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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서자(庶子)의식
이정(而丁) 박헌영(朴憲永, 1900~1955)은 충남 예산군에서 몰락 양반가의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몰락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던 것으로 보아 궁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p. 124~125]”
하지만 서자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연구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리 태어난 시기가 구한말이었다 해도 후처 소생을 가만 놔둘 리 없는 세상의 눈길은 그에게 상처였고 아무리 뛰어넘으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담장 같은 것이었다. 기왕의 논의들을 종합하면, 세상의 지탄과 주변의 눈총이 그의 콤플렉스를 키웠고 이것이 바로 그를 훌쩍 웃자라게 한 정치 심리적 동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지배적[p. 124]”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또한, 그의 비서를 역임한 박갑동(朴甲東, 1919~ )이 수집한, “박헌영과 함께 생활한 동네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헌영이 자라서 공산주의 사상을 갖게 된 동기도 따져보면 천대받던 서자의 저항의식에서 싹텄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p. 126]”
그러나 조선 시대에 태어난 수많은 서자들이 모두 혁명가의 길을 걷지는 않았고, 모든 혁명가가 사생아나 서자 출신도 아니다. 따라서 그가 혁명가, 그것도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혁명가의 길을 선택한 원인을 태생에서 찾는 것은 다소 무리한 해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오로지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나눠준 교과서대로 세상을 보려 했다. 유독 박헌영은 교조적인 원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모습이 그를 불변의 공산당 지도자로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없게 만든 이유도 되었다. [p. 331]” 이렇게 박헌영이 가장 교조적이고 교과서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서자임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정통’에 집착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철저한 비타협주의자
박헌영은 국내에 머물렀던 독립운동가로는 드물게 일제와의 타협을 배제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변절을 피하기 위해 자기 똥을 먹어 정신병자 흉내를 내어 병 보석으로 석방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혁명가로서는 이러한 비타협적인 태도가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치가에게는 유연한 태도가 필수적이다. 그래서일까 정치가가 되지 못한 혁명가의 모습은 저자에 의해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월북-재월북’ 과정은 경성콤그룹의 제도적 연장이나 조공의 실질 재건이 현실로 드러나기 어렵다는 판단의 결과다. 그리고 박헌영의 국내헤게모니 장악이 해방공간 남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정치적 조바심의 또 다른 숙성 때문이다. 아홉 달 동안, 그것도 다섯 차례에 걸쳐 도합 34일간 체류한 박의 반복 월북은 비장함과 처연함을 함께 담은 절박한 ‘재기’와 ‘부활’과정에 다름 아니다. 서울도 안전하지 않고 평양도 완전하지 않았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p. 290]”라고 표현된다.
물론 그렇다고 남한에서 남로당이 우익과 타협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한 것이 박헌영의 탓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박헌영 평전>(2009)를 쓴 안재성은 이를 “훗날의 역사학자들도 박헌영이 우익 민족주의자들을 포용하지 못해 집권에 실패했다고 너무 쉽게 단정하지만, 일면적 시각이었다. 박헌영보다 훨씬 유연하게 우익과 접촉하려 애썼던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조봉암(曺奉岩, 1898~1959), 백남운(白南雲, 1894~1979) 등도 모두 정치세력화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송진우(宋鎭禹, 1890~1945), 김구(金九, 1876~1949), 김규식(金奎植, 1880~1950), 이시영(李始榮, 1868~1953) 등 양심적인 우익 지도자들조차도 결국에는 모두 실패했다는 사실을 외면한 아전인수식 비판이었다. 미국과 손잡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테러탄압 아래 남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세력은 거의 없었다. [pp. 327~328]”고 표현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박헌영만큼 혹독한 대접을 받는 이도 드물 것이다. 좌익이라면 이골 나도록 공격하는 문화까지 감안하지 않더라도 다분히 의도적인 비판과 토착 사회주의자란 ‘그’밖에 없다며 들뜬 칭송과 총애를 동시에 끌어안아야 할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적절한 찬사와 비판을 넘어 맹종과 혐오의 극성을 단숨에 흡수하는 대상이 하필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p. 21]”
이런 점을 보면, 그가 받는 비난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액막이 무녀로서의 몫도 있는 듯하다.
장고(長考) 끝의 악수(惡手), 월북(越北)
더 이상 남쪽에서는 헤게모니 장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북한으로 떠났다. 그가 꿈꾸던 날은 아직까지 오지 않았지만 더 오래 기다릴 수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 선택한 길이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장고(長考) 끝의 악수(惡手)였다.
박헌영이 월북했을 때, 북한에는 넓은 의미의 갑산파, 연안파, 소련파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직계인 소련 88여단 출신의 빨치산파와 방계인 국내에 잔류했던 박금철(朴金喆, 1912~?) 등의 좁은 의미의 갑산파, 소련 국적의 한인 2세들로 구성된 허가이(許哥而,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1890~1953), 박창옥(朴昌玉, ?)의 소련파, 조선의용군 출신의 김무정(金武亭, 1905~1952), 최창익(崔昌益, 1896~1956) 등의 연안파가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박헌영의 남로당이 추가된 것이다.
문제는 박헌영 등 남로당파가 월북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뿌리를 뽑아버렸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가 한국전쟁, 아니 조기 남침을 주장한 것은 이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쌓아놓은 명망으로 바지사장처럼 직책은 얻었지만, 뿌리 뽑힌 식물처럼 고사(枯死)되고 있다는 것을. 결국 모든 판돈을 올인한 한국전쟁이라는 도박은 그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토착 공산주의자인 현준혁(玄俊赫, 1906~1945)과 달리 그는 1927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러시아로 탈출,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고 소련공산당에도 입당한 바 있었다. 아마도 소련공산당에도 나름의 인맥은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에게 간택된 것은 그가 아닌 김일성이었다. “토착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의심과 편견을 드러낸 스탈린의 평소원칙을 잘 반영(된 결과였다.) 게다가 그 같은 원칙의 일관성은 바로 자신[스탈린]의 안정적 위성정권구축과 맞닿고 있었다. [p. 102]” 결국 강대국의 이해타산을 위해 약소국 독립운동가의 꿈이 희생된 것이다. 그가 월북을 하지 않았더라도 ‘몰락’이라는 결과는 같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치열했던 삶을 보면,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영혼이 되는 것을 피했을 것 같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한 갑자가 넘는다. 지친 영혼을 이념이라는 색안경으로 바라보는 것을 멈출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학위논문처럼 어렵고 현학적인 글이지만, 이 책 <평전 박헌영>이 그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한 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옥의 티
p. 290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월북-재월북’ 과정은~ : 월북과 재월북 사이에 단어가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이다. 북한으로 월북한 상태에서 또 월북했다면 도대체 어떤 나라로 갔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재월북’을 빼고 그냥 ‘월북’ 과정은~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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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박헌영 박종성 인간사랑/2017.10.30. sanbaram 조선의 토착 사회주의 또는 공산당을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박헌형이다. 그의 비애는 죽을 고생 다하여 강점기의 핍박을 견디고 버텨냈지만, 해방공간에서마저 당 재건이 쉽지 않았다. 그에게 해방 이후의 정치적 자유는 혁명적 자유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월북하여 북부조선에 합류는 사회주의 조선건립의 목표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정치적 일관성의 발로였다. 김일성을 낙점하는 스탈린의 흉중을 알면서도 지근거리의 정치를 불사한 것도 ‘혁명’과 ‘운동’을 섞지 않고 ‘지하활동’과 ‘세포정치’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마지막 노력의 일환이었다. 식민체제와 군정체제의 압박에 이어 김일성체제와의 중첩적인 경쟁은 박헌영의 정치활동을 궁극적으로 제한한 세 개의 꼭짓점이다. 이들을 이음매로 엮어 역사의 삼각 틀을 고정시키면 그 안에서 좀체 고립과 소외의 족쇄를 분쇄하지 못하는 그였음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독자성을 지니며 서로 다른 평가와 해석의 대상으로 오롯이 남아 있다고 평한다. 박헌영은 첩의 자식이다. 1900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아버지 영해 박씨 현주와 어머닌 신평이씨 학규 사이에 출생했다. 박현주에게는 이미 맏아들 지영이 있었고 박헌영 뒤로 두 딸이 있었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다. 어머니도 재가하기 전 남편에게 딸 조봉희가 있었고 국밥장사를 했다. 청년 박헌영에게 3.1은 자발적 봉기의 원형이자 사회혁명 전초였던 동학농민전쟁만 못한 실망스런 일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모더니즘의 열기 속에서 ‘독립’의 의미는 물론 ‘계급타파’와 ‘사회주의조선’의 꿈을 완수해야 한다는 다중의 부담을 주었다. '조선공산당→재건불능의 조공→ 경성콤그룹→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남. 북로당→ 조선로동당‘으로의 전환과 변화는 곧 박헌영의 주도권 재구와 상실을 잘 압축할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단절과 지속의 외양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박헌영은 대중연설보다 집중적인 문장구성과 이론적 사고를 통한 혁명계몽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의 방대한 글쓰기 작업은 연설문과 논문, 번역문과 편지로 크게 나뉘고, 이에 덧붙여 말하기의 외연을 법정진술과 취조기록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 박헌영의 ‘여인들’은 모두 다섯이다. 박헌영의 자식을 출산한 이들만도 ‘셋’이고 소생은 전부 넷이다. 첫 부인 주세죽과 딸을 하나 두었지만, 감옥을 드나들다보니 부인은 동지(김단야)와 눈이 맞아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순금과는 동거하며 후사를 두지 않았다. 그 후 정순년과 동거하여 원경스님으로 알려진 아들 박병삼을 두지만, 생모 정순년 대신 어린 박병삼을 키우며 김삼룡과 동거했다. 1949년 6월경 평양에서 윤레나(윤옥)와 재혼한 박헌영이 다시 슬하에 박 나타샤와 박 세르게이 두 남매를 둔다. 박헌영의 여인들 중 현 앨리스(현미옥)는 가장 먼저(1920)만난 여자였고 처형으로 최후를 맞을 때(1956년)도 함께 했다. 그녀는 북한에서는 미제고용간첩 이었고 남한에서는 심지어 마타하리요, 미군정의 눈에는 ‘공산주의 악마’였으며 일본에서는 한낱 ‘공산당연락원’으로 폄하되는 여인의 삶에서 그녀 개인은 없었다. 그러나 박헌영의 여인 이야길 하면서 동서양의 유명인들의 여인편력이나 성에 관한 장광설은 지나친 감이 있다.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월불-재월북’ 과정은 경성콤그룹의 제도적 연장이나 조공의 실질 재건이 현실로 드러나기 어렵다는 판단의 결과다. 그리고 박헌영의 국내헤게모니 장악이 해방공간 남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정치적 조바심의 또 다른 이유다. 아홉 달 동안, 그것도 다섯 차례에 걸쳐 도합 34일간 체류한 박의 반복 월북은 비장함과 처연함을 함께 담은 절박한 ‘재기’와 ‘부활’과정에 다름 아니다. 서울도 안전하지 않고 평양도 완전하지 않았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p.290)"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사건. 줄여서 정판사사건은 5월 15일 미군정청 공안부 발표로 일반에 알려졌다.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당국은 공산당에 대해 강경책을 펴게 되었고, 이때부터 남한에서의 공산당 활동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박헌영의 월북에는 모두 십 수 명에 달하는 동행자들이 함께 자리한다. 권오직, 이인동, 김태준, 허성택, 박치우, 이태준, 서득은, 김삼룡, 이호제, 이승엽, 이현상 등의 동행자들은 각기 정치적 무게감과 역량 크기만 보더라도 박헌영 주변의 걸출한 강골들로 특히 언론, 문학, 철학 등 학문적 기초와 업적으로 탄탄히 무장한 지식인 혁명가들이다. “강점기엔 일본경찰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일체 경찰출신의)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또 다시 체포, 고문 받으며 분단 이후 북한에서조차 김일성의 권력 장악과정에서 투옥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p.308)” 박헌영은 ‘타협=패배’ 라는 등식 아니면, 그건 곧 반혁명 혹은 반동성니라는 틀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곧 자신의 정치적 존재이유이자 희망의 목표를 실천적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박헌영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마디라도 공한주의에 대해 회의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상적으로 박헌영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랄 수 있었다. 공산주의 내부의 공격과 달리, 그는 일제의 간첩도 미제의 간첩도 아니었으며, 그 어떤 증언이나 기록에도 그가 비겁자로 굴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우익의 공격대로 철두철미한 소련파였으며 그것이 그의 치명적인 결함의 출발이었다. 이런 모습이 그를 불변의 공산당 지도자로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없게 만든 이유도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박헌영이 조기 남침을 주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침하게 되면 남한 내 좌익세력이 일제히 봉기함으로써 손쉽게 통일할 수 있을 것으로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지도층이 믿었다고 보기는 어렵다.(p.447)” 전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엔군은 즉시 참전했고 미국의 적극개입도 북한에겐 버거웠을 뿐 아니라 국군의 기세마저 등등했다. 전쟁 전까지 이어진 이승만 정권의 좌익색출과 토벌은 남로당의 궤멸을 재촉하여 박헌영이 꿈꾼 세상의 인프라도 무너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 개시년도인 50년 말에 이르도록 북한 전역을 밀어붙이는 한, 미 군대의 승세는 김일성과 박헌영을 당혹시키기 충분했다. 휴전을 하자 전쟁 패배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가 ‘미국간첩’이라는 혐의도 김일성에겐 절호의 핑계였고 자신들과의 다름을 부각시킬 결정적 계기였다. 임화-53년 8월 6일, 리승엽-54년 7월 30일, 리강국-55년 12월 즈음, 순차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북한 당국은 박헌영을 처형 하게 된다. 사형집행 시기는 현재까지 분명한 기록이 없다. 소문으로나마 제일 먼저 이를 알린 박갑동은 판결 바로 다음날인 55년 12월 16일 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가 하면 날짜는 밝히지 않은 채 판결 여덟 달 뒤인 56년 8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해방후 행적이 마뜩치 않아 강점기 투쟁마저 미워하며 말살시킴은 허투루 넘기지 못할 문제다. 일제 향한 고난의 저항이 워낙 감동적이라 그것만으로 사회주의 조선혁명과정의 과오를 온전히 맞바꾸려 듦도 유치한 과장이다. 어쩌랴. 바위에 눌린 가재처럼 오도 가도 못한 채,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헤매는 그를 놓아줄 방도란 이제 살아남은 자들 몫인 것을.(p.473)” 박헌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저자의 감회다. 이 평전을 통해 우리의 사회주의가 일제 강점기에 도입되어 어떤 활동을 했으며, 해방 후의 활동과 월북으로 이어져 전쟁을 치른 후 남북분단으로 고착화되기까지의 과정을 알 수 있다. 한국 공산주의가 궁금하거나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된다. 저자 박종성은 서원대학교에서 일한다. <혁명의 이론사>, <박헌영론>, <왕조의 정치변동>, <강점기 조선의 정치질서>, <한국정치아 정치폭력>, <문학과 정치>, <백정과 기생>, <아전과 내시>, <패션과 권력>, <퇴폐에 대하여> 등 다양한 저서가 있다. 1차 월북 : 1945. 10. 8-1945.10.9.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번째 비밀회동은 45년 10월 8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 대여섯 시간동안 이루어진다. 장소는 개성 북방의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장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비밀리에 38선 이북지역에서 급히 만난 목적은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의 입장을 전달하면서 견해를 좁히기 위해서였다. p.380 2차 월북 : 1945.12.28.-1946.1.1. 이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만난 장소는 평양의 공산당 북부조직위원회의 사무실과 회의실 등이었다. 이 때의 주요목적은 바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 즉 ‘조선 문제에 관한 의정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였다고 박은 증언한다. p.384 3차 월북 : 1946.4.2.-1946.4.6. 46년 4월 2일 밤에 38선을 넘어 3일 오후 평양에 도착해서 6일 오후 서우로 떠나기 전까지 이루어진다. 이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만난 장소는 두 번째와 마찬가지였고 숙소 또한 김일성의 사택이었다. 이때는 미소공동위원회의 3호 결정(임시정부 수립문제)에 대한 공동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p.393 4차 월북과 김일성, 박헌영의 모스크바행 : 1946.6.27.-1946.7.12. 박헌영이 평양과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이루어진다. 특히 제4차 월북은 김과의 국내문제 협의뿐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의 면담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각별히 중요하다. 5차 월북 : 1946.7.16.-1946.7.22. 7월 18일과 20일 경,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가 두 차례 열린다. 이때 주로 논의한 문제들이 3당 합당과 조선정판사사건, 단독정부수립과 주와 합작, 그리고 박헌영이 제기한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등이다. p.415 6차 월북 : 1946.10.11.-1956.7 46년 9월 6일 박헌영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이 발포되자 이북에서는 연락원(한은필 등)을 파견하여 여러 차례 박의 월북을 종용한다. 박헌영은 처음에는 서울에서 계속 투쟁해야 한다며 월북을 거부하다가 10월 항쟁이 폭발하자 생각을 바꾼다. p.421 (이 리뷰는 예스24시를 통해 인간사랑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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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박헌영 박종성 인간사랑/2017.10.30.
조선의 토착 사회주의 또는 공산당을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박헌영이다. 그의 비애는 죽을 고생 다하여 강점기의 핍박을 견디고 버텨냈지만, 해방공간에서마저 당 재건이 쉽지 않았다. 그에게 해방 이후의 정치적 자유는 혁명적 자유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월북하여 북부조선에 합류는 사회주의 조선건립의 목표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정치적 일관성의 발로였다. 김일성을 낙점하는 스탈린의 흉중을 알면서도 지근거리의 정치를 불사한 것도 ‘혁명’과 ‘운동’을 섞지 않고 ‘지하활동’과 ‘세포정치’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마지막 노력의 일환이었다. 식민체제와 군정체제의 압박에 이어 김일성체제와의 중첩적인 경쟁은 박헌영의 정치활동을 궁극적으로 제한한 세 개의 꼭짓점이다. 이들을 이음매로 엮어 역사의 삼각 틀을 고정시키면 그 안에서 좀체 고립과 소외의 족쇄를 분쇄하지 못하는 그였음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독자성을 지니며 서로 다른 평가와 해석의 대상으로 오롯이 남아 있다고 평한다.
박헌영은 첩의 자식이다. 1900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아버지 영해 박씨 현주와 어머닌 신평이씨 학규 사이에 출생했다. 박현주에게는 이미 맏아들 지영이 있었고 박헌영 뒤로 두 딸이 있었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다. 어머니도 재가하기 전 남편에게 딸 조봉희가 있었고 국밥장사를 했다. 청년 박헌영에게 3.1은 자발적 봉기의 원형이자 사회혁명 전초였던 동학농민전쟁만 못한 실망스런 일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모더니즘의 열기 속에서 ‘독립’의 의미는 물론 ‘계급타파’와 ‘사회주의조선’의 꿈을 완수해야 한다는 다중의 부담을 주었다. '조선공산당→재건불능의 조공→ 경성콤그룹→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남. 북로당→ 조선로동당‘으로의 전환과 변화는 곧 박헌영의 주도권 재구와 상실을 잘 압축할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단절과 지속의 외양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박헌영은 대중연설보다 집중적인 문장구성과 이론적 사고를 통한 혁명계몽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의 방대한 글쓰기 작업은 연설문과 논문, 번역문과 편지로 크게 나뉘고, 이에 덧붙여 말하기의 외연을 법정진술과 취조기록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
박헌영의 ‘여인들’은 모두 다섯이다. 박헌영의 자식을 출산한 이들만도 ‘셋’이고 소생은 전부 넷이다. 첫 부인 주세죽과 딸을 하나 두었지만, 감옥을 드나들다보니 부인은 동지(김단야)와 눈이 맞아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순금과는 동거하며 후사를 두지 않았다. 그 후 정순년과 동거하여 원경스님으로 알려진 아들 박병삼을 두지만, 생모 정순년 대신 어린 박병삼을 키우며 김삼룡과 동거했다. 1949년 6월경 평양에서 윤레나(윤옥)와 재혼한 박헌영이 다시 슬하에 박 나타샤와 박 세르게이 두 남매를 둔다. 박헌영의 여인들 중 현 앨리스(현미옥)는 가장 먼저(1920)만난 여자였고 처형으로 최후를 맞을 때(1956년)도 함께 했다. 그녀는 북한에서는 미제고용간첩 이었고 남한에서는 심지어 마타하리요, 미군정의 눈에는 ‘공산주의 악마’였으며 일본에서는 한낱 ‘공산당연락원’으로 폄하되는 여인의 삶에서 그녀 개인은 없었다. 그러나 박헌영의 여인 이야길 하면서 동서양의 유명인들의 여인편력이나 성에 관한 장광설은 지나친 감이 있다.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월불-재월북’ 과정은 경성콤그룹의 제도적 연장이나 조공의 실질 재건이 현실로 드러나기 어렵다는 판단의 결과다. 그리고 박헌영의 국내헤게모니 장악이 해방공간 남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정치적 조바심의 또 다른 이유다. 아홉 달 동안, 그것도 다섯 차례에 걸쳐 도합 34일간 체류한 박의 반복 월북은 비장함과 처연함을 함께 담은 절박한 ‘재기’와 ‘부활’과정에 다름 아니다. 서울도 안전하지 않고 평양도 완전하지 않았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p.290)"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사건. 줄여서 정판사사건은 5월 15일 미군정청 공안부 발표로 일반에 알려졌다.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당국은 공산당에 대해 강경책을 펴게 되었고, 이때부터 남한에서의 공산당 활동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박헌영의 월북에는 모두 십 수 명에 달하는 동행자들이 함께 자리한다. 권오직, 이인동, 김태준, 허성택, 박치우, 이태준, 서득은, 김삼룡, 이호제, 이승엽, 이현상 등의 동행자들은 각기 정치적 무게감과 역량 크기만 보더라도 박헌영 주변의 걸출한 강골들로 특히 언론, 문학, 철학 등 학문적 기초와 업적으로 탄탄히 무장한 지식인 혁명가들이다.
“강점기엔 일본경찰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일체 경찰출신의)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또 다시 체포, 고문 받으며 분단 이후 북한에서조차 김일성의 권력 장악과정에서 투옥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p.308)” 박헌영은 ‘타협=패배’ 라는 등식 아니면, 그건 곧 반혁명 혹은 반동성니라는 틀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곧 자신의 정치적 존재이유이자 희망의 목표를 실천적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박헌영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마디라도 공한주의에 대해 회의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상적으로 박헌영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랄 수 있었다. 공산주의 내부의 공격과 달리, 그는 일제의 간첩도 미제의 간첩도 아니었으며, 그 어떤 증언이나 기록에도 그가 비겁자로 굴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우익의 공격대로 철두철미한 소련파였으며 그것이 그의 치명적인 결함의 출발이었다. 이런 모습이 그를 불변의 공산당 지도자로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없게 만든 이유도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박헌영이 조기 남침을 주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침하게 되면 남한 내 좌익세력이 일제히 봉기함으로써 손쉽게 통일할 수 있을 것으로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지도층이 믿었다고 보기는 어렵다.(p.447)” 전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유엔군은 즉시 참전했고 미국의 적극개입도 북한에겐 버거웠을 뿐 아니라 국군의 기세마저 등등했다. 전쟁 전까지 이어진 이승만 정권의 좌익색출과 토벌은 남로당의 궤멸을 재촉하여 박헌영이 꿈꾼 세상의 인프라도 무너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 개시년도인 50년 말에 이르도록 북한 전역을 밀어붙이는 한, 미 군대의 승세는 김일성과 박헌영을 당혹시키기 충분했다. 휴전을 하자 전쟁 패배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가 ‘미국간첩’이라는 혐의도 김일성에겐 절호의 핑계였고 자신들과의 다름을 부각시킬 결정적 계기였다. 임화-53년 8월 6일, 리승엽-54년 7월 30일, 리강국-55년 12월 즈음, 순차적으로 사형을 집행한 북한 당국은 박헌영을 처형 하게 된다. 사형집행 시기는 현재까지 분명한 기록이 없다. 소문으로나마 제일 먼저 이를 알린 박갑동은 판결 바로 다음날인 55년 12월 16일 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가 하면 날짜는 밝히지 않은 채 판결 여덟 달 뒤인 56년 8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해방후 행적이 마뜩치 않아 강점기 투쟁마저 미워하며 말살시킴은 허투루 넘기지 못할 문제다. 일제 향한 고난의 저항이 워낙 감동적이라 그것만으로 사회주의 조선혁명과정의 과오를 온전히 맞바꾸려 듦도 유치한 과장이다. 어쩌랴. 바위에 눌린 가재처럼 오도 가도 못한 채,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헤매는 그를 놓아줄 방도란 이제 살아남은 자들 몫인 것을.(p.473)” 박헌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저자의 감회다. 이 평전을 통해 우리의 사회주의가 일제 강점기에 도입되어 어떤 활동을 했으며, 해방 후의 활동과 월북으로 이어져 전쟁을 치른 후 남북분단으로 고착화되기까지의 과정을 알 수 있다. 한국 공산주의가 궁금하거나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읽어볼만한 책이라 생각된다.
저자 박종성은 서원대학교에서 일한다. <혁명의 이론사>, <박헌영론>, <왕조의 정치변동>, <강점기 조선의 정치질서>, <한국정치아 정치폭력>, <문학과 정치>, <백정과 기생>, <아전과 내시>, <패션과 권력>, <퇴폐에 대하여> 등 다양한 저서가 있다.
1차 월북 : 1945. 10. 8-1945.10.9.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번째 비밀회동은 45년 10월 8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 대여섯 시간동안 이루어진다. 장소는 개성 북방의 소련군 38경비사령부 회의장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비밀리에 38선 이북지역에서 급히 만난 목적은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의 입장을 전달하면서 견해를 좁히기 위해서였다. p.380 2차 월북 : 1945.12.28.-1946.1.1. 이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만난 장소는 평양의 공산당 북부조직위원회의 사무실과 회의실 등이었다. 이 때의 주요목적은 바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 즉 ‘조선 문제에 관한 의정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였다고 박은 증언한다. p.384 3차 월북 : 1946.4.2.-1946.4.6. 46년 4월 2일 밤에 38선을 넘어 3일 오후 평양에 도착해서 6일 오후 서우로 떠나기 전까지 이루어진다. 이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만난 장소는 두 번째와 마찬가지였고 숙소 또한 김일성의 사택이었다. 이때는 미소공동위원회의 3호 결정(임시정부 수립문제)에 대한 공동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p.393 4차 월북과 김일성, 박헌영의 모스크바행 : 1946.6.27.-1946.7.12. 박헌영이 평양과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이루어진다. 특히 제4차 월북은 김과의 국내문제 협의뿐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의 면담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각별히 중요하다. 5차 월북 : 1946.7.16.-1946.7.22. 7월 18일과 20일 경, 북조선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가 두 차례 열린다. 이때 주로 논의한 문제들이 3당 합당과 조선정판사사건, 단독정부수립과 주와 합작, 그리고 박헌영이 제기한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등이다. p.415 6차 월북 : 1946.10.11.-1956.7 46년 9월 6일 박헌영에 대한 미군정의 체포령이 발포되자 이북에서는 연락원(한은필 등)을 파견하여 여러 차례 박의 월북을 종용한다. 박헌영은 처음에는 서울에서 계속 투쟁해야 한다며 월북을 거부하다가 10월 항쟁이 폭발하자 생각을 바꾼다.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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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운동가였던 박헌영은 그동안 한반도에서 그리 잘 다뤄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지향하였던 사상이 대한민국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과 더불어 김일성과 북한의 성립 과정 중에서 치열한 세력 경쟁을 벌였던 그의 존재는 남북한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한반도에서의 공산주의가 독립 운동과 더불어 남북한 수립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려는 시도로 인하여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평전 박헌영> 역시 이러한 분위기와 더불어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삶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특히 평전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그의 생애 전반을 다양한 시선으로 말하고 있기에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그동안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의미를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를 향한 개인적 호, 불호가 엄격히 갈리는 차이도 감안해야 할 것이고 이 같은 편견을 털어내려는 탈 이데올로기적 호방함의 사회적 확산을 눈여겨본들, 자료의 불충분을 핑계 삼은 작업의 지연도 한 몫 하였을 터다. 하지만 사라진 혁명가를 둘러싼 정치적 판단유보는 아직도 지배적이다. 분단 구조아래 남북한 어디서도 환호하지 않는 곡절이란 게 하필 어느 한쪽 스탠스를 택함으로써 우러나는 이념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소극적 욕망 때문이었던 것이다. - p. 104 中에서 - 박헌영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대한 저자의 토로는 개인의 소회에 그치지 않고, 박헌영이라는 인물이 남북 모두에게 환호받지 못했다는 대목에서 이념과 정치 논리에 의한 개인의 평가가 결정되는 오늘날의 학계에 대한 현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부분은 거꾸로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박헌영의 생애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 역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대목들을 새롭게 찾아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이 책에 대한 의미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는 평전을 통하여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새로운 생각의 틀을 전달해줄 수 있다는 평전의 목적에도 잘 부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헌영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 내지는 무지함을 떨치기 위해서는 우선 혁명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하여 얻게 된다. 단순히 그가 공산주의자이기에 일본은 물론 대한민국에서 외면을 받았던 것일까? 공산주의자로서 혁명가를 자처한 그에게 있어서 혁명은 그의 과업이자 생애의 목표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혁명이 단순히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심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모든 혁명은 시대와 맞서려는 자들의 단호함과 당대의 기득권이 서로 부딪히는 파열의 형식이자 오랜 정치적 조율의 과정이다. 시대적 충돌방식이 새롭게 자리를 잡아나가는 절차다. 당장의 '맞섭'이 군중의 지지를 이끌고 맨 앞에서 이를 이끌거나 한 가운데서 조종과 통제의 끈을 움겨잡은 채 막후연출까지 장악하는 이들을 일컬어 '혁명가'로 이름 붙인지도 꽤 되었다. - p. 16中에서 - 이 대목은 공산주의자로 폄훼되던 박헌영을 단순히 공산주의 사상가로 고정하여 이념적인 불편함을 초래했던 종래의 관점에서 벗어나 혁명가로 그를 평가한다면 그에 대하여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그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였기에 '맞섬'의 대가까지 가중된 상황을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이념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연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이 책이 평전의 형식으로 쓰여진 점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은 박헌영의 삶의 시작부분이라 할 수 있는 출생에 대한 대목부터 느낄 수 있다. 그가 단순히 서자 출신이라는 이유는 그게 그치지 않고, 서자 출신이라는 열등감이 그가 공산주의자가 된 하나의 동인이라고 말하는 박헌영에 대한 의견을 저자의 평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태생적 한계'라는 용어를 통하여 그에 대한 콤플렉스로 내세우는 것은 그의 심리적인 상황과 처지를 부정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방편이라 말하면서 '태생적 한계'와 '가족의 구성'을 겹쳐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즉, 박헌영이라는 인간에게 '사랑'은 어려운 '정치'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박헌영을 부정적인 존재로 대우하던 종래의 틀에서 벗어나 그가 엄연한 사람임을 밝히며 공평하고 균형적인 시선으로 그를 들여다볼 것을 그의 삶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출생의 시기부터 부여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자 출신과 더불어 박헌영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부분은 그가 다수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였다는 점이다. 최초 주세죽과 결혼한 이후에 그녀와 이혼을 계기로 여러 여성과 결혼의 연을 맺는 그의 모습은 판에 박힌 행동과 자신의 사고틀을 좀체 벗어나지 않으려는 '교조적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는 오늘날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박헌영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에게 공격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춘원 이광수는 그의 작품 [혁명가의 안해(아내)]를 통하여 그러한 박헌영의 삶을 비꼬기까지 하였으니 당시 박헌영의 상황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박헌영에게 행복이란 적어도 여인들과의 자연스러운 관계속에서 기대할 일은 아니었다라고 옹호를 하기도 하지만, 그의 여성관 역시 전근대적인 봉건성이나 유교국가적 권위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게 된다. 아울러 그가 끝내 '혼자'였어야 한다고 평함으로써 그의 여성관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비판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종한 공산주의 사상에서 말하는 여성관과와의 차이로 인하여 혹평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박헌영의 출생과 여인들로 대변되는 사적인 삶은 그동안 그의 사상과 업적을 가리기 위하여 크게 부각되고 있음을 그의 [결기]에 대한 부분에서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사실 그의 출신이라든지 여성과의 관계는 조선희의 [세 여자]와 같은 소설에서 이미 잘 다뤄진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해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평전 박헌영>은 그러한 부분을 작가의 균형잡힌 시선과 평을 통하여 다루고 있는 것이다. '거침없음(비타협성)', '한결같음(일관성)', '끊임없음(지속성)'이라는 표현들을 통하여 그의 내적 지구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당시 사상적 전환과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이 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 전환하면서 독립 운동가는 물론이거니와 그 안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사상 전환에 대한 회유를 시도하였을 때, 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그러한 회유를 받아 사상과 이념을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의 옥고를 치루면서 감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박헌영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중략) 박한영은 '타협 = 패배'라는 등식 아니면, 그건 곧 '반혁명' 혹은 '반동성'과 이음동어라는 이해 틀을 버리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곧 자신의 정치적 존재이유이자 희망의 목표를 이룰 실천적 방법이라고 굳게 믿는다. 특히 적을 향한 배타성이 결연히 드러나는 성격은 박헌영 특유의 강함과 그 이면의 심리를 주목하게 한다. 단호함과 겸허함을 동시에 갖춘 것으로 정평 있는 그가 심지어 지나친 예민함을 보여 일을 그르치거나 주위의 비판을 사는 행태로 문제를 제기하는 건 때로 난감하였다. - p. 321 中에서 - 사상적 전환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결기가 어떠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실제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사상적 전환을 통하여 일본에 대한 협력 내지는 침묵으로 태세를 전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한반도의 공산주의의 교주적인 모습을 견지한다. 단순히 그 위치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나름의 결기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이러한 단호함은 해방 이후에도 그의 삶의 방향에 역시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해방 이후 오히려 그의 존재감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부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공백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 시기에 오히려 그는 '막후의 핵심이며 선봉'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는데, 그의 공백은 젊은 김일성의 존재로 인하여 더욱 커지게 된다. 여러 번의 월북을 통하여 김일성과 소련의 만남이 이루어질때마다 그의 존재는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국 일당 체제도 양보하여 남쪽에서는 박헌영, 북쪽에서는 김일성이라는 구도로 시작되고, 결국 김일성이 주도권을 갖추는 동안 박헌영은 오히려 이용만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46년 위조 지폐 발행을 통하여 남쪽의 경제를 혼란시키려고 했던 <정판사 사건>을 비롯하여 오늘날 현대사에서 다수의 공작 사건으로 기록된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 및 주도자를 박헌영이라고 지목하는 부분은 오히려 당시 남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친일 세력 내지는 우파에 의한 것임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결국 그는 남북 모두에게 그들의 세력을 공고히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6.25 전쟁 이후 북한에서 전쟁의 책임을 지고 결국 처형된 그의 비극적인 결말 역시 그의 결기와도 충분히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평전 박헌영>은 그동안 그에 대한 철저한 외면으로 인하여 그에 대하여 알지 못했던 부분에 대하여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그러한 새로운 부분은 그의 개인적인 생애의 전반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를 통하여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 현대사의 초기 모습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해방 이후 여러 번의 월북은 그를 공산주의자, 빨갱이라고 일방적으로 치부할 부분이 아니라 그가 김일성 또는 소련과의 협상을 통하여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의 공산주의의 역사와 당시 혼란스러웠던 해방 정국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적 차이로 인하여 그동안 우리에게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영원히 외면하고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닌 시대와 이념의 대립에 의하여 가려져 있던 한 개인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더불어 일방적인 관점이 아닌 다양한 관점으로의 역사 연구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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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우리는 대부분 그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다.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주의
운동가가 된 그는 국내의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였고, 일경에 잡혀 수감생활을 하던 중 병 보석으로
풀려나자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이후 상해에서 잡혀 국내에 송환되어 6여년을
복역하였다. 해방이 되자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힘썼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따른 좌익의 찬탁운동을 주도하였다. 미군정의 검거를 피해 월북하였고 북한에 머무르며 남로당을 지도하기도 했지만,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과의 권력다툼에서 패하여 처형되었다. 그를 두고 해방공간의 혼란을 야기한
극좌 모험주의자라고 우익은 말했고,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에 대한 평전이라니, 일단은 호기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의 저자인 박종성교수의 책은 몇 권
읽은 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도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을 꼽으라면 단연 [사랑하다 죽다]와 [퇴폐에
대하여]이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그의 글쓰기에 반하였기
때문이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풀어나가는 이야기 방식이, 그리고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주제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풀어나가는 그의 글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그의 글을 이해하려
했고, 그렇게 이해한 글은 마음속에 와 닿았다는 기억이 있다. 이
책은 이제껏 금기시되었던 인물에 대한 평전이라는 것 외에도 박종성교수가 쓴 글이라니 무언지 모를 기대감이 먼저 들었고, 역시 그의 글답다는 생각을 굳혀 주었다.
저자는 먼저 사람에 대한 연구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치학이 채택하는 분석대상이
큰 탓도 있지만, 개인에 대한 관심이 국가나 집단 혹은 조직전체에 비해 밀리는 경향이 있고,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전은
어느 한 사람의 삶을 다른 사람이 평가 해석한다는 점에서 자서전이나 회고록과 같은 편견, 찬양 또는
왜곡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제 아무리 고른 시각을 지탱하려 한들 자신의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박헌영에
대한 평전을 쓰면서 여느 평전과는 다른 포맷을 취하고 있다. 그 사람의 삶을 연대기순이 아니라 특정주제로
묶어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물론 주제에 대한 인문학적 풀이를 겸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좌익이라는 꼬리표로 이미 배척대상이 된지 오래고,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직후 미제고용간첩으로 숙청된 이후 논의 자체를 종결 지었다는 박헌영, 그래서 그에
대한 논의는 지극히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해석의 모험심을 자극한다고 말한다.
박헌영은 1900년 충남예산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그가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콤플렉스로 작용한 흔적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헌영은
여인들과의 인연의 관리에 단호하지 못했다. 본처 주세죽 이외에도 네 명의 여자가 더 있었고, 자녀 역시 본처 소생 말고도 세 명의 자식이 더 있었다. 민족의 모순, 계급의 한계, 역사의
단절을 꾸지람하면서도 종국에는 도덕적 자기완결 앞에 허망하게 무너진 그의 삶은 혁명이론과 실제의 간극만큼 바라보기 버겁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박헌영의 여성관이 청교도적 자기검열이나
단호한 절제로 이어지지 않은 과거는 물론 이를 위해 애쓰지 않은 추종자들의 의식이 전근대적 봉건성이나 유교주의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박헌영이 월북 전까지 조직을 지탱, 강화하는 과정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인연을 맺은 이들과의 관계를
동행이라는 주제로 살펴보고 있다. 박헌영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며 청년 박헌영의
정치활동을 지원했던 사람들, 그리고 조선공산당 시절과 병 보석으로 풀려나 국외로 탈출하여 소련과 상해에서
활동하던 시절, 해방 후에 이르기까지 그는 국내사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그가 꿈꾸던 조국건설을 위한 활동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부터 5차례에 걸쳐 월북하여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협의를 김일성과 이어나갔다. 그러나 미군정의 체포령은 그로 하여금 1946년 10월 6차월북하여
북에 주저앉게 만든다. 해방 후 남한에서의 조선공산당 재건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그로 하여금 월북을
택하게 했지만 북에서도 환영 받을 수 없음을 알기에 치밀한 계산이 필요했다. 이처럼 박헌영의 북행은 불가피한 면도 있지만 원천적으로 자의에 의해, 결정적
시기의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저울질하며 계산에서 준비된 행위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해방공간에서 난무한 온갖 정치폭력
가운데 국가폭력을 제외한 민중부문의 폭력에 초점을 맞출 때, 대부분의 정점에 박헌영이 도사리고 있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승기를 잡기 위한 우익과 그런 우익을 등에 업은 미군정 당국의 희망사항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게 적을 만듬으로써 자신들이 애써 확보한 고지를 강고히 하고 불편한 과오를 숨기거나
가리기 위해 애쓴 대가라는 것이다. 이는 박헌영을 미제간첩으로 몰아 숙청한 북한의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
박헌영의 죽음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쿠데타 음모사건에 대한 재판과 미제 고용간첩에 대한 논의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결국 한국전쟁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라고 한다. 이처럼 강점기엔 일본경찰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아래에서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체포, 고문 받으며, 분단
이후 북한에서조차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투옥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비극적 운명이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조국건설을 꿈꾸었던
박헌영. 저자는 박헌영의 비타협성, 일관성 그리고 지속성이
그를 혁명가로 만든 결기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동강난
땅에서 일궈낸 과업이 모조리 반역이고, 저주로 돌팔매 맞아야 할 악마의 표상이라 믿는 한, 해방 후 투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강점기 투쟁마저 왜곡하며 말살시키려 하는 한, 세월이 흘러도 해석은 매양 거기서 거기다라고 지적한다. 그런
저자의 말이 아니래도 우리는 이제 냉정하게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을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평가를 위한 단초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한 사회주의자를 알아간다는 것도, 혁명을 꿈꾸었던 한 남자의 삶과 이를 가로지른 역사의 곡절을 알아간다는 것도 좋았지만, 그것보다도 가슴을 설레게 했던 것은 뭐라 딱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자꾸 읽고 싶게끔 만드는 저자의 글쓰기였다. 아마 이 책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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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혁명가의 삶에 드리워진 역사적 아이러니 - 박종성, 『평전 박헌영』
박종성이 지은 『평전 박헌영』(인간사랑, 2017)은 소위 ‘혁명가’로 일컬어지는 역사적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든 혁명은 시대와 맞서려는 자들의 단호함과 당대의 기득권이 서로 부딪히는 파열의 형식이자 오랜 정치적 조율의 과정”(16쪽)이라는 지은이의 말을 참고한다면, 혁명가는 목숨을 걸고 당대의 기득권 세력과 맞서 싸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돌려 말하면 혁명가는 기득권을 가진 권력과 맞서는 대가로 개인의 삶을 온전히 포기한다. 박헌영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1900년에 태어나 스물이 되는 해에 3·1 만세운동을 겪은 이 인물의 삶은 일제 강점기-해방공간(미군정)-북조선(김일성 체제)이라는 거대한 체제=구조와 맞서는 형식으로 실현되었다. 어떤 이는 그를 혁명가로 떠받들었고, 또 어떤 이는 그를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은 ‘악질 빨갱이’로 평가했다. 남한에서는 당연히 인정받지 못한 그가 북한에서조차 ‘미제 간첩’으로 내몰리는 과정은 역사적 아이러니치고는 지독한 아이러니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박헌영의 일대기를 순차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평전(評傳)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므로 박헌영의 전기적 사실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지은이는 박헌영이 산 시대를 가로지르며 역사적 인물로서 박헌영을 그려낸다. 역사적 인물이 시대를 이끄는 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역사적 인물은 시대 속에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기 마련이다. 지은이는 박헌영이 걸어온 공산주의 혁명의 길을 섣부르게 평가하지 않고, 그가 산 시대적 상황을, 그리고 그와 함께 혁명의 길을 걸은 숱한 동지(同志)들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그려낸다. 박헌영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확장된다. 인간 박헌영은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 한 시대의 기호=상징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정당을 만든다는 건 적어도 조선사회에서 꿈꾸지 못할 일이었다. 왕조의 시대가 그랬고 식민체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억압의 굴레를 뚫고 민족을 자유롭게 하며 누대累代에 걸쳐 쌓인 계급적 모순마저 끊겠다는 각오로 역사 전면에 나서려 애쓰는 일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립적으로 바라볼 수 없도록 운동주체를 채근한다. 박헌영 역시 거세게 몰아치는 모더니즘의 열기 속에서 ‘독립’의 의무는 물론 ‘계급타파’와 ‘사회주의조선’의 꿈을 완수해야 한다는 다중의 부담을 이겨내야 했던 건 그 자체로 비극이다. 함께 하기 힘든 것들과 함께 하며 견디기 어려운 여러 압박들과의 혼존마저 넘어서야만 하는 ‘엇갈림’과 ‘맞섬’ 혹은 그 사이에서 가없이 흔들려야 하는 ‘유동’의 부담은 이미 시작된 천문학적 근대와 함께 그가 끌어안아야 할 복잡한 내면풍경이다. (74~5쪽)
박헌영이 산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는 다르다. ‘모더니즘’이라는 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가 산 시대의 모더니즘은 식민지 시대라는 조건 속에서 이제 막 발화가 시작된 사상일 뿐이다. 개인을 생각하기 이전에 그는 집안=가문에 묶여 있었고, 나아가 민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계급을 타파하고 사회주의를 완수하려는 꿈이 이러한 모더니즘과 함께 하기 힘든 일이었다는 점은 지은이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박헌영이라는 한 인물의 내면에 공존하는 다양한 심리는 사실 시대적 조건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에둘러 보여준다.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평등과 실제 삶으로 펼쳐지는 불평등의 모순은 교조적 공산주의자로서 “지독한 순수”(109쪽)를 지향했던 박헌영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역사적 한계였던 셈이다.
지은이는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박헌영이 다섯 명의 여인을 만나 첩의 자식을 낳는 상황의 모순을 짚어내고 있다. 경제적 여유를 성적 자유와 연결한 F. 엥겔스의 논의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가부장제의 ‘첩 제도’는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부정하는 논리와 맞닿아 있다. 박헌영은 그런 첩 제도의 산물로 태어난 서자였지만, 바로 그 ‘첩 제도’를 통해 ‘배 다른 자식’을 얻은 아비이기도 했다. 물론 “혁명가의 삶에서 개인의 도덕성을 어디까지 요구할 것인지는 늘 어려운 물음으로 남는다.”(136쪽) 혁명운동의 과정에서 그가 겪었을 지독한 고독=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지은이는 ‘큰일’을 한다는 명분에 가려진 혁명가 개인의 일탈을 세심하게 따져보고 있다. 한 가정을 꾸리기 힘든 ‘혁명가’의 이 일탈적인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정작 조선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성적 탐욕의 자제나 이를 둘러싼 항구적 모범을 기대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지는 새삼스럽다. 부인이 엄연히 제 집에 있건만, 새로운 사랑을 앞세운 동거생활에 기꺼이 나섬은 물론 욕정과 탐닉의 구현과는 거리가 먼 고결한 혁명본업을 곁에 둔 채 두 여인을 동시에 품는 식의 성정치적 일탈은 항구적 혁명 기치로 내건 ‘반제·반봉건 투쟁’의 서슬 푸른 함성과는 멀어도 한참 먼 일들이다. 이순금만 하더라도 동거대상은 모두 셋이다. 박헌영 말고도 이재유와 먼저 시·공간을 함께 한 이순금의 남편은 알려진 대로 김삼룡이다. 하지만 김삼룡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경성콤그룹을 이끈 이들의 정치적 조율로 박헌영 역시 그룹 멤버가 되지만, 이순금과 김삼룡 ‘둘’은 조직의 확장과 지탱만큼 정순년과 ‘박’의 소생인 박병삼을 기르고 돌보는 데 주력한다. 그런가 하면 이순금의 친오빠, 이관술이 교사로 재직한 동덕여고의 동창생, 박진홍은 이재유의 아지트 키퍼로 서로 다른 시기의 위장 부부역할을 맡아 ‘관계’를 잇는다. 알면서도 서로를 외면해야 할 ‘여인들’의 상호 애증과 견딤의 세월은 ‘혁명’과 ‘사랑’이 나란히 버틸 낭만의 콘셉트가 아님을 이처럼 잘 말해준다. (173~4쪽) 사랑은 욕망이다. 인간이라면 사랑의 욕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지은이가 인간의 이런 욕망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지은이는 왜 박헌영의 ‘일탈’에 서슬 퍼런 윤리를 들이대고 있는 것일까? 그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지향한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혁명을 위한 결연한 투쟁과 단호한 자기검열 앞에서 끝내 프라이버시의 냉정함을 담보하지 못한 박헌영의 한계는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186~7쪽)라고 지은이는 묻고 있다. 혁명가는 온전한 가정을 꾸리기 힘들다. 끊임없이 도피해야 하는 삶을 사는 혁명가에게 가정은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과 다르지 않다. 혁명가에도 ‘욕망’이 있다는 말로 이 상황을 합리화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박헌영이 박헌영다우려면, 끝내 ‘혼자였어야’만 하지 않았을까.”(187쪽)라고 이야기한다. 고독은 혁명가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일까
한 인물의 내면풍경을 다루는 평전이니만큼 지은이는 ‘혁명가’라는 이름의 이면에 드리워진 인간의 욕망에 주목한다. 혁명이 개인의 욕망을 넘어서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면, (개인의) 사랑은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박헌영을 냉혈한 혁명가로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가 내보인 일탈적인 사랑은 그 또한 ‘피가 끓는’ 인간이었음을 다시금 알려준다. 지은이의 이런 서술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혁명가’로서 찬탄하거나, ‘빨갱이’로서 비하하는 사람들을 향해 지은이는 서자로 태어나 여러 여자와 사랑을 나눈 ‘인간’ 박헌영을 제시한다. 혁명가(혹은 빨갱이)이기 이전에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걸은 공산주의의 길 또한 어찌 보면 이러한 인간으로서 걸은 길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셈이다.
박헌영은 그 어느 순간에도 공산주의자로서 산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상 전향’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지은이는 이러한 박헌영의 강인한 내면을 ‘결기’라는 말로 집약해서 표현한다. 결기는 ‘곧고 바르며 과단성 있는 성미’를 의미한다. 지은이의 말대로라면 심리적 강인함에 해당되는 이 결기로 박헌영은 공산주의를 탄압하는 거대 세력들과 맞섰다. 급진적인 ‘인텔리겐챠’로서 지독한 순수를 가슴에 품었던 박헌영의 비타협적 투쟁은 이 결기로 하여 가능했다. “결기로 일어서 결기로 버티고 결기로 주저앉은 사내의 삶이 결기로 무너지는 사연은 늘 ‘극적 극단성’을 담보한다.”(329쪽)고 지은이는 생각한다. 해방공간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이 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스탈린의 생각이 김일성에게 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결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전쟁 속의 ‘죽임’은 세상 그 어떤 죽임보다 만만하였다. 적을 죽여야 한다는 주문쯤이야 일상의 사명일 뿐 명분까지 만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밖의 적들 옆으로 안의 적까지 몰아붙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튀는 피의 선연함과 스러지며 내지르는 함성이 설령 단말마의 기억들이 된다 한들, 곳곳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야포의 굉음은 평소의 정치적 불만과 야망의 파편들을 묻어버리기 퍽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교전의 와중에서 만들 수 있는 죽음의 숱한 핑계들은 평소의 미움과 원한마저 편리하게 녹인다. 비록 전투나 전쟁에서 무너질망정, 패배의 이유를 따지며 책임마저 추궁할 가장 단순하고 빠르며 확실한 혐의의 터전이다. ‘전쟁’만큼 만만한 폭력의 정치는 세상천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대를 버티고 견디려는 자들이 기댈 마지막 언덕의 이름도 ‘폭력’이었다. 박헌영은 그 곁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451~2쪽) 이 책에는 박헌영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실려 있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뻗어 나가는 이야기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삶이 조망될 수 있음을 예시한다. 지은이는 당대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박헌영이 처한 상황을 분명히 드러낸다. 남쪽의 이승만이나 북쪽의 김일성에 비한다면, 박헌영은 지은이의 말마따나 지극히 순수한 정치 세계를 지향했다. 공산주의 교과서에 실린 강령대로 행동했다는 박헌영의 이 순수함이 정작 권력 싸움에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된 셈이다. 사람들은 무자비한 정치 폭력을 일삼은 자로 박헌영을 기억한다. 요인을 암살하고, 위조지폐를 만들었으며, 대구 10월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로 사람들은 서슴없이 그를 지목한다. 북한에서는 미제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 박헌영이고 보면, 그는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암흑지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지은이는 “‘그’만한 사람이 또 있었는지를. 그런 인물이 지금도 있는지를.”(471쪽) 애타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빨갱이’라는 말에 치를 떠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은이의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난과 찬탄의 정치학에서 벗어나 인간 박헌영을 봐야 한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인간 박헌영은 자기 욕망에 휘둘리는 평범한 남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존감(순수함이라고 해도 좋다) 하나로 비극적인 시대 상황과 맞선 결기어린 혁명가이기도 했다. 시대적 한계에 갇혀 제 뜻을 펴지 못한 이 사람(역사는 이긴 자들의 역사라는 말이 생각난다)은 지금도 “삶의 대가를 하필 ‘빨갱이’로 치러야 할 얄궂음 앞에”(473쪽) 내몰려 있다.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제 길을 간 박헌영의 결기를 결기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회는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이 여전히 회자되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이 문제는 아직도 저 짙은 안개 속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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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시대에 혁명을 꿈꾼 자 [평전 박헌영]
인상적인 표지다. 저자 방종성이 직접 그린 인물화라고 한다. 혁명가의 전신을 바로 보려 애쓰다 다 그리지 못하고 옆얼굴 아니면 눈가 표정 쯤 그리려다 멀어져갔다는 말로 저자는 겸손을 표한다. 사실 박헌영은 영화에 등장했던 '박열' 만큼이나 생소한 인물이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우리 역사의 어느 틈에 끼워넣어야 하는 인물인가?
중간쯤 읽어가다 보면 박헌영을 연구했던 이들의 평가 중에
"만일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이 북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20세기 후반의 우리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박헌영의 복권을 제기하는 것은 현존하는 평양의 정치체제를 전면 부정하는 것과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 그 둘은 맥락이 다른 문제이거니와 엄연히 60년 넘게 전개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그 누구도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평한 손석춘의 말이 나온다.
김일성에 견줄 만한 '혁명가'로 박헌영을 꼽는다면, 그는 우리의 근대사에 있어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주의 체제에 경도된 이가 아니었기에 막스나 엥겔스의 이름만 들어도 눈살을 찌푸렸던 나다. 그러나 주의는 주의고 역사는 역사다. 주의와 역사를 하나로 품기에는 배움이 너무도 짧아 외면하려 했던 내 저장고에 박헌영 하나를 더 채운다고 머리가 터지지는 않겠지. '평전'이라 하여 위인전과 비슷한 전개를 기대하지는 말라. 평전과 위인전은 다르고, 특히나 박종성의 평전은 시대별 종단보다 주제별 횡단에 주력한 것이므로 색다른 읽기를 제공한다.
1900년에 태어나 56년(그의 생몰 연도는 정확치 않음)을 살다간 그의 삶의 여정을 저자는 전기적 방법으로 압축, 재구성하는 작업을 했다. 박헌영을 대중적, 국제적 인물로 인식, 확장하는 사회과학적 노력은 저자가 평전을 서술한 형식으로 드러난다. 사랑-투옥-고문-유학-이별-재건-월북-전쟁-재판-숙청이라는 주제로 주르륵 그의 삶을 꿰어놓았다.
시간적 순서, 혹은 시대별 서술에 따르지 않아 뒤죽박죽이지 않을까, 혼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책을 읽어가면서 차츰 해소된다. 주제별로 한 인물을 파악하는 것도 나름 매력 있고 재미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자임에도 문학적 소양을 드러내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에 조금은 익숙해져서인지(^^) 가끔씩은 긴 호흡의 글에 중독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암울한 시대에 혁명을 꿈꾸었지만 끝내 혁명에서 멀어지고 말았다.-32
저자는 박헌영 연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맨 앞에 내놓는다.
출생과 부친에 대한 존재론적 강박, 여인들과의 이어지는 인연과 '문학'의 힘, 사랑의 굴절과 좌절, 자녀의 출산과 가족구성의 지속적 단절, 정치적 '글스기'와 '말하기'의 편차, 혁명 동지들과의 동행과 이별, 거침없는 저항과 도전의 역정, 월북과 전쟁의 파노라마, 재판과 죽음의 곡절 등 글감의 꼭지들이야 그의 삶의 마디만큼 간단치가 않다. 아울러 그의 삶에 대하여 느끼는 부담 역시 단순한 의지만으론 깨기 어렵다./ 첨예한 진영논리에 그를 다시 '가두려 함'은 도그마의 경직성에 물든 혁명가의 만년을 지속적으로 방임하거나 때로 난자하려는 정치적 편의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의 미움을 언어와 노선으로 은폐하는 작업도 속절없이 되풀이할 일은 아니다.-114
정치적인 길을 가면서도 '문학'에 기대었던 박헌영의 모습은 의외다. '자조 섞인 한탄' 일 망정, 동시대 민중들의 갈등과 대립을 문학적 상상에 녹여내고 시름을 흘려보낼 요량으로 문학을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었다.
일본에서 사회파 추리의 대명사로 불리던 마쓰모토 세이초는 보편적인 테마로 인간을 묘사하고 역사와 사회의 어둠을 파헤치려 했다. "내용은 시대를 반영하고, 그 사상의 빛을 받아 변모해 간다."라는 신념으로 작품을 써나갔던 그는 픽션, 논픽션, 평전, 고대사, 현대사 등으로 창작 세계를 확장시켰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한때 군인으로 종군했던 경험을 살려 <북의 시인 임화>를 썼다.
박헌영을 읽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의외의 접점이 생겼네~ 춘원, 횡보, 임화에서 마쓰모토 세이초로 이어지는 시대의 질곡을 더듬으면 박헌영의 생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강점기 조선의 폭력통치, 해방공간의 미군정체제, 김일성체제와의 중첩적인 경쟁을 박헌영의 정치활동을 제한한 세 개의 꼭짓점으로 놓는다하니, 대체적인 시대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시대의 흐름 속 한 인물을 여러 관점에서 파헤치려는 저자의 노력을 높이 산다.
6차례에 걸친 박헌영의 월북을 한 눈에 보기 쉽게 정리한 도표다. 월북이란 단어를 편협한 시각에서 보지 않는다면,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혁명을 꿈꾸었던 한 이상주의자의 도저하고 '결기'에 찬 시도로 볼 수 있겠다. 외세와의 긴밀한 연계 없이는 뿌리 내리기 힘든 과업, 계쏙 잃어야 얻을 수 있는 파워 폴리틱스 앞에서 깊고 무거운 번뇌를 거듭했던 지도자의 발자취로 읽으라 권한다.
정녕 사회혁명을 꿈꾸었지만 홀로 서두르기만 하던 조급한 모더니스트 간단없는 역사단절에도 계급전복과 민족해방을 도모하려 한 애끓는 로맨티시스트-469
저자는 인간 박헌영의 삶을 하나의 테두리 속에 가두는 것을 무엇보다 꺼리면서도 극찬과 혹평의 사이에서 그를 건져내는 것이 우선이라 하며 진보와 보수의 다툼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 만한 사람이 또 있었는지, 그런 인물이 지금도 있는지. 거친 광야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없는 나라에 '그'처럼 나설 자 있는지를 묻는다. 중국과 미국,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지금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지켜보며 답답한 가슴을 하루에도 몇 번씩 치는 우리다. '초인'을 기대하는 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이가 '초인'에 가까웠는지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되는 시점이다.
#평전 박헌영, #인간사랑,#투쟁,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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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첩의 자식이다. 1900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아버지 영해 박씨 현주와 어머닌 신평이씨 학규 사이에 출생했다. 박현주에게는 이미 맏아들 지영이 있었고 박헌영 뒤로 두 딸이 있었다. 아버지는 쌀가게를 경영하면서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다. 어머니도 재가하기 전 남편에게 딸 조봉희가 있었고 국밥장사를 했다. 청년 박헌영에게 3.1은 자발적 봉기의 원형이자 사회혁명 전초였던 동학농민전쟁만 못한 실망스런 일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모더니즘의 열기 속에서 ‘독립’의 의미는 물론 ‘계급타파’와 ‘사회주의조선’의 꿈을 완수해야 한다는 다중의 부담을 주었다. '조선공산당→재건불능의 조공→ 경성콤그룹→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남. 북로당→ 조선로동당‘으로의 전환과 변화는 곧 박헌영의 주도권 재구와 상실을 잘 압축할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단절과 지속의 외양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박헌영은 대중연설보다 집중적인 문장구성과 이론적 사고를 통한 혁명계몽이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의 방대한 글쓰기 작업은 연설문과 논문, 번역문과 편지로 크게 나뉘고, 이에 덧붙여 말하기의 외연을 법정진술과 취조기록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 박헌영의 ‘여인들’은 모두 다섯이다. 박헌영의 자식을 출산한 이들만도 ‘셋’이고 소생은 전부 넷이다. 첫 부인 주세죽과 딸을 하나 두었지만, 감옥을 드나들다보니 부인은 동지(김단야)와 눈이 맞아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순금과는 동거하며 후사를 두지 않았다. 그 후 정순년과 동거하여 원경스님으로 알려진 아들 박병삼을 두지만, 생모 정순년 대신 어린 박병삼을 키우며 김삼룡과 동거했다. 1949년 6월경 평양에서 윤레나(윤옥)와 재혼한 박헌영이 다시 슬하에 박 나타샤와 박 세르게이 두 남매를 둔다. 박헌영의 여인들 중 현 앨리스(현미옥)는 가장 먼저(1920)만난 여자였고 처형으로 최후를 맞을 때(1956년)도 함께 했다. 그녀는 북한에서는 미제고용간첩 이었고 남한에서는 심지어 마타하리요, 미군정의 눈에는 ‘공산주의 악마’였으며 일본에서는 한낱 ‘공산당연락원’으로 폄하되는 여인의 삶에서 그녀 개인은 없었다. 그러나 박헌영의 여인 이야길 하면서 동서양의 유명인들의 여인편력이나 성에 관한 장광설은 지나친 감이 있다.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월불-재월북’ 과정은 경성콤그룹의 제도적 연장이나 조공의 실질 재건이 현실로 드러나기 어렵다는 판단의 결과다. 그리고 박헌영의 국내헤게모니 장악이 해방공간 남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정치적 조바심의 또 다른 이유다. 아홉 달 동안, 그것도 다섯 차례에 걸쳐 도합 34일간 체류한 박의 반복 월북은 비장함과 처연함을 함께 담은 절박한 ‘재기’와 ‘부활’과정에 다름 아니다. 서울도 안전하지 않고 평양도 완전하지 않았던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p.290)" 1946년 5월 조선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사건. 줄여서 정판사사건은 5월 15일 미군정청 공안부 발표로 일반에 알려졌다.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당국은 공산당에 대해 강경책을 펴게 되었고, 이때부터 남한에서의 공산당 활동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박헌영의 월북에는 모두 십 수 명에 달하는 동행자들이 함께 자리한다. 권오직, 이인동, 김태준, 허성택, 박치우, 이태준, 서득은, 김삼룡, 이호제, 이승엽, 이현상 등의 동행자들은 각기 정치적 무게감과 역량 크기만 보더라도 박헌영 주변의 걸출한 강골들로 특히 언론, 문학, 철학 등 학문적 기초와 업적으로 탄탄히 무장한 지식인 혁명가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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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 서평단을 통해서 이 책을 만났다. who 위인전기 시리즈를 통해서 카를 마르코스를 비롯해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호찌민, 로자 룩셈브로크, 체 게바라 등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통의 인물을 만났으나 정작 우리나라의 공산주의자는 만나지 못했다. 외국의 공산주의자에 비해 우리나라의 공산주의자는 어땠는지 호기심을 갖고 바로 신청을 했다. 댓글을 통해 밝힌 나의 마음이다.
이 책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댓글에서 적은 그대로다. 부자세습을 넘어 3대 세습까지 이룬 김일성은 공산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듯했다.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가까운 사람은 박헌영이 아닐까, 그는 어떤 생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에 대한 기대를 갖고 펼친 책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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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두 가지를 근거로 삼고자 한다. 하나는 그의 생애 속에서 통시적으로 그 근원을 찾고 하나는 공시적으로 그를 인지하는 세대별 관심과 선호를 그 맥락으로 삼아 찾고자 한다. 그래서 그를 이제는 역사의 무게 속에 감춰 두지 말고 정치적으로 위치를 찾아주고자 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 그가 차지한 비중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기에 이제는 그를 복원하여 그의 실체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형성된 그에 대한 사람들의 미움이 언어와 노선으로 은폐되어서는 안 됨을 말한다. 즉 그를 다시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한다. 먼저 생애 속에서 그가 걸어간 사회주의의 일정을 제시한다. 그가 후처 소생임을 말하고 그것이 유교주의 사회에서 평등을 주창하는 혁명가의 길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비폭력불복종의 운동의 기조를 소극적 방법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반봉건 반제국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보고 있다. 그런 활동 속에 가족 부양과 과업추진의 이중적 고충에 사로잡히게 되고 감옥을 오가는 동안 부인인 주세죽이 동지인 김단야와 사랑에 빠지는 충격적인 배반을 당한다. 그것은 그가 더욱 강인하게 사회적 운동에 몰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의 삶에 5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그의 사회주의 세계 건설에는 러시아 혁명이 숨어 있다. 러시아 혁명은 민중의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겪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요소로 생각했다. 하여 해방 공간에서 그는 생명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투쟁에 임한다. 북쪽의 김일성과 만나 사회주의 사회를 계획하고 남쪽에서는 반제국주의 반미 투쟁을 이어가는 활동을 한다. 이런 혁명이 남쪽에선 대구 10월 항쟁으로 표현되고, 그 뒤에 그가 있었다고 모두 인식하게 된다. 이런 활동 속에 남쪽에서 활동의 폭이 좁아진 그는 북으로 간다. 권오직 이인동 김태준 허성택 서득은 등은 그와 동행했던 동지들이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들이 선택한 북한행은 투사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남쪽에서 어찌되었던 그들의 소명 의식을 가지고 투쟁했더라면 더 빨리 남한이 민주주의가 정착 되었고 민중들이 힘을 가지는 다양화된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저자는 생각해보고 있다. 김상룡, 이현상 등처럼 말이다. 임화의 시들은 그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그의 집요한 성취동기, 역사적 소명의식은 그를 뛰어난 지도자로 만들어 가고 있다. 탁월한 언변과 과감한 정치력 카리스마의 선천적 세련화는 그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무기가 될 것이다. 그는 심리적인 강인함을 가지고 타협의 회피와 자기주장을 강고하게 펼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그가 많은 동지들을 거느리고 남로당의 총수로 선택될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의 초대정권의 내각 부수상 겸 외상을 역임한다. 그리고 북한에서도 남로당을 진두지휘하면서 북로당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마로 나선다. 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밀리면서 유엔의 9.28 서울수복이 따른다. 이럴 때 그는 중국을 방문하게 되고 모택동을 만난다. 그리고 친중 정부수립을 자신을 중심으로 세우겠다고 모택동에게 말한다. 모택동은 박헌영을 밀어주고 좋아하지만 이 때는 김일성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의 생각을 갈아 앉힌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전쟁 중 정권전복음모 및 미제의 간첩 혐의를 쓰고 김일성 등에 의해 그들(남로당파)은 제거된다. 전쟁에 대한 책임까지 지고 말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가감 없이 냉정한 눈으로 살펴보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박헌영만큼 혹독한 대접을 받는 이도 드물 것이다. 좌익이라면 이골 나도록 공격하는 문화까지 감안하지 않더라도 다분히 의도적인 바판과 토착 사회주의자란 그밖에 없다며 들뜬 칭송의 총애를 동시에 끌어안아야 할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적절한 찬사와 비판을 넘어 맹종과 혐오의 극성을 단숨에 흡수하는 대상이 하필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박헌영이 걸어간 길을 잘 명시해 주는 글이다. 그는 우리들에겐 이중적인 모습으로 보여 지는 듯하다. 민중을 위하는 마음과 민중과 반대편에 서는 빨갱이라고 명명되는 이름이 그것이다. 그것은 찬사와 비난의 평가를 내리게 만드는 사항이 된다. 어느 쪽으로 그를 보든지 우리는 그가 우리 곁에 있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그리고 지금의 획일적인 평가에서 달리 그를 보는 눈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치열하게 투쟁을 하면서 목적을 성취시키고자 살아간 인물이라는 것을.
치욕과 찬양의 틈새에서 의식과 육신의 지탱거점을 온전히 가누기란 본원적으로 힘겨운 이들이 혁명가였을 것이다. 하여 끝내 자신이 이루려 그다지도 몸부림치던 과업이란 것이 ‘일체허망’. ‘허무일색’으로 마무리되는 모습도 홀로 비장하게 응시해야 하는 게 그들의 운명이었음을 역사는 자주 증언한다(P33) 그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다. 아마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는 냉정함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데, 정감정인 요소가 그의 언행에는 있었다. 그것이 빨갱이라는 억울한 이름으로 돌아오는 일임에랴. 그의 삶은 사랑, 투옥, 유학, 이별, 재건, 월북, 전쟁, 재판, 숙청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꼭지점들은 삶의 미망이 섞여 있는 시간이다. 들끓는 삶의 마디마디에 아린 기억들이 묻어 난다. 자신의 소신과 달리 흘러가는 남북한의 역사적 현실, 그 가운데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투사의 아픈 걸음이 그의 삶에 녹아 있다. 그의 숙청과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치열한 그의 투쟁이 민중을 위한 애씀이었다는데 있다. 우리는 그의 이력을 이제는 인정을 하고 있는 그대로 그를 보아나가야 한다. 저자는 이렇듯 긍정적으로 그를 만나고 있다. 남북한에서 둘 다 거부된 그의 정치적 삶이 이젠 복원의 길을 걸어야 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오래된 과거’ 아니 ‘오래된 미레’처럼 익숙해지고 있었다. 박의 ‘월북’이 서울에서의 ‘저항’과 ‘잔존’을 견지지 못한 마지막 결단이라고 이해하면, 그의 있고 없음은 물리적 갈등의 모면과 회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38선을 넘어서는 적극적 ‘이동’의 정치는 다시 ‘의도치 않은 행위’의 결과로 분화하는 갈등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2인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잘 드러낸 문장들이다. 결국 뜻보다는 그의 치열한 삶이 거부감을 불러일으켜 그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것이다. 이렇듯 안타까운 이제는 그를 시대가 요구하니 숨을 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의 평전을 읽으면서 마음이 쏴해 온다. |