음의 평화로, 어떤 이는 학문으로 승화시켰는데 이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라는 형벌은 조선시대의 문학을 꽃피우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섬은 여행객들에게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지만 그 섬이 담고 있는 것은 유배객들의 절망과 고독 또한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저자는 유배객의 자취를 따라 직접 섬을 답사하여 이쁜 사진은 사진작가 이한구씨가 글은 이종묵 교수와 안대회 교수가 조선시대 유배객들의 흔적을 담아둔 책이다.

 

유배라는 형벌로 절망가운데 살았던 연산군과 광해군의 마지막은 씁쓸함을 남기지만 진도에 유배된 노수신은 절망하지 않고 진도 사람들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애환을 담은 소재로 많은 시를 남겼다. [귀양지의 네가지 맛]이라는 시에서는 ‘맑은 새벽에 머리를 빗는 맛,늦게 아침밥을 먹고 천천히 산보하는 맛,환한 창가에 앉아 햇볕을 쪼이는 맛,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 맛’ 이 귀양지의 맛이라며 유배지의 한가로움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훗날 노수신이 시의 대가로 칭송받고 귀양지에서 풀려 정승이 되는 데 유배 시절의 독서가 바탕이 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유배지를 “신선사는 거리“ 라고 노래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대기이다 . 이대기는 백령도에 유배온 바로 그 해에 [백령도지]를 지었는데 [백령도지]는 한 섬의 전모를 충실히 기록한 보물로 남았다. 칠십 평생을 살면서 꼭 짓지 않으면 일없이 시나 문장을 거의 짓지 않았으나 그가 백령도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시 한수는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 적어 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에 몸이 있고

아무 생각도 없는 지경에 마음이 있네.

생각을 잊고 사물에 뜻을 두니

사물마다 모두 아름다워라.

남만의 바람과 흉노의 달도

오히려 빼어난 풍경이려니.

바다의 대나무와 섬의 소나무도

신선사는 거리인가 보구나. -[무회옹] 설학집 1권-

 

 

제주도에 유배된 정조와 순조 연간의 사람 조정철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인데 조정철이 역사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제주에 유배되어 30년의 모진 세월을 살며 당한 설움을 시로 표현하였는데 거의 천 편에 이르는 작품에 분통과 억울함,슬픔과 괴로움,굴욕과 부끄러움,은혜와 원망을 담아 놓았다. 그러나 조정철이 눈에 띄인 것은 조정철이 유독 다른 유배객과는 달리 제주목사로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이 너무도 절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극적인 것은 제주목사로서 제주 땅을 다시 밟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인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홍의녀지묘’라는 비를 세워주고 그 묘비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이렇게 우리의 아름다운 섬은 유배지로서 유배온 사람들의 손길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위도에서 이규보, 교통도에서 연산군과 광해군이, 나라를 위해 투쟁하였으나 적국인 대마도에서 최후를 맞이한 최익현을, 흑산도에서는 정약전을, 남해에서 한글 고전 소설의 걸작을 낳은 김만중을 만나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유배라는 형벌로부터 시작된 것을 볼 때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배란 조선 학문의 위대한 발전을 가져왔다라고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섬을 찾아 수백년전의 자취를 온전히 찾을 수는 없었으나 사진으로 보여주는 섬의 모습에서 유배를 온 유배객들의 쓸쓸함과 고독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리라 본다.

 



YES마니아 : 로얄 k********2 2011.09.19.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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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섬에서 느꼈을 인생 무상 권력 무상-'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외로운 섬에서 느꼈을 인생 무상 권력 무상-'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내용보기
벼슬 자리에 앉아 호령하다 하루 아침에 죄인 신세가 돼 절해고도에 보내진 양반들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유배형을 받은 양반들이 고려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수백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간 사진을 보니, 거센 바람 소리와 세찬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같다. 무심하게 하늘높이 날아 오르는 새들은 인생무상이고 권력무상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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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 자리에 앉아 호령하다 하루 아침에 죄인 신세가 돼 절해고도에 보내진 양반들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유배형을 받은 양반들이 고려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수백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간 사진을 보니, 거센 바람 소리와 세찬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같다. 무심하게 하늘높이 날아 오르는 새들은 인생무상이고 권력무상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 드넓은 바다를 헤치며 절해고도로 들어가는 유배객의 심정은 어땠을까? 살아서 다시 뭍으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렸으리라. 

아닌게 아니라, 유배지에서 불귀의 객으로 숨을 거둔 인물들도 여럿이었다. 반정으로 폐위가 된 연산군은 교동도에, 광해군은 제주도에 유배돼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약전이 16년이나 살면서 숨을 거둔 곳은 흑산도였다. 그는 그곳 주민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자산어보'를 남기는 것으로 그 기나긴 유배 생활을 역사에 새겼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 역시나 남해도에서  한글 소설 '사씨 남정기'와 평론집이라 할 수 있는 '서포만필'같은 걸작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서체로 유명한 이광사 역시나 신지도에서 15년간을 머물렀지만 끝내 육지를 밟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자신이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 시나 서체, 그림은 고통을 삭이는 방편인 동시에 생계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그들이 머물렀던 흔적은 대부분 세월에 씻겨 졌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 그리고 좌절과 외로움에 젖은 사대부들은 이 절해고도에서 수 많은 예술작들은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 속에는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심정과 인고의 세월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중종 대에 유배가 된 노수신은 무려 19년동안 진도에 머물렀지만, 그는 꾸준히 책을 놓치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복직하게 된 이후에도 늘 책을 가까이하며 영의정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조선 후기 화가인 조희룡의 그림이 만개하게 된 것은 임자도에서였다. 유배된 2년동안 하루도 그림을 거르지 않는 동안 그의 실력과 화풍을 완성시켰다. 유배지에서 좌절하는 대신 발전하고 성숙해지는 길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에도 제주 여인 홍윤애의 순애보는 유배지에서도 막을 수 없었던 사랑의 힘을 보여준다. 역모 혐의로 제주에 유배된 중죄인 조정철의 집을 드나들며 딸까지 낳았던 홍윤애, 그녀는 죄인인 조정철이 첩을 두었다는 혐의를 받게되자 자결을 택하는 것으로 연인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무려 31년이라는 기나긴 유배생활을 마친 뒤 조정철은 목사가 돼서 다시 제주를 찾아왔고, 자신을 위해 죽어간 여인을 위해 묘비를 손수 써주었다. 그녀의 사랑은 헛되지 않았고, 넋이나마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이렇게 많은 인물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유배지들, 하나같이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지라 지금은 관광지로도 유명해져 현재의 모습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라고 할만 하다. 현대화된 유배지 현지를 찍은 사진들과 기암절벽하며 끝없이 펼쳐지는 대해 같이 변함없는 자연의 모습은 묘하게 대조를 이루었고, 내 감정을 자극했다.

특히나 이광사의 유배생활을 지켜봤음직한 우람한 고목을 보면서 왜 이렇게 감상적이 되는건지..아무리 권력을  누린다 해도,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역사적 인물들의 사연과 시원시원나게 편집된 사진이 조화가 잘 어우러진 책이었다. 유배된 인물들의 행적을 좇는 동시에 유배지 섬들을 하나 하나 둘러보는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유배지들을 둘러보는 답사 상품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역사적인 컨텐츠를  겸비한 그야말로 양질의 답사가 될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으니 말이다.

 

 

e****0 2012.02.28. 신고 공감 5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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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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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역시 남들 가는 여름 휴가를 떠나지 않은 나는지도를 보아 가면서 하나의 절해고도와 유배객 한분을 연결지어 먼 길을 떠나는 시간여행, 공간여행을 동시에 즐길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또 일렁이는 돛단배에 몸을 싣고 남해 서해 바다를 조심조심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그 섬에 도착한 유배객이 머물면서 남긴 시, 서, 화를 만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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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역시 남들 가는 여름 휴가를 떠나지 않은 나는
지도를 보아 가면서 하나의 절해고도와 유배객 한분을 연결지어 먼 길을 떠나는 시간여행, 공간여행을 동시에 즐길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또 일렁이는 돛단배에 몸을 싣고 남해 서해 바다를 조심조심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그 섬에 도착한 유배객이 머물면서 남긴 시, 서, 화를 만나기도 하고, 역사 속에서 훌쩍 나와 현대를 만나게 해주는 사진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나도 위리안치되고 싶다. 가끔은..
단,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나올 수 있을 것...

w*******a 2011.08.24.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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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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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섬, 그리고 여행, 참 묘한 조화인 것 같다. 정말 멋있는 책이다. 여행을 가게 하고 싶어 하는 것과 동시에 바빠서 여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여행을 다녀온 듯 한 느낌이 들게 하는 책이다. 정말 감동적이었던 것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와 과거를 왔다 갔다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섬 풍경을 생생한 사진으로 담아 낸 것이라든가, 과거를 세세하게 묘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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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섬, 그리고 여행, 참 묘한 조화인 것 같다. 정말 멋있는 책이다. 여행을 가게 하고 싶어 하는 것과 동시에 바빠서 여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여행을 다녀온 듯 한 느낌이 들게 하는 책이다.

정말 감동적이었던 것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와 과거를 왔다 갔다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섬 풍경을 생생한 사진으로 담아 낸 것이라든가, 과거를 세세하게 묘사함으로 상상 속에서 과거 여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그래서 내가 책 속에 들어간 듯 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제목의 뜻이 많이 궁금했었다. 이 말의 뜻은 외딴 섬,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의 집에 가시 울타리를 쳐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죄인을 가두어 두는 것을 말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가택연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가택연금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 그 의미가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어느 시대에나 정치색에 따라,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억울한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조가 추구했던 탕평정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친구처럼, 자신들의 욕심보다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면 우리나라가 지금 이 모양은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많이 느껴야 했다.

비록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주인공들은 벌을 받아 섬에 들어 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몰라서 섬을 알리지 못했던 서민들에 비해 글을 아는 사람들이 들이 섬 안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섬의 풍경, 문화, 생활 등이 기록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벌로 들어간 섬 문화에 젖어 들어 섬사람들과 동화되어 가족같이 지내면서 섬사람들의 억울함, 울분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을 너무나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자신 안에 자기를 가두고 한탄만 하다가 죽어간 이들도 있었다. 상처에서 영원이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던 이들을 보면서 차라리 정치를 하는 것보다 섬에 갇혀 있는 것이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했다면 국민들은 더 많이 아팠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민중이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들을 통해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 물어보는 계기도 되었다. 과연 내가 이들과 같은 상황이라면 처해진 상황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옛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기 위해 임금을 향한 사모곡을 지어 임금이 들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는지, 섬사람들과 동화되어 이들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했을 사람인지 말이다. 뭐라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이 살면서 내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듯하다.

아무튼 책을 통해 타임머신을 타고 멋있는 곳을 많이 여행할 수 있어 행복했다. 섬 안에 내가 있는 듯했고, 역사 안에 내가 들어간 듯 해서 바쁜 생활 가운데 훌륭한 활력소가 되었다.

y*****r 2011.09.05.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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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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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뜻을 몰라서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어렵게만 느껴졌던 책이었어요. 그래도 궁금한것은 그냥 지나칠수 없어서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절해고도 [ 絶海孤島]' 는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을 말하는것이고, '위리안치 [ 圍籬安置 ]'는 죄인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것을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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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뜻을 몰라서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어렵게만 느껴졌던 책이었어요. 그래도 궁금한것은 그냥 지나칠수 없어서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절해고도 絶海孤島]' 는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을 말하는것이고, '위리안치 [ 圍籬安置 ]'는 죄인을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것을 지칭하는것이더군요.  그러니깐, '절해 고도에 위리안치하라'라는 말은 한마디로 유배한다는 이야기였네요.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유배 된것이 진짜 나쁜 형벌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잠시 들르는 여행지라면 멋지겠지만, 자유가 박탈당하고, 세상과 단절된 삶, 그리고 낯선 곳,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생각해보면 또 다른 시각에서 풍경을 바라볼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유배되었다고 좌절하지 않고, 유배 기간동안 재기의 기회를 삼거나, 그곳 생활에 적응하여 자신을 길을 걸은분들의 삶을 읽으면서 많이 배우게 된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유배되어 섬에 살았더라면, 노수신처럼 지금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것 같아요. 노수신처럼 사는 삶이 유배객의 삶처럼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무릉도원에 온 사람처럼 느껴진, 한편으로 제주도로 유배된 조정철은 책까지 못 읽게 했다는 글을 읽고 정말 큰 고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배 행적을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가 생각났어요.  유배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지를 절절히 느끼게 했는데,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러 인물중에서 아무래도 제가 여자라서인지 조정철과 홍윤애의 애절한 사랑이 가장 기억에 남은것 같습니다. 유배지에서 만난 사랑 그리고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은 홍윤애를 위해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 그녀를 위한 시를 바친 조정철을 보면서 왠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거든요. 


 

 첫인상의 어려움과 달리, 보기만 해도 정신이 맑아지는 풍경사진과 흥미로운 역사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이사 준비로 피곤해있었터라 책이 읽히지 않을거라는 제 예상을 가볍게 날려버렸답니다.덕분에 인물과 역사를 함께 배우면서 멋진 휴양지도 알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외로운 유배지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름다운 휴양지가 되어 버린 섬들을 보면서 세삼 세월의 큰 변화를 느끼게 했습니다.   


 

 혹 저처럼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너무 어려운 책이라 생각해서 읽지 않으시려했다면, 다시 한번 생각을 바꿔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꼭 역사가 아니더라도 멋진 사진과 옛문헌의 글만 읽어도 기분전환이 되는 책이었답니다. 나중에 책 사진 찍어서 올리도록 할께요.


 

b*****e 2011.09.09.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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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찾은 조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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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찾은 조선의 역사 역사의 현장엔 어제와 오늘이 함께 공존한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역사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하고 때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도 하지만 현장엔 그 뿌리가 어떤 형태로든 남아 후손들에게 당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든 기록문화의 형태로 남아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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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찾은 조선의 역사

역사의 현장엔 어제와 오늘이 함께 공존한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역사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하고 때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도 하지만 현장엔 그 뿌리가 어떤 형태로든 남아 후손들에게 당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든 기록문화의 형태로 남아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역사적 현장과 그에 얽힌 사연 그리고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역사적 현장은 오늘과 밀접하게 관계 맺으며 건재하게 살아 있음을 안다.

 

순전히 타의에 의해 그것도 정치적인 이유로 삶의 터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이 있다. 유배자라는 이름을 달고 정치의 중심이었던 한양을 떠나 가깝게는 강화도 멀리로는 제주도, 흑산도 등 육지에서 떨어진 섬으로 밀려나 한양을 바라보며 유배에서 풀러날 만을 기다리다 죽어간 사람도 있고 운이 좋게 풀려나 보란 듯이 재기한 사람도 있다. 유배신분에 억울해 하며 암울한 시간을 살았던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학문과 시문에 열중하여 후대에 남을 성과를 올린 사람도 있다.

 

이 책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바로 그런 유배자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들이 살아왔던 현장에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고자 하는 후대사람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책이다. 조선에서 유배는 대부분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간혹, 정치적인 이유와는 상관없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당파의 세력 판도에 의해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벌어진 일이기에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유배를 가는 죄인의 신분이지만 당당하게 현지에서도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짧게는 수십 여일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섬에 갇혀 지내야했던 유배자들의 삶은 세월의 무게에 의해 대부분 사라졌다. 저자 이종목과 안대회가 주목했던 것은 그들이 남긴 기록이다. 유배객의 신분으로 울적한 마음을 시와 그림으로 남겼던 사람이나 지역의 지리지를 작성한 사람도 있고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있다. 바로 그 기록에 근거하여 유배자들이 머물렀던 섬을 찾아 현재의 모습에서 당시 흔적을 따라가 보는 일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찾은 유배의 섬은 위도, 거제도, 교동도, 대마도, 진도, 백령도, 제주도, 흑산도, 녹도, 남해도, 신지도, 임자도, 추자도를 찾아, 그곳에 머물렀던 유배객 이규보, 이행, 연산과 광해군, 이건명과 조관빈, 최익현, 노수신, 이대기, 조정철, 정약전, 신헌, 신기선, 김만중, 이광사, 이세보, 조희룡, 안조원, 이진유 등이다. 주로 남해안 인근의 섬으로 한양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다. 정치적 이유가 대부분이었기에 정치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당연하게 유배지로 선택된 것이다. 섬은 그때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졌다. 연륙교가 놓여 이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곳도 있다. 또한, 정치적 상황이 변해 당시 죄인이었던 사람에 대해 평가가 달라지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편안하고 대접받은 유배객이 있는가하면 먹을 것을 구걸하며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야 했던 유배객도 있었다.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유배된 섬에서 한탄 속에 숨을 거둔 객도 있었고,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죽을 때까지 높은 벼슬을 한 이도 있었다. 벼슬아치로 살 때는 결코 이룰 수 없는 학문적 성과를 거둔 이가 있는가하면, 외로운 섬에서 예술혼을 불사른 이도 있었다.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해 기억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있었기에 섬 또한 사람들 사이에 기억되었다.

 

저자들이 유배의 현장 섬을 찾아 섬의 자연풍광과 사람들의 삶을 담았다. 유배객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사진에 담긴 섬들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경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유배객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내용 중 확실한 사실을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조희룡 편에서 김정희의 수하로 이야기 된 부분이 그것이다. 저자들의 전공이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다.



m*****8 2011.10.15. 신고 공감 2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절망의 땅에서 꽃피운 삶의 이야기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절망의 땅에서 꽃피운 삶의 이야기들" 내용보기
“위리안치는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킨 형벌이다. 개구멍 같은 작은 틈으로 먹을 것을 주어 그저 목숨만을 연명하도록 했으니 인간을 격리시키는 제도로는 참으로 가혹하고 처참한 형벌이었다. 이 형벌은 연산군 때 처음 시행되었다.” [본문 중]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게 될까?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절망의 땅에서 꽃피운 삶의 이야기들" 내용보기

“위리안치는 머무는 집의 지붕 높이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킨 형벌이다. 개구멍 같은 작은 틈으로 먹을 것을 주어 그저 목숨만을 연명하도록 했으니 인간을 격리시키는 제도로는 참으로 가혹하고 처참한 형벌이었다. 이 형벌은 연산군 때 처음 시행되었다.” [본문 중]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게 될까?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좁은 감옥은 아니었을지언정 언제까지라는 기한이 정해지지 않아 돌아가리라는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유배생활. 그 암울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 책의 저자들은 옛 선조들이 느꼈을 비탄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아름다운 절경을 뒤로한 채 외로이 스스로와 싸웠을 처연한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여러 유배지를 답사하며 그곳에 유배되었던 역사적인 인물들의 행적을 따라가며 독자들에게는 흔히 접하지 못할 귀중한 이야기들을 선사해주고 있었는데 이들이 소개해준 인물들 중 노수신이라는 인물은 아마도 가장 기억에 남을 인물이 아닐까 싶다. 진도에서 19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야 했던 그는 굴 속 같은 방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재기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훌륭한 시를 쓰며 새로운 학자로서의 소양을 만들어갔는데 그 오랜 시간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면모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나 같으면 1년 아니 1달이라는 시간이라도 제대로 정진하면서 버틸 수 있었을까 싶다. 마음을 다잡고 자신을 채찍질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원망하며 애통해하느라 오히려 마음의 상처를 내고 괴로워하느라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읽었던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불현듯 떠오른다. 20년간 옥고를 치루면서도 사색하듯 고요히 써내려간 편지글들을 읽으면서 얼마나 놀라고 감동스러웠는지 모른다. 유배지와 감옥이라는 이 절망의 공간에서 그들은 그렇게 또 하나의 삶을 만들어가며 한 단계 더 성숙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바로 이 점이 책에서 마주한 옛 선인들과의 멋진 조우였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노수신은 물론 정약전의 경우에도 섬으로 유배되지 않았으면 결코 탄생되지 않았을 위대한 업적을 남긴다. 흑산도에서 살며 보고 느낀 그대로의 자연을 옮긴 박물학 저서 <현산어보>와 소나무의 벌목을 비판하는 <송정사의>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디 이뿐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만중의 경우 남해로 유배되었지만 그 유명한 <사씨남정기>를 남겼으니 예술이란 저자의 고통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구나 싶을 정도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들이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를 찾아 나서면서 그 섬 자체도 소개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이 살다간 흔적을 이제는 찾을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해서 씁쓸한 마음마저 든다. 멋스럽게 찍힌 섬의 모습들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처연하고 아련하게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절망의 땅을 새로운 시각으로 사람들에게 알린 아이러니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외롭고 힘든 시간 속에서 사투하면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이도 있었지만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신비스런 섬의 이야기들은 분명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고 학자로서의 정진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탓에 그들의 회한과 눈물이 그대로 아름다운 글로 옮겨져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고통을 예술과 학문으로 승화시킨 시대의 인물들, 또 그들이 그 기나긴 시간을 견뎌온 그 섬들은 지금도 여전히 역사의 뒤안길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s*****m 2011.09.15.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